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의 꽃과 나무 전문가샘들께 들으니 아카시아가 아니라 ‘아까시’가 맞단다. 서양이름 아카시아는 열대 원산지인 다른나무라는 듯. 아무튼.. 어느새 갖가지 나무의 연둣빛 이파리 색이 점점 진해가는 가운데 달콤한 향기가 동네를 진동하는 계절이 왔고... 외출하려고 언덕길을 내려가다 머리 위로 드리워진 꽃송이를 보고는 그냥 지나치지 못해 휴대폰을 꺼냈다. 작년에도 아까시꽃 개화기록을 블로그에 했던가 안했던가. +_+a 아까시꿀 따는 거 딱 하나 용도 이외엔 토양에도 숲의 식생에도 죄다 도움 안되는 '나쁜' 나무라고 하지만 그래도 예쁘고 향기로워 나는 좋아할란다. 동네 축대 위, 시멘트 길 옆에서도 안죽고 씩씩하게 자라면 제 몫은 다 하는 거 아닌가 말이다. 잎줄기 하나 따들고 가위바위보 하면서 누가누가 많이 따나 내기할 친구가 바로 곁에 없는 것이 다만 섭섭할 따름이다.
캐나다를 떠나는 날 아침. 여전히 흐렸지만 차츰 날이 개려는 듯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파란 하늘이 보였다. 에잇! 우리가 떠나려고 하니깐 날씨가 좋아지고 난리! 아쉬워도 어쩌랴... 전망 좋은 호텔방 창앞에서 이리저리 풍경을 구경했다.
앞 건물 옥상 정원 부러워라;;
호텔 바로 건너편에 고급 아파트가 있었는데 아침 일찍 옥상 정원에 나와서 어슬렁 거리는 사람들 모습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저런 데는 월세가 얼마나 하려나 ㅎㅎ K언니는 마음에 드는 도시마다 아파트 하나씩 사놓고 싶다고 E언니에게 시세를 물었다.
암튼 밥보다 잠이 더 중요한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S가 국물 먹고싶다며 전날 저녁에 사놓은 '농심' 사발면(1개만 샀는데도 결국 남김)을 비롯해 먹어치울 게 너무 많았기에 우린 쿨하게 조식 뷔페를 포기한 뒤 방에서 각자 짐 챙기고 화장하는 동안 왔다갔다 주섬주섬 사과와 토마토, 우유, 견과류, 요구르트로 아침을 '배불리' 때웠다.
짐 가방을 다 챙겨 차에 싣고 10분쯤 거리에 있는 페리 항구로 향했는데, 아이고 입국 심사 대기만 1시간 30분이 걸린 끝에 드디어 10시 30분 배를 타고 다시 포트앤젤레스로 출발~.
항구 가는 길에 본 의회였던가 도서관이었던가 시청이었던가... ㅋㅋ 차에서 후딱 창문 열고 건진 사진
아마도 수상택시이거나 연안경비정인 듯한 동그랗고 귀여운 배한테 마음속으로 마구 손을 흔들며 단풍국에겐 작별을 고했다. 빅토리아 항구엔 파란 하늘이 본격적으로 드러나주시고... 쳇.
국경너머 포트앤젤레스에 도착하니 12시 또 점심시간이었다. 중간에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와 점심 먹을 음식점으 찾느니 차라리 점심 먼저 먹고 시애틀까지 내쳐 달리기로... 그러나 배는 안 고픈 상태이므로 이번엔 정말로 '간단하게' 수프나 먹자고 의견이 모아졌다. ^^;
그리하여 선택된 Toga's Soup House
여기선 정말로 버섯수프와 파니니, 커피만 먹는데 성공! 심지어 언니들은 커피도 한잔 덜 시키고는 뜨거운 물 달라고 해서 전날 산 허브차 티백으로 차를 제조해 마셨다.
커피 맛에 관한 한 워낙 내가 좀 까다로워서 ^^; 미국 커피는 어딜 가나 질보다 양이라고 시큰둥해 했었는데 이집 커피는 원두의 종류도 다양하게 선택해 시킬 수 있고, 역시나 커피 맛도 괜찮았다. 내가 딱 좋아하는 강배전, 쓰면서도 탄내는 아니고 구수한 맛이 났다. 흐뭇해 하며 리필해서 한잔 더 마셔주고도 컵에 잔뜩 따라가지고 차에 올랐다.
