'투덜일기'에 해당되는 글 503건

  1. 2010.07.07 어둠 연습 5
  2. 2010.07.06 호칭 14
  3. 2010.07.04 4
  4. 2010.06.29 자기모순 19
  5. 2010.06.26 새벽 4
  6. 2010.06.24 별꼴이야 5
  7. 2010.06.24 옷 갈아입기 2
  8. 2010.06.19 목소리 14
  9. 2010.06.15 어린 취향 11
  10. 2010.06.09 어울림 5

어둠 연습

투덜일기 2010. 7. 7. 22:29

예전에 친할머니, 외할머니 두분 할머니댁에 놀러가보면 혼자 계실 땐 언제나 방을 깜깜하게 해놓았다. 쓸데없이 전깃세 많이 나간다는 것이 그 이유였는데, 내 눈엔 그게 그렇게 청승맞게 보여 싫었다. 그까짓 전깃세 아껴봤자 얼마나 아낀다고, 토굴 같은 어둠 속에 혼자 앉아 있는단 말인가. 낮에도 방방마다 돌아다닐 때 꼭 불을 켜야 직성이 풀리는 데 습관이 들어버린 나는 특히 여름엔 어두워야 더 시원하다는 논리로 밤중에도 좀처럼 전등을 켜지 않고 어둠속에 앉아 TV를 보시는 할머니들이 의아했다. 백열등이야 오래 켜두면 온도가 올라간다지만 형광등이나 할로겐 램프는 온도와 상관 없다고 극구 설명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최소한 두 사람은 모여야 전등을 켜는 게 낭비가 아니라는 할머니들의 절약정신과는 다르게 요샌 나도 종종 어둠이 편한 걸 느낀다. 가만 보니 낮밤을 바꿔살면서 전등을 환하게 켜고도 책 앞엔 보조스탠드까지 켜야 눈이 덜 피곤한 직업의 반작용인 듯도 하다. 작업을 할 때나 밥을 먹을 때, 엄마와 둘이 한 공간에 있을 때가 아니라면 깜깜한 어둠속에 늘어져 취하는 휴식이 어찌나 달콤한지. 낮에도 방에 들어가면 꼭 전등을 켜야 마음이 놓이던 습관은 낮에도 눈부신 인공조명에서 자유로운 어둑어둑한 실내에 앉아 있는 쪽이 편한 느낌으로 변하는 중이다.

과거 외국엘 나가보면 호텔이든 친구네 집이든 화장실 빼곤 죄다 어둠침침 간접조명으로 대충 밝혀놓은 실내가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었고, 가끔은 미칠듯이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다. 전등 스위치를 올리면 하얗게 밝아지는 실내 조명에 내가 그만큼 익숙해 있다는 의미였다. 우리나라도 인테리어에 신경을 좀 쓴다 싶은 사람들은 '촌스러운' 중앙 전등을 없애고 집에도 백열등 같은 간접조명으로 아늑하고 가라앉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게 유행된지 오래다. 작업실이 있을 때는 가끔씩 나도 은은한 백열등 스탠드 불빛 속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커피를 마시며 괜한 폼과 분위기를 잡아보기도 했지만, 평소에도 늘 그렇게 살라고 하면 여전히 답답함을 느꼈을 게 틀림없다.

물론 지금도 나름 어둠 속에서 익숙함과 편안 느낌을 키워가고는 있지만, 채광창이 많고 공간이 툭 트인 집에서 살고 싶다는 로망이 변함없는 걸 보면 본래가 토굴형 인간으로 태어난 건 아닌 모양이다. 인공 조명을 더하지 않아도 낮엔 충분히 환하고 밤엔 충분히 어두운 자연스러움을 선망하는지도.

어쨌거나 요즘 밤중에 일하다 말고 물을 마시러 부엌에 나가면 이미 눈과 몸에 익은 어둠 속에서 정확히 손을 뻗어 물컵을 집은 다음 정수기에 대고 손의 감각만으로 물의 양을 짐작하는 놀이를 즐긴다. 조바심을 내서 너무 빨리 포기하면 안 돼. 그렇다고 물이 넘치면 곤란하지. 손끝의 감각을 믿어보는 거야. 차디찬 냉수가 찰랑찰랑 차오르는 선을 손가락으로 느끼다 재빨리 컵을 떼 단번에 컵의 8부까지 성공시키면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찰랑찰랑 물컵을 들고 길게 늘어진 선풍기 전선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조심스레 거실을 지나 짧은 복도를 건너 환한 방으로 무사히 돌아오면 퍽이나 큰 성취를 한 느낌. 이른바 나의 어둠연습이다.

