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해마다 연초가 되면 그해 예정되어 있는 '볼만한 전시' 목록을 포스트잇에 적어 벽에 붙여놓는다. 그도 못 미더워 탁상달력에도 표시를 해둔다. 게으름부리다 놓치지 말라는 나름의 독촉질을 미리 해두는 거다. 그런데도 올해는 좀처럼 굼뜬 엉덩이를 들기가 쉽지 않았다. 작년말부터 3월초까지 했던 <하늘에서 본 지구> 특별전은 차일피일 벼르다 정 보고 싶으면 나중에 책으로  사보지 뭐, 그랬고,  1, 2월에 있었던 <김환기 회고전>은 나중에 '환기 미술관'에 가서 보면 된다고 스스로 핑계를 대며 건너뛰었고, 3-5월에 열린 <한국의 단색화> 전은 마감일정에 쫓기는 중인데다(언제 안 쫓기는 적 있었냐? 쳇;;) 과천까지 가야한다니 더욱 떨치고 나서기가 힘들어 놓치고 말았다.

 

그 다음으로 적어놓은 것이 서도호의 <집속의 집> 전시. 서도호에 대해서 내가 뭐 쥐뿔이라도 알았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도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던 것은 '한옥 위주 설치미술'이라는 문구 때문이었다. 설치미술보다는 회화쪽을 더 좋아하지만 한옥이라니! 무조건 가야해, 싶었다. 전시일정은 3월 22일부터 6월 3일까지 리움미술관. 4월쯤에 보러가면 딱이겠다 계획했던 이 전시를 결국 나는 끝나기 겨우 며칠 전에야 겨우 보고 왔다. 그러기까지 이러다 기회를 놓치고 말 것 같아 어찌나 조바심을 쳤는지 원.

 

뜨거운 한옥 열풍 덕분인지, 리움미술관에서 홍보를 잘한 건지, 나만 몰랐을 뿐 서도호 작가가 워낙 유명한 예술가인 건지, 어디나 '촬영금지'를 원칙으로 삼는 우리나라 미술관에서 드물게 사진 촬영을 허락한 전시라 특히 입소문이 힘을 발휘했기 때문인지, <집속의 집> 전시는 시종일관 호황이었대고, 당연히 마지막주 평일에도 사람들이 드글드글했다. 뉴스를 보니 리움에서 역대 최고의 관객수를 자랑했던 앤디 워홀 전시에 버금가는 사람들이 찾았다나 뭐라나. 역시... 한옥 좋아하는 건 한국인은 나뿐이 아니었다. 대개 설치미술 작품 전시는 회화 작품보다 관객이 적게 마련일 텐데... 놀라워라.

 

암튼 전시를 보러가기 전부터 방송에 소개된 전시장과 작품 설명, 블로그 사진들을 꽤 많이 봤던 터라 정작 가서 실망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마음 한구석에 없지 않았는데, 다행히도 그건 기우였다. 실제로 보지 않고선 여간해서 그 느낌을 실감할 수 없는데도 너도나도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람들의 심정이 나도 충분히 이해가 되더라니까!  

사진은 전시장 입구에 매달려 있는 <투영>이란 작품. 철사로 틀을 잡고 한복 갑사 같은 천으로 한옥의 문을 형상화해 매달아놓은 형국인데, 어우 내가 딱 좋아하는 '파란색'이 아닌가. 다른 블로그에서 이 작품사진을 접하며 밖에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어 미술관 유리창 벽에 빗물이 맺혀 있다면 더욱 운치가 있겠다고 말도 안되는 상상을 했었으나, 내가 보러 간날은 해가 쨍쨍했고 설사 비가 내렸다 해도 건물 구조상 통로 옆면이라 저 유리창에 빗물이 맺힐 수는 없었다. 혹 천창에 빗물이 떨어질 수는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암튼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1층 전시장으로 내려가며 곧장 내 눈을 사로잡은 건 역시나 철사와 실크로 탄생시켜 천장에 매달아놓은 한옥 <서울집>이었다. 청덕궁에 있는 연경당을 본떠 작가의 아버지가 지었고 실제로 작가가 어린시절 살기도 했다는 한옥을 재현한 것이라고. 모든 작품이 섬세함과 꼼꼼함의 궁극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정교한 문창살은 물론이고 복잡한 구조의 분합문까지 완벽하게 만들어 놓았다. 이 정도로 재현하려면 한옥 건축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설계도 잘 알아야할 것이다. 바느질이야 다른 전문가가 했다지만, 존경심에 감탄만 발할 뿐이다. ㅠ.ㅠ  

시카고 전시 때 영상을 보니 관객들이  이 작품 아래 바닥에 드러누워 서까래도 올려다보면서 실제로 한옥에 누운 듯한 기분을 체험해보던데, 용기가 없어서 차마 나는 그래보지 못했다. 그저 구석구석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고 이런 집에 살았던 작가의 추억을 부러워하다 사진으로 찍어 남기고...

 

이 인상적인 한옥의 한쪽 벽면은 또 다른 작품으로 탄생했다. 이름하여 <북쪽 벽>. 

