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소 쌈닭

투덜일기 2010. 5. 16. 14:55

이 동네로 이사온 뒤 20년 넘게 단골로 다니던 세탁소를 등지게 된 건 작년이었다. 원래 세탁소 주인 아저씨가 말이 워낙 많고 수다스러워서 나로선 상대하기 좀 짜증났지만 세탁이나 수선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가끔 좁아터진 옷장 대신 철지난 옷을 대신 맡아주는 장기 보관소 역할도 오래 해왔고(봄에 겨울 옷 맡겨놓고 잊고 있다가 날씨 추워지면 찾아오는 식) 세탁물 다 되면 알아서 배달도 해주었으므로 작년의 사건만 아니었다면 단골을 바꿀 생각은 하지 않았을 터였다.

사건은 왕비마마의 바지 허리를 줄이는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재작년에 심하게 몸이 불어 바지를 새로 사야했던 왕비마마는 1년뒤 허리가 원래 사이즈로 되돌아오는 바람에 다시 바지를 줄여 입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나는 우선 왕비마마 바지 한벌을 세탁소에 맡기고는 허리를 1인치만 줄여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돈을 주고 찾아온 바지를 입어본 엄마는 바지를 덜 줄였나 아직도 허리가 크다고 불평을 했다. 잘 맞는 바지 허리폭과 맞춰보고 1인치 줄이기를 결정한 터라 그 바지에 대보니 정말로 그대로였다. 그럼 대체 어디를 줄이고 수선비를 받은 건가 살펴본 나는 기막히게도 바지 단을 1인치 잘라놓은 걸 발견했다.

나는 즉각 세탁소로 가서 바지 허리를 줄여달랬더니 왜 단을 잘랐느냐고 따졌다. 그랬더니 가뜩이나 말 많은 세탁소 아저씨는 펄쩍 뛰며 속사포처럼 내가 바지단 줄여달랬지 언제 허리 줄여달라고 했느냐며 나에게 잘못을 뒤집어씌웠다. 기.가.막.혀.서.원. 애당초 내가 엄마 바지를 내밀며 허리를 줄여달라고 했을 때, 그 수다쟁이 아저씨가 묵묵히 그러마고 일감을 받았을 리 만무했다. "바지 허리를 1인치나 줄이는 걸 보니 어머니가 살이 빠지셨나 보네. 운동이라도 하셨나 왜 살이 빠지셨을까, 하기야 저 아래 개천에 산책로 참 잘 만들어 놨죠? 나도 시간 나는대로 개천가서 운동하는데 왜 살이 안빠지나 몰라... 아가씨도 거기 가서 운동 좀 해요? 운동기구 잘 많들어 놨던데..... 어쩌고 저쩌고..." 그러면서 계속 말을 시키는 바람에 난 한참이나 귀를 닫고 있다가 마지막에 얼마인지 수선비만 묻고 돌아왔던 터였다.
그래놓고 내가 바지단을 줄여달라고 했다니! 내가 저런 이야기까지 하지 않았으냐며 정황을 설명해도 세탁소 아저씨는 막무가내로 내 잘못임을 주장했다.

다음날 득달같이 다시 수선한 엄마 바지를 배달온 아저씨는 자기는 절대로 잘못 듣지 않았으며 분명히 따님이 바지단을 줄여달라고 잘못 말을 했기 때문에 두번이나 수선을 했지만, 단골이고 하니까 수선비는 한번만 받겠다고 잔뜩 생색을 내며 거의 20분이나 떠들다가 돌아갔다고 했다. 마침 외출을 해 집에 없었던 나는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기가 막혔다. 따발총처럼 쏟아대는 아저씨의 수다와 주장에 엄마마저도 "혹시 니가 잘못 말했을 수도 있잖아..."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아무리 내 정신머리가 없을망정 허리 줄이러 가서 단을 줄여달라고 한단 말인가! 그럼 엄마 살빠졌나 보다는 얘기는 뭐고, 개천변에서 운동하는 얘기는 왜 나왔느냐고!

세탁물 맡기러 갈 때마다, 그리고 세탁물을 배달 올 때마다 뭐든 순순히 넘어가는 일 없이 시시콜콜 오만가지 이야기를 죄다 끌어붙여 수다를 떨어대며 내 시간을 축내온 S세탁소 아저씨에 대한 인내심은 그날로 끝장이었다. 자기가 실수를 했을 수도 있으니 어쨌든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라도 비쳤다면 나도 그냥 넘어갔겠지만, 그 아저씨는 자기 세탁인생 30년을 운운하며 그간 그런 터무니 없는 실수는 절대 한 적 없다고, 전적으로 내가 단을 줄여달라고 잘못 말했기 때문에 단을 줄인 것 뿐이라고 우기며, 나를 정신나간년으로 만드는데야 어떻게 참는단 말인가.