나의 할머니들이 굳이 전등켜기를 마다하고 어둠을 즐긴 이유는 어찌보면 꼭 전깃세 절약 때문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어둠이 편하고 시원하다는 느낌을 확실히 알 것 같은 요즘처럼 더운 여름날엔 더더욱. 삶은 확실히 직접 겪어봐야 한다는 진리와 함께, 차츰 내가 예전 할머니들과 가까운 세대가 되어감을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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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칭

투덜일기 2010. 7. 6. 17:25


지난 토요일에 누군가 나를 '~~양'이라고 부르는 바람에 퍼뜩 얼굴이 뜨거워졌다. 바로 전에 거행된 성당 혼배미사에서 신랑신부를 '~~군, ~~양'이라고 불렀던 호칭을 당연히 여겼던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나에 대한 호칭은 갈수록 가관이 되어가는 중이다. '아줌마' 호칭에 적응하는 것도 어렵거늘 심심찮게 '어머니' 소리를 듣질 않나(마트 직원들은 제발 '손님'이라고만 불러주면 좋겠다! '어머니'들만 장을 보는 건 아니라고!), '사모님' 소리를 듣질 않나(부동산 텔레마케터가 전화 받자마자 대뜸 그러더라. "사모님, 파주쪽에 좋은 땅이 있어서 전화드렸습니다.")...

호칭 중에 내가 들어도 아무 거부반응이 안 드는 건 '언니, 누나('누님'은 좀 징그럽다), 고모, ~~야, ~~씨, 저기요' 정도다. 서비스업 종사자들에게 듣는 손님, 고객님 따위도 거북살스럽고, 출판계 종사자들에게 듣는 '선생님' 호칭도 민망하며, 드물게 방송업계에서 '~작가님'이라고 하면 와락 낯이 간지럽다. 나이차가 꽤 있지만 완전히 하대는 못하고 간간히 나를 '자기'라고 부르는 지인들도 있는데, 몇년째라 그나마도 익숙해지고는 있어도 그 역시 여전히 편한 호칭은 아니다. '자기' 대신에 차라리 이름 부르기 뭣한 온갖 상대를 아우르며 부를 수 있는 '저기요'가 더 좋다면 좀 이상한가? 온라인 공간에서 부르는 '라니님'이라는 호칭도 십여년이 다 되가니 익숙할 수밖에 없긴 한데, 닉네임이 간지러운 탓이라고는 해도 마냥 편하지는 않다. 내쪽에서 다른 블로거 이웃이나 온라인상에서 만난 대상에게 '님'자를 붙여 부르는 건 크게 어색하거나 힘들지 않은데 반해, '불리는' 입장을 굳이 불편해하는지도 모르겠다. ('님' 대신에 '니'를 쓰는 ㅌㄹ 마을 주민들의 호칭이 내심 몹시 흐뭇하면서도 또 잘 쓰지는 못하는 건 나의 유연성 부족 탓이다 ㅠ.ㅠ)

하루에도 수십번씩 불리는 입장이었던 직장 시절, 호칭은 나에게 꽤나 스트레스였다. 보수적인 분위기가 팽배했던 마지막 두 회사에서 여직원에 대한 호칭은 대개 성으로만 불리는 '미스~' 아니면 '~양'이었기 때문이다. 성과 이름을 다 붙여서 '~~~씨'라고 불러달라는 여직원회의 공식 요구도 젊은 직원들 사이에서나 통했을 뿐, 임원진들은 수십년째 입에 밴 'ㅂ양, ㄱ양'이라는 호칭 습관을 쉬 고치지 못했다. 심지어 "ㅂ양아, 이부장 들어오라케라."는 말투였으니 뭐. 똑같은 의존명사라도 '군'과 달리 '양'은 성 뒤에 바로 붙여 쓰면 비하의 뉘앙스가 느껴진다. '군(君)'은 '임금 군'자를 빌어쓰는 반면에 '양(孃)'은 뜻이 '계집애'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고, '군'이라는 호칭이 결혼여부와 크게 상관없이 친구들끼리 존대하는 의미로도 사용되는 데 반해 '양'은 결혼 이전에만 쓸 수 있는 말인데다 과거 일부 직업 종사자들을 하대하는 말로 쓰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인 물같은 보수 집단의 총체라고 할 수 있는 학교에선 여전히 '양'과 '군'의 호칭이 비하의 의미 없이 흔히 사용되고 있는 듯하고, 그 습관이 중년의 나에게도 '양'을 붙이는 촌극을 벌이게 했을 것이다. 그때 들을 때도 민망했지만, 언제 들어도 좋은 '학생' 호칭에 묻어가며 흐뭇해 했던 것처럼 당시엔 '~~~양'이라는 부름이 화들짝 놀랄만큼 낯뜨럽진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젠 제 아무리 비혼이라도 '양'은 중년의 나에겐 도저히 붙여선 안될 호칭이 아닌가 말이다. 

