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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1.01.21 남겨두고 싶은 기분 6
  3. 2016.12.14 판관 4
  4. 2016.12.05 나도 근황 8
  5. 2013.03.25 궁궐이 좋아서 3
  6. 2013.03.12 부정행위 14
  7. 2012.10.04 추석 맞이 식겁 8
  8. 2012.09.20 의문 11
  9. 2012.04.16 14
  10. 2012.02.01 정년 16

모르겠다

삶꾸러미 2022. 2. 10. 21:11

어느덧 주변에 아픈 친구들이 많아졌다. 이제 그럴 나이인가 싶기도 하고, 그래 유병장수 시대라지 자조해보지만, 대한민국 사람들의 기대수명이 80세를 넘겼다는 얘기를 들으면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상황이 많다. 대사증후군이나 퇴행성 질환이 아니라 삶과 죽음을 오갈 수도 있는 중병을 앓고 있는 친구들 때문이다. 

작년 여름과 올해 1월, 반년도 채 되지 않는 사이에 두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 I는 희소난치질환을 오래 앓다가 마지막엔 재활병원에 누워 힘겹게 하루하루를 넘겨야 했고, J는 예후가 좋지 않은 병을 진단 받았지만 씩씩하게 두번이나 수술을 받고 오랜 항암기간을 잘 견뎌내 희망을 주더니 금세 상황이 나빠졌다.

늘 느끼는 거지만 죽음은 아무리 미리 예상하고 마음을 다져도 준비가 되지 않는다. 더욱이 친했던 친구의 부음은 타격이 클수밖에 없다. 오십을 넘기면 인류가 태고적부터 DNA로 넘겨받은 타고난 생명은 다 한 셈이고 나머지 삶은 의학의 힘과 영양, 본인의 운동 여부와 관련이 있다고 하니 이제 내 또래 친구들은 자다가 심장이 멎어도 이상할 나이가 아니라는 말도 책에서 본 적 있지만, 확실히 지나온 나의 삶 보다 남은 삶이 더 짧을 거란 것도 알지만, 그래도 황망함과 충격은 여전하다.

아직 어리기만 한 친구들의 자녀는 앞으로 엄마 없이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자식을 먼저 보낸 친구의 부모님은 또 얼마나 가슴이 사무칠지 생각할수록 마음이 무겁다. 그리고 친구에 불과한 남겨진 자로서 되게 하찮은 고민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디지털 세상에 남은 친구들의 흔적은 또 어떻게 마무리해야할까. 잘 모르겠다.

새해인사를 서로 주고받았던 단톡방엔 친구의 흔적과 프로필 사진이 그대로 남아 있다. 아마도 홀로 남은 딸은 엄마의 휴대폰을 해지하지 않고 계속 간직할 모양이다. 나 역시 친구가 남긴 흔적들이 애틋해 얼마간의 애도기간은 필요할 거라 생각하면서 동시에 그 흔적을 볼 때마다 너무 슬프고 마음이 무거워져서 이젠 그만 들여다보고 싶다는 이기적인 충동이 들기도 한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내 마음은 개운하지 않을 테고, 톡방에서 나오거나 SNS연결을 끊어버린다면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을 듯하다. 

그럼에도 떠오르는 건 마지막까지 오히려 내 걱정을 했던 친구 J의 충고다. 너는 이제 네 생각만 해, 나도 이제 딸 걱정 그만하고 내 생각만 할 거야. 니가 행복해야 주변도 챙길 여유가 생기는 거야. 네 생각만 해, 꼭. 조근조근 타이르는 친구의 목소리까지 아직 생생한 그 말대로 올해의 목표는 내려놓는 삶, 내 생각만 하기... 이런 걸로 정해야지 다짐했었는데...

역시 그래서 잘 모르겠다. 늘 우유부단하고 갈팡질팡할 때 거침없이 방향을 정해주던 친구 J는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나에게 뭐라고 해주었을까. 친구의 부재를 결국 이런 고민으로 더 아쉬워하는 내가 또 좀 한심하고. 빈소에서 한참 울고 웃고 또 울다가 헤어지며 누군가 말했다. 이제 우리한테 가장 좋은 친구는 건강하게 오래 곁에 있어주는 친구라고. 이제 나는 확실히 그런 나이가 되었다. 그러니 친구들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기 위해서라도 건강을 좀 더 챙겨야겠다는 것만 일단 알겠다. 몹시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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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이 어땠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삶이 따분하고 지겨워져 뭔가 막 더 배우고 싶어서 동네 도서관과 구청 교육 프로그램을 뒤졌던가? 아, 기억났다. 친구가 동네 구청 취미 프로그램에서 단돈 몇만원에 몇달간 베이킹을 배우는데, 재미도 있고 수업 끝나면 그날 만든 맛있는 빵을 한 아름씩 갖고 온다며 나도 찾아보라고 권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동네엔 구직을 위한 프로그램밖에 없었고, 그나마도 신청 시기가 안 맞았다. 그러다 눈에 띈 마을강사 양성 교육 공문.

4주였던가.. 여름 방학 내 꽤 긴 기간 교육 전문가와 현장 교사들의 수업을 들었고, 각자 다양한 아이디어로 자유학기제를 위한 프로그램을 짜서 제출하면 인근 학교와 연계해주겠다고 했다. 할까말까 망설이다 대충 요식행위로 만들어 낸 프로그램은 당연하겠지만 아무 선택도 받지 못했다. 그럼 그렇지. 알바도 아니고 자원봉사도 아니고 부업도 아니고 몹시 어중간한 시도는 관두고 본업에나 충실하자 싶었다. 그러다 돌연 다음해에 한 학교에서 수업 의뢰를 받았고, 그렇게 시작한 자유학년제 수업이 올해로 벌써 5년째다.

해마다 관둘까 말까, 들이는 시간과 품에 비해서 형편없는 강사료를 생각하면... 종종 본업에 지장을 주는 스케줄을 생각하면 그만두는 게 맞다 싶다가도, 또 불안한 미래를 1년 전에 미리 상상해보면 뭐라도 하고 있는 게 정신건강에 좋지 않을까도 싶고, 일단 학교에서 만나는 예쁜 아이들이 주는 특별한 에너지가 있다. ㅠ.ㅠ 물론 재작년 같은 경우엔 몇몇 거친 아이들에게 성희롱을 당한 적도 있고, 다 때려치우고 싶을 만큼 좌절을 겪기도 했다. 근데 또 그러다가 한두 명에게라도 묵묵히 위로를 받으면 다시 버텨나갈 힘이 생기고...

코로나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흔들렸던 2020년 학교는 정말 위기상황이었고, 중학교 1학년 자유학년제 수업도 파행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거리두기 단계에 따라서 비대면과 대면 수업을 병행한 학교도 있지만, 아예 전면 온라인수업으로만 결정한 학교도 있어서, 난생 처음 온라인수업을 여러가지 종류별로 준비해야하는 나로서는 그야말로 '멘붕'이었다. 구청측에서 여러가지 심화교육도 마련해주고, 먼저 온라인수업을 경험한 동료 선생님들이 쏠쏠한 노하우를 공유해주시고, 유튜브로 온갖 온라인플랫폼을 찾아 독학을 하고... 밤새워 PPT와 동영상을 만들었다 지웠다 반복하며 8월 내내 미쳤지 미쳤지, 이짓을 내가 왜 하고 있나 징징 울고 싶었던 것 같다.

째뜬 구글클래스룸과 EBS온라인클래스와 줌 화상수업을 오가며, 헐떡였던 2학기 자유학년제 수업이 1월 4일로 마침표를 찍었다. 창의적인 글쓰기와 번역 문장 연습을 주로 하는 프로그램 특성상, 대면수업이 아니면 학생들과 소통하기가 엄청 어려울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온라인 수업이어서 좋은 점도 꽤 있었고, 2020년에 만난 아이들은 역대 최고로 성실하고 뛰어난 학생들이었다. 교실에서 만났더라면 더 뛰어난 성과를 얻었을 것 같아서 아쉽지만, 반대로 온라인으로 소통해서 내가 더 편견없이 공정하게 아이들을 대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교실에서 수업을 하면 발표력 좋고 참여도 좋은 몇몇 학생들 위주로 소통이 진행될 수밖에 없다. 물론 매시간 활동지를 쓰게 하면서 일일이 들여다보고 격려하고 어떻게든 뭔가를 써내게 하려고 나로선 온갖 수단을 쓰지만;; 한 학기 내내 입 꼭 다물고 비협조적인 아이들에게는 나도 골이 나서 포기하기 쉽다.

