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덜일기'에 해당되는 글 503건

  1. 2010.11.17 모녀의 취향 19
  2. 2010.11.15 신기한 금요일 18
  3. 2010.11.10 고민 9
  4. 2010.11.10 잔상 4
  5. 2010.11.09 어떤 친구 4
  6. 2010.11.05 말줄임 16
  7. 2010.11.01 11월 13
  8. 2010.10.29 생선가시 2
  9. 2010.10.28 인구조사 10
  10. 2010.10.19 사진 7

모녀의 취향

투덜일기 2010. 11. 17. 16:23

넉달만에 동창모임 오찬에 나가셨던 왕비마마가 4시를 넘기고도 귀가하지 않았다. 걱정이 돼서 전화를 걸었더니 친구분들과 쇼핑을 다니다 이제 귀가 중이라는 대답. 그간 다리 허리도 아프고 심리적으로도 불안하여 홀로 외출은 꿈도 못꾸던 양반이 최근 매일 꾸준한 산책과 운동으로 이룬 쾌거이니 나로선 박수라도 칠 일이었다. 그리고 일흔살 노여사님들 다섯 분이 대체 어디로 쇼핑을 다니셨는지(강남 모처로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고), 쇼핑 품목은 무엇일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요가하러 다녀와 보니 그새 귀가하신 왕비마마는 희색이 만면한 얼굴로 기다렸다는 듯이 새로 장만한 겨울외투를 보여주었다. 헌데 소재만 좀 달랐지 기존에 있던 외투와 색깔(진한 갈색)이며 길이와 스타일이 거의 똑같았다. 어차피 사온 물건이니 그냥 잘 샀다고, 예쁘다고 칭찬해드리면 좀 좋으련만 까칠한 딸의 입에서 좋은 말이 나갈 리가 없다. -_-; 이왕 사는 거 왜 똑같이 생긴 걸 샀느냐고 타박부터 튀어나왔다. '맞는 사이즈가 없어서'라는 왕비마마의 대답을 들으니, 타박부터 앞세운 것이 민망해져 얼른 잘 사셨다고 칭찬을 해주었는데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문고리에 걸어두었던 또 하나의 패딩외투를 꺼내며 '하도 싸서 니 꺼도 사왔으니 입어보라'는 말씀. 헉... 내 눈엔 이보다 더 흉측할 순 없을 듯한 '빤딱이' 남색 원단에다 '프린세스' 라인(패딩에 웬!!)이고, 심지어  목엔 회색과 청색으로 '여우털'이 부숭부숭 징그럽게 달려 있다. (물론 왕비마마는 그 '여우털'이 '포인트'라고 강조했다) 그야말로 할머니들이 가뿐하게 동네 마실 다니실 때 입으면 딱 좋을만한 물건을 비록 나이는 40대지만 곧죽어도 '영플라자'에서만 옷을 사입는 딸에게 사다주시다니.. ㅠ.ㅠ 

사실 우리 모녀는 취향이 너무도 달라서 자기 마음대로 골라 서로에게 선물한 옷은 원래 성공하기가 힘들다. 왕비마마가 거동이 그나마 자유로웠던 5년전까지는 내가 그렇게 타박을 하고 퇴짜를 놓아도, 백화점 갔다가 괜히 집어들고 오시는 옷이 종종 있어서 너무도 괴로웠다. 내가 즐겨입는 옷들이 다 너무도 후줄근하고 추레하고 칙칙하다고 여겨 못마땅해 하는 왕비마마가 골라오는 옷이야 너무도 뻔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나마 내가 충동적으로 사오는 왕비마마의 옷은 성공률이 5할대는 되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두번에 한번은 색깔이며 디자인 때문에 바꿔야 하거나 아예 반품하는 경우도 있었기에, 그간 모녀는 옷을 사다주고도 괜히 욕을 먹어 각자 삐치는 역사의 반복을 교훈 삼아 다시는 자기 마음대로 옷을 사다 내밀지 않기로, 그러니까 옷을 사주려거든 같이 가서 입어보고 고르기로 암묵적인 약속을 했었다. 그런데 새삼 도대체 왜??!! 

옷이 너무 '미워서' 절대로 입을 수 없다는 나의 입장과 동네 마트 갈 때라도 막 입으면 되지 않느냐는 왕비마마의 옥신각신은 서로의 취향에 대한 비난으로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친구분이 사입고 온 옷이 좋아 보여 다들 따라가 한두벌씩 샀다는 그 옷의 판매처가 정확히 어딘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가격으로 보아 '반품불가'가 확실하다) 반품이나 교환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마당에 모녀가 실랑이를 부려봤자 소용 없는 일이다. 결국 입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는 최후통첩과 함께 (나 또한 자꾸 강요하면 차라리 헌옷 기부함에 넣어버리겠다고 협박했음 -_-;) 왕비마마는 아침에 다시 입어보라며 문제의 패딩을 내 방에 걸어놓고 물러나셨다. 하지만 오늘 다시 쳐다봐도 내 눈엔 역시나 몸서리 처지게 싫고;; ㅠ.ㅠ 

재킷도 외투도 다들 '넣고 꿰맨 것 같이' 몸에 딱 맞는 스타일이 유행일 때에도 나는 넉넉하고 큼지막한 옷이 좋았다. 그래서 과거엔 가끔 남동생들 옷을 빌려 입거나 아예 내 옷을 크게 사서 어린 동생들과 나누어 입는 것도 좋았다. 할머니의 유품 가운데서 내가 골라 가진 큼지막한 순모 니트 외투는 그야말로 할머니 같다고 왕비마마가 질색팔색을 하든 말든 여전히 십수년째 나의 애용품이다. 아버지의 유품중에서도 수많은 옷가지는 거의 다 아름다운 가게에 기증했지만 그 전에 동생들도 올케들도 최대한 자기 몸에 맞는 걸 골라 간직했고, 나 역시 왕비마마가 내겐 어울리지 않는 '잠바떼기'라고 못마땅해 하시는 아버지 옷 두 어벌을 챙겨 입고 다녔다. 적어도 옷차림에 관한 한 나는 별로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편이다. '내' 눈에 예뻐 보이고 좋으면 그만이고, 남들이 뭐라든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10년, 20년 된 낡은 옷을 버리지 못하는 건 나름의 역사와 추억이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정말로' 마음에 들기 때문이라, 유행에 크게 뒤떨어졌든 아니든 그런 옷을 입고 나서면 슬며시 기분이 좋아진다.

