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이라면 병

투덜일기 2010. 2. 24. 23:56

거의 매일 오랜 시간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인간이지만 아주 가끔 컴퓨터를 켜지도 못하는 날이 있어 블로그 접근이 아예 불가능하거나, 나름 급한 일이라 자중한다고 블로그를 자진차단하는 날도 있다. 그렇게 만 이틀만에 블로그 세상에 들어오면 여기저기 새로운 글도 많고 요즘은 댓글이 수십개씩 달리는 게 유행이라 따라잡기가 만만찮음을 느낀다. 마치 모두들 다 아는 사이인 자리에 홀로 초면으로 끼는 듯한 어색한 기분에 비할까? 특히 이미 댓글이 열몇 개를 넘어가는 글엔 나도 모르게 손이 오그라들면서 머리가 잠시 멍해진다. 그러고는 곧 이어 생각이 꼬리를 물기 시작한다. 꼭 댓글을 남겨 글을 읽었다는 표시를 할 필요는 없지 않나? 오가는 댓글 속에 싹트는 인정(?)이라지만 이른바 눈팅이라는 것만 하면서도 블로그질은 즐거울 수 있는데... 게다가 똑같은 견해를 뒷북치듯 댓글로 남길 필요는 없지 않을까? 뭐 이런 쓰잘데기 없는 생각들이다.

그간엔 최대한 나를 채찍질해서 뒷북 댓글이라도 성실히 달려고 노력해왔는데, 점점 그러기가 싫다. 요즘 이웃들의 포스팅 가운데서는 댓글이 50개를 넘어가는 글들도 있는데 하나하나 너무 재미있어 또 어떤 댓글이 달렸을까 자꾸만 가보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어떤 글에 내가 읽기도 전에 38개쯤의 댓글이 달려 있으면 돌연한 댓글 부담 때문에(확실히 병이다!) 본문도 잘 안읽힌다. ㅋ

그렇다고 또 글에 아무도 댓글을 안 달아놓은 청결한 상태에서 다는 첫 댓글을 즐기는가 하면 절대 아니다. 누구 글이든 나는 첫 댓글을 다는 게 꺼려지고 두렵다. <아싸~ 1등!> 이렇게 달아놓고 즐거워할 수도 있는 첫 댓글을 나는 왜 무서워하는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다. 설마 댓글에도 <글막힘 혹은 writer's block>이란 게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병적인 소심함 때문? 

처음 블로그질을 시작하며 나는 내심 원칙을 하나 정했다. 블로그질이 과도한 스트레스가 되는 날, 과감히 관두겠다고. 그런데 알게 모르게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블로그 세상의 <예의>라는 게 슬슬 나에게 스트레스로 작용하는 모양이다. 블로그 세상에서 처음 스트레스를 느낀 건 꼴같잖은 모 건축가가 엉뚱하게 명예훼손의 가능성을 제기하는 바람에 티스토리측에게 잠시 글을 삭제당했던 사건 때문이었고, 소송을 불사할까보다며 전의를 불태웠던 나의 고민이 무색하게도 글이 회복되는 것으로 사건이 일단락된 적이 있다. 그런데 댓글 스트레스는 그렇게 파르르 단기적인 분노와는 좀 다르다. 내가 극복하지 않으면 점점 더 큰 압박감으로 나를 삼킬 수도 있는 끝도 없는 모래수렁이랄까.

하기야 악플 달릴 것을 두려워하여 요번에 나온 소녀시대의 신곡이 너무 싫다는 내용의 포스팅은 아예 하지도 않을 정도로 이미 자기검열은 심해졌다. 재미없는 신세한탄만 계속 쓰는 것도 좀 민망하고, 스스로 재미 없는 포스팅이라고 여겨지는 글은 한참이나 비공개로 두었다가 간신히 바꾸기도 한다. (그래서 쓰다 말았거나 비공개로 내버려둔 글이 꽤 된다. -_-;;) 그나마 다행인 건 일주일씩 포스팅을 건너뛰어도 거뜬해졌다는 사실이다. ㅋㅋ 구구절절 적고 보니 나는 아직도 초보 블로거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뭘 이런 걸 다 갖고 병이네 뭐네 고민을 하고 앉았는지 원.

어쨌거나 다 적었으니 이참에 선언을 해야겠다. 이웃이신 당고님의 어느 글에 예순, 일흔, 팔순에도 블로그 이웃하면서 글로 소통하고 위로받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내용으로 달린 댓글에서 나도 안경다리에 줄 달린 돋보기를 쓰고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며 열심히 블로그질을 하고 있는 노년의 내 모습을 상상하며 슬몃 웃었기 때문에 내리는 선언이다. 수십년 이 짓을 계속하려면 더 편해져야 할 게 아닌가!

해서, 앞으로 나는 댓글을 소홀히 할 것이다. (내 글에 달린 이웃의 댓글에 일일이 답다는 것도 사실 귀찮았다)
아니 댓글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댓글로 이웃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애쓰지 않을 테다!
나도 모르게 자판이 두들겨지는 댓글만 달겠노라!

설마 이 선언 때문에 다른 스트레스가 생기는 건 아니겠....지? 나의 선언이 어떻게 지켜질지 나도 궁금하다. 하하하.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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