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82건

  1. 2013.09.11 조선의 못난 개항
  2. 2013.07.12 비오는 날 경복궁 4
  3. 2013.06.07 타블로이드 전쟁 3
  4. 2013.03.27 불충분한 느낌 10
  5. 2013.01.11 2012년 나의 BEST 14
  6. 2013.01.05 2012년에 읽은 책 6
  7. 2012.12.21 책 비닐 3
  8. 2012.09.12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6
  9. 2012.03.06 윌리 로니스 - 그날들 13
  10. 2012.02.01 정년 16

 

궁궐 관련해서 역사강의를 들으러 좀 다니면서, 19세기말 20세기초 조선이 처했던 국제정세와 비교할 때 현재 G2로 부각한 중국과 G3나 다름없는 일본 사이에 끼어 대미관계를 고민하는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이 사뭇 비슷하다는 말을 꽤 들었다. 아시아로 몰려든 서양열강의 제국주의 압박 속에서 외세에 기대어 눈치를 보다 나라를 잃었던 조선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대한민국도 정신 똑바로 차려야한다고 말이다. 정치인들도 똑같이 그렇게 느끼고 있는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짜증스러운 망국의 역사라 별로 관심없었던 근대에도 요즘 새삼 눈을 돌려 이 책을 읽게 됐다. '일본은 어떻게 개항에 성공했고 조선은 왜 실패했나'라는 이 책의 부제 그대로 그 내막이 실로 궁금했고, 과거엔 나라 빼앗긴 무능한 왕이라고만 여겼던 고종에 대한 평가가 최근들어 달라져 여기저기서 그를 '나름대로' 독립을 위해 노력했으며 신문물 도입과 개화에 힘쓴 개혁군주로 그려내고 있는 점도 호기심이 일었다. 고종이 진짜 그랬다고? 이미 까마득하지만 중고등학생 때 배운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정말로 시대착오적인 잘못이었고, 대한제국을 선포해 나라의 위신을 세우려 했던 고종의 눈물겨운 근대화 시도는 단순히 일제의 횡포 때문에 실패했을까? 

 

문소영 지음, 역사의아침, 2013

제목에서도 이미 짐작할 수 있듯이, 저자는 조선의 근대화 실패가 일본과는 확연하게 달랐던 사대부들의 고리타분한 사상과 내부적인 준비부족, 세계정세에 어두운 편협한 시각, 국가재정의 궁핍 등을 원인으로 삼는다. 그리고 특히나 몇번 개화파가 시도했던 근대화 개혁의 기회 앞에서 고종은 걸림돌 노릇을 톡톡히 했다. 당시 고종과 개화파들의 의식수준이라는 것이 기껏해야 '뛰어난' 동양 사상은 고수하며 서양의 앞선 기술만 도입하자는 '동도서기'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도 한계였다.

 

일본의 사무라이 계급과 다이묘들도 구한말 한학자들과 양반 못지않게 처음엔 개항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무력봉기를 시도하기도 했지만, 결국 메이지 유신을 성공리에 이끌 수 있었던건 주요 반대인사들이 직접 유럽과 미국을 유람하며 앞선 산업기술과 '대세'를 실감한 뒤 방향을 전환했고 거국적으로 서양문명과 합리적인 서구 사상까지 받아들여 부국강병에 힘썼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조선은 서양으로 유학을 떠났던 인물의 경험과 깨우침이 제도개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사적인 에피소드로 남았을 뿐, 근대화와 관련하여 변덕이 죽끓듯 했던 고종의 정책과 입맛에 따라 일부 개화파는 일본으로 망명을 해야할 정도였다. 부국강병에 힘쓰는 대신에 자꾸만 외세나 끌어들이고 말이지...

 

갑신정변과 갑오개혁 같은 위로부터의 개혁 가능성은 물론이고, 임오군란과 동학농민운동 같은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가능했던 순간에도 고종과 관료들은 항상 청나라와 일본에 기대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결과적으로 청나라 군대와 일본군대가 한반도에 상주하는 빌미만 제공하고 말았다. 물론 호시탐탐 외세가 노리고 있는 상황이라고는 해도 왕권약화는 고종의 자업자득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16세기 이후로 조선이 모든 분야에서 진취성을 잃고 자만하여 퇴행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정말이지 구한말의 역사는 읽고 있다보면 혀를 끌끌 차게 되거나 부아가 치밀만큼 안타깝다. 나 역시도 그렇기 때문에 굳이 들여다보려하지 않거나, 단편적인 역사적 사실을 빌미로 최대한 그 때를 미화해 생각하려는 태도를 취했던 것 같다. 가령,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환궁우를 지어 조선왕조 500년간 중국 눈치보며 알아서 기느라 못했던 천신제를 올렸다든지(제후국의 왕은 감히 하늘에 제사를 지내지 못한다는 것이 중화의 질서;;),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한지 불과 8년만에 아시아 최초로 경복궁 건청궁 일대에 전깃불을 설치할 만큼 고종이 신문물 도입에 관심이 많았다든지(경복궁 향원정 옆에 가면 '전기발상지' 표석도 있다), 헤이그밀사 파견으로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알리려 했다든지, 왕실 사유재산인 내탕금을 털어 워싱턴에 주미공사관 건물을 매입해 자주외교의 노력을 했다든지, 고종이 순순히 양위를 거부하다 순종의 즉위식에 참석을 안했다나 뭐라나(그러나 관련자료 사진을 보면 고종과 순종 모두 즉위식에 참석했을 확률이 높다;;; ㅋ).....

하지만 분명한 건 제국주의 시대에서 조선말의 행보는 분명 잘못된 것이었고 개화노력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으니 '나름대로의 노력' 정도로는 확실히 부족하다. 남탓만 하는 것도 웃기는 노릇이고 말이다.

