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에 해당되는 글 29건

  1. 2021.09.13 엄마들은 왜 그럴까 2 2
  2. 2014.07.29 드라마 잡담 2
  3. 2012.01.20 옛날 이야기 6
  4. 2011.10.18 아흔개의 봄 4
  5. 2011.05.20 파란 대야 13
  6. 2011.05.13 오이김치 2
  7. 2011.03.27 풀 그림 10
  8. 2010.12.11 바느질 13
  9. 2010.10.29 생선가시 2
  10. 2010.07.07 어둠 연습 5

어린 시절 친가든 외가든 할머니댁에 놀러 가보면 온 집안이 깜깜했다. 전깃불을 아끼느라고 혼자 계시거나 할아버지랑 두분만 계시면 낮엔 좀처럼 전등을 켜지 않는 게 일상이었던 거다. 역시나 전쟁 세대의 습관인 것 같다. 7, 80년대까지도 종종 비가 많이 오거나 벼락치면 정전사태가 났으니 학교에서 전기 절약에 관한 표어를 만든 적도 있다. 

암튼 여름방학때 외가에 놀러가 며칠 지내다보면 외할머니는 심지어 전깃불을 켜면 덥다고 얼른 끄라고 소리치셨다. 예전 30촉, 20촉, 100촉짜리 (이런 말 아는 사람은 옛날 사람이다. ㅠ.ㅠ) 백열등에 익숙한 사고방식이었을 거다. 진짜로 백열등은 오래 켜두면 뜨거워서 손을 델 수도 있다. 그치만 형광등은 안 뜨거워진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외할머니에겐 안 통했다. 해서 여름 낮엔 어둠컴컴한 방안에서 선풍기만 휘휘 돌아가는 풍경이 그려진다.

문제는 우리 엄마도 여전히 전깃불을 몹시 아끼신다는 거다. 이번 여름에 하도 더워서 에어컨을 밤새 트는 날은 있었을지언정, 방에 전등 켜는 건 잘 볼 수가 없다. 집이 동남향이라서 오후엔 좀 거실이 어두워지는 편이라 글씨라도 읽을라치면 난 전등을 켜야 속이 시원한데 엄마는 굳이 베란다 창에 비춰가며 그냥 뭔가를 읽으신다. 화장실 갈 때도 낮엔 전등을 켜지 않으신다. 문 닫으면 당연히 어두우니 볼 일 보면서 문을 열어두는 식이다. ㅠ.ㅠ 엄마나 나나 각자 공간에서 따로 살지만 난 혼자 있어서 화장실 문 열고 볼 일 보는 건 상상도 안 되는데, 엄만 참....  

짜증이 나는 건 엄마가 뭔가 안방이나 옷방에서 물건을 찾아야할 때다. 낮에도 옷장이나 서랍에 든 물건을 찾으려면 전등을 켜야 마땅하건만, 엄만 깜깜한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뒤져놓곤 "암만 찾아도 없다"고 그냥 나오신다. 내가 전등 스위치만 올려도 바로 보이는 물건을 도대체 왜?!!

놀랍게도 전등을 잘 안 켜는 것 역시 친구의 어머님들도 공통으로 보이시는 행동이다. 노화가 진행될수록 시야가 좁아지는지 물건을 잘 찾지 못하면서도, 굳이 전기요금을 아끼는 습관... 참으로 괴롭다. 우리나라만큼 전기요금 싼 데도 없다고, LED등이나 형광등은 전기요금도 얼마 안 나온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소용없다. 반면에 조카들은 가는 곳마다 전등을 켜두는 게 일상이다. 어두운 걸 못 견디는 거다. 혼자 있을땐 더더욱! 그래서 조카 ㅈㅁ이가 우리집에서 지낼 땐 전등 스위치 안 내린다고 할머니한테 잔소리를 엄청 들었다. 화장실도 늘 켜놓고 냉장고 들락날락해야하니 부엌도 켜놓고...  ㅎㅎ

신체리듬을 자연에 맞추려면 낮엔 태양광으로만 살고 밤엔 전등의 도움을 약간 받다가 깜깜하게 끄고 잘 자는 게 좋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하냐고! 전등은 잘 안켜고 깜깜하게 사시지만 그보다 전기요금은 훨씬 더 많이 나오는 TV는 온종일 틀어놓으신다는 것 또한 엄마들의 공통점이다. 아 진짜, 엄마들은 왜 그럴까. (그렇지 않은 어머님들의 사례 구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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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잡담

놀잇감 2014. 7. 29. 15:09

요샌 통 챙겨보는 드라마가 없다. 일이 바쁘기도 했지만 정붙이고 볼만한 드라마가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강하다. 케이블 방송에서 꽤 화제가 되었던 드라마들도 하나도 못/안봤다. 일단은 다운로드족이 아니라서 몰아보기도 못하고, 내 방엔 케이블이 골고루 안나오고.. 그렇다고 시간 맞춰 본방이나 재방을 볼 부지런함은 앞으로도 영영 기대할 수 없을 것 같다. 뭐가 이렇게 다 귀찮고 시큰둥한지 원... 


하여간 그런데도 가끔씩 엄니 따라서 보는 드라마가 있으니 <참 좋은 시절>과 <기분 좋은 날>이다. 그러고 보니 둘 다 주말드라마로군. 공중파 주말드라마의 특징은 몇주 안보다가 보아도 내용 이해에 전혀 어려움이 없다는 점인 것 같다. <기분 좋은 날>의 경우 일요일엔 <개그 콘서트>에 밀려서 안보는 날이 많은데도 등장인물 관계를 다 알겠으니 원... 암튼 KBS 주말 연속극은 울 엄마의 경우 어떤 내용이든, 배우가 누구든 아무런 상관없이, 그냥 습관적으로 틀어놓고 보신다. 새로운 드라마가 시작되면 적응 못해서 한달 쯤은 고생을 하면서도 딴데로는 채널이 절대 안 돌아간다! 어휴... 참 놀라운 충성심이라고 해야할지.


<참 좋은 시절>의 경우 이서진이 주인공인데, 엄마도 나도 <꽃보다 할배>로 뜬 투덜이 서지니에 대한 인상이 좋아서 참고 보려다가 한참을 괴로워했었다. 울 엄마 왈, 이서진은 <꽃보다 할배> 때가 백배 낫단다. 드라마에선 하도 무게를 잡고 인상을 써대서 늙은 아저씨 같다고... 여주인공이랑 안어울린다나. (심지어 이서진은 노총각이고 김희선은 애엄마인데도! ㅋㅋ)  그럼에도 울 엄마가 인내심을 갖고 그 드라마를 보는 건 맛깔스러운 사투리를 쓰는 귀여운 애들(동원이 동주) 덕분이 칠할 쯤 되는 것 같고, 나머지는 본처인 장소심 여사(윤여정)과 첩 하영춘 여사(최화정)의 관계가 아닐까 대충 짐작하고 있다. 


바람둥이 남편이 오래 전 나몰라라 내팽개친 집안을 일구며 시아버지에 쌍둥이 시동생에, 배다른 막내아들에, 또 그 막내아들이 고딩때 사고쳐서 낳은 쌍둥이 손주들까지 호적에 자식으로 올려 보살핀 '보살' 같은 사람이 바로 장소심 여사(윤여정)인데, 첩인 하영춘(최화정)과의 애틋한 관계는 거의 놀라울 지경이다. 십수년간 남편 없는 집에서(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가능했겠지만) 둘이 한 방을 쓰며 자매처럼 모녀처럼 지냈을 정도.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바람둥이 남편이 있는 집안이거나 불임의 문제로 후처를 들인 경우 형님, 아우 해가면서 본처와 후처가 한 집에서 오손도손 사는 일이 옛날엔 꽤 많았단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외갓집이 그랬다니 뭐 말 다했지...