시애틀로 향하는 길은 올 때와는 다른 고속도로여서 주변 풍경도 많이 달랐던 것 같다. 메드퍼드에서 올라갈 때는 죄다 들판과 시골이었는데... 시애틀로 내려가는 길은 계속 도시 고속도로의 느낌. 마치 강북강변도로나 88도로를 달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
새삼 포트앤젤레스에서 시애틀까지 거리가 궁금해져 찾아보니 82마일이란다. 환산하면 130킬로미터 정도. 3시쯤 시애틀에 도착했으니 2시간 40분 걸린다는 저 시간도 얼추 맞았던 것 같음.
시애틀에 연중내내 그렇게 비가 많이 내린다고 들은 것 같은데, 우리가 갔을 때는 날씨가 완전 쾌청! 새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아주 가끔 떠다녔다. 미서부로 이민간지 30년도 넘은 S도 시애틀은 처음이라면서 신기해했는데 우왕... 샌프란시스코만큼이나 언덕 지형이 많았다! 언덕배기 우리 동네만 와도 S는 경사가 무섭다고 비명을 지르는데 ㅋㅋ 거의 45도쯤 느껴지는 급경사 일방통행도로를 잠시 오르내리며 호텔을 찾아가는 동안 S는 E언니의 운전솜씨에 계속 감탄했다. 자긴 이런 길 절대 운전 못한다면서...
암튼 가파른 언덕을 쭉 내려가 바닷가에 자리잡은 메리엇 호텔(Seattle Marriott Waterfront Hotel)에 체크인을 했다. 우왕... 역시 대도시에 있는 호텔답게 일단 건물도 높고! ㅋㅋ 규모도 크고 실내인테리어도 호화스러웠다. 일정 중 가장 큰 호텔이었던 것 같음. 그래서 E언니가 프런트데스크에서 수속 밟는 사이 우린 막 로비를 돌아다니며 구석구석 구경하고 촌스럽게 사진찍고 그랬다. ^___^
게다가 관대하게도 로비로 들어가는 현관 바로 앞에 커피머신이랑 주스, 생수가 얼음과 함께 마련되어 있어서, 음료수 마시며 로비에서 그냥 노닥거리기만 해도 흐뭇할 것 같았다.
저녁 7시부터 9시까지였던가... 식당 옆에 마련된 디저트 바도 무료이용가능하다고 했다. 좋았어, 오늘 저녁엔 달디 단 미쿡 디저트까지 먹어주마 작정을 했다.
E언니의 설명으론 곳곳에 걸린 그림도 가구들도 꽤 유명하고 비싼 거라고... Marriott 체인 중에서 오너가 신경을 꽤 많이 쓴 지점이라고 했다. 듣고 보니 쿠션 하나도 막 예사롭지 않게 보이고.. +_+
꽤 높은 층이었던 호텔방에 올라가니 무시무시한 테라스로 나가면 전망이 꽤 좋은 곳이었으나... 나는 차마 무서워서 테라스로 발을 못 내밀고 창문 안쪽에서 대충 풍경을 사진에 담았다.
카펫 무늬도 고급지다 ^^
벽 모퉁이에 매달린 페가수스 귀엽;;
테라스로 나가는 창문쪽으로 다시 찍은 사진... ㅋㅋ
실루엣으로 보이는 분은 수많은 멋진 사진을 공유해주신 K언니다.
방구경만 후딱 마친 뒤엔 부리나케 뚜벅이 시애틀 시내 투어에 나설 계획이었다. 일단은 시애틀까지 와서 들러보지 않을 수 없다는 스타벅스 1호점이 있는 Pike Place Market부터 가기로 했다. 다들 가보면 실망한다지만 어쨌거나 언니들과 S는 스타벅스 1호점에서만 파는 시그니처 머그잔을 여러 개 구입하는 게 하나의 미션이어서...
마음 편히 '볼일'을 좀 보고 내려오겠다는 언니들을 방에 남겨둔 채 나는 친구와 먼저 로비로 내려갔다. 호텔 건물 두채가 연결되어 있는 건지 ㄷ자 모양인지 암튼 로비 메인 출구 말고도 여기저기 후문이 있어서 호기심에 거리로 나갔는데 ㅋㅋ 호텔에서 나갈 수는 있어도 외부에서 열고 들어갈 순 없는 문이었다. 에고... 꼼짝없이 길바닥에서 기다리게 생겼네 젠장...
