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 해당되는 글 56건

  1. 2010.12.12 월동준비 21
  2. 2010.12.09 막내 프리미엄 18
  3. 2010.11.22 비가 와서 7
  4. 2010.08.11 모순인가 아닌가 3
  5. 2010.04.06 개구리 반찬 15
  6. 2010.03.07 노년의 생일 19
  7. 2010.01.09 섬망증
  8. 2009.12.18 영하 10도 4
  9. 2009.09.28 휴대폰 음성메모 15
  10. 2009.08.10 국수 18

월동준비

투덜일기 2010. 12. 12. 23:57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어서 몰랐는데, 오늘은 서울 최저기온이 영하6도였대고 내일모레는 영하 10도까지 내려가 한파주의보가 발효될 예정이란다. 말만 들어도 부르르 몸이 떨리는 영하 10도라는 숫자에 벌써부터 어깨가 움츠러든다. 겨울만 되면 남반구로 도망치거나 동면하고 싶다는 충동이 드는 여름형 인간인 나는 통일이 된다고 해도 중강진 같은 데선 절대로 살아남지 못할 것 같다. 암튼 본격 겨울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집안을 둘러보니 제대로 월동준비를 해놓지 않았다. 내가 작업할 때 발치에 놓아두고 쓰는 작은 전기난로야 없어서는 안될 한겨울 필수품이고, 선풍기처럼 생긴 온열기는 내놓아도 거의 쓰는 일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꺼내 놓아야 마음이 놓이는데 말이다. 올초에도 한껏 게으름을 부리다 봄이 다 지나가도록 난로를 방치하다 간신히 넣어두었는데, 계절을 바꿔 이어지는 게으름은 노상 내 뒤통수를 친다. 겨울용품은 이상스레 봄기운이 완연한 뒤에도 잘 안치우게 되서, 자동차 털방석도 봄에 남들이 눈치 줄 때까지 깔고 다녔다. 오래 된 차라서 요즘 신형 자동차처럼 자동차 시트에 열선이 안깔려 있기 때문에 나처럼 추위로 엄살 떠는 인간은 털방석이 필수인데, 그동안은 엉덩이 시려운 줄도 몰랐구나야. 

아파트 같은 데와 달리 낡은 주택은 구석구석 찬바람 새어들어오는 데가 많아서 원래는 엄마 방 문풍지도 갈아 붙였어야 했다. 창틀과 창문까지 새로 단 내 방과 달리 왕비마마 방 창문은 단열이 영 시원찮기 때문이다. 나야 아무리 추워도 매일 잠깐은 창문을 열어두어야 숨쉬기에 지장이 없지만, 방문으로 환기시키면 된다고 주장하시는 왕비마마의 방은 아버지 계실 땐 아예 겨우내 밀봉하기도 했었는데, 그것까지 내가 도맡기엔 일이 너무 크다. 그래도 작년엔 스티커 떼서 붙이기만 하면 되는 문풍지 사다가 창문틈을 죄다 막아 드렸건만 올해는 정말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난로를 틀어대서 전기요금을 더 내든, 보일러를 틀어대서 가스비를 더 내든 전체 난방비로 따지면 그게 그거니까 겨울엔 그냥 절약하지 말고 마음 편히 따뜻하게 살자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겨울엔 이산화탄소 배출량이고 뭐고 일단 사람이 살아야하지 않겠냐고! (추우면 난 정말 살기가 싫다. ㅠ.ㅠ) 영하 10도를 넘어가면 온종일 휭휭 돌아가는 낡은 보일러도 쯤 불쌍할 정도다.