영어권에서 Miss는 나이와 상관없이 쓰이긴 해도 결혼여부를  드러내는 차별적인 호칭이라 Ms.가 생겨났다지만 사실, 우리나라엔 성차별마저 초월할 수 있는 훌륭한 호칭 '씨'가 있다. 성에만 붙이면 약간 비하와 하대의 느낌이 풍기지만 온전한 이름에 다 붙이면 또 달라지는 훌륭한 호칭이니, 이왕이면 앞으로도 늙을 때까지 나는 '~~~씨'로만 불리면 좋겠다. 회사 다니던 시절 나이는 많은데 직급이 없어서 '~~~씨'로 불리던 남직원들은 갓 스무살쯤 된 여직원들한테 그렇게 불리는 걸 몹시 기분나빠 했었다. 나는 오히려 그들의 생각이 고루해서 코웃음을 쳤고, 지금도 왜 그들이 그 호칭을 기분나빠했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아랫사람이 나를 '~~~씨'라고 불러주면 고마워 해야하는 게 아닌가! 노인이 된 후에도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 정체성을 이루어야 하는 '누구누구 부인, 누구누구 엄마, 누구누구 할머니' 대신에 간단히 '~~~씨'로 불리는 게 자존감을 위해서도 얼마나 좋은가 말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다녀간 택배 아저씨가 마당에서 "~~~씨!"라고 내 이름을 힘차게 외쳤고 나는 "네!" 큰소리로 반기며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왔다. 역시 서로 부르고 듣기 편한 호칭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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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일기 2010. 7. 4. 13:07

특별히 상처가 잘 안아물거나 멍이 잘 드는 체질은 아닌데도 칠칠맞질 못해서 종아리나 무릎 언저리엔 언제나 멍이 한두개씩 들어 있다. 식탁에서 다리 빼다가도 괜히 기둥에 무릎을 부딪치고, 빨래 건조대와 가까이 놓인 탁자 모서리가 위험함을 익히 알고 있으면서 며칠에 한번은 꼭 정강이를 찍힌다.

어제는 외출전에 커피를 빨리 마시겠다고 콩콩대다 오른쪽 정강이에 피까지 났다. 왼쪽 장단지에 언제 생겼는지 모르게 남은 멍자국은 이제 회색으로 거의 사라질 지경인데, 그게 뭐 아쉽다고 새 멍을 만들었는지. 하기야 아직은 멍이 아니라 그저 빨갛게 부풀어 오른 상처일 뿐이다.

다치고 나서 금방 표나는 상처와 달리 한참 있다가 은근히 살갗 밑에서 피어오르는 멍은 어째 대범한 척 넘겼다가 혼자 내심 질긴 뒤끝을 보이며 씩씩거리는 내 속알딱지를 닮았다. 며칠 지나 이게 언제 생겼더라 의아해하는 것까지 전부 닮았더라면 좋았을 걸, 뒤늦게 마음에 생겨난 멍은 잘 안잊혀지니 탈이다. 검붉게 든 피멍도 결국엔 옅어져 사라지듯이 질긴 뒤끝이 후벼판 상상의 멍도 딱 그만큼의 시간 이후엔 말끔히 사라지게 만드는 비법을 배우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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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모순

투덜일기 2010. 6. 29. 23:11

워낙 모순덩어리인 인간인지라, 이곳에 올리는 글도 그런 경향을 피할 수가 없다.
개 싫다면서 개 이야기 줄창 올리고
수다스러운 사람 싫다면서 본인은 긴수다가 끝날 줄을 모르고
요리블로그 아니라면서 걸핏하면 요리 이야기 써대고
월드컵 싫다면서 이젠 월드컵 얘기도 또 쓸 판이다.

하기야 월드컵에 완전히 귀를 닫고 살래도 그러기란 불가능하다. 사방에서 이야기하고, 인터넷 좀 하려면 화면에 절반 이상이 그 이야기이고, TV 채널을 돌리다가도 문득문득 아직은 월드컵 바람이 식지 않았으니까. 어쨌든 그래서 알게 된 바에 의하면 오늘이 일본과 파라과이의 16강전이 열리는 날이란다.

한국팀이 8강 진출에 실패하면서, 나는 막연히 아시아에선 유일하게 일본이 남았으니 걔네라도 8강에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번 월드컵은 워낙 대진운과 오심에 따라 결과가 좌우되고 있으니, 한국이 떨어지고 일본이 8강에 올라가도 한국팀의 전력이 일본팀보다 열등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는 안 나올 거란 단순한 생각을 품었던 거다. 실제 실력과 상관없이 일본은 늘 한국보다 피파 순위가 높기도 하지 않았나. 하긴 뭐 초반부터 우수수 떨어져나간 팀들을 보면 피파 순위는 개나 물어가라고 해야할 것 같기는 하더라마는.

