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연습

투덜일기 2010. 7. 7. 22:29

예전에 친할머니, 외할머니 두분 할머니댁에 놀러가보면 혼자 계실 땐 언제나 방을 깜깜하게 해놓았다. 쓸데없이 전깃세 많이 나간다는 것이 그 이유였는데, 내 눈엔 그게 그렇게 청승맞게 보여 싫었다. 그까짓 전깃세 아껴봤자 얼마나 아낀다고, 토굴 같은 어둠 속에 혼자 앉아 있는단 말인가. 낮에도 방방마다 돌아다닐 때 꼭 불을 켜야 직성이 풀리는 데 습관이 들어버린 나는 특히 여름엔 어두워야 더 시원하다는 논리로 밤중에도 좀처럼 전등을 켜지 않고 어둠속에 앉아 TV를 보시는 할머니들이 의아했다. 백열등이야 오래 켜두면 온도가 올라간다지만 형광등이나 할로겐 램프는 온도와 상관 없다고 극구 설명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최소한 두 사람은 모여야 전등을 켜는 게 낭비가 아니라는 할머니들의 절약정신과는 다르게 요샌 나도 종종 어둠이 편한 걸 느낀다. 가만 보니 낮밤을 바꿔살면서 전등을 환하게 켜고도 책 앞엔 보조스탠드까지 켜야 눈이 덜 피곤한 직업의 반작용인 듯도 하다. 작업을 할 때나 밥을 먹을 때, 엄마와 둘이 한 공간에 있을 때가 아니라면 깜깜한 어둠속에 늘어져 취하는 휴식이 어찌나 달콤한지. 낮에도 방에 들어가면 꼭 전등을 켜야 마음이 놓이던 습관은 낮에도 눈부신 인공조명에서 자유로운 어둑어둑한 실내에 앉아 있는 쪽이 편한 느낌으로 변하는 중이다.

과거 외국엘 나가보면 호텔이든 친구네 집이든 화장실 빼곤 죄다 어둠침침 간접조명으로 대충 밝혀놓은 실내가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었고, 가끔은 미칠듯이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다. 전등 스위치를 올리면 하얗게 밝아지는 실내 조명에 내가 그만큼 익숙해 있다는 의미였다. 우리나라도 인테리어에 신경을 좀 쓴다 싶은 사람들은 '촌스러운' 중앙 전등을 없애고 집에도 백열등 같은 간접조명으로 아늑하고 가라앉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게 유행된지 오래다. 작업실이 있을 때는 가끔씩 나도 은은한 백열등 스탠드 불빛 속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커피를 마시며 괜한 폼과 분위기를 잡아보기도 했지만, 평소에도 늘 그렇게 살라고 하면 여전히 답답함을 느꼈을 게 틀림없다.

물론 지금도 나름 어둠 속에서 익숙함과 편안 느낌을 키워가고는 있지만, 채광창이 많고 공간이 툭 트인 집에서 살고 싶다는 로망이 변함없는 걸 보면 본래가 토굴형 인간으로 태어난 건 아닌 모양이다. 인공 조명을 더하지 않아도 낮엔 충분히 환하고 밤엔 충분히 어두운 자연스러움을 선망하는지도.

어쨌거나 요즘 밤중에 일하다 말고 물을 마시러 부엌에 나가면 이미 눈과 몸에 익은 어둠 속에서 정확히 손을 뻗어 물컵을 집은 다음 정수기에 대고 손의 감각만으로 물의 양을 짐작하는 놀이를 즐긴다. 조바심을 내서 너무 빨리 포기하면 안 돼. 그렇다고 물이 넘치면 곤란하지. 손끝의 감각을 믿어보는 거야. 차디찬 냉수가 찰랑찰랑 차오르는 선을 손가락으로 느끼다 재빨리 컵을 떼 단번에 컵의 8부까지 성공시키면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찰랑찰랑 물컵을 들고 길게 늘어진 선풍기 전선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조심스레 거실을 지나 짧은 복도를 건너 환한 방으로 무사히 돌아오면 퍽이나 큰 성취를 한 느낌. 이른바 나의 어둠연습이다.

나의 할머니들이 굳이 전등켜기를 마다하고 어둠을 즐긴 이유는 어찌보면 꼭 전깃세 절약 때문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어둠이 편하고 시원하다는 느낌을 확실히 알 것 같은 요즘처럼 더운 여름날엔 더더욱. 삶은 확실히 직접 겪어봐야 한다는 진리와 함께, 차츰 내가 예전 할머니들과 가까운 세대가 되어감을 실감한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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