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울림

투덜일기 2010. 6. 9. 16:23

세상 사람들 누구나 자기가 꼭 원하고 바라는 일을 할 형편은 안되는 것이 현실임을 잘 알지만, 그래도 내가 품고 있는 그 사람의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직업을 선택했다고 하면 공연히 속이 상하다.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결정을 존중하는 마음을 품으면서도 혼자 속앓이를 하듯 한동안 그런 생각이 든다는 얘기다. 가령, 낯 많이 가리고 사교성이 심히 부족하다고 스스로도 인정하던 친구가 돌연 아는 사람이 하던 호프집을 인수해 해보겠다고 나섰을 때처럼. 친구 중에 누구든 하나쯤 술집이든 카페든 주인이 되면 덩달아 나도 참 좋겠다는 막연한 바람을 노상 품었으면서도, 좀 더 씩씩하고 강한 친구라면 모를까 그 친구는 못 해낼 것 같다는 생각부터 앞서는 바람에 친구의 인생에 간섭할 권리도 없는 주제에 뜯어말리려고 했던 적이 있다. 사업자등록증을 내느라 보건소에 가서 기막힌 검진을 받아야 했다며 거의 울것 같은 표정을 하는 친구 앞에서 속으로는 여전히 "너랑 호프집 주인은 정말 안 어울려!"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누누히 말려도 해보겠다는데야 결국 다 잘 될 거라고 위로하는 수밖에 없긴  했지만. 

오래 전부터 나를 아는 친구들은 심지어 지금의 내 직업도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기며 내심 아직도 염려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처음 회사 때려치우고 집에 들어앉아 번역을 해보겠다고 나섰을 때, 지인들의 절반쯤은 나를 말렸다. 나처럼 사람들과 어울리며 노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떻게 홀로 조용히 틀어박혀 심심하게 하는 일을 하겠느냐고. 만날 놀러다니느라 분명 일은 뒷전으로 밀어뒀다가 결국 욕만 잔뜩 먹거나, 심심해서 못 견디고 다시 회사생활을 하게 될 거라고 장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16년째 이 일을 하고 있으니 일단은 그들이 틀린 셈이다. 표면상 이 일이 나에게 어울리든 말든.

결국 남들이 생각하는 직업의 어울림은 그저 타인으로서의 느낌일 뿐이라는 얘긴데도, 요번에 공인중개사로 부동산사무실을 개업한다는 어느 친구 소식에 또 한번 나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대학 다니던 시절 그 친구는 유치하든 말든 자기가 쓴 글을 빼곡히 실은 문집을 만들었다며 씩 웃으면서 조악하게 인쇄된 그 개인 문집을 내게도 한 부 쥐어줬던 부류였다. 일상적인 안부와 푸념밖엔 없는 내 답장이 민망할 정도로 그 친구의 편지엔 깊은 사색과 주옥같은 글귀가 가득했으므로 나는 부디 그가 글로 밥벌이를 하면 좋겠다는 염원을 계속 품었던 것 같다. 흔한 회사원으로 살더라도 가끔은 글쓰기를 잊지 않기를 말이다. 이 땅에서 글쟁이로 밥벌이를 한다는 게 얼마나 팍팍한 일인지 잘 알지만, 그래도 그게 그 친구와 '어울리는 직업'일 듯한 나만의 착각을 아직도 못 버렸다는 뜻이다. 서비스업에 대한 나의 편견도 문제이긴 하다. 공인중개사라면 모름지기 활달한 사교성과 드넓은 대인관계를 갖춘 사람이어야만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헌데 주변의 얘기를 들어보면 공인중개사로서의 성공 여부는 그런 성격적인 부분보다는 정확한 분석력과 기획력에 달려 있단다. 주절주절 수다떨며 어중이떠중이 고객에게 설레발을 치는 것보다는 매물 분석을 잘해서 계약 성공률을 높여야 한다나 뭐라나.

사람이 변하기란 쉽지 않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사실 아직도 그 친구가 부동산사무소에서 화려한 언변으로 부동산 투자나 주택매매를 중개하는 광경이 상상되질 않는다. 하기야 발상을 바꾸면 나처럼 말 많은 거 싫어하는 고객들이 묵묵히 실속있는 매물과 자료로만 승부하는 공인중개사를 반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도... 나 같은 고객이 몇 명이나 되겠느냐고!
재테크라는 말부터 싫어하는 나와 같은 부류라고 생각했던 그 친구가 정 반대 성격의 배우자를 만나 세상물정 모른다고 질책을 받으며 따로 열심히 경제서와 실용서 쌓아둔 채 재테크 공부를 한다고 쑥스럽게 웃을 때만 해도 이런 반전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간만에 얼굴도 볼 겸 개업식에 오라는 친구의 목소리는 확실히 예전과 달리 자신감 넘치고 활기차게 들렸으니, 그의 선택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나 혼자만의 착각일지 모르겠다. 그러니 새로 찍은 공인중개사 명함을 건네는 친구의 모습을 앞두고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은 애써 버려볼 작정이다. 의외로 잘 어울릴지 모르잖아, 라면서. 하지만 축하의 자리를 앞두고 자꾸만 기쁨보다 아쉬움이 샘솟는다. 순전히 내 욕심이고 이기심이란 걸 아는데도 나 원 참. 누가 내 인생에 섣불리 간섭하면 애정의 조언이든 아니든 파르르 떨기부터 하는 인간에겐 영 가당찮은 태도다. 그래서 반성이 필요하다는 의미.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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