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갈아입기

투덜일기 2010. 6. 24. 21:30

얼마 전 공교롭게 하루에 세번의 외출을 할 일이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매번 다른 옷을 입었음을 알게 됐다. 중간에 집에 돌아올 때마다 두번이나 다시 뒹구는용도의 옷으로 갈아입었으니 대체 하루에 옷을 몇번이나 갈아입은 건가. 참 내.
첫 직장이 의류관련된 곳이라 그때 세뇌된 것들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모양으로, 때와 장소 상황에 맞는 옷을 최대한 맞춰 입어야한다는 강박이 심한 편이다. 그러면서도 또 편한 걸 추구하는 귀차니즘까지 동원하고 앉았으니 결국엔 모순으로 스스로를 볶아치는 셈이다. 

오전중 첫 외출은 왕비마마의 병원이었는데, 오래 전 오로지 운전수 역할만 하면 될 땐 정말 일어나자마자 세수도 안하고 눈꼽만 대강 떼낸 뒤 야구모자 하나 질끈 눌러쓰고 아무 옷이나 걸치는 편이었지만 요샌 상황이 다르다. 진료실에 함께 들어가서 청력과 기억력이 모두 부실한 환자 대신 의사 얘기를 잘 듣고 질문도 던져야하기 때문에 잠옷 같은 옷을 걸칠 순 없단 의미다. 최소한 의료진 앞에서 보호자로서의 권위를 어느 정도는 내세울 수 있는 간편한 차림이 요구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7부바지는 인정하되 찢어진 반바지, 탱크탑류는  곤란.. 뭐 이런 식이다.) 환자나 보호자의 옷차림에 따라 의료진의 친절도나 진료의 질이 달라진다는 통계는 그 어디에서도 본 적 없지만, 껄렁껄렁 날라리처럼 하고 와서 쭈뼛쭈뼛 기웃대는 사람보다는 멀쩡히 차려입은 사람에게 좀 더 공손하다는 것이 그간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지론(또는 편견)이다.

오후 외출은 뙤약볕 아래 나서야 하기도 했고 요가 강습을 위한 거라 정말로 최대한 편하게 정말로 아무거나(반바지에 티셔츠) 입고 나갔다. 요가복을 따로 챙겨가긴 하지만 땀흘린 뒤에 입는 옷도 역시 편해야 제격. 직장인들도 요가학원에 많이 다니던데, 어휴 나 같으면 불편해서 다시 정장으로 갈아입는 짓 못할 것 같다. 마지막 외출은 간만에 동창들 만나는 자리인데 에어컨을 염려해 청바지도 긴 걸로, 상의도 소매가 좀 내려오는 걸로 선택했는데, 그러고도 버스안에서 덜덜 떨었으니 탁월한 안목이긴 했다. 

하지만 남들은 신경도 쓰지 않는 차림새 강박 때문에 종종 한꺼번에 후둘러 놓은 여러 벌의 옷을 보면 스스로가 참 한심스럽고 못마땅하다. 그렇다고 패셔니스타의 반열에 오를 만큼 뛰어난 센스를 발휘하는 것도 아니면서 왜 자유로워지지 못하는가 말이다. 하지만 잘 차려입고 아니고의 여부를 떠나서,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는 차림새로 외출한 경우(색깔 조화가 영 엉망이라든지--이 또한 순전히 주관적인 잣대가 적용된다-- 큰 맘 먹고 입었는데 치마가 너무 짧다든지!) 난 제대로 볼 일을 보지 못할 정도로 집에 당장 들어가 몸을 숨기고픈 충동을 느낀다. 한때 옷장과 서랍을 열면 죄다 검정색 아니면 회색밖에 없었을 시기가 있었던 건, 바로 색깔 조화를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 때문이었다. 하지만 또 내가 누군가. 싫증 잘내는 변덕쟁이로서 언제부턴가는 알록달록한 원색들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특히 여름철 옷은 서랍장을 연 순간 정신이 사나워질 정도다.

요번에 여름옷 꺼내면서 최근 3년간 안입은 옷 처리하기 원칙에 따라 꽤 많은 옷을 정리했다 싶은데도, 여전히 서랍장은 미어터지고 그럼에도 막상 입고 나가는 옷은 만날 그게 그거라 입을 옷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삶을 단촐하게 유지하고 환경을 생각하며, 동시에 소비활동으로 경제에 이바지하고 소소한 욕망도 채우는 중용의 삶은 참... 실천하기가 어렵다. 일단 옷에 대한 강박관념부터 벗어나야 할 터인데, 그런 날이 오긴 할까.
Posted by 입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