깃발 달린 데가 주출입구이고.. 노란건물 앞쪽 툭 튀어나온 차양 아래가 호텔후문이었다.
근데 호텔 후문 바로 옆 건물 앞에 어떤 아저씨가 검은 개를 한마리 데리고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아오.. 거리 사진 찍다 괜히 아저씨 인사를 받아주는 바람에 원치 않은 대화에 끌려들어갔다.
빤질빤질 윤기나는 털에 박힌 검은 눈도 잘 안보이는 늘씬하게 생긴 개였는데 그간 엄첨 심심했었는지(거리에 다니는 사람이 정말 드물긴 하다!) 이 아저씨가 막 괜히 친한 척하면서 자기 개가 very friendly하니깐 어서 만져보라 그러고... +_+ 주인 말을 들었는지 검은 개는 슬그머니 일어나서 나한테 막 코를 들이밀고... ㅋㅋㅋㅋ 개도 싫어하고 한국어 이외의 언어로 말시키는 사람 싫어하는 미쿡시민권자 S는 저만큼 홀로 달아나버렸다.
개 애호가도 아닌데 시애틀에서 괜히 남의 개를 쓰다듬어주고 앉아 있으면서 속으로 이 언니들 왜 빨리 안 내려오나 ㅠ.ㅠ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일어나 이 아저씨와 개를 벗어나나.. 그런 고민을 했다.
기다리던 언니들은 쉬 안 나타나고 결국엔 친구 핑계 대고 도망쳤던 것 같다. 뭐 암튼... 나름 재미난 에피소드와 사진으로 남았으니 됐다. ^^;
호텔에서 두세 블록 쯤 떨어진 스타벅스1호점엘 가보니 정말로 커피 사는 사람보다 기념품 사는 사람이 더 많고 줄도 꽤 많이 서 있었다. 가게가 워낙 작기 때문! 무시무시하게 생긴 옛날 인어그림을 별로 안좋아하기 때문에 나는 그냥 커피 맛이나 보련다.. 싶어 아이스커피를 주문했는데 우쒸... 왜 지들 맘대로 시럽을 넣어주고 난리?!
그럴 땐 주문 잘못 받았다고 반드시 바꿔먹어야하는 데가 미쿡인데... ㅠ.ㅠ 또 다시 줄 서기 귀찮아서 걍 참고 마셨다. 미치도록 달게 시럽을 넣은 게 아닌 걸 보면 분명 종업원이 실수로 찔끔 짜넣다가 말았다고 우리끼리 궁시렁거렸다.
보다시피 실내엔 자리 잡고 앉을 테이블도 거의 없다. 창가쪽으로 높고 둥근 탁자가 두세 개 정도 있었던 듯... 처음이고 한번이니까 찾아가보는 거지만, 굳이 또 갈 필요도 없고 아예 안 가도 그만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확실히 나는 스타벅스 팬이 아니여... ㅎㅎ
그치만 주변 거리와 시장은 구석구석 예쁘고 신나고 구경할 게 많았다! 아쉽게도 평일이라 임시 장터 같은 시장은 일찍 파하는 분위기라 좌판에서 파는 유리알 반지를 사오라는 친정엄마의 부탁을 들었던 S는 잠시 난감해했다.
분위기가 딱 연남동 동진시장 소품공방 같은 분위였던 공예품 좌판들은 이미 다 사라지고 간판만 남아있었고, 그나마 나머지 절반을 차지하는 꽃좌판들만 문 닫을 준비를 하면서 꽃다발을 막판 세일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꽃다발처럼 엄청 화려하고 포장기술 뛰어난 건 아니지만 하얀 종이에 둘둘 말렸어도 꽃 자체가 싱싱하고 탐스러운 꽃다발을 10- 20달러면 살 수 있었다.
여행까지 가서 꽃다발 사고 싶어 들먹들먹하는 내가 좀 웃겼지만 달랑 5달러에 떨이 판매하는 꽃다발을 본 순간, 하루만이라도 호텔방에 꽂아두고 즐기겠다면서 +_+ 굳이 내가 오지랖을 떨었다.