사람의 체온이 참 훌륭한 난로여서 넓지도 않은 집이건만 오도카니 두 모녀가 서성거릴 때는 똑같이 보일러 온도를 맞춰놓아도 어쩐지 썰렁한 느낌인데, 동생네가 놀러오면 금세 후끈후끈 열기가 감돈다. 애들이야 워낙 에너지로 똘똘 뭉친 불덩이라 쳐도, 그러고 보니 제일 뜨거운 인간난로였던 아버지가 계실 땐 세 식구라도 그렇게 춥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양털 실내화를 못 벗는 날씨에도 아버지는 반팔 속옷바람으로 돌아다니시는 양반이셨으니 오죽할까. 하기야 3년 전만 해도 이런 월동준비 따위엔 신경조차 안써도 되는 편한 팔자였구나. "아빠, 춥다!"라고 한 마디만 하면 그만이었던 그때를 그리워하는 게 이런저런 귀찮음을 피하려는 이기심 때문일까봐 문득 죄스럽다. 스산한 마음엔 그저 보일러 온도나 올릴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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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 프리미엄

투덜일기 2010. 12. 9. 21:37

어제 할아버지 제사를 마치고 모두들 헤어져 돌아가는 순간, 주차장에서 내가 조카들을 한번씩 더 껴안고 뽀뽀를 주고받자, 막내고모가 외쳤다. "나두, 나두!" 나는 씩 웃으며 나보다 아홉살 많지만 항상 내가 뭘 더 챙겨줘야 한다고 느끼는 막내고모를 껴안고 뺨에 입을 맞춰주었다.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주면서. 생각해보니,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도 명절이나 제삿날 밤에 헤어질 때, 아버지가 열여덟살이나 터울이 나는 막내동생에게는 각별히 꼭 포옹과 입맞춤으로 작별인사를 했던 것 같다. "우리 막둥이, 잘 가라"고 하시면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아계셨을 때 특별히 막내딸을 더 챙긴 것이야 말할 것도 없다.

겨우 9살 차이나는 고모와 조카 사이가 어렸을 땐 꽤나 경쟁적이었다는 것도 같은데, 내가 기억하는 한 막내고모는 거의 내 우상이었고 스무살 무렵부터는 어쩐지 맏이인 내가 막내인 고모를 돌봐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말투부터 상냥함과 애교가 뚝뚝 떨어지며 하늘 끝까지 여성스럽고 연약하고 다소곳해서 내가 봐도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막내고모를 씩씩한 내가 지켜줘야 한다고 느꼈달까. 물론 고모쪽에선 그래봤자 땅꼬마 조카라고 생각했겠지만 말이다. 

요즘에야 형제들 수가 적어서 막내란 존재의 개성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 모양이지만, 맏이인 내가 보기엔 확실히 막내가 달라도 많이 다르다. 우리 막내고모로 말할 것 같으면, 무려 8남매의 막내딸이고 (할머니가 마흔 다섯살에 낳으셨다) 제일 큰 언니와는 스무 살도 넘게 차이가 나는 완전 늦둥이라, 지금까지도 온 가족이 애틋하고 안쓰러이 여기는 애교쟁이 막내의 개성이 극대화된 경우다. 천사표이신 나의 작은 엄마들은 다섯이나 되는 시누이 가운데 유일하게 막내고모를 위해선 지금도 번갈아가며 김치를 담가다주신다. 14년 전에 할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지금까지 주욱. (막내고모 요리솜씨가 엉망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예술 하는 사람들은 요리도 잘하나? 의아할 정도다;;)  울 엄마도 건강하실 땐 밑반찬 만들어가지고 아버지랑 같이 수시로 막내고모네를 살폈다. 뭘 좀 제대로 먹고 살기나 하는지 모르겠다면서. 우리 집안에서 막내란 그런 존재인 것이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어쩐지 보살펴주어야 할 것 같고 이유없이 애틋한. 