온라인 수업을 듣고 연계 과제를 제출해야 출석으로 인정된다고 서슬퍼런 경고를 해도, 아랑곳하지 않는 아이들도 당연히 있다. 당당히 백지를 매번 내는 식이다. 교실 수업이었다면 활동지 써주기 전엔 집에 안보낸다고 복도에서 기다린다고 협박을 해서라도 받아내는 편인데, 온라인 댓글로는 아무리 피드백을 신경써도 결국 제대로 글쓰기를 못시킨 경우가 있다. 줌으로 하는 실시간 쌍방향 수업엔 담임 선생님이 전화로 아무리 깨워도, 자느라고 못 들어온 아이도 있었고. ㅠ.ㅠ  그 학생은 다음 주 홀로 학교에 등교해 종일 학교 컴퓨터로 화상 수업을 들었지만,  그 다음주엔 그 수법도 통하지 않았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비대면 수업을 한 학기 경험한 소감은, 나름대로 보람찼다는 것이다. 열네살 아이들은 아직도 참 어리고 순수하지만 동시에 놀라울 정도로 깊은 생각과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서 깜짝 놀랄 때가 많다. 열심히 하는 아이들은 교실 수업이든 온라인 수업이든 똑같이 훌륭한 결과물을 보여주었다. 나도 동영상 수업을 들어보면 집중력이 떨어져서 자꾸 딴 생각을 하거나 슬며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걸 깨닫고 부끄러운 적이 많다. 어른도 그럴진대 진짜로 재미있는 수업이 아니면 아이들에게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누구도 하기 싫어하는 글쓰기를 시키는 수업이라니!  나로선 재미나게 해본다고 최선을 다하지만 그 마음이 과연 통할지는 미지수였는데... 놀랍게도 많은 아이들이 열심히 피드백으로 내게 용기를 주었다. 쌤 수업 재미있어요! 어떻게 이렇게 재미있게 수업을 하시나요.. 등등... 음화홧. 

나로선 당연히 힘이 나서 아이디어를 짜내고 PPT 자료도 더 열심히 다시 만들고, 구글설문지나 문서로 받을 과제도 정성들여 이리저리 고치고 최대한 활기차게 동영상을 녹화했다. 아이들이 낸 과제물엔 열심히 댓글로 피드백을 달고, 개성을 파악해 기록해두고는 계속 관심을 쏟았다. 물론 일일이 댓글로 응원을 보내고 조심스러운 글 한 줄에도 마구 칭찬을 날리느라, 당연히 시간을 많이 잡아먹어서 속으로 또 미쳤지 미쳤지 왜 이러고 앉았나 후회도 했지만...

그런 정성에 대한 보답일까, 아이들도 과제 댓글로, 수업 피드백으로 여러가지 긍정적인 이야기를 많이해주어 기뻤는데 8주차 마지막 수업 마지막 과제 끝에는 한 학생이 제법 긴 쪽지를 적어두었고, 그걸 읽으며 난 주책맞게 눈물이 핑 돌았다. 우와....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도, 공을 들인 노력과 진심이 통한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싶었던 것 같다. 

더보기
기념으로 간직하려고 캡쳐해놓음 ^^;; 

글쓰기를 원래도 잘하는 학생들이 있다. 하지만 고만고만한 문장력이라도 좀 더 생각을 깊이 했다거나 정성을 들인 표현은 금세 표가 나고 점점 발전하는 게 보이는 아이들이 있으면 덩달아 나도 신이 난다. 처음엔 힘들어하다가 막판에 잠재력을 쑥 펼쳐보이는 아이들에게는 더욱 감동하는 편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만, 칭찬의 중요성을 정말 매번 느낀다. 위에 쪽지를 보낸 아이도 그랬지만, 한두번은 칭찬을 해주어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괜히 해보는 소리겠거니 싶은걸까? 그럴 땐 뭉뚱그려 참 잘했어요, 라는 칭찬은 안통한다. 구체적으로 어디가 어떻게 좋은지, 어느 문장과 표현이 마음에 드는지 콕 찝어 말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가능하면 그걸 기억했다가 다음번에 또 이어서 칭찬해주고... 아 물론, 강사 주제에 그렇게 정성을 들이는 게 쉽진 않다. 가성비를 따진다면 그야말로 허튼짓일 수도 있고.... 

지금 하는 번역 일을 사랑하지만 힘들고 지칠 때면 그 옛날에 첫 직장 다니지 말고 그냥 교사를 했어야하는 건데, 그럼 지금쯤 당당히 명예퇴직을 하고 연금으로 먹고 살텐데,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으나 이렇게 유사 교사체험을 한 뒤론 그 생각이 쏙 들어갔다. 일주일에 몇 시간 수업 준비로도 이렇게 진이 빠지는데;; 난 아마 뼈를 갈아넣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라는 교사 선배들의 짐작이 맞을 것 같다. 학교 선생님들 모두 존경스럽다!

암튼 본업도 마감 못 맞추고 헐떡대면서, 딴짓하는 건 괜한 뻘짓 아닌가 싶다가도 또 어디가서 이런 보람을 느껴보겠나 싶은 마음에 2021년에도 결국 또 자유학년제 수업을 맡기로 했다. 번역가를 직업으로 추천하기에는 사실 현실적으로 너무도 막막한 부분이 많지만, 그래도 중1 아이들을 데리고 번역 수업을 해보면 해마다 장래에 번역가가 되어볼까 흥미가 생겼다는 아이들이 몇명씩 꼭 나온다. ㅋㅋ 해마다 영업 성공?! 그 아이들이 진짜로 번역가가 될지 그건 장담 못하지만, 그럴 생각에 글쓰기와 책읽기에 더 관심을 갖는다면 나로선 더 바랄 게 없다. 올해는 또 어떤 개성 넘치는 아이들을 만나게 될지 두려움 반 설렘 반이지만 온라인 수업 노하우도 얼추 생겼겠다 작년보다 조금이라도 더 재미있는 수업을 해낼 수 있지 않을까.

오래 버려두었던 블로그에 또 이렇게 끄적거리는 이유는 분명 또 일이 하기 싫어서일 것이다. 마감에 왜 일이 하기 싫을까. ㅠ.ㅠ 어쨌거나 뿌듯하고 벅찼던 느낌이 다 휘발되기 전에 이렇게라도 남겨두게 돼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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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관

삶꾸러미 2016. 12. 14. 22:40

판관이라고 쓰니 퍼뜩 판관 포청천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ㅎㅎ 제목을 판사라고 쓸까, 재판관이라고 쓸까 아님 '편견'이라고 쓸까 나름 고민하다 정했다. 내가 생애 최초 직접 목격한 판사는 정말 무능하고 한심해보였다. 1986년 이른바 '건대사태'라고 불렸던 건대점거농성 시위로 친구들이 대거 잡혀들어갔었고, 대부분 반성문을 쓰고서 기소유예로 나와 곧장 군대에 끌려가거나 복학한 친구들과 달리 한 친구는 고집스레 반성문 쓰기를 거부하다 시국사범으로 재판을 받았다. 재판이 열릴 때마다 응원차 동부지법에 가서 본 그 친구의 뒷모습 뒤로 저 멀리 높은 곳에 앉아 있던 판사는 얼마나 딴세상 사람 같던지. 가끔씩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을 수도 없는 법률용어를 지껄이는 검사, 변호사도 판사와 함께 세트로 그저 막연한 불신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가끔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던 화려한 웅변술을 자랑하는 변론이나 검사의 예리한 질문 따위는 없었다. 그저 사건번호와 증거서류의 나열, 사실 인정 확인 여부 정도? 당시 재판에서 가장 귀담아 들을만했고 또 친구와 부모들의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던 건, 파란색(이었던 것으로 기억) 죄수복을 입고 나와 나란히 피고석에 앉아 있다가 최후 진술을 하라는 판사의 말에 조금도 굽히지 않고 독재타도를 위한 자신들의 행동이 무죄라며 본인의 주장을 펼쳤던 대학생 피고들이었다. 

