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덜일기'에 해당되는 글 503건

  1. 2010.12.26 주전자 12
  2. 2010.12.21 감기약 테라플루 10
  3. 2010.12.17 멀미 10
  4. 2010.12.14 1900분 8
  5. 2010.12.12 월동준비 21
  6. 2010.12.09 막내 프리미엄 18
  7. 2010.12.08 어제 썼다 사라진 글: 꿈 4
  8. 2010.11.26 몸값 18
  9. 2010.11.23 개 혐오주의자의 개 관찰 10
  10. 2010.11.19 비겁한 밥벌이 3

주전자

투덜일기 2010. 12. 26. 21:17

과학이나 상식으로 접근하면 말이 되지 않을 것 같지만 나 혼자 굳게 믿고 있는 편견 가운데 하나는 바로 물 끓이기. 물은 섭씨 100도에서 끓으니까 (여기서 고도나 물의 순도는 논외로 하자;; 복잡한 거 모른다) 30초를 끓이든 1분을 끓이든 5분을 끓이든 물의 온도는 똑같을 테고 성분이 달라지거나 하지도 않을 거다. 그런데 나는 주전자 꼭지에서 수증기가 팍팍 올라올 만큼 꼭 물을 '팔팔' 오래 끓여야만 커피 포함 모든 차를 맛있게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이 오랜 편견은 아마도 생수나 정수기가 생활화되기 이전에 수돗물로 모든 찻물을 끓이던 시절 수돗물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당연히 내가 원두커피와 친해지기 이전에 생겨난 것이고, 특히 인스턴트 커피를 탈 때는 반드시 해당되는 '진리'였다. 

내가 녹차를 몹시도 싫어하면서 떫고 비린내 나고 비위에 거슬리는 맛이 난다고 주장하면, 녹차 애호가인 친구는 내가 찻물 온도를 못 맞춰서 그런 거라고 코웃음을 치지만 그 친구가 청정지역에서 수행자들을 위해 재배한 특수 녹차를 다관까지 갖춰놓고 만들어줘 봐도 도무지 녹차는 내 취향이 아니다. 나도 집에서 왕비마마 녹차 만들어 드릴 때 물 뜨거우면 더 떫어지니까 충분히 식혀서 티백을 넣는단 말이닷! 드물게 드립 커피를 만들어 마실 때도 물의 온도가 중요하다는 얘기를 익히 들었기 때문에 드립 전용 주전자는 없더라도 일단 물을 팔팔 끓인 다음에 사기로 된 작은 주전자에 일단 옮겨 대강이나마 물의 온도를 90도쯤으로 맞춘(다고 생각한다 ^^;)다. 물을 붓는 게 아니라 아예 푹푹 오래 끓여야 하는 대추차나 둥글레차, 생강차 같은 건 말할 필요도 없다. 향긋하거나 구수한 냄새가 온 집안에 감돌 때까지 약한 불에 뭉근히 끓여야 제격이 아닌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집집마다 없는 집이 거의 없다는 무선주전자를 사고 싶지도 않고 전혀 필요를 느끼지도 않는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이미 탁 하고 꺼져버리는 경박함도 마음에 들지 않고, 일단 그렇게 끓다 만 물로는 커피믹스에 금방 부어도 맛이 없다니깐! +_+ 내가 근거 없는 이 이론을 제시하면 더러 동의를 하면서 무선주전자 작동 버튼을 한번 더 눌러 두번 끓인다는 이도 있다. 코코아든 커피믹스, 녹차든 홍차든, 캐모마일 차든 국화차든, 일반 주전자로도 물을 좀 덜 끓였거나 무선주전자로 물을 끓여 타면 뭔가 미묘하게 덜 된 맛이 느껴지는데, 이게 순전히 나의 무선주전자 불신 탓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특히 원두커피의 경우는 에스프레소를 희석할 때도 끓인 물을 적정온도로 식혀 부어야 향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 테고, 드립 전용 주전자까지 필요한 드립커피는 더 말할 것도 없으니 커피물을 팔팔 오래 끓여야 한다는 나의 주장은 순전히 억지이고 오류일지 모른다. 강릉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커피전문점 사장님도 전기 무선주전자로 끓인 물을 드립 주전자에 담아 (그 과정에서 적정온도인 90도가 될 거라고 했다) 커피를 만들더라. ㅋ 그저 내가 좀 구식이고 아날로그형 인간이고 사소한 데 집착하는 구석이 있다고 인정할 뿐이다.

문제는 자동 온도조절 장치가 있는 무선주전자와 달리 가스불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팔팔 끓이다가는 자칫하면 주전자를 태워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이미 내가 '해먹은' 주전자가 서너 개는 되는 듯하다. 나처럼 정신 나간 장단기 기억상실증 환자들을 위해 익히 발명된 '삐삐 주전자'가 있기는 하지만, 난 또 시끄러운 그 물건도 혐오하는 사람이다.-_-; 예쁘장한 법랑 주전자로 찻물을 끓어야 더 맛있게 마실 수 있는 걸 어쩌랴. 그래서 찻물을 올려놓고 수다를 떨거나 딴짓을 하다 허거걱 놀라 달려가는 경우가 간간이 있는데, 다행스럽게도 물이 다 졸아들지 않아 새로 끓이기만 하면 될 때도 있지만 심한 경우엔 법랑에 금이 갈 정도로 쇠가 달구어져 십년감수를 하는 경우도 있다.

작년에도 딸기 무늬가 들어간 법랑 주전자를 그렇게 망가뜨려 보냈건만, 얼마 전 아끼던 '에**' 주전자를 또 그렇게 해먹고 말았다. ㅠ.ㅠ 한두 잔 타기 위한 찻물을 올려 놓으면 반드시 그 옆에서 지키다가 임무를 완수해야 함을 원칙으로 정했으면서, 거의 1년 주기로 그 원칙을 까먹는 탓이다. 이쯤 되면 집집마다 아줌마들이 왜 무선주전자로 정착을 하는지 알 것도 같다. 차 한 잔 탈 물을 끓이는 데는 1분도 안걸린대고, 가스불을 켜면서 발생하는 유해가스도 없으니 탄소배출량도 적을 거라고 누군가 주장하던데, 그 진위는 몰라도 1년에 한번씩 주전자를 태워먹어 새로 사는 것보다는 그쪽이 환경을 위해서도 좋을 것 같긴 하다. 그래봤자 나는 또 일반 주전자를 사들이겠지만서도... 

쓰던 법랑 주전자를 태워먹은지 몇달 됐는데도 아직 새로 안(못)사고 엄마네 삐삐 주전자를 빌려다 쓰고 있는 이유는 무엇으로 살지 마음을 정하지 못해서다. 또 다시 편하고 익숙한 '에**' 주전자로 살것인가(그렇다면 또 어떤 무늬로??), 그냥 법랑주전자이긴 하되 별로 안 예뻐도 저렴한 것으로 부담없이 장만할 것인가, 아니면 이왕 사는 거 더욱 깜찍한 무늬가 들어간 고가의 유럽산 법랑 주전자를 살 것인가(이 또한 브랜드와 무늬가 여러가지다 -_-;) 우유부단한 마음으로는 쉽사리 결단을 내릴 수가 없다. 으휴. 앞으로 또 태워먹지 말란 법이 없으니 너무 비싼 건 안 사는 게 나을 것도 같지만, 또 고가의 주전자라면 아끼느라 더더욱 조심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러니 계속 갈팡질팡이지! 까짓 주전자 하나로도 꾸질꾸질 청승맞게 (문득 하이킥 해리 생각나는 조어로다;) 이러고 고민하는 내가 참 싫다. 주전자 태워먹는 나는 더욱 싫고! 물 끓이는 것조차 집착하는 내가 제일 싫은 건가? 아무려나 차 마시는 기분이 안 나서라도 얼른 주전자를 사긴 해야할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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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약 테라플루

투덜일기 2010. 12. 21. 01:44

감기에 걸려도 웬만해선 병원도 안 가고 약도 안먹고 버티며 '잘 먹어서 낫는' 식탐 요법을 주로 찾는 나지만 '레몬차처럼' 뜨거운 물에 타 마시는 감기약이 있다니 한번 먹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어제부터 콧물이 심해 줄줄 흘러내리지 않으면 코가 꽉 막혀 제대로 호흡이 곤란한 지경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먹어보겠단 생각도 안했겠지만 말이다.