막내라서 본능적으로 애교와 귀염성이 많기 때문에 부모와 형제들의 사랑을 더 받는 것인지, 아니면 풍부한 애정 덕분에 막내들이 맏이와는 다르게 애교와 붙임성 같은 것들이 개발되는 것인지 나로선 통 모를일이다. 하지만 나의 막내동생을 보아도 어려서부터 무뚝뚝한 두 맏이와는 달랐다. 큰동생은 둘째이긴 해도 맏아들이네, 장손이네 하는 말을 듣고 자라서 그런지 맏이로서의 성격이 강한 편이고, 나와 마찬가지로 애교 따윈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저 자존심과 똥고집만 내세울 뿐. 삼남매가 뭐든 잘못을 하거나 싸웠다는 이유로 회초리 맞을 일이 생기면, 나와 큰동생은 '잘못했어요' 소리를 안하고 꿋꿋하게 정해진 매를 다 맞는 편이라면, 막내는 딱 한대 만 맞고도, 아니 심지어는 자기 맞을 차례가 되면 벌써부터 울음바람에 엄마를 와락 끌어안으며 잘못했다고 싹싹 빌어서 매를 피했다. 우리들 눈에 그게 얼마나 얄미워 보였던지!! 엄마 목을 끌어안고 돌아서서 막내녀석이 우리에게 혀를 쏙 내밀어 보였던 것도 같고...  -_-;  하지만 어려서도 나는 대체로 막내가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매일 저녁 좁은 단칸방에서 노래와 춤으로 재롱을 부리며 온 가족을 즐겁게 해주었던 것도 항상 막내였다. 나와 큰동생은 엄마 아빠 밖에 없는데도 앞에 나가서 노래 한 마디 하는 게 어찌나 어려웠는지 원. 심지어 막내동생은 요즘도 두 아들을 데리고 우리 앞에서 가끔 최신 유행하는 아이돌 춤을 시범 보이며 귀여움을 떤다. ㅋㅋㅋㅋ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역시나 막내인 그의 배우자까지도 춤연습을 하며 논다는 것 같다.)

나의 조카들을 봐도 그렇다. 겨우 둘씩이라 맏이와 막내로 구분하기도 좀 뭣하지만, 집집마다 첫째와 둘째는 판이하게 성격이 다르다. 둘째들은 하나같이 애교가 많고 붙임성이 뛰어나고 눈치가 빨라서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첫째들은 뻣뻣하고 자존심만 강한 데다 융통성이 없어서 만날 엄마랑 싸운단다. 심지어 나의 올케들은 둘다 '막내'라서 맏이 특유의 애교 부족과 무뚝뚝함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맏이인 내 눈엔 위기를 모면하는 약삭빠른 둘째들의 아양떨기가 귀여우면서도 가끔 얄미운데 말이다!

어쨌든 막내는 막내고 맏이는 맏이라서, 각자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긴 하다.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은 없지만, 확실히 아픔에도 차이가 있다는데 어쩌란 말인가. 어젯밤 왕비마마도 실토하셨다. 깨물면 새끼손가락이 제일 아프고, 엄지손가락은 별로 안아프다고. (시범까지 보이며;;) 그래서 맏이인 나와 큰동생의 경우엔 뭘 하든 믿게 되고, 약간씩 못미더운 부분이 있더라도 크게 걱정이 안되는 반면에, 막내의 경우엔 그저 안쓰럽고 염려스럽고 어떻게든 좀 더 챙겨줘야 할 것 같다고 말이다. 딸인 나와 달리, 두 형제 사이엔 은근한 경쟁심리가 있는 걸 알기 때문에 내가 왕비마마께 그렇게 티나게 굴지 좀 마시라고 했더니,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나랑 큰동생은 울 할머니가 키우셨는데, 막내는 당신이 직접 키워서 좀 남다른가보다고. -_-; (왕비마마는 막내를 낳고 비로소 직장을 관두고 전업주부의 길로 들어섰다.)

물론 막내라도 맏이같은 성품을 개발한 이도 있을 테고, 가족 내의 위치를 티내지 않고 사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우리집 맏이와 막내들을 보면 막내 프리미엄이란 게 존재하는 것이 확실하다. 맏이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신비로운 힘과 재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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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와서

추억주머니 2010. 11. 22. 03:38

일기예보를 안 봐서 비온다는 소식을 모르고 있었는데 새벽에 난데없이 요란하게 비가 내린다. 아파트도 그렇고 콘크리트로 지은 요즘 집에 살면서 밖에 비오는 소리를 듣기가 쉽지 않은데 내가 유독 빗소리에 민감한 이유는 오래된 우리집 뒷베란다 쪽으로 덧씌운 섀시 때문이다. 알루미늄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지붕을 후두두둑 때리는 빗소리가 좀 요란해야지. 빗줄기가 가늘면 제 아무리 예민한 귀를 지녔대도 나 역시 비오는 걸 못 알아차릴 때가 많지만, 지금처럼 빗줄기가 굵을 땐 옛날 '슬레이트' 지붕을 덧댄 기와집에 살 때처럼 반사적으로 창밖을 내다보게 된다. 보안등에 비친 빗줄기가 확연히 보일 정도로 확실히 비가 많이 내리고 있다.