한미한 집안이라 가까운 친척이나 지인 중에서도 잘 나가는 '사'자 붙은 직업군이 거의 없다 보니 그들에 대한 편견도 심하다. 물론 순전히 여우의 신포도 이론일 수도 있다. 공부 잘해서 사법고시 패스하면 뭐하나 노상 범죄자들만 상대하는데. 공부 잘해서 의대 나와 의사 되면 뭐하나, 노상 병든 환자들만 상대하는데. 그런 식이다. (그러나 막상 주변에 누가 아프면, 아이고 유명한 대학병원에 아는 의사 한명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발을 동동 구른 적 많음을 고백한다.) 그들도 당연히 나 같은 사람을 한심해하겠지. 인문학 전공하면 뭐하나, 결국 백수인데... ㅋ

암튼 따져보니 거의 삼십년 만에 오늘 판사를 코앞에서 볼 일이 있었다. 변호사는 음... 몇년 전 친구 결혼식에서 대거 만나본 이후로, 작년에 또 집 문제로 사건을 의뢰하며 만났으니 희소가치가 아무래도 덜하다. 그런데다 놀라운 건 우리 집 토지분할 소송 건을 맡은 판사가 직접 토지측량팀과 함께 현장 검증을 나왔다는 사실이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원고, 피고, 피고측 변호인... 그런 말을 우리집 마당에서 흩날리는 눈을 맞으며 듣고 있자니 뭔가 초현실적인 느낌이었다. +_+ 게다가 오늘 또 날은 얼마나 추웠는지.

나름 중무장을 하고 나갔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다들 모이기 30분 전부터 나가서 줄자로 다시 여기저기 재고 표시하고 그간 집의 역사를 돌이키고 했던 터라  계속 밖에서 장시간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측량과정을 지켜보려니 덜덜 몸이 떨려왔다. 추우니 굳이 나오지 마시라고 했던 왕비마마까지 결국엔 내려와 모든 사건 당사자들과 재판 관계자들이 모인 자리. 지루하게 원고의 말도 안되는 주장(옛날에 이 집을 지어 팔면서 재건축을 예견해 알박기 해놨던 땅 20평쯤을 분할 받아서 거기다 건물을 짓겠단다. 공동주택의 분할 토지를 대체 어떻게 잘라가겠다는 건지? 우린 그럼 앞마당과 뒷마당에서 일부씩 나눠 가져가라 그렇게 주장했었다. ㅋㅋ)을 듣다가 에라 모르겠다 싶어 나는 집으로 올라와 얼른 차를 끓였다. 

덩달아 덜덜 떨고 계신 울 엄마한테 뜨끈한 둥글레차를 먹여야겠다 그런 생각이었으나 또 어떻게 우리만 마시나... 촛불시위용으로 사둔 종이컵을 죄다 꺼내 대충 열두 잔을 만들어가지고 내려갔다. 우선 제일 연장자인 울 엄마부터... 그 담엔 누구한테 권하지? 연장자 순이면 내가 알기로 101호 주인 아저씨가 그담 차례였다. 그러고는 레이디퍼스트니깐 판사의 비서인 듯한 여자분... 

그랬더니 그 여자분이 저 멀찍이 서 있던 판사님한테 먼저 권하란다. 어 그런가요? 그러나 오... 판사는 됐다고 손사레. 순간 아 이거 나의 실수인가 싶었다. 누군가 김영란법에 이것도 걸리나요? 허허 웃으며 말했다. 흥칫뿡이다. 그럼 드시지 말라고 냉큼 돌아서서 얄밉지만 소송을 걸어온 옛 이웃, 원고측 아저씨와 아주머니에게도, 함께 온 그쪽 일행한테도 다 차를 돌렸다. 토지공사인지 지적공사인지... 측량을 하러 온 팀에게 마저 차를 돌리고 딱 한잔이 남자 그제야 판사도 못이기는 척 종이컵을 받았다. 우리측 변호사도 그렇고 다들 손시려웠는지 뜨거운 차가 담긴 종이컵을 양손으로 감싸쥐었다. 별거 아니라도 뜨거운 차 몇 모금에 나 역시 속이 풀리는 듯. 

원고측이 원하는 대로 측량 한번, 판사가 지정하는 대로 측량 한번. 현장검증이 끝나고(이런 민사상의 확인도 현장 검증이라고 하는 줄 처음 알았다!) 관계자들은 모두 돌아갔다. 결과는 아직도 오리무중. 변호사 말로는 원고가 또 어떻게 나올지, 판사도 어떤 결론을 내릴지는 묵묵히 지켜보아야 한단다. 암튼 오늘의 깨달음은 내가 낸 세금으로 나라에서 월급 주는 판사에 대한 막연한 나의 불신과 거부감이 단 한번의 대면으로 약간 흔들렸다는 점이다. 아, 일 열심히 하는 판사도 있겠구나. 다 권력과 결탁해 버티다가 전관예우를 노리는 건 아닐 수도 있겠구나. 가끔 소신있는 판결과 양심 깃든 판결문으로 뉴스에 나오는 판사가 희귀종처럼 생각됐었는데, 우리 엄마와 나에겐 너무도 대단한 사건이되 밖에서 보기엔 돈도 얼마 결부되지 않은 사소하다면 사소한 이런 사건으로 추위에 덜덜 떨며 몇시간이나 현장검증을 하는 판사도 있구나 신기했다. 

법조계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깊은 편견에 사로잡혔으면 이런 걸 다 신기해하나 싶다가도, 보수, 진보 성향에 따라서 전혀 다른 법 해석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헌재의 판결을 앞두고 있자니 불신은 당연한 것도 같다. 아무리 인간이 만든 법률이고 언어라는 것이 미묘한 차이가 있다지만, 그래도 '법'인데 어떻게 해석과 적용이 사람에 따라 다를 수가 있지? 나로선 정말 모르겠다. 판관, 편견, 판결. 이상하게도 초성 게임이라도 하듯 조합이 비슷한 이 세 단어를 오늘 종일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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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근황

삶꾸러미 2016. 12. 5. 22:56


본격 겨울을 앞둔 11월은 1년중에 내가 가장 넘기기 힘들어하는 달이어서, 괜한 우울감과 무기력에 시달리는데 올핸 그럴 겨를이 아예 없었다. 뭔가 대단히 분주한 일들이 많았고, 토요일이면 광화문으로 뛰쳐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나의 11월 우울증을 날려버린 공은 파렴치한 닭그네에게도 일부 지분이 있다. 수십년만에 국민대통합을 이룬 공이 그치에게 있듯이 말이다. 하여간 시국이 시국인지라 후다닥 일감 처리할 때 아니면 진득하게 컴퓨터 앞에 앉아 뭔가 끼적일 마음의 여유도 없었던 것 같다. 홧병으로 가슴이 콩닥거리면 머리가 텅 비거나 무거워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블로그형 인간성은 버릴 수가 없어서 짧은 여행기며 그날그날 단상들을 적어놓지 않고 계속 쌓이니 숙제 안한 찜찜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연말 베스트 집계 하려면 기록해둬야하는데! 뭐 이런 심정? ㅎㅎ 해서 간단하게 사진위주로 뭐 하고 지냈나 근황 정리 시작.

