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친구

투덜일기 2010. 11. 9. 12:58
고1때 짝이었다. 학교졸업후 이민을 가버린 또 한 명의 친구와 셋이 3년내 단짝이라 계속 반이 달라졌는데도 하교는 꼭 같이 하는 충성을 서로에게 보였고, 각자 삶이 달라진 대학시절에도 줄곧 자주 만났다. 고3때도 내내 수시로 학교 등나무 벤치로 불려나가, 교회 오빠와의 연애상담을 도맡았던 터라 이후에도 친구의 연애고민을 들어주는 것이 내 주된 임무였다. 주변에선 둘의 키가 작다는 것 말고는 공통점이 하나도 없는데 같이 어울리는 게 신기하다고 했다. 남자친구가 늘 우선순위라 약속을 하고도 걸핏하면 바람을 맞히는(그땐 삐삐도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라, 약속장소에서 기다리며 공중전화로 친구 집에 계속 전화를 걸어 가족에게 메시지를 남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 친구를 내가 왜 늘 참아주는지 나도 신기했다. 그래도 고등학교 때 친구는 평생 가는 거니까, 라고 믿었던 것 같다. 며칠 뒤 눈물과 애교로 참회하며 사과하는 친구의 변명에 넘어가기도 했다. 남자친구가 채워줄 수 있는 부분이 있고, 동성친구가 채워줄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그날은 남자친구가 필요한 날이었다나. (아 그럼 미리 전화해서 약속을 취소하거나 자기는 못나온다고 하던지!)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것을 즐겼던 친구는 대학시절부터 대학로 카페에서 피아노를 치는 아르바이트를 했고, 몇 번의 편입과 전과를 거치느라 학교를 세군데나 옮긴 뒤에도 결국 최종 직업은 피아니스트였다. 피아노를 치는 공간도 대학로나 미사리 카페에서 강남에 있는 별 다섯개짜리 호텔로 격상되었다. 그럴 거면서 굳이 수학과는 왜 졸업했는지 원. 내가 피아노 치는 남자에 대한 선망이 있듯, 공주 드레스를 입고 피아노 치는 여자에 대한 선망을 품은 대다수의 남자들 덕분에 친구는 주변에 남자가 끊이질 않았다. 집이 갑자기 기울어 빚쟁이들에 쫓기느라 친구의 가족들이 야반도주로 뿔뿔이 흩어져야 했을 때 친구는 동생을 하나 데리고 우리 집에 들어와 코딱지 만한 내 방에서 함께 몇달 지내야 했는데, 심지어 그 기간에도 심야에 울리는 전화는 모두 그 친구의 남자친구에게 걸려온 것이었다. 9시 이후엔 남의 집에 전화를 걸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가르쳤던 우리 아버지가 주무시다 말고 일어나, 딸 남자친구도 아니고 딸 친구의 남자친구 전화를 받아 바꿔주시는 상황이(당시 전화기는 안방과 거실에만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얼굴 뜨겁지만, 친구는 예의 애교 넘치는 말투로 생글생글 웃으며 죄송해요, 아버님, 한 마디로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스물여덟살 때였던가. '니가 한번 봐 달라'며 수없이 내게 소개했던 애인들 가운데서 친구는 드디어 한 남자와 결혼을 결심했다. 이상하게 나쁜남자가 매력적이라면서 늘 날나리 같은 남자를 선호하던 친구는 대기업에 다니는 검소하고 성실한 남자를 선택했고, 나는 드디어 친구의 방황이 끝나나 보다며 진심으로 기뻤다. 결혼식날 토요일 12시 예식에 맞춰 아침 7시까지 신랑신부를 픽업하는 역할이 내게 주어졌을 때도 기쁘게 승락했다. 그 남자는 친구도 없나, 하는 의문도 그땐 들지 않았다. 다만 전날 눈이 내리는 바람에 안산까지 출퇴근길에 흙탕물을 홀라당 뒤집어쓴 차에 신랑신부를 태울 수가 없어서, 깜깜한 새벽에 일어나 양동이에 뜨거운 물을 퍼담아 들고 나가서 골목 가로등 불빛 아래 손수 세차를 하면서 약간 서글프긴 했다. 친구 결혼식 때문에 세차하랴 꽃단장 하랴 새벽부터 부산을 떠는 나를 보며 부모님은 혀를 끌끌 찼다. ㅁㅅ이가 너 이 고생 하는 거 알아주기는 하냐고.

