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해당되는 글 28건

  1. 2017.03.12 드디어 봄인가 5
  2. 2016.12.25 간만에 동네 산책 5
  3. 2016.02.29 어제 눈 풍경 6
  4. 2015.12.03 눈길 4
  5. 2015.11.30 멍... 8
  6. 2015.02.24 눈길 등산 4
  7. 2013.03.21 종묘 8
  8. 2013.01.02 눈이 와도 너~무 온다 7
  9. 2012.12.31 2012년 12월 31일 7
  10. 2012.12.20 월동준비 10

드디어 봄인가

투덜일기 2017. 3. 12. 22:02

뻔뻔하고 찌질하고 치졸하게 버티던 안하무인이 드디어 제집으로 돌아갔다는 뉴스를 보았다. 지난 금요일에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을 듣고 감격해 낮술을 마시며 축배를 들면서도, 아직 갈 길은 멀었음을 알고 있었다. 청산해야할 적폐와 비리가 어디 한두 가지라야 말이지. 아무리 역사는 반복되는 거라지만, 80년대에도 90년대에도 세상이 달라질 거라며 감격의 축배를 든 순간이 있었다. 물론 달라진 부분도 있었으나, 변화의 추진력이 꺾여 과거로 회귀한 것도 많았고 최근 10년은 확실히 삶이 더 팍팍해졌다. 게다가 감히 그 파렴치한 입으로 또 다시 진실 운운하는 헛소리가 나오는 걸 보면, 과연 그 여자가 정신 차릴 순간이 오긴 할 것인가 의심스럽다. 원래부터 정신 차리기를 기대하기 어려운 괴물일 수도 있겠고. 

암튼 어제 축제의 한마당이 되었다는 광화문에는 선약이 있어 나가지 못했다. 마지막 촛불집회이길 바라며 3월 4일에 광화문광장으로 나간 이유도, 실제로 촛불을 들 마지막 기회일 거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어제 저녁, 거의 매번 광화문에 동행했던 후배 하나가 사진을 보내왔다. 

하하하하... 재기발랄하기도 하지!

포장마차에서 오뎅을 사먹진 않았지만 우리도 호떡은 사먹었고 주로 배낭에 빵과 과자, 뜨거운 커피와 차, 과일을 바리바리 싸들고 나가 구호 외치는 틈틈이 우걱우걱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머릿수 채우러 나갔던 것도 맞고.. ㅎㅎ

노발평화상장은 탐나지 않는데 촛불 배지는 너무 예쁘잖아! +_+ 아이고 갖고 싶어라...

집회 끝나고 행진이 시작되고 나면 어느새 해방구처럼 변한 청진동 서촌 앞길과 세종로, 종로 일대에서 딱 한사람만 없으면 정말 축제로구나~ 느꼈던 게 한두번이 아니었다. 분노도 분노려니와 그런 행복한 추동력이 다섯달에 이르는 긴 촛불 역사를 가능하게 했겠지 싶다. 

미국 대선에서 저들은 저급하게 굴어도 우린 고급지게 가자(When they go low, we go high.)고 했던 미셸 오바마의 말이 새삼 떠오른다. 태극기 부대가 아무리 지저분하고 비논리적이고 폭력적으로 헛소리를 지껄이며 죽창과 야구방망이를 휘둘러대도, 촛불집회는 괜한 꼬투리 하나 안잡히겠단 신중함으로 어찌나 품위를 잘 지켜냈는지. 

집회 중간에 한장한장 빨간 종이 나눠주고 다니시던 할아버지 새삼 존경합니다..

당장 퇴진, 퇴장하라는 의미로 연출한 레드 카드 퍼포먼스마저도 왤케 아름답기만 했던지, 분노조절이 잘 안되서불끈불끈 수시로 뒷골을 잡던 나와 후배들은 너무 감상적인 거 아니냐고, 촛불이 더 이상 예쁘기만 하면 안되는 거 아니냐고 궁시렁궁시렁거렸었다. 

물론 분노와 슬픔마저도 아름답고 우아해서 더 감동적이고, 간간이 유머와 센스가 하늘을 찔러서 더 유쾌했던 건 사실이다. 

노발평화상을 준 주체로 적혀 있는 '앞으로 태어날 후손 드림'이란 글귀를 보니 휴대폰에 든 사진이 또 한 장 떠올랐다. 역시 3월 4일 집회에서 머릿수 채우는 역할은 다 했으니 헌재쪽으로 행진은 생략하고 슬슬 고픈 배나 채우러 가자며 인사동으로 향하는 길에 만난 귀여운 후손님의 사진이다. 

초상권을 우려해 뒤에서 몰래 한 장 찍었더니만 앞에서 찍어도 된다고... 흔쾌히 v도 그려주신 호피 패션의 아기! 

다들 사진을 찍으며 이런 아이가 행복하게 살 미래를 위해서라도 우리들이 촛불을 들어야하느니라.. 그런 말들을 했던 것 같다.  



