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충분한 느낌

투덜일기 2013. 3. 27. 15:10

 

사놓은 지 한참 된 더글라스 케네디의 <위험한 관계>를 드디어 읽었다. 사자마자 처음 몇장 읽어볼 땐 뭔가 견딜 수 없이 따분하고 상투적이라 참지 못하고 내려놓았었다. 나랑 안맞는 책인가. 가끔 그런 책들이 있다. 다들 좋은 책이라고 하는데 나는 통 그 재미를 모르겠는 책들. 더글라스 케네디도 그런 작가인가 싶었는데,1년도 더 지나 다시 집어드니 이번엔 꽤 잘 읽혔다. 그때도 아마 소설 기피증이 발현되었을 때였을지도 모르겠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다른 책을 안 읽어서 저 유명한 <빅 픽처>와 비교는 불가하지만 퍽 재미나게 읽었다. 균열이 가기 시작한 부부관계와 모성의 부담감을 참 잘도 파헤쳐놓았다 싶다. 마흔 살 넘어 어렵사리 딸을 낳은 친구 하나가 겪었던 무시무시한 산후우울증을 알기에 더 실감이 났던 것 같다. 친구 역시 아기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엄마로 판명되어 분리하는 게 좋겠다는 의사의 권유가 있었다. 아기는 부산 시댁으로 보내고 우선 엄마의 우울증부터 치료해야한다고 했다. 친구는 아기를 죽일 뻔 했다면서 엄마 자격 불충분이라고 몹시 울었다. 다행히도 친구는 아기가 백일을 맞기 전에 건강을 회복했고, 이후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키우고는 있지만 아직도 간간이 엄마 노릇에 자신 없어하며 한숨짓는다. 가끔 우는 소리를 하는 친구에게 내가 해주는 말은 하나 밖에 없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은 위대해!

 

모성이 뭔지 나로선 절대 알 수 없겠지만, 불충분한 느낌이 뭔지는 나도 잘 안다. 책에서도 딱 내 마음 같은 구절을 발견했다.

 

우리의 대화에 공통된 주제가 있다면 이 오래 지속되어온 불충분한 느낌이었다. 대학시절 내가 내내 그랬지만 성적이 B학점을 넘지 못하면 늘 하던 걱정.... 내가 모든 면에서 '괜찮은 편이지만' 그리 뛰어나지는 못한 사람 같다는 기분.... 내가 꽤 저명한 신문사에서 오래도록 일했거나 특파원이었다거나 직업 일선에서 자신감 넘치는 사람으로 유명했다는 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나는 늘 의심을 품었고, 언제 내 능력이 들통날지 염려스러웠다.

- p267, <위험한 관계>

 

맞다. 나는 내 실력이 늘 의심스럽다. 실제 능력이 들통날까봐 겁이 나서 늘 조심씩 허세를 부려온 것도 사실이다. 뭘 해도 불충분한 느낌이 가시질 않는 건 깜냥도 안되면서 뛰어난 사람이면 좋겠고 이왕이면 완벽을 추구하는 욕심 때문이다. 어쩌면 이미 본모습이 들통나 다른 이들은 다 알고 있는데 나만 아직 욕심을 부여잡고 징징거리는 지도 모르겠다. 하여간에 또 다시 자신감이 바닥으로 떨어져 뒹굴다 막 발에 밟히는 나날에, 내 불안을 콕 집어준 구절을 책에서 발견하고는 나만 그러는 게 아니구나 좀 위안이 되었다. 그런데 또 궁금해지는 것 한가지. 불충분한 느낌이 주는 불안에 얽매이는 사람은 이 책 주인공처럼 다 그렇게 비호감에 짜증나는 성격인가?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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