반면에 왕비마마는 남의 눈에 어떻게 보이느냐가 최우선이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도 가을이면 겨울옷 입는 걸 꺼린다. 남들이 겨울옷을 꺼내 입은 걸 보아야만 그제야 안심하고 입는 식이다. 외투를 입으면 반드시 단추나 지퍼를 채워야 집을 나선다. 앞섶을 풀어헤친 모양새는 불량스럽고 단정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본인에겐 너무도 어색하단다. 땀을 삐질삐질 흘릴망정 집밖에선 재킷이나 외투의 단추를 잘 풀지 않는다. +_+ 겨울이면 놀라울 정도의 겹쳐입기 신공을 벌이느라 여러 옷을 풀어헤치고 목도리까지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다니는 딸의 차림새가 왕비마마에겐 얼마나 '거지 같이' 보일지 알만하다.

원래도 체구 차이가 크게 나서 옷을 같이 입는 모녀들처럼 (정민공주는 이미 제 엄마와 고모 옷을 수시로 빼앗아 입고 있지만;;) 옷을 나눠입고 살아본 역사가 없긴 하지만, 체구가 같았더라도 아마 왕비마마와 나는 극과 극인 취향 때문에라도 절대 옷을 공유하지 못했을 것이다. 수십년간 지켜보고 같이 살며 서로 못마땅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양반이 왜 새삼 이런 일을 벌이셨는지 원. 그나저나 저 흉측한 물건을 어떻게 하나 그게 큰일이다. 으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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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금요일

투덜일기 2010. 11. 15. 14:12

지난 금요일 저녁의 일부는 마치 잠깐 딴 세상에 다녀왔거나 시간의 블랙홀 같은 데 빠져 요상한 경험을 하고 돌아온 느낌이었다. 서로 연관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나에겐 '신기하게' 느껴진 경험 두 가지.

갈까말까 좀체 끝나지 않는 나의 고민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는 듯이, 확인사살을 하듯 참석을 독려하는 담당자의 전화를 이틀에 걸쳐 받는 바람에 결국엔 약속 시간에 맞춰 뚜벅이로 집을 나섰다. 그런데 저녁 7시가 조금 못된 시간 강남의 어느 전철역에서 한강다리 쪽으로 걸어가는 동안 줄곧, 나 말고는 인도에 '민간인'이 하나도 없었다. 가로수나 가로등처럼 5미터 간격으로 양쪽에 줄지어 서 있는 경찰관들 빼놓고는. -_-; 그나마 이어폰을 꽂고 있었기에망정이지 멍하니 걸어가는 중이었다면 너무 어색해서 괜스레 발목이라도 삐끗할 것처럼 삼엄한 분위기였다. 더욱이 인도 바로 옆 차도에도 시내 방향으로는 차가 한 대도 지나가지 않았고 그냥 텅 비어 있었다. 반대편 모 호텔 앞쪽 차도엔 차들이 빽빽하게 서 있던 것과 대조적이어서 더욱 기묘했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한쪽 도로에만 차들을 지워버린 거나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이 들 정도였다. 드디어 내가 골목으로 꺾어져 들어가야할 무렵 즈음 경찰 오토바이가 한 대 앞장서 가더니 이어 비상등을 켠 검정색 세단 두 대가 휙 지나갔다. 어느 나라 국기인지 모를 소형 깃발을 양쪽에 휘날리면서. 

수십년 전 거국적인 행사나 귀빈 방문이 있을 때마다 걸핏하면 여의도광장으로, 경복궁 옆이나 광화문 앞길로 교복을 입은채 동원됐던 나의 학창시절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미 도로가 통제되어 몇 정거장쯤 전에 미리 버스를 내려 정해진 집결지까지 마냥 걸어가야 했는데, 주로 아침이나 대낮이긴 했어도 꼭 그렇게 경찰들이 줄지어 서서 '길'을 경호하고 있었다. 가깝게는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텅 비어 있던 평양 거리와 인도에 일사불란하게 도열해 진달래꽃을 흔들어대던 북한 주민들도 떠올랐다. 말도 안되는 '국격'이니 뭐니 떠들지 말고 차라리 그런 독재적인 사고방식만이라도 차별화를 두려 했다면 전 세계 외신에 또 한 번 서울과 평양을 혼동하게 만들 남부끄러운 장면을 연출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저들'은 참말로 이해가 안되는 족속들이다. 그렇게 높이려는 국격이 겨우 북한과 동격의 수준이라니... 북한이 세계적으로 누리는 독보적인 위상이 그리도 부러웠던 것일까?

출판 기념회 같은 자리에 많이 쫓아다니는 편이 아니긴 하지만 더러 가보면 그냥 뷔페 음식 차려놓고 간단히 인삿말이 오간 뒤 담소하는 분위기가 전부였다. 애당초 내가 담당자의 초대에 응했던 것도 그렇게 큰 부담은 없을 거라는 막연한 예상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금요일의 행사는 놀랍게도 단상에 마이크가 차려지고 공식적인 인삿말과 짧은 강연까지 식순에 따라 진행되는 엄청난 분위기였다. 심지어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이름표 달기'와 '일으켜 세워서 인사시키기'도 자행됐고, 2부엔 여흥을 돋울 초대가수도 등장했다. +_+ 안내되는 자리에 앉은 순간 이미 나 정도의 내공으론 참석해선 안될 자리였구나 싶었던 나는 마치 연예인 구경하듯 유명 번역가들을 좌우로 흘끔거리며 안절부절 못했다. 문인들이 이런저런 자리에서 서로 안면을 잘 트고 지내는 것과 달리 번역하는 이들은 웬만해선 서로 안면이 없음을 잘 안다며, 출판사 대표와 담당자가 곳곳에 앉아 분위기를 무마해주기는 했어도, 초중반엔 정말 민망하고 뻘쭘했다. 이날의 경험을 교훈 삼아 앞으로 다시는 뭣도 모른 채 그런 자리에 가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나마 수확이라면 저명한 번역가들도 어김없이 열악한 번역료와 불규칙한 수입과 자기관리와 '마감지연' 문제로 고민하고 있음을 깨닫고 동병상련의 기쁨을 맛보았다는 정도? ㅋㅋㅋ 아 맞다, 나 만큼이나 그분들도 '전문' 번역가라는 말을 싫어했다. 소설가 앞에 굳이 '여성'을 붙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번역 장르에 대한 은근한 비하의 느낌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뉘앙스는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리고 글과 말은 달라서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반드시 말을 잘하는 건 아니라고 믿고 있었는데, 거기 온 분들은 다들 달변이어서 놀라웠다. 계속 안면 있는 담당자와만 속닥거리다가 나중엔 나도 술기운으로 버텨내긴 했지만, 그날 지켜본 바에 따르면 '저명도'에 따라 사교성도 비례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니 나처럼 숫기도 없고 지명도도 떨어지는 인간이 얼마나 좌불안석이었을지! 아무려나 신기한 경험이었다는 것으로 외출 결과 보고 및 지난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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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투덜일기 2010. 11. 10. 15:08