2014년 가을에 법주사(부모님의 신혼여행지였다)에 함께 다녀온 이후로, 엄마는 가을만 되면 모녀 여행을 바라신다. 작년엔 그래서 부산엘 다녀왔는데, 올해는 전주와 담양을 여행지로 정했다. 엄마가 전주 학인당에 묵어보고 싶어 하셨기 때문이다. 한번 경험해보고 싶다는 왕비마마의 로망은 실현했으되, 결과적으로 한옥 민박은 노년의 엄마에게 맞지 않는 걸로 결론이 났다. ㅠ.ㅠ 댓돌 위로 툇마루로, 높은 문지방 넘어 화장실로 오르락내리락해야하는 구조가 관절 부실한 노인에겐 부적절. 게다가 1년만에 왕비마마의 기력은 너무도 약해져, 좀체 걷질 못하셨다. 진짜 나이든 할머니구나 하는 걸 실감한 여행이어서 덩달아 나도 마음이 무거웠다. (넌 안 늙었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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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 좋아서

삶꾸러미 2013. 3. 25. 18:00

혹시 나처럼 궁궐이, 또는 한옥이 좋아서 궁궐 전각 청소라도 하면서 가까이서 보고 싶어한다거나 궁궐 한옥과 관련된 공부에 마음이 동하는 사람이 어쩌면 또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요번에 내 경우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덜컥 일을 저지르고 났더니만 공부할 땐 좋았는데, 이젠 뭔가 막 끌려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좀 당황스럽다. 원래 원했던 것이 이거였나 싶기도 하고, 궁극적인 목표(일반 관람객에게 공개되지 않는 궁궐 공간에 발을 들이는 것!)를 달성할 때까지 일단 참으며 계속 따라가보아야 하는 것인가 아닌가 줄곧 의문이 든다.

 

내가 멍청해서 그렇지, 요즘 사람들이야 검색 능력이 워낙 뛰어나므로 마음만 있다면 자신이 원하는 방식을 잘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내가 겪어보니 단체와 경로도 워낙 많아 실제로 경험하기 전에는 뭐가 뭔지 아리송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제야 좀 알게 된 문화재 관련 민간활동의 차이와 접근법을 좀 적어놓을까 한다. 누구에게든 도움이 되면 다행이고, 나중에 혹시라도 내가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 뭔가 또 다른 방법을 찾아볼 때 한 쾌에 필요한 정보를 기록으로 남기려는 속셈도 있다. 

 

하여간에 궁궐이나 문화재, 박물관에 관심이 있고 그것과 관련된 교육을 받거나 자원봉사를 하고 싶다면 가장 먼저 찾아가보아야 할 곳은 문화재청(http://www.cha.go.kr/cha/idx/Index.do?mn=NS_01) 홈페이지다. 궁궐과 한옥, 기타 문화재, 유적지에 관한 모든 정보가 다 망라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그와 연계된  NGO와 재단에 대한 링크와 소개도 찾아볼 수 있다. 문화재 관련 자원봉사 공지는 대부분 문화재청 게시판에도 동시에 올라온다. 종종 무료 인문강좌 안내도 올라와서 나는 그걸 노리고 들락거리다 그만 궁궐을 '지키기'까지 하는 사람들이 받는 교육을 알게 되었다. ^^

 

처음 내가 알고 있던 단체는 아름지기(http://www.arumjigi.org/). 

창덕궁이 워낙 내가 좋아하던 궁궐이라 거길 청소하려면 아름지기 자원봉사 회원이 되는 수밖에 없는 줄 알았었다. 그런데 회원을 연중내내 모집하는 게 아닌데다 대체 언제 모집하는지 통 잘 모르겠고(알아보면 늘 모집 끝났다고 나왔다. 흥!) 연회비(12만원)도 내야한대서 일단 마음을 접었었다. 처음에 어느 대기업이 세운 재단이라는데 내가 별로 안좋게 보는 대기업이란 것도 마이너스 요인.

하지만 현재는 후원기업의 목록이 상당히 많고 문화재 주변 환경정리사업 뿐만 아니라 한옥 보급, 한옥 운영 같은 것도 함께 한다. 한옥체험을 할 수 있는  함양한옥이 바로 아름지기가 운영하는 곳이다. 아무래도 '재단'이다보니 영리사업도 하는 게 아닐까. 회원이 되면 함양한옥 숙박비도 약간 할인된다는 것 같다. 헌데 여기선 문화재나 역사 관련 교육도 매번 돈을 내고(1만원 정도) 신청해서 들어야 한다. 그나마도 사이트에 들어가보니 일반인 상대 교육을 요샌 거의 안하는 것 같다. 요즘 질 좋은 무료강좌가 얼마나 많은데 돈까지 내가며 듣겠나. ㅎㅎ

 

알고보니 자원봉사를 청소수준에서만 그치고 싶었다면 내가 찾아갔어야 하는 단체는 따로 있었다. 바로 문화재청에서 운영하는 '한문화재 한지킴이'(http://jikimi.cha.go.kr/community_new/newCafeMainList.action)

주요 문화재를 하나씩 기업체 하나가 맡아서 관리하고 있기도 하지만 개인이나 가족 지킴이 신청도 받는다. 문제가 있다면 관심 있는 문화재를 딱 한 군데 지정해서 활동해야한다는 점(하기야 궁궐해설사가 된다해도, 궁을 한군데만 정해서 해야한다. 몇년쯤 경력이 쌓인 다음에 소속을 바꿀 수야 있겠지만;;). 게다가 문화재 지킴이를 신청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고, 일정한 심사를 거쳐서 통보를 해준다고 한다. 창덕궁 같은데는 바로 옆에 있는 현대에서 맡아서 지킴이 봉사한다고 들었는데 개인이 신청한다고 창덕궁 청소활동에 붙여주기나 할지 그건 미지수다(그러고 보니 창덕궁 도배랑 청소 같은 건 아름지기 전담이라던데, 어떻게 활동영역을 나눴는지는 알수 없다). 하여간에 이 제도는 자기가 사는 곳 주변의 문화재나 유적지를 아끼고 보호하는 활동을 권장하기 위함이란다. 정부 주도의 커뮤니티 활동이므로 유료회원제도는 아닌 것 같다만 끝까지 가입해보질 않아 확실하지 않다. ^^; 내가 궁궐 전각 청소를 빌미로 문화재에 좀 들어가볼 작정으로 공부 시작했다니깐, 다들 그럼 한문화재 한지킴이를 했어야 했다고 조언해주었다. 쩝;;

 

다음으로는 '우리궁궐지킴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사단법인 한국의 재발견(http://www.rekor.or.kr/)이 있다. 4대궁궐과 종묘에서 해설 자원봉사를 주 활동으로 하고, <우리문화사랑방>이라고 해서 한달에 한번(매월 셋째주 토요일 3시-5시) 일반인 대상으로 무료 인문강좌도 여는 단체다. 이곳에서 두어달 간 소정의 교육을 받고(교육비 15만원) 6개월 수습활동까지 거치면 궁궐 해설사 자원봉사를 하게 된다. 한달에 만원씩 회비도 내면서... (아름지기 연회비가 12만원인 걸로 보아 유사 단체들 모두 그게 적정 회비 수준이라고 정했나보다. 혹시 이것도 담합? ㅋㅋㅋ) 궁궐과 종묘에서 활동하는 자원봉사 담당 요일은 금요일과 토요일. 지원자격은 18세-65세 사이, 교육생 모집은 해마다 연말에 있는 듯. 정식으로 궁궐해설사가 되어 자원봉사를 하게 되면, '한복'이나 최소한 '생활한복'을 입고 활동해야 한단다. 궁궐을 안내하는 자원봉사자에 대한 문화재청의 요구사항이라고. (헌데 잠깐 딴소리를 하자면, 경복궁의 경우 문화재청 소속일 듯한 해설사 직원들은 한복을 입지 않는다! 가만보니 검은색 코트를 유니폼으로 입는다. 창덕궁 해설사들은 다 한복을 입던데, 왜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세계문화유산 지정 유무의 차이일까? 암튼... 유료 해설사들은 한복 안입고 설명하는데 자원봉사자들은 반드시 한복을 입으라고 요구하는 것도 웃긴다! 흥)  

 