내가 울 엄마의 친할머니, 그러니깐 증조 외할머니이신 '송씨' 할머니의 모습을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반해, 울 부모님의 결혼식 사진에도 떡하니 한복 입고 가족사진에 찍힌 울 엄마의 '큰엄마'에 대해서는 통 기억이 없다. 그분이 증조외할머니보다 일찍 돌아가셨다는 뜻이다. 암튼 울 외할머니는 일제 강점기 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남매를 키우던 중, 살림 해주러 일 다니던 같은 동네의 어느 집에 아들을 낳아주러 후처로 들어가게 된다. (해방 직후 일본에서 고향 가는 배를 탔다는 남편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으니, 가족 부양의 의무는 계속 외할머니 몫이었다...) 


딸 하나만 낳고서 계속 아이를 낳지 못해 대가 끊기게 생긴 그 하씨 집에, 외할머니는 아들 둘 딸 하나를 더 낳아주었고 본처와 후처는 나란히 한 집에서 애들을 건사하고 키웠다. 원래 있던 두 아이(울 엄마와 큰외삼촌)도 바로 윗집에 살면서 잠만 따로 잤지, 밥은 다같이 먹었다는 것 같다. 울 외할머니에겐 시어머니가 되는 송씨 할머니가 건재하셨기에 집까지 다 합치진 못했던 듯... 암튼 그러다 하씨 할아버지도 일찍 세상을 떴으니... 남은 건 우글우글 여자들과 올망졸망한 애들뿐. 


드라마 속 장소심 여사와 하영춘 여사처럼 울 외할머니와 본처 할머니는 오손도손 같이 살며 애들을 함께 키웠대고, 동네에 작은 절을 지어 바칠 만큼 돈이 꽤나 많고 살림살이 규모도 컸다는 하씨네 집안일을 같이 돌봤다고 한다. 울 엄마는 하씨네 본처 아줌마를 큰엄마라고 불렀던 반면, 울 외할머니가 낳은 하씨네 자식들은 본처를 그냥 엄마, 낳아주신 생모인 울 외할머니를 '작은엄마'라고 불렀단다. 그러니깐 울 외할머니 역할이 최화정이란 말쌈. +_+ 일반적으로 남편이 바람기가 많은 오입쟁이라 후처를 들이는 경우 본처와의 사이가 좋지 않다지만, 본처가 아들을 낳지 못해 스스로 아들 낳아줄 후처를 주선하는 경우엔 사이가 좋은 경우가 더러 있단다. (아무리 그래도 참 놀랍다! 곤경에 처한 여자들의 동지애, 자매애는 어디까지 가능하단 얘긴가...) 


째뜬 울 외할머니는 평생 그 하씨 집안 호적에 오른 적 없이 그냥 대를 이어준 첩으로만 사신 분이다. 생계 때문이긴 하지만 이씨 성을 가진 두 자식을 데리고 정식으로 개가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기가 낳은 하씨네 자식들에게 법적인 어머니 노릇도 할 수 없는 정말 딱한 처지에서 두집 자식들에게 모두 죄스러워하며 사신 것 같다. 체력이며 목청이며 천성은 카리스마 넘치는 여장부인데, 자식들에게는 늘 전전긍긍...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본인이 낳지 않은 하씨네 큰딸까지  하나같이 죽어라 속들을 썩여대는 자식들을 위해 기도하고 김치 담가 나르고 사고치면 뒷수습하고... 그러셨다. (젤 멀쩡한 자식인 울 엄마만 해도 걸핏하면 우울증이 도졌으니 뭐;;) 하여간에 울 엄마의 증언에 따르면 울 외할머니와 '큰엄마'의 사이는 몹시 좋았고, 첩이 낳은 아이들도 다 엄청 예뻐했단다. 대를 잇게 된 두 아들 뿐만 아니라 막내딸까지도 주로 업어 기른 사람이 '큰엄마'였다나.본처 입장에서 볼 때 울 외할머니가 자신의 법적인 지위를 위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짐작이 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배다른 자식들을 예뻐하다 못해, 엄연히 따지면 남남인 울 엄마와 큰외삼촌까지 잘해줬다는 걸 보면 본처나 후처나 두 양반 성품이 워낙 착했던 것 같다. 심지어 내가 태어났을 때도 그 '큰엄마'라는 양반이 아기 손가락 하나만 붙잡고 예뻐서 어쩔 줄 몰라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우리 외갓집의 경우 남편의 이른 사망으로 본처와 후처간의 사이가 더욱 돈독해지고 자매처럼 서로 의지하며 집안을 일구었다면, 드라마 <참 좋은 날>의 상황은 훨씬 복잡하다. 수십년간 집밖으로 떠돌던 바람둥이 남편(김영철)이 돌아온 것! 당연히 두 여자의 공분과 미움을 살 수밖에 없고, 울 엄마 역시 그들에게 공감하며 김영철 아저씨를 엄청 욕하며 드라마를 보고있다. 저런 남편은 없는 게 낫지.. 라면서. 최근 이야기는 돌아온 남편 때문에 결국 첩이었던 하영춘이 집을 나갔고, 다들 늘그막에 노부부가 행복한 재결합을 하나보다 짐작하지만 장소심 여사가 이혼 카드를 내밀며 파란이 인다. 평생 희생하며 산 아줌니가 엄마 노릇 지긋지긋하다고 집을 나가겠다니 원... 


드라마에선 본처의 이야기지만 장소심 여사의 희생으로 점철된 인생을 보면 나는  울 외할머니의 삶이 떠오른다. 본처도 일찍 죽고 결국 모든 집안 건사와 자식 교육의 책임은 울 외할머니의 어깨에 떨어졌다. (울 부모님 결혼식 사진 속의 하씨 형제들은 모두 까까머리에 까만 교복 차림이다.) 외할머니는 86세까지 장수하셨고, 계속 꽤 큰 살림 규모를 유지했지만, 본인 명의로는 그 어떤 재산도 남아있지 않았더랬다. 미리미리 죄다 자식들 공동명의로 해놓았는데도 또 그 지분을 놓고 하씨네 자손들은 장례 끝나기 무섭게 박터지게 싸움을 해대고...  윤여정이 이혼선언과 함께 가출 결심을 밝히면서, 엄마 노릇이 지긋지긋해서 이제 관두겠다고 하는데 내가 막 공감이 됐다. 아오.. 안봐도 비디오지... 얼마전까지 대소변 받아내야 하는 시아버지 봉양도 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아무튼 하도 설정이 신파스럽고 구식이라 8,90년대가 배경인 줄 알았던 드라마는 요즘 이야기였다. ㅋㅋ 울 엄마 세대 이야기도 아니고 무려 울 할머니 세대에나 있었던 일들을 소재로 삼았으니 당연히 인기가 없지 싶지만, 암튼 나와 울 엄마는 주말 저녁 밥먹고 나서 잠시 쉬는 동안 외할머니를 떠올리게 만드는 답답한 구세대 드라마를 계속 보지 않을까 싶다. 울 외할머니의 인생은 일제 강점기에 남편과 이별한 이후 단 한순간도 아름답게 피어난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과연 장소심 여사와 하영춘 여사에겐 참 좋은 시절이 오긴 오려나.. 그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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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이야기

추억주머니 2012. 1. 20. 21:53

할아버지, 할머니가 생전해 해주시던 이야기들이 나는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한일합방되던 해와 그 이듬해 이북에서 태어나 해방을 맞고, 만주 생활을 거쳐 한국전쟁을 겪고 90년대까지 사신 두분은 세상의 급격한 변화를 개인의 역사로 지니고 계셨다. 물론 그 나이대의 어르신들이 다 그러했겠지만 말이다. 할아버지가 젊어서 기운이 장사라 단오날 씨름대회에서 이겨 황소를 탔다는 이야기, 할머니가 꽃가마 타고 몸종까지 데리고 시집오던 이야기, 손기정 옹이 바로 이웃에 살았는데 뜀박질을 정말 잘해서 노상 심부름을 시켜먹었다는 이야기, 만주에서 여각하며 돈을 막 궤짝으로 벌어들였는데 밤마다 돈 세기가 싫어 큰고모 둘이 서로 미뤘다는 이야기, 부산으로 피난 내려와 다른 사람들처럼 집 살 생각은 안하고 곧 고향 돌아갈 거라 여겨 그 많은 식구가 여관에서 지내며 갖고 온 돈을 다 탕진했다는 이야기, 결국 평생 한량으로 사신 할아버지 대신 할머니가 광주리 이고 나가 생선장수를 하며 생계를 꾸렸던 고생담...