 

이 책의 저자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다. 이 책 이전에도 조선의 근대와 관련된 책을 썼나본데 '일개 기자' 따위가 언급할 내용이 아니라는 학계의 비판도 있었다고 서문에 적혀있다. 아니, 역사책은 꼭 역사학자만 써야하나? 쳇... 그렇다고 이 책이 흥미위주로 가벼운 것도 아니다. 1, 2차 사료들을 충분히 공부하고 기존 역사학자들의 연구내용을 바탕으로 비교분석했기 때문에(물론 그래서 인용문도 많음) 꽤나 공부삼아 읽어야 했는데 나로선 재미도 쏠쏠했다. 그나저나 근대 조선말과 고종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한 백년쯤 더 흘러야 객관적으로 자격지심 없이 담담히 이야기할 수 있으려나. 역사학계에선 여차하면 서로 식민사관이라고 공격질을 해대니 참 어떤 견해가 옳은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조선말 고종과 양반들은 너무 무지했고 무능했다는 견해가 옳다는데 나도 동감. 그런데도 고종 승하 후 온 백성들이 덕수궁 앞에 몰려가 통곡을 했던 건 고종을 애정해서가 아니라 그냥 절대왕권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조건반사 행동이 아니었을까. 내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바에 따르면, 독재자 박통이 사망했을 때도 소복 입은 시민들이 연도에 늘어서 통곡을 했었단 말이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신채호 선생의 말쌈이 새삼 자주 떠오르는 세상이다.

 

 

흥선대원군 체제에서 오히려 조선은 개혁되고, 부강하고 강력했다. (33쪽)

 

조선이 새로운 정보를 취득할 수 있는 통로는 청나라와의 사신 교류와 임진왜란 이후 정례화된 일본과의 통신사 교류였다. 그러나 이렇게 얻은 정보는 서적으로 출판돼 널리 공유되기 보다 개인문집으로 남아 사장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중략) 성리학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이단으로 치부하는 노론식 사고방식과 국정운영이 16세기 말부터 조선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었다. (98쪽)

 

그렇다면 1910년 8월까지 황제의 자리에 올라 있었던 순종이나, 1863년에 왕좌에 올라 1907년까지 44년간, 특히 마지막 10년은 황제로까지 불렸던 고종에게는 아무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일까? 일본에게 받은 은사금이나 작위만 가지고 따져보면, 고종이 가장 많은 은사금과 가장 높은 지위를 보장받았다. (119쪽)

 

1873년-94년 사이에 민씨가문 사람들이 전보다 많이 등용됐으나 결코 조정을 손아귀에 쥐고 휘두를 정도는 아니었다. 민씨로 삼정승에 오른 사람이 1878년 잠깐 우의정이 됐다가 사망한 민규호 하나뿐이었다. 명성황후와 민씨가문은 고종이 가장 든든해할 보좌역을 했을지언정 고종을 압도하거나 대신할 힘도 의지도 없었다. (123쪽)

 

21세기 들어 고종에 대한 이미지가 바뀌고 있다. 이전까지만 해도 유약하고 무능해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로 갖다바친 왕이 고종이었다. 권력욕에 날뛰는 아버지 흥선대원군에게 치이고, 아버지가 하야한 뒤에는 드센 아내 명성황후에게 휘둘리면서 민씨 외척세력에게 권력을 내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대한제국을 선포해 땅에 떨어졌던 나라의 위신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대한제국 13년 동안 근대화에 온몸을 불사른 왕으로 칭송되고 있다. 외교에도 남다른 탁월한 실력을 발휘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어찌된 영문인가? (146쪽)

 

일본과 조선의 차이는 농민운동을 바라보는 개화 지식인들의 폐쇄적인 사고와 신분적 질서를 완고하게 강조하는 태도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깨우치지 못한 동학 농민군을 탓하기보다는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하는 지식인으로서 조선의 선비들이 더 부끄러워해야할 일이었다. 구한말 조선의 양반들은 조선을 위기에서 구해낼 수 있을만한 사상으로 재무장하지 못했다. (210쪽)

 

고종은 미국을 믿었으나 미국은 두차례나 일본과 밀약을 맺으며 조선의 뒤통수를 쳤다. (248쪽)

 

조선 근대화 성공의 유일한 방법은 개화파와 고종이 협력해 제도개혁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을 통해 드러나듯이 근대화를 유효하게 추진할 제도개혁이 왕권을 제약하게 되면 왕이 협력하지 않았다. 왕이 개혁의 걸림돌이었던 것이다. (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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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 경복궁

놀잇감 2013. 7. 12. 17:34

유홍준 교수가  부제를 '인생도처유상수'로 붙인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권에서 그랬다. 경복궁 근정전은 비 많이 내리는 날 가보아야 그 진가를 감상할 수가 있다고. 그래서 내심 장마기간 동안 기대하고 있다가 꽤나 비가 철철 내리는 날 어디 진짜 그런가 살펴보았다.

흥례문 행각, 근정문 앞마당 구석에서 찍은 사진이다. 뒷배경의 북악산에 드리워진 비구름과 어우러진 모습이 꽤나 매력적이다.  


그러나 내가 궁금했던 건 정말로 근정전 앞 조정바닥에 깔린 박석 사이로 물길이 휘휘 돌아 흘러 배수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가 하는 점! ^^; ㅋㅋㅋ 배수구로 연신 물이 빠져나가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군데군데 낮아진 박석 주변엔 어쩔 수 없는 물웅덩이가 보여, '개뻥 아냐!'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____^ 내가 조정에 얕게나마 물웅덩이 있다고 투덜대니까, 저 정도면 물 고인 거 아니라고... 집중호우 쏟아져도 강남사거리처럼 물바다로 변하진 않는다고...

째뜬 장화신고 가길 잘했다고 생각이 들만큼 궁궐 마당엔 군데군데 물웅덩이가 생겨났다는 것이 현실이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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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콜린스 지음/홍한별 옮김/양철북(2013)

'문학 탐정'이라는 별명에 딱 맞게, 폴 콜린스는 이번에도 19세기말에 벌어진 엽기적인 살인사건의 흔적을 낱낱이 추적해 '황색 언론'이 탄생하게 된 현장을 재조명했다. 더불어 미스터리로 남았던 사건의 진실까지 추리해낸다. <토머스 페인 유골 분실사건> 때도 느꼈지만, 추리소설 뺨치는 흥미진진한 서사와 전개는 이제껏 읽어본 다섯권 가운데 이 작품이 '갑'이다. 법정스릴러 소설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음.

