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건축가

놀잇감 2012. 6. 29. 01:42

 

시간이 지날수록 여운이 계속 사라질 게 뻔하므로 기억이 다 지워지기 전에 후기 몇 마디 적어놔야겠다. 올해의 베스트 영화에 들어갈지도 모르니까.

 

다큐멘터리 영화인데도 이 작품을 찍은 정재은 감독의 상업영화 <고양이를 부탁해>보다 관객이 많아 4만명을 넘어섰단다. 3월에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아직도 소수의 개봉관에서 하루에 한두 번씩 볼 수 있게 상영한다는 건 그만큼 찾는 이들이 많다는 증거다. 나도 봐야지 봐야지 벼르다가 6월 들어선 당연히 끝났겠거니 했는데 아직 상영하고 있는 데가 있었다. 마지막 기회마저 놓칠 순 없다고 결심하고 광화문 스폰지하우스로 나갔다. 

 

감독이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건축학개론>의 열풍 덕을 봤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다는데, 고 정기용 건축가가 지닌 인간미와 고집 같은 것 때문인지 극영화로 보아도 손색없을 만큼 좋은 영화였다. 암으로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말을 본인 입으로 하지만, 병과 죽음을 극적인 소재로 이용하려는 시도는 원래부터 없는 듯하다. 다만 안타까울 뿐. 건축에 대한 생각과 접근방식은 존경할만하지만, 건축 자체로서의 조형미나 완성도는 떨어진다고 가차없이(그러나 애정을 담아서) 비판하는 동료 건축가나 비평가들의 증언(?)도 신선했고, 병 때문에 쉰 목소리로 힘없이 전하는 정기용 선생의 이런저런 이야기도 좋았다. 원래도 유머감각과 멋이 넘치는 분이었을 듯. 저런 모자가 저렇게 잘 어울리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건물을 지을 땐 쓸 사람의 의견을 제일 많이 반영해야한다며 안성면사무소에 목욕탕을 함께 지었다는 일화는 원래도 유명해 들어본 적 있다. 할머니들이 일년에 몇 번 봉고 빌려서 겨우 다니던 목욕탕을 단돈 천원에 노상 다닐 수 있게 되어 누가 지었는지도 모르면서 편하고 좋다고 말하는 모습은, 우리가 바라는 공공 건축물의 이상을 잘 보여주는 듯했다. 기괴하고 흉물스러워 쳐다보고 싶지도 않은 요즘 서울시청의 모습을 내가 왜 그렇게 못마땅해하는지 그 이유도 잘 알겠고. 박원순 시장이 아무리 시청을 결혼식장이며 행사장으로 시민에게 내준다고 해도, 이젠 쓸데없는 짓이다. 그 흉측하고 불편한 곳에 가서 그런 일생의 중요행사를 하고 싶겠느냐고! 더불어 돈 처들여 흉측하게 만들기 분야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것 같은 동대문운동장 이야기도 언급되던데, 서울의 역사, 동대문 운동장의 역사를 최대한 반영하려 했다가 설계 경쟁에서 떨어진 다른 한국 건축가들의 아이디어가 난 훨씬 좋았다. 나도 생애 최초로 야구 구경을 간 곳은 동대문운동장이었단 말이닷! 하지만 심사를 맡은 이들도 설계 경쟁 우승작도 외국인이었다는 점을 참...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원. 이명박 시장시절부터 시작해 5세훈이 디자인 서울이랍시고 망쳐놓은 것들의 후유증은 그러고 보니 아직도 멀었다.

 

등나무를 심어 천연 지붕 효과를 낸 무주의 등나무 공설운동장도 그렇고, 원래 있던 나무를 그대로 살리고 도너츠 모양의 건물로 지은 기적의 도서관 같은덴 나중에 한번 여행삼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작품 같은 건축물에 건축가와 아무런 상의도 없이 공무원들이 '녹색성장'을 빌미로 흉물스러운 태양광 수집판을 덕지덕지 가려놓아, 선생한테 "개같은 새끼들"이라는 평가를 듣는 장면을 보면서는 한숨이 나왔다. 우리나라 공무원들은 참 안목과 하는 짓거리가 왜 다 그 모양일까나. 최근에 새로 지은 군청, 구청, 시청  청사들을 보면 하나같이 천박한 유리 외관이고 말이지... 하기야 애당초 정기용 선생 같은 이에게 건축을 맡긴 공무원들도 있긴 했구나. -_-; 

 

일민미술관에서 회고전 준비하는 과정도 영화에 담겼던데, 후회해도 진짜 소용없는 짓이지만 그 전시를 보고싶다고 달력에 적어만 놓았을 뿐 놓쳤던 게 참 안타까웠다. 드물게 건축가를 남편으로 둔 친구들에게 내가 "좋겠다 좋겠다 멋지다"따위의 감탄사를 연발하면, 뜻밖에도 설계랍시고 만날 컴퓨터 앞에서 마우스만 갖고 씨름한다는 실망스러운 대답을 듣곤 했으나 정기용 선생은 옛날 분이라서 그런지, 아랫사람 실무자가 아니라서 그런지 아날로그 방식대로 연필과 색연필로 그린 설계를 보여주어 더욱 좋았다. 그 그림과 도면들을 실물로 알현할 기회가 있었는데 내가 날려버렸다니... 으휴.

 

<말하는 건축가>라는 제목에도 참 기막히게 어울릴 만큼, 건축에 대해서 건축하는 사람의 태도에 대해서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주옥같은 명언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는데 벌써 다 까먹고 말았다. 책을 사보면 되려나.. 그러는 중이다. 영화가 끝나고 광화문 스폰지하우스에서 나와 골목을 벗어나자마자 눈앞에 떡 일민미술관이 보이는데, 마음이 스산했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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