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폴더를 슬쩍 훑어보니 누구에게든 도움이 될만한 독서후기보다는 그저 감상에 치우친 책자랑이 많다. 책읽기에 대한 내공과 역량이 그것밖에 안된다는 얘기다.  이번에도 후기보다는 책자랑 또 한판.

사진집은 워낙 비싸서 잘 안사게 되는데 작년말쯤에 나온 윌리 로니스의 이 책은 괜스레 갖고 싶었다. 순전히 바게트 빵 들고 뛰어가는 저 아이 사진이 표지라서 그랬던 것 같다. 오래 전 전시회 다녀와서 흑백사진을 추억하며 막내동생 사진이랑 비교해 올렸던 바로 그 사진이다.
게다가 이 책은 그냥 사진집이 아니라 사진을 찍은 '그날'에 대한 뒷이야기도 담겨 있다고 했다. 원제는 <Ce jour-là>, 부제가 '내 작은 삶의 기적: 윌리 로니스의 사진 그리고 이야기들'이다.

찾아보니 전시를 보러간건 2007년이었고 사진작가는 2009년에 작고했단다. 1910년에 태어나 무려 아흔아홉살. 우리 할아버지와 같은 해 태어났건만 14년을 더 살았다. 근대와 현대를 모두 경험한 이에 대한 선망일까, 수많은 <결정적 순간>을 선보인 앙리-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도 좋고, 같은 말이라 생각되는 <정확한 순간>을 담은 윌리 로니스의 사진도 좋다.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오래전 전시회때 본 사진들은 책에 별로 들어있지 않은 듯하다. 내가 마음대로 로니스의 아들 뱅상이라 짐작했던, 저 <작은 파리지앵> 사진을 포함해 두어 장만 낯이 익었다.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바스티유의 연인> 사진도 없다. 그 대신 같은 날  찍은 <바스티유 기념탑의 그림자>가 들어있는 식이다. 60장쯤 되는 사진과 그 뒷이야기가 짤막하게 담겨 분량은 180페이지도 되지 않는다. 읽을 거리가 좀 더 많기를 바랐으나, 사실 사진은 구구절절 설명을 듣기보다 보는 사람의 인상과 느낌이 더 중요하므로 이야기가 짧아 사진이 더 돋보였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사진이 더 많았다면 가격도 훨씬 더 비싸졌겠지!

가능하면 연출하지 않고 그냥 주어진 순간을 포착하거나 기다렸다가 일상을 잡아내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는 작가도, 저 빵소년 사진은 연출한 거란다. 빵집 앞에 할머니와 줄 서 있는 저 아이를 보고 부탁해 '세번이나' 달리게 했다는 사연. 우연히 맞닥뜨려 포착한 사진들은 확실히 조금 흔들려 초점이 흐려지기도 했던데, 저 바게트 빵소년 사진은 정말 거의 완벽해보인다.

두고두고 찬찬히 보고 읽을 심산으로 산 책인데, 택배상자 열다가 그 자리에 앉아 다 읽고 말았다. 사진도 좋지만 간결한 단상과 사연을 적은 담백한 글도 좋다. 요즘 부쩍 '세상은 불공평해! 뭔가를 잘하는 사람은 다른 것도 다 잘해! 공부 잘하는 사람은 그림도 잘 그리고 악기도 잘 다루고! 잘 생기고 예쁜 사람이 성격도 좋고 머리도 좋아!'라고 투덜대는 일이 잦아졌다. 이 책을 보고서도 하이고, 바흐를 몹시도 좋아했다는 이 아저씨 '사진도 잘 찍지만 글도 잘쓰네' 하며 열등감에 사로잡혔다. -_-; 

"보통, 나는 일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 그저 바라보고, 기다린다. 어떤 사진이든 그냥 그 상황의 인상에 다른다. 내 순간성을 잡을 수 있는 좋은 위치만 찾으려고 애쓸 뿐이다. 실재가 더 생생한 진실 속에 드러나도록, 그것은 시점의 쾌락이다. 때론 고통이기도 하다. 일어나지 않은 것을, 혹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어날 일을 바라는 것이기 때문에." (p30)

"사실, 내 사진 인생을 통틀어 내가 가장 붙잡고 싶은 것은 완전히 우연한 순간들이다. 그 순간들은 내가 할 줄 아는 것보다 더 훌륭하게 나에게 이야기해줄 줄 안다. 내 시선을, 내 감성을 표현해주는 것이다. 사진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데 뭔가 일어나고 있다. 내 인생은 실망으로 가득 차 있으나 커다란 기쁨도 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해줄 수 있는 이런 기쁨의 순간을 포착하고 싶다. 삶이 슬그머니 아는 척을 해오면 감사하다. 우연과의 거대한 공모가 있다. 그런 것은 깊이 느껴지는 법이다." (p91-92)

으음... 혹시나 저작권법 위반 어쩌구 할까봐, 그리도 또 좀 퍼오기 귀찮아서 사진 없이 글만 인용하려니 느낌이 제대로 전달이 안되는군. 암튼, 새하얀 설경을 어스름에 찍어놓은 것 같은 소박한 흑백사진과 글들이 참 어울리는 책이다. 서늘한 느낌과 따뜻함이 공존한다고나 할까.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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