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한 금요일

투덜일기 2010. 11. 15. 14:12

지난 금요일 저녁의 일부는 마치 잠깐 딴 세상에 다녀왔거나 시간의 블랙홀 같은 데 빠져 요상한 경험을 하고 돌아온 느낌이었다. 서로 연관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나에겐 '신기하게' 느껴진 경험 두 가지.

갈까말까 좀체 끝나지 않는 나의 고민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는 듯이, 확인사살을 하듯 참석을 독려하는 담당자의 전화를 이틀에 걸쳐 받는 바람에 결국엔 약속 시간에 맞춰 뚜벅이로 집을 나섰다. 그런데 저녁 7시가 조금 못된 시간 강남의 어느 전철역에서 한강다리 쪽으로 걸어가는 동안 줄곧, 나 말고는 인도에 '민간인'이 하나도 없었다. 가로수나 가로등처럼 5미터 간격으로 양쪽에 줄지어 서 있는 경찰관들 빼놓고는. -_-; 그나마 이어폰을 꽂고 있었기에망정이지 멍하니 걸어가는 중이었다면 너무 어색해서 괜스레 발목이라도 삐끗할 것처럼 삼엄한 분위기였다. 더욱이 인도 바로 옆 차도에도 시내 방향으로는 차가 한 대도 지나가지 않았고 그냥 텅 비어 있었다. 반대편 모 호텔 앞쪽 차도엔 차들이 빽빽하게 서 있던 것과 대조적이어서 더욱 기묘했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한쪽 도로에만 차들을 지워버린 거나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이 들 정도였다. 드디어 내가 골목으로 꺾어져 들어가야할 무렵 즈음 경찰 오토바이가 한 대 앞장서 가더니 이어 비상등을 켠 검정색 세단 두 대가 휙 지나갔다. 어느 나라 국기인지 모를 소형 깃발을 양쪽에 휘날리면서. 

수십년 전 거국적인 행사나 귀빈 방문이 있을 때마다 걸핏하면 여의도광장으로, 경복궁 옆이나 광화문 앞길로 교복을 입은채 동원됐던 나의 학창시절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미 도로가 통제되어 몇 정거장쯤 전에 미리 버스를 내려 정해진 집결지까지 마냥 걸어가야 했는데, 주로 아침이나 대낮이긴 했어도 꼭 그렇게 경찰들이 줄지어 서서 '길'을 경호하고 있었다. 가깝게는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텅 비어 있던 평양 거리와 인도에 일사불란하게 도열해 진달래꽃을 흔들어대던 북한 주민들도 떠올랐다. 말도 안되는 '국격'이니 뭐니 떠들지 말고 차라리 그런 독재적인 사고방식만이라도 차별화를 두려 했다면 전 세계 외신에 또 한 번 서울과 평양을 혼동하게 만들 남부끄러운 장면을 연출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저들'은 참말로 이해가 안되는 족속들이다. 그렇게 높이려는 국격이 겨우 북한과 동격의 수준이라니... 북한이 세계적으로 누리는 독보적인 위상이 그리도 부러웠던 것일까?

출판 기념회 같은 자리에 많이 쫓아다니는 편이 아니긴 하지만 더러 가보면 그냥 뷔페 음식 차려놓고 간단히 인삿말이 오간 뒤 담소하는 분위기가 전부였다. 애당초 내가 담당자의 초대에 응했던 것도 그렇게 큰 부담은 없을 거라는 막연한 예상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금요일의 행사는 놀랍게도 단상에 마이크가 차려지고 공식적인 인삿말과 짧은 강연까지 식순에 따라 진행되는 엄청난 분위기였다. 심지어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이름표 달기'와 '일으켜 세워서 인사시키기'도 자행됐고, 2부엔 여흥을 돋울 초대가수도 등장했다. +_+ 안내되는 자리에 앉은 순간 이미 나 정도의 내공으론 참석해선 안될 자리였구나 싶었던 나는 마치 연예인 구경하듯 유명 번역가들을 좌우로 흘끔거리며 안절부절 못했다. 문인들이 이런저런 자리에서 서로 안면을 잘 트고 지내는 것과 달리 번역하는 이들은 웬만해선 서로 안면이 없음을 잘 안다며, 출판사 대표와 담당자가 곳곳에 앉아 분위기를 무마해주기는 했어도, 초중반엔 정말 민망하고 뻘쭘했다. 이날의 경험을 교훈 삼아 앞으로 다시는 뭣도 모른 채 그런 자리에 가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나마 수확이라면 저명한 번역가들도 어김없이 열악한 번역료와 불규칙한 수입과 자기관리와 '마감지연' 문제로 고민하고 있음을 깨닫고 동병상련의 기쁨을 맛보았다는 정도? ㅋㅋㅋ 아 맞다, 나 만큼이나 그분들도 '전문' 번역가라는 말을 싫어했다. 소설가 앞에 굳이 '여성'을 붙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번역 장르에 대한 은근한 비하의 느낌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뉘앙스는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리고 글과 말은 달라서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반드시 말을 잘하는 건 아니라고 믿고 있었는데, 거기 온 분들은 다들 달변이어서 놀라웠다. 계속 안면 있는 담당자와만 속닥거리다가 나중엔 나도 술기운으로 버텨내긴 했지만, 그날 지켜본 바에 따르면 '저명도'에 따라 사교성도 비례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니 나처럼 숫기도 없고 지명도도 떨어지는 인간이 얼마나 좌불안석이었을지! 아무려나 신기한 경험이었다는 것으로 외출 결과 보고 및 지난 일기 끝.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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