궁궐지킴이의 종류는 또 있었으니, '궁궐길라잡이(http://www.palaceguide.or.kr/)'라고 원래 한국청년연합(KYC)에서 운영하던 NGO인데 따로 독립했다는 것 같다. 암튼 여기도 똑같이 15만원의 교육비를 낸 뒤 총 8개월간 이론교육과 실습교육을 마친 다음에 무료 궁궐해설사로 활동한다. 활동 요일은 일요일. KYC에서 시작한 터라 궁궐지킴이보다 상대적으로 궁궐길라잡이의 연령대가 낮다고 들었다. ^^; 그러나 교육생 지원자격은 '성인'으로만 되어 65세로 제한이 있었던 한국의 재발견보다 오히려 더 탄력적이다. 교육생 모집은 해마다 같은 시기가 아닌듯, 올해는 2, 3월에 모집 공고가 났고 최근 60명을 선발했다. 여기도 교육 마치고 해설사로 활동하려면 회비를 내야하는데 학생 5천원, 성인 만원. (오, 학생한테 유리하군! 그러나 방학도 아닌데 어찌 교육을 받으라고 쯧쯧쯧;;). 여기도 정식 궁궐해설사로 자원봉사를 할 때는 생활한복을 입어야 한다. 궁궐지킴이들은 각자 취향에 맞는 한복과 생활한복을 입는 반면, 궁궐길라잡이들은 생활한복 유니폼이 정해져 있는 듯하다. (결정적으로 내 눈엔 심히 안 예쁘다. 내가 변형한복을 마뜩찮게 여기기 때문일 수도;;)

 

뿐만 아니라 궁궐문화원(http://gungstory.com/common/main.asp)도 있다. 여긴 어린이와 청소년 궁궐학교와 체험학습을 좀 더 세밀하게 운영하고 있는 듯, 청소년 궁궐기자단 같은 것도 모집한다. 궁궐에서 자원봉사할 문화해설사를 교육하고 훈련하는 역할은 위 단체들과 똑같다. 창경궁 내에 궁궐문화원이 있다고 하는데, 교육받는 공간이나 사무실 같은 것들이 대체 어디 있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사회적 기업이라서 무려 궁안에 사무실을 차리게 해준 건가? ^^

어쨌거나 여기도 지난달엔가 궁궐 해설 자원봉사자 교육생을 모집했다. 00명이라고 공고가 났던데, 신청인원이 적었는지 최종 선발인원이 그리 많지는 않다. 똑같이 10주 정도 기본교육을 받은 뒤 6개월 현장 수습기간을 거쳐, 궁궐해설사로 활동하는데, 종묘를 제외한 4대 궁궐에서 매주 목요일에 자원봉사를 하게 된단다. 역시나 지정 복장을 해야한다는 걸 보니, 자원봉사 활동시에는 한복을 입어야하는 모양이다(맞다, 문화재청의 권고사항이랬지;; ㅋ). 자원봉사 이외에도 여기는 '문화유산 체험학습지도사', '궁궐숲해설사' 같은 자격증을 따기 위한 전문가 양성과정도 있고, 관련 자격증도 발급하는 모양이다. 자원봉사가 아니라 나중에 이런 일을 직업으로 삼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쪽으로 접근해야 할 듯.

 

그밖에도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서울민속박물관, 서울자연사박물관, 서울시립미술관, 과천현대미술관... 기타등등 온갖 박물관과 미술관에서도 자원봉사 해설사를 모집하고 있으며, 간간이 유무료 인문강좌를 연다. 왕릉에 대한 수업도 있고, 기획전시 일정에 따라 특정 시기의 유물에 대한 강좌도 있다. 시간과 에너지만 허락된다면 찾아다니면서 들어볼만한 인문강좌가 참 많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각종 문화센터에서 개설한 인문강좌도 많고, 아예 문화해설사 과정도 따로 있더라. 인문학이 외면을 받고 죽어간다고 한쪽에선 난리지만(흔한 말로 "요즘 인문학을 공부하면 하버드 학위가 있어도 취직이 안돼!"라고들 한다.) 현실에선 분명 인문강좌에 대한 수요가 꽤 많다는 얘기다. 이 또한 내겐 좀 의아하고 신기했다. ^^

 

나로선, 아니, 내 돈 내고 생고생하는 자원봉사를 빡세게 교육까지 받아가면서 대체 왜??? 라는 의문이 먼저 들지만, 사람들은 의외로 참 이타적인 삶을 추구하나보다. 타인을 위한 봉사가 곧 자신을 위하는 길인지 어쩐지, 나는 아직 그런 숭고한 이념 같은 건 모르는 사람이라 기묘하기만 한데 눈 씻고 찾아보면 자신의 흥미에 맞게 찾아할 '봉사할' 일은 널려있는 듯하다. 정부와 지자체가 해야할 일을 시민에게만 떠맡기는 건 아닌가 나 같은 삐딱이는 좀 의심스럽지만 뭐 다들 좋아서 하는 일이라는데 어떡하겠나. 너도나도 재능기부가 유행인 것을. 나처럼 깊은 생각 없이 기웃대는 사람은 오래 버텨내지 못할 것임을 잘 알지만 암튼 당분간은 재미난 구경 다니는 셈치고 지켜볼 작정이니 앞날이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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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행위

삶꾸러미 2013. 3. 12. 17:04

두달 반이나 되는 교육기간에 비해 수강료 15만원은 싼 편이라 여겨 덜컥 나도 신청을 하기는 했지만, 수업을 들으러 다니며 보게되는 광경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다들 참 열심히도 사는데 그간 나만 탱자탱자 허송세월을 하고 있었구나 싶기도 하고...

 

내가 놀란 첫번째 이유는 100명이나 되는 수강인원. 대체 다 뭐하는 사람들이기에 평일저녁을 포함하여 일주일에 세번씩 꼬박꼬박 그토록 학구열을 불태우는지? 두번째는 교육 끝까지 변함없었던 앞자리 다툼. 마지막날 수료증 받으며 알게 된 건데, 맨 앞자리를 거의 안놓치셨던 반백의 어느 아저씨는 대전에서 매번 올라왔단다. 강사의 열강으로 수업이 늦어져서 어쩔 때는 밤 10시가 다 되어 끝나는 날도 있었는데, 그런 날이면 그 아저씨가 매몰차게 일어나 먼저 나가버리기에 지겨웠나보다고만 생각했더니 막차 시간 때문에 그랬던 거였다. 학창시절 방학때 대규모 특강 같은 거 들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처음 백여명씩 수업을 듣기 시작했더라도 마지막 즈음에 남은 인원은 기껏해야 2, 30명도 안됐던 거 같다. (스펙 쌓기 경쟁 심한 요즘은 또 달라졌으려나? 그건 모를 일이다;;;) 그래서 난 이번에도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 절반이나 되려나.. 하고 짐작하고 있었다. 헌데 그것 역시 나의 오산. 시험을 볼까말까 나처럼 막판까지 고민을 하다가 나타났는지 어쩐지는 모르겠으나, 마지막 날까지 8,90명 정도되는 인원수는 처음과 거의 변함이 없었다. 아 대체 뭣하는 사람들이기에! 

 

내심 시험공부는 별로 못했어도 설마 떨어지기야 하겠나, 싶은 생각에(그간 궁궐 구경다닌 경력이 얼만데! 수강인원의 절반에서 3분의 1쯤 정도 떨어뜨린다는데 설마!) 시험을 보기로 막판결심을 하고 강당 밖에서 또 다시 교재를 뒤적거리며 초치기에 힘쓰고 있던 나는 또 한 번 다른 사람들의 열기에 놀라움과 불안감에 사로잡혀야 했다. 아 무슨 논술대비도 아니고! 정갈하게 프린터로 뽑은 예상문제를 한뭉치씩 움켜쥐고서 여기저기 웅성웅성 떼로 모여 서로 질문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주워섬기는 내용은 내가 단편적으로 암기에 힘쓰고 있던 지식과는 차원이 달랐다. 오방색과 풍수의 접목이 어떻고, 창덕궁 어느 정자 주련에 적힌 한시의 내용이 어떻고... 궁궐 이름은 물론이고 웬만한 전각 이름이며 사대문, 사소문 정도는 한자로 쓸 수 있어야 한다는 둥... +_+ 아웅, 나는 전각 이름을 한글로도 죄다 못 외웠는데 쩝...