 

게다가 언론과 문학 부문에서 미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상의 주인공인 조지프 퓰리처가 지독한 특종 경쟁과 부수 전쟁에서 승리하려고 온갖 꼼수와 불법을 자행한 언론인의 표상이었다니! 후발주자로 나서 막강한 자금력으로 승승장구하는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의 <뉴욕 저널>에 맞서기 위하여 퓰리처의 <뉴욕 월드>가 벌인 선정적인 폭로전 양상은 정말이지 요즘 인터넷이며 종편 매체가 하는 짓거리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역사는 반복된다더니, 뻥 터뜨렸다가 아님 말고, 식의 황색 언론 보도행태가 이토록 강력한 전범을 갖고 있을 줄이야.

 

1897년, 이스트강에서 엽기적인 토막사체가 발견된다. 방수포에 꽁꽁싸서 묶어 강에 던진 꾸러미를 발견한 건 강에서 놀던 아이들. 시신의 신원과 살인범을 찾기 위해 뉴욕 전역을 뛰어다니는 건 경찰보다 먼저 두 일간지의 기자들. 당시엔 기자들도 배지를 번쩍이고 다니며 경찰 못지 않은 특권을 누렸던 모양이다. 게다가 신문사는 아예 탐정단을 꾸려 경찰보다 앞서서 사건수사에 개입한다. 수사 진행은 아예 기자들이 먼저 발견하고 선점하고 빼돌린(!) 증거와 증인의 인터뷰 기사를 바탕으로 진행될 정도다. 매일같이 엽기 살인사건과 관련된 따끈한 뉴스가 1면에 대문짝만하게, 그것도 컬러 삽화를 곁들여(사건 현장 지도는 물론이고, 희생자의 손 그림까지 생생하게!) 실린 걸 보게 되다니 나로선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만, 당시 1센트짜리 신문은 이 선정적인 보도경쟁 덕분에 날개돋친듯 팔려나갔단다. 고가의 신형 컬러 인쇄기계를 도입하고 스타 삽화가, 스타 기자들을 몽땅 '돈으로' 스카우트해 선배의 등을 친 허스트의 <저널>이 당연히 압승. 발행부수가 무려 150만부에 달해 세계최고가 되었다나 뭐라나... 

 

캘리포니아 샌시미온인가 하는 곳에 허스트가 '돈 처발라' 지은 허스트 캐슬에 구경간 적이 있다. 산꼭대기에 그야말로 '성채'를 지어놓고 화려뻔쩍한 실내는 유럽의 온갖 골동품으로 채웠고, 일부 건물은 유럽의 고성을 통째로 날라왔다는 듯했다. 언론재벌이라고 해서 돈을 얼마나 많이 벌었기에 그렇게 막대한 돈지랄을 할 수 있었나 싶었더니... (관광지 내 박물관 같은 데서 기록영화도 보긴 했다만 당연히 내 기억 속의 지우개;;;) 별별 짓을 다 했던 모양이다. 허허허. 심지어 쿠바 감옥에 갇힌 혁명가의 딸도 기자가 쇠창살을 끊고 몰래 빼와 특종을 냈을 정도다. 

 

암튼 사건발생부터 희생자 신원확인 과정, 범인 검거, 재판, 증언, 판결까지 순간순간 드라마틱한 전개의 연속이다. 이렇게 완벽하게 사건을 재구성할 수 있도록 연일 특종전쟁을 해댄 타블로이드 신문도 놀랍지만 수천건의 기사를 죄다 검색낸 지은이의 노고도 기막힐 노릇! 폴.콜.린.스.진.정.존.경.스.럽.다. 마지막엔 사건 관계자들의 후일담까지 곁들여졌다. 젊은 언론인 허스트의 공격적인 마케팅과 공격에 무너져 처절하게 패배한 퓰리처는 말년에야 비로소 <뉴욕 타임스> 같은 정도 언론이 옳다고 느꼈나보다. 전재산을 기부해, 자기 이름을 딴 상이 제정되면서 황색언론의 창시자라는 오명도 슬그머니 잊혀지고 말았다.  

 

사건이 하도 엽기적이라 처음엔 잠자리에서 읽기 섬뜩하다 싶었는데, 자전거 부대로 몰려다니는 기자들의 행태도 그러려니와 당대 사람들의 반응이 하도 웃겨서 나중엔 계속 낄낄댔다. 시대의 특징인지 모르겠으나, 세기말 미국인들 진짜 징하다. 살인사건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어쩜! 알 권리를 빌미로, 상업적인 성공을 위하여 인권 따위 무시하고 취재의 촉을 들이대는 기자들과 언론의 생리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고, 너무 자세한 사건 기사는 유사한 모방 범죄를 양산한다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신나는(?) 구경거리에 반색해 황색언론의 정착을 도운 세기말 미국 대중들은 가만 생각해보면, 요즘 인터넷 찌라시에 열혈 댓글과 악을 달며 흥분하는 사람들과도 다를 바가 없다. 세기의 살인사건을 만든 건 결국 당시 탐욕스러운 언론인들이었지만, 그 탐욕이 가능했던 건 결국 대중의 호응 덕분이었다. 쓰레기 같은 인터넷 찌라시나 증권가 찌라시, 일베 같은 것도 결국엔 수요가 있으니 생겨나는 게 아닐까. 뉴스에도 연령표시를 해야할 것 같은 무서운 세상에 살고 있는 요즘, 그저 웃고 넘길 수만은 없는 과거의 한 자락이었다.

 

 

퓰리처는 세계 최초로 컬러 만화를 신문에 실었다. 귀가 주전자 손잡이처럼 생긴, 공동주택에 사는 익살꾼 민머리 꼬마가 주인공이었다. 제목은 <옐로 키드>. 옐로 키드가 인기를 끌자 경쟁 신문사에서는 <월드>를 만화 저널리즘이라고 비웃었다. 그래서 "옐로 저널리즘(황색언론)"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 p35.