할아버지, 할머니가 장수하신 덕분에 서른살 무렵까지 두분의 옛날 이야기를 되풀이해 들으며 나는 우리 조부님 세대가 아마도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살지 않았겠나 생각했다. 하지만 부모님 세대의 이야기를 들어보아도 드라마틱하기는 마찬가지다. 두분 역시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열살 무렵 전쟁통에 피난살이 했던 기억을 갖고 있으며, 라디오와 전축에 이어 흑백TV와 컬러TV, 자동차, 컴퓨터 따위의 등장을 지켜보셨다. 젊어선 지금은 사라진 전차를 타고 다니며 통학 및 데이트를 했다고 하고, 서울이라도 동네가 높아 상수도가 들어오지 않아, 부모님은 결혼 이후에도 한참 물을 지게로 길어다 먹고 살았다고 전한다. 또 울 엄만 공병호 타자기라나 뭐라나 해서, 국내에서 최초의 국가공인 타이피스트 자격증을 딴 몇 명에 속한 덕분에 일터에서 콧대높은 '미쓰 리'로 불리며 그 옛날 출산휴가와 복직을 거듭하며 아이 셋을 낳을 때까지 10년도 넘게 검찰청엘 근무했다고 들었다. 타이피스트들이 서류를 타이핑해주지 않으면 사건을 못넘긴다나 뭐라나. 그때 엄마의 흑백사진을 보면 머리 위쪽에 '후까시'를 잔뜩 넣어 부풀리고 아랫머리를 밖이나 안으로 살짝 꼬부려 '고데'(일명 '소도마끼'라고 하던가?-_-;)를 한 모습이다. 그땐 일주일에 한번 머리를 감고 월요일 아침 일찍 미장원엘 가서 그 머리를 하고는 얌전히 자면서 일주일을 버텼다나! 

엄마는 옛날부터 TV를 보다가는 뉴스에 얼굴을 비치는 유명 정치인들을 가리키며, 저 사람이 그때는 '새파란 검사보'였다는 둥, '부장검사'였다는 둥 알은체를 했다. 막내 낳고 퇴직을 했으니 일을 관둔지가 40년도 넘었는데, 엄마는 그때 검찰청 동료 아줌마들과 아직도 연락하고 만난다. <딸아들 구별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당시 국가정책을 무시하고 셋이나 애를 낳았다며 주변의 눈치를 꽤나 받았다는데, 엄마는 막내를 낳아 아들이 둘 되니까 그제야 마음이 턱 놓이더라고 했다. 이왕 산아제한 정책 무시한 거 딸 하나 더 낳지 그랬느냐고, 엄마가 아플 때마다 나는 계속 툴툴댔다. 아들들은 다 소용없고(!) 딸 하나는 너무 불리해!

실제로 어린 시절 내 친구들은 형제들이 대부분 많아서 보통 네다섯은 되었다. 제 밥 그릇은 지가 알아서 쥐고 태어난다면서. 그런 친구들 집에 가보면 우리 할머니가 내 이름 부를 때 고모들 이름을 먼저 두어번 부르고 나서야 성공하듯, 친구네 엄마도 자식들 이름을 부를 때 몇번씩 헷갈려했다. 울 엄만 그러는 일 없던데. 어쨌든 얼마전 <무한도전>에서 추억의 골목놀이가 종류별로 나오며, 맨 마지막에 엄마들이 저녁밥 먹으라고 골목에서 노는 아이들을 하나씩 불러들여가는 모습에 괜히 가슴이 짠했다. 요즘엔 그렇게 동네에서 뛰노는 아이들도 없고, 엄마들이 골목어귀에서 "OO야 밥먹어라!"고 소리치며 아이를 찾는 일도 더는 없으니 말이다. 대신에 학원 간 아이에게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거나 문자를 보낼 뿐...

더불어 내 나이와 역사도 만만칠 않음을 느낀다. 내 어린 시절 사진은 거의 흑백사진이다가 열살 무렵에야 겨우 컬러사진이 등장할 정도니 말해 무엇하리. 그뿐인가, 나도 동네를 돌아다니던 물지게, 똥지게의 기억이 어렴풋하게나마 남아있고 ㅠ.ㅠ 나무로 짜인 장식장에 들어 양쪽으로 문을 드르륵 열게 되어 있던 흑백TV가 집에 생겨나, 학기초 <가정생활환경 조사서>에 드디어 '텔레비죤' 항목에 표시할 수 있게 됐음을 기뻐했던 기억이 있다. 누런 육성회비 봉투의 추억이 없나, 교복자율화 세대라서 사복입고 고등학교엘 다닌 경험이 없나, 7,80년대 이야기가 나오면 모르는 게 하나도 없다. ㅠ.ㅠ 대학시절 좀 깨어 있는 친구들은 교양과목으로 컴퓨터 기초를 수강했지만, 나는 거금주고 산 <클로버> 타자기만 믿고 신기술을 외면했다. 먹끈이 돌아가고 자판을 아주 세게 쳐야 글씨가 새겨지는 수동 타자기만 사용해보다가, 회사에 취직해 처음 전동타자기를 접하고는 너무 힘주어 치는 바람에 한번에 알파벳이 세개씩 다다다 쳐져서 당황했던 건 또 어떻고! 사무실에 컴퓨터가 등장한 건 두번째 회사로 옮긴 이후였고, 그 뒤로도 한참이나 나는 주로 수십 종류의 서류양식 인쇄물에 기안서, 보고서, 영업계획서 따위를 손글씨로 쓰느라 끙끙대야 했다.
 
컴퓨터에 그나마 좀 익숙해진 건 90년대 중반이었던 직장생활 막바지. 개통하는데만 당시 돈 150만원쯤 들었던 무전기 만한 모터로라 휴대폰과 '임원진' 자동차에만 부착되어 있던 카폰을 신기해하던 나도 그 무렵 공중전화 옆에서만 통화가 되는 <시티폰>을 거쳐 PCS폰을 개통했다. 그때부터 썼던 번호를 3년전까지도 고수했으니 참 놀랍다. 그간 바꾼 핸드폰은 또 몇개나 될까. +_+ 아주 어릴 땐 집에 전화도 없어서 10원짜리 챙겨들고 공중전화 걸러 나가 까치발을 들고 다이얼을 돌렸는데, 이젠 거리에서 공중전화를 보는 것조차 힘이 들다. 아버지 학교로 전화를 걸면 친절한 교환수 언니들이 자리 비운 아버지를 찾아 이리저리 전화를 돌려 어떻게든 연결해주었고, 교복 입고 놀러가면 아버지가 교환실에 넣어놓고 퇴근시간까지 기다리게 했었다. 그러면 교환수 언니들은 간식으로 중국집에서 군만두랑 잡채밥을 시켜주었는데, 그 때 먹은 잡채밥이 어찌나 맛있었던지 아직도 잡채밥은 중국집 음식에 대한 나의 판단 기준이 되었다. ^^; 극장 간판화가, 버스 차장과 더불어 교환수도 이젠 오래전에 사라진 직업이다.