꽃샘추위는 아직 한참 남았겠지만 나가보면 확실히 햇볕도 바람도 달라졌다. 봄 기운이 반가운 것과는 별개로 걱정은 계속 이어진다. 대선 정국에 휘말려 이제 겨우 진행되고 있는 비리 수사가 덮이면 안되는데, 세월호 인양도 진상조사도 더 늦어지면 안되는데, 끝까지 파헤쳐서 그네를 구속시켜야하는데... 또 두눈 부릅뜨고 두고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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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동네 산책

놀잇감 2016. 12. 25. 17:37

한달에 두번 정기적으로 가는 등산 이외엔 통 운동을 못했다. 집에서 매일하던 스트레칭도 때려치고, 연일 동면하고 시프다 징징거리지 않으면 마감에 쪼이거나 가끔 나가서 송년회 빌미로 술 퍼마시고 고기 먹고... 몸이 디룩디룩해지는 느낌이 대번에 들었다. 12월은 뭐 어쩔 수 없지 그러며 포기했는데, 문제는 또 다시 불면.. ㅠ.ㅠ

이틀 내내 딱 2시간밖에 눈을 못붙이고 간신히 그저께 오전에 마감을 쫑낸 건 좋았는데, 곧장 궁궐봉사 갔다가 왔으면 장렬히 쓰러져 시체처럼 자야 정상이건만... 와... 눈이 새빨개지도록 잠이 안오는 거라. 새벽에 간신히 까무룩 잠들었다 비몽사몽 온종일 뒹굴거리면서 아 낮잠 자기 딱 좋은 날이다 했는데 그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특단의 조치로 한밤중에 맥주캔 두개를 마셨다. 설마 술김엔 자겠지! 그러나 그것도 나의 오산. +_+ 알딸딸하니 기분좋게 취해 천장이 살짝 오르락내리락하는데도 날이 훤하게 밝도록 잠이 안와! 미친다 정말... 

해서 오늘은 피톤치드의 힘을 빌러 물 한 병 들고 동네 산을 올랐다. 다행히 미세먼지는 보통수준. 하긴 뭐 나쁨이라고 했어도 마스크 쓰고 나갈 판이었다. 내가 잠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그걸 못하다니! 으헉... 깊은 잠을 자고 싶단 욕심에 헐떡헐떡 숨이 턱에 차도록 걸음을 빨리해 안산 정상까지 올랐다가는 일부러 빙 돌아 잣나무 숲, 메타세콰이어 숲, 잡목 숲을 일부러 다 통과했다. 희뿌연 오후 햇살 아래 나무 사이로 한강도 보이고...​

​메타세콰이어 숲으로 들어서니 오옷 이건 북유럽필? ㅋㅋ 혼자 찧고 까불면서 괜히 즐거웠다. 

인적 드문 숲길에선 이어폰 꽂고 혼자 걷기가 무서워진 지 오래다. 우리 동네엔 아직 그런 플래카드 못봤지만 남한산성에도 아차산에도 북한산 입구에도 여성 등산객 홀로 등산 자제하라고 적혀 있는 걸 좀 많이 봤어야지. ㅠ.ㅠ 그치만 날씨는 꿀꿀했으되 일요일 오후라 그런지 등산로에도 자락길에도 가족 단위로, 친구들끼리 걷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서 계속 안심하고 음악 감상해도 괜찮은 분위기라 더 좋았다. 

늦은 오후에 죄다 역광 사진이라 해가 곧 질 것처럼 나왔군. 그래서 겨울나무의 앙상함과 스산함이 더 잘 보이는 것 같다. 잎이 없어도 나뭇가지만으로도 참 이렇게 예쁘다니. +_+ 얼른 스케치 실력 좋아져서 막 그릴 수 있으면 좋겠다. 


몇달만에 산책에 나선 건지 모르겠는데 내가 그간 눈이 삐어서 보질 못했던 건지 설마 그새 구청에서 새로 심은 건지(나무 굵기로 봐선 그럴 리 없을 듯 ㅋㅋ 길가 주변 나무를 정리했으면 또 모를까)... 못 보던 자작나무도 발견!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는 무라카미 하루키도 떠오르면서, 인제 자작나무 숲에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나저나 이거 자작나무 맞겠지? 오늘밤엔 부디 잠이 잘 오기를.. 주문이라도 외워볼까보닷. 야발라바히기야..?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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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눈 풍경

투덜일기 2016. 2. 29. 13:22

3월이 코앞인데 어젠 어쩜 그리도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지. 창밖을 내다보다... 아마도 올해 마지막으로 실컷 보는 눈일 거란 생각에 충동적으로 주섬주섬 옷을 입고 다 저녁때 집을 나섰다.
눈덮인 숲길을 자박자박 걷고 싶어!

산길은 생각보다 미끄러워서 한시간 남짓 걷다가 돌아서야했지만 뿌듯한 산책이었다. 오늘도 듬성듬성 눈발이 날리고는 있지만 맑고 쨍한 추위에, 어제 눈속을 헤집고 돌아다닌 기억이 거의 꿈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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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

투덜일기 2015. 12. 3. 22:06

오늘은 이상하게 눈길을 걷고 싶었다. 뽀드득뽀드득 소리나게 눈을 밟으면서.

그러나 느즈막히 일어나 밖을 내다보니 푹한 날씨에 벌써 눈은 거의 다 녹아 흔적을 찾기가 어려웠다. 나뭇가지에나 조금 매달려있을뿐.. 

그렇다면 방법은? 동네 산에라도 올라가는 것뿐이었다. 마침 도서관에 책 갖다줄 것도 있겠다 겸사겸사 집을 나섰다. 기온은 영상이라지만, 산속은 그래도 추울지 모르니깐 따뜻한 물도 좀 챙기고 귤도 하나 주머니에 넣었다. 간간이 부는 바람은 꽤나 싸늘. 후드티 모자를 푹 뒤집어썼다.