서도호, [북쪽 벽]

바글바글한 사람들이 잠깐 주변을 비운 틈을 타 이 사진을 찍어오느라 한참을 기다려야 했는데, 투명하게 비치는 이 작품 앞뒤로 사람들이 한가롭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니 옛날 이 집에 살았을 사람들이 안에서 거니는 것으로 보아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게 바로 설치미술의 묘미겠거니.  바람이 불면 하늘하늘 연기처럼 흔들릴 것만 같은 느낌의 <서울집>(재질이 실크라고 하니까 더욱 그렇게 느껴졌을 수도;;)과 달리 이 작품은 폴리에스터와 철사로 구현된 것이라 만지면 까슬까슬한 모기장 느낌이 날 것도 같았으나 확인할 길은 물론 없다. ㅋ

 

순전히 내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고, 암튼 작품 재질 때문에 손상을 우려해 브로셔도 못 갖고 들어가게 하는 (아마도) 실물 크기의 <뉴욕집>은 콘센트 하나 경첩 하나까지 일일이 천과 바느질로 정교하게 표현해놓아, 그 탄생 과정을 상상하면 숨이 막힐 정도였다.

 

하지만 한번에 다섯 명만 작품 '안'에 들어가 관람을 할 수 있는 탓에 15분쯤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던 이 <뉴욕 집>보다 나는 그 뉴욕 집이 있는 건물의 전면과 현관을 표현한 작품이 더 마음에 들었다. 작품제목에 348이라는 저 주소가 들어갔던 것도 같은데;; 하나같이 작품 제목이 벽이나 기둥 한 귀퉁이에 숨어있다시피 해서 일일이 찾아보며 다녔는데도 벌써 전시 다녀온 지가 한참 되다보니 많이 까먹었다. 흑...

아무려나 이 작품이 줄 한참 서서 구경한 <뉴욕집>보다 좋았던 건 내가 초록색보다는 무작정 파란색을 더 선호하기 때문만은 아니겠고, 어느 공간으로든  어느 공간으로든 들어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문>에 대해서 원래도 좀 관심이 많다.

나의 한옥 열망에는 가로지른 빗장을 풀고 삐그덕 소리를 내며 열리는 솟을 대문으로 드나들고 싶은 욕망도 포함되어 있으니 말이다. 외국으로 공부하러 떠난 작가가 느낀 정체성의 혼돈과 공간적 이질감 때문에 특히나 <집속의 집>이라는 주제와 이런 작품들이 탄생했으니, 작품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여러 종류의 문들도 예사로운 소재는 아닌 것 같다.

작품이 허공에 붕 떠있으니 당연히 그렇겠지만, 현관 입구의 계단부터 정겹다기보다는 어쩐지 위압당하는 느낌을 받은 건 내 착각이었으려나?

 

 

2층으로 이어지는 전시에서도 인상적인 문이 하나 더 있었다. '리움버전' <문>이라는 작품으로, 방처럼 따로 마련된 전시실에서 그 문에 여러가지 영상물을 비춰 볼 때마다 느낌을 달리했다. 작품의 반대편에서도 볼 수 있고 둥근 아치 밑으로는 사람들이 드나들 수도 있게.

새들이 날아가고 매화가 피어나고, 노루가 지나가고, 시나브로 날이 저물고...

살아 움직이는 노루와 매화 그림, 서예 글씨체를 보며, 작가가 한국화를 전공했다니 직접 쓰고 그렸나보다, 완전 천재로구나 싶었는데 브로셔를 읽어보니 일본을 비롯해 다른 유명 작가의 작품을 차용한 거란다. 아시아 예술의 접목과 만남.. 이런 주제였던 것 같은데 브로셔를 벌써 홀랑 잃어버려 확인할 길이 없다. 결론은 2층 전시에서 이 작품 <문>이 제일 좋았다는 얘기. ㅋ

 

 

나와 달리 2층에서 가장 인기있는 작품은 꼼꼼함과 정교함의 승리라고 할 수 있는 <별똥별>이라는 작품이었으나, 재미있는 발상과 섬세함에 감탄하기는 했어도 역시 난 한옥!이 더 좋았다. ㅎㅎㅎ 

낙하산에 매달려 날아온 한옥이 영국 어느 건물에 부딪혀 망가진 모습을 일일이 아파트 소품 하나하나까지 축소해 만들어 놓았던데, 사진으론 도저히 그 사실적인 정교함이 찍히질 않는다.

 

영상물을 보니 영국 무슨 비엔날레에서 실제로 한옥이 서양 건물 두채 사이에 날아와 떨어진 것처럼 작품을 전시한 적도 있던데, 이건 그 작품의 축소판인 셈. 

 

그밖에도 작품의 탄생과정을 짐작할 수 있는 여러가지 평면도와 축소 모형, 빨간색 실을 풀분무기로 붙여 만든 듯한 작품도 있었으나 나는 다시 1층으로 내려가 한옥 작품들 주변에서 좀 더 서성거리다 돌아왔다. 앞으로도 <서도호 전시>라고 하면 지체없이 달려가 보게 될 것 같다.

 

 

어느덧 올해도 반년이 다 지나가려고 하는데, 돌아보니 이게 제대로 본 첫 전시인 듯하다. 이인성 회고전도 벌써 시작했으니 그건 놓지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하며, 마무리하는데 3주도 더 걸린 전시관람 후기 끝.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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