 

허스트는 다시 <월드>보다 한발 앞서서 법원에 전화설비를 했다. 법정에서 인쇄실까지 1분이라고 그 주말 <저널>이 자랑했다. <저널>은 최초로 법원광장에 설치된 전화선을 통해 목격자 증언을 실시간으로 전송할 수 있게 되었다. - p226

 

허스트는 미국 신기록을 보유한 전서구 세 마리를 빌렸다... 그래서 법정에서 그린 스케치를 단 몇분 만에 <저널> 신문사 창에 설치된 새장으로 전달할 수 있었다. 비둘기가 도착하면 움직임 감지회로가 벨을 울려, 용감한 새들이 최신 삽화를 가지고 도착했음을 편집기자들에게 알렸다.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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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충분한 느낌

투덜일기 2013. 3. 27. 15:10

 

사놓은 지 한참 된 더글라스 케네디의 <위험한 관계>를 드디어 읽었다. 사자마자 처음 몇장 읽어볼 땐 뭔가 견딜 수 없이 따분하고 상투적이라 참지 못하고 내려놓았었다. 나랑 안맞는 책인가. 가끔 그런 책들이 있다. 다들 좋은 책이라고 하는데 나는 통 그 재미를 모르겠는 책들. 더글라스 케네디도 그런 작가인가 싶었는데,1년도 더 지나 다시 집어드니 이번엔 꽤 잘 읽혔다. 그때도 아마 소설 기피증이 발현되었을 때였을지도 모르겠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다른 책을 안 읽어서 저 유명한 <빅 픽처>와 비교는 불가하지만 퍽 재미나게 읽었다. 균열이 가기 시작한 부부관계와 모성의 부담감을 참 잘도 파헤쳐놓았다 싶다. 마흔 살 넘어 어렵사리 딸을 낳은 친구 하나가 겪었던 무시무시한 산후우울증을 알기에 더 실감이 났던 것 같다. 친구 역시 아기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엄마로 판명되어 분리하는 게 좋겠다는 의사의 권유가 있었다. 아기는 부산 시댁으로 보내고 우선 엄마의 우울증부터 치료해야한다고 했다. 친구는 아기를 죽일 뻔 했다면서 엄마 자격 불충분이라고 몹시 울었다. 다행히도 친구는 아기가 백일을 맞기 전에 건강을 회복했고, 이후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키우고는 있지만 아직도 간간이 엄마 노릇에 자신 없어하며 한숨짓는다. 가끔 우는 소리를 하는 친구에게 내가 해주는 말은 하나 밖에 없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은 위대해!

 

모성이 뭔지 나로선 절대 알 수 없겠지만, 불충분한 느낌이 뭔지는 나도 잘 안다. 책에서도 딱 내 마음 같은 구절을 발견했다.

 

우리의 대화에 공통된 주제가 있다면 이 오래 지속되어온 불충분한 느낌이었다. 대학시절 내가 내내 그랬지만 성적이 B학점을 넘지 못하면 늘 하던 걱정.... 내가 모든 면에서 '괜찮은 편이지만' 그리 뛰어나지는 못한 사람 같다는 기분.... 내가 꽤 저명한 신문사에서 오래도록 일했거나 특파원이었다거나 직업 일선에서 자신감 넘치는 사람으로 유명했다는 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나는 늘 의심을 품었고, 언제 내 능력이 들통날지 염려스러웠다.

- p267, <위험한 관계>

 

맞다. 나는 내 실력이 늘 의심스럽다. 실제 능력이 들통날까봐 겁이 나서 늘 조심씩 허세를 부려온 것도 사실이다. 뭘 해도 불충분한 느낌이 가시질 않는 건 깜냥도 안되면서 뛰어난 사람이면 좋겠고 이왕이면 완벽을 추구하는 욕심 때문이다. 어쩌면 이미 본모습이 들통나 다른 이들은 다 알고 있는데 나만 아직 욕심을 부여잡고 징징거리는 지도 모르겠다. 하여간에 또 다시 자신감이 바닥으로 떨어져 뒹굴다 막 발에 밟히는 나날에, 내 불안을 콕 집어준 구절을 책에서 발견하고는 나만 그러는 게 아니구나 좀 위안이 되었다. 그런데 또 궁금해지는 것 한가지. 불충분한 느낌이 주는 불안에 얽매이는 사람은 이 책 주인공처럼 다 그렇게 비호감에 짜증나는 성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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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나의 BEST

놀잇감 2013. 1. 11. 03:31

2006년부터 블로그를 시작한 뒤로 처음 몇해는 정리할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이젠 한해를 정리하는 포스팅을 하지 않으면 깔끔하게 일년을 마무리하지 못한 것 같은 미진한 느낌이 들 지경이다. 우선은 여기 적어두고 돌아보며 홀로 흐뭇해하려는 목적이 크다 해도, 이웃들의 베스트 목록과 비교해보는 쏠쏠한 묘미 또한 포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연말부터 어서 해야지 해야지 마음먹고 시작은 했으되 새해 들어 열흘이 넘도록 또 차일피일 마무리를 미루고만 있는 건 곤란하다. 덜 망설이고 덜 미루겠다는 새해결심을 했으면 한달은 좀 지켜야하지 않겠니, 하는 마음도 있지만 이마저도 하지 않으면 나의 2012년은 너무도 성취한 것 없이 허송세월만 한 해로 남을 것 같아 두렵다. 