금요일 저녁에 출판사에 갈 일이 있다. 출판사에 전화할 일이 있을 때 한 이틀 전부터 고민고민 하다가 벼르고 별러 어렵사리 전화를 거는 편이라면, 출판사에 갈 일은 일주일 이전부터 고민스럽다. 예전에 스스로 조직형 인간이라고 여기며 살던 직장인 시절엔 거래처에 독촉전화를 하고 업무사항을 전달하고 외부인을 만나 상담하고 거래처를 방문하는 게 별 스스럼 없었던 것 같은데, 지금 돌이켜보면 몸서리 쳐지는 꿈만 같다. 담당자와 아무리 친분이 쌓였더라도 이젠 낯선 회의실에 앉아 그 뻘쭘한 시간을 어떻게 매끄럽게 보내야할지 통 자신이 없다.

평소의 나 같으면 금요일 외출 건을 거절했어야 옳다. 근데 뭣에 씌였는지 상당히 복잡한 출판 행사가 벌어지는 그날 가깝지도 않은 출판사엘 왜 가겠다고 승락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지난 여름 어지간히도 속을 썩인 담당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장 큰 이유였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막상 가자고 생각하니 영 마뜩찮다. 더욱이 빌어먹을 쥐20 때문에 어느 길이 어떻게 통제될지 알 수 없다는 요번 금요일에 강남까지 가야한다니.

지난주까지만 해도 쥐20에 반대하는 심보를 보란듯이 알리기 위해서라도 '자율적 2부제' 따위 무시하고 차를 가져갈 작정이었다(벌써부터 우리집 담벼락과 현관에 '11, 12일 양일간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세요'라는 홍보물이 붙어 있어 더욱 배알이 틀렸다). 한강 다리만 건너면 바로 있는 곳이라 차로 가면 30-40분이되,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면 내가 제일 싫어하는 계단을 수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시간과 걷는 시간까지 합해 1시간도 넘게 잡아야 한다. 출퇴근 길에 막히는 시간까지 감안하더라도 시민 편의를 우습게 아는 놈들의 행태에 어떻게든 딴죽을 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명박산성에 버금가는 펜스를 쳐가며 벌써부터 길을 막는 건 물론이고, '높으신 분들'의 이동 경로에 따라 강남길은 수시로 어디나 통제될 거란 뉴스를 보며 다시 원초적인 고민에 빠졌다. 괜히 차안에서 3시간쯤 갇혀 있으면 어쩌나. 감기 걸렸다고 핑계대고 가지 말까... -_-; 헌데 그럼 전화를 걸어야 하잖아! 전화도 없이 그냥 안나타나도 나 하나쯤 안 온 거 모르지 않을까. 양치기중년의 삶에 대한 반성으로라도 그냥 전철 갈아타고 걸어 걸어서라도 가야하는 걸까...

울화는 결국 다시 이름도 공교로운 쥐20으로 향한다. 왜 하필! 그딴 걸 하느라 세상 시끄럽고 사람 불편하게 만드는 거냐고! (번거로운 외출을 승락한 내 잘못은 역시나 뒷전이다. -_-; 이렇게 잠깐 외출도 고민스러운데 차폐막을 뚫고 계속 강남으로 출퇴근 해야하는 사람들은 오죽 불편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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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상

투덜일기 2010. 11. 10. 01:36

며칠 전 장보러 갔을 때 마트 밑반찬 가게에서 만들어 놓은 반찬을 충동구매했었다. 원래 그렇게 만들어 놓고 세 팩에 5천원 하는 반찬들은 조미료 때문에 못미더워 까탈스러운 척 하면서 좀체 사다먹질 않는데, 그날은 채소 진열대에서도 생전 못보던 '유채나물'이란 게 눈길을 끄는 바람에 파래무침과 연근조림을 더 얹어 구색을 맞추었다.

그런데 사온 반찬들을 거의 다 먹어가던 참이라 그릇 바닥에 연근이 두어개 밖에 안 남았을 때, 뭔가 새까만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대번에 왕비마마를 의심했다. 숟가락질 하시다가 흑미 하나를 떨어뜨렸나보다고 생각했던 거다. 그러나 확인 결과 흑미 크기의 새까만 물체는 물엿에 휩싸여 죽은 파리 시체였다.

엄마한테는 말도 못하고 남은 반찬들을 다 버리고도 며칠 내내 밥상에 앉기만 하면 연근 구멍 안쪽에 늘어붙어 있던 파리가 떠올라 입맛이 달아났다. 비위가 그리 약한 편은 아닌데, 이상하게도 그날의 파리가 남긴 잔상은 오래도록 뇌리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파리가 빠져 죽은 연근조림을 먹은 모녀 모두 탈은 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반들반들 물엿에 싸여 날개는 녹아버렸는지 몸통만 얼핏 본 그 파리가 오래도록 나를 괴롭힌 것처럼, 아래 끼적인 친구 욕하는 푸념도 흉한 잔상을 내게 오래 남길 것 같다. 돈이 없어 빌릴 처지에 놓이게 된 건 잘못도 아니고 죄도 아닌데, 나는 왜 그렇게 분노하고 친구를 욕했을까. 그간 크든 작든 돈 문제로 나를 힘들게 했던 지인들과의 모든 경험을 뭉뚱그려 그 친구 잘못으로 몰아붙인 혐의가 짙다. 친구라면서 실망한 건 그 쪽이나 내 쪽이나 똑같을 텐데, 나만 옳은 척 수십년의 역사를 몇줄로 매도한 행위가 이제 보니 참 옹졸하다. 연근 물엿에 빠져 죽은 검은 파리가 내 꼬락서니 같은 이 기분은 며칠 전의 잔상보다 꽤나 오래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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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친구