요란한 빗소리를 들으면 어린 시절 다섯식구가 셋방을 전전하며 살 때 가끔 자다말고 물난리를 겪는 경우가 있었던 게 기억난다. 어딘가 깨진 기와 때문에 천장에서 똑똑 떨어진 물이 이불을 흠씬 적신 다음에야 한밤중에 깨어난 부모님이 삼남매를 깨워 이부자리를 한 구석으로 치우고는 물 떨어지는 곳에 대야를 받쳐 놓아야 했다. 어린 우리야 잠자리를 구석으로 옮기고는 곧장 잠이 들었지만나 부모님은 걸레로 물기를 닦고 나서도 대야가 넘칠까봐 밤새 불침번을 서셨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이면 아버지는 곧장 지붕에 올라가 기와 깨진 곳을 확인하셨는데, 그런 일이 워낙 다반사인지 집집마다 마당 한구석엔 기왓장이 몇장씩 쌓여있었다. 어린 눈엔 그냥 쓸모없이 굴러다니는 것 같은 기와를 가져다가 소꼽놀이라도 할라치면 어른들에게 혼이 났다. 그래도 몰래 한장쯤 기와를 훔쳐다가 냅다 깨뜨려서 망까기와 비석치기에 쓸 괜찮은 판판한 돌멩이를 만들어 나눠 갖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 옛날 빗물 떨어지는 천장 아래 대야와 양은 그릇을 받쳐놓으며 부모님은 어두운 얼굴로 한숨을 쉬셨지만 어린 나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똑똑 번갈아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그저 재미있기만 해서 자꾸 손을 갖다 대며 물놀이를 하려 들었다. 중학생 때부터는 지붕이 새는 집에 살아본 적이 없었지만, 그래도 양은 그릇에 똑똑 떨어지는 빗소리가 재미있는 건 여전해서 처마 밑에 일부러 양동이를 가져다놓은 기억도 있다. 혹시 빗물을 받아서 다른 용도로 쓰기 위함이었던가? 빗물을 받아 며칠 두었다가 어항에 넣어주었던 것도 같고...

아파트에 살면 다달이 관리비 내는 것으로 집안팍의 유지관리와 관련된 모든 수고를 남에게 일임할 수 있으니 그건 제일 편할 것 같다. 하지만 우리집은 몇년에 한번씩 해야 하는 외관 페인트칠도 그렇고 지붕 방수도 그렇고, 매년 해야하는 정화조 청소도 그렇고 일일이 사람을 불러다가 의뢰를 해야한다. 일년에 한번쯤은 사다리 타고 지붕에 올라가서 사방에서 날아온 낙엽이 혹시 배수구를 막고 있지는 않은지도 확인해야 하고. 그 모든 일을 주관하시던 아버지가 안 계시니 이제 그런 것들도 모두 내 책임인데, 과태료 운운하며 구청에서 매년 업체 연락처가 적힌 안내장을 보내오는 정화조 청소 말고는 계속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던 터라 사실 비만 오면 불안불안하다.

아직은 아래층에서도 어디 비새고 물샌다는 얘기도 없고 방방마다 멀쩡하긴 한데 원래 문제 생기기 전에 올해쯤 미리미리 조치를 취했어야 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장마철 지나고도 수시로 비가 많이 왔던 지난 여름 내내 지붕에 올라가서 낙엽 치우고 배수구 확인했어야 하는데 어쩌냐고 계속 불안해하시는 왕비마마에게 막내녀석 다니러 오는 날 시키면 된다고 큰소리 뻥뻥 치고는 매번 까먹고 그냥 넘어갔다. 여름도 잘 지났으니 올 겨울은 무사히 넘어가주지 않을까. 