눈내린 날의 늦은 오후. 늘 사람들로 버글거리던 개천변 산책길에도 인적이 드물더니만 산길을 오르는 오솔길엔 사람구경하기가 정말로 어려웠다. 아이 좋아라. 온 산이 다 내것이여~

공포영화나 롤러코스터는 무서워하지만, 혼자 집에 있는다든지 깜깜한 곳에 혼자 있는 것, 아무도 없는 길을 걸어가는 따위는 무섭지 않다. 오히려 사람이 나타나야 괜히 무섭지... 산속에서 저 멀리 시끄러운 음악과 함께 불현듯나타나는 할매, 할배들이 아예 없어서 더 좋았다. 고즈넉하고 호젓한 분위기.

하지만 뽀드득뽀드득 밟히는 눈길은 좀체 나타나지 않았다. 죄다 질퍽질퍽 녹아버렸;;; 그래도 실망은 일렀다. 정상 봉우리를 남겨두고 마지막 산모퉁이를 돌자 그때부턴 정말로 눈길 시작. 사람들이 죄다 밟고 다니긴 했어도 뽀드득뽀드득 제대로 소리도 나주시고, 오가는 바람에 눈보라가 가끔씩 마구 휘날려주시고, 아주 깊은 산속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정상 봉수대에서 한바퀴 서울시내를 내려다본 뒤 미지근하게 식은 물 원샷하고는 서둘러 내려오는 길.... 아 쒸.. 길을 잘못들었다. 새하얗게 눈이 덮인, 아무도 걷지 않은 산길을 내가 제일 먼저 오르고 싶다는 이상한 로망이 있지만, 게으름 때문에 도무지 실천을 못하는 것말고도 혹시 산속에서 괜히 길을 잃으면 어쩌나 그런 두려움이 있었다. 동네 산이기는 해도, 아니 동네 산이기 때문에 길이 하도 여러갈래라서 조금만 신경을 덜 쓰면 다른 동네로 내려가기십상인 게 이 동네 @산이다. 

거기다 자락길까지 만들어놔서 사방팔방으로 다 통하게 해놨으니... 곳곳에서 만나지는 정자도 비슷비슷, 운동기구도 비슷비슷, 약수터도 비슷비슷... 오늘은 그냥 눈 녹은 길만 따라 올라갔다 내려오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어디선가 방향을 잘못 들었나보았다. 

올라갈 때 본 정자가 틀림없는 줄 알고 내려가보니 완전히 낯선 길 옆이었다. 젠장. 머릿속으로 방향을 더듬어 내려간 곳은 당연히 연희동 쪽인 줄 알고 방향을 틀어 걸어갔는데.. 아 놔... 또 멘붕. 내가 내려간 곳은 연희동쪽이 아니고 정 반대인 무악재쪽이었다. ㅋㅋ 완전히 산을 넘어가버렸네그려. 그나마 중턱에 뚫린 자락길을 다시 돌아서 무사히 도서관에 들렀다가 집에 왔지만, 길 잃은 줄도 모르고 산속에서 좋아라 사진 찍고 흥얼대다가 맑아졌던 파란 하늘이 다시 구름으로 덮이면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순간 살짝 겁이 났다.

여기서 괜히 빙판길에(점점 기온이 떨어졌는지 중턱 아래쪽도 눈길이 얼어붙기 시작) 넘어져 팔이라도 부러지면 혼자서 낑낑대며 병원까지 가야하는 건가 어쩐가...  ㅋ 왜 괜히 재수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가 자책하며 킥킥거렸다. 당연히 조심조심 걸어 한번도 안넘어졌음.   

올초부터 눈길에 꼭대기까지 안가본 것도 아니고... 늘 다니던 산길에서 길을 잃다니 (역시 눈이 덮이면 다 낯설어보인다) 좀 바보같았지만, 그래도 나름 뿌듯하고 보람찼던 눈길 탐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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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

투덜일기 2015. 11. 30. 21:15

요즘 누가 잘 지내느냐고 물으면 대답이 곧장 안나온다. 어.. 으음.. 글쎄... 

그저 멍... 

머리가 작동을 잘 못하는 듯 누가 뭘 물어도 대답을 잘 못하겠고, 뭔가 설명을 할 때도 단어가 잘 생각이 안나고, 그래도 뭔가 애써보려는 의욕이 앞서다보면 괜히 버럭 화를 내고 앉았다. 


무작정 우울해지는 11월 탓이라고, 특히나 왜 또 그렇게 비는 내리는지, 혹은 대책없이 너무 열심히 놀고 난 뒤의 후유증이라고, 그도 아니면 진짜로 호르몬에 이상이 찾아온 '갱년기'의 시작인지도 모르겠다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지만 어쩌면 그 모든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게 아닐까.