요즘 그 감기약이 유행(?)이라지만 과연 우리 동네 약국에서도 팔려나 약간 의아했는데, 확실히 인기품목인지 "테라플루라는 감기약 혹시 있나요?"라고 예상 질문까지 연습하고 간 것이 무색하게도 약사 바로 앞 카운터에 가격표까지 붙은 채 따로 진열되어 있어 말 한 마디 없이 살 수 있었다. 밤과 낮 용으로 나뉘어 한 상자에 각각 6천원. 처방전 없이 살 수 있는 종합감기약 종류는 10알 한 상자에 2-3천원쯤이면 살 수 있는 데 반해 차 형태라서 아무래도 좀 비싸군 싶었다. 

어쨌거나 얼른 물을 끓여 찻잔에 담아 한 봉지 타 마셔본 첫 소감은 '맛없다!'였다. 레몬차 맛이 나기는 하는데 뒷맛이 몹시 쓰고 떫은 느낌. 인공적인 단맛에 뒤이어 섬뜩한 쓴맛이 파고드는 애들 감기약 시럽과 비슷한 맛이랄까. 으윽. 큼지막한 알약을 목구멍으로 삼키는 것도 못할 노릇이지만, 나로선 그 달달씁쓸텁텁한 감기약을 차로 한 잔 다 마시는 것도 꽤나 고역이었다. (차라리 한번에 꿀꺽 삼키는 알약이 낫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음) 하지만 벨로도 처음엔 맛 없어서 외면했다가 두번째 다시 시음한 뒤 맛있다고 여겼다니 나도 첫인상에 너무 얽매이진 않기로 마음 먹었다. 첫술에 배부르랴. 내가 걸린 감기의 주요 증상은 어제부터 두통과 콧물, 코막힘이었는데 약을 먹고 나선 일단 코막힘 때문에 입으로만 숨을 쉬어야 했던 상황은 좀 나아진 느낌이었다. 그러나 콧물은 금세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4-6시간 간격으로 먹으라는 복용 설명에 맞춰 인상을 팍팍 써가며 두잔째 마시고난 지 세 시간쯤 지난 지금, 한 시간 전부터 주체할 수 없는 콧물의 공격으로 계속 팽팽 코를 풀어대고 있다. 나에겐 별로 맞지 않는 감기약인가? -_-;; 실은 제약회사를 탐탁지 않아 하는 나의 심리가 약효를 방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처음 약을 타서 마시기 전에 복용 안내를 확인하다 보니 제약회사가 하필 '노바티스'였다. 일찌기 장 지글러 선생께서 탐욕스러운 다국적 제약회사의 선봉으로 고발한 바로 그 회사란 걸 알고 나니 어찌나 기분이 찝찝하던지. 하기야 유명 제약회사 치고 탐욕스럽지 않은 데가 없지만, 노바티스는 특히 백혈병 치료약 글리벡으로 전세계적으로 치사한 짓을 벌이고 있는 곳인데...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백혈병 환자들이 청원한 가격 인하 청구 때문에 소송중일 거다.) 약에 대한 믿음이 발휘하는 플라시보 효과가 최소한 30퍼센트나 된다는 걸 감안하면, 노바티스에 대한 불신과 마뜩찮음이 약효에 어느정도는 영향을 미쳤을 것 같다. ㅋ (언제부터 그렇게 정치적인 걸 그리 꼼꼼히 따졌다고!)

하긴 아래 포스팅한 네스프레소 기계도 말 나온김에 정말 확 질러? 싶은 충동에 좀 더 알아보니 네슬레에서 만든 거라고 했다. 네슬레 또한 가난한 나라에서 분유로 장난 치고 노동자 핍박하는 악덕 다국적 기업이라는데, 정치적으로 상당히 진보 성향을 띠고 있는 클루니가 그런 회사 광고를 찍었다니 급 실망스럽기도 하고, 과연 모르고 찍었을까 알고도 그냥 찍은 걸까 마구 궁금해졌다. (하기야 나도 <탐욕의 시대>를 읽기 전엔 인스턴트 커피 땡길 때 맥심 커피 대신 꼭 테이스터스 초이스 커피를 샀었으니 남 말 할 처지가 아니긴 하다.) 어쨌거나 나는 몰랐으면 모를까 알았으니 훗날 캡슐형 에스프레소 머신을 사게 되더라도 네스프레소는 사지 못할 거다. 조지 클루니와 광고만 소비해 주는 수밖에. -_-; 

트랙백할 욕심에 감기약 얘기 쓰다가 갑자기 장 지글러 선생 타령하고 있는 걸 보면 코를 하도 풀어대 정신이 없는 건 분명하다. ㅎ 암튼 겨우 두 봉다리 마셔본 결과로는 별로 쓸만하지 않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며, 특히 가격 대비 효용을 따진다면 괘씸할 정도다. (병원 거부증을 참아내고 차라리 동네 의원엘 갔더라면 진료비와 약값을 다 포함해도 4-5천원 안쪽이었을 텐데! 아깝다, 만이천원 -_-;; 그리고 더더욱 아깝다, 매달 내는 나의 건강보험료 십몇만원 ㅠ.ㅠ)  그래도 이왕 산 거, 끝까지 마셔볼 작정이긴 하다. 밤 약은 잠 올까봐 아직 못 마시고 있는데 그건 좀 약효가 다르려나 기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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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미

투덜일기 2010. 12. 17. 01:19

어렸을 때는 제법 차멀미를 하는 편이라 가까운 친할머니댁에 갈 땐 아무렇지 않아도 한강을 건너가야 하는 외할머니댁에 갈땐 엄마가 꼭 비닐봉투를 가방에 챙겨넣고 다녔다. 그렇다고 매번 멀미를 하는 건 아니었고, 운이 좋아 자리에 앉아 버스 창문을 열수 있다든지 기분이 좋은 날은 멀쩡했던 반면, 기분이 별로인 날엔 속이 비었든 찼든 멀미로 괴로워하던 아이였던 듯하다.