5천원의 행복이랄까나... ㅋㅋ 과연 꽃이 얼마나 갈지 그것도 궁금했다. 암튼 스타벅스 1호점 기념품 컵 보따리 대신에 나는 꽃다발을 들고 시장구경을 다녔고, 과일, 생선, 과자류.. 따위의 먹거리에 더 눈을 빛냈다. 생선 좌판에도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생선과 바다가재, 새우, 조개 따위가 예쁘게 진열되어 있었는데... 어딜 가나 생선가게는 호객행위가 심한가? +_+
조용한 과일가게 점원들과 달리 생선가게 주인들은 막 호객행위를 하며 자꾸 친한 척을 하려고 들어서 차마 민망해 사진도 찍지 못했다. 우쒸..
터키 갔을 때도 그러더니... 과일가게는 어디나 '깔별로' 종류별로 과일을 줄맞춰 진열해놓고 판다.
시장인데도(아니 시장이니까?) 당연히 한쪽 옆에 시식코너도 마련되어 있어서.. 이것저것 먹어본 우리는 딸기와 블루베리를 한봉다리씩 샀고, 과일과 야채를 말려 튀겨놓은 천연과자(?)도 한 봉지 사들었다.
그러고는 일단 짐이 많아 다시 호텔로 후퇴. 내 꽃다발이 창피해서 그러죠! 킥킥대며 언니들한테 난 꽃다발 한밤중까지 들고 다녀도 상관없다고 말했지만... 머그잔과 텀블러가 사실 너무 무겁긴 했다.
다시 걸어서 바닷가 호텔로 돌아가는데.. 우왕.. 저 멀리 뭉게구름은 예쁘고 햇살은 눈부시고... 홀로 길바닥에 앉아 있는 청년(?)은 어쩐지 크리스 마틴을 떠오르게 하고... ㅎㅎ 좋구나~
원래는 런던 아이 비슷한 Seattle Great Wheel도 갈 계획이었으나 다들 딱히 높은 델 좋아하지 았았고, 어차피 스페이스니들도 갈 건데 하며 멀리서 구경하는 걸로 때웠다. 풍경사진 왼쪽에 동그란 바퀴 같은 게 보인다.
벚꽃타령을 거의 해마다 빠지지 않고 하고 있는 건 매번 고백하지만 올해로 벌써 10주기가 되는 아버지에 대한 부채감 때문일 테고, 어쨌거나 올해도 집앞에 벚꽃이 만발했다. 동네 안산 벚꽃길도 지난 주말이 축제기간이었는데, 여의도 윤중로 벚꽃축제가 개화일 예측이 어긋나 망해버렸듯이, 이 동네도 엊그제 주말엔 꽃봉오리만 분홍색으로 열렸을뿐 3분의 1도 피지 않았다고 한다.
눈코뜰새 없이 바쁜 가운데서도 주말에 잠깐 엄마 모시고 작년처럼 앞산으로 봄소풍 갈까 했었는데 날도 흐려지고 꽃도 없다니 일단 패스~. 그치만 엄마도 나도 하루하루 팝콘처럼 터져가는 집앞 살구나무와 벚나무 꽃을 매일 베란다에 나가 사진에 담으며 좋아라했다. 꽃놀이가 따로 있니, 이런게 꽃놀이지, 밖에 나가면 시끄럽고 정신만 사납다, 라고 엄마가 말해주어 일단 안심했다.
블로그에 자랑할 만개일을 며칠로 해야하나 분홍분홍하게 꽃눈이 올라올 때부터 관찰하고 있었는데, 지나고 보면 늘 그래왔듯 꽃이 피기 시작하면서 봄비가 한번 내렸다. 요즘 미세먼지가 좀 독한가. 혹시 올해 벚꽃은 누렇게 미세먼지에 뒤덮여 망하는 게 아닌가 걱정했으나 결국 그건 기우였다.
나무 심으라고 하늘에서 일부러 비를 내린 건지, 후두두둑 빗방울이 떨어지던 4월5일 식목일에 담은 살구꽃과 벚꽃이다. 한 10분의 1쯤 피었다고 해야하나.
4월5일 살구꽃
4월 5일 벚꽃
비가 내리고 나서 미세먼지가 물러가 새파란 하늘이 드러났던 4월 7일 금요일. (사진을 매일 찍은 게 아니었나보다. 켁..) 살구꽃은 이미 꽃잎이 막 떨어지기 시작했다.