여행 다녀온 후기를 뭔가 알차게 기록해 놓고 싶다는 생각은 의외로 스트레스여서, 개학 앞두고 방학숙제 잔뜩 밀린 아이 같은 심정으로 괜히 월말을 앞두고 전전긍긍했었다. 사진만 미리 대충 골라 비밀글로 올려두고는 차차 수정해서 마무리해야지.. 그랬는데 그마저도 귀찮을 줄이야! 결국 배째라.. 숙제 안해가면 그만이다.. 그런 태도를 불러일으키는 중이다. ㅎ


해마다 겨울이 시작되면 아 다 귀찮다, 춥다, 동면하고 싶다, 짜증부리는 일을 반복하고는 있지만 쓸데없이 의미를 부여하고, 별것 아닌데서 의미를 찾고 집착하고 미리 고민하는 나의 습관은 한해를 또 허송했나 반성모드 돌입과 함께 또 한 해는 어떻게 보내게 될까 공포에 사로잡히면서 그 증상이 극심해지는 것 같다. 


올해는 20주년이네 어쩌구 시건방떨다가 더 민망해진 게 아닐지. ㅠ.ㅠ 뜨르르하게 장소빌리고 지인들 초대해서 파티하겠다는 계획은 전격 폐기했다. 귀차니즘이 가장 크고, 시간도 너무 없고, 비용도 만만찮고... 막상 누굴 오라고할지 생각하니 머리가 복잡해져서 (임시 준비위원 자처한 후배가 초대할 사람 목록부터 뽑으라는데-- 출판계 부터--으악.. 졸지에 무서워졌다) 그냥 조용히 자축하기로 마음을 바꿨음. ㅋㅋ  니가 그렇지 뭐. 회사에서 20년 근속상 준대도 자괴감에 빠져 시큰둥할 인간이 스스로 판을 벌이겠단 생각이 애당초 웃겼다. 


하여간 그래서 더욱 자중하며 새해까지 남은 한달을 잘 보내기로. (꼴랑 블로그에 몇줄 쓰는 것도 이렇게 힘들어서야.. 어휴.. 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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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 등산

놀잇감 2015. 2. 24. 20:19

설날 이전 주말에 정선 함백산으로 눈길 등산을 갔었다. 아이젠과 스패츠까지 구비해야하는 본격 눈길 산행은 하도 간만인데다가, 남한에서 6번째로 높은 산이라고 해서 겁을 집어먹었는데 다행히 새벽에 출발해 당일로 다녀오려니 꽤나 높은 지점(해발 800미터쯤인 만항재??라던가;;)에서 산행을 시작해 그리 오래 걸리는 코스는 아니었다. 서울 기온은 영상이어도, 함백산은 쾌적한 날씨에 영하3,4도 정도 될거라는 예상. 헌데 하루종일 어찌나 날씨가 변화무쌍한지... 눈보라가 휘날리다가 쨍쨍 햇빛이 비치다가 다시 컴컴하게 흐렸다가...  워낙 가물어 눈이 별로 없는 거라는데도 중간중간 엄청난 눈길이 나왔다가 질질 누런 물이 흐르는 진창길이 이어지다가... 귀시렵고 코시려운 칼바람이 휘몰아치다가... 아주 정신이 쏙 빠졌다. 

그래도 다행인 건 2월에 눈길 산행할 수 있는 곳이 몇 안되다 보니 등산객들이 워낙 많아서 곳곳에 병목 정체현상(!)이 벌어져 빨랑 올라가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구간이 많았다는 점. ㅎㅎ 원래는 3,40분씩 내달리듯 강행군 하다가 모여서 단체로 간식 먹으며 잠시 쉬곤 하는데 하도 중간중간 막히다보니 산 정상을 넘어서기까지 제대로 간식 먹을 시간도 없었다. 점심시간에야 비로소 죄다 모여 눈밭에 옹기종기 앉아 보온도시락을 까먹었다.  

 

왼쪽이 내 스틱과 장갑. 저 장갑은 아빠가 쓰시던 거다. 유품정리하면서 차마 아까워서 남겨두긴 했지만... 저 등산 장갑을 내가 끼고 겨울산행을 하게될 줄은 아빠도 몰랐겠고 나도 몰랐다.

​위의 사진 두 장은 그나마 바람 덜한 비탈사면 옆에서 점심 먹느라 멈췄을 때 찍은 것. 하도 가물어서 산불을 염려해 폐쇄된 등산로도 많다는데 초보자인 내 눈엔 저만큼 쌓인 눈도 신기할 따름이고...  

수증기가 나뭇가지에 겹겹이 얼어붙어 바람결따라 희한한 눈꽃을 피운 걸 '상고대'라고 한다는데, 강원도도 계속 워낙 기온이 높아 눈꽃을 볼 순 없어 다들 아쉬워했지만, 난 원없이 눈을 밟은 것 같아 그저 좋았다. 이번 겨울에 가장 장대한 눈구경은 의외로 터키 갔을 때였으니 뭐;;; 

​하산 길엔 스틱을 매만진다거나 모자를 고쳐쓴다거나 해서 조금만 머뭇거리다간 종종 저런 인적 드문 눈길에 홀로 남게 됐다. 서둘러 따라갈 걱정 속에서도 기뻐하며 얼른 휴대폰을 꺼내들고 후딱 눌렀더니 흔들렸다. ㅋㅋ 잘 따라가지도 못하는 주제에 사진 찍는다고 더 꾸물거리면 혼날까봐(?) 감히 등산 중엔 폰카질을 할 엄두도 못내겠고, 사실 헥헥거릴 때는 힘들어서 사진찍을 생각도 잘 나질 않는다. ㅎㅎ

등산가서 꼭 정상 표지석 옆에서 독사진으로 인증샷을 남기는 사람은 '늙은이'라는 증거란다. 이 집단도 반드시 정상 표지석 옆에 사람들 죄다 모아놓고 단체사진을 찍는데, 웃기고 어색하지만 이젠 나도 그러려니 하며 한쪽 귀퉁이에서 얼굴이 특히 넙대대하게 나오든 말든 참아낸다. 궁궐에서 어쩔 수 없이 찍히는 사진에 무감각해졌듯이 어떻게 나오든 말든 내가 열심히 들여다볼 게 아니니 상관없다는 생각. ㅋㅋ 점점 대인배가 되어가고 있는 건가? 