자라면서 괜한 차멀미는 거의 사라졌지만, 지금도 혹시라도 차안에서 글씨를 보면 거의 10초 안에 멀미 기운을 느낀다. 나의 조카들은 워낙 어려서부터 제 아빠가 모는 자동차를 차고 다녀서 그런지, 달리는 차안에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책을 읽기도 하지만 나는 문자 메시지만 좀 오래 들여다보고 있어도 멀미를 하는 식이다. 글씨만 안 읽으면 아무리 차가 흔들려도 길이 막혀도 이젠 멀쩡한데! (반면에 지하철은 너무 오래 타면 멀미 증상이 나타난다. 특히 지하구간이 30분 이상 지속되면 못견디는 듯;; 그게 지하철 멀미인지 아니면 폐소공포증의 일환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_-;)

대학 수학여행 때는 경비절약을 하느라 목포로 기차를 타고 가서 다시 배로 제주도에 들어갔다가 올 때만 비행기를 타는 코스가 정석처럼 여겨졌다. 해서 우리는 목포항(여수항이었던가 -_-a)에서 저마다 귀밑에 동그란 멀미 패치 키미테를 붙였고, 일부 여학생들은 그러고도 마시는 멀미약까지 삼켰는데, 인솔자로 따라간 할머니 교수가 우리를 비웃었다. 당신은 운전을 하기 때문에 멀미를 안하신다나. 원래 운동신경이 뛰어난 사람들은 멀미를 안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미 차멀미와는 작별한지 오래였던 나도 혹시나 걱정스러워 키미테를 붙이기는 했었지만, 그 말에 자극을 받아 나중에 제주도에서 유람선을 탈 때 그냥 타봤더니 아무렇지도 않았고 차멀미 뿐만 아니라 배멀미도 극복해냈다고 속으로 뿌듯했다.

헌데 요즘 다시 버스를 타고 다닐 때 멀미하는 날이 많아졌다. 다 아이폰 때문이다! 예전 휴대폰 있을 때도 버스에서 문자를 재빨리 확인하고, 또 버스가 정류장에 서는 시간을 활용해서 재빨리 답문자를 보내는 일은 수시로 있었다. 음주운전 만큼이나 위험하다는 건 알지만 운전 중에도 문자를 확인하고 보내는 걸 자랑스레 여기기도 했고. 물론 눈치없이 길게 컬러메일을 보내오는 경우엔 두어줄 읽고 얼른 창밖을 응시해 멀미를 방지하는 기술을 적용하면 그만이었다. 워낙 휴대폰 자판이 손에 익어 운전중이든 버스를 타고 가는 중이든 답문자를 찍는 건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았었고...

하지만 아이폰의 터치 자판은 가로로 돌려도 짧은 문자메시지 하나 찍어 보내기가 여전히 수월하지가 않은 데다, 문자와 상관 없이 버스만 타면 습관적으로 이것저것 어플을 눌러 확인하는 버릇이 문제다. 뭘 그리 중요한 메일 확인할 게 많다고 노상 메일함 열어보고, 트위터다 페이스북이다 열어보고 앉았는지 원... 가뜩이나 올해 부쩍 노안이 심해져서 눈이 금방 피로해지는 편인데 흔들리는 버스에서 휴대폰을 갖고 놀려니 왜 멀미가 안 나겠나.

아까  요가학원 나가면서 버스에서 또 습관적으로 아이폰질 하다가 문자 몇개 주고받았더니 곧장 멀미가 쏠려 반성하고 집어 넣었지만, 메슥거리는 속이 밤중인 지금까지도 가라앉지를 않고 있다. 저녁까지 소화 잘 안되는 걸 먹어서 그런가... 버스에서 글씨 오래 보면 반드시 멀미한다는 걸 알면서도 대체 나는 매번 아이폰을 꺼내드는지 새삼 화가 나면서, 공개적으로 자아비판을 해야할 사안이라고 느꼈다. -_-; 인터넷 중독에 이어 이젠 아이폰 중독까지 되면 정말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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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분

투덜일기 2010. 12. 14. 11:59

발신 번호가 길고 복잡한 것으로 보아 국제전화임이 분명한 전화가 두번이나 오다 받으면 아무말 없다가 끊기고 또 받으면 아무 소리도 안하다 끊어졌다. 해서 또 그놈의 보이스피싱인가 지레 겁을 먹고 이맛살을 찌푸린 채 전투태세를 취하고 전화기를 노려보며 기다렸더니, 이번엔 또 컴퓨터방 전화가 울렸다. 아침 댓바람부터 이리로 전화를 거는 이 역시 대부분 텔레마케터들이라 번호부터 확인했다. 아하. 이번에도 국제전화는 분명한데, 지역번호가 낯익은 친구 전화였다. 

미서부에 사는 친구가 아는 사람에게 새로 전화카드를 샀는데, 대체 얼마 짜리인지 몰라도 아 글쎄 한국이랑 1900분이나 통화할 수 있는 카드란다. +_+ 한국으로 전화할 사람이 나밖에 없다고 했더니만 아예 휴대폰에 핀번호를 다 입력해주었으나, 그 단축번호로 전화를 거니 자꾸 에러가 나서 운전하다 말고 수첩 꺼내 일일이 그 번호를 다 눌렀단다. 아무리 핸즈프리로 통화를 하는 거니 상관없다지만, 그래도 운전중엔 위험하다고 일단 끊고 다시 통화하자고 추임새처럼 반복하면서도 수다가 길어져 LA에서 고속도로 탔다는 애가 통화 끝날 때쯤엔 집에 다 와간다고 했다.

1시간 가까이 통화를 했는데도 친구가 음화화홧 웃으며 아직도 1800분 넘게 남았으니 염려 말란다. 앞으론 자기가 전화할 테니까 쓸데없이 내쪽에서 전화하지 말라고도 당부했다. 셈에 약한 나는 1900분이면 대체 몇시간인지 감도 잡히질 않는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휴대폰 요금제에도 무료음성통화가 200분 들어 있는데, 워낙 전화질을 꺼려하다보니 노상 남아돌아간다. 데이터용량처럼 음성통화도 다음달로 이월되면 좋겠다고 생각해보지만, 지지난달엔 무려 130분이나 남았다고 말일날 문자가 왔었고, 지난달엔 분발하는 의미로 악착같이 휴대폰을 써댔어도 40분이나 남았던 걸 감안하면, 나 같은 사람은 음성통화량을 이월시켜줘도 다 못쓰고 점점 불어나 오히려 부담만 느낄 것 같다. 

85년도에 친구가 이민갔을 때만 해도 서로 말소리가 한참 뒤에 전달되는 션찮은 통화품질의 국제전화로 몇분 얘기 안했는데도 전화요금이 몇만원씩 나왔으므로, 그땐 정말 급한 일이나 친구 생일날 축하 전화가 아니고선 선뜻 전화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요샌 대체로 국제전화 요금이 싸져서 TV 광고처럼 굳이 저렴한 회사를 찾아 누를 필요도 없다. 자주 걸지도 않는데 무엇하러 숫자 하나라도 더 눌러서 실수의 가능성을 높인단 말인가. 헌데 알뜰한 친구는 나와 다르다. 얼마 전까지 친구는 나와 통화를 하려면 반드시 국제전화 정액제를 쓰고 있다던 언니네 집에 가서 전화를 걸었다. 한달에 10불쯤 내면 100분이 무료통화라던가. 그 이전에는 홍보용으로 나눠주는 전화카드를 주로 이용해 전화를 걸었다. 나도 여행갈 땐 전화카드를 사가지고 가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일일이 핀번호를 입력해야 하는 게 귀찮아서 나중엔 그냥 신용카드 전화기를 찾아 쓰거나 좀 비싸도 짧게 끝내지 싶어 호텔전화를 그냥 썼다. (그러고 보니 휴대폰 로밍 같은 거 불가능하던 시절 얘기다 ^^;)