아직도 해가 뜨지 않아 어두웠던 오전 7시, 이미 살림집에서 함께 살고 있던 친구의 집 초인종을 누르자 신랑이 부스스 새집을 지은 머리로 문을 열어주었다. 심지어 신부는 자고 있었고... 그제야 일어난 두 사람이 부리나케 씻는 동안 나는 신랑신부 예복과 폐백 때 입을 한복 따위를 영차영차 미리 차에 실었다. (친구가 아니라 머슴이었나?) (내 생각에) 남성편력 및 방황 끝, 행복 시작이라 여겼던 친구의 결혼생활은 3년을 채우지 못했다. 남자의 성실함과 검소함은 친구에게 따분함과 궁상으로 비치기 시작했다. 화려하게 즐기는 삶의 습관을 친구는 포기하지 못했고, 꼼꼼히 모든 수입을 관리하는 남편 몰래 딴 주머니를 차느라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를 팔아 야밤에 놀러다니기를 거듭하던 친구는 결국, 무려 열살이나 어린 아르바이트생(수능 끝나고 호텔 주차요원으로 일하던)과 바람을 피우다 들통나 이혼했다. 결혼이라는 제도나 한 남자와의 약속 따위에 얽매일 수 없는 친구란 걸 나도 그 무렵 깨달았던 듯하다.

친구는 놀랍게도 그 문제의 남자친구와 거의 10년간 만남과 헤어짐을 거듭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은 친구에게 진리였다. 몇달씩 심지어 1년 가까이 연락이 없으면 연애든 일이든 잘 진행된다는 뜻이었다. 그러다 뜬금없이 연락이 와 만나자고 해 나가보면 어김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헤어짐의 아픔을 토로했다. 그러고는 어김없이 일주일 쯤 뒤에 헤헤거리며 전화를 걸어 다시 만나기로 했다는 기쁜 소식을 알렸다. 드물게 곁에 애인이 없을 때만 찾는 친구로 전락한 나 역시 그 친구를 어느 정도는 포기하고 있었다. 그냥 세월의 힘과 관성으로 견뎌주는 관계랄까.

타고난 사교술과 수완으로 친구는 꾸준히 사업 규모를 늘려가는 모양이었다. 피아노 연주도 현악기 편성을 늘려서 호텔 로비에서 연주하는 것뿐만 아니라 결혼식이나 여러 행사에도 불려다녔다. 그야말로 엔터테이너의 길로 접어든 친구는 후배 연주자들을 거느리고 양성하는 사업가로 변신해, 몇년 전엔 법인을 차렸다고 했다. 행사 연주 한번에 최소한 몇백만원을 벌어들이는 그 친구의 시각으론 골머리를 써가며 컴퓨터 앞에 앉아 '푼돈'을 버는 내가 한심했는지, 몇년 전까지도 내게 '차라리' 고액과외를 하지 그러냐고 안타까워했다. -_-;