어쨌거나 며칠 전 제삿날 모임에서 내가 이런 의견을 토로했더니 식구들이 다 펄쩍 뛰었다. 한국팀이 8강에 못 올라갔으니, 일본이 올라가는 '꼴'은 절대 못본다는 식이었다. 특별히 일본에 적대감정이 없는데도 그냥 그런 생각이 든단다. 우루과이전에서 한국이 엄청 잘하고도 8강 진출에 실패했기 때문에, 더더욱 일본이 운이 좋아 이기는 상황은 견딜 수가 없을 거라나. 

오늘 16강 전에서 일본팀을 응원하겠는가 말겠는가 묻는 기사도 얼핏 보이는 걸 보면, 그런 생각을 품는 이가 나의 가족만은 아닌 듯하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런 심리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픈 것과 같은 원리 때문일까 아닐까. 같은 상황에서 일본이 아니라 중국팀이나 다른 아시아팀이 올라갔더라도 사람들은 역시나 '8강 진출은 한국 아니면 안 돼!'라고 생각했을까.

내 마음속도 잘 모르면서 남의 속마음까지 들여다보는 건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니 결국 답은 미궁에 빠지고 말겠지만, 쓰잘데기 없는 곳에 호기심을 발휘하는 사람으로서 오늘의 경기 결과는 퍽이나 궁금할 것 같다. 일본은 과연 8강에 진출할것인지 아닌지. 그 결과에 따른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할지. 느긋하게 일이나 하면서 잠시 후 결과를 기다려봐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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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투덜일기 2010. 6. 26. 07:42

동이 트자마자 새들이 울어댄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는 까치소리 뿐, 나머지는 어느 새의 울음인지 하나도 알 수가 없는데 몇년 만에 몹시 우거지게 자라 내 방 쪽 베란다까지 가지를 뻗은 옆집 벚나무에는 신기할 정도로 여러 종류의 새가 날아든다. 참새인가 싶었다가 배가 훨씬 하얗고 줄무늬가 뚜렷한 데다 포르르 포르르 울어대는 목소리가 훨씬 예뻐 몹시 궁금해 조류도감을 찾아본 결과 '곤줄박이'인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린 새부터, 회색 딱다구리가 아닐까 홀로 상상하게 만드는 제법 큰 녀석까지, 모습을 드러낸 놈도 있고 그저 소리만 들려준 놈들도 있는데, 암튼 이상하게도 이 동네엔 새가 많이 날아든다.

나 역시 조류로 분류한다면 올빼미과에 속하는 처지인지라,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속담을 참 싫어하는데 동이 트자마자 앞다투어 날아다니며 울어대는 새들을 보노라면 그 말이 맞는가 싶긴 하다. 벌레를 잡아먹을 요량이 아니라면 걔네들이 새벽부터 왜 그리 바쁘고 시끄럽게 날아다니겠나. 올핸 아무 방비 없이 지나온 탓에 앵두나무에도 무궁화에도 군데군데 입이 말려 있는 걸 보면 이름 모를 곤충의 애벌레들이 제멋대로 터를 잡은 모양이던데, 유독 우리 마당에 새들이 붐비는 건 그 벌레들을 잡아먹기 위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설마 단체로 아침운동을 하는 건 아닐 테고.

다섯시 무렵부터 시끄럽게 울어대던 여러 종류의 새들은 이제 배를 다 채웠는지 어디론가 날아가 사위가 다시 조용해졌다. 조금 있으면 또 인간들이 내는 소음으로 앞마당과 골목이 시끄러울 차례다. 세상의 생명이라면 누구나 다 누리는 새벽이건만, 새벽 시간은 유독 나 혼자만의 소유인 것 같아 새벽의 청명함이 사라지며 아침이 찾아오면 괜히 손해보는 느낌이다. 이제 내 시간은 끝이 났구나, 하는 느낌. 나만의 새벽은 끝났으니 이제 나를 공유해야하는 시간이라 작업의 능률도 뚝뚝 떨어지는 모양이다. 나만의 시간을 이어가려면 어서 잠을 청하는 수밖에 없다. 그만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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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꼴이야

투덜일기 2010. 6. 24. 21:59

댓글에 초연해지겠노라고 마음먹고 포스팅까지 했지만, 어쩔 수가 없다.
세탁소 관련 푸념을 해놓은 글에 달린 댓글이 계속 신경쓰이는 것을.