 

심지어 전투적이기까지 한 사람들의 시험열기에 나는 은근히 주눅이 들었다. 수업시간에 꾸벅꾸벅 졸던 사람들만 믿고 (근거없는) 자신감을 앞세운 게 잘못이었나 싶어지면서 헛웃음이 나왔다. 아우 괜히 망신당하는 거 아냐. 될대로 되라 하는 마음이라 떨리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암튼 신기한 경험이었다. 놀라움은 시험장 안에서도 이어졌다. 자리배치를 다시 한다기에 번호대로 앉히려나 했더니만, 그게 아니라 부정행위 방지를 위하여 한줄씩 띄어 줄 맞춰 앉으라는 얘기. 작년에도 바닥에 책을 펼쳐놓고 부정행위를 시도한 사람이 있었단다. 부디 올해는 그러는 분이 없길 바란다면서... 아니 안되면 마는 거지, 무슨 '이깟' 시험에 부정행위를 한대?

 

그러나 역시 놀랍게도 시험 도중 휴대폰 사용하지 마라, 옆사람과 대화할 필요 없지 않느냐 따위의 주의가 들려왔고 결국 누군가 시험지를 빼앗기는 듯했다. 오마나. 궁궐 답사 갔을 때도 놀라운 행동을 하는 사람이 더러 있긴 했다. 지킴이 자원봉사 하겠다는 사람이 궁궐에서 가래침을 뱉질 않나, 문짝과 난간을 마구 흔들어보질 않나, 제사 때 지금도 깎아 쓰는 향나무라니깐 돌아서면서 가지를 꺾어 냄새를 맡아보질 않나... @.,@ 실로 머릿속이 궁금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험에 붙자고 부정행위까지! 사람 속은 정말 모를 일이다. 돈(지킴이 하려면 약소하지만 다달이 만원씩 회비도 내야한다)과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가며 문화재를 지키는 자원봉사를 하겠다고 나선 사람의 태도와 부정행위가 어떻게 어울릴 수가 있지? 단지 자신이 원하는 일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취해도 된다는 무한경쟁논리가 여기서도 적용되는 건가? 혹시 자격증 같은 게 필요해서 어쩔 수 없이 수강한 사람도 있었던 걸까? 좀 무섭기까지 했다.

 

주관식 두 문제는 손도 못대고 공란으로 두어야 했고, 객관식도 아리까리 해서 마구 찍어댔으며, 한자로 답을 쓰라는 문제는 뻔뻔하게 한글로 답을 적어두고 후다닥 시험장을 나와 집으로 향한 나와 달리, 열공에 힘쓴 사람들은 얌전히 밖에 앉아 시험 끝나고 발표된다는 정답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우 끝까지 놀라운 사람들! 마지막 면접대상자 발표 공지에는 선발기준이 대략적으로 설명되어 있었다. 출석과 시험성적, 그리고 수험태도(부정행위)를 감안하여 선정하였다고. 흐음... 시험감독이 세 사람이나 되더라니, 부정행위를 한 사람이 여럿이라 걸러냈다는 뜻인가. 나의 합격이 어쩌면 그 사람들 덕분은 아닐까? ㅎㅎ 

 

어린시절 시험볼 때 고개를 들거나 쓸데없이 움직이면 부정행위로 간주하겠다는 선생님 말씀에 계속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다가 목 통증에 시달리거나, 지우개를 떨어뜨리고도 한참 고민하다 선생님한테 주워도 되느냐고 물었던 고지식한 학생이었던 나도 딱 한 번 고3 마지막 시험 때는 부정행위에 가담한 적이 있었다. 학력고사도 끝났겠다 어차피 내신에 들어갈 성적도 아니니 반 전체가 컨닝페이퍼를 돌려 보기로 모의가 되었던 것. 시험지 귀퉁이를 찢어 답을 순서대로 적은 뒤 주변에 돌리는 임무를 맡은 몇 사람 중 하나였는데, 어찌나 떨렸던지 뒤에 앉은 친구가 여러번이나 쿡쿡 찔러댄 다음에야 겨우 용기를 내어 쪽지를 건냈다. 아마 내 답에 자신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나 역시 부정행위에 관한 한 양심에 찔리는 일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암튼 늙으나 젊으나 시험에 임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열공파와 컨닝파, 배짱파, 소신파 등 변함이 없다는 깨달음 역시 이번 교육에서 얻은 신기한 경험이다. 다만 변한 게 있다면 내가 더는 벼락치기의 여왕이 아니라는 사실 뿐.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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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맞이 식겁

삶꾸러미 2012. 10. 4. 09:00

추석 전날, 식탁에서 엄마랑 동생은 밤을 까고 나는 나물을 다듬는 중이었다. 명절은 자기에게도 잔칫날임을 잘 아는 조카네 개 파랑이, 꼬리를 흔들며 여기저기 기웃거려봐도 아직은 먹을 것도 없고 퉁박만 받기 일쑤였다. 자꾸만 다리에 기어올라 아양을 떠는 녀석에게 저리 가라고 이르고는 주방으로 뭘 가지러 갔던가. 우연히 나는 파랑이가 식탁 밑에서 뭔가를 집어먹는 광경을 목격했다. 마침 개주인인 큰동생 내외는 빠뜨린 물건을 사러 외출 중이었는데, 잠시 뒤 파랑이가 갑자기 컥컥거리기며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식탁 밑으로 떨어진 밤껍질을 낼름 주워먹은 듯했다. 개문외한인 나와 막내동생이 보기엔 녀석이 숨을 못쉬어 당장이라도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어린 조카가 목부분을 어루만지고 입안을 들여다보았지만 소용없는 일. 사람이면 뒤에서 껴안고 상복부 마사지라도 한다지만, 개는 그럴때 어떻게 해야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나. 파랑이는 입도 못 벌리고 그릉그릉 캑캑 괴로워했다. 하필 주인도 없는데! 

 

버둥거리는 파랑이를 안고 동생과 나는 다급히 동물병원으로 달려갔다. 막내동생은 얼마 전 친구 가족들과 놀러갔었는데, 그날따라 아픈 개를 집에 두고 갈 수 없어 함께 데려왔다는 친구네 개가 시름시름 앓다가 새벽에 결국 죽는 광경을 목격했다며 심난해 했다. 입도 못 벌리고 몸부림치던 파랑이는 다행히 차에 타고 가는 도중 입을 벌리고 캑캑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추석연휴라 문을 닫았으면 어쩌나 걱정했던 동물병원은 열려 있었고, 의사에게 파랑이 상태를 이야기하니 그나마 밤껍질이라면 다행이라고 했다. 똥으로 나올 확률이 높은 거라서 외과적인 수술까지는 필요없을 것 같다고. 일단 엑스레이를 찍어보자면서 석장이나 찍었는데, 밤껍질은 또 엑스레이에 안나오는 이물질이란다. 일단 식도에선 넘어갔으나 이물질에 놀란 위가 약간 뒤틀려 있는 상황이고, 지켜보아야 알 수 있으니 소화를 돕는 주사 2대를 놔주겠다고. 어휴...

 

우린 완전 식겁해서 벌벌 떨었는데 전화로 소식을 전해들은 개주인은 가끔 뭘 잘못 삼켜서 좀 그러다 마는데 뭐하러 병원까지 갔느냐고 천하태평이었다. 우쒸! 우린 진짜로 파랑이 숨넘어가는 줄 알았단 말이다! 명절 앞두고 웬 난리인가 별별 생각이 다 들면서 순간적으로 온갖 최악의 시나리오를 다 쓰고 앉았던 것도 모르고 나 원 참. 원래도 파랑이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최대한 불쌍을 짓고 바들바들 떨면서 모두에게 사랑의 손길과 맛있는 것을 갈구하는 놈이다. 해서 바들바들 떠는 것이야 그러려니 하겠는데 집에 와서도 약간 몸을 뒤채며 경련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찌나 신경이 쓰이던지.

 

밤껍질이 위와 장의 벽을 긁어대면서 빠져나갈 거라 토할 수도 있으니, 수의사는 문제 생기면 다시 병원에 데려오라고 말했었다. 잔칫날 앞두고 파랑이도 나름 포식의 꿈에 부풀어 있었겠으나, 놀란 위에 인간의 음식이 들어가면 안될 것 같아 요주의 애견인들에게 신신당부를 해두었고, 결국 추석날까지 별 탈 없이 잘 지나가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애완동물은 정말 아무나 키우는 게 아님이 확실하다. 엄청난 병원비도 그렇고(4만7천원!), 말도 안통하는 애들이 어딘가 모르게 아프면 무서워서 어쩐담.