우리 집에서 가까운 호텔에 행사가 있을 때나 간간이 서로 얼굴을 볼 수 있었던 친구가 연애고민 이외의 난감한 부탁을 해오기 시작한 건 작년부터였다. 엔터테인먼트 사업이란 것이 원래 열악한 자본금으로 시작해 인적자원으로 외부의 투자를 끌어들여 운영하는 것이라는데(친구의 설명이 그렇다), 당연히 수입이 불규칙할 수밖에 없어 간혹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한다는 길고 긴 푸념 끝에 친구가 화끈하게 말했다. 천만원만 빌려달라고. 보름 있다가 투자금 들어오면 갚겠다고. +_+ 누구나 통장에 그 정도 여윳돈은 늘 갖고 있어서 수시로 뺄 수 있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과거에 몇 차례 몇몇 친구에게 돈을 빌려준 경험으로 미루어, 친구에게는 그냥 주겠다는 마음이 없는 한은 돈을 빌려주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는 걸 알고 있는 나는 고민을 꽤 했다. 빌려줄까 말까의 고민이 아니라(물론 그럴 돈도 없었지만!), 어떻게 '잘' 거절해야 할까 고민이었다. 그냥 선뜻 선물로 줄 상황이 아니고서야 친구와는 돈 거래를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는 것을 납득시켜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나는 비겁하게 여윳돈이 없다는 변명과 사과로 친구를 돌려보내고 말았다. 그러면 할 수 없지 뭐, 라며 돌아간 친구는 그 일로 삐쳤는지, 또는 내가 필요 없어진 때문인지 몇달이 넘도록 연락이 없었다. 원래도 내 쪽에서 먼저 연락하는 법이 잘 없기 때문에 문득 생각이 나더라도 나 역시 잘됐다 싶을 정도였다. 오랜만에 만나서 돈 얘기나 하는 친구라니! 차라리 연애 고민 상담이 낫지... -_-; 그러다 올초에 또 한번 '딱 일주일만' 필요해서 그러는데 5백만원만 빌려달라는 연락이 왔다. 어휴... 급히 돈거래를 청하는 사람들은 어쩜 그렇게 변명거리가 다들 그렇게 똑같은지.

결국 나는 친구와 관계정리의 위험을 무릅쓰고 (어쩌면 그쪽을 바란 것인지도!) 미안하지만 친구와는 돈거래를 하지 않기로 했다는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말로는 이해한다면서, 그래도 자기를 그렇게 못 믿는다는 게 섭섭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던 친구는 알았으니 내게 다시는 돈 얘기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또 몇달이 지났건만 친구는 며칠 전 또 다시 '5백만원'의 용건으로 나를 찾았다. 그리고 이번엔 레퍼토리도 달라져 있었다. 요번 쇼케이스 진행하느라고 생각보다 비용이 많이 들어가서 그래. 오백이 안되면, 일단 삼백도 괜찮아. 너 설마 그 정도는 있지? 당장 너한테 없으면, 일주일 뒤에 드린다고 너희 엄마나 동생한테 얘기 좀 해봐라. 10일에 1억 투자 들어오기로 되어 있으니까, 딱 일주일만 쓰면 돼. 응?

친구의 억지에 기가 막혀서 성의 없이 대꾸하다 미안하다고 전화를 끊으려니 서글픔이 밀려들었다. 친구의 상황이 정말로 어떠하든, 그간의 역사가 어찌 되었든 이 친구에겐 내게 여유가 아주 많더라도 선뜻 천만원, 오백만원을 내어줄 수 있는 '관계'가 아니란 생각 때문이었다. 전화를 끊고 잠시 씩씩대던 마음으론 번호를 스팸등록 해놓을까도 싶었지만 그러지는 않기로 했다. 정말로 절실하게 돈이 필요한 상황은 누구에게도 닥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젠 친구의 번호가 뜨면, ' 또 애인이랑 헤어졌나?'라는 의문 대신 '또 돈 빌려달라고 할 건가?'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오를 것이고, 그래서 이미 우리의 관계는 무너져버렸음이 안타깝다. 수십년 된 우정이 겨우 요거냐고, 친구랍시고 그럴 줄 몰랐다고 그녀가 나를 욕하든 말든, 하는 수 없다. 나는 이만한 그릇의 사람인 것을. 고등학교 친구든 아니든 평생 가는 친구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고, 멀어지는 친구 또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만만한 대부업자로 여기는 친구 따위 나도 사절이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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