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나잇 인 파리

놀잇감 2012. 8. 19. 16:51

가물거리는 기억이 다 사라지기 전에 올 여름 본 영화를 다 정리하려고 낑낑대고 있자니 꼭 밀린 방학 일기 쓰는 기분이다. 뭐든지 그때그때 해놓으면 참 좋으련만, 일도 포스팅도, 하다못해 AS신청도 왜 벼르고 미뤄뒀다 하는지 원. 어쨌거나 이거 쓰고 나면 두 편 남았다. <다크나이트 라이즈>와 <두개의 문>. 미리 예고해놓아야 건너뛰지 않을 듯. -_-

 

<미드나잇 인 파리>는 이웃분들도 재미있다고 추천하셨고, 친구 하나도 놓치지 말고 꼭 보라고 권했다. 보고 나서 이토록 유쾌해지는 영화가 드물다나. 그렇게 입소문이 많이 나서 그런지, 워낙 개봉관이 줄어든 탓인지 예매 않고 씨네큐브로 보러갔다가 '매진' 사태에 놀라 담날 표를 예매해야 할 정도로 인기였다.  

 

시간여행이 소재이고 작가인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가 낭만 넘치는 밤의 파리에서 수많은 유명 작가들과 예술가들을 대면한다는 이야기도 알고 갔는데도 시종일관 킬킬깔깔대며 즐거이 관람했다. 주인공 길 페더 역의 오웬 윌슨은 제대로 본 영화가 <웨딩 크래셔> 딱 한 편이라, 그냥 그렇고 그런 코미디 배우인 줄 알았는데(깨진 콧잔등이 그 영화에서만 나오는 분장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시나리오로 성공했으면서도 아직 소설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세심한 작가 역할에 의외로 아주 딱이었다.

 

<웨딩 크래셔>에서도 부잣집 딸로 나온 레이첼 맥아담스랑 호흡을 맞추더니, 공교롭게 이 영화에서도 레이첼 맥아담스가 부잣집 딸인 속물 약혼녀로 나오더군. <노트북>도 그렇고 <시간여행자의 아내>도 그렇고 레이첼 맥아담스 얼굴이 애지중지 키운 부잣집 딸 이미지인가보다. ㅋ 그에 비하면 확실히 아드리아나 역할의 마리옹 코티아르도 그렇고 골동품 가게 점원이었던 레아 세이두도 그렇고 할리우드 배우랑은 느낌이 참 다르다. 같은 서양인이라도 유럽풍 외모를 더 쳐주는 나의 편견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나. '빠다' 잔뜩 바른 미국식 영어발음보다는 좀 안들리고 못 알아듣더라도 영국식 영어나 유럽인들이 하는 영어발음이 더 멋진 것 같다. 이 또한 문화사대주의인가 아닌가, 혹 인종주의의 혐의는 없나 늘 고민되는 부분이다.

 

하여간에 비오는 파리가 더 멋지다며 빗속을 쏘다니자거나, 운치 있는 밤 거리 좀 걸어다니자는데 정신나간 사람 취급하는 약혼녀 이네즈와 낭만주의자 길은 원래부터 잘 안맞는 사람이었다. 둘이 약혼을 한 사이라는 게 더 신기할 정도! 거기다 밤마다 뎅뎅뎅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1920년대의 파리로 돌아가 하늘처럼 떠받들던 유명 작가들과 예술가는 물론이고 당대 예술가들의 뮤즈(모딜리아니, 브라크의 연인을 거쳐 현재는 피카소의 애인이다!)인 아름다운 아드리아나까지 만났으니, 현재로 돌아와 맞는 대낮의 현실은 더욱 짜증스러울수밖에 없다. 사윗감이 못미더워 탐정까지 고용하는 장인을 보아도 그런 집안에 그냥 장가갔으면 어쩔 뻔 했나!