암튼 아이젠을 등산화에 끼고 걸으면 체력소모가 더하다는데, 딱히 더 힘든 느낌이 없었던 건 오르막길마다 거의 계속 막혀서 크게 힘들일 일이 없었기때문일까, 아니면 연초부터 휴대폰에 앱까지 깔아놓고 근력+유산소 운동을 꾸준히 해왔기 때문일까 통 알수가 없다. 등산 고수들은 눈도 많지 않고 정체 현상 때문에 제대로 등산다운 등산을 못했다고 투덜댔으니 아무래도 전자가 원인인 것 같지만... 2월 들어선 통 앞산에도 한번 안 올라간 터라 근력이 과연 늘었는지 모르겠다. 점점 늘어나는 몸무게의 대부분은 과연 지방일까 근육일까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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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놀잇감 2013. 3. 21. 00:33

탑골 공원의 노인들이 대거 종묘 앞 공원으로 몰려들면서 종묘는 내게 더더욱 매력없는 곳으로 자리잡았던 것 같다. 파르테논 신전 기둥들만 위대하다 구경다닐 게 아니라고, 조선 왕들의 사당인 종묘 역시 신전으로서의 위엄과 품격을 갖춘 곳이라고 책에서 읽긴 했어도 내심으론 좀 미심쩍었다. 지나치게 길쭉하기만 한 종묘 건물들 역시 아름다운 한옥에 속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궁궐들과 달리 종묘에 대해선 그렇게 좀 삐딱한 생각이 있었는데, 이론수업에 이어 답사를 가보고는 의외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많아 설명에 쏙 빠져들었다. 종묘제례 순서와 음악과 제관들의 역할과 동선, 각종 제물과 제기 놓는 위치까지 죄다 기록으로 남겨놓아, 지금까지도 그 전통을 실연할 수 있게 해놓다니, 비록 망하긴 했어도 조선의 문화수준은 참으로 대단했던 것 같다.

 

종묘 정전의 모습. 신실의 수는 모두 19칸이란다. 좌우행각을 잘라도 워낙 길어 한 화면에 잡을 수가 없다.

종묘 건축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답사를 다녀온 이후에도 잘 모르겠다만 ^^; 왜 그렇게 건물이 마냥 옆으로만 길어졌는지 사연을 들여다보면 결국 저 아랫동네 종가집 제사 문화와도 관련이 있어 더욱 흥미로웠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면서 종묘는 궁궐보다도 먼저 지어졌다. 조상신을 모시는 종묘, 그리고 곡식과 땅의 신을 모시는 사직이 국가의 근간으로 궁궐보다도 더 중요했단 얘기다. 사극에서 만날 '종묘사직' 운운하는 이야기가 그 때문이란다.

 

암튼 천자국은 7묘, 제후국은 5묘가 당시 예법이고 왕실제사도 4대조만 봉사하면 되므로 신실 5칸만 만들어놓으면 되는데 왜 저렇게 자꾸만 길이가 늘어났느냐. 그건 결국 '효'를 확장하면 '충'이 되는 유교원리를 널리 지배이데올로기로 고착시키기 위한 일환인 것 같다. 그리고 그놈의 '정'과 '정통성에 대한 집착'? ^^; 세월이 흘러흘러 4대조 봉사에서 벗어나는 까마득한 조상 신주는 옆에 따로 마련한 영녕전으로 옮기면 그뿐인데,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 인물이니 옮길 수가 없어 그냥 놔두었고, 태종도 공이 많으니 그냥 놔두었고, 세종대왕은 당연히 위대한 왕이므로 옮길 수가 없었고... '불천지주'라고 해서 옮기지 않는 신주가 늘어나면서, 신실을 늘려짓게 된 거다. 종묘에선 서쪽이 높은 자리라서 왼쪽 신실은 그대로 두고 계속해서 오른쪽으로만...  

이성계가 추존한 4대조와 정전에서 밀려난 나머지 왕들의 신주가 있는 영녕전. 여긴 지붕높이로도 가운데 4칸이 가장 선대조임을 알 수 있다.