이웃 블로그에서 공포 영화 <캐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한 이야기지만, 내가 어릴 땐 골목 담벼락에 주르륵 영화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공포영화는 예고편도 못보는 겁쟁이라, 빨간 피가 주르륵 흘러내릴 것만 같은 글씨체로 쓰인 <캐리> 포스터가 벽에 붙어 있는 골목은 잘 지나지도 못했다. 방학이면 꼭 종로에 데려가 <로보트 태권브이> <똘이장군> <칠칠단의 비밀>따위의 만화영화를 보여주고 짜장면과 탕수육을 사주시던 삼촌 덕분에 나의 형제들은 꽤 어려서부터 단성사, 피카디리, 명보, 스카라, 국도, 대한 극장 같은데로 영화를 보러 다녔다. 외화의 등장인물까지도 거의 실물과 똑같이 그린 극장 간판이 걸려있던 시절이었다. 시내 개봉관 극장간판은 참으로 사실적인데, 동네 3류극장 쯤 되면 배우 얼굴을 잘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극장간판 그림의 질이 달랐던 것도 기억난다. 오랜 독재 끝에 총맞아 죽은 대통령과 계엄령을 겪은 것이 중학생 때이니 참 나도 오래 살았구나 싶어 입만 열면 자꾸 옛날 이야기가 나온다. 꼰대스럽게도 아, 옛날엔 말이지... 그러면서. @.,@

굳이 호랑이 담배피우던 시절의 민담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원래 그냥 지난 이야기 회상을 좋아하는 것도 같다. 아직 어린 조카들도 자신의 '옛날' 이야기 듣는 걸 좋아한다. 너 어릴 때 이러저러했노라고 걔들은 기억도 못하는 아기 시절 에피소드를 들려주면, 또, 또, 또... 그러면서 자꾸 옛날 이야기를 들춘다. 생각해보니, 어떤 시대를 살든 어느 세대에 속하든 인간의 수명이 워낙 길어 평생 따져보면 누구나 드라마틱한 삶과 역사를 겪을 수밖에 없을 듯하다. 내가 <소년중앙>과 <어깨동무> 같은 어린이 월간지를 보던 시절 21세기엔 쉽사리 우주여행을 다니고 다른 행성의 우주인과 교류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했다. 그 만큼은 아니지만 세상은 참 많이 변했고, 조카 세대가 살아가는 세상 또한 그만큼 변해 나중엔 오늘의 현실을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로 회상하게 될 것이다. 나의 남은 생엔 또 어떤 사건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남은 날에서 오늘이 제일 젊고 팔팔한 순간이라는 말이 새삼스러운 걸 보면 확실히 내가 중년은 중년이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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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개의 봄

삶꾸러미 2011. 10. 18. 20:50

우울증이 심해지면 어김없이 반복되는 엄마의 자학 레퍼토리 가운데 하나는 쓸모없는 자신을 어디에든 '갖다 버리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매달 후원금을 보내시던 불교 간행물 <연꽃마을>에서 운영하는 요양시설을 콕 찝어서 그리로 보내고 너는 자유롭게 편히 살라는 말을 하신 적도 있다. (그러나 무슨 연유인지 얼마전 엄마는 얼마 되지도 않는 월 후원금 자동이체를 끊어버렸다. ㅋㅋ) 그 말은 곧 엄마가 가장 피하고픈 상황이 어딘가에 버려지는 것이며, 낯선 곳에 버려지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깃든 투정을 반어법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노년이 되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칠순을 넘기면서 엄마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치매다. 얼마 전엔 나 몰래 보건소에서 운영하는 노인건강관리 프로그램에서 치매검사도 하고 왔단다. 한달에 한번 꼬박꼬박 정신과의와 상담을 하고 우울증 약을 먹는데도 안심이 되질 않았던 모양이다. 다른 건 다 잘했는데 단어 세 가지 기억했다 나중에 말하기 문제를 하나도 못 맞혔다면서 아쉬워하긴 했지만, 검사 결과 '양호' 판정을 받아온 엄마는 자기 치매 아니라면서 몹시 기뻐했다. 

가끔씩 내가 엄마에게 구구단을 외게 시키고, 불쑥 덧셈 뺄셈 문제를 내는 이유도 자꾸만 깜빡깜빡 잊는 건망증이 치매 초기증상일까봐 벌벌 떠는 엄마를 안심시키기 위함이다. 헌데 멀쩡한 젊은 사람들도 잠 잘 못자고 컨디션 안좋으면 말도 헛나오고, 구구단은커녕 단순한 셈도 못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니 일조량 떨어지면서 해마다 몹시 불안불안 조마조마하게 넘기는 가을에 접어들며 심신의 컨디션이 약간 떨어진 엄마가 불면과 건망증을 잠시 겪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심지어 나는 잠 잘 자고 컨디션 좋을 때도 암산이나 돈계산 같은 숫자와 관련된 사고는 단순한 것조차 잘 하지 못하며, 가끔씩 손에 멀쩡히 들고 있는 차키나 휴대폰을 찾아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는 인간이다. 치매초기를 의심하려면 차라리 나를 의심해야지, 수십년 전 사건부터 쓰레기 배출요일까지 나보다 더 잘 꿰고 있는 엄마는 염려할 게재가 아니다.

다른 노인들은 청년처럼 펄펄 뛰어다니실 나이인 71세에 울 엄마가 너무 엄살(?)을 떠는 것 같아 못마땅해 툴툴거리지만 내심 나도 겁이 나긴 한다.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아버지 세분은 앓지도 않으시다가 졸지에 쓰러져 운명하셨고, 꽤 오래  병을 앓으신 외할머니도 끝까지 정신은 거의 말짱하셨기 때문에, 우리 엄마도 자잘한 지병은 있으시되 정신은 끝내 혼미해지지 않기를 바라고는 있으나 건강에 관한 한 누구도 자신할 수 있는 부분은 없다. 게다가 노인성 우울증이 치매로 이어지는 확률이 꽤나 높음(치매 초기가 노인성 우울증으로 시작된다던가?)을 알기에 마음을 놓을 순 없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점은 울 엄마의 우울증이 45년 역사를 넘긴 지병이라 노인성 우울증과는 양상이 다르고 (사실 엄밀히 말해 울 엄마는 조울증이시다), 꾸준히 치료를 받아오고 있으며, 평생 비빌 언덕이셨던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오히려 더 잘 견뎌내고 계셔 4년째 심하게 앓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쨌거나 못된 딸년인 나는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우환에 대비하여 이미 방향도 세워놓았다. 요즘은 치매노인 부양을 돕는 데이케어 센터가 동네마다 생겨나기도 했으므로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는 버텨보도록 노력하되, 힘에 부친다고 생각되면 당연히 요양병원에 모실 거라고.
 
하지만 요양병원에 방치하고 더는 돌보지 않는 수많은 노인 환자 문제를 언론에서 접하거나 열악하기 짝이 없는 일부 요양병원의 운영실태에 관한 뉴스를 보게 되면 이미 일어나지도 않은 일, 저지르지도 않은 일에 대한 죄책감을 느낀다. 이는 마치 결국엔 우리 엄마도 치매에 걸릴것임을 당연시하는 태도가 아닌가 말이다. 80세 이상 노인의 30-40%가 치매를 앓는다는 통계를 온전히 믿는 건 아니지만, 어떤 상황이든 미리 온갖 가능성을 상상하고 미리 걱정하는 나의 태도는 자꾸만 최악의 상황을 미리 대비해두어야한다는 쪽으로 결론을 짓는다. 이런 생각을 엄마에게 내비친 적 없는데도, 엄마가 가끔씩 우울증이 도졌을 때 들먹이는 '내다 버려라' 레퍼토리를 보면 엄마는 당신 딸년이 능히 그럴 수  있는 '냉정한' 인물임을 미리 알고 두려워하는지도 모르겠다. 병증이 좀 나아지고 나면 다시 "엄마는 너 없이는 못산다"는 절박한 레퍼토리로 방침을 바꾸시는 것을 봐도 그런 쪽으로 심증이 굳어진다.