 

우디 앨런 영화는 등장인물들이 대부분 수다스럽고 말이 워낙 많아 영화가 재미 없으면 완전 따분하고 짜증스러울 수도 있지만 재치와 유머 넘치는 대화로 시종일관 킬킬거리게 만들기도 하는데, 이 영화는 단연 후자였다. 우디 앨런 영화중에 단연코 제일 재미있었다는 사람들의 평가에 나도 동감한다. 게다가  헤밍웨이도 그렇고 피츠제럴드도 그렇고 어쩜 그렇게도 작가 사진에서 익히 봤던 인물이랑 똑 닮은 배우들을 찾아냈을까나! 캐시 베이츠가 맡은 거트루드 스타인 역할은 닮았는지 잘 모르겠으나, 워낙 내가 좋아하는 배우니까 패스~. 허세 잔뜩 들어간 피카소며, 초현실주의자라들이라서 다른 시간대에서 왔다는 길의 고백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살바도르 달리, 만 레이, 브뉘엘까지, 진짜로 실물이 나타나 눈앞에 앉아 있는 기분이 나도 막 들었다. ㅋㅋㅋ 심지어 1920년대에서 한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890년대의 파리로 돌아간 장면에서 만난 툴루즈 로트렉은 거짓말 좀 보태면 나도 알아맞힐 수 있을 만큼 자화상과 꼭 닮은 배우였다! 사실 이 영화 포스터에 떡하니 저렇게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그림을 사용했길래, 스쳐지나가는 예술가 중 한 사람으로 고흐도 나올 줄 기대했는데 로트렉 나오는 장면에서 고갱과 드가는 나오는데 고흐는 안나오두만. 하기야 연도상으로도 1890년이면 고흐가 파리에서 예술가들과 교류할 때가 아니긴 하다. ㅠ.ㅠ

 

마크 트웨인이니, T.S. 엘리엇이니 하는 작가와 예술가들이 작품 속에서 실제 인물로나 대화 속에서 하도 많이 등장하는 터라 알면 알수록 더 쏠쏠한 재미가 있겠으나, 헤밍웨이, 피카소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터이니 굳이 상관없을 것 같다. 나도 콜 포터 같은 재즈 음악가나 쥬나 반스 같은 사람은 금시초문인데도 그러려니, 웃고 즐기는데 별 상관 없었다. 그래도 로댕의 조각 작품이나 모네의 수련 그림, 셰익스피어앤드 컴퍼니 서점 같이 좀 익숙한 장면이 나오면 괜히 더 반가운 건 어쩔 수 없는 듯. 등장인물의 대사에도 엄청 깨알같이 유명 작품 제목과 인용문이 대거 사용되었다니 그걸 죄다 알아듣고 영화를 감상한 사람은 더욱 우디 앨런의 천재성에 감탄했겠다.

 

감독이 배경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담아낸 영화는 꼭 그런 티가 난다. <하와이언 레시피> 보면서는 하와이의 에메랄드 빛 바다 보고싶다, 저 한적한 섬에 가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했는데, 주인공과 함께 파리의 낮과 밤을 쏘다니는 동안엔 파리 열망이 꿈틀 솟았다. 며칠 겉핥기로 본 과거의 파리는 좀 쌀쌀맞은 느낌이었고 그다지 낭만적인지도 모르겠던데, 비오는 날엔 기분이 좀 다르려나? 어쨌거나 실제로 가서 확인해보고 싶다규~~

 

길이 1920년대를 황금시대라 여기며 동경했듯,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아드리아나는 또 다시 한 세대 이전의 아름다운 과거를 동경한다. 근데 또 막상 1890년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들은 르네상스 시대야말로 최고의 황금기였다고 푸념하고....   결국 지나간 과거는 다 아름답게 포장되어 후대인을 유혹하는 법이란 의미. 나 역시 인생의 황금기는 이미 지나가버렸다고 아쉬워한 적 있지만, 막상 그때로 돌아가겠느냐고 하면 굳이 그럴 마음이 없다. 좌충우돌 펄럭거리던 청춘은 한번으로 족해! 혹 어쩌면 아직 내 인생의 황금기가 오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p 역시나 결론은 카르페 디엠, 지금 당장 하고 싶은대로 살기!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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