특히 공덕이 높은 선대 왕만 정전에 계속 두기로 원칙을 세웠지만, 왕이 되고 보니 자기 아버지가 '불천지주'가 되야 그야말로 '끝발'이 서는 셈이니 숙종 같은 임금은 아직 신주 옮길 순서도 되지 않은(원래 4대째 후손 왕이 신하들과 논의하여 정해야 하는데!) 아버지 신주를 후다닥 불천지주로 정해버리는 일도 있었다고. 암튼 그래서 몇칸씩 자꾸만 미리 늘려지어놓은 정전 신실이 무려 19칸에 이르게 됐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때 소실된 걸 다시 지은 원래 건물 부분의 기둥은 배흘림 기둥이고 후대에 증축한 부분의 기둥은 민흘림 기둥이라나 뭐라나... 예리한 눈으로는 기둥 다른 것도 구분할 수 있다는데 난 설명듣기에 바빠 그것까지 확인하진 못했다. ^^

 

하여간에 종묘를 직접 가보고서 처음 알게된 것 하나는 내가 그간 왕릉 구경다니면서도 궁궐과 똑같이 가운데가 어도이고 좌우가 문무 신하들이 다니는 길이라 착각했던, 박석 깔린 길의 용도였다! 아 글쎄, 가운데는 신주와 주요 제례용품(을 옮기는 제관)만 다닐 수 있는 신도이고 오른쪽이 왕이 다니는 길, 왼쪽이 세자가 다니는 길이었단다. 대동한 신하들은 박석에도 못 올라갔단 얘기. 심지어 종묘 정전과 영녕전 앞의 대문도 신주와 주요 제례용품만 드나들 수 있다. 왕릉 홍살문이 신성한 공간임을 가리키는 곳이란 건 전에도 알고 있었는데, 양쪽 대문도 궁궐문처럼 다 막힌 판문이 아니라 홍살문처럼 위쪽이 뚫려있었다. 왕과 제관들은 종묘 입구부터 아예 동선이 달라져서 옷 갈아입고 목욕제례 준비하는 별도의 건물로 들어갔다가 동문으로 입장한단다. 악공 같은 하급 관리들은 동문 출입도 안되고 반대편 서문으로 드나든다고.

 

그래서 답사 설명 내내 교육생과 관람객들에게 함부로 한 가운데 신도를 밟지 말라는 당부가 이어졌고, 종묘에 들어서자마자 그런 내용이 적힌 팻말도 서 있었다. 하지만 어디 사람들이 그런데 계속 신경을 쓰는가 말이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법인 것을. ㅋㅋ 하여간 종묘와 왕릉의 가운데 길은 인간을 위한 길이 아니라는 것이 새롭고 놀라운 발견이었다.

 

복잡하기 이를데 없었던 제례절차와 제물의 종류는 별로 기억나는 게 없는데, 제사 지낼 때 향과 술을 왜 같이 올리는지는 확실히 알았다. 유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혼과 백이 몸에서 빠져나간다고 믿는단다. '혼비백산'이 거기에서 나온 말이라고.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스며드는데, 그래서 혼은 사당에 모시고 묘를 만들어 백과 시신을 함께 모시는 거란다. 제사를 지내려면 혼백을 다시 모셔와야 하니, 향을 피워 혼을 부르고 술을 부어 백을 불러올린다네! 종묘 신실 앞에는 그래서 바닥에 술을 붓는 구멍도 있다고! ^^; 일부 집안에서 제사때 '모사기'라고 하여 모래를 담은 그릇에 술을 붓는 순서가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란다. 나로선 난생 처음 듣는 이야기.

 

어쨌거나 재미났던 건 이 시대의 많은 여성들이 명절 증후군을 앓듯, 역대 조선의 왕들도 직접 제사를 올려야하는 날짜가 잡히면 얼마나 부담스러웠던지 종종 병을 앓았단다(가령, 재임기간이 특히나 길었던 영조가 와병으로 제사를 친히 지내지 못해 개탄하는 이야기가 조선왕조실록에 종종 나온다고;;). <국조오례의> 율법에 따라 왕이 직접 가는 제사(친행)와 신하를 대신 제관으로 보내는 제사(섭행)가 구분되어 있었는데, 왕이 제사증후군 때문에 지엄한 국법을 더러 지키지 못했다는 얘기다. ㅋㅋㅋㅋ 그 옛날 왕실 제사도 그럴진대 요즘 우리들 제사야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그런데도 요즘 일부 종가집에서는 까마득한 몇대 조 할아버지 제사며 시제까지 꼬박꼬박 지내고 있으니... 전통을 따진다면 수천년전 전통이 더 역사 깊고 오래 된 것이고 조선의 역사는 불과 6백년인데 뭘 그리 예법 따지고 전통 따지고 앉았는지 모르겠다.

 

왕실사당에서 유교 예법에 맞춰 4대조 봉사를 하고, 심지어 불천지주를 정하여 수많은 선대왕에게 1년에도 몇번씩 제사를 지내긴 했지만 영녕전으로 옮긴 왕들에 대해서는 1년에 딱 한번 한식에만 제사를 지냈다. 오 나름 합리적이지 않은가. 그리고 놀랍게도 양반가에서도 조선 중기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대부분 4대조 봉사를 하지 않았단다. 간편하게 부모님 제사만 올리는 것이 대세! 하기야 부모 돌아가시면 3년상씩이나 해야하는데, 어떻게 고조할아버지까지 제사를 챙기겠나! 