투덜일기 2010. 11. 9. 12:58
고1때 짝이었다. 학교졸업후 이민을 가버린 또 한 명의 친구와 셋이 3년내 단짝이라 계속 반이 달라졌는데도 하교는 꼭 같이 하는 충성을 서로에게 보였고, 각자 삶이 달라진 대학시절에도 줄곧 자주 만났다. 고3때도 내내 수시로 학교 등나무 벤치로 불려나가, 교회 오빠와의 연애상담을 도맡았던 터라 이후에도 친구의 연애고민을 들어주는 것이 내 주된 임무였다. 주변에선 둘의 키가 작다는 것 말고는 공통점이 하나도 없는데 같이 어울리는 게 신기하다고 했다. 남자친구가 늘 우선순위라 약속을 하고도 걸핏하면 바람을 맞히는(그땐 삐삐도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라, 약속장소에서 기다리며 공중전화로 친구 집에 계속 전화를 걸어 가족에게 메시지를 남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 친구를 내가 왜 늘 참아주는지 나도 신기했다. 그래도 고등학교 때 친구는 평생 가는 거니까, 라고 믿었던 것 같다. 며칠 뒤 눈물과 애교로 참회하며 사과하는 친구의 변명에 넘어가기도 했다. 남자친구가 채워줄 수 있는 부분이 있고, 동성친구가 채워줄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그날은 남자친구가 필요한 날이었다나. (아 그럼 미리 전화해서 약속을 취소하거나 자기는 못나온다고 하던지!)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것을 즐겼던 친구는 대학시절부터 대학로 카페에서 피아노를 치는 아르바이트를 했고, 몇 번의 편입과 전과를 거치느라 학교를 세군데나 옮긴 뒤에도 결국 최종 직업은 피아니스트였다. 피아노를 치는 공간도 대학로나 미사리 카페에서 강남에 있는 별 다섯개짜리 호텔로 격상되었다. 그럴 거면서 굳이 수학과는 왜 졸업했는지 원. 내가 피아노 치는 남자에 대한 선망이 있듯, 공주 드레스를 입고 피아노 치는 여자에 대한 선망을 품은 대다수의 남자들 덕분에 친구는 주변에 남자가 끊이질 않았다. 집이 갑자기 기울어 빚쟁이들에 쫓기느라 친구의 가족들이 야반도주로 뿔뿔이 흩어져야 했을 때 친구는 동생을 하나 데리고 우리 집에 들어와 코딱지 만한 내 방에서 함께 몇달 지내야 했는데, 심지어 그 기간에도 심야에 울리는 전화는 모두 그 친구의 남자친구에게 걸려온 것이었다. 9시 이후엔 남의 집에 전화를 걸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가르쳤던 우리 아버지가 주무시다 말고 일어나, 딸 남자친구도 아니고 딸 친구의 남자친구 전화를 받아 바꿔주시는 상황이(당시 전화기는 안방과 거실에만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얼굴 뜨겁지만, 친구는 예의 애교 넘치는 말투로 생글생글 웃으며 죄송해요, 아버님, 한 마디로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스물여덟살 때였던가. '니가 한번 봐 달라'며 수없이 내게 소개했던 애인들 가운데서 친구는 드디어 한 남자와 결혼을 결심했다. 이상하게 나쁜남자가 매력적이라면서 늘 날나리 같은 남자를 선호하던 친구는 대기업에 다니는 검소하고 성실한 남자를 선택했고, 나는 드디어 친구의 방황이 끝나나 보다며 진심으로 기뻤다. 결혼식날 토요일 12시 예식에 맞춰 아침 7시까지 신랑신부를 픽업하는 역할이 내게 주어졌을 때도 기쁘게 승락했다. 그 남자는 친구도 없나, 하는 의문도 그땐 들지 않았다. 다만 전날 눈이 내리는 바람에 안산까지 출퇴근길에 흙탕물을 홀라당 뒤집어쓴 차에 신랑신부를 태울 수가 없어서, 깜깜한 새벽에 일어나 양동이에 뜨거운 물을 퍼담아 들고 나가서 골목 가로등 불빛 아래 손수 세차를 하면서 약간 서글프긴 했다. 친구 결혼식 때문에 세차하랴 꽃단장 하랴 새벽부터 부산을 떠는 나를 보며 부모님은 혀를 끌끌 찼다. ㅁㅅ이가 너 이 고생 하는 거 알아주기는 하냐고.

아직도 해가 뜨지 않아 어두웠던 오전 7시, 이미 살림집에서 함께 살고 있던 친구의 집 초인종을 누르자 신랑이 부스스 새집을 지은 머리로 문을 열어주었다. 심지어 신부는 자고 있었고... 그제야 일어난 두 사람이 부리나케 씻는 동안 나는 신랑신부 예복과 폐백 때 입을 한복 따위를 영차영차 미리 차에 실었다. (친구가 아니라 머슴이었나?) (내 생각에) 남성편력 및 방황 끝, 행복 시작이라 여겼던 친구의 결혼생활은 3년을 채우지 못했다. 남자의 성실함과 검소함은 친구에게 따분함과 궁상으로 비치기 시작했다. 화려하게 즐기는 삶의 습관을 친구는 포기하지 못했고, 꼼꼼히 모든 수입을 관리하는 남편 몰래 딴 주머니를 차느라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를 팔아 야밤에 놀러다니기를 거듭하던 친구는 결국, 무려 열살이나 어린 아르바이트생(수능 끝나고 호텔 주차요원으로 일하던)과 바람을 피우다 들통나 이혼했다. 결혼이라는 제도나 한 남자와의 약속 따위에 얽매일 수 없는 친구란 걸 나도 그 무렵 깨달았던 듯하다.

친구는 놀랍게도 그 문제의 남자친구와 거의 10년간 만남과 헤어짐을 거듭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은 친구에게 진리였다. 몇달씩 심지어 1년 가까이 연락이 없으면 연애든 일이든 잘 진행된다는 뜻이었다. 그러다 뜬금없이 연락이 와 만나자고 해 나가보면 어김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헤어짐의 아픔을 토로했다. 그러고는 어김없이 일주일 쯤 뒤에 헤헤거리며 전화를 걸어 다시 만나기로 했다는 기쁜 소식을 알렸다. 드물게 곁에 애인이 없을 때만 찾는 친구로 전락한 나 역시 그 친구를 어느 정도는 포기하고 있었다. 그냥 세월의 힘과 관성으로 견뎌주는 관계랄까.