 

자주 만나지 못해도 내 소식이 궁금하면 인터넷 서점에 내 이름을 쳐 근황을 확인한다는 이들이 더러 있는데 작년엔 내내 거의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요새 일 안해요? 새로 나온 책이 없네... 그들의 물음에 대답하기가 나도 부끄러웠다. 2012년엔 정말로 내 이름을 옮긴이로 달고 나온 책이 딱 '한권' 출간되었다. 출판불황을 탓하기엔 나의 나태함이 제공한 이유가 너무도 커서 얼굴이 뜨거울 지경이다. 1년에 번역 한권 하고도 거뜬히 먹고 살만한 수입이 되는 처지도 아니면서 이 무슨 행태인지! -_-;

 

어쨌거나 2012년 한해 내내 이런 게 최고로 좋았다는 시답잖은 목록이라도 뽑아 놓고 지난 삶의 의미를 찾아볼 요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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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베스트 포스팅을 하려고 보니 먼저 읽은 책 정리부터 해야겠다 싶었다. 마흔권을 넘겼던 작년에 비해 권수가 거의 절반으로 줄었으니 정리하기도 더 수월하다. 읽은 족족 누구에게든 도움이 될만한 독후감을 써놓으면 참 좋으련만 올해도 독서후기는 거의 남기지 못했고, 독서노트랍시고 만들어놓은 공책에도 감상은 별로 없고 죄다 베껴적어놓은 인용문 투성이다. 그래서 어떤 책은 제목도 벌써 가물가물, 낯설 정도다. 적어놓은 제목을 보며 소설인지 비소설인지 분류하는 것도 혼동했으니 오죽하랴. 어쨌든 따져보니 24권, 한달에 딱 2권 꼴이다. 여름 지나고부터는 통 소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 비소설만 찾아보았는데도 소설이 적지 않아 좀 놀랐다.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일도 하기 싫어 마냥 방구석에서 뒹굴러다니는 날들이 많았기에, 독서경향 같은 게 있을 리도 없고 그저 이 정도로도 장하다고 결론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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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비닐

투덜일기 2012. 12. 21. 16:32

선거날로 부러 시간을 잡아 만나기로 한 날, 친구가 초등학교 1학년인 아들 녀석을 데리고 나왔다. 자기도 엄마 친구 만나고 싶다며 따라나섰다나. 닌텐도를 손에 쥐여주었어도 당연히 껌딱지 붙이고선 왕수다를 이어나가기가 어려웠고, 우린 또 다른 당근 수법을 떠올렸다. 서점에 가서 마음에 드는 책을 하나 사주기로 한 거였다. 장차 과학자가 되고 싶다는 소년은 내가 좀 아는 체를 했더니만 신이 나서 지구와 인류의 역사를 읊어댔다. 그래서 이번엔 세계사책을 읽고 싶다나. 헛, 고놈 맹랑하고 기특할세.

 

우리가 만난 쇼핑몰엔 북스리브로가 있었기에 그리로 내려갔는데 문제는 웬만한 아동서가 대개 책 비닐에 꽁꽁 싸여 있어 펴볼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아니, 내용을 읽어보고 확인을 해야 살 게 아닌가! 버럭 부아가 치밀었지만 소심증이 먼저 동하여 일단은 비닐이 벗겨져 있는 책부터 고르기 시작했다. 대형서점에 가면 어린이 코너 한구석에 마련된 소파나 놀이방 같은 데서 책을 좀 읽어보고 고르는 걸 당연하게 여겼던 소년은 일단 그 서점이 워낙 협소하고 열악하여 그런 공간이 없다는데 급실망을 하였고, 대부분 대여섯권 짜리 시리즈로 나온 두툼한 세계사책을 비닐 벗겨진 걸로 한두 권만 얼핏 보고 고르는 상황을 영 못마땅해 했다.

 

친구와 내가 대강 책을 골라 추천해주고 강권하듯 계산을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아이가 좀 더 살펴보고 싶은 다른 분야의 책들 역시 죄다 비닐에 싸여 있다는 것이 함정! 그제야 쌈닭 정신이 발동한 나는 직원에게 따지기에 이르렀다. 만화는 원래가 펴볼 수가 없다는 대답. 근데 왜 만화가 아닌 과학서나 동화책도 비닐에 싸여있는지? 그런 책들은 자기한테 가져오면 비닐을 벗겨주겠단다. 뭐라? 우리는 비닐도 못 벗기는 하등동물인가?

 

사정을 이야기하며 다시 읽고 픈 책을 골라보라고 달랬지만 결국 아이는 책 비닐의 난관 속에서 훌쩍훌쩍 울음을 터뜨렸다. 고르기 전에 책도 못 보게 하면서 무슨 서점이 이래요? 그러게나 말이다. 아이 물음에 나도 말문이 막혔다. 게다가 요즘 아이들 책은 왜 몽땅 만화책 일색인지?  서점에서 절대 못 펼쳐보게 해서 일단 팔고보자는 상술 때문에 만화책만 진열해 놓은 건가? 친구도 아이 책은 알음알음 주변에서 추천해준 책을 온라인 서점에서 앞장 정도 읽어보고 주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서점에 와선 책구경 겸 놀다 가곤 했던 터라 난감하다고 했다.

 

그 서점이 곧 망하려고 그러는 것인지, 아동서 시장마저도 워낙 불황이라 다른 대형서점에서도 그렇게 죄다 비닐로 책을 사수하고 있는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쓸데없는 수천억대 삽질에 예산 쓰느라 도서관 예산은 형편없이 삭감되어, 이미 올 하반기엔 전혀 신간 구매를 못하고 있는 도서관이 태반이라고 들었다. 헌데 도서관엔 새책이 없고, 서점에서도 책을 못 펼쳐보게 하면 도대체 아이들은 책을 어디에서 읽으라는 건지? 부자 부모만 책을 턱턱 사주라고? 아니지, 무한경쟁 교육에선 어차피 책 읽을 시간도 없으니 그저 공부, 공부, 사교육과 게임에만 심취하라고?

 

만화책과 잡지, 사진집, 그리고 19금 도서만 비닐에 싸서 파는 줄 알았던 내가 무지몽매했던 것인가? 궁금해서라도 다음에 다른 서점에 가면 꼭 살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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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회 지음/박현주 옮김/마음산책

작년 가을 와우북페스티벌에서 산 책을 요번 여름 지산밸리 록페스티벌에 가면서 챙겨가 읽었다. 이웃 주민들의 지산 지참서가 작년엔 조르주 심농이었음을 알기에, 나도 더운 여름날 시간 떼우기로 읽기에 적당한 책을 선정하느라 잠시 고민하다 내린 선택이었다. 결과적으로 탁월한 안목이었다.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칭찬하는 것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오래 전부터 이 책 훌륭하단 말을 더러 들었었는데, 나도 그 매력을 실감했다. 출판사와 번역자를 달리해 판권 계약까지 갱신해가며 나올만한 가치가 있는 책은 확실. 그래서 또 좀체 안쓰던 독후감도 쓰기 시작했는데... 계속 비공개로 두었다가 마무리하기까지 한달이 넘게 걸렸다. 젠장. 이러면서 책에 기대 밥벌어먹겠다는 건 좀 양심불량 같다. ㅎ