 

신분 가리지 않고 고조부까지 4대 봉사를 한 건 순전히 조선후기 들어 성리학에 지나치게 얽매인 지배층의 의식변화 때문이었다. 심지어 조선중기까지는 딸, 아들 구분없이 제사와 차례를 나누어 모시거나 번갈아 모셨으며 재산분배도 동등했다.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전체적인 나라 살림살이가 거덜난 가운데 빈부상하 할 것 없이 4대 봉사의 전통이 서서히 자리잡으면서 유산과 제사 모두 장자에게 편중되는(한 놈이라도 먹고 살게 밀어주자;; 뭐 이런 심리) 악습이 시작되고 만 거다.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민가의 제례가 신분의 격차에 따라 아예 정해져 있었다. 벼슬이 대부 이상은 증조까지 3대, 6품 이상의 벼슬아치는 할아버지까지 2대, 7품 이하의 벼슬아치와 평민은 부모 제사만 지내면 됐던 거다. 그나마도 불교식이라 매장이나 화장 후 신주는 절에 모셨으므로 실제 제례는 절에 가서 제를 올렸단다. 그러니까 고려시대만 해도 집안에서 복작복작 여자들이 제사음식 장만할 이유가 없었던 거지!

 

설날을 기점으로 차례와 제사가 다시 우리집으로 돌아오면서 당연히 울 엄마를 비롯해 일부 집안 어르신들이 큰 걱정을 했다. 한 번 나간 제사가 다시 돌아오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내가 이번 궁궐 수업을 들으러 다닌 건 어쩌면 우리집에 그런 일이 있을 걸 미리 안 미지의 힘이 나를 조종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스운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수업때 듣고 책에서 읽은 '옛날 법도'와 실제 사례를 들어가며 어르신들의 우려를 쉽사리 잠재울 수 있었다. 성리학의 대표적 인물인 이황, 이이 때만 해도 딸이랑 아들이랑 번갈아가며 부모 제사 올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는데 뭘요! 딸과 사위가 혼례 후 계속 친정에 눌러 살면서 친정집안 제사를 도맡는 경우도 많았단다. 당시 논의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발휘했던 건 현모양처의 화신 신사임당 드립! 오죽헌은 다들 알다시피 신사임당의 친정집, 율곡 이이의 외가다. 그리고 신사임당은 출가 후에도 오죽헌에서 무려 18년을 살았단다. +_+ 친정 집안에 아들이 없기는 했지만, 남편과의 사이가 별로 안좋았다지만 정말 '현모양처' 치고는 대단한 뚝심 아닌가? ㅋㅋㅋ (그 옛날에 신사임당이 18년간 강릉 친정 살면서 시댁 올라가서 제사 지냈겠느냐는 나의 질문에 팔순 큰고모는 대답을 못하셨다 ^^v)

 

현재까지 남아있는 한옥 고택의 사연을 읽다보면 놀랄 때가 많다. 주로 양반 아무개가 장가를 들어 처가집 근처에 새로 지은 집인 경우가 왜 그리 잦은지! 그 옛날엔 영아사망률이 워낙 높다보니 남자가 여자네 집으로 장가를 들러가면 집을 새로 짓든 말든 암튼 친정에서 최소한 3년쯤 첫 아이를 낳아서 무사히 돌잔치를 할 때까지 처가살이를 하는 경우가 많았단다. 친정엄마한테 육아 맡기느라고 친정 근처에 집 얻는 요즘 세태와 다른 게 무언가!

 

종묘 이야기하다가 흥분해서 딴소리로 끝나고야 말았지만 하여간에 왕이든 평민이든 제사는 참 부담스러운 행사였다는

점이 이날의 교훈이었다. 그래서 진창에 발이 푹푹 빠지고 돌아다면서도 경쾌하고 기분좋게 답사를 마치고 돌아설 수 있었던 듯. 그날은 겨울 하늘이 유난히 파랗고 예뻤다. 

 

그러고 보니 밀린 답사후기도 이걸로 끝이다. 이때만해도 사방에 쌓인 눈이 수북했는데, 꽃샘추위라 내일은 날씨가 다시 영하로 내려간다고 하지만 햇살과 꽃눈을 보면 확실히 봄이 오고 있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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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그믐날 써놓은 일기대로 새해 첫날엔 그간 계속 내린 눈을 고스란히 쓰고 있는 차에 눈도 치우고 집앞 계단에 얼어붙은 얼음도 삽으로 팍팍 찍어 깨뜨렸다. 뭔가 세상에(최소한 아래층 포함 이 집에 사는 몇 안되는 식구들에겐;;) 도움이 된 일을 한 것 같은 뿌듯함 속에 들어와 특별히 맛있게 커피를 만들어 마셨다. 얼마 간의 비질, 삽질, 판때기질(?)로 오늘치 운동량을 채울 수 있을까말까 알량하게 계산도 하고... 물론 그림일기 용 사진도 찍었다. ^^v

 

 

 

겨울마다 차에 쌓인 눈을 치울 때 쓰는 물건은 흔히들 책상에 올려놓고 쓰는 초록색 고무판때기다. '판때기질'이라 함은 그러니까 그 초록색 고무판으로 까치발을 들어가며 차 지붕에 있는 눈까지 밀어내고 퍼버리는 노동이다. 그러나 주말엔 날씨가 풀리면서 진눈깨비가 내려서 유리창엔 온통 얼음이 들러붙어있어 말끔하게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차문도 얼어붙어 열려면 잡아 뜯어야하게 생겼으나, 어차피 토요일까진 탈 일 없으니 패스~

 

후련한 마음으로 들어와 있는데, 저녁먹고 나니 또 다시 온 동네 비질 소리가 들려왔다. 창밖으로 내다보니 눈이 또 내렸다. ㅠ.ㅜ 서울 적설량은 3.1cm. 한숨 쉬며 다시 내려가 마당과 계단에 쌓인 눈은 다시 처치했으되, 차를 덮은 눈은 그냥 냅두고 들어왔다. 밤새 또 내릴 지 몰라.