타고난 사교술과 수완으로 친구는 꾸준히 사업 규모를 늘려가는 모양이었다. 피아노 연주도 현악기 편성을 늘려서 호텔 로비에서 연주하는 것뿐만 아니라 결혼식이나 여러 행사에도 불려다녔다. 그야말로 엔터테이너의 길로 접어든 친구는 후배 연주자들을 거느리고 양성하는 사업가로 변신해, 몇년 전엔 법인을 차렸다고 했다. 행사 연주 한번에 최소한 몇백만원을 벌어들이는 그 친구의 시각으론 골머리를 써가며 컴퓨터 앞에 앉아 '푼돈'을 버는 내가 한심했는지, 몇년 전까지도 내게 '차라리' 고액과외를 하지 그러냐고 안타까워했다. -_-;

우리 집에서 가까운 호텔에 행사가 있을 때나 간간이 서로 얼굴을 볼 수 있었던 친구가 연애고민 이외의 난감한 부탁을 해오기 시작한 건 작년부터였다. 엔터테인먼트 사업이란 것이 원래 열악한 자본금으로 시작해 인적자원으로 외부의 투자를 끌어들여 운영하는 것이라는데(친구의 설명이 그렇다), 당연히 수입이 불규칙할 수밖에 없어 간혹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한다는 길고 긴 푸념 끝에 친구가 화끈하게 말했다. 천만원만 빌려달라고. 보름 있다가 투자금 들어오면 갚겠다고. +_+ 누구나 통장에 그 정도 여윳돈은 늘 갖고 있어서 수시로 뺄 수 있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과거에 몇 차례 몇몇 친구에게 돈을 빌려준 경험으로 미루어, 친구에게는 그냥 주겠다는 마음이 없는 한은 돈을 빌려주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는 걸 알고 있는 나는 고민을 꽤 했다. 빌려줄까 말까의 고민이 아니라(물론 그럴 돈도 없었지만!), 어떻게 '잘' 거절해야 할까 고민이었다. 그냥 선뜻 선물로 줄 상황이 아니고서야 친구와는 돈 거래를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는 것을 납득시켜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나는 비겁하게 여윳돈이 없다는 변명과 사과로 친구를 돌려보내고 말았다. 그러면 할 수 없지 뭐, 라며 돌아간 친구는 그 일로 삐쳤는지, 또는 내가 필요 없어진 때문인지 몇달이 넘도록 연락이 없었다. 원래도 내 쪽에서 먼저 연락하는 법이 잘 없기 때문에 문득 생각이 나더라도 나 역시 잘됐다 싶을 정도였다. 오랜만에 만나서 돈 얘기나 하는 친구라니! 차라리 연애 고민 상담이 낫지... -_-; 그러다 올초에 또 한번 '딱 일주일만' 필요해서 그러는데 5백만원만 빌려달라는 연락이 왔다. 어휴... 급히 돈거래를 청하는 사람들은 어쩜 그렇게 변명거리가 다들 그렇게 똑같은지.

결국 나는 친구와 관계정리의 위험을 무릅쓰고 (어쩌면 그쪽을 바란 것인지도!) 미안하지만 친구와는 돈거래를 하지 않기로 했다는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말로는 이해한다면서, 그래도 자기를 그렇게 못 믿는다는 게 섭섭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던 친구는 알았으니 내게 다시는 돈 얘기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또 몇달이 지났건만 친구는 며칠 전 또 다시 '5백만원'의 용건으로 나를 찾았다. 그리고 이번엔 레퍼토리도 달라져 있었다. 요번 쇼케이스 진행하느라고 생각보다 비용이 많이 들어가서 그래. 오백이 안되면, 일단 삼백도 괜찮아. 너 설마 그 정도는 있지? 당장 너한테 없으면, 일주일 뒤에 드린다고 너희 엄마나 동생한테 얘기 좀 해봐라. 10일에 1억 투자 들어오기로 되어 있으니까, 딱 일주일만 쓰면 돼. 응?

친구의 억지에 기가 막혀서 성의 없이 대꾸하다 미안하다고 전화를 끊으려니 서글픔이 밀려들었다. 친구의 상황이 정말로 어떠하든, 그간의 역사가 어찌 되었든 이 친구에겐 내게 여유가 아주 많더라도 선뜻 천만원, 오백만원을 내어줄 수 있는 '관계'가 아니란 생각 때문이었다. 전화를 끊고 잠시 씩씩대던 마음으론 번호를 스팸등록 해놓을까도 싶었지만 그러지는 않기로 했다. 정말로 절실하게 돈이 필요한 상황은 누구에게도 닥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젠 친구의 번호가 뜨면, ' 또 애인이랑 헤어졌나?'라는 의문 대신 '또 돈 빌려달라고 할 건가?'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오를 것이고, 그래서 이미 우리의 관계는 무너져버렸음이 안타깝다. 수십년 된 우정이 겨우 요거냐고, 친구랍시고 그럴 줄 몰랐다고 그녀가 나를 욕하든 말든, 하는 수 없다. 나는 이만한 그릇의 사람인 것을. 고등학교 친구든 아니든 평생 가는 친구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고, 멀어지는 친구 또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만만한 대부업자로 여기는 친구 따위 나도 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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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줄임

투덜일기 2010. 11. 5. 13:46

예전에 가수 박진영을 퍽 좋아했다. 나 또한 한때 춤추러 다니는 걸 좋아하던 때가 있었기 때문에 춤 잘추는 사람에 대한 동경 같은 게 있기도 했고, 최근의 노래들 말고 초창기의 노래들은 정말 한 곡도 버릴 게 없다며 달달 욀 정도로 많이 들었다. 그런데 가수 박진영 말고 그가 인터뷰 같은 데 나와서 말하는 건 약간 재수없는 말투라고 생각하다가 공통점을 발견하고 반색했던 적이 있다. 쓸데없이 말 줄여서 말하는 사람(물론 박진영은 '여자'라고 했지만)이 별로라면서, 호감 가던 사람이 물냉면, 비빔냉면을 '물냉, 비냉' 따위로 줄여부르면 정이 확~ 떨어진다고 말했다. 나도 그랬다! 대학 신입생 때 과에서 모임이 있으면 꼭 중국집엘 데려가 무작정 짬뽕국물에 소주를 시켜 먹이다가, 제일 저렴한 짜장면과 우동 중에서 끼니를 정하라고 강권했다. 그때 내가 몹시도 싫어하던 선배는 엄청 나대면서 우리에게 각자 먹을 메뉴를 '앞 글자'만 얘기하게 시키고는 자기가 굳이 메모지에 正자를 그리며 수를 파악했다. 아이들이 '우-짜-우-짜-우-짜-짜'라고 말하는 게 재밌다나. -_-; 으으으.. 지금 생각해도 몸서리쳐지게 싫다! 물론 때에 따라 나도 편하게 물냉, 비냉으로 줄여서 쓰기는 하지만, 스스럼없는 사이가 아니라 조금은 격식이 필요한 자리에서 경박한 줄임말을 들으면 그 사람에 대한 호감도가 급감한다.

