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칭

투덜일기 2010. 7. 6. 17:25


지난 토요일에 누군가 나를 '~~양'이라고 부르는 바람에 퍼뜩 얼굴이 뜨거워졌다. 바로 전에 거행된 성당 혼배미사에서 신랑신부를 '~~군, ~~양'이라고 불렀던 호칭을 당연히 여겼던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나에 대한 호칭은 갈수록 가관이 되어가는 중이다. '아줌마' 호칭에 적응하는 것도 어렵거늘 심심찮게 '어머니' 소리를 듣질 않나(마트 직원들은 제발 '손님'이라고만 불러주면 좋겠다! '어머니'들만 장을 보는 건 아니라고!), '사모님' 소리를 듣질 않나(부동산 텔레마케터가 전화 받자마자 대뜸 그러더라. "사모님, 파주쪽에 좋은 땅이 있어서 전화드렸습니다.")...

호칭 중에 내가 들어도 아무 거부반응이 안 드는 건 '언니, 누나('누님'은 좀 징그럽다), 고모, ~~야, ~~씨, 저기요' 정도다. 서비스업 종사자들에게 듣는 손님, 고객님 따위도 거북살스럽고, 출판계 종사자들에게 듣는 '선생님' 호칭도 민망하며, 드물게 방송업계에서 '~작가님'이라고 하면 와락 낯이 간지럽다. 나이차가 꽤 있지만 완전히 하대는 못하고 간간히 나를 '자기'라고 부르는 지인들도 있는데, 몇년째라 그나마도 익숙해지고는 있어도 그 역시 여전히 편한 호칭은 아니다. '자기' 대신에 차라리 이름 부르기 뭣한 온갖 상대를 아우르며 부를 수 있는 '저기요'가 더 좋다면 좀 이상한가? 온라인 공간에서 부르는 '라니님'이라는 호칭도 십여년이 다 되가니 익숙할 수밖에 없긴 한데, 닉네임이 간지러운 탓이라고는 해도 마냥 편하지는 않다. 내쪽에서 다른 블로거 이웃이나 온라인상에서 만난 대상에게 '님'자를 붙여 부르는 건 크게 어색하거나 힘들지 않은데 반해, '불리는' 입장을 굳이 불편해하는지도 모르겠다. ('님' 대신에 '니'를 쓰는 ㅌㄹ 마을 주민들의 호칭이 내심 몹시 흐뭇하면서도 또 잘 쓰지는 못하는 건 나의 유연성 부족 탓이다 ㅠ.ㅠ)

하루에도 수십번씩 불리는 입장이었던 직장 시절, 호칭은 나에게 꽤나 스트레스였다. 보수적인 분위기가 팽배했던 마지막 두 회사에서 여직원에 대한 호칭은 대개 성으로만 불리는 '미스~' 아니면 '~양'이었기 때문이다. 성과 이름을 다 붙여서 '~~~씨'라고 불러달라는 여직원회의 공식 요구도 젊은 직원들 사이에서나 통했을 뿐, 임원진들은 수십년째 입에 밴 'ㅂ양, ㄱ양'이라는 호칭 습관을 쉬 고치지 못했다. 심지어 "ㅂ양아, 이부장 들어오라케라."는 말투였으니 뭐. 똑같은 의존명사라도 '군'과 달리 '양'은 성 뒤에 바로 붙여 쓰면 비하의 뉘앙스가 느껴진다. '군(君)'은 '임금 군'자를 빌어쓰는 반면에 '양(孃)'은 뜻이 '계집애'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고, '군'이라는 호칭이 결혼여부와 크게 상관없이 친구들끼리 존대하는 의미로도 사용되는 데 반해 '양'은 결혼 이전에만 쓸 수 있는 말인데다 과거 일부 직업 종사자들을 하대하는 말로 쓰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인 물같은 보수 집단의 총체라고 할 수 있는 학교에선 여전히 '양'과 '군'의 호칭이 비하의 의미 없이 흔히 사용되고 있는 듯하고, 그 습관이 중년의 나에게도 '양'을 붙이는 촌극을 벌이게 했을 것이다. 그때 들을 때도 민망했지만, 언제 들어도 좋은 '학생' 호칭에 묻어가며 흐뭇해 했던 것처럼 당시엔 '~~~양'이라는 부름이 화들짝 놀랄만큼 낯뜨럽진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젠 제 아무리 비혼이라도 '양'은 중년의 나에겐 도저히 붙여선 안될 호칭이 아닌가 말이다. 

영어권에서 Miss는 나이와 상관없이 쓰이긴 해도 결혼여부를  드러내는 차별적인 호칭이라 Ms.가 생겨났다지만 사실, 우리나라엔 성차별마저 초월할 수 있는 훌륭한 호칭 '씨'가 있다. 성에만 붙이면 약간 비하와 하대의 느낌이 풍기지만 온전한 이름에 다 붙이면 또 달라지는 훌륭한 호칭이니, 이왕이면 앞으로도 늙을 때까지 나는 '~~~씨'로만 불리면 좋겠다. 회사 다니던 시절 나이는 많은데 직급이 없어서 '~~~씨'로 불리던 남직원들은 갓 스무살쯤 된 여직원들한테 그렇게 불리는 걸 몹시 기분나빠 했었다. 나는 오히려 그들의 생각이 고루해서 코웃음을 쳤고, 지금도 왜 그들이 그 호칭을 기분나빠했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아랫사람이 나를 '~~~씨'라고 불러주면 고마워 해야하는 게 아닌가! 노인이 된 후에도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 정체성을 이루어야 하는 '누구누구 부인, 누구누구 엄마, 누구누구 할머니' 대신에 간단히 '~~~씨'로 불리는 게 자존감을 위해서도 얼마나 좋은가 말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다녀간 택배 아저씨가 마당에서 "~~~씨!"라고 내 이름을 힘차게 외쳤고 나는 "네!" 큰소리로 반기며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왔다. 역시 서로 부르고 듣기 편한 호칭임에 틀림없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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