요양병원에 병든 부모 수발을 내맡기는 것을 '현대판 고려장'에 비유하는 세태에 우리 엄마도 나도 공감하고 있는 것 같다. 몇년전 중풍에 걸려 요양병원 신세를 꽤 오래 지고 있는 친구분을 더러 면회하러 다녀본 엄마도, 거동 못하시는 아버지를 요양병원에 모셨더니 물리치료와 집단생활 덕에 오히려 건강을 상당부분 되찾으셨다는 친구의 고무적인 이야기를 들은 바 있는 나도, 요양병원에 대한 거부감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그래도 자식이 직접 살뜰히 모시는 것만 하겠나, 하는 인습적인 사고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지인 한분은 10년째 거동 못하시는 어머니를 간병인과 함께 집에서 모시고 있다. 자기 어머니는 정신이 온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워낙 언사가 요란하시어 단체생활에 부적합하다는 것이 이유인데, 내가 보기엔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일주일에 한번씩 간병인이 돌아가는 주말에 꼬박 하루 혼자서 간병을 하고 나면 심신이 완전히 지쳐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면서 왜 그 힘든 끈을 놓지 않으려는지. 하기야 그분은 나 역시 자기 같은 상황이 되어도 절대 엄마를 요양원에 보내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나는 그 반대를 결심하고 장담하고 있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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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대야

추억주머니 2011. 5. 20. 23:21

온 집안 가득 대부분 옛날 살림살이로 들어찬 우리집.
창고나 다름없는 옷방 한 구석엔 엄마가 시집올 때 혼수로 해온 재봉틀이 아직도 있다. 아주 오래 전 방바닥을 죄다 뜯고 새로 난방용 파이프를 깔던 대공사를 했을 때, 나는 쓰지도 않는 그 재봉틀을 버리자고 주장했다가 혼만 났다. 반들반들한 까만색에 자개로 양쪽 문에 무늬를 넣어 키 큰 문갑처럼 생긴 발재봉틀은 의자를 놓고 사용해야 하는데, 어찌나 무거운지 어른 둘이 들기에도 만만칠 않은 애물단지다. 그 재봉틀로 엄마가 시집와서 옷감 끊어다가 어린 시누이들 옷도 만들어 입혔고, 온갖 낡은 옷 수선하고 20년 전쯤까지는 내 바지 길이도 잘라 박아주고 통짜 커튼이랑 식탁보도 만들었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효용 면에서나 공간 면에서 이젠 그만 버려야한다는 것이 당시 나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집안 개조 스트레스 때문에 병이 도져 거의 정신줄을 놓았던 엄마 등 뒤에서 아버지는 목소리를 낮춰 나를 나무랐다. 엄마 혼수품 중에 딱 하나 남은 재봉틀이 상징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물건인데 그러냐고, 우리가 함부로 버리고 말고 할 순 없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혹시라도 엄마가 스스로 버리겠다는 결정을 내릴 때까지 둬야한다고. 10년쯤 전에 내가 또 슬쩍 재봉틀 쓰지도 않는데 버릴까, 하고 물어봤을 때도 엄마는 니 마음대로 해라, 고 하라면서도 눈빛으로는 몹시 아까워하는 것 같았다. 엄마가 직접 만든 누렇게 바란 천덮개를 쓰고서 골동품 발재봉틀이 아직도 옷방 구석에서 온갖 짐에 눌려 있는 이유다.
 
정수기 청소를 하러 오는 분들이 작년부턴가는 물을 받을 통까지 들고 오지만, 그 전까지는 우리에게 물을 받을 커다란 통을 달라고 했다. 그래서 옛날에 엄마가 간단히 김치 담글 때나 만두를 빚을 때 쓰던 대야 두개(하나는 둥근 동심원 무늬 요철이 있는 양은[?] 재질이고 하나는 파란색 플라스틱이다)는 싱크대 밑에서 먼지를 쓰다가 두달에 한번씩 요긴하게 쓰였다. 헌데 이제는 그 두달에 한번 쓸모가 없어진 거다. 어차피 김치는 담가먹지 않기로 했으니 정수기 청소용으로도 필요 없게된 그 대야는 없애도 되는 물건이란 생각에 난 또 슬쩍 버려도 되겠느냐고 엄마에게 물었다. (요즘 잘 못버리는 지병 자가치료를 시도하는 중이다 ㅎ) 어차피 크기가 커서 재활용품 버리는 날 몰래 들고나가는 건 불가능한 물품이다. 엄마는 또 니 마음대로 해라, 고 말은 하면서도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고는 파란 대야의 사연을 들려줬다.

둘(울 엄마와 아버지)이 벌어 총 열 식구 먹여살리느라 워낙 살림이 빠듯하고 정신이 없던 가난한 집안에선 첫손녀딸 백일이 오는지 가는지 관심도 없었다. 엄마는 섭섭함을 감추고 주말에 몰래 나가 백일사진이나 찍어주어야지 생각했는데, 그날 아침 일찍 출근도 하기 전에 외할머니가 뜨끈뜨끈한 수수팥떡을 이고 오셨단다. 나의 백일 떡을 문제의 그 파란 대야에 담아서. 심지어 새벽같이 부처님 앞에 올렸다가 날라온 거였다나. (나의 우상이자 영원한 1순위 천사표 친할머니가 나의 백일도 몰랐다는 놀라운 반전에 잠시 멍했다가, 그런 일에 꽁하는 내 자신이 웃겨서 피식 웃었다.)

그냥 내다버리기엔 너무 멀쩡하다고 인정;; 이러다 평생 끼고 산다

'나쇼날'이라서 물도 잘 안들고 플라스틱도 튼튼하고 좋다고, 요샌 그런 플라스틱 나오지도 않는다고 말하는 엄마 앞에서 파란 대야를 뒤집어보니 정말로 영어로 National이라고 적힌 마름모꼴 로고 위에 역시나 영어로 National Plastic Co., Limited라고 둥글게 찍혀 있었다. 나는 슬며시 다시 대야를 싱크대 밑으로 밀어넣고 일어섰다. 무려 사십여년 전 내 백일에 맛있는 수수팥떡을 담아 외할머니가 이고 오신 대야라는데... -_-;
이런저런 의미와 추억을 이유로 결국 나는 아무것도 버릴 수 없는 것인가, 한숨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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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김치

식탐보고서 2011. 5. 13. 01:53

음식으로 환기하는 기억에 대해서라면 프루스트가 제일 유명하겠지만, 프루스트가 처음 발견 한 건 아니었을 것 같다. 유독 식탐이 강하지 않은 사람도 음식과 연결되어 추억으로 남는 게 어디 드문 일인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친구들에게 옥수수와 동격으로 떠오르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옥수수 노점상은 절대 지나치지 못하고 꼭 사먹어야 직성이 풀리는데다가, 굳이 먼지 풀풀 나는 길거리에서 와구와구 뜯어먹으며 행복해했기 때문이라나.

계절따라 제철음식을 찾아먹는 일도 원래는 가난과 필요가 낳은 습관이겠지만, 그 습관이 반복되어 세대를 거듭하다 결국 전통이자 추억이 되었을 것이다. 봄이 되면 진달래 따다 부쳐먹던 화전이랑 쑥버무리 같은 게 관련 인물들과 같이 떠오르는 식이겠지. 음식이 그리운지 사람이 그리운지 콕 찝어낼 순 없어도 그냥 그 음식을 먹으면 마음 한 구석이 달래지는 기운 같은 게 있다. 그걸 못해 결핍되면 못내 아쉽고 공허해질 테고.