말 줄여쓰기 열풍이 분 건 아무래도 삐삐를 시작으로 해서 휴대폰 문자메시지의 글자수 제한에다, pc통신을 거쳐 인터넷 문화의 확산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디카, 폰카, 떡삼(떡+삼겹살), 김떡순(김밥+떡볶이+순대), 뭥미 따위의 줄임말을 아무 거부감 없이 쓰고 있고, 학습을 거쳐 엄친아, 엄친딸, 언플(언론플레이), 일코(일반인 코스프레) 해제, 인강(인터넷 강의) 같은 말들을 알아가고 있다. 하지만 굳이 안 줄여도 될 말들을 언론에서까지 덩달아 열심히 줄여서 쓰기를 권장하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고 몹시 마음에 안든다. 물론 예전에도 일간지 헤드라인에는 집약적인 느낌의 줄임말이 쓰였고, 그것이 잘못이라 여기지 않는다. 언론과 뉴스에 수시로 오르내리는 국감, 건보료, 생보자, 금감원 정도는 이제 줄임말도 아니라고 여겨질 정도다.

헌데 오늘 뉴스를 보다가 뭥미, 하는 낱말을 듣고 뉴스 내용에 집중해보았지만 끝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_-; 우리나라 방송의 뉴스는 중3 수준의 어휘와 지력에 맞춘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내가 중3수준의 상식과 지력에도 못미친다는 의미? 내가 못 알아먹은 말은 코스피의 폭등과 세계증시 관련 뉴스를 언급하며 그 원인을 설명하는 부분에 나온 '연준'이라는 말이었다. 한번쯤은 그게 뭔지 긴 말로 풀이해줄 만도 하건만, 앵커와 기자가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을 정도로 오래 다루면서도 끝내 '연준'이 어쩌고 저쩌고, '연준'의 이번 발표가 주절주절, 그랬다. 요즘처럼 검색이 일상화된 시대에는 못알아 먹는 사람이 알아서 찾아보라는 식인가보다 싶어, 검색해보니, '연방준비제도'인 모양이다.

예전엔 <금감원 @@ 개입 결정> 같은 헤드라인이 떠도 기사 중엔 금융감독원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친절히 정식 명칭으로 풀어주었던 것 같은데, 요샌 그나마도 안해주는 게 미덕이고 추세인가? 가뜩이나 복잡한 세상에 복잡한 일이 많아 뉴스는 내가 봐도 못 알아먹는 이야기가 수두룩하지만, "저게 뭔 얘기라니?"라고 물으며 난감해 하시는 왕비마마의 속상함을 지켜보자면 버럭 화가 난다. 말만 덜 줄여도 이해의 폭이 커질 수 있을텐데 싶어서 말이다.

하기여 요즘엔 드라마 제목, 방송제목도 죄다 줄여서 '성스', '인아', '무도' '음캠', '남격'이라고 부르는 게 일반화된 듯하고, 심지어는 존경하는 뮤지션이라면서 마이클 잭슨을 '마잭'이라고 줄여 부르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라니 내가 아무리 투덜거려도 이미 추세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다. 그저 내가 무식한 거라고 자책하며 이런 공간에다가나 경박한 줄임말 싫다고 푸념하는 수밖에 없겠지. 연방준비제도도 모르는데 '연준'을 어떻게 알란 말이야!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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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투덜일기 2010. 11. 1. 12:14

변기에서 물이 샌다는 걸 처음 발견한 게 언제더라. 최소한 다섯달은 된 것 같다. 두달에 한번씩 나오는 상하수도 고지서의 금액을 두세번이나 예년과 비교하며 고민했으니 말이다. 처음엔 전달보다 만원쯤 더 많아진 금액을 보고도 여름이라 물을 많이 썼을 거라고 위로하며 넘겨버렸다. 그러다 급기야 두배를 넘어선 고지서를 받아들고도 계속 변기 수리를 미루기만 했던 데는 나름 핑계가 있었다.

우선은 동네 어귀에 있던 수리점이 문을 닫았다. 작년에 엄마네 화장실 수리하면서 받아둔 명함으로 곧장 전화를 걸었더니만 그 지경이었다. 그렇다면 어디에다 연락해서 사람을 불러야 하나, 난감해진 나는 에라 모르겠다 잠시 잊어버리는 쪽을 택했다. 고요한 밤에 유독 크게 들리는 졸졸 새는 물소리를 들으면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물부족으로 먹는 물도 없어 병에 걸리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퍼뜩 인터넷으로 변기 출장수리 회사를 알아보긴 했지만, 너무 거창한 느낌이 들어 꼬리가 내려갔다.

그러고 또 그간 너무 바빴다. 대체 마감중이 아닐 때가 언제 있었느냐고 주변에서 퉁박을 주기는 하지만 밀린 일들이 차곡차곡 쌓여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상황이라 심적으로 어찌나 부담이 됐던지 화장실 변기 수리 따위는 우선순위에서 멀찌감치 밀려나고 말았다. 차라리 변기로 이어지는 수도를 잠가놓고 물을 받아 붓는 쪽을 택하거나 엄마네 화장실을 다닐망정, 사람을 불러 견적을 받고 수리를 맡기는 번거로운 절차를 회피했던 거다.

