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 관련해서 역사강의를 들으러 좀 다니면서, 19세기말 20세기초 조선이 처했던 국제정세와 비교할 때 현재 G2로 부각한 중국과 G3나 다름없는 일본 사이에 끼어 대미관계를 고민하는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이 사뭇 비슷하다는 말을 꽤 들었다. 아시아로 몰려든 서양열강의 제국주의 압박 속에서 외세에 기대어 눈치를 보다 나라를 잃었던 조선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대한민국도 정신 똑바로 차려야한다고 말이다. 정치인들도 똑같이 그렇게 느끼고 있는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짜증스러운 망국의 역사라 별로 관심없었던 근대에도 요즘 새삼 눈을 돌려 이 책을 읽게 됐다. '일본은 어떻게 개항에 성공했고 조선은 왜 실패했나'라는 이 책의 부제 그대로 그 내막이 실로 궁금했고, 과거엔 나라 빼앗긴 무능한 왕이라고만 여겼던 고종에 대한 평가가 최근들어 달라져 여기저기서 그를 '나름대로' 독립을 위해 노력했으며 신문물 도입과 개화에 힘쓴 개혁군주로 그려내고 있는 점도 호기심이 일었다. 고종이 진짜 그랬다고? 이미 까마득하지만 중고등학생 때 배운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정말로 시대착오적인 잘못이었고, 대한제국을 선포해 나라의 위신을 세우려 했던 고종의 눈물겨운 근대화 시도는 단순히 일제의 횡포 때문에 실패했을까? 

 

문소영 지음, 역사의아침, 2013

제목에서도 이미 짐작할 수 있듯이, 저자는 조선의 근대화 실패가 일본과는 확연하게 달랐던 사대부들의 고리타분한 사상과 내부적인 준비부족, 세계정세에 어두운 편협한 시각, 국가재정의 궁핍 등을 원인으로 삼는다. 그리고 특히나 몇번 개화파가 시도했던 근대화 개혁의 기회 앞에서 고종은 걸림돌 노릇을 톡톡히 했다. 당시 고종과 개화파들의 의식수준이라는 것이 기껏해야 '뛰어난' 동양 사상은 고수하며 서양의 앞선 기술만 도입하자는 '동도서기'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도 한계였다.

 

일본의 사무라이 계급과 다이묘들도 구한말 한학자들과 양반 못지않게 처음엔 개항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무력봉기를 시도하기도 했지만, 결국 메이지 유신을 성공리에 이끌 수 있었던건 주요 반대인사들이 직접 유럽과 미국을 유람하며 앞선 산업기술과 '대세'를 실감한 뒤 방향을 전환했고 거국적으로 서양문명과 합리적인 서구 사상까지 받아들여 부국강병에 힘썼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조선은 서양으로 유학을 떠났던 인물의 경험과 깨우침이 제도개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사적인 에피소드로 남았을 뿐, 근대화와 관련하여 변덕이 죽끓듯 했던 고종의 정책과 입맛에 따라 일부 개화파는 일본으로 망명을 해야할 정도였다. 부국강병에 힘쓰는 대신에 자꾸만 외세나 끌어들이고 말이지...

 

갑신정변과 갑오개혁 같은 위로부터의 개혁 가능성은 물론이고, 임오군란과 동학농민운동 같은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가능했던 순간에도 고종과 관료들은 항상 청나라와 일본에 기대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결과적으로 청나라 군대와 일본군대가 한반도에 상주하는 빌미만 제공하고 말았다. 물론 호시탐탐 외세가 노리고 있는 상황이라고는 해도 왕권약화는 고종의 자업자득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16세기 이후로 조선이 모든 분야에서 진취성을 잃고 자만하여 퇴행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정말이지 구한말의 역사는 읽고 있다보면 혀를 끌끌 차게 되거나 부아가 치밀만큼 안타깝다. 나 역시도 그렇기 때문에 굳이 들여다보려하지 않거나, 단편적인 역사적 사실을 빌미로 최대한 그 때를 미화해 생각하려는 태도를 취했던 것 같다. 가령,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환궁우를 지어 조선왕조 500년간 중국 눈치보며 알아서 기느라 못했던 천신제를 올렸다든지(제후국의 왕은 감히 하늘에 제사를 지내지 못한다는 것이 중화의 질서;;),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한지 불과 8년만에 아시아 최초로 경복궁 건청궁 일대에 전깃불을 설치할 만큼 고종이 신문물 도입에 관심이 많았다든지(경복궁 향원정 옆에 가면 '전기발상지' 표석도 있다), 헤이그밀사 파견으로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알리려 했다든지, 왕실 사유재산인 내탕금을 털어 워싱턴에 주미공사관 건물을 매입해 자주외교의 노력을 했다든지, 고종이 순순히 양위를 거부하다 순종의 즉위식에 참석을 안했다나 뭐라나(그러나 관련자료 사진을 보면 고종과 순종 모두 즉위식에 참석했을 확률이 높다;;; ㅋ).....