 

그간 나는 전 세계적으로 열풍이 일고 있는 북유럽 추리소설을 한번도 읽어보지 않았다. TV 시리즈나 영화로 만들어질 만큼 유명한 <월랜더>니 <밀레니엄> 시리즈도 그저 명성만 들어보았을 뿐 서점 갈 일 있을 때 몇 장 들춰보고서도 선뜻 읽고픈 마음은 들지 않았다. 시리즈로 죄다 읽어야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고, 범죄소설 장르가 좀 불편하다는 느낌도 있다. 셜록, CSI, 크리미널 마인드, 로앤오더 같은 범죄 수사 드라마는 흥미롭게 보면서 책으로 보는 건 왜 꺼려지는지 잘 모르겠다. 혹시 이해력과 지력이 딸려서? ㅎㅎ

 

'하얀 감방'이라고 불리는 조립식 콘크리트 서민주택에 살던 그린란드 출신 소년 이사야가 지붕에서 떨어져 죽는다. 경찰은 소년이 홀로 눈 덮인 지붕에 올라가 놀다 사고를 당했다고 짐작해 사건을 종결짓지만, 이웃에 살며 이사야와 각별한 우정을 쌓았던 스밀라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고 직감한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이사야가 괜히 지붕에 올라갔을 리가 없다.  게다가 그린란드 이누이트족 사냥꾼 어머니와 덴마크인 의사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스밀라 카비아크 야스페르센은 그 누구보다 눈과 얼음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다. 눈밭 위로 누군가 풀쩍 뛰고 나면 공기의 흔적으로 좀 전에 뛴 자세까지 보지 않고 재현할 수 있을 정도여서, 한동안 각종 북극 개발 연구팀 소속으로 활동한 적도 있다. 처음 만난 1년 반 전부터 술주정뱅이인 이사야의 엄마 대신 이사야를 보호해야 한다고 결심했던 스밀라는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이사야가 비밀 장소에 남긴 녹음테이프, 북극개발 파견 근무중 사망한 이사야의 아버지를 둘러싼 의문, 자원 개발회사가 오래전부터 벌여온 알 수 없는 연구 프로젝트, 이사야를 부검한 로옌 박사의 정체... 실마리가 풀려나갈수록 새로운 의문은 꼬리를 무는데, 스밀라는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도 고집을 꺾지 않는다. 특수하게 개조한 쇄빙선을 타고 찾아가는 북극해의 작은 섬에는 대체 무엇이 감추어져 있었는지...

 

이렇게 줄거리로 적어놓으니 단순한 내용 같지만 이 책엔 간단히 설명할 수 없는 뭔가 심오한 느낌이 있다. 아웃사이더인 스밀라의 존재론적인 고민이 깊이 깔려 있기 때문일까?  번역자 말로는 일종의 학술소설로 볼 수도 있다고 할 만큼 수의 원리며 얼음, 빙하에 대한 언급이 많지만, 그 또한 보기 드물게 매혹적인 주인공 스밀라의 놀라운 지적 능력과 본능을 강조하는 장치일 뿐 그리 학술적이라 느껴지진 않았던 것 같다. 책의 뒤표지엔 스밀라가 이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자라고 찬양하는 소설가 김연수의 감상이 적혀 있는데, 나 역시 그 평에 동감했다. 외톨이를 자처하는데 고독하지 않고 당당하며 누구보다 강하고 아름답다. 딱 내 취향이다 싶은 선망의 여인상이라고 하면 좀 웃긴가? 인물의 매력뿐만 아니라 작품의 서사와 표현도 마음에 든다. 심오하고 진지하면서 따분하지 않기란 원래 어려운 거라 생각한다. 근데 이건 그런 축에 드는 책이다. 지산에서 마지막 날 뙤약볕을 피해 시간을 보내며 읽다 만 이 책을 가져가지 않은 걸 엄청나게 후회했다. 덮어두고 나온 책의 뒷 이야기가 어찌나 궁금하던지. 분량(627쪽)이 길어서 결국 집에 돌아와 마저 다 읽을 수 있었는데, 여운이 꽤나 한참 가서 며칠간 되풀이해 뒤적이며 읽었다. 겨울과 북극해가 배경인지라 여름에 읽으며 서늘한 느낌이 들어 더욱 좋았던 듯하다.

 

베껴 적어놓은 글귀가 엄청 많지는 않은데, 아예 통째로 좋은 페이지가 꽤 있었기 때문이었다. 페터 회의 다른 책도 좀 궁금해졌다.

 

다른 사람들이 교회의 축복을 느끼는 방식으로 나는 고독을 느낀다. 고독은 내게 있어서 은혜의 불빛이다. 나는 내 방문을 닫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자비를 베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 (22)

 

나는 일생동안 지속될 것이라 여겨지는 그런 현상들에는 능하지 않다. 종신형, 결혼서약, 종신직. 그런 것들은 삶의 단편들을 고정시켜 시간의 흐름에서 면제시키려는 시도다.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여겨지는 일들은 더 심각하다. (376)

 

여행은 모든 인간의 감정을 극대화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사냥을 하러, 방문을 하러, 혹은 케케르타트를 향해 카니크를 떠날 때마다 잠복해 있던 사랑, 우정, 적의의 감정이 모두 폭발하고는 했다. (394)

 

죽음이 나쁜 것은 미래를 바꿔놓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를 기억과 함께 외로이 남겨놓기 때문이다. (415)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대단히 과장된 얘기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상대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리라는 두려움 45퍼센트와 이번에는 그 두려움이 무색하게 되리라는 광적인 희망 45퍼센트, 거기에 소박하게 사랑의 가능성에 대한 여린 감각 10퍼센트를 더하여 이루어진다.