그러다 문득 오늘 우편물 꺼내러 현관에 내려갔더니 문앞에 명함이 한장 떨어져 있었다. "@@누수탐지수리공사. 출장문의 환영." 유레카! 곧바로 명함을 집어와 전화를 거니 20분 만에 올 수 있다고 했고, 한시간도 지나지 않아 단돈 6만원과 커피 한잔 서비스로 모든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었다. ㅠ.ㅠ 이렇게 쉽게 해결될 일을 대체 난 몇달 간 끙끙댔던 것인가. 몇달 간 수리비보다 훨씬 더 많이 하수구에 흘려보낸 수돗물 값은 또 어떻고. 친절한 아저씨는 영수증을 끊어주며 수도사업소에 연락해서 팩스로 수리내역을 보내면 그간 더 낸 상하수도비를 얼마간 돌려받을 수도 있다고 권했지만, 내가 그런 어려운 일을 시도할 리가 만무하다. 그저 문제상황이 종료되었음이 기쁘고 감격스러울 뿐.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는데, 요즘 나의 행태를 보면 매사가 이런 식이다. 뭐든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고민만 하다가 결국엔 계속 미루고 또 미루다 실행에 옮기는 건 하나도 없어 늘 쫓기는 사람처럼 전전긍긍. 머리맡이며 탁자에 읽다가 말고 (내가 지금 한가롭게 책이나 읽을 때냐!) 던져둔 책이 몇권이며, 이 블로그에도 쓰다가 말고 (시답잖은 신변잡기로 블로그질 할 시간에 일 한 줄이라도 더 하지!)  비공개로 남겨둔 글이 몇개던가. 한숨.

이렇게 어영부영 11월. 올해도 겨우 두달 남았다. 여름부터 질질 새던 변기 문제를 하루아침에 뚝딱 해결해주고 돌아간, 내게는 슈퍼맨 같았던 누수탐지수리공사 아저씨처럼, 어디론가 전화만 걸면 질질질 흘리고만 사는 내 인생을 바로잡아주는 해결사의 도움이 절실한 게 아닐까. 하기야 변기수리 하나도 어디에 전화를 걸어야 할지 몰라 헤맨 기간이 다섯 달이니 그마저도 요원하긴 하다. 우선은 어디로든 전화를 걸 마음부터 다잡아야 하는데, 이놈의 전화공포증이 어딜 가나 문제다. 난 왜 어디든 전화 거는 게 이리도 싫은지 원. 이것 봐라, 또 전화 핑계를 대고 앉았다. 온갖 핑계와 변명으로 점철된 이놈의 마감인생, 아침부터 얼굴이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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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가시

투덜일기 2010. 10. 29. 20:23

밥먹을 때 혼자 생선가시를 발라 먹기 시작한 게 언제인지는 당연히 잘 기억나질 않는다. 하지만 대충 짐작컨대 열살 언저리가 아니었을까? 할아버지의 호통 교육으로 젓가락질은 국민학교 이전에 이미 통달한데다, 밥상머리에서 오래도록 엄마의 시중을 받기엔 두 동생이 있어 어려웠을 테고, 그때도 이미 잘난척 했던 나의 성격이 그런 걸 허락치  않았을 것 같다. 엄마가 살쪽을 우리에게 나눠준 뒤 당신은 남은 살에서 생선가시를 대충 발라서 입안에 넣고 마구 씹다가 남은 가시를 뱉어내는 방식을 어려서도 몹시 못마땅해 했던 기억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남동생들은 머리가 굵어진 뒤에도 생선을 먹을 땐 꼭 엄마가 거들어줘야 했다. 막내는 아예 비린것을 싫어해서 웬만해선 젓가락도 대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억지로 먹이려고 자꾸 밥그릇에 생선살을 올려주는 편이었고, 큰동생은 생선가시를 바르는 게 아니라 생선 몸통을 헤쳐놓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영악한 나는 생선 종류가 달라지더라도 중간 뼈대와 등, 배에 난 가시의 구조를 알면 완벽하게 생선살만 발라먹는 게 어렵지도 않은데 다들 왜 헤매는지 도대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다행히도 착한 올케들은 생선반찬을 식탁에 올릴 때마다 어린 조카들 뿐만 아니라 남편을 위해서도 일일이 가시를 발라 살만 먹기 좋게 마련해주는 성품이다. 그게 습관이 된 덕분에 심지어 같이 밥을 먹을 땐 우리 모녀를 위해서도 가시를 발라주는 지경. 애들과 남편을 위해 돌아가며 생선 가시를 발라주느라 생선을 굽거나 조리는 날엔 정작 자기는 잘 먹지도 못한다고 푸념하면서도, 지켜보면 노상 그러고 있다. 엄마도 위대하지만 아내도 위대함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가끔 나도 밥상머리에서 일손을 돕느라 조카들에게 생선살을 발라 숟가락에 얹어주다 보면, 녀석들이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정말로 젓가락을 쉴 수가 없고, 내 입으론 생선살 한톨 못들어간다.

물론 이젠 나에게도 밥상머리에서 늘 생선가시 바르는 시중을 들어들어야 하는 왕비마마가 계신다. 과거에도 그랬듯 왕비마마는 대충 큰 가시만 발라낸 생선 살을 마구 씹다가(잔 가시는 칼슘 섭취를 위해 먹어도 괜찮다고 주장하신다) 걸리는 가시가 있으면 뱉어내는 분인데, 그러다 꼭 가시가 목에 걸려 켁켁거리며 괴로워하시기 때문에 나는 절대 못하게 말린다. 일주일 단위로 병원에 다닐망정 생선가시 빼러 응급실 가는 일은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식단을 구체적으로 짜서 해먹고 사는 건 아니지만, 일주일에 한두번은 꼭 생선을 굽거나 조려 상에 올리는 편이라 어느새 생선가시 바르는 일도 나름 주간행사다. 

돌아보면 굴비를 좋아하셨던 할머니를 위해 말년에 생선가시를 바르는 일도 내 몫이었던 것 같다. 내가 어렸을 땐 당연히 할머니가 생선 살을 발라 내 밥숟갈에 얹어주셨겠지만, 눈이 어두워지신 할머니를 위해선 나나 엄마가 할머니 밥숟갈에 굴비 살을 올려드려야 했다. 그러면 할머니는 당신은 됐으니 너나 어서 먹으라고 말씀하셨지만, 잔 가시 하나 없이 '성공적으로' 살코기만 할머니 숟가락에 얹어 드리며 나는 몹시 뿌듯하기만 했었다. 그런데 엄마를 위해 생선살을 바르는 요즘은 뿌듯함보다 서글픔이 앞서고 그래서 자꾸만 심술이 난다. 할머니를 위해선 꼭 숟가락에 생선살을 얹어드렸으면서, 엄마를 위해선 가시만 따로 발라 치워놓고 직접 집어 드시라고 하는 것만 봐도 태도가 다르다. 벌써부터 매사에 너무 의존적으로 만들지 않기 위함이라는 의도가 깔려 있기는 하지만, 그 밑바탕엔 엄마가 완전히 힘없는 '할머니'란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보가 녹아 있다. 

