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비닐

투덜일기 2012. 12. 21. 16:32

선거날로 부러 시간을 잡아 만나기로 한 날, 친구가 초등학교 1학년인 아들 녀석을 데리고 나왔다. 자기도 엄마 친구 만나고 싶다며 따라나섰다나. 닌텐도를 손에 쥐여주었어도 당연히 껌딱지 붙이고선 왕수다를 이어나가기가 어려웠고, 우린 또 다른 당근 수법을 떠올렸다. 서점에 가서 마음에 드는 책을 하나 사주기로 한 거였다. 장차 과학자가 되고 싶다는 소년은 내가 좀 아는 체를 했더니만 신이 나서 지구와 인류의 역사를 읊어댔다. 그래서 이번엔 세계사책을 읽고 싶다나. 헛, 고놈 맹랑하고 기특할세.

 

우리가 만난 쇼핑몰엔 북스리브로가 있었기에 그리로 내려갔는데 문제는 웬만한 아동서가 대개 책 비닐에 꽁꽁 싸여 있어 펴볼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아니, 내용을 읽어보고 확인을 해야 살 게 아닌가! 버럭 부아가 치밀었지만 소심증이 먼저 동하여 일단은 비닐이 벗겨져 있는 책부터 고르기 시작했다. 대형서점에 가면 어린이 코너 한구석에 마련된 소파나 놀이방 같은 데서 책을 좀 읽어보고 고르는 걸 당연하게 여겼던 소년은 일단 그 서점이 워낙 협소하고 열악하여 그런 공간이 없다는데 급실망을 하였고, 대부분 대여섯권 짜리 시리즈로 나온 두툼한 세계사책을 비닐 벗겨진 걸로 한두 권만 얼핏 보고 고르는 상황을 영 못마땅해 했다.

 

친구와 내가 대강 책을 골라 추천해주고 강권하듯 계산을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아이가 좀 더 살펴보고 싶은 다른 분야의 책들 역시 죄다 비닐에 싸여 있다는 것이 함정! 그제야 쌈닭 정신이 발동한 나는 직원에게 따지기에 이르렀다. 만화는 원래가 펴볼 수가 없다는 대답. 근데 왜 만화가 아닌 과학서나 동화책도 비닐에 싸여있는지? 그런 책들은 자기한테 가져오면 비닐을 벗겨주겠단다. 뭐라? 우리는 비닐도 못 벗기는 하등동물인가?

 

사정을 이야기하며 다시 읽고 픈 책을 골라보라고 달랬지만 결국 아이는 책 비닐의 난관 속에서 훌쩍훌쩍 울음을 터뜨렸다. 고르기 전에 책도 못 보게 하면서 무슨 서점이 이래요? 그러게나 말이다. 아이 물음에 나도 말문이 막혔다. 게다가 요즘 아이들 책은 왜 몽땅 만화책 일색인지?  서점에서 절대 못 펼쳐보게 해서 일단 팔고보자는 상술 때문에 만화책만 진열해 놓은 건가? 친구도 아이 책은 알음알음 주변에서 추천해준 책을 온라인 서점에서 앞장 정도 읽어보고 주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서점에 와선 책구경 겸 놀다 가곤 했던 터라 난감하다고 했다.

 

그 서점이 곧 망하려고 그러는 것인지, 아동서 시장마저도 워낙 불황이라 다른 대형서점에서도 그렇게 죄다 비닐로 책을 사수하고 있는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쓸데없는 수천억대 삽질에 예산 쓰느라 도서관 예산은 형편없이 삭감되어, 이미 올 하반기엔 전혀 신간 구매를 못하고 있는 도서관이 태반이라고 들었다. 헌데 도서관엔 새책이 없고, 서점에서도 책을 못 펼쳐보게 하면 도대체 아이들은 책을 어디에서 읽으라는 건지? 부자 부모만 책을 턱턱 사주라고? 아니지, 무한경쟁 교육에선 어차피 책 읽을 시간도 없으니 그저 공부, 공부, 사교육과 게임에만 심취하라고?

 

만화책과 잡지, 사진집, 그리고 19금 도서만 비닐에 싸서 파는 줄 알았던 내가 무지몽매했던 것인가? 궁금해서라도 다음에 다른 서점에 가면 꼭 살펴봐야겠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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