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부터 블로그를 시작한 뒤로 처음 몇해는 정리할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이젠 한해를 정리하는 포스팅을 하지 않으면 깔끔하게 일년을 마무리하지 못한 것 같은 미진한 느낌이 들 지경이다. 우선은 여기 적어두고 돌아보며 홀로 흐뭇해하려는 목적이 크다 해도, 이웃들의 베스트 목록과 비교해보는 쏠쏠한 묘미 또한 포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연말부터 어서 해야지 해야지 마음먹고 시작은 했으되 새해 들어 열흘이 넘도록 또 차일피일 마무리를 미루고만 있는 건 곤란하다. 덜 망설이고 덜 미루겠다는 새해결심을 했으면 한달은 좀 지켜야하지 않겠니, 하는 마음도 있지만 이마저도 하지 않으면 나의 2012년은 너무도 성취한 것 없이 허송세월만 한 해로 남을 것 같아 두렵다.
자주 만나지 못해도 내 소식이 궁금하면 인터넷 서점에 내 이름을 쳐 근황을 확인한다는 이들이 더러 있는데 작년엔 내내 거의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요새 일 안해요? 새로 나온 책이 없네... 그들의 물음에 대답하기가 나도 부끄러웠다. 2012년엔 정말로 내 이름을 옮긴이로 달고 나온 책이 딱 '한권' 출간되었다. 출판불황을 탓하기엔 나의 나태함이 제공한 이유가 너무도 커서 얼굴이 뜨거울 지경이다. 1년에 번역 한권 하고도 거뜬히 먹고 살만한 수입이 되는 처지도 아니면서 이 무슨 행태인지! -_-;
어쨌거나 2012년 한해 내내 이런 게 최고로 좋았다는 시답잖은 목록이라도 뽑아 놓고 지난 삶의 의미를 찾아볼 요량이다.
1. 2012년 최고의 책 3
리영희 산문선, 희망
박동곤, 지구를 부탁해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은 독후감도 올렸었겠다, 확실히 뽑아놓고 나머지 두권을 놓고 오래도록 고민했다. 읽을 땐 베스트 후보로 꼽았던 책들이 있었는데 막상 지나고 보니 그 느낌이 다 너무도 흐려지는 바람에... ㅠ.ㅠ
결국 공책에 인용문을 가장 많이 베껴놓은 책들 가운데 글귀들을 새삼 다시 읽어보며 어렵사리 고른 것이 <희망>과 <지구를 부탁해>다. 영화 <레미제라블> 때문에 요즘 <레미제라블> 완역본이 출판사별로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는데, <희망>에 들어있는 어느 에세이에도 선생이 감옥에서 다시 <레미제라블>을 읽으며 빅토르 위고에 대한 감사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래서 나도 따라 읽고 싶어졌었는데, 영화까지 보고나니...
5권이라니 겁이 좀 나긴 하지만 지난 가을부터 생겨난 소설 기피증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도전해볼까 하는 중이다.
<지구를 부탁해>는 아무래도 연말에 읽은 책이라 기억이 생생한 덕을 많이 봤고, 막연한 과학 공부에 대한 선망까지 더해져 뽑힌 듯. ㅋㅋ
아래의 두 책도 후보에서 아깝게 탈락했다.
2. 2012년 최고의 영화 3
광해
베스트 영화도 마지막 한 편 때문에 몹시도 어려웠다. <레미제라블>을 연말에 봤어야 고민없이 골랐을 텐데! 으휴...
<미드나잇 인 파리>는 시종일관 깔깔거리게 재미를 주면서도 강요하지 않는 감동이랄까 뭔가 찡하고 짠한 느낌까지 종합선물세트 같은 영화였다.
<말하는 건축가>는 정기용 건축가의 인간적인 매력도 크게 작용했지만 다큐멘터리 영화 자체의 아름다움과 완성도가 뛰어났기 때문에 빛을 발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게 연출의 힘이겠지?