갑자기 내린 비는 소나기였나보다. 옛 추억에 골몰해 자판을 두들기는 사이 빗소리가 잦아들었다. 쓸데 없는 생각 그만하고 일이나 더 하라는 배려인가. 흐흐흐. 암튼 이렇게 월요일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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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언론인과 사진작가 부부가 있다. 언론인인 남자의 취재 도구는 볼펜과 작은 수첩, 소형 녹음기가 전부다. 남자는 가방도 없이 여기저기 다니다 뭔가 기록할 일이 있으면 재킷 주머니에 넣어둔 수첩과 볼펜, 소형 녹음기를 꺼낸다. 가끔은 노트북 컴퓨터를 소지하고 다닐 때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땐 기사를 바로 송고하거나 자료를 참고해야 하는 경우이고, 대부분은 양손을 자유롭게 하고 다니는 걸 좋아한다. 그와 동반 기사를 취재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어쨌든 언론인 남편보다 상대적으로 촬영도구가 많은 여자는 작은 체구에 여러 종류의 카메라와 렌즈가 들어 있는 큼지막한 가방을 늘 어깨에 짊어지고 다닌다. 본격적인 촬영이 있는 날 쫓아다녀본 적이 있는데, 웬만한 택배상자보다도 큰 카메라 가방엔 각종 카메라와 렌즈, 빛의 느낌을 확인하기 위해 먼저 찍어본다는 폴라로이드 카메라까지 들어 있어 무게가 20킬로그램은 족히 될 듯 했다.

특별히 전문적인 취재나 촬영이 있는 날은 아니지만 둘이 같이 관련된 행사 때문에 두 부부가 같이 외출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남자는 맨몸에 빈손이고, 여자는 예의 그 묵직한 카메라 가방을 들었다. 남편은 아내의 카메라 가방을 들어주어야 할까, 아닐까? 더욱이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인 남자는 185센티미터의 장신에 100킬로그램은 나가는 거구인 반면, 프리랜서 사진작가인 아내는 150센티미터의 단신이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둘과 동행하게 됐을 때 나는 빈말로라도 카메라 가방을 대신 들어주겠다는 말 한 마디 안하는 남자의 태도에 분개했고, 복잡한 인사동을 함께 거닐며 나 역시 비슷한 단신임에도 사진작가 친구에게 가방을 같이 들자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헌데 친구는 괜찮다며 내 호의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마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어깨가 아파 가방 매는 쪽을 자주 바꾸면서도.  

가끔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은 나는 반나절을 지켜보다 참다못해 덩치 큰 남편에게 왜 부인 짐을 대신 들어주지 않느냐고 묻고 말았다. 넌 짐도 하나 없으면서, 가냘픈 아내가 끙끙거리며 그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혼자 들고 다니는 게 가엾지도 않냐고. 남자는 오히려 내 질문을 의아하게 여겼다. 사진작가로서 무거운 촬영도구를 들고 다니는 건 어디까지나 당연한 일인데, 왜 자기가 간섭해야 하느냐고. 자기 아내가 사진작가라는 직업을 선택했을 땐 그에 수반되는 모든 수고로움까지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므로, 온전히 본인의 책임이라고. -_-; 논리적으로 너무도 맞는 말이었지만, 나는 그들이 '외국인'이기 때문에 그런 '쿨'한 사고방식과 행동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국인 부부였다면 둘 다 아무리 '프로'다운 직업인이라고 해도, 둘이 같이 움직일 땐 상대적으로 힘 센 남편이 아내의 짐을 잠시라도 들어주지 않았겠나 말이다.

이번엔 예순 살의 아버지와 열일곱 살의 늦둥이 딸이 있다. 역시나 이들도 미국인이다. 방학을 맞아 이혼한 아버지의 집에 다니러온 십대의 딸은 올 때보다 더 빵빵해진 큼지막한 가방을 낑낑거리며 짊어지고 아버지의 배웅을 받는다. 가방의 무게 때문에 딸은 걸음걸이가 휘청거릴 정도다. 아버지는 시원섭섭함을 느끼며 딸을 위해 현관문을 열어주는 친절을 베푼다. 그의 배웅은 아파트 현관에서 끝이 난다. 주차장까지 함께 나가는 건 아버지 본인도, 딸도 상상조차 하지 않는 모양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예순 살이라고는 하지만 깡마른 십대 딸보다는 그래도 아버지가 주차장까지 짐을 옮겨다주어야 '자연스럽지' 않을까? 물론 어디까지나 이건 내 생각이지만. 