 

요번 추석엔 노동의 후유증이 어찌나 강렬한지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이미 몸이 막 늘어지고 어질어질 현기증이 났다. 바닥난 체력탓 수면부족 탓이 크게 작용했겠지만 아마 본격적인 노동도 하기 전에 파랑이 때문에 식겁한 것도 영향을 미쳤을지 모르겠다. 명절 노동의 최소화를 위하여 그나마도 온 친척들이 저녁까지 내리 먹고 버티던 악습을 걷어치우고,  점심 먹고 헤어지기로 결정한 지 수년째. 하도 길이 막혀 15분 거리를 한 시간이나 걸려 집에 돌아와선 다 저녁 때가 됐거나 말거나 곧장 쓰러져 자버렸는데 열몇 시간을 자고 일어나서도 온몸이 결렸다. 머리는 또 왜 지끈지끈 아픈지 좀 서러울만큼 연휴 내내 힘이 들었다. 볕 좋은 가을날씨 즐길 틈도 없이 연휴는 다 가버렸는데, 묵직한 몸은 여전하다. 오늘부터 출근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뭐, 이러면서 기운내려고 용쓰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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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

삶꾸러미 2012. 9. 20. 21:18

어느덧 또 2년이 흘러 얼마전 자동차 검사 안내장이 날아왔다. 느낌으론 작년에 한 것 같은데 벌써 2년이라니, 귀찮음보다 놀라움이 먼저였다. 어쨌거나 이번에도 나는 동네 카센터에 검사 대행을 맡겼다. 검사 안내장엔 대행 의뢰하지 말고 직접 검사소로 예약하고 찾아오라고 적혀 있었지만 흥, 안속는다 안속아.

 

처음 자동차가 생기고 종합검사 안내장이 나왔을 땐 당연히 차를 맡겨 대신 검사를 맡게할 수밖에 없었다. 차 유리에 선팅을 했었는데 당시엔 그게 불법 개조에 속하는 금지품목이었다(요샌 너무 심하게 깜깜한 것만 아니면 법적으로도 선팅이 허용되므로 벗겨낼 필요가 없다). 그러니 카센터에서 선팅을 다 벗겨내고 검사를 받은 뒤 다시 선팅을 해주어야 했던 것.

 

그렇게 2년에 한번씩 검사 안내장이 나오면 당연하게 카센터에 대행을 의뢰했던 나는 문득 대행비가 아까워졌다. 두번째 자동차로 갖게된 하얀색 세피아를 몰 때였다. 아는 분에게 중고로 넘겨받긴 했어도 워낙 마일리지도 높지 않은 새차에 가까웠고, 얼마 전 엔진오일이며 웬만한 점검도 했겠다 별 문제 없을 것 같았다. 15년쯤 전이라 당시 검사비가 얼마였는지 모르겠는데, 그때나 요새나 검사 대행을 맡기려면 암튼 거기다 3만원쯤을 더 얹어주어야 한다. 물론 미리 차를 점검해 보완해야할 부분이 있다면 수리비는 당연히 별도. 허나 그때까진 수년째 자동차 검사 대행을 맡기면서 문제 있어서 추가로 수리 비용 지불해 본 적도 없었다. 당연히 만만하게 여겨질 수밖에.

 

어차피 선팅 필름은 떼어내고 갔다가 다시 맡겨야 했지만, 밥벌이 시원찮은 초보 번역가 시절이라 몇만원이라도 절약하려는 마음이었다. 선팅 필름은 스티커 잡아떼듯 죽 잡아당기면 쉽게 떨어진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별 문제 없었고, 죄다 아저씨들 투성이인 검사장으로 당당히 들어가 서류를 접수하고 검사를 받는 것까진 좋았는데... +_+

 

문제 없이 검사를 통과할 것이라던 예상과 달리 내 차는 배출가스 불량 및 전조등 각도 불량(?!! 난생처음 들어보는 사유였다;;)이라며 결격사유가 두 가지나 되어 재검에 걸렸다. 헐...  진땀이 삐질삐질 났다. 이런 걸 긁어 부스럼이라고 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나는 결국 인근 공업사를 찾아가 불합격 항목을 알리고 쌩돈을 들여 수리를 받은 뒤, 다음날 다시 검사를 받아야 했다. 자동차 검사따위 나 혼자서도 잘 할 수 있다며, 호기롭게 집을 나섰다가 기가 팍 죽어 돌아온 나에게 당시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주변에 자동차 검사 받으러 직접 갔다는 사람 한 명도 못 들어봤다. 다 대행시킨다더라. 마일리지 10만 킬로미터 넘은 똥차도 대행시키면 그냥 통과라더라. 다들 돈 벌어먹고 살아야 하니 카센터와 검사소 사이에 모종의 야로가 있다는 뜻이다, 이 헛똑똑아.

 

해서 그 이후 나는 자동차 정기검사에 관한 한 잘난 척을 관두고 매번 동네 카센터에 가져다준다. 대행료 몇만원 더 내는 거? 하나도 안 아깝다. -_-; 혼자서 해보겠다고 나섰다가 망신당했던 그해로부터 딱 2년 뒤, 나는 카센터 아저씨한테 다시 차를 맡기고 연락을 기다렸다. 2년 전에도 배출가스로 걸린 승용차라면, 마일리지도 더 늘어나고 2년 더 노후된 차라서 또 어딘가 문제가 있다고 재검 판결이 나는 건 아닐까 궁금했다. 하지만 차는 불과 한두 시간 만에 종합검사를 마치고 무사히 돌아왔다. 새차도 직접 검사 받으러 가면 어딘가 걸릴 수 있지만, 검사대행 맡기면 헌차도 전혀 문제없다는 불패의 진리를 믿을 수밖에. 흥!

 

정규 검사소보다 몇몇 지정 공업사에서 하는 출장 검사소가 융통성을 더 발휘하는지 어쩐지 잘 모르겠고, 검사를 의뢰하는 거래 카센터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느라 모종의 눈감아주기가 자행되는지 어쩐지도 나로선 알 수 없다. 어쨌거나 운이 없었든 아니든, 직접 자동차 검사받으러 갔다가 퇴짜맞은 전적이 있는 나로서는 한번의 경험으로도 <뭔가 야로 있음>을 굳게 믿으며, 앞으로도 주욱 검사 대행 쪽을 선택할 것이다. 물론 마일리지는 청년이되 연식은 12년이나 묵은 내 차는 요번 검사를 받기 전에 여기저기 손볼 데가 많아 돈을 꽤나 잡아먹고 검사에 임했으니 당연히 무사통과했다. 하지만 카센터에서 다 점검 받은 차를 가지고 내가 직접 검사소에 갔더라도 같은 결과가 나왔을지는 장담 못하겠다. 오래 전 단 한번의 경험으로 불신이 너무 깊은가? 누가 좀 반박 사례를 알려준다면 감사하겠음. 설마... 일정한 불합격률을 유지하기 위한 무작위 복불복에서 나만 재수없게 걸렸던 건 아니....겠지?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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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꾸러미 2012. 4. 16. 11:37

일주일전부터 동네 여기저기서 발견하고 모은 봄꽃과 들풀 사진. 이제야 정말로 봄이로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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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꽃임은 분명한데, 아무래도 외래종같다. 제비꽃의 다른 말이라지만 그야말로 '오랑캐꽃'이라고 불러야할 것 같은 양꽃의 느낌.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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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하러 동네 중학교 올라갔다 발견한 매화꽃. 묻지도 않았는데 어떤 아줌마가 지나가다 청매화라고 콕 찝어 알려줬다. 동백 흉내를 내려는지 시들지도 않은 꽃이 바람에 툭 떨어져 바닥에서도 고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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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 같지만... 엄마가 옛날엔 나물로 해먹던 잣나물이라고 가르쳐줬다. 겨울 나고서 이렇게 흙을 비집고 올라오는 봄날의 여린 풀은 꽃 못지 않게 예쁘다.