<광해>는 재미있게 봤으면서도 대종상을 부문별로 죄다 휩쓸 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베스트로 뽑기가 살짝 망설여졌다. 이유가 뭘까나... 그간 이병헌을 괜히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피하는 편이었는데 (<공동경비구역 JSA> 이후 죽 안보다가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이 마지막이었던 듯;;) 이 영화 보고 앞으론 피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연기가 정말.. 물이 올랐다고밖엔;;
광해 대신 <파수꾼>을 넣을까도 생각했지만 연초에 뒷북으로 본 영화라 보고나서의 충격적 느낌이 많이 사라진 탓에 막판에 밀렸다. 2012년엔 이래저래 개봉작도, 아닌 것도 꽤 많이 봤다. <두개의 문>을 보고나서 포스팅을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하다보니 계속 밀려 이후론 영화 본 기록도 제대로 안남겼다. <다크나이트 라이즈>랑 <007 스카이폴> 모두 한물 가고 잊혀진 노장 히어로를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게 흥미로워서 비교 포스팅을 시작은 했었는데;; 결국 마무리가 안 되서 흐지부지... 이참에 영화 제목이라도 적어놓아야겠다.
건축학개론 / 가을소나타 / 버니드롭 / 말하는 건축가 / 두개의 문 / 도둑들 / 미드나잇 인 파리 / 하와이언 레시피 / 광해 / 늑대소년 / 다크나이트 라이즈/ 007 스카이폴 / 아워이디엇브라더 / 26년 / 킹스 스피치 / 헬로 고스트 / 파수꾼 / 옥희의 영화 / 북촌방향 / 풍산개 / 진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 자전거 탄 소년 / 대지진 / 시라노 연애조작단 / 맨인블랙 3
3. 2012년 최고의 드라마 3
BBC 셜록 시즌2
응답라하 1997
추적자
2012년에는 드라마를 별로 챙겨보지 않았다. 애정을 담아서 참아가며 봐줄 수 있는 드라마가 좀체 있어야 말이지! 미드, 일드를 찾아서 다운 받아 보는 부지런함은 원래도 없었으니;;;
째뜬 2012년이 시작되자마자 후딱 3편 방영하고 끝나버린 셜록 시즌2를 이리보고 저리 또 보고 케이블에서 찾아보며 상반기를 버텼던 것 같다.
그러다 후반기에 만난 대박 드라마 두 편이 <응답하라 1997>과 <추적자>. <추적자>는 불편해서 과연 볼 수 있을까 염려하며 보다말다 했었는데, 법도 공권력도 통하지 않는 이 나라의 정의에 대해서 조목조목 참 잘도 비판하고 있는데다 부모의 심정을 절절하게도 그렸다 싶어서 나중엔 크고 작은 드라마상의 헛점 따위는 눈감아주면서 응원했다. 연말에 손현주 씨가 상도 타서 어찌나 기뻤는지.
<추적자>가 끝나고 또 정붙일 드라마가 없어 방황하던 끝에 sns에서 하도 응칠, 응칠 하길래 본방 다 끝날무렵 불이 붙어 정주행하느라 아주 행복했다. 1997년이면 나도 한참 하이텔, 천리안 동호회 활동으로 밤을 설칠 때라 아이돌 팬덤에 대해선 전혀 모르면서도 그 시절 노래와 추억에 흠뻑 젖어들 수 있었다. 게다가 어찌나 시나리오며 소품이며 구성이 치밀한지 쫀쫀하기가 이를 데 없고, 캐릭터 하나하나도 허투로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는데다, 호기심과 궁금함을 어떻게 그토록 끝까지 이어가며 퍼즐 맞추기를 하는지... 내래이션 대사들도 '주옥' 같아서 적어놓은 게 꽤 된다. ^^;
"지금보다 절실한 나중이란 없다.