새로 전화카드 사업을 시작한 지인을 돕느라 산 거라지만 1900분짜리 전화카드는 항상 검소하고 알뜰한 친구에겐 엄청난 소비가 틀림없다. 그리고 우리 둘의 요즘 통화 빈도수로 볼 때 그 시간을 다 쓰려면 아마 몇년이 걸릴지도 모르겠다. -_-; 그 카드 다 쓰기 전에 꼭 내가 가든 니가 오든 2주짜리 휴가계획을 잡아보자고 아련한 꿈을 수다로 풀어내다 전화를 끊었다. 1900분. 단순한 계산도 서툴고 아둔한 내 머리로는 거의 영원한 시간처럼 느껴지는 든든한 쌈짓돈 같은 게 생긴 기분이다. 친구가 돈 버렸다고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새해 인사 전화는 내가 먼저 걸어야겠다. 크리스마스 카드 겸 편지라도 새삼 쓰면 더욱 좋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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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동준비

투덜일기 2010. 12. 12. 23:57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어서 몰랐는데, 오늘은 서울 최저기온이 영하6도였대고 내일모레는 영하 10도까지 내려가 한파주의보가 발효될 예정이란다. 말만 들어도 부르르 몸이 떨리는 영하 10도라는 숫자에 벌써부터 어깨가 움츠러든다. 겨울만 되면 남반구로 도망치거나 동면하고 싶다는 충동이 드는 여름형 인간인 나는 통일이 된다고 해도 중강진 같은 데선 절대로 살아남지 못할 것 같다. 암튼 본격 겨울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집안을 둘러보니 제대로 월동준비를 해놓지 않았다. 내가 작업할 때 발치에 놓아두고 쓰는 작은 전기난로야 없어서는 안될 한겨울 필수품이고, 선풍기처럼 생긴 온열기는 내놓아도 거의 쓰는 일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꺼내 놓아야 마음이 놓이는데 말이다. 올초에도 한껏 게으름을 부리다 봄이 다 지나가도록 난로를 방치하다 간신히 넣어두었는데, 계절을 바꿔 이어지는 게으름은 노상 내 뒤통수를 친다. 겨울용품은 이상스레 봄기운이 완연한 뒤에도 잘 안치우게 되서, 자동차 털방석도 봄에 남들이 눈치 줄 때까지 깔고 다녔다. 오래 된 차라서 요즘 신형 자동차처럼 자동차 시트에 열선이 안깔려 있기 때문에 나처럼 추위로 엄살 떠는 인간은 털방석이 필수인데, 그동안은 엉덩이 시려운 줄도 몰랐구나야. 

아파트 같은 데와 달리 낡은 주택은 구석구석 찬바람 새어들어오는 데가 많아서 원래는 엄마 방 문풍지도 갈아 붙였어야 했다. 창틀과 창문까지 새로 단 내 방과 달리 왕비마마 방 창문은 단열이 영 시원찮기 때문이다. 나야 아무리 추워도 매일 잠깐은 창문을 열어두어야 숨쉬기에 지장이 없지만, 방문으로 환기시키면 된다고 주장하시는 왕비마마의 방은 아버지 계실 땐 아예 겨우내 밀봉하기도 했었는데, 그것까지 내가 도맡기엔 일이 너무 크다. 그래도 작년엔 스티커 떼서 붙이기만 하면 되는 문풍지 사다가 창문틈을 죄다 막아 드렸건만 올해는 정말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난로를 틀어대서 전기요금을 더 내든, 보일러를 틀어대서 가스비를 더 내든 전체 난방비로 따지면 그게 그거니까 겨울엔 그냥 절약하지 말고 마음 편히 따뜻하게 살자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겨울엔 이산화탄소 배출량이고 뭐고 일단 사람이 살아야하지 않겠냐고! (추우면 난 정말 살기가 싫다. ㅠ.ㅠ) 영하 10도를 넘어가면 온종일 휭휭 돌아가는 낡은 보일러도 쯤 불쌍할 정도다.

사람의 체온이 참 훌륭한 난로여서 넓지도 않은 집이건만 오도카니 두 모녀가 서성거릴 때는 똑같이 보일러 온도를 맞춰놓아도 어쩐지 썰렁한 느낌인데, 동생네가 놀러오면 금세 후끈후끈 열기가 감돈다. 애들이야 워낙 에너지로 똘똘 뭉친 불덩이라 쳐도, 그러고 보니 제일 뜨거운 인간난로였던 아버지가 계실 땐 세 식구라도 그렇게 춥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양털 실내화를 못 벗는 날씨에도 아버지는 반팔 속옷바람으로 돌아다니시는 양반이셨으니 오죽할까. 하기야 3년 전만 해도 이런 월동준비 따위엔 신경조차 안써도 되는 편한 팔자였구나. "아빠, 춥다!"라고 한 마디만 하면 그만이었던 그때를 그리워하는 게 이런저런 귀찮음을 피하려는 이기심 때문일까봐 문득 죄스럽다. 스산한 마음엔 그저 보일러 온도나 올릴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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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 프리미엄

투덜일기 2010. 12. 9. 21:37

어제 할아버지 제사를 마치고 모두들 헤어져 돌아가는 순간, 주차장에서 내가 조카들을 한번씩 더 껴안고 뽀뽀를 주고받자, 막내고모가 외쳤다. "나두, 나두!" 나는 씩 웃으며 나보다 아홉살 많지만 항상 내가 뭘 더 챙겨줘야 한다고 느끼는 막내고모를 껴안고 뺨에 입을 맞춰주었다.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주면서. 생각해보니,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도 명절이나 제삿날 밤에 헤어질 때, 아버지가 열여덟살이나 터울이 나는 막내동생에게는 각별히 꼭 포옹과 입맞춤으로 작별인사를 했던 것 같다. "우리 막둥이, 잘 가라"고 하시면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아계셨을 때 특별히 막내딸을 더 챙긴 것이야 말할 것도 없다.

겨우 9살 차이나는 고모와 조카 사이가 어렸을 땐 꽤나 경쟁적이었다는 것도 같은데, 내가 기억하는 한 막내고모는 거의 내 우상이었고 스무살 무렵부터는 어쩐지 맏이인 내가 막내인 고모를 돌봐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말투부터 상냥함과 애교가 뚝뚝 떨어지며 하늘 끝까지 여성스럽고 연약하고 다소곳해서 내가 봐도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막내고모를 씩씩한 내가 지켜줘야 한다고 느꼈달까. 물론 고모쪽에선 그래봤자 땅꼬마 조카라고 생각했겠지만 말이다. 

요즘에야 형제들 수가 적어서 막내란 존재의 개성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 모양이지만, 맏이인 내가 보기엔 확실히 막내가 달라도 많이 다르다. 우리 막내고모로 말할 것 같으면, 무려 8남매의 막내딸이고 (할머니가 마흔 다섯살에 낳으셨다) 제일 큰 언니와는 스무 살도 넘게 차이가 나는 완전 늦둥이라, 지금까지도 온 가족이 애틋하고 안쓰러이 여기는 애교쟁이 막내의 개성이 극대화된 경우다. 천사표이신 나의 작은 엄마들은 다섯이나 되는 시누이 가운데 유일하게 막내고모를 위해선 지금도 번갈아가며 김치를 담가다주신다. 14년 전에 할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지금까지 주욱. (막내고모 요리솜씨가 엉망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예술 하는 사람들은 요리도 잘하나? 의아할 정도다;;)  울 엄마도 건강하실 땐 밑반찬 만들어가지고 아버지랑 같이 수시로 막내고모네를 살폈다. 뭘 좀 제대로 먹고 살기나 하는지 모르겠다면서. 우리 집안에서 막내란 그런 존재인 것이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어쩐지 보살펴주어야 할 것 같고 이유없이 애틋한. 