나는 더 이상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내가 더 이상 볼거리에 걸리지 않는 것처럼. (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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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폴더를 슬쩍 훑어보니 누구에게든 도움이 될만한 독서후기보다는 그저 감상에 치우친 책자랑이 많다. 책읽기에 대한 내공과 역량이 그것밖에 안된다는 얘기다.  이번에도 후기보다는 책자랑 또 한판.

사진집은 워낙 비싸서 잘 안사게 되는데 작년말쯤에 나온 윌리 로니스의 이 책은 괜스레 갖고 싶었다. 순전히 바게트 빵 들고 뛰어가는 저 아이 사진이 표지라서 그랬던 것 같다. 오래 전 전시회 다녀와서 흑백사진을 추억하며 막내동생 사진이랑 비교해 올렸던 바로 그 사진이다.
게다가 이 책은 그냥 사진집이 아니라 사진을 찍은 '그날'에 대한 뒷이야기도 담겨 있다고 했다. 원제는 <Ce jour-là>, 부제가 '내 작은 삶의 기적: 윌리 로니스의 사진 그리고 이야기들'이다.

찾아보니 전시를 보러간건 2007년이었고 사진작가는 2009년에 작고했단다. 1910년에 태어나 무려 아흔아홉살. 우리 할아버지와 같은 해 태어났건만 14년을 더 살았다. 근대와 현대를 모두 경험한 이에 대한 선망일까, 수많은 <결정적 순간>을 선보인 앙리-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도 좋고, 같은 말이라 생각되는 <정확한 순간>을 담은 윌리 로니스의 사진도 좋다.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오래전 전시회때 본 사진들은 책에 별로 들어있지 않은 듯하다. 내가 마음대로 로니스의 아들 뱅상이라 짐작했던, 저 <작은 파리지앵> 사진을 포함해 두어 장만 낯이 익었다.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바스티유의 연인> 사진도 없다. 그 대신 같은 날  찍은 <바스티유 기념탑의 그림자>가 들어있는 식이다. 60장쯤 되는 사진과 그 뒷이야기가 짤막하게 담겨 분량은 180페이지도 되지 않는다. 읽을 거리가 좀 더 많기를 바랐으나, 사실 사진은 구구절절 설명을 듣기보다 보는 사람의 인상과 느낌이 더 중요하므로 이야기가 짧아 사진이 더 돋보였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사진이 더 많았다면 가격도 훨씬 더 비싸졌겠지!

가능하면 연출하지 않고 그냥 주어진 순간을 포착하거나 기다렸다가 일상을 잡아내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는 작가도, 저 빵소년 사진은 연출한 거란다. 빵집 앞에 할머니와 줄 서 있는 저 아이를 보고 부탁해 '세번이나' 달리게 했다는 사연. 우연히 맞닥뜨려 포착한 사진들은 확실히 조금 흔들려 초점이 흐려지기도 했던데, 저 바게트 빵소년 사진은 정말 거의 완벽해보인다.

두고두고 찬찬히 보고 읽을 심산으로 산 책인데, 택배상자 열다가 그 자리에 앉아 다 읽고 말았다. 사진도 좋지만 간결한 단상과 사연을 적은 담백한 글도 좋다. 요즘 부쩍 '세상은 불공평해! 뭔가를 잘하는 사람은 다른 것도 다 잘해! 공부 잘하는 사람은 그림도 잘 그리고 악기도 잘 다루고! 잘 생기고 예쁜 사람이 성격도 좋고 머리도 좋아!'라고 투덜대는 일이 잦아졌다. 이 책을 보고서도 하이고, 바흐를 몹시도 좋아했다는 이 아저씨 '사진도 잘 찍지만 글도 잘쓰네' 하며 열등감에 사로잡혔다. -_-; 

"보통, 나는 일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 그저 바라보고, 기다린다. 어떤 사진이든 그냥 그 상황의 인상에 다른다. 내 순간성을 잡을 수 있는 좋은 위치만 찾으려고 애쓸 뿐이다. 실재가 더 생생한 진실 속에 드러나도록, 그것은 시점의 쾌락이다. 때론 고통이기도 하다. 일어나지 않은 것을, 혹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어날 일을 바라는 것이기 때문에." (p30)

"사실, 내 사진 인생을 통틀어 내가 가장 붙잡고 싶은 것은 완전히 우연한 순간들이다. 그 순간들은 내가 할 줄 아는 것보다 더 훌륭하게 나에게 이야기해줄 줄 안다. 내 시선을, 내 감성을 표현해주는 것이다. 사진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데 뭔가 일어나고 있다. 내 인생은 실망으로 가득 차 있으나 커다란 기쁨도 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해줄 수 있는 이런 기쁨의 순간을 포착하고 싶다. 삶이 슬그머니 아는 척을 해오면 감사하다. 우연과의 거대한 공모가 있다. 그런 것은 깊이 느껴지는 법이다." (p91-92)

으음... 혹시나 저작권법 위반 어쩌구 할까봐, 그리도 또 좀 퍼오기 귀찮아서 사진 없이 글만 인용하려니 느낌이 제대로 전달이 안되는군. 암튼, 새하얀 설경을 어스름에 찍어놓은 것 같은 소박한 흑백사진과 글들이 참 어울리는 책이다. 서늘한 느낌과 따뜻함이 공존한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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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

삶꾸러미 2012. 2. 1. 03:00

며칠 뒤면 만난지 꼭 13년째 되는 이들을 주말에 만났을 때 어쩌다 나온 이야기인데, 나를 알기 이전에는 책을 읽을 때 한번도 번역자에게 신경을 써본 적이 없다고 다들 입을 모았다. 지금도 내가 번역한 책이나 돼야 옮긴이 이름을 눈여겨 볼 뿐, 다른 책은 여전히 무관심하다나. 그렇다면 나는 과거에 어쨌더라? 번역을 생업으로 삼아야겠다고 마음 먹은 다음에야 당연히 번역의 질과 번역자가 최고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겠으나, 그 이전에는?