춘심이 동해 결국 뛰쳐나가게 만들었던 주말의 봄날씨를 겪으며 집앞에도 꽃잔치가 벌어졌다. 몇년째 계속 두 그루 다 벚꽃인 줄 알고 살았다가 작년에야 비로소 왼쪽 나무는 벚나무가 아니라 살구나무란 걸 깨달았다. 자세히 보면 꽃이 좀 다르긴 하다. 살구꽃이 더 작고, 촘촘한 밀도도 벚꽃보다 떨어진다. 근데도 작년까지는 계속 까막눈으로 똑같이만 보였다는 사실;; 

이것이 살구나무꽃.

이것이 벚꽃. 얘는 어제까지만 해도 완전히 다 피지 않아서 어젠 위 사진만 찍었는데, 벚꽃도 드디어 오늘 만개했다. 사진으로 보니 진짜로 벚꽃엔 별이 들었구나. +_+ 어디선가 말은 들어밨는데 정말 꽃속에 든 별을 제대로 실감한 건 오늘. 

나의 살던 고향은...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어제 오늘 계속 흥얼거리는 중.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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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

삶꾸러미 2012. 2. 1. 03:00

며칠 뒤면 만난지 꼭 13년째 되는 이들을 주말에 만났을 때 어쩌다 나온 이야기인데, 나를 알기 이전에는 책을 읽을 때 한번도 번역자에게 신경을 써본 적이 없다고 다들 입을 모았다. 지금도 내가 번역한 책이나 돼야 옮긴이 이름을 눈여겨 볼 뿐, 다른 책은 여전히 무관심하다나. 그렇다면 나는 과거에 어쨌더라? 번역을 생업으로 삼아야겠다고 마음 먹은 다음에야 당연히 번역의 질과 번역자가 최고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겠으나, 그 이전에는?

흔히들 가장 훌륭한 번역자는 투명인간이어야 한다는 말을 한다. 번역서를 읽고 있으되 번역서를 읽고 있다는 의식이 들지 않을 만큼 문장이 매끄럽고 작품의 결을 살려, 지은이와 독자 사이에서 '번역'이라는 중간단계의 존재를 가능한 한 일깨우지 않아야한다는 뜻이다. 순수하게 책읽기를 즐기고 감동하였다면 그 찬사는 오로지 작가를 향한 것일뿐, 번역자가 누구인지는 굳이 몰라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나는 별 생각 없는 독자 시절에도 확실히 번역자에게 관심을 두었다. 그 옛날 세계문학전집류의 번역이야 다 거기서 거기였으므로 크게 신경쓰지 않았지만, 간간이 손에 들어오는 단행본 번역서의 경우엔 중고등학생의 눈에도 느낌이 달랐다. 같은 루이제 린저의 책이라도 전혜린 번역은 감동스러운데 다른 사람이 번역한 책은 이게 뭔소린가 싶어 여러번 되돌아가며 읽어야했다. 고려원에서 출간되어 라디오에 광고까지 나오던 당대의 화제작들 가운데서도, 밤을 홀딱 새가며 손에서 놓지 못하는 책이 있는가 하면, 도저히 책에서 묘사되는 상황과 인물이 그려지지 않는 책도 있어 짜증이 났다. 그런 부실한 책의 번역자는 부러 눈여겨봐두곤 했다. 나중에 피해 읽으려고. -_-; 특히 고려원의 단골 번역자 중에 영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었는데, 십수년 뒤 내가 이 분야에 들어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문하생들에게 원고료 반값도 안주며 번역시키고 자기 이름으로 책 내는 걸로 유명한 분이었다. 아직까지도 현역에서 활동중이시던데 설마 여전히 그러지는 않으니까 출판사에서 계속 일감을 주는 것이기를 빈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특히 교수입네 하는 사람들이 번역한 책을 유독 못미더워했다. 웬만한 교수님들은 시간도 없고 논문 한편으로밖에 인정해주지 않는 번역에 힘쓸 이유가 없기에, 죄다 제자들한테 번역 시켜 원고정리만 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특히 전공책 같은 건 어떻게 번역본보다 차라리 원서가 더 쉬울 수가 있는지! @.,@ 하지만 나 같은 사람들의 의구심과 불신을 알면서도 묵묵히, 꾸준히 손수 번역에 힘쓰는 교수님들도 분명 존재한다. 본인이 아니고선 누가 하겠나 싶어 사명감으로 일하는 경우도 있는 듯하고, 고전의 경우엔 공신력 있는 번역을 원하는 출판사들이 교수진을 설득해 본인에겐 크게 득될 것도 없는 일감을 맡기는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종신교수직도 갖고 있으면서 번역도 잘하는 분들은 나에겐 워낙 넘사벽이라, 외국어를 두세개씩 전천후로 막 번역하는 다재다능 번역가들에게 품는 질투심 같은 것도 아예 생기질 않는다. 요번에 드디어 줄리언 반스를 읽어보겠다고 사둔 책들을 들춰보니 번역자가 모두 신재실 선생이다. 호흡도 그렇고 소설 내용도 박학다식하여, 쉽지 않았을 것 같은 번역 문장도 마음에 들어 어떤 분인가 슬쩍 약력을 살피니 1941년생이시란다. 그렇다면 울 엄마와 동갑! 올해로 일흔둘의 나이다. 초판이 나온 건 2005년이니까 그보다 몇 해 전에 작업했다고 해도, 60대 초중반에 번역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교수 정년이 65세니까 어쩌면 투잡족의 시기에 번역을 하셨을지도 모르겠다. (순전히 내 상상 시나리오에 그칠 수도 있다;;) 2011년 부커상을 수상한 줄리언 반스의 최신작 <The Sense of an Ending>도 아마 같은 분이 지금 막 번역을 하고 있지 않을까 상상하며(파피, 블루고비, 새알밭님이 모두 원서로 읽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작품이다;;), 나는 또 괜히 비감에 젖었다.

처음 생업이자 천직이라 여겨 이 길에 들어섰을 땐 정말 득의양양했다. 좋아하는 책 노상 끼고 볼 수 있고, 시간 자유롭고, '정년'도 없고 얼마나 좋은가!
.....

하지만 이 일로 10년을 넘기고 난 어느 순간부터 나는 '정년'이 없다는 게 그렇게 환상적인 업무조건은 아닐지 모른다고 투덜대고 있었다. 딱 예순살까지만 일하고 은퇴해서 소박하지만 유유히 놀고 먹을 순 없을까. 길게 잡아도 예순다섯살까지만 일하고 싶은데! 내가 이런 말을 하고 다니면 주변에서 끌끌 혀를 차거나 한심해 했다. 늙어서도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게 얼마나 큰 특혜일 텐데 배부른 소리 하고 앉았구나. 그 정도 벌이와 씀씀이로는 아마 너 평생 죽기 직전까지 일해야 할걸? 누가 그때까지 계속 일감을 주기는 한다냐? 

설상가상 요샌 평균수명이 '너무' 늘어 100살까지 산다고들 난리다. 노령화사회의 폐해가 어쩌고 저쩌고 겁을 줘가면서. 심지어 남들은 철밥통으로 알고 있는 종신교수직에 있는 지인도 65세에 정년퇴직하고 나면 얼마 되지 않는 사학연금으로는 100살까지 살기 어렵다며 무언가 다른 방도를 내야한다고 엄살을 떤다. 으윽. 그렇다면 결국 결론은 내가 '정년'과 '은퇴'에 관한 생각을 바꾸고 십수년전의 나로 돌아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희희낙락 열심히 일을 해야한다는 의미다. 계속 신뢰를 쌓아 노년에도 계속 찾는 이가 있도록 깊은 내공을 쌓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별 내공도 쌓지 않은 채 올해로 '겨우' 번역 17년째 접어든 나는 자꾸 꾀가 나서, 뭔가 더 내게 잘 맞고 머리를 덜 쓰는 일은 없을까 두리번거리고 있을 뿐이고... ㅠ.ㅠ 열심히 일한 당신, 이제는 좀 쉬라고 노인들에게 말해줄 복지사회 따윈 이 땅에 거의 불가능한 것 같은데 대체 어쩌려는지!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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