막내라서 본능적으로 애교와 귀염성이 많기 때문에 부모와 형제들의 사랑을 더 받는 것인지, 아니면 풍부한 애정 덕분에 막내들이 맏이와는 다르게 애교와 붙임성 같은 것들이 개발되는 것인지 나로선 통 모를일이다. 하지만 나의 막내동생을 보아도 어려서부터 무뚝뚝한 두 맏이와는 달랐다. 큰동생은 둘째이긴 해도 맏아들이네, 장손이네 하는 말을 듣고 자라서 그런지 맏이로서의 성격이 강한 편이고, 나와 마찬가지로 애교 따윈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저 자존심과 똥고집만 내세울 뿐. 삼남매가 뭐든 잘못을 하거나 싸웠다는 이유로 회초리 맞을 일이 생기면, 나와 큰동생은 '잘못했어요' 소리를 안하고 꿋꿋하게 정해진 매를 다 맞는 편이라면, 막내는 딱 한대 만 맞고도, 아니 심지어는 자기 맞을 차례가 되면 벌써부터 울음바람에 엄마를 와락 끌어안으며 잘못했다고 싹싹 빌어서 매를 피했다. 우리들 눈에 그게 얼마나 얄미워 보였던지!! 엄마 목을 끌어안고 돌아서서 막내녀석이 우리에게 혀를 쏙 내밀어 보였던 것도 같고...  -_-;  하지만 어려서도 나는 대체로 막내가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매일 저녁 좁은 단칸방에서 노래와 춤으로 재롱을 부리며 온 가족을 즐겁게 해주었던 것도 항상 막내였다. 나와 큰동생은 엄마 아빠 밖에 없는데도 앞에 나가서 노래 한 마디 하는 게 어찌나 어려웠는지 원. 심지어 막내동생은 요즘도 두 아들을 데리고 우리 앞에서 가끔 최신 유행하는 아이돌 춤을 시범 보이며 귀여움을 떤다. ㅋㅋㅋㅋ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역시나 막내인 그의 배우자까지도 춤연습을 하며 논다는 것 같다.)

나의 조카들을 봐도 그렇다. 겨우 둘씩이라 맏이와 막내로 구분하기도 좀 뭣하지만, 집집마다 첫째와 둘째는 판이하게 성격이 다르다. 둘째들은 하나같이 애교가 많고 붙임성이 뛰어나고 눈치가 빨라서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첫째들은 뻣뻣하고 자존심만 강한 데다 융통성이 없어서 만날 엄마랑 싸운단다. 심지어 나의 올케들은 둘다 '막내'라서 맏이 특유의 애교 부족과 무뚝뚝함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맏이인 내 눈엔 위기를 모면하는 약삭빠른 둘째들의 아양떨기가 귀여우면서도 가끔 얄미운데 말이다!

어쨌든 막내는 막내고 맏이는 맏이라서, 각자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긴 하다.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은 없지만, 확실히 아픔에도 차이가 있다는데 어쩌란 말인가. 어젯밤 왕비마마도 실토하셨다. 깨물면 새끼손가락이 제일 아프고, 엄지손가락은 별로 안아프다고. (시범까지 보이며;;) 그래서 맏이인 나와 큰동생의 경우엔 뭘 하든 믿게 되고, 약간씩 못미더운 부분이 있더라도 크게 걱정이 안되는 반면에, 막내의 경우엔 그저 안쓰럽고 염려스럽고 어떻게든 좀 더 챙겨줘야 할 것 같다고 말이다. 딸인 나와 달리, 두 형제 사이엔 은근한 경쟁심리가 있는 걸 알기 때문에 내가 왕비마마께 그렇게 티나게 굴지 좀 마시라고 했더니,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나랑 큰동생은 울 할머니가 키우셨는데, 막내는 당신이 직접 키워서 좀 남다른가보다고. -_-; (왕비마마는 막내를 낳고 비로소 직장을 관두고 전업주부의 길로 들어섰다.)

물론 막내라도 맏이같은 성품을 개발한 이도 있을 테고, 가족 내의 위치를 티내지 않고 사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우리집 맏이와 막내들을 보면 막내 프리미엄이란 게 존재하는 것이 확실하다. 맏이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신비로운 힘과 재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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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낮에 포스팅했다가 이상스레 사라진 글을 얼음배님의 도움으로 찾았다. 시답잖게 끼적인 신변잡기 잡문이라도 기껏 써놓은 글이 없어지니까 마치 소지품 하나를 잃어버린 것처럼 황당하고 기분이 나빴는데, 이렇게 찾고보니 딱 분실물 회수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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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순이 답게 꿈도 없이 (단순히 기억을 못하는 거라지만 암튼;;) 깊은 잠을 푹 자는 게 좋은데, 요샌 자고나면 뒤숭숭한 꿈이 기억난다.

아래층 똥개임이 분명한데 모양새는 셰퍼드인지 누렁이인지 모를 커다란 개한테 물리기 직전인 상황. 나는 놈의 머리통을 양손으로 움켜쥐고 얼어붙어 있다. 놈은 자꾸만 그 무서운 아가리를 벌리며 고개를 돌려 내 손을 물어뜯으려 하고, 나는 징징 울면서 개의 머리통을 놓지도 못하고 코앞으로 다가온 개 이빨에 아득했던 느낌. 그야말로 개꿈이다. 일주일도 더 지났는데 지금도 기억이 선명해 몸서리가 처지는 걸 보면 아래층 개에 대한 나의 공포가 어지간한 모양;;

자전거를 타고 어디론가 달려가는 길인데 자꾸만 난데없이 벽이 앞을 가로막아 쾅 부딪혀 나동그라진다. 거기서 꿈이 끝나면 좋으련면 카트라이더 게임도 아니고 어느새 멀쩡해진 난 또 페달을 밟고 있고 높은 시멘트 턱이나 벽에 또 온몸으로 부딪친다. 막 아파하며 계속 자전거 사고를 반복하다 마지막에야 비로소 소스라치며 깨어났다. 이 나이에 키가 크려나, 쳇. 체인에 기름만 쳐놓고 가을 내내 단 한번도 못(안)타고 겨울을 맞은 느루에 대한 나의 죄책감이 불러낸 꿈이라고 자가진단을 내렸다.

장소는 학교. 환경미화 상태로 봐선 초등학교인 것 같은데 나를 포함한 온갖 나이의 학생들이 만들기 수업을 하다가 사이렌 소리에 복도로 나가보니, 새까맣게 전투경찰들이 몰려와 구둣발과 방패를 바닥에 찍으며 쾅쾅 소리를 내 겁을 주고 있다. 나는 소국(?) 한 줄기를 들고 미술관 복도 같은 곳으로 이리저리 달아나다가 전경을 피해 어느 책상 구석으로 숨어든다. 반대편에서 살금살금 내쪽으로 오려는 어린 학생들한테 움직이지 말라고, 그러다 다 들킨다고 화를 내다가 깨어났던가... 이 꿈은 어수선한 시국탓이렸다.