이 장면은 지금 작업중인 소설의 이야기인데, 나는 이 부분에서 몇년 전 친구 부부의 에피소드가 떠올랐고 확실히 내가(심히 비약하자면 한국인이) 의존적이구나 하고 느꼈다. 책 속에서 아버지가 무거운 딸의 짐을 스스로 옮기도록 내버려두는 장면은 그의 매몰찬 성격이나 무정함을 묘사하려는 뉘앙스가 전혀 없고, 그저 자연스러운 작별의 장면일 뿐이었다. 물론 유별난 딸의 독립심과 괴력을 강조한 것도 아니다. 다만 가족 안에서도 개인주의가 통용되는 미국 사람들의 사고가 드러났을 뿐이다. 부녀 사이에도 자기 일은 자기가 책임지는 게 원칙상 옳긴 하다. 그럼에도 나는 어느 틈엔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 같으면 당연히 나 대신 짐을 옮겨다 줬을 텐데, 라고. 위에 적은 친구 부부의 에피소드에서 내 주변 남자들 같으면 당연히 아내의 카메라 가방을 대신 들고 다녔을 텐데, 라고 생각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나는 무겁든 가볍든 남자들이 여자의 핸드백을 대신 들고 다니는 걸 혐오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며(다만 책가방은 인정 ^^;), 사사건건 "여자는 약하니까 이런 건 못해!"라고 핑계대는 여자들을 줄곧 혐오하며 집밖에선 늘 괴력을 발휘해온 이른바 돌쇠형 여자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묵직한 아기 캐리어와 기저귀 가방, 시장바구니 따위는 남편이 매고 들어야 '옳다'고 생각한다. 물론 남편이 아내보다 더 힘이 세다는 전제 하에. 요즘엔 인식이 많이 바뀌어서 별로 그런 커플이 눈에 띄지 않지만 몇년 전까지도 흔하게 보았던, 아내에게 아기와 기저귀 가방을 모두 들게 하고 본인은 빈손으로 한가로이 걸어가는 뻔뻔한 남편들의 뒤통수를 내가 얼마나 째려보며 욕했던가.

돌이켜보니 나는 양성평등과 성별역할 구분의 철폐를 집밖에서만 엄중이 부르짖었던 것 같다. 집안은 마치 그런 원칙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으니 마음껏 응석을 부리거나 편협한 태도를 취해도 용서될 수 있다는 듯이. 물리적인 힘을 쓰는 부분에서도 양성평등을 주장하는 건, 무조건 남녀 공히 군대에 가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어린이든 성인이든 하나의 인간 개체임은 마찬가지이므로 모든 사회적 의무를 똑같이 져야 한다고 우겨대는 억지논리와 다를 바가 없다는 걸 잘 안다. 그럼에도 어쩐지 집 안과 밖에서 성별 문제에 대한 나의 이런 태도가 모순처럼 느껴지는 걸 피할 수가 없다. 험악하게 운전하는 것조차 여성에 대한 편견 타파와 양성평등을 향한 내 나름의 노력이라고 우스개 소리를 하면서, 정작 집안의 영역에선 상당히 '연약한' 여자라 '특별히' 더 존중받아야 한다는 특권을 자임했다. 물론 나의 이런 태도는 맏딸이면서 고명딸이라는 지위에서 오는 프리미엄이 작용한 덕분이다. 상대적으로 두 남동생들은 나 때문에 역차별을 당하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행스럽게도 체중과 체구에 상관없이 어느덧 집안에서 '힘쓰는' 인물이 되면서, 그리고 '딸이고 첫째'이라서 더 예쁨을 받는 건 엄연한 '차별'임을 눈 동그랗게 뜨고 지적하는 똘똘한 조카들 덕분에 집안에서도 성 역할의 경계는 확실히 무너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런데 또 불쑥 걱정이 든다. 가족적 온정주의는 양성평등과 꼭 상충되어야만 하는 것인지? 제대로 공부는 안하고 몸으로 부딪치고 느끼는 현실로만 나름의 원칙과 이론을 정립하려니 생겨나는 부끄러운 헷갈림이다. 언제고 제대로 여성학 공부 좀 해봐야할 터인데, '과연' 언제나... 만날 해야할 일, 하고 싶은 일을 뒤로 미루고 한탄만 하는 이런 태도야 말로 진정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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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 반찬