4월 7일 살구꽃
이 살구꽃 사진 찍어 놓고 들여다 보며 혼자 우와 이거 고흐의 아몬드꽃 필 나는데! 라며 혼자 좋아했었는데 이제보니 하나도 안 그렇다. ㅠ.ㅠ
햇살이 찬란해서 오히려 벚꽃이 잘 안나오는 것 같이 필터를 사용했더니만 또 너무 밝다.
4월 7일 금요일
이미 난 이날로 벚꽃 만개선언을 해야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었다. 벌도 엄청 날아들어서 베란다 나가기 좀 무섭고... 살구꽃은 꿀이 많은지 이상하게 생긴 새들이 날아와서 막 꽃을 쪼아먹기도 했다.
그러나 토요일 아침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니, 우왕 어제와는 확실히 다르게 꽃이 더 풍성해졌다. 드디어 다 피었군 싶은 느낌. 탐스러웠다.
4월 8일 역시나 필터 사용
필터 없이 그냥 좀 당겨서 찍었더니 이런 색감이 나왔다. 흠.. 이것도 예쁘다. 근데 나 참 사진 못찍는다. ㅋㅋㅋ
4월 8일 토요일
그리고는 드디어 오늘... 살구꽃은 절반 이상 다 떨어져 마당에 나뒹굴고, 벚꽃도 한잎 두잎 떨어져내리기 시작했다. 앞산 벚꽃길엔 아직 절반도 다 안피었다는데... 우리집도 언덕이건만, 산밑이라 공기가 더 차가운 건지 높이 몇십미터 차이로 같은 동네라도 개화시기가 그렇게 다르다.
뻔뻔하고 찌질하고 치졸하게 버티던 안하무인이 드디어 제집으로 돌아갔다는 뉴스를 보았다. 지난 금요일에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을 듣고 감격해 낮술을 마시며 축배를 들면서도, 아직 갈 길은 멀었음을 알고 있었다. 청산해야할 적폐와 비리가 어디 한두 가지라야 말이지. 아무리 역사는 반복되는 거라지만, 80년대에도 90년대에도 세상이 달라질 거라며 감격의 축배를 든 순간이 있었다. 물론 달라진 부분도 있었으나, 변화의 추진력이 꺾여 과거로 회귀한 것도 많았고 최근 10년은 확실히 삶이 더 팍팍해졌다. 게다가 감히 그 파렴치한 입으로 또 다시 진실 운운하는 헛소리가 나오는 걸 보면, 과연 그 여자가 정신 차릴 순간이 오긴 할 것인가 의심스럽다. 원래부터 정신 차리기를 기대하기 어려운 괴물일 수도 있겠고.
암튼 어제 축제의 한마당이 되었다는 광화문에는 선약이 있어 나가지 못했다. 마지막 촛불집회이길 바라며 3월 4일에 광화문광장으로 나간 이유도, 실제로 촛불을 들 마지막 기회일 거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어제 저녁, 거의 매번 광화문에 동행했던 후배 하나가 사진을 보내왔다.
하하하하... 재기발랄하기도 하지!
포장마차에서 오뎅을 사먹진 않았지만 우리도 호떡은 사먹었고 주로 배낭에 빵과 과자, 뜨거운 커피와 차, 과일을 바리바리 싸들고 나가 구호 외치는 틈틈이 우걱우걱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머릿수 채우러 나갔던 것도 맞고.. ㅎㅎ
노발평화상장은 탐나지 않는데 촛불 배지는 너무 예쁘잖아! +_+ 아이고 갖고 싶어라...
집회 끝나고 행진이 시작되고 나면 어느새 해방구처럼 변한 청진동 서촌 앞길과 세종로, 종로 일대에서 딱 한사람만 없으면 정말 축제로구나~ 느꼈던 게 한두번이 아니었다. 분노도 분노려니와 그런 행복한 추동력이 다섯달에 이르는 긴 촛불 역사를 가능하게 했겠지 싶다.
미국 대선에서 저들은 저급하게 굴어도 우린 고급지게 가자(When they go low, we go high.)고 했던 미셸 오바마의 말이 새삼 떠오른다. 태극기 부대가 아무리 지저분하고 비논리적이고 폭력적으로 헛소리를 지껄이며 죽창과 야구방망이를 휘둘러대도, 촛불집회는 괜한 꼬투리 하나 안잡히겠단 신중함으로 어찌나 품위를 잘 지켜냈는지.