원고마감 때문에 30시간 계속 깨어있다가 시체처럼 쓰러졌던 어제 저녁에 잠시 눈을 붙였을 땐 그냥 계속 이리저리 쫓겨다녔다. 누가 쫓아오는지도 모르면서 계속 뒤를 돌아보며 달아나는데 배가 어찌나 고프던지. 뭘 좀 먹으면 다리 놀림이 빨라질텐데 싶어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꿈에서도 식탐이라니. ㅋㅋㅋ

초절정 마감중이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블로그질은 줄곧 부지런히 하는 인간인데 일요일 새벽 난데없이 모니터가 먹통이 되는 바람에 (하드가 안 나간게 얼마나 다행인지!)
동생네 모니터를 떼와서 번역하던 파일을 옮기는 삽질을 해야했고, 노트북으로 작업은 가능했으나 어쩐 일인지 노트북은 인터넷선을 인식못하는 만행을 부렸다. 해서 어제 또 다시 동생네 모니터를 공수해 와야 했고, 오늘에야 비로소 급사죄와 함께 일부 원고만 쏘아주고는 시방 또 이러고 있다.

이참에 컴퓨터를 새로 살까도 생각했으나, 프로그램 깔고 파일 옮기고 어쩌고 하는 과정에 들일 시간이 아까워서 일단 점심먹고 나서 모니터나 하나 급히 사올 작정. -_-;; 요번엔 온라인으로 사고 택배 기다릴 여유도 없다. 잊지 말고 매일매일 원고 백업할 것.

마음이 이렇게 콩닥콩닥 바쁘니 개에 물리고 자빠지고 쫓기고 하는 꿈을 안 꿀 리가 있겠나.
설상가상 내일은 할아버지 제사다. 며칠 전에 친척분들한테 미리 죄다 연락해야 하는 임무를 잊고 있던 탓에 어제 오늘 어른들한테 전화로 계속 혼났다. 왜 하필 동생네는 또 이사를 가가지고 말이지. 아침 내내 주소와 길 설명하느라 문자를 수십통 날렸다.

아, 12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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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값

투덜일기 2010. 11. 26. 14:40

처음도 아니고 두번째 계약인데 굳이 출판사로 나오라고 할 때 알아봤어야 했다. 2시에서 3시 사이에 아무때나 오라더니만 아침부터 일찌감치 다시 전화를 해서 나의 단잠을 깨워 2시까지 오라고 콕 찍어줄 때부터 조짐이 안좋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재미없으니 시리즈물의 계속 출간을 재고해보라고 내가 충심어린 부탁을 했던 청소년 소설의 두번째 책을 얼떨결에 계약하고 돌아와선 스스로가 한심해 엊저녁부터 계속 제머리를 쥐어박는 중이다.

어차피 책이 잘 팔릴지 안 팔릴지 예측하는 혜안 따위는 갖추지 못한 인간이니 출판사에서 계속 시리즈를 내겠다면 번역은 내가 맡아야한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중간에 어떤 문제가 있든 시리즈물의 번역자가 바뀌는 건 독자를 위해서도 좋지 못한 일이다. 다행히 편집 담당자는 책이 재미있다고 했으니, 내가 청소년물을 즐기기에 너무 '늙어'버렸나보다고 짐작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다음책을 논의하러 갔었던 것이고.

하지만 시장에서 콩나물값 깎는 것도 아니고, 사람 불러다가 계약서까지 뽑아놓고 눈앞에서 원고료를 깎는 건 너무했다. 이메일이나 전화로 그런 의향을 물어왔다면 내가 아무리 소심하다고 해도 당연히 거절했을 것이다. 다른 데는 내년 계약 건부터 어렵더라도 조금씩 몸값을 올려주는 형국인데 새삼 번역료를 깎아달라니. 시리즈물의 번역료를 권당 달리할 수도 있다는 건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번역가별로 몸값이 거의 정해져 있긴 해도 책에 따라 번역료가 약간씩 조절되는 경우는 물론 있다. 분량이 너무 엄청난 책의 경우 출판사에서 미리 양해를 구하는 수도 있고, 상대적으로 번역하기 쉬운 책과 어려운 책은 출판사에서도 이미 알고 있지 않겠나. 지난번 계약도 가벼운 '청소년물'임을 빌미로 나로선 최대한 양보한 선에서 번역료를 책정했던 터였다. 하지만 출판사에서 책정한 제작비에 맞춰서 두들겨 패듯 가장 만만한 '인건비'인 번역료를 막무가내로 깎으려 드는 곳을 간혹 만나게 되면 정말이지 맥이 쭉 빠진다. 시리즈물이라서 뒷권은 번역하기 더 수월할 거라는 짐작의 근거는 대체 무엇인지.

일단 사무실로 불러들이면 내가 소심해서 면전에서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따위의 극적인 행동은 하지 못할 거라는 걸 저쪽에서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작전은 유효했다. 나름 굳은 얼굴로 입장을 밝히기는 했어도 결국 달변의 설득에 넘어가 자포자기 심정으로 계약서에 사인을 해주었으니 말이다. 저들이 칼자루를 쥐고 있는 '갑'이라서 '을'인 내가 져야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결과적으로 겨우 몇십만원가지고 서로 밀고 당기기를 하고 있다는 상황이 서글퍼져 어서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비루한 밥벌이 아닌 직업이 어디 있을까마는 드물게 겪는 이런 장면은 그저 도망치고 싶을 뿐이다. 시리즈물 끝나면 다시는 상대하지 않을 출판사로 블랙리스트에 올리는 것으로 소심한 복수를 하는 수밖에.

내키지 않아도 가끔씩 가게 되는 파주 출판도시는 이상스레 정이 가지 않는다. 삐까번쩍한 건물들이 즐비해도 인기척은 전혀 없이 회색빛으로 가라앉은 그곳에 가면 괜히 숨이 막힌다. 씁쓸한 심정으로 서둘러 집에 오니 파주에 있는 또 다른 출판사에서 보낸 증정본 택배상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올해 출간되는 마지막 책일 것이다. 책표지를 쓰다듬으며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나의 몸값이 여기 담겨 있으니 그만 잊어버리자고 마음먹었다. 헌데 새삼 구석에 던져둔 계약서를 보니 자꾸 울컥해서... 여기다 일러바쳤으니 이제 정말 툭툭 털고 웃어버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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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개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구구절절 자꾸만 포스팅하는 날이 올 줄은 정녕 몰랐으나 이렇게 되고 말았다. 더욱이 내가 아는 한 지상 최고의 애견인이신 메리제인님의 눈물겨운 동거견 이야기를 엿보기도 했고, 이웃이신 키드님께 훈련소에 간 장금이 사연을 전해 듣고 보니 여전히 나에겐 불가사의이자 골칫거리인 개들 때문에 연일 겪는 괴로움을 고해바치지 않을 수가 없다. 하기야 좀 지나고 보니 '인간'을 한 종으로 일반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듯 개들도 도저히 한 가지 종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구석이 많다. 품종에 따른 차이인지, 그저 녀석들의 두뇌나 성격 차이인지 나로선 영영 오리무중이겠으나 암튼 걔네들을 한꺼번에 '개새끼'라고 싸잡아 부르는 게 내가 보기에도 부당하다고 여겨질 정도다. 알면 알수록 모를 개들의 세계.