 

올 겨울 들어선 거의 사흘꼴로 눈이 내리는 느낌이다. 눈이 많이 오면 풍년이 든다지만 작작 좀 내리시지...

 

말하자면 이건 그러니깐  밀렸다 쓰는 '어제 일기'다. 핑계라면 어젯밤에 다시 내린 눈 때문에 김이 샜다는 사실. ;-p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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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31일

투덜일기 2012. 12. 31. 23:17

2012년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포스팅으로 마무리하면 참 좋은 날이겠으나, 게으름뱅이는 한해 마무리도 꼭 새해로 넘겨서 하는 버릇이 있는 고로 그냥 로그인 한 김에 몇 자 적고 끝내련다.

 

잦은 눈 때문에 집앞 계단과 마당이 온통 얼어붙어 왕비마마한테는 절대 출입금지를 명해놓았으되, 나까지 그럴 순 없었다. 우체국도 가야하고 눈을 찔러대는 머리칼도 좀 잘라야하고 진짜 설날은 아니지만 내일 떡만두국이라도 끓여먹으려면 간단히 장도 봐야하고...

 

동네 간이 우편취급소를 향해 종종걸음을 치다 길모퉁이를 돈 순간 문득 눈이 부셨다. 한겨울 노을 속 태양에도 눈이 부실 수 있다는 사실이 왜 그리도 신선하던지. 그러고 보니 2012년에 마지막으로 보는 태양이로구나. 문득 감상이 돋아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냈다. 장갑을 빼자마자 순식간에 바싹 얼어붙는 듯한 손가락을 얼른 놀려 얻은 올해의 마지막 해 사진.

 

머리 위로 지나는 고가도로와 지저분한 전깃줄과 전봇대와 앙상한 가로수 사이로 보이는 햇빛은 당연히 사진보다 강렬하고 아름다웠다.

 

한시간 45분만에 눈길을 뚜벅뚜벅(사실은 뒤뚱뒤뚱;;) 걸어 목표한 일  세가지를 모두 마치고 산뜻한 기분으로 돌아오며 부디 새해엔 덜 방황하고 덜 망설이고 덜 좌절하기를 빌었다. 사소한 일이든 큰 일이든 제발이지 마음 먹은 건 막 일주일씩 한달씩 미루고 그러지 말기를...

 

하루하루 아무 기억도 흔적도 없이 보낸 날들 가운데 그래도 오늘 12월 31일엔 우체국에도 갔고 머리칼도 잘랐고 배달아저씨의 도움 없이 낑낑 대며 홀로 식량도 날랐고, 아주 간만에 그림일기도 썼노라고 기억하고 싶었다. ^^;

 

 

이왕이면 그림일기의 형식을 끝까지 빌어서;;

오늘의 날씨: 맑고 추움

오늘의 기분: 홀가분

내일의 할 일: 떡만두국 끓여먹기 & 차에 쌓인 눈 치우기

 

이러면 새해 첫날인 내일도 그림 일기 하나 올라오지 않을까나. ㅎㅎㅎ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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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동준비

투덜일기 2012. 12. 20.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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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가 들어간 유일한 영어단어라나 뭐라나(이는 확실히 틀린 주장이므로 오해 없도록 미리 밝혀야겠다;; ㅋ), 그래서 누구에게든 선물하기 딱이라는 장갑. 우산이나 스카프처럼 사도사도 욕심이 생겨 겨울마다 기웃거리게 된다. 가죽장갑은 끼나마나 손시려울 것 같아 처박아둔지 오래고, 여러가지 장식 요란한 벙어리장갑은 아무래도 끼고 나서기 민망해진 나이라는 자격지심이 앞서고... 

결국 작년에 회색 털실장갑을 하나 사 끼었다. 또 '스님용' 장갑을 산 거냐고 놀림 좀 받았지만 내 마음에 들면 그만이지 뭐. 게다가 언젠가 쓸모가 있을 것 같아 사두었던 옷핀모양 단추도 직접 달아놓고는 어찌나 뿌듯하게 끼고 다녔는지.

그런데 지난번 영하 십몇도 혹한에 나가보니 안에 부숭부숭 안에 털이 든 이중장갑 끼고 온 사람이 몹시 부러워 올해 또 한 켤레 사들였다. 겨울엔 그저 오리털 패딩이 최고라며 기럭지 넉넉한 깜장 패딩과 함께 월동준비는 완벽하게 끝냈노라고 흐뭇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어젯밤 돌연 평범한 월동장비로는 버틸 수 없는 빙하기가 시작됨을 느꼈다.

그렇다면 답은 결국 상식이 통하는 따뜻한 곳(그런 곳이 정말로 있다면;;; 이라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지구 다 망가뜨리고 나면 다른 행성 개척해 떠나 살겠다는 허황한 꿈과 뭐가 다른가 싶긴 하다)으로 떠야하는 게 아닐까, 상투적이고 가볍기 짝이 없게도 그것이 제일 먼저 든 생각. 감상적 패배주의에 빠지면 안된다는데 난 꼭 그런 심정이다. 희망이 있나? 5년 전과 똑같은 기시감이 가장 두렵다. 절대로 깨어날 수 없는 악몽이 되풀이되고 있는 건지도.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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