크케켁! 아가씨도 세탁소쥔 못지않게 말많고 수다스럽그만 ㅋㅋㅋ
읽는데 한시간은 걸리겠네 근데어떻게 세탁소아자씨만 말이많다고 그러셔?ㅋ

이런 댓글을 다는 사람은 정체가 무엇이고 어떤 심리일까? +_+

가설 1. 세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거나 그 측근이라 세탁소 주인들을 싸잡아 폄하하는 글에 화가 나 빈정거리고 있음.
가설 2. 난독증 때문에 분량 긴 블로그 포스팅에 심한 근원적 적개심을 품고 있으며, 괜히 심심해서 아무나 붙들고 시비를 걸고 싶어졌음.
....

머리가 나빠서, 그리고 버럭 짜증이 나서 사고력이 마비되는 바람에  더 훌륭한 가설을 떠올릴 수조차 없다.
어차피 포털사이트에서 운영하는 블로그 계정이니 어중이떠중이 별별 사람 다 드나드는 곳임을 감안해야 하는데도, 가끔 이런 일을 당하면 마치 내 영역을 침범당한 것 같아 황당하고 적개심마저 불타오른다. 기막히는 수준의 수많은 악플러에게 시달려야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나 모르겠다. 어쨌거나 나는 댓글 스트레스를 답댓글로 풀려다 자제하고, 아예 포스팅으로 풀어보려는 속셈으로 이렇게 외치노라.

별꼴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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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갈아입기

투덜일기 2010. 6. 24. 21:30

얼마 전 공교롭게 하루에 세번의 외출을 할 일이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매번 다른 옷을 입었음을 알게 됐다. 중간에 집에 돌아올 때마다 두번이나 다시 뒹구는용도의 옷으로 갈아입었으니 대체 하루에 옷을 몇번이나 갈아입은 건가. 참 내.
첫 직장이 의류관련된 곳이라 그때 세뇌된 것들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모양으로, 때와 장소 상황에 맞는 옷을 최대한 맞춰 입어야한다는 강박이 심한 편이다. 그러면서도 또 편한 걸 추구하는 귀차니즘까지 동원하고 앉았으니 결국엔 모순으로 스스로를 볶아치는 셈이다. 

오전중 첫 외출은 왕비마마의 병원이었는데, 오래 전 오로지 운전수 역할만 하면 될 땐 정말 일어나자마자 세수도 안하고 눈꼽만 대강 떼낸 뒤 야구모자 하나 질끈 눌러쓰고 아무 옷이나 걸치는 편이었지만 요샌 상황이 다르다. 진료실에 함께 들어가서 청력과 기억력이 모두 부실한 환자 대신 의사 얘기를 잘 듣고 질문도 던져야하기 때문에 잠옷 같은 옷을 걸칠 순 없단 의미다. 최소한 의료진 앞에서 보호자로서의 권위를 어느 정도는 내세울 수 있는 간편한 차림이 요구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7부바지는 인정하되 찢어진 반바지, 탱크탑류는  곤란.. 뭐 이런 식이다.) 환자나 보호자의 옷차림에 따라 의료진의 친절도나 진료의 질이 달라진다는 통계는 그 어디에서도 본 적 없지만, 껄렁껄렁 날라리처럼 하고 와서 쭈뼛쭈뼛 기웃대는 사람보다는 멀쩡히 차려입은 사람에게 좀 더 공손하다는 것이 그간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지론(또는 편견)이다.

오후 외출은 뙤약볕 아래 나서야 하기도 했고 요가 강습을 위한 거라 정말로 최대한 편하게 정말로 아무거나(반바지에 티셔츠) 입고 나갔다. 요가복을 따로 챙겨가긴 하지만 땀흘린 뒤에 입는 옷도 역시 편해야 제격. 직장인들도 요가학원에 많이 다니던데, 어휴 나 같으면 불편해서 다시 정장으로 갈아입는 짓 못할 것 같다. 마지막 외출은 간만에 동창들 만나는 자리인데 에어컨을 염려해 청바지도 긴 걸로, 상의도 소매가 좀 내려오는 걸로 선택했는데, 그러고도 버스안에서 덜덜 떨었으니 탁월한 안목이긴 했다. 

하지만 남들은 신경도 쓰지 않는 차림새 강박 때문에 종종 한꺼번에 후둘러 놓은 여러 벌의 옷을 보면 스스로가 참 한심스럽고 못마땅하다. 그렇다고 패셔니스타의 반열에 오를 만큼 뛰어난 센스를 발휘하는 것도 아니면서 왜 자유로워지지 못하는가 말이다. 하지만 잘 차려입고 아니고의 여부를 떠나서,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는 차림새로 외출한 경우(색깔 조화가 영 엉망이라든지--이 또한 순전히 주관적인 잣대가 적용된다-- 큰 맘 먹고 입었는데 치마가 너무 짧다든지!) 난 제대로 볼 일을 보지 못할 정도로 집에 당장 들어가 몸을 숨기고픈 충동을 느낀다. 한때 옷장과 서랍을 열면 죄다 검정색 아니면 회색밖에 없었을 시기가 있었던 건, 바로 색깔 조화를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 때문이었다. 하지만 또 내가 누군가. 싫증 잘내는 변덕쟁이로서 언제부턴가는 알록달록한 원색들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특히 여름철 옷은 서랍장을 연 순간 정신이 사나워질 정도다.