흔히들 가장 훌륭한 번역자는 투명인간이어야 한다는 말을 한다. 번역서를 읽고 있으되 번역서를 읽고 있다는 의식이 들지 않을 만큼 문장이 매끄럽고 작품의 결을 살려, 지은이와 독자 사이에서 '번역'이라는 중간단계의 존재를 가능한 한 일깨우지 않아야한다는 뜻이다. 순수하게 책읽기를 즐기고 감동하였다면 그 찬사는 오로지 작가를 향한 것일뿐, 번역자가 누구인지는 굳이 몰라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나는 별 생각 없는 독자 시절에도 확실히 번역자에게 관심을 두었다. 그 옛날 세계문학전집류의 번역이야 다 거기서 거기였으므로 크게 신경쓰지 않았지만, 간간이 손에 들어오는 단행본 번역서의 경우엔 중고등학생의 눈에도 느낌이 달랐다. 같은 루이제 린저의 책이라도 전혜린 번역은 감동스러운데 다른 사람이 번역한 책은 이게 뭔소린가 싶어 여러번 되돌아가며 읽어야했다. 고려원에서 출간되어 라디오에 광고까지 나오던 당대의 화제작들 가운데서도, 밤을 홀딱 새가며 손에서 놓지 못하는 책이 있는가 하면, 도저히 책에서 묘사되는 상황과 인물이 그려지지 않는 책도 있어 짜증이 났다. 그런 부실한 책의 번역자는 부러 눈여겨봐두곤 했다. 나중에 피해 읽으려고. -_-; 특히 고려원의 단골 번역자 중에 영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었는데, 십수년 뒤 내가 이 분야에 들어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문하생들에게 원고료 반값도 안주며 번역시키고 자기 이름으로 책 내는 걸로 유명한 분이었다. 아직까지도 현역에서 활동중이시던데 설마 여전히 그러지는 않으니까 출판사에서 계속 일감을 주는 것이기를 빈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특히 교수입네 하는 사람들이 번역한 책을 유독 못미더워했다. 웬만한 교수님들은 시간도 없고 논문 한편으로밖에 인정해주지 않는 번역에 힘쓸 이유가 없기에, 죄다 제자들한테 번역 시켜 원고정리만 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특히 전공책 같은 건 어떻게 번역본보다 차라리 원서가 더 쉬울 수가 있는지! @.,@ 하지만 나 같은 사람들의 의구심과 불신을 알면서도 묵묵히, 꾸준히 손수 번역에 힘쓰는 교수님들도 분명 존재한다. 본인이 아니고선 누가 하겠나 싶어 사명감으로 일하는 경우도 있는 듯하고, 고전의 경우엔 공신력 있는 번역을 원하는 출판사들이 교수진을 설득해 본인에겐 크게 득될 것도 없는 일감을 맡기는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종신교수직도 갖고 있으면서 번역도 잘하는 분들은 나에겐 워낙 넘사벽이라, 외국어를 두세개씩 전천후로 막 번역하는 다재다능 번역가들에게 품는 질투심 같은 것도 아예 생기질 않는다. 요번에 드디어 줄리언 반스를 읽어보겠다고 사둔 책들을 들춰보니 번역자가 모두 신재실 선생이다. 호흡도 그렇고 소설 내용도 박학다식하여, 쉽지 않았을 것 같은 번역 문장도 마음에 들어 어떤 분인가 슬쩍 약력을 살피니 1941년생이시란다. 그렇다면 울 엄마와 동갑! 올해로 일흔둘의 나이다. 초판이 나온 건 2005년이니까 그보다 몇 해 전에 작업했다고 해도, 60대 초중반에 번역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교수 정년이 65세니까 어쩌면 투잡족의 시기에 번역을 하셨을지도 모르겠다. (순전히 내 상상 시나리오에 그칠 수도 있다;;) 2011년 부커상을 수상한 줄리언 반스의 최신작 <The Sense of an Ending>도 아마 같은 분이 지금 막 번역을 하고 있지 않을까 상상하며(파피, 블루고비, 새알밭님이 모두 원서로 읽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작품이다;;), 나는 또 괜히 비감에 젖었다.

처음 생업이자 천직이라 여겨 이 길에 들어섰을 땐 정말 득의양양했다. 좋아하는 책 노상 끼고 볼 수 있고, 시간 자유롭고, '정년'도 없고 얼마나 좋은가!
.....

하지만 이 일로 10년을 넘기고 난 어느 순간부터 나는 '정년'이 없다는 게 그렇게 환상적인 업무조건은 아닐지 모른다고 투덜대고 있었다. 딱 예순살까지만 일하고 은퇴해서 소박하지만 유유히 놀고 먹을 순 없을까. 길게 잡아도 예순다섯살까지만 일하고 싶은데! 내가 이런 말을 하고 다니면 주변에서 끌끌 혀를 차거나 한심해 했다. 늙어서도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게 얼마나 큰 특혜일 텐데 배부른 소리 하고 앉았구나. 그 정도 벌이와 씀씀이로는 아마 너 평생 죽기 직전까지 일해야 할걸? 누가 그때까지 계속 일감을 주기는 한다냐? 

설상가상 요샌 평균수명이 '너무' 늘어 100살까지 산다고들 난리다. 노령화사회의 폐해가 어쩌고 저쩌고 겁을 줘가면서. 심지어 남들은 철밥통으로 알고 있는 종신교수직에 있는 지인도 65세에 정년퇴직하고 나면 얼마 되지 않는 사학연금으로는 100살까지 살기 어렵다며 무언가 다른 방도를 내야한다고 엄살을 떤다. 으윽. 그렇다면 결국 결론은 내가 '정년'과 '은퇴'에 관한 생각을 바꾸고 십수년전의 나로 돌아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희희낙락 열심히 일을 해야한다는 의미다. 계속 신뢰를 쌓아 노년에도 계속 찾는 이가 있도록 깊은 내공을 쌓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별 내공도 쌓지 않은 채 올해로 '겨우' 번역 17년째 접어든 나는 자꾸 꾀가 나서, 뭔가 더 내게 잘 맞고 머리를 덜 쓰는 일은 없을까 두리번거리고 있을 뿐이고... ㅠ.ㅠ 열심히 일한 당신, 이제는 좀 쉬라고 노인들에게 말해줄 복지사회 따윈 이 땅에 거의 불가능한 것 같은데 대체 어쩌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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