사례1.
이름: 호야. 품종: 시츄. 숫놈.
친구네 개다. 2007년 8월에 한달된 녀석을 입양해 지금껏 기르고 있으니 3살인가, 4살인가. 암튼 내가 아는 개들 중에 가장 모범견이다. 처음 놀러갔을 때도 전혀 짖지 않았고, 몇번 와서 추근대기는 했으나 우리가 질색하는 걸 알고는 단숨에 물러가더니 이제는 만나도 소 닭보듯 무관심하다. 완전 고맙다.
두 딸을 비롯해 나의 친구가 정성들여 배변훈련을 시켰기 때문인지 실수 따위 단 한번도 한 적이 없단다. 어릴 땐 배변판에 쉬야를 하더니 지금은 아침 저녁에 두번 시간 맞춰 밖에 데리고 나갈 때 볼일을 보기 때문에 배변판도 집안에 깔아놓을 필요가 없어졌단다. 저도 데려가는 외출과 두고 가는 외출을 정확히 알아듣고 현관에서 배웅 태세를 취하거나 따라나설 준비를 귀신같이 한다. +_+ 중국 황실에서 키우려고 개발한 품종이라 왕궁에 어울리게 호들갑스럽지 않은 성격을 지니게 됐을 거라는 게 친구의 주장이다. 사실일까? 나는 짖는 걸 본 적이 없어서 목소리도 모를 정도다. 친구가 자기 사진 대신 녀석의 사진을 전화번호부에 저장해달라고 해서 감히 아이폰 앨범에 들어있다. 사진을 찍으려고 들면 이렇듯 가만히 앉아서 도도하게 포즈를 취해준다.

사례 2.
이름: 파랑이. 품종: 말티즈. 숫놈.
영광스럽게도 내 블로그에 여러번 등장한 바 있는 조카네 개다.
누군가 키우다가 올 봄에 양도한 녀석이라 정확한 나이 잘 모르겠다. 두살이라던가. 간혹 보면 저래서 개 팔자 상팔자로구나 싶을 정도로 푹신한 제 전용 침대에 누워 널브러져 자고 있을 때도 있으나 주로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며 쉴새없이 꼬리를 흔들어 아양을 떨다가 큰조카 방 문 앞이나 책상 밑을 지킨다. 특히 과일을 미친듯이 좋아해서, 우리가 과일을 먹을 때면 가엾어 보이려고 목을 쭉~ 빼고 옆을 맴돌다 기필코 얻어먹는다.  
집에 누가 오든 무조건 짖는다. 근데 그게 겁을 줘서 쫓아버리려는 게 아니라 자기 안아달라고 반갑다고 짖는 거다. 애정결핍이냐 뭐냐! 낯선 사람들의 경우 주인이 짖지 말라고 하면 금세 조용해지지만, 나나 왕비마마처럼 제 편이라고 생각하는(아 대체 왜??) 사람들이 집에 오면 쓰다듬어주거나 한참동안 안아주며 아는 척 할때까지 주인한테 혼이 나면서도 계속 짖는다. 친척들이 우글우글 모여드는 명절 같은 날에도 날뛰며 돌아다니더니 추석날엔 급기야 주인장 안방 침대에 떡하니 똥을 싸놓은 웃기는 놈이다. 주인이 있을 때면 낑낑거려서 배변판이 있는 베란다 문 열어달라고 신호를 보내고, 배변판에 볼일을 본 뒤엔 잘난척 짖어대며 간식 먹으려고 미친듯이 달려온다. 그럴땐 아주 멀쩡한데, 가끔가다 혼자 집에 있을 때 방방마다 한번씩은 모든 침대에 볼일을 벌여놓았고 소파와 쿠션에도 여러번 사고를 쳐서 쫓겨날 위기에 처했었다. 그래서 옛날 난로 주변에 치는 철망 같은 '우리'에 갇혀 지내기도 했는데 요샌 힘과 요령이 생겨서 거기 가둬놔도 머리로 들어올리고 나온단다. 최근엔 외출할 때 베란다에 가둬놔도 혼자 문을 밀고 나와 온 집안을 돌아다닐 만큼 영약하다고...
아무래도 파랑이는 정민이랑 지환이처럼 자기도 내 조카라고 착각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다. 우리 조카들이 좀 엉기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서 TV를 보거나 책을 읽을 때도 내 다리를 베거나 팔짱을 끼거나 옆에 꼭 붙어서 다리라도 올려놓는 편인데, 그러고 있으면 이 녀석도 어느 틈엔가 파고들어 내 발목에라도 턱을 올리고 동참하거나 흉측하게 발라당 드러누워 그윽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어쩌라고!) 헤어질 때도 마찬가지다. 조카들만 한번씩 안아주고 돌아서면 아주 난리가 난다. 내 무릎까지 뛰어올라 자기한테도 작별인사를 하라고 종용하는 고약한 놈이다. 말티즈가 원래 좀 애정을 갈구하는 성격이라고는 해도, 개라면 뜨악하게 여기는 나나 왕비마마에게까지 매번 달려들어 엉기는 녀석을 보면 정말 모르겠다.

사례 3.
사진은 없다. 이름: 이쁜이. 품종: 말티즈. 암놈.
이모네 개인데 벌써 새끼를 세번이나 낳았다던가, 6살이라고 들은 듯. 몸집은 작은 놈이 엄청 짖어대고 사납다. 이모네는 아들만 둘이라서 딸 하나 키우는 셈 친다고 이모가 얘기하시는데, 정말로 자기가 막내딸이라고 여기는 듯 공주병 증세가 엿보인다. 소파 맨 끝이 자기 자리라서 다른 사람이 앉으면 엄청 짖어대는데, 이모랑 이모부가 말리면 말은 듣지만 냉큼 이모나 이모부의 무릎에 올라 앉아야 제자리를 양보한다. 얘 혼자 오래 놔두는 걸 두 양반 다 못 견뎌해서 서로 먼저 집에 들어가라고 다투실 정도다. 영리해서 배변실수 얘긴 들어본 적이 없고, 언젠가 이모가 계단 센서등이 고장나 넘어지는 바람에 다치셨을 때 엄청 울어대며 옆을 지켰다고 효녀 소리를 듣는다. 작년에 사촌동생이 딸을 낳는 바람에 손녀가 생긴 이모랑 이모부가 얘 때문에 아기를 많이 못안아주실 정도라고 들었다. 그나마 사촌동생이 지방에 살기 때문에 늘 같이 사는 건 아니라 스트레스가 심하진 않은 모양이다.

사례 4.
이름: 곰돌이. 품종: 똥개 (진돗개 잡종으로 의심됨)
온동네의 골칫덩이 아래층 똥개이므로 당연히 사진은 없다. 찍어줄 마음도 절대 없고! 
올해 이천에서 태어나 서울로 올라왔으므로 겨우 한살인데 이미 덩치는 거짓말 좀 보태서 나만해졌다. ㅠ.ㅠ 충성심이 뛰어난 건지 멍청한 건지 개 주인 아저씨와 아주머니 딸, 세 사람 이외엔 무조건 미친듯이 짖어댄다. 같은 집에 사는 나와 왕비마마, 또 옆쪽 아래층 가족들에겐 짖지 말라고 개주인들이 누누히 혼내고 야단치고 가르쳐도 소용이 없다. 혹시나 해서 내가 그간 온갖 뼈다귀(일부러 살도 많이 붙여서 가져다 주었었다!)와 비계덩어리로 아부를 떨어 보았으나 개주인이 별 효험 없을 거라고 경고하더니 정말로 그랬다. 동네 사람들의 반발로 잠시 다시 고향 이천으로 내려가 있던 달포 정도엔 원래 개주인인 할머니(아래층 아저씨의 어머니시란다)한테도 그렇게 짖어댔고, 제 아비도 몰라보고 짖어대다가 귀를 물리기도 했단다. 밥주는 사람한테는 개도 안짖는다는 옛말 다 거짓인가보다. 그 한달 동안 원래 주인인 할머니도 이놈의 개가 하도 짖어대는 바람에 무서워서 가까이 가지 못해 사료를 줄 때마다 밥그릇을 막대기로 디밀어야 했다고... 나 역시 뼈다귀로 놈의 환심을 사려 할 땐 자칫 물릴 것 같아서 매번 주인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골목에 사람만 지나가도 컹컹 짖어대는 놈의 목소리는 정말이지 괴로운 지경이다. 대부분은 저도 무서워서 짖는지 개집으로 쏙 들어가며 짖어대지만, 나는 만만하게 보이는 모양으로 마구 달려들어 쇠사슬을 끊기라도 할 듯한 기세로 짖기 때문에 무서워죽겠다. 한번은 개줄이 끊어졌는지 집앞에서 얼쩡대다 내가 차고에 차를 대자마자 그악스럽게 짖어댔다. 차문을 열고 내리려다 식겁한 나는 집주인을 불러 개 좀 잡아달라고 한 뒤에 겨우 차에서 내려 집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 뒤로 쇠사슬로 개끈을 바꾼 것 같기는 하지만, 나는 마당을 드나들 때마다 여전히 언젠가 저놈의 '개새끼'한테 물려죽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린다. ㅠ.ㅠ 아주 가끔 대낮에 집을 나서는 경우엔 나와 왕비마마를 멀끔히 쳐다보기만 하고 안짖을 때도 있으나, 밖에서 들어올 땐 낮이든 밤이든 어김없이 잡아먹을 듯 짖어댄다. 어휴... 그럴 때마다 개주인이 나와서 조용히시키기는 하지만, 그 집이 비었을 때는 후다닥 도망쳐 들어오는 수밖에 없어서 정말 짜증나고 두렵다. 주인을 철썩같이 알아보는 놈이라면 주인 말도 잘 듣고 훈련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만날 보는 사람들한테는 짖지 말라는 꾸지람을 수백번도 더 들었을텐데도 못 알아먹는 멍청한 똥개!