요번에 여름옷 꺼내면서 최근 3년간 안입은 옷 처리하기 원칙에 따라 꽤 많은 옷을 정리했다 싶은데도, 여전히 서랍장은 미어터지고 그럼에도 막상 입고 나가는 옷은 만날 그게 그거라 입을 옷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삶을 단촐하게 유지하고 환경을 생각하며, 동시에 소비활동으로 경제에 이바지하고 소소한 욕망도 채우는 중용의 삶은 참... 실천하기가 어렵다. 일단 옷에 대한 강박관념부터 벗어나야 할 터인데, 그런 날이 오긴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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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투덜일기 2010. 6. 19. 18:11

편견인지 취향인지 나는 목소리 큰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공공장소에서 남들 아랑곳하지 않고 커다란 목청으로 핏대 올리며 이야기하는 사람은 혐오대상이다. 목소리 좋은 사람 싫어할 이는 아무도 없겠지만, 어쨌든 나는 목소리의 미추 여부를 떠나 그냥 조용조용 나직나직하고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좋다. 그렇다고 너무 저음이라 웅얼웅얼 못알아 들어먹게 생긴 목소리는 또 별로.

그런 잣대로 보자면 나는 내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직도 가끔 전화 받으면 정체를 알 수 없는 텔레마케터가 "어머니 안 계세요?"라고 물을 때가 있을 정도로 목소리가 유치하게 가늘고 높은 톤이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고상함과 우아 떠는 연습을 좀 많이 한 덕분인지 그나마 예전보다는 톤이 좀 낮아진 것도 같지만, 내 귀에 들리는 목소리가 아니라 무심결에 녹음된 진짜 목소리를 들으면 퍼뜩 놀랍고 민망하다. 내가 정말로 싫어하는 앵앵거리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지 않은가. 유난스레 많이 떠들어대고 들어온 날 특히 공허하고 자기혐오에 빠지는 건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싫어하는 내 목소리를 계속 견뎌야 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본인의 목소리를 무척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안 품게 되지 않을까.

목소리도 타고난 신체의 일부인데 싫으니 좋으니 따지는 건 외모지상주의에 빠져 예쁘니 미우니 잘생겼느니 못생겼느니 손가락질하는 것과 똑같은 태도임을 알고는 있다. 그래도 좋은 건 좋은 거고 싫은 건 싫은 거니 어쩌랴. 남들에게 티는 안내면서 속으로만 삭이고 살며 쓸데없이 욕먹기만 피하는 수밖에.

헌데 귀가 잘 안들리는 왕비마마와 살려니 자꾸만 목소리를 높이게 되는데 가뜩이나 본인 목소리 싫어하는 나로선 상황 자체가 스트레스고, 나도 모르게 쉽사리 짜증이 묻어나와 남들이 들으면 만날 모녀가 싸우고 앉았다고 여길 것만 같다. 원래부터 나긋나긋 상냥하고 낮은 목소리를 지녔다면 이런 상황에서도 좀 더 지혜롭게 헤쳐나갈 수 있지 않으려나. 근본적인 이유는 까칠한 성격 탓인데도 오늘은 애먼 목소리만 탓하고 앉았다. 묵언수행이라도 해야할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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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취향

투덜일기 2010. 6. 15. 17:50

최근 친구 하나가 '미드'에 빠져 연일 날밤을 새며 시즌을 하나씩 섭렵하고 있다며 내게도 추천을 해달라고 했다.
촌스럽게도 기회가 되면 간혹 미드를 즐겨보기는 하지만 열성적인 다운로드족이 아닌 나는 그런 걸 추천해줄 입장이 못돼 민망했다. 벌써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그 옛날 <프렌즈>, <사인펠드>, <섹스앤더시티>, <ER>로 미드의 맛을 알아가기 시작했지만, 그때도 난 다운로드족이 아니라 케이블로 찾아보는 편이거나 dvd를 장만하지 않으면 주변에 빌려봤다. 확실히 나는 디지털시대를 살아가는 아날로그형 낀세대라는 얘기다.

