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터 회 지음/박현주 옮김/마음산책

작년 가을 와우북페스티벌에서 산 책을 요번 여름 지산밸리 록페스티벌에 가면서 챙겨가 읽었다. 이웃 주민들의 지산 지참서가 작년엔 조르주 심농이었음을 알기에, 나도 더운 여름날 시간 떼우기로 읽기에 적당한 책을 선정하느라 잠시 고민하다 내린 선택이었다. 결과적으로 탁월한 안목이었다.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칭찬하는 것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오래 전부터 이 책 훌륭하단 말을 더러 들었었는데, 나도 그 매력을 실감했다. 출판사와 번역자를 달리해 판권 계약까지 갱신해가며 나올만한 가치가 있는 책은 확실. 그래서 또 좀체 안쓰던 독후감도 쓰기 시작했는데... 계속 비공개로 두었다가 마무리하기까지 한달이 넘게 걸렸다. 젠장. 이러면서 책에 기대 밥벌어먹겠다는 건 좀 양심불량 같다. ㅎ

 

그간 나는 전 세계적으로 열풍이 일고 있는 북유럽 추리소설을 한번도 읽어보지 않았다. TV 시리즈나 영화로 만들어질 만큼 유명한 <월랜더>니 <밀레니엄> 시리즈도 그저 명성만 들어보았을 뿐 서점 갈 일 있을 때 몇 장 들춰보고서도 선뜻 읽고픈 마음은 들지 않았다. 시리즈로 죄다 읽어야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고, 범죄소설 장르가 좀 불편하다는 느낌도 있다. 셜록, CSI, 크리미널 마인드, 로앤오더 같은 범죄 수사 드라마는 흥미롭게 보면서 책으로 보는 건 왜 꺼려지는지 잘 모르겠다. 혹시 이해력과 지력이 딸려서? ㅎㅎ

 

'하얀 감방'이라고 불리는 조립식 콘크리트 서민주택에 살던 그린란드 출신 소년 이사야가 지붕에서 떨어져 죽는다. 경찰은 소년이 홀로 눈 덮인 지붕에 올라가 놀다 사고를 당했다고 짐작해 사건을 종결짓지만, 이웃에 살며 이사야와 각별한 우정을 쌓았던 스밀라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고 직감한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이사야가 괜히 지붕에 올라갔을 리가 없다.  게다가 그린란드 이누이트족 사냥꾼 어머니와 덴마크인 의사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스밀라 카비아크 야스페르센은 그 누구보다 눈과 얼음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다. 눈밭 위로 누군가 풀쩍 뛰고 나면 공기의 흔적으로 좀 전에 뛴 자세까지 보지 않고 재현할 수 있을 정도여서, 한동안 각종 북극 개발 연구팀 소속으로 활동한 적도 있다. 처음 만난 1년 반 전부터 술주정뱅이인 이사야의 엄마 대신 이사야를 보호해야 한다고 결심했던 스밀라는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이사야가 비밀 장소에 남긴 녹음테이프, 북극개발 파견 근무중 사망한 이사야의 아버지를 둘러싼 의문, 자원 개발회사가 오래전부터 벌여온 알 수 없는 연구 프로젝트, 이사야를 부검한 로옌 박사의 정체... 실마리가 풀려나갈수록 새로운 의문은 꼬리를 무는데, 스밀라는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도 고집을 꺾지 않는다. 특수하게 개조한 쇄빙선을 타고 찾아가는 북극해의 작은 섬에는 대체 무엇이 감추어져 있었는지...

 

이렇게 줄거리로 적어놓으니 단순한 내용 같지만 이 책엔 간단히 설명할 수 없는 뭔가 심오한 느낌이 있다. 아웃사이더인 스밀라의 존재론적인 고민이 깊이 깔려 있기 때문일까?  번역자 말로는 일종의 학술소설로 볼 수도 있다고 할 만큼 수의 원리며 얼음, 빙하에 대한 언급이 많지만, 그 또한 보기 드물게 매혹적인 주인공 스밀라의 놀라운 지적 능력과 본능을 강조하는 장치일 뿐 그리 학술적이라 느껴지진 않았던 것 같다. 책의 뒤표지엔 스밀라가 이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자라고 찬양하는 소설가 김연수의 감상이 적혀 있는데, 나 역시 그 평에 동감했다. 외톨이를 자처하는데 고독하지 않고 당당하며 누구보다 강하고 아름답다. 딱 내 취향이다 싶은 선망의 여인상이라고 하면 좀 웃긴가? 인물의 매력뿐만 아니라 작품의 서사와 표현도 마음에 든다. 심오하고 진지하면서 따분하지 않기란 원래 어려운 거라 생각한다. 근데 이건 그런 축에 드는 책이다. 지산에서 마지막 날 뙤약볕을 피해 시간을 보내며 읽다 만 이 책을 가져가지 않은 걸 엄청나게 후회했다. 덮어두고 나온 책의 뒷 이야기가 어찌나 궁금하던지. 분량(627쪽)이 길어서 결국 집에 돌아와 마저 다 읽을 수 있었는데, 여운이 꽤나 한참 가서 며칠간 되풀이해 뒤적이며 읽었다. 겨울과 북극해가 배경인지라 여름에 읽으며 서늘한 느낌이 들어 더욱 좋았던 듯하다.

 

베껴 적어놓은 글귀가 엄청 많지는 않은데, 아예 통째로 좋은 페이지가 꽤 있었기 때문이었다. 페터 회의 다른 책도 좀 궁금해졌다.

 

다른 사람들이 교회의 축복을 느끼는 방식으로 나는 고독을 느낀다. 고독은 내게 있어서 은혜의 불빛이다. 나는 내 방문을 닫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자비를 베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 (22)

 

나는 일생동안 지속될 것이라 여겨지는 그런 현상들에는 능하지 않다. 종신형, 결혼서약, 종신직. 그런 것들은 삶의 단편들을 고정시켜 시간의 흐름에서 면제시키려는 시도다.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여겨지는 일들은 더 심각하다. (376)

 

여행은 모든 인간의 감정을 극대화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사냥을 하러, 방문을 하러, 혹은 케케르타트를 향해 카니크를 떠날 때마다 잠복해 있던 사랑, 우정, 적의의 감정이 모두 폭발하고는 했다. (394)

 

죽음이 나쁜 것은 미래를 바꿔놓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를 기억과 함께 외로이 남겨놓기 때문이다. (415)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대단히 과장된 얘기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상대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리라는 두려움 45퍼센트와 이번에는 그 두려움이 무색하게 되리라는 광적인 희망 45퍼센트, 거기에 소박하게 사랑의 가능성에 대한 여린 감각 10퍼센트를 더하여 이루어진다.

나는 더 이상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내가 더 이상 볼거리에 걸리지 않는 것처럼. (441)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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