아래층 똥개한테 물려죽기 전에 어서 이 동네를 떠야한다는 결심을 새록새록 다지고는 있지만 또 귀찮은 현실 앞에선 기가 죽는다. 이사는 스트레스 지수가 배우자의 죽음과 맞먹는다던데... 겨울도 다가오고.. 내년 봄에나... 뭐 이러고 앉아서 개소리나 해대고 있다는 얘기다. 으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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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한 밥벌이

투덜일기 2010. 11. 19. 02:38

기획력 있는 번역자들과 달리, 나처럼 줏대없이 주어지는 일로 번역을 하다보면 못마땅한 책과 씨름해야 할 때가 더러 있다. 누가 간절히 부탁하거나 일감이 똑 끊기면 어쩌나 밥벌이 걱정을 해야하는 상황에 몰리면, 스스로도 민망한 자기합리화 과정을 거쳐 일을 맡게 되는 식이다. 당신 정도 경력이면 이제 마음에 드는 책만 골라서 해도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하는 이도 간간이 있지만, 모르는 소리다. 먹고 살려면 말이다. -_-; 더욱이 인세 욕심에 눈이 어두워져 매절 계약일 마다하고 인세 계약일만 찾아하는 바람에 일년 내 수입이라고는 얼마 안되는 계약금 몇 건으로 버텨야 했던 해도 있었음을 감안하면, 죽도록 싫거나 너무 어려운 책, 또는 몹쓸 출판사의 일만 아니면 대개는 약간의 망설임과 고민 끝에 못 이기는 척 계약에 응한다.

문제는 그렇게 별 애정 없이 맡은 책의 경우, 프로답지 못하게 아무래도 홀대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그러니까 독자의 입장에서 어떻게든 책에 흥미를 느껴야 진도도 빨라지고 정성이 더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가능하면 어떤 책이든 애정을 품어보려고 자기최면을 걸곤 한다. 그리고 쉽든 어렵든 '골빠지는' 과정을 거쳐 번역원고가 마무리되면, 좀 모자란 자식이라도 똑같이 정을 쏟는 부모(에 비하면 너무 비약이 심한가? 맞다, 심하다)처럼 돌변해 칭찬일색으로 치장하여 민망하기 그지없는 역자후기까지 양산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도대체 이런 책을 종이 아깝게 왜 만드나 싶은 생각이 들거나 도저히 최면이 안 걸리는 '문제작'이 있다.

예를 들면, 얼마 전에 원고를 넘긴 청소년 소설이 그렇다. 번역의뢰를 받고 상담을 하며 대강 훑어본 느낌으론 소재나 줄거리가 흥미로울 수 있겠다 싶었다(소녀의 탐정놀이 비슷;;). 분량도 얇은 데다 청소년 소설이니 내용도 문체도 수월하여 아주 가뿐하게, 잘하면 한달 안에 '해치울' 수 있는 '만만한' 작업이 될 듯했고, 더욱이 책 나오면 '조카가 좋아하겠다'는 생각부터 들어 덜컥 계약에 응했다. 헌데 아뿔싸. 눈높이를 낮추어 아무리 조카 같은 청소년 독자의 눈으로 봐도 통 스토리도 재미도 없고 유치하고 구성도 단순하여 영 마음에 들지를 않았다. ㅠㅠ 그러니 점점 일을 하기가 싫어질밖에... 한달만에 해치우겠다고 생각했던 작업은 계속 늘어졌고, 그런 책을 쓴 작가도, 번역서를 출판하겠다고 나선 출판사도 밉기만 했다. 물론 제일 등신 같다고 느껴진 건 쉬운 맛에 덜컥 번역하겠다고 나선 나였고. 

어쨌든 지난달에 번역 원고를 넘기며 양심 고백을 했다. 야심차게 4권짜리 시리즈물로 기획했다는 건 알지만, 일단 원고를 읽어보고 나서 계속 다음 시리즈도 출간할지 진지하게 재고해 보라고. 요즘 청소년들도 눈이 높아서 웬만해선 만족시키기 어려운데 이건 좀 아니다 싶다고. (처음 책을 추천했거나 검토한 사람 물 먹이는 짓이라 조심스럽기는 했다) 하지만 담당자는 책에 대한 자신이 있는 건지 일단 대뜸 다음 책을 계약하러 오라고 청했고 '다음주쯤' 출판사에 오면서 '역자후기'를 '재미있게' 써오라고까지 부탁했다. -_-; 날짜를 콕 찝어 정해주어도 외출이 어려운 나에게 '다음주쯤'이라고 했으니 내가 어찌했을 것 같은가. 게다가 재미 없어 멀미날 것 같은 책을 위해서 '재미있는 역자후기'라니!

한번쯤 독촉전화를 받으면 발등이 앗뜨거라 싶어 뭔가 써지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통 그런 자극도 없으니(전화 공포증 때문에 내쪽에서 먼저 어떻게 하기로 했는지 전화걸어서 물어볼 수도 없고, 후기를 못 썼으니 제발저려서 어떻게 전화를 건담!) 한달이 다 되어가는 오늘까지도 나는 옮긴이의 말을 아직 한 줄도 쓰지 못했다. 대개는 번역을 하면서 후기에 써먹을 아이디가 떠오르거나 인상적인 구절이 있을 때 미리 메모를 해두곤 하는데 이 책은 전혀 그런 빌미가 없던 터라 정말 완전히 막막강산이다. 다른 일도 해야하는데 이도저도 제대로 못하고 갈팡질팡 제 머리만 쥐어박고 있으려니 어찌나 한심스러운지. 그래도 이렇게 자아비판을 공개적으로 하고 나면 낯이 뜨거워 뭔가 어떻게든 진전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끼적이긴 했는데, 만날 이렇게 제 얼굴에 침뱉는 얘기만 쓰는 번역가라는 걸 출판사에서 알아채면 정말로 밥줄이 끊기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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