오늘 저녁에도 가시가 젤 없는 편인 삼치를 구워 먹으며 생각해보니, 내가 열살무렵에 생선가시 분야(?)에서 독립했다고 쳐도 엄마의 시중을 받은 게 10년이니 최소한 나도 10년은 군말없이 봉사해야 맞는 거다. 그 이후에도 계속 그런 봉사의 세월이 이어지면 감사할 일이고... 생선가시 때문에 툴툴대다 갑자기 철났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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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조사

투덜일기 2010. 10. 28. 17:54

며칠 전 외출에서 돌아오니 우편물 두 개가 현관문에 매달려 있었다. 현관에 뭔가 붙어 있을 때는 새로 연 치킨집이나 피자집 홍보물이나, 우편배달부 아저씨가 붙여놓은  등기우편 배달 안내문이 전부일 뿐, 모든 우편물은 현관 옆 벽에 걸어놓은 우편함에 들어 있는데 이상하다 싶었더니, 인구조사 안내문이었다.

아래쪽 계단 입구를 막아서 현관문을 새로 달아 살고 있지만 원래 2층은 두 가구가 살던 집이라 왕비마마와 나는 주민등록도 따로 되어 있어 '법'적으로는 각각 독거노인과 독거중년이다. 그러니 당연히 인구조사 안내문도 두 가구 분이 나왔을밖에. 마지막 인구조사가 언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조사요원이 집에 들어와 단순한 호구조사 이상의 난감한 질문들을 시시콜콜 해댔던 게 기억났다. 낯선 사람을 들이는 것도 싫고 희한한 질문에 일일이 대답해주는 것도 싫은 나 같은 대인기피증 환자에겐 인터넷 조사가 얼마나 다행스럽던지! 득달같이 해당 사이트엘 들어가 조사를 마쳤다.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나 의아한 질문들이 눈에 띄었다. '인구조사'를 한다면서 살고 있는 주거환경에 대해선 왜 그렇게 시시콜콜 묻는지? 방이 몇개냐, 부엌이 몇 개냐, 화장실이 몇 개냐, 독립적인 출입구가 몇개냐.. 하는 건 그나마 쉽게 대답할 수 있었지만 정확한 건평은 왜 묻는 건데? +_+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야 입주할 때부터, 그리고 애어른 할 것 없이 수시로 서로 묻는다는 "너 몇평 사니?"라는 질문과 대답으로 늘 숙지하고 있는 지식일 수도 있겠지만, 나 같은 사람은 누렇게 변한 '집문서'나 '등기권리증'을 뒤져봐야 답할 수 있는 문항이란 말이닷!

오래 전 국민학교 때 생활환경 조사서에서 자가/전세/월세 따위의 구분 뿐만 아니라 집에 TV, 냉장고, 세탁기, 전기밥솥(!) 따위의 가전제품이 있는지 없는지도 표시해야 했던 때가 떠올라서 기분이 묘했다. 뉴스를 보니 인터넷 인구조사 비율이 30%만 돼도 절약할 수 있는 인건비가 몇십억이라고 하던데, 나처럼 민망한 조사원의 방문을 피하고 싶거나, 대면조사를 원해도 시간이 없어서 못하는 사람들이 비율이 그만큼은 되지 않을까? 피할 수 없는 강제성을 띈 조사라는 느낌에 얼른 응하기는 했는데, 어째 기분이 영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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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투덜일기 2010. 10. 19. 16:11

언제부턴가 사진 찍히는 걸 즐기지 않게 됐다. 내가 품고 있는 본인에 대한 이미지와 사진으로 나온 실제 모습의 괴리감이 점점 커지면서 마음 상하는 일이 계속됐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그랬으면 또 모르겠으나, 어려서는 사진 찍고 찍히는 걸 하도 좋아해서 20대 후반까지는 거의 앨범을 수시로 사들여 사진 정리를 하는 게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앨범은 조카들 사진전용 뿐이고, 그나마도 처음 디지털카메라를 샀을 땐 몇달씩 몰아서 인화해 앨범에 넣어두었지만 최근 2, 3년 동안은 인화조차 해본 적이 없다. 막내동생이 훌륭한 dslr 카메라로 작품을 찍어주면서 내 똑딱이 디카로는 인화까지 할 가치를 못느꼈던 때문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컴퓨터에만 들어 있는 최근 사진들을 보아도 풍경사진이 8할이요 나머지는 왕비마마와 조카들 사진일 뿐 내 사진은 거의 없다. 심지어 올봄에 엄마랑 일본에 갔을 때도 80여장의 사진 중 내 독사진은 엄마가 공항에서 찍어주신 거 딱 한장이었다. 사진찍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수시로 찍는다는 이른바 '셀카'도 당연히 없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 사진에 찍혀야할 땐 긴장해 얼굴에서 경련이 이는 것 같고 당연히 표정이 어색해진다. 나보다 몇살이라도 많은 이들은 사진기 앞에서 손사래를 치는 나를 나무란다. 오늘 찍은 사진이 앞으로 남은 평생 찍을 사진 중에 제일 젊은 사진이라면서. 지금은 보기 싫은 것 같아도 또 한 10년, 20년 뒤에 오늘 사진을 보면, 캬 이땐 정말 젊었구나, 하게 될 거라나.

그래 맞다, 싶으면서도 여전히 카메라 앞에선 작아지는 느낌이라 사진찍기를 외면해왔으나, 앞으로는 가족모임 있을 때마다 멋진 사진 좀 찍어보라고 만날 포즈를 잡는 큰동생네 부부처럼 나도 가끔은 사진을 남겨야겠다고 오늘 다짐했다. 어디서 갑자기 프로필 사진을 내놓으라는데 있어야 내놓지! 그래도 컴퓨터를 뒤지면 쓸만한 독사진 몇장은 있을 줄 알았더니, 내 착각이었다. 디카를 거의 매일 들고 다니던 마지막 시기인 5, 6년을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어쩜 괜찮은 독사진 한장이 없었다. 그나마 사진 용량도 커야한다니 휴대폰 카메라로 눌러댄 막사진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어떻게든 오려서 써먹어보라고 막내동생을 들쑤셔 어렵사리 조카들과 찍은 사진을 챙겨보내며 문득 생각했다. 미리미리 영정사진으로 쓸만한 프로필 사진을 준비해놓는 것이 반드시 어르신들만의 일은 아니라고.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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