하지만 분명한 건 제국주의 시대에서 조선말의 행보는 분명 잘못된 것이었고 개화노력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으니 '나름대로의 노력' 정도로는 확실히 부족하다. 남탓만 하는 것도 웃기는 노릇이고 말이다.

 

이 책의 저자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다. 이 책 이전에도 조선의 근대와 관련된 책을 썼나본데 '일개 기자' 따위가 언급할 내용이 아니라는 학계의 비판도 있었다고 서문에 적혀있다. 아니, 역사책은 꼭 역사학자만 써야하나? 쳇... 그렇다고 이 책이 흥미위주로 가벼운 것도 아니다. 1, 2차 사료들을 충분히 공부하고 기존 역사학자들의 연구내용을 바탕으로 비교분석했기 때문에(물론 그래서 인용문도 많음) 꽤나 공부삼아 읽어야 했는데 나로선 재미도 쏠쏠했다. 그나저나 근대 조선말과 고종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한 백년쯤 더 흘러야 객관적으로 자격지심 없이 담담히 이야기할 수 있으려나. 역사학계에선 여차하면 서로 식민사관이라고 공격질을 해대니 참 어떤 견해가 옳은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조선말 고종과 양반들은 너무 무지했고 무능했다는 견해가 옳다는데 나도 동감. 그런데도 고종 승하 후 온 백성들이 덕수궁 앞에 몰려가 통곡을 했던 건 고종을 애정해서가 아니라 그냥 절대왕권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조건반사 행동이 아니었을까. 내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바에 따르면, 독재자 박통이 사망했을 때도 소복 입은 시민들이 연도에 늘어서 통곡을 했었단 말이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신채호 선생의 말쌈이 새삼 자주 떠오르는 세상이다.

 

 

흥선대원군 체제에서 오히려 조선은 개혁되고, 부강하고 강력했다. (33쪽)

 

조선이 새로운 정보를 취득할 수 있는 통로는 청나라와의 사신 교류와 임진왜란 이후 정례화된 일본과의 통신사 교류였다. 그러나 이렇게 얻은 정보는 서적으로 출판돼 널리 공유되기 보다 개인문집으로 남아 사장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중략) 성리학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이단으로 치부하는 노론식 사고방식과 국정운영이 16세기 말부터 조선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었다. (98쪽)

 

그렇다면 1910년 8월까지 황제의 자리에 올라 있었던 순종이나, 1863년에 왕좌에 올라 1907년까지 44년간, 특히 마지막 10년은 황제로까지 불렸던 고종에게는 아무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일까? 일본에게 받은 은사금이나 작위만 가지고 따져보면, 고종이 가장 많은 은사금과 가장 높은 지위를 보장받았다. (119쪽)

 

1873년-94년 사이에 민씨가문 사람들이 전보다 많이 등용됐으나 결코 조정을 손아귀에 쥐고 휘두를 정도는 아니었다. 민씨로 삼정승에 오른 사람이 1878년 잠깐 우의정이 됐다가 사망한 민규호 하나뿐이었다. 명성황후와 민씨가문은 고종이 가장 든든해할 보좌역을 했을지언정 고종을 압도하거나 대신할 힘도 의지도 없었다. (123쪽)

 

21세기 들어 고종에 대한 이미지가 바뀌고 있다. 이전까지만 해도 유약하고 무능해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로 갖다바친 왕이 고종이었다. 권력욕에 날뛰는 아버지 흥선대원군에게 치이고, 아버지가 하야한 뒤에는 드센 아내 명성황후에게 휘둘리면서 민씨 외척세력에게 권력을 내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대한제국을 선포해 땅에 떨어졌던 나라의 위신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대한제국 13년 동안 근대화에 온몸을 불사른 왕으로 칭송되고 있다. 외교에도 남다른 탁월한 실력을 발휘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어찌된 영문인가? (146쪽)

 

일본과 조선의 차이는 농민운동을 바라보는 개화 지식인들의 폐쇄적인 사고와 신분적 질서를 완고하게 강조하는 태도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깨우치지 못한 동학 농민군을 탓하기보다는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하는 지식인으로서 조선의 선비들이 더 부끄러워해야할 일이었다. 구한말 조선의 양반들은 조선을 위기에서 구해낼 수 있을만한 사상으로 재무장하지 못했다. (210쪽)

 

고종은 미국을 믿었으나 미국은 두차례나 일본과 밀약을 맺으며 조선의 뒤통수를 쳤다. (248쪽)

 

조선 근대화 성공의 유일한 방법은 개화파와 고종이 협력해 제도개혁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을 통해 드러나듯이 근대화를 유효하게 추진할 제도개혁이 왕권을 제약하게 되면 왕이 협력하지 않았다. 왕이 개혁의 걸림돌이었던 것이다. (255쪽)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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