집회 중간에 한장한장 빨간 종이 나눠주고 다니시던 할아버지 새삼 존경합니다..
당장 퇴진, 퇴장하라는 의미로 연출한 레드 카드 퍼포먼스마저도 왤케 아름답기만 했던지, 분노조절이 잘 안되서불끈불끈 수시로 뒷골을 잡던 나와 후배들은 너무 감상적인 거 아니냐고, 촛불이 더 이상 예쁘기만 하면 안되는 거 아니냐고 궁시렁궁시렁거렸었다.
물론 분노와 슬픔마저도 아름답고 우아해서 더 감동적이고, 간간이 유머와 센스가 하늘을 찔러서 더 유쾌했던 건 사실이다.
노발평화상을 준 주체로 적혀 있는 '앞으로 태어날 후손 드림'이란 글귀를 보니 휴대폰에 든 사진이 또 한 장 떠올랐다. 역시 3월 4일 집회에서 머릿수 채우는 역할은 다 했으니 헌재쪽으로 행진은 생략하고 슬슬 고픈 배나 채우러 가자며 인사동으로 향하는 길에 만난 귀여운 후손님의 사진이다.
초상권을 우려해 뒤에서 몰래 한 장 찍었더니만 앞에서 찍어도 된다고... 흔쾌히 v도 그려주신 호피 패션의 아기!
다들 사진을 찍으며 이런 아이가 행복하게 살 미래를 위해서라도 우리들이 촛불을 들어야하느니라.. 그런 말들을 했던 것 같다.
꽃샘추위는 아직 한참 남았겠지만 나가보면 확실히 햇볕도 바람도 달라졌다. 봄 기운이 반가운 것과는 별개로 걱정은 계속 이어진다. 대선 정국에 휘말려 이제 겨우 진행되고 있는 비리 수사가 덮이면 안되는데, 세월호 인양도 진상조사도 더 늦어지면 안되는데, 끝까지 파헤쳐서 그네를 구속시켜야하는데... 또 두눈 부릅뜨고 두고볼 일이다.
5월의 나무 색을 가장 좋아한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지구온난화 때문인지, 내가 좋아하는 연두색 이파리는 이제 4월에 볼 수 있다. 5월이 되면 이미 색이 너무 진해질 것 같은 안타까움.
아카시아꽃도 5월에 핀다고 믿었으나 지는 벚꽃 옆에 벌써 피어나 향기를 뿜고 있었다. 지구가 덥다덥다 비명을 지르고 있는 건 아닌가. 어쨌거나... 흐린 4월 어느날.. 멋진 나무들과 여린 연두색 잎들을 실컷 보고 돌아왔다. 날이 너무 흐려서 나무들은 죄다 검게 나왔군. ㅠ.ㅠ
그나마 제대로 나뭇잎 연두색이 담긴 사진은... 너무 새빨개서 섬뜩하기까지 했던 철쭉꽃 저 뒤쪽에 얼핏 담긴 나무들이다.
8년전부터 이 동네 벚꽃 축제는 내게 부채감을 안겨주는 은근한 압력인 관계로 올해도 효녀 코스프레에 나섰다. 공식 축제가 내일부터인줄 알았던 건 나의 착각. 마침 오늘부터 시작이라 오전부터 사람들이 득시글득시글... 그늘 벤치 차지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래도 꽃그늘에서 김밥먹고 축하공연 리허설 잠깐 본 걸로 만족. 한들한들 봄바람에 벌써 꽃비가 하염없이 날리고 있었다. 그날 밤처럼 ㅠㅠ
이곳의 명물 수양벚꽃은 해마다 점점 볼품없어지는 것 같다. 왕비마마 말씀으론 나무가 늙어서 그렇다고...
후배가 대림미술관 전시 초대권이 있다고 해서, 아무 정보도 없이 그냥 가자 가자 날을 잡았다. 봄맞이도 할 겸, 전시를 보고나선 서촌을 거닐다 수성동 계곡과 인왕산 둘레길도 걷자고 했다. 문제는 여럿이 시간을 조율한 날짜가 '일요일'이었다는 것.
