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투덜일기 2010. 11. 1. 12:14

변기에서 물이 샌다는 걸 처음 발견한 게 언제더라. 최소한 다섯달은 된 것 같다. 두달에 한번씩 나오는 상하수도 고지서의 금액을 두세번이나 예년과 비교하며 고민했으니 말이다. 처음엔 전달보다 만원쯤 더 많아진 금액을 보고도 여름이라 물을 많이 썼을 거라고 위로하며 넘겨버렸다. 그러다 급기야 두배를 넘어선 고지서를 받아들고도 계속 변기 수리를 미루기만 했던 데는 나름 핑계가 있었다.

우선은 동네 어귀에 있던 수리점이 문을 닫았다. 작년에 엄마네 화장실 수리하면서 받아둔 명함으로 곧장 전화를 걸었더니만 그 지경이었다. 그렇다면 어디에다 연락해서 사람을 불러야 하나, 난감해진 나는 에라 모르겠다 잠시 잊어버리는 쪽을 택했다. 고요한 밤에 유독 크게 들리는 졸졸 새는 물소리를 들으면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물부족으로 먹는 물도 없어 병에 걸리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퍼뜩 인터넷으로 변기 출장수리 회사를 알아보긴 했지만, 너무 거창한 느낌이 들어 꼬리가 내려갔다.

그러고 또 그간 너무 바빴다. 대체 마감중이 아닐 때가 언제 있었느냐고 주변에서 퉁박을 주기는 하지만 밀린 일들이 차곡차곡 쌓여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상황이라 심적으로 어찌나 부담이 됐던지 화장실 변기 수리 따위는 우선순위에서 멀찌감치 밀려나고 말았다. 차라리 변기로 이어지는 수도를 잠가놓고 물을 받아 붓는 쪽을 택하거나 엄마네 화장실을 다닐망정, 사람을 불러 견적을 받고 수리를 맡기는 번거로운 절차를 회피했던 거다.

그러다 문득 오늘 우편물 꺼내러 현관에 내려갔더니 문앞에 명함이 한장 떨어져 있었다. "@@누수탐지수리공사. 출장문의 환영." 유레카! 곧바로 명함을 집어와 전화를 거니 20분 만에 올 수 있다고 했고, 한시간도 지나지 않아 단돈 6만원과 커피 한잔 서비스로 모든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었다. ㅠ.ㅠ 이렇게 쉽게 해결될 일을 대체 난 몇달 간 끙끙댔던 것인가. 몇달 간 수리비보다 훨씬 더 많이 하수구에 흘려보낸 수돗물 값은 또 어떻고. 친절한 아저씨는 영수증을 끊어주며 수도사업소에 연락해서 팩스로 수리내역을 보내면 그간 더 낸 상하수도비를 얼마간 돌려받을 수도 있다고 권했지만, 내가 그런 어려운 일을 시도할 리가 만무하다. 그저 문제상황이 종료되었음이 기쁘고 감격스러울 뿐.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는데, 요즘 나의 행태를 보면 매사가 이런 식이다. 뭐든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고민만 하다가 결국엔 계속 미루고 또 미루다 실행에 옮기는 건 하나도 없어 늘 쫓기는 사람처럼 전전긍긍. 머리맡이며 탁자에 읽다가 말고 (내가 지금 한가롭게 책이나 읽을 때냐!) 던져둔 책이 몇권이며, 이 블로그에도 쓰다가 말고 (시답잖은 신변잡기로 블로그질 할 시간에 일 한 줄이라도 더 하지!)  비공개로 남겨둔 글이 몇개던가. 한숨.

이렇게 어영부영 11월. 올해도 겨우 두달 남았다. 여름부터 질질 새던 변기 문제를 하루아침에 뚝딱 해결해주고 돌아간, 내게는 슈퍼맨 같았던 누수탐지수리공사 아저씨처럼, 어디론가 전화만 걸면 질질질 흘리고만 사는 내 인생을 바로잡아주는 해결사의 도움이 절실한 게 아닐까. 하기야 변기수리 하나도 어디에 전화를 걸어야 할지 몰라 헤맨 기간이 다섯 달이니 그마저도 요원하긴 하다. 우선은 어디로든 전화를 걸 마음부터 다잡아야 하는데, 이놈의 전화공포증이 어딜 가나 문제다. 난 왜 어디든 전화 거는 게 이리도 싫은지 원. 이것 봐라, 또 전화 핑계를 대고 앉았다. 온갖 핑계와 변명으로 점철된 이놈의 마감인생, 아침부터 얼굴이 뜨겁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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