나중이란,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눈앞에 와 있는 지금이 아닌
행여 안 올지도 모를 다음 기회를 얘기하기엔
삶은 그리 길지 않다. - <응답하라 1997> 13화 중에서
4. 2012년 최고의 공연
지산밸리 록페스티벌 첫날, 라디오헤드
2012년엔 선망하던 지산밸리 록페스티벌에 3일권을 끊어 실제로 갔었다는 것이 스스로도 놀라운 쾌거였다. 라인업으로는 펜타포트가 더 멋진 것 같기도 했지만, 뭐니뭐니해도 <라디오헤드> 공연을 직접 보다니! 현란한 꽃무늬 조명을 배경으로 몽롱한 분위기에서 연신 오징어춤을 추어대던 톰 요크를 비롯해 라디오 헤드의 연주와 노래를 세시간 넘게 원없이 볼 수 있었으니 무얼 더 바라랴. 더구나 낮부터 그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쉴새없이 밴드를 따라 이동하며 공연을 본다는 문화 자체가 신기하기도 하고... 더 나이들기 전에(?) 가본 게 장하다 싶다. 과연 다시 갈 엄두를 낼 수 있을지는 모를 일...
어쨌거나 십수년째 활동중인 관록있는 노장 밴드에 환호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며 어쩐지 가슴이 찡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한겨울에 본 스팅 공연 때도 관객층이 지난번보다 훨씬 젊어졌다는 게 새삼 뿌듯했던 것 같다. 체력 딸려서 록페스티벌 같은데 따라다니는 건 좀 무리일 것 같지만, 어쨌거나 좋은 밴드와 가수들의 내한공연이 계속해서 풍성하면 좋겠다.
포스팅을 못했지만 실로 크리스마스 이브엔 절대로 방콕을 고수하던 내가 십수년만에 옆구리를 찔려 <스윗소로우> 공연을 보러갔었다. ^^ 고려대 화정체육관 8천석을 다 채운 관객이 새삼 놀라울 정도였는데, 내년에도 옆구리를 찌르면 또 갈 순 있겠다고 생각이 들만큼 재미도 있고 노래들도 좋았으나, 저렴한 2층 좌석 탓에 음향이 '너무도 심하게' 나빴다. 가사가 하나도 안들려! ㅠ.ㅠ 스티브 잡스 패러디 해서 멤버 근황 소개하는 코너랑 수면양말 뭉쳐서 눈싸움 하는 아이디어는 기발하다 할 수 있었지만 진행이 너무 늘어지고 시간도 길다보니 나로선 지루했다. 1층 플로어석에서 멤버들을 코앞에서 보며 양말 던지고 놀았으면 안 지루했으려나? 째뜬 2층 관객들은 불우이웃돕기 기부한다는데도 입구에서 무료로 나눠주었던 수면양말을 기념으로 가져갈 생각인지 던지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다. 특히 내 주변엔 참여도 꽝! (나의 일행도 기념품 양말 챙겨가겠다고 꺼내지도 않았음) 나 혼자 양말 뭉쳐 던지며 체력장 공던지기 생각나서 킬킬댔었다.
아무튼 똑같이 가장 저렴한 꼭대기 관객석에서 보았으되 음향 면에서도 뛰어났고 공연 자체의 감동도 강렬했으므로 베스트 공연 세번째 자리는 강수진의 <까멜리아 레이디>가 차지했다. 무척이나 오랜만에 드물게 보는 발레 공연이었다는 것도 가산점.
5. 2012년 최고의 전시 3
고르고자시고 할 것도 없이 전시라곤 달랑 이 셋을 봤나보다. 그래도 연초에 적어놓은 목록 중에서 놓치지 말아야지 결심했던 전시를 놓치지 않았다는 데 의의를 두어야;;; ㅠ.ㅠ
자세한 건 포스팅 링크로 대체하련다.
6. 2012년 인상적인 일들
- 지산밸리 록페스티벌에 3일권까지 끊어서 이틀'이나' 구경다닌 사건. 그 더운 날씨에 모여든 수많은 인파도 놀라웠고, 그 자리에 내가 있다는 것도 놀라웠고, 별이 총총한 밤하늘 올려다보며 산을 넘어다니다 모기에게 왕창 뜯겨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까지 모두가 오래 남을 '사건'인듯;;
- LA 친구랑 일본, 안동, 부산 여행. 특히나 작고 아담한 온천 료칸, 깔끔한 한옥, 바다 보이는 찜질방에서 모두 자 본 경험! ㅋㅋ
- 번역가라는 직업에 대해서 대학생 후배들에게 강연료씩이나 받고 이야기했던 일. 지금 생각해도 오그라든다 ㅠ.ㅠ
7. 2012년 최고의 득템 3
방구석에서 뒹굴뒹굴 게으름 부리며 방황하며 주로 보낸 한해라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딱히 질러댄 물건이 있는 것 같지가 않다. 그저 필요한 옷가지와 신발을 엄선해서 사들인 정도. 그에 반해 생일을 빌미로 '받아낸' 물건에는 아직까지도 득템의 흐뭇함이 가시지 않은 게 있다.