얼마전부터 자꾸 오이소박이가 먹고 싶었다. 그냥 흔한 오이소박이가 아니라 우리 외할머니표 오이소박이. 보통 오이소박이라고 하면 오이를 서너토막 잘라 한쪽에 칼집을 내 부추양념 소를 넣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외할머니표 오이소박이는 달랐다. 부추는 지저분해진다고 넣지 않는다. 대신에 조선오이 끝동 부분을 손가락 두어마디 쯤 잘라내 채를 썰어 양념에 버무려 소를 만든다. 오이는 통째로 길게 가운데 칼집을 넣어 소를 넣는둥마는둥하게 넣는다. 어려서 엄마가 만들어준 오이소박이의 경우 부추 소는 죄다 긁어내고 오이만 먹었는데, 할머니표 오이소박이는 양념을 긁어내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다. 전국방방곡곡 풍광 좋은 사찰로 성지순례와 방생 다니실 때 수십년 간 모아온, 납작하고 큼지막한 돌멩이로 눌러놓았다가 그 돌멩이째 우리집으로 날라오는 할머니표 오이소박이는 어찌나 아작아작 시원하고 깔끔하게 맛있는지 그야말로 밥도둑이었다. 

말년에 꽤 오래 모시고 살며 병수발을 들었던 막내이모가 젓갈 없이 소금으로만 깔끔하고 슴슴하게 맛을 내는 할머니표 김치는 그럭저럭 전승하는데 성공을 거두었지만, 오이소박이만은 아무리 애써봐도 도저히 그 맛을 낼 수가 없다고 손을 들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입퇴원을 반복하던 마지막 무렵에도 손수 오이소박이를 담가 자식들 집집마다 나눠주셨다. 울 엄마는 칠순에도 이미 입맛이 무뎌져 간을 잘 모르는데 할머니는 여든다섯에도 어떻게 한결같은 김치맛을 내셨는지 불가사의하다. 이모는 할머니 때랑 똑같이 가락동 시장에 가서 늘 사던 그 집에서 오이를 사다가 똑같이 한다고 해봐도 맛이 나질 않는다며 속상해하신다. 그래봐야 어쩌겠나.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함께 사라져버린 할머니의 그리운 손맛 여러가지 가운데 하나로 아쉬워할 수밖에.

토막썰기를 해서 칼집을 넣은 오이소박이도 밥상에서 잘라 먹으려면 꽤 불편한데, 통째로 길게 오이소박이를 담그면 사실 그릇에 낼 때부터 아예 잘라야 하므로 더욱 성가시다. 그런데도 할머니가 평생 그 방법을 고수하셨던 걸 보면 그래야 제맛이 나기 때문일 것이다. 하우스에서 재배한 오이가 사시사철 장에 나오긴 하지만, 할머니가 거의 열흘 간격으로 꼭 스무개, 서른개씩만 담가 보내던 오이소박이 행렬이 시작되는 건 확실히 요맘때였던 게 틀림없다.  뜬금없이 눈앞에 할머니표 오이소박이가 어른어른거리면서 먹고 싶어진 걸 보면 말이다.

반찬코너에서 한 그릇 사다먹어볼까도 생각했지만 고춧가루 범벅에다 내가 싫어하는 당근까지 채썰어 소를 박은 꼬라지를 보니 당최 내키질 않았다. 먹고 싶은 것에 대한 열정 하나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나는 결국 오이 여섯개를 사다가 직접 오이김치를 담그기로 했다. 어차피 외할머니표 오이소박이의 맛을 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 처음부터 먹기 좋게 오이도 조각조각 잘라 절이고 부추도 넣었다. 오이김치 요리법을 찾아 참고한 대로 멸치액젓도 넣고 매실청도 넣어(둘 다 할머니는 절대 안 넣으셨을 양념이다) 대충 버무렸다. 당연히 할머니표 오이소박이와는 아주 동떨어진 오이김치가 탄생되었다. 버무리자마자 한 보시기 담아 우적우적 밥 한그릇을 다 먹고 나니 그래도 마음 속 결핍이 어느정도 채워진 듯했다.

음력사월이 시작되면서부터 외할머니가 부지런히 오이소박이를 담가 보내신 이유는 물론 잘 알고 있다. 이가 부실한 맏사위가 배추김치보다 오이소박이를 훨씬 더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매운 것도 잘 먹지 못하는 아버지에겐 양념과 고춧가루를 많이 넣지 않아 말간 생김새의 오이소박이가 딱이었다. 그리고 마침 아버지의 생일은 음력 사월 끄트머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돌아가신 분의 생일은 이제 제삿날이라는데 나는 4년이 지난 지금도 요맘때면 오이소박이를 먹어야 하는 습관이 밴 몸을 지니고 있으니 참 징하고 서글프다. 할머니랑 아버지가 겨우 오이소박이가 먹고 싶어서 그리움 타령이냐고 타박하실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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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그림

추억주머니 2011. 3. 27. 16:02


풀 그림 이야기가 나오면 내겐 또 남다른 사연이 있다. 예전에 미니홈피에도 밝혔던 이야긴데, 풀로 그린 조카 그림도 하나 더 있겠다 그 추억도 마저 상기해야겠다. 부모님이 동생들을 데리고 분가하시고 나서도, 나는 초등학교 2학년 중간 무렵까지 본적지이자 출생지인 ***동 집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들과 살았다. 연년생인 남동생과 입학 터울을 둘 겸,
생일이 여름인데도 제법 똘똘하다는 것만 믿고 제 이름밖에 쓸 줄 모르는 나를 덜컥 7살에 국민학교에 입학시켜놓고, 할머니는 매일 전교에서 제일 작은 1학년 학생인 나를 업어나르셨다. 울 엄마는 또 첫딸 입학을 위해 제일 비싼 최고급 책가방을 사주었다는데 (가죽이었는지 아닌지 기억나지 않지만 암튼 빨간색이었던 그 가방은 무척 재질이 두꺼웠고 열고 닫기 불편했다) 그게 또 엄청 무거워, 할머니가 보기엔 책가방 무게 때문에 애가 뒤로 넘어갈 것 같았단다. ㅋㅋ

늘 교문 앞에서 수업 끝나기를 기다리던 할머니가 보이지 않던 어느 날, 나는 친구들과 가방 들어주기 가위바위보를 했다. 지금도 그때도 가위바위보에 젬병인 나는 당연히 꼴찌였다. 책가방을 앞 뒤로 매고 양손에도 하나씩 친구 책가방을 들었다. 꼴찌에서 두번째는 신발주머니를 모아 들었다. 낑낑대며 학교 앞 언덕길을 내려가는 나를 저 멀리서 발견한 할머니는 고래고래 소리를 치시며 달려왔다. 힘 없는 아이 괴롭히는 나쁜 놈들이라고... 친구들의 엉덩이까지 한대씩 퍽퍽 때려준 할머니는 내가 옆에서 괴롭힌 게 아니라 그냥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것 뿐이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러고도 분에 못 이기셨는지 할머니는 울먹거리는 친구들에게 집이 어디냐고, 앞장서라고 말씀하셨다. 애들 부모에게 일러 다시는 손녀딸을 괴롭히지 말라고 당부할 작정이었던 거다. 그래서... 화난 그 아이들은 한동안 나와 놀아주지 않았다.  

한글도 못 떼고 들어가 이해력이 많이 떨어졌던 나는 1학년 미술시간 준비물을 알려준 선생님의 설명을 오해했던 모양이다. 미술책을 미리 들춰보았다면 그런 실수는 하지 않았겠지만, 어린애가 뭘 알았겠나. 늦둥이로 낳은 막내딸도 거의 다 키워놓아 국민학생의 학부모 노릇에 서툴렀을 할머니, 할아버지도 마찬가지고. 어쨌든 "풀에 물을 들여오라"는 선생님의 설명을 나는 집에 가서 그대로 전했고, 할머니, 할아버지는 고심 끝에 누렇게 말라붙은 (아마도 채 신록이 우거지기 전인듯..) 풀들을 마당에서 따다가 정성껏 물감으로 이런저런 색을 칠해 물을 들여주셨다.