지금도 우연히 마주치면 넋을 놓고 시청하는 <CSI>, <그레이 아나토미>, <하우스>도 파일을 다운받아 본 적은 없으며 <위기의 주부들>은 누가 파일을 보내주겠다고 하는데도 별로 볼 마음이 안생겼다. 뭔가 내 취향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랄까. 더욱이 TV시청 자세가 퍽이나 불량한 나는 드라마라고 하면 느긋하게 소파나 큰 쿠션에 거의 드러누워 편히 감상해야지,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작업하는 기분으로 봐야하는게 영 마뜩찮다. 일드를 특히 즐겨보는 부지런한 친구 하나는 열심히 다운받아서 케이블로 TV에 연결해 소파에 드러누워 보기도 하지만, 내가 그 친구 집에 가서 같이 봐주는 건 모를까 내가 몸소 그런 수고를 하고 싶은 생각은 평생 들지 않을 거다.
 
미드 친구는 당연히 <위기의 주부들>의 열혈팬이었고 내가 이름만 대강 아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로 열변을 토했다. 부업을 하는 가정주부인 친구는 그날 마땅히 다운받아볼 게 없으면 <위기의 주부들> 시리즈를 여러번 돌려보며 두세번째 시청할 땐 인테리어 소품과 가구, 식기, 패션소품까지 눈여겨봐 참고한다고 했다. 목동사시는 시간 많은 여사님들 사이에선 그게 유행이란다. +_+

추천해줄만한 미드가 생각나지 않는다는데도 굳이 최근에 본 걸 떠올리라는 친구의 말에 나는 자신없게 말했다. "가십걸...? 그 전엔 <OC>라는 것도 봤다...."
친구는 푸하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나의 어린 취향이 걱정스럽다고(그녀의 표현은 '취향이 어려서 큰일'이라고) 말했다. 자기는 그런 애들 나오는 드라마는 눈에 전혀 안들어온다나. 하기야 다들 <아이리스> 볼 때도 내가 혼자 <미남이시네요> 보면서 설레고 좋아라할 때부터 알아봤단다. 아이돌 가수 몇명을 눈여겨 보며 좋아라하는 것도 그렇고...

결혼과 학부모 역할을 인생의 커다란 '성취'이자 '성숙함'로로 여기며 '비혼'은 미완성 인생과 미숙함의  표상이라는 걸 은연중에 풍기는 주부 친구들이 "너는 참 취향이 어려서 큰일이다"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본능적으로(어쩌면 자격지심 때문에) 발끈하게 된다. 그들의 말엔 종종 "그러니까 정신 좀 차려라"는 당부의 뜻이 담겨 있음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잘 보지도 않는 미국 드라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예쁜 학용품에 열광하고 실크블라우스보다 그림 그려진 티셔츠에 더 눈길이 가는 나의 태도를 어리다고 판단한다면 나도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취향은 곧 개성이라는 게 내 생각이고, 취향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반갑기는 하지만 친구라고 해서 반드시 같은 취향을 가질 이유는 없다. 물론 처음부터 취향이 비슷해 급속도로 친해지는 사이도 있다. 그러나 몇 분 차이로 태어난 쌍둥이도 취향이 다른 판국에 복제인간이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취향이 판박이처럼 똑같은 사람을 만날 수가 있겠나. 하물며 어쩔 때는 본인의 취향 마저도 마음에 안드는 것을.

사실 나는 요즘 여러 분야에서 내 취향이 뭔지 선명하게 이야기할 자신조차 없다. 이것도 좋은 것 같고 저것도 좋은 것 같고, 좋아하는 것과 어울리는 것의 괴리 속에 괴로워하기도 하고 이제껏 그게 내 모습이라고 그려놓은 형상이 순간순간 허물어지고 일그러지는 걸 느낀다. 그리고 그렇게 갈팡질팡 우유부단하게 해매는 자신이 짜증스럽기도 하다. 취향에 대해 핀잔을 들으면 발끈하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 같다. 나도 잘 모르는 취향을 누가 얼마나 안다고! 하기야 남의 눈이기 때문에 객관적이라 더욱 판단이 잘 서는 것일까? 그렇더라도 할 수 없다. 어리다고 놀리든 말든, 난 이렇게 살테닷. 쳇.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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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울림

투덜일기 2010. 6. 9. 16:23

세상 사람들 누구나 자기가 꼭 원하고 바라는 일을 할 형편은 안되는 것이 현실임을 잘 알지만, 그래도 내가 품고 있는 그 사람의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직업을 선택했다고 하면 공연히 속이 상하다.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결정을 존중하는 마음을 품으면서도 혼자 속앓이를 하듯 한동안 그런 생각이 든다는 얘기다. 가령, 낯 많이 가리고 사교성이 심히 부족하다고 스스로도 인정하던 친구가 돌연 아는 사람이 하던 호프집을 인수해 해보겠다고 나섰을 때처럼. 친구 중에 누구든 하나쯤 술집이든 카페든 주인이 되면 덩달아 나도 참 좋겠다는 막연한 바람을 노상 품었으면서도, 좀 더 씩씩하고 강한 친구라면 모를까 그 친구는 못 해낼 것 같다는 생각부터 앞서는 바람에 친구의 인생에 간섭할 권리도 없는 주제에 뜯어말리려고 했던 적이 있다. 사업자등록증을 내느라 보건소에 가서 기막힌 검진을 받아야 했다며 거의 울것 같은 표정을 하는 친구 앞에서 속으로는 여전히 "너랑 호프집 주인은 정말 안 어울려!"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누누히 말려도 해보겠다는데야 결국 다 잘 될 거라고 위로하는 수밖에 없긴  했지만. 