유명한 대규모 기획전시도 아니고 뭐 어떻겠어 막연히 짐작했으나 그건 우리의 오산. ㅠ.ㅠ 일요일 오후 대림미술관은 초대권교환부터 입장까지 구비구비 줄을 서서 3, 40분 기다렸다 들어가야했다. 전시장 내부도 당연히 사람들로 바글바글... 앞사람과 간격 유지하며 관람해달라고 진행요원들이 간간이 막 채근하는 분위기였다. 아이고...
째뜬 공짜란 말에 무슨 전시인줄도 모르고 무작정 보러간 거 치고는 몹시 뿌듯한 관람이었다. 5천원 내고(회원할인 받으면 3천원) 보라고 해도 아깝지 않았을 것 같았다.
올해의 '컬러'가 '로즈쿼츠'(Rose Quartz)와 '세레니티'(Serenity)라는 요상한 이름의 분홍색과 하늘색이란 걸 혹시들 아시는지? 해마다 패션계와 디자인계에서 유행할(?) 색깔을 미리 지정하는 건지 어쩐지 암튼 매년 연초가 되면 그해의 색깔이 발표되고, 여러 브랜드와 디자인 업체들은 또 색깔로 열심히 상품을 만들어 선을 보인다. 과연 얼마나 팔리는지는 내 알바가 아니고... ^^
위 사진 맨 위에 적힌 '팬톤'이라는 회사가 바로 해마다 색을 정하는 곳인데, 색과 관련된 디자인과 패션계에선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표준 색상을 관장(?? 맞는 말인가 모르겠다;;)한다. 미묘한 톤과 채도와 명도가 다른 색깔에 대해서 서로 설명하고 전달할 때 기준이 되는 셈.
소싯적 나의 첫 회사가 미국 의류회사였던 관계로 사무실에 팬톤 컬러북이 있었고, 뉴욕에서도 디자이너가 샘플을 의뢰한다든지 나염, 염색 색깔을 지시할 때 '페덱스 상자'에 고이고이 담아 '오리지널 컬러'라며 보내오던 우표만한 컬러칩이 어찌나 앙증맞고 예쁜지, 또 색깔 이름은 얼마나 영롱하고 기발한지 ㅋㅋ 심심할 땐 컬러북 넘겨보며 괜히 시간을 때우기도 했었다.
암튼... 그 추억의 팬톤 컬러북 선망은 아직도 종종 수십만원, 백수십만원에 이르는 팬톤 컬러북 시리즈를 '쓸데없이' 소장하고 싶다는 욕구를 일으키는 바.... 가끔 팬톤 코리아 홈페이지에 가서 괜히 이것저것 펼쳐보는 신세다 내가.
아 근데!
대림 미술관에 갔더니만 뙇~~!! 마침 팬톤 컬러와 연계된 색채와 디자인 전시가 아닌가! 하하하하...
팬톤 컬러칩과 어울리는 일상의 물건들 사진과
미묘하게 다른 사람들의 피부색...
알록달록 무지개처럼 물들인 펠트지와 가죽들(캠퍼 제품에 사용되는!)
그리고 그밖에 영롱한 색감을 자랑하는 인테리어 소품, 의자, 장식품들이 주르륵 전시되어 있었다.
대림미술관의 좋은 점은 사진촬영을 막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티켓이나 인증샷이 있으면 전시를 얼마든지 또 보러가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늘 입소문을 타고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이겠지...
파스텔톤으로 물들인 유리 촛대 작품들은 '이딸라'의 공방에서 나온 거란다.
북유럽풍 인테리어와 식기들이 몇년전부터 대유행이고, 나 역시 '이딸라' 접시들을 갖고 싶어서 호시탐탐 노리기만 할 뿐 차마 비싸서 사지 못하고 있었는데 핀란드 이딸라가 처음 시작은 유리공방이었다는 듯. 내가 무셔워하는 새 모양유리공예품들이 많아서 그쪽은 대충 휙 보고 이 영롱한 파스텔톤의 유리 촛대 구경만 실컷 했다. 하나에 45000원이던가.. 아트샵에서 살수도 있음. 근데 예쁜 색은 없었어!(라고 믿음 ㅋ)
의자들을 벽면에 색깔별로 높이놓이 쌓아놓았던 전시실에서... 그 유명한 임스체어부터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여러 브랜드의 의자들을 바라보며 침 깨나 흘리기도 하고...