다음날 곱게 '물들인 풀'을 갖고 학교에 간 나는 친구들이 다 나와 달리 '찍어 쓰는 풀통'에 물감을 풀어 색색깔로 물들여온 걸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이 사건은 어린 나에게 제법 큰 충격이었던 듯하다. 부모님 슬하로 옮기느라 전학을 했던 이후 국민학교는 몰라도, 입학한 국민학교 시절의 기억은 거의 사라졌는데도 책가방 사건과 더불어 이 사건은 또렷이 남아있으니 말이다. 그날 나의 담임이셨던 '호복순' 선생님(이 이름도 절대 잊혀지질 않는다^^)은 우는 나를 달래시곤 옆 친구에게 색깔풀을 나눠주라 하셨고, 미술시간은 친구의 준비물을 빌어쓰며 무사히 넘어갔다.

정민공주에게 내가 언제 이 사연을 들려주었는지 모르겠는데, 어린 정민이에게도 몹시 인상적인 이야기였던 듯 가끔씩 불쑥 고모 어렸을 때 미술시간에 '물 들인 풀' 준비물을 잘못 해간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면서 선생님이 왜 준비물을 잘못 해간 고모를 혼내지 않았는지, 친구는 왜 암말 없이 자기 물감을 나눠주었는지(자기 그림 그릴 것도 모자랄지 모르는데!) 꼬치꼬치 묻곤 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려준 날은 어김없이 풀을 쑤어 물감 풀을 만들어 바쳐야 했고.. -_-;

2007년 1월. 장 뒤뷔페의 우를루프 정원 전시회를 함께 다녀온 날도 공주는 위대한 예술가에게 영감을 받았는지 물감풀을 청해 풀 그림을 시도했다. 파란색 풀과 빨간색 풀 두 가지나 만들어야 했는데 찹쌀가루(마침 밀가루가 집에 없었다)를 아낀 탓에 풀이 너무 묽어 다른 때보다 작품엔 열악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작품이 마르지도 않은 상태에서 개구쟁이 동생이 밟고 지나가는 바람에 사진으로만 남은 공주의 풀 그림을 천재 시리즈에 넣을까 말까 하다가 뺐는데 결국 이렇게 올리게 되는군.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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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느질

놀잇감 2010. 12. 11. 13:31
주말이랍시고 또 일이 하기싫어져서 방바닥을 뒹굴며 어른들의 장난감 아이폰이랑 씨름중이다.

11월에도 괜히 딴짓하고 싶어서 밤마다 바느질에 힘썼던걸 자랑하지 않았으니 이제라도 올려야지. 블로그에 포스팅하려고 사는 인생인가 싶어 민망하지만 이런 거 자백하고 나면 스스로 한심스러워져서 채찍질의 효과가 좀 있다. ㅋㅋ

우선은 왕비마마가 할머니 같아보인다고 질색을 하는 울 할머니의 유품 스웨터를 살짝 리폼했다. 단추만 바꿔 단 것도 리폼이라 쳐준다면.... 40킬로그램도 안되는 체중의 할머니가 입으시기엔 솔직히 옷도 너무크고 묵직하다. 셋째고모가 핸드메이드에다 순모라고 엄청 생색내며 선물했기 때문에 할머니가 어쩔수없이 몇번 입으시고는 노상 간수하는데 더 신경을 쓰셨고, 그래서 20년쯤 묵었어도 아직 새것 같다. 원래는 털실로 짜서 덧씌운 단추가 달려 있었는데 나무느낌의 단추를 사서 바꿔 달았다. 이렇게만 해도 할머니옷 얻어 입은 느낌은 좀 덜나지 않을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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켁 사진 방향이 안돌려지누만 ^^;

두번째 바느질도 할머니와 관련이 있다.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생신에 넷째고모가 이불을 선물했었다. 집집마다 풍습이 달라서 고인의 물건을 다 태우거나 없애는 것이 원칙이라는 얘기도 있고 특히 이불은 반드시 살라버려야 한다는 말도 들었지만 난 그게 잘 이해되지 않았다. 고인의 유품을 간직하며 추억을 곱씹는게 뭐가 나쁜가? 특히나 올빼미인 내가 잠자러 들어가면 그때 할머니가 곧 일어날거니까 당신자리에서 자라고 덮어주시던 이불인 것을...
해서 봄가을에 10년 넘게 애용했더니 드디어 한쪽 가장자리가 헤졌다. 버려야하나 고민했었는데 막상 버리자니 다른데가 너무 멀쩡하고 대용량 쓰레기봉투값도 아까운 거다. (이럴 땐 또 지지리 궁상 ㅎㅎㅎ) 그래서 천을 끊어다가 덧씌워 꿰매보자고 결심한 게 작년이었다. 사실 그러고는 잊고 있었는데 요가학원 근처에서 발견한 바느질 부자재 가게에 저 스웨터 단추 사러 가보니 아 글쎄 천도 파는게 아닌가! 동대문 가야하는줄 알고 1년도 넘게 미루기만 했었는데... 그래서 그날로 득달같이 천을 잘라 헤진부분을 감쪽같이 덧씌웠다. 완성품을 본 정민공주가 예쁘다고 아래쪽도 마저 하라더라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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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폭풍 바느질에 힘쓰다보니 두려울 것이 없어졌고 동네 구두수선 아저씨가 가죽이너무 부드러워 자긴 못고친다고 하는 바람에 찢어진 채로 그냥 들고다니던 가방을 손수 꿰매겠다는 도전의식이 불타올랐다. 마침 택에 달렸던 가죽 한조각도 안버리고 두었더라고!! 안쪽 천을 튿어서 바느질을 버텨줄 천도 풀칠해 넣으며 스스로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삭바느질로 전생에 먹고 살다가 갖바치 노릇도 했던 것일까 ㅋㅋㅋ 아무래도 가죽이라 바늘땀은 비뚤빼뚤하지만 이로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가방이 탄생했으니 더욱 감격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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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헉... 이렇게 복잡하고 긴글을 휴대폰으로 쓰다니 나도참 못말린다. 오타는 얼마나났을지 모르겠으나 다시는 이런 삽질을 방지하는 의미로 컴퓨터로 수정하지 않겠음.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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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가시

투덜일기 2010. 10. 29. 20:23

밥먹을 때 혼자 생선가시를 발라 먹기 시작한 게 언제인지는 당연히 잘 기억나질 않는다. 하지만 대충 짐작컨대 열살 언저리가 아니었을까? 할아버지의 호통 교육으로 젓가락질은 국민학교 이전에 이미 통달한데다, 밥상머리에서 오래도록 엄마의 시중을 받기엔 두 동생이 있어 어려웠을 테고, 그때도 이미 잘난척 했던 나의 성격이 그런 걸 허락치  않았을 것 같다. 엄마가 살쪽을 우리에게 나눠준 뒤 당신은 남은 살에서 생선가시를 대충 발라서 입안에 넣고 마구 씹다가 남은 가시를 뱉어내는 방식을 어려서도 몹시 못마땅해 했던 기억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남동생들은 머리가 굵어진 뒤에도 생선을 먹을 땐 꼭 엄마가 거들어줘야 했다. 막내는 아예 비린것을 싫어해서 웬만해선 젓가락도 대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억지로 먹이려고 자꾸 밥그릇에 생선살을 올려주는 편이었고, 큰동생은 생선가시를 바르는 게 아니라 생선 몸통을 헤쳐놓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영악한 나는 생선 종류가 달라지더라도 중간 뼈대와 등, 배에 난 가시의 구조를 알면 완벽하게 생선살만 발라먹는 게 어렵지도 않은데 다들 왜 헤매는지 도대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다행히도 착한 올케들은 생선반찬을 식탁에 올릴 때마다 어린 조카들 뿐만 아니라 남편을 위해서도 일일이 가시를 발라 살만 먹기 좋게 마련해주는 성품이다. 그게 습관이 된 덕분에 심지어 같이 밥을 먹을 땐 우리 모녀를 위해서도 가시를 발라주는 지경. 애들과 남편을 위해 돌아가며 생선 가시를 발라주느라 생선을 굽거나 조리는 날엔 정작 자기는 잘 먹지도 못한다고 푸념하면서도, 지켜보면 노상 그러고 있다. 엄마도 위대하지만 아내도 위대함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가끔 나도 밥상머리에서 일손을 돕느라 조카들에게 생선살을 발라 숟가락에 얹어주다 보면, 녀석들이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정말로 젓가락을 쉴 수가 없고, 내 입으론 생선살 한톨 못들어간다.