오래 전부터 나를 아는 친구들은 심지어 지금의 내 직업도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기며 내심 아직도 염려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처음 회사 때려치우고 집에 들어앉아 번역을 해보겠다고 나섰을 때, 지인들의 절반쯤은 나를 말렸다. 나처럼 사람들과 어울리며 노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떻게 홀로 조용히 틀어박혀 심심하게 하는 일을 하겠느냐고. 만날 놀러다니느라 분명 일은 뒷전으로 밀어뒀다가 결국 욕만 잔뜩 먹거나, 심심해서 못 견디고 다시 회사생활을 하게 될 거라고 장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16년째 이 일을 하고 있으니 일단은 그들이 틀린 셈이다. 표면상 이 일이 나에게 어울리든 말든.

결국 남들이 생각하는 직업의 어울림은 그저 타인으로서의 느낌일 뿐이라는 얘긴데도, 요번에 공인중개사로 부동산사무실을 개업한다는 어느 친구 소식에 또 한번 나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대학 다니던 시절 그 친구는 유치하든 말든 자기가 쓴 글을 빼곡히 실은 문집을 만들었다며 씩 웃으면서 조악하게 인쇄된 그 개인 문집을 내게도 한 부 쥐어줬던 부류였다. 일상적인 안부와 푸념밖엔 없는 내 답장이 민망할 정도로 그 친구의 편지엔 깊은 사색과 주옥같은 글귀가 가득했으므로 나는 부디 그가 글로 밥벌이를 하면 좋겠다는 염원을 계속 품었던 것 같다. 흔한 회사원으로 살더라도 가끔은 글쓰기를 잊지 않기를 말이다. 이 땅에서 글쟁이로 밥벌이를 한다는 게 얼마나 팍팍한 일인지 잘 알지만, 그래도 그게 그 친구와 '어울리는 직업'일 듯한 나만의 착각을 아직도 못 버렸다는 뜻이다. 서비스업에 대한 나의 편견도 문제이긴 하다. 공인중개사라면 모름지기 활달한 사교성과 드넓은 대인관계를 갖춘 사람이어야만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헌데 주변의 얘기를 들어보면 공인중개사로서의 성공 여부는 그런 성격적인 부분보다는 정확한 분석력과 기획력에 달려 있단다. 주절주절 수다떨며 어중이떠중이 고객에게 설레발을 치는 것보다는 매물 분석을 잘해서 계약 성공률을 높여야 한다나 뭐라나.

사람이 변하기란 쉽지 않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사실 아직도 그 친구가 부동산사무소에서 화려한 언변으로 부동산 투자나 주택매매를 중개하는 광경이 상상되질 않는다. 하기야 발상을 바꾸면 나처럼 말 많은 거 싫어하는 고객들이 묵묵히 실속있는 매물과 자료로만 승부하는 공인중개사를 반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도... 나 같은 고객이 몇 명이나 되겠느냐고!
재테크라는 말부터 싫어하는 나와 같은 부류라고 생각했던 그 친구가 정 반대 성격의 배우자를 만나 세상물정 모른다고 질책을 받으며 따로 열심히 경제서와 실용서 쌓아둔 채 재테크 공부를 한다고 쑥스럽게 웃을 때만 해도 이런 반전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간만에 얼굴도 볼 겸 개업식에 오라는 친구의 목소리는 확실히 예전과 달리 자신감 넘치고 활기차게 들렸으니, 그의 선택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나 혼자만의 착각일지 모르겠다. 그러니 새로 찍은 공인중개사 명함을 건네는 친구의 모습을 앞두고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은 애써 버려볼 작정이다. 의외로 잘 어울릴지 모르잖아, 라면서. 하지만 축하의 자리를 앞두고 자꾸만 기쁨보다 아쉬움이 샘솟는다. 순전히 내 욕심이고 이기심이란 걸 아는데도 나 원 참. 누가 내 인생에 섣불리 간섭하면 애정의 조언이든 아니든 파르르 떨기부터 하는 인간에겐 영 가당찮은 태도다. 그래서 반성이 필요하다는 의미.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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