3, 4층에 마련된 다채로운 인테리어 중에 하나 갖는다면 어떤 걸로 할까 괜한 고민도 하고...
하여간에 알록달록 눈이 즐거운 전시였다.
마지막 사진은 소파도 너무 귀엽지만... 왼쪽 도자기 소품을 눈여겨 봐야한다는 것. 베르메르의 하녀그림과 어울리는 위치에 도자기 주전자를 놓았다. 건물 창문과도 절묘하게 이어놓은 창틀 디자인도 예쁨.
빨간날이라서 논다는 것 말고는 (어차피 준백수 프리랜서에겐 빨간날도 큰 의미는 없다) 대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 날이지만... 그래도 '불자'이신 왕비마마에겐 퍽 중요한 날이고, 가뜩이나 요즘 맘고생이 심하신 걸 아는지라 동네 개천변에 만들어놓았다는 '코끼리등과 사자등'을 보러 부처님오신날 저녁 밥먹고 나서 슬슬 산책에 동반해드렸다.
위로도 잘 크고는 있지만 그래도 제 사촌들보다는 자꾸만 옆으로 늘어나는 비중이 큰 조카 ㅈㅎ이도 억지로 운동시킬 겸 끌고 나갈 요량이었는데, 이 짓궂은놈 좀 보게. 굳이 방울토마토를 지퍼백에 싸가지고 나가서 먹겠다고 우겼다. -_-; 그러더니 걸어가는 내내 굳이 토마토 봉지를 내게 들게 하고는 하나씩 꺼내먹으며 하는 말. "지금 나와서 걸으며 소모하는 칼로리보다 이거 한 알 칼로리가 더 높을걸! 흥!" ㅠ.ㅠ 내가 졌다....
개천변 산책로엔 코끼리등과 사자등만 켜놓은 게 아니라 꽤 큰 등 4개를 밝혀놓았고, 어느 사찰에서 주최를 한 건지 뭔가 요란하게 석가탄신일 축하연 같은 게 벌어지고 있었다. 성악가들의 합창이 스피커에서 왕왕대며 흘러나오고.... 아 젠장. 시끄럽고 사람 많은 거 딱 질색인데... 아이팟까지 귀에 꽂고 나간 조카는 시끄러워서 자기 음악 안들린다고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빨랑 집에 가자고. ㅋㅋ 그러나 왕비마마는 은근히 성악 공연이며 대금 연주에 관심을 보이는 눈치이니 곧장 들어올 순 없었다. 애당초 명색이 부처님오신날 기념 왕비마마 위로차 나간 밤산책인데.
해서 적당히 어슬렁거리다 시끄러운 산책로를 등지고 돌아왔다. 마침 사회자가 이상한 음악 틀어놓고 사람들 무대로 나와서 춤추게 하려는 순서여서 단호히 일어설 수 있었던 것. 그런 건 울 엄마도 민망하고 주책스럽다며 싫어하셔서 어찌나 다행인지. 원래 '동이족이 음주가무를 즐긴다'고 중국 역사책에도 나와있다지만, 아오... 우리나라 사람들 누가 시키기만 하면 장소불문하고 뛰쳐나와 춤추고 노래하고 신명나게 노는 거 나로선 좀체 이해가 안되는 게 사실이다. 그런 용기와 끼는 다들 어디에서 나오는 건지 원.
째뜬 이번 행사를 위해서 새로이 만든 건지, 광화문 연등행렬 할 때 썼던 걸 재활용한 건지 알 수는 없지만 봄밤에 밝혀둔 코끼리등, 사자등, 부처등은 다 예뻐보였다. 왕비마마는 오전에 절에 가서도 열심히 '우리의 웬수바가지'를 위해 특별축원을 하고 기도를 했다는데 과연... ^^ 종교도 회의적이지만 특히 기복 신앙은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엄마의 기도는 늘 짠하고 안쓰럽다.
아참.. 나는 방울토마토 지퍼백 들고나가느라 휴대폰도 안 챙겼기 때문에 사진촬영은 ㅈㅎ이가 협조해주었다. 아이폰6는 야경에 강하다더니 역시... 나도 얼른 바꿔야겠다! (뜬금없는 결론이네 ㅎ 그치만 꽤 멀리 개천 안쪽에 설치된 등을 줌으로 당겨 막 찍었는데 이 정도면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