마침 작년에 원래 있던 S세탁소 건너편에 새로이 세탁소가 생겼던 터라 나로선 아쉬울 것도 전혀 없었다. 20년 단골 하나 잃어서 아쉬운 건 세탁소 아저씨 쪽일 거라 여기며(하기야 그쪽도 별로 아쉬울 게 없을 지도...) 보란 듯이 새 세탁소를 이용하고 있었다. 헌데 동네 세탁소는 세탁이 전문이고 원래 수선 쪽은 약하기 마련임을 감안하더라도 새로운 ㅎ세탁소는 수선솜씨가 너무 형편 없는 것이 문제였다. 단신의 비애 가운데 가장 큰 부분은 바지를 살 때마다 수선해서 입어야 하는 것인데, 백화점 같은 데서야 옷을 산 데서 바로 수선을 해주니 문제 없지만 충동구매로 사들인 바지 같은 경우 이 세탁소에 맡기면 내 성에 안차게 해놓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재봉선이 비뚤어진 것도 불만이지만 가장 큰 불만은 실 색깔! 수선도 하는 세탁소라면 최대한 다양한 재봉실을 갖춰놓아야 정석일 텐데 면바지든 청바지든 어쩜 그렇게 엉뚱한 색깔로 박아놓는지.. ㅠ.ㅠ

해서 요번에 산 청바지는 기필코 밑단의 예쁜 물빠짐 모양과 실색깔을 살려두겠다 다짐하며, 백화점 수선집에서 해주는 대로 밑단을 잘라 그대로 올려 이어붙이는 방식으로 해달라고 자세히 설명을 해주며, 가능한지부터 물었다. 별 말이 없는 과묵한 스타일이라 그나마 시끄럽지 않아 좋았던 세탁소 아저씨는 "밑단을 살려달라는 거 아닙니까?"라고 되물으며 흔쾌히 대답하여, 나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그런데 어제 청바지를 찾으러 가보니, 세상에나! 차라리 밑단을 그냥 잘라 접어 박은 거면 실 색깔이 달라도 투박하지나 않을 텐데, 이 아저씨는 내 말을 어디로 들은 건지 청바지 단에 억지로 바이어스를 두르듯 싸박아 놓은 게 아닌가. ㅠ.ㅠ 할 줄 모르면 모른다고나 하지!!!!

바지 완전히 버려놨다고 울상을 하며 경악하던 나는 집에 올라와서도 도저히 울화를 그냥 참을 수가 없어서 (아까운 내 청바지! 그게 얼마짜린데!) 다시 세탁소로 내려가 다른 수선집에 맡겨 살려보게 잘라버린 밑단이라도 내놓으라며, 화를 냈다. 청바지 잘라 밑단 올려붙이는 거 해보지도 않았으면서 왜 안다고 그랬느냐고. 그랬더니 이 아저씨 완전 적반하장, 자긴 아무 잘못이 없단다. 밑단 살려달래서 살려놨는데 뭐가 잘못이냐고 되레 큰소리를 쳤다. 게다가 잘라낸 청바지 밑단도 버리고 없단다. 어제는 토요일. 우리 동네 쓰레기 배출일은 화/목/일. 내가 그걸 놓칠 리 없으니 버렸을 리 없다고 따지자, 밑단 박음을 풀러서 그걸 잘라다가 씌워 박은 거라고 실토했다. 악! ㅠ.ㅠ

애당초 샘플 청바지를 가지고 내려가서 실제로 보여주며 설명을 했어야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수선하는 세탁소에서 어떻게 청바지 밑단 줄이는 방법도 모르고 있단 말인가!!! 예전 세탁소 아저씨와 마찬가지로 이 아저씨 역시 미안하단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전적으로 내 잘못(그렇게 잘났으면 옷 산데 가서 수선받지 왜 세탁소에 맡기느냐! 청바지 자르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뭐가 다르다고 따지냐! 등등)이라며 계속 자기 잘못 없음을 주장하더니 막판엔 억울하면 손해배상청구라도 하란다. +_+ 기.가.막.혀.서.원.

결국 동네 세탁소 두 군데서 정신나간 쌈닭으로 활약하고 열만 받았다는 얘기다. 아주 못입게 된 건 아니지만 심혈을 기울여 오래 고른 청바지를 (포인트랑 쿠폰 쓰느라고 백화점에 가서 입어보고 스타일번호 적어다가 온라인으로 샀단 말이닷! ㅠㅠ) 망쳤다는 상심에 어젠 너무 열이 받아 아무 생각도 안들었는데, 오늘 생각해보니 궁금한 게 생겼다. 우리 동네 세탁소 아저씨들만 우연의 일치로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세탁업 특성상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면 배상액이 커질 수 있어 전체적으로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업계의 관행일까? 흠... 아마도 내가 이래서 자꾸 수선집에 보낼 일을 손수 바느질하고 앉아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번 일을 계기로 옷 수선은 내가 할 수 없는 건 반드시 전문 수선집에 맡길 작정이고, 세탁물은 길 건너편 옆동네 세탁소를 이용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이 동네 (거의) 토박이로서 동네 세탁소 두 아저씨들 실력없고 이상하다고 소문내고 다녀서 복수할 거닷!


Posted by 입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