물론 이젠 나에게도 밥상머리에서 늘 생선가시 바르는 시중을 들어들어야 하는 왕비마마가 계신다. 과거에도 그랬듯 왕비마마는 대충 큰 가시만 발라낸 생선 살을 마구 씹다가(잔 가시는 칼슘 섭취를 위해 먹어도 괜찮다고 주장하신다) 걸리는 가시가 있으면 뱉어내는 분인데, 그러다 꼭 가시가 목에 걸려 켁켁거리며 괴로워하시기 때문에 나는 절대 못하게 말린다. 일주일 단위로 병원에 다닐망정 생선가시 빼러 응급실 가는 일은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식단을 구체적으로 짜서 해먹고 사는 건 아니지만, 일주일에 한두번은 꼭 생선을 굽거나 조려 상에 올리는 편이라 어느새 생선가시 바르는 일도 나름 주간행사다. 

돌아보면 굴비를 좋아하셨던 할머니를 위해 말년에 생선가시를 바르는 일도 내 몫이었던 것 같다. 내가 어렸을 땐 당연히 할머니가 생선 살을 발라 내 밥숟갈에 얹어주셨겠지만, 눈이 어두워지신 할머니를 위해선 나나 엄마가 할머니 밥숟갈에 굴비 살을 올려드려야 했다. 그러면 할머니는 당신은 됐으니 너나 어서 먹으라고 말씀하셨지만, 잔 가시 하나 없이 '성공적으로' 살코기만 할머니 숟가락에 얹어 드리며 나는 몹시 뿌듯하기만 했었다. 그런데 엄마를 위해 생선살을 바르는 요즘은 뿌듯함보다 서글픔이 앞서고 그래서 자꾸만 심술이 난다. 할머니를 위해선 꼭 숟가락에 생선살을 얹어드렸으면서, 엄마를 위해선 가시만 따로 발라 치워놓고 직접 집어 드시라고 하는 것만 봐도 태도가 다르다. 벌써부터 매사에 너무 의존적으로 만들지 않기 위함이라는 의도가 깔려 있기는 하지만, 그 밑바탕엔 엄마가 완전히 힘없는 '할머니'란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보가 녹아 있다. 

오늘 저녁에도 가시가 젤 없는 편인 삼치를 구워 먹으며 생각해보니, 내가 열살무렵에 생선가시 분야(?)에서 독립했다고 쳐도 엄마의 시중을 받은 게 10년이니 최소한 나도 10년은 군말없이 봉사해야 맞는 거다. 그 이후에도 계속 그런 봉사의 세월이 이어지면 감사할 일이고... 생선가시 때문에 툴툴대다 갑자기 철났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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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연습

투덜일기 2010. 7. 7. 22:29

예전에 친할머니, 외할머니 두분 할머니댁에 놀러가보면 혼자 계실 땐 언제나 방을 깜깜하게 해놓았다. 쓸데없이 전깃세 많이 나간다는 것이 그 이유였는데, 내 눈엔 그게 그렇게 청승맞게 보여 싫었다. 그까짓 전깃세 아껴봤자 얼마나 아낀다고, 토굴 같은 어둠 속에 혼자 앉아 있는단 말인가. 낮에도 방방마다 돌아다닐 때 꼭 불을 켜야 직성이 풀리는 데 습관이 들어버린 나는 특히 여름엔 어두워야 더 시원하다는 논리로 밤중에도 좀처럼 전등을 켜지 않고 어둠속에 앉아 TV를 보시는 할머니들이 의아했다. 백열등이야 오래 켜두면 온도가 올라간다지만 형광등이나 할로겐 램프는 온도와 상관 없다고 극구 설명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최소한 두 사람은 모여야 전등을 켜는 게 낭비가 아니라는 할머니들의 절약정신과는 다르게 요샌 나도 종종 어둠이 편한 걸 느낀다. 가만 보니 낮밤을 바꿔살면서 전등을 환하게 켜고도 책 앞엔 보조스탠드까지 켜야 눈이 덜 피곤한 직업의 반작용인 듯도 하다. 작업을 할 때나 밥을 먹을 때, 엄마와 둘이 한 공간에 있을 때가 아니라면 깜깜한 어둠속에 늘어져 취하는 휴식이 어찌나 달콤한지. 낮에도 방에 들어가면 꼭 전등을 켜야 마음이 놓이던 습관은 낮에도 눈부신 인공조명에서 자유로운 어둑어둑한 실내에 앉아 있는 쪽이 편한 느낌으로 변하는 중이다.

과거 외국엘 나가보면 호텔이든 친구네 집이든 화장실 빼곤 죄다 어둠침침 간접조명으로 대충 밝혀놓은 실내가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었고, 가끔은 미칠듯이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다. 전등 스위치를 올리면 하얗게 밝아지는 실내 조명에 내가 그만큼 익숙해 있다는 의미였다. 우리나라도 인테리어에 신경을 좀 쓴다 싶은 사람들은 '촌스러운' 중앙 전등을 없애고 집에도 백열등 같은 간접조명으로 아늑하고 가라앉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게 유행된지 오래다. 작업실이 있을 때는 가끔씩 나도 은은한 백열등 스탠드 불빛 속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커피를 마시며 괜한 폼과 분위기를 잡아보기도 했지만, 평소에도 늘 그렇게 살라고 하면 여전히 답답함을 느꼈을 게 틀림없다.

물론 지금도 나름 어둠 속에서 익숙함과 편안 느낌을 키워가고는 있지만, 채광창이 많고 공간이 툭 트인 집에서 살고 싶다는 로망이 변함없는 걸 보면 본래가 토굴형 인간으로 태어난 건 아닌 모양이다. 인공 조명을 더하지 않아도 낮엔 충분히 환하고 밤엔 충분히 어두운 자연스러움을 선망하는지도.

어쨌거나 요즘 밤중에 일하다 말고 물을 마시러 부엌에 나가면 이미 눈과 몸에 익은 어둠 속에서 정확히 손을 뻗어 물컵을 집은 다음 정수기에 대고 손의 감각만으로 물의 양을 짐작하는 놀이를 즐긴다. 조바심을 내서 너무 빨리 포기하면 안 돼. 그렇다고 물이 넘치면 곤란하지. 손끝의 감각을 믿어보는 거야. 차디찬 냉수가 찰랑찰랑 차오르는 선을 손가락으로 느끼다 재빨리 컵을 떼 단번에 컵의 8부까지 성공시키면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찰랑찰랑 물컵을 들고 길게 늘어진 선풍기 전선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조심스레 거실을 지나 짧은 복도를 건너 환한 방으로 무사히 돌아오면 퍽이나 큰 성취를 한 느낌. 이른바 나의 어둠연습이다.

나의 할머니들이 굳이 전등켜기를 마다하고 어둠을 즐긴 이유는 어찌보면 꼭 전깃세 절약 때문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어둠이 편하고 시원하다는 느낌을 확실히 알 것 같은 요즘처럼 더운 여름날엔 더더욱. 삶은 확실히 직접 겪어봐야 한다는 진리와 함께, 차츰 내가 예전 할머니들과 가까운 세대가 되어감을 실감한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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