첫번째는 캐스 키드슨 배낭. 북촌 구경갔던 날 삼청동 초입에 난데없이 생겨난 매장을 보고 동네랑 참 안어울린다고 툴툴대며 구경 들어갔다가 이 땡땡이 배낭을 발견했다. '땡땡이 마니아로 알려진 파피가 좋아하겠다'는 것이 처음 든 생각이었는데 신상이라 세일 안한다는 말을 듣고 어깨에 한번 걸쳐보자마자 단번에 마음을 사로잡았다. 크기도 넉넉하니 딱 내가 원하던 쓰임새의 배낭이 아닌가. ㅋㅋㅋ 거의 1분만에 생일선물로 사달라고 요구했다.
안동, 부산 여행때 몹시도 요긴하게 쓰였고, 요즘 궁궐 공부하러 다닐 때도 완전 애용하고 있다.
두번째는 스누피만화 박스세트!
절판된 50년대 세트부터 모으진 못했지만 ㅠ.ㅠ 67년부터 82년까지 장만해놓고 여름부터 틈틈이 즐겨보고 있다. 독서목록에 이것도 포함시킬까 약간 고민했었는데 관뒀다. 이건 읽는 책이 아니라 감상하는 책이여~ 이러면서...
다른 세트들도 여기 저기 사이트를 기웃거리며 호시탐탐 노리는 중이다.
세번째는 생일선물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니고 얻은 물건이라 좀 민망하지만, 큰동생네서 쓰던 장식장을 물려받았다. 할머니가 쓰시던 낡은 화장대를 차마 못 버리고 망가지도록 쓰면서 이사가면 새로 사야지.. 라고만 생각하다가 동생네서 장식장 개비한다기에 얼른 좋아라 가져온 뒤 내다버렸다. 화장대 거울도 색깔 맞춰 페인트 사다가 진밤색으로 칠하고;;; 앞으로 또 10년은 너끈히 쓸듯. ;-p
7. 2012년 WORST 3
2건의 계약 파기. 2012년의 워스트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쓰신 이웃도 있던데 나도 따라 그렇게 쓰고만 싶다. '신용'이란 말을 언급하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출판사를 오래오래 괴롭히다 심지어는 먹튀 버금가는 짓을 저지른 셈이 되었다. (계약금은 돌려줬으니 먹튀는 아니겠;;...) 블랙리스트에 올랐어도 할 말이 없다. 부디 정신차리는 계기가 되기를.
안동 여행 때 운전했던 친구. 시작부터 실망시키더니 어쩜 끝까지... 82년에 만났으니 딱 30년 만에 드디어 친구로서 제명하기로 결심했다. 생각해보니 새삼 그 옛날 삐삐도 없던 시절 셀수없이 바람 맞은 사실이 왜 그리도 열뻗치는지! 뒤끝작렬. 전화번호는 지우지 않았다. 피할래도 알아야 피할 수 있으니까...
사촌동생 결혼식장에서 원피스 입고 자빠진 일. (이건 세개 꼽느라 억지로 포함시켰음을 고백 ㅋㅋ)
8. 2012년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너 이러면 안된다
9. 2013년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2012년 12월 31일 일기에도 적어놓았듯 새해엔 정말로 덜 망설이고 덜 미루고 덜 좌절하고 덜 방황하면 좋겠고, 나름 안식년이라며 자/타발적인 휴식을 시작했지만 경제적인 여건상 오래 놀 순 없을 듯하므로.... ㅠ.ㅠ
조금만 더 탱탱 놀다가 후반기쯤부터는 바닥을 치고 올라와 다시 슬슬 꿈틀거릴 수 있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