식탐보고서 2010. 4. 6. 14:54
어릴 때 하고 놀던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놀이를 기억하는가.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잠자~~안다.
잠꾸러어~~기.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세수하~~안다.
예쁘~~은이.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옷입느~~은다.
멋재~~앵이.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학교가~~안다.
모버~~엄생.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놀러가~~안다.
날나~~리.
.
.
딱히 가사가 정해져 있었던 것 같지 않은 이 놀이의 마지막은 <밥먹느~~은다 -- 무슨 바~~안찬? -- 개구리 바~~안찬 -- 살았니 죽었니?>에 대한 대답과 함께 술래가 친구들을 잡으러 가거나("살았다!"고 외쳤을 때) 움찔 움직인 친구를 잡아내는 ("죽었다!"가 대답일 때) 것으로 끝이 난다. 운동신경도 둔하고 달음박질 느린 나는 친구들과 밖에서 놀이를 할 땐 별로 즐기질 않았는데, 다 놀고 집에 들어와서 흥얼흥얼 새로운 댓구를 만들어내는 걸 좋아했고, 부엌을 들여다보며 할머니나 엄마한테도 놀이를 하듯 장단 맞춰 "무슨 바~~안찬?"이라고 묻는 걸 재밌어했다. 그리고 할머니나 엄마가 "개구리 바~~안찬"이라고 대답할 땐 기쁘게도 뭔가 맛있는 <고기> 반찬을 만들고 있다는 의미였다.

수십년도 훨씬 지난 오래 전 추억이지만, 가끔 우리집에선 개구리 반찬이 아직도 <맛있는 고기 반찬>의 의미로 쓰일 때가 있다. 대개는 내가 입을 쑥 내민 채로 콩닥콩닥 냉장고와 조리대를 오가며 꽤 오래 부산을 떠는 저녁 무렵이면 왕비마마가 슬쩍 부엌으로 다가오며 묻는다. "무슨 개구리 반찬이라도 만드니?"
그러고 보니 옛날에 엄마가 장보러 가면서 아버지와 내게 뭐 특별히 먹고 싶은 거 없냐고 물으면 가끔 입을 모아 그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개구리 반찬!"이라고. 

채식이 지구를 살리고 이산화탄소 발생을 줄이는 지름길이란 걸 알지만, 우리 가족은 고기를 너무 사랑해서 절대 채식주의자로 살 순 없을 것 같다. 일주일만 고기를 굶으면 손발이 후들후들 떨린다는 건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지만, 아무리 생선으로 단백질을 섭취한다고 해도 돼지고기, 닭고기, 쇠고기, 오리고기 따위를 먹어야만 채워지는 육식애호 인자를 확실히 엄마도 나도 보유하고 있음을 느낀다. 채소 싫어하는 조카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해서 일주일에 두세 번은 정말로 개구리 반찬을 만들어 먹는 것 같다. 당연히 일주일에 한번씩 장을 볼 때도 돼지고기, 쇠고기, 닭고기, 오리고기를 종류별로 거의 빠뜨리는 일이 없다. ㅠ.ㅠ 고기마다 다 맛이 다른 걸 어쩌란 말이냐. ㅎㅎㅎ 봄이 오면 남들은 식욕을 잃는다는데, 왕비마마도 무수리도 입맛을 잃기는커녕 지난주부터는 이상스레 식탐이 동해 고기가 더 먹고 싶어서 이틀이 멀다하고 과식을 거듭하고는 피둥피둥  몸무게를 늘이고 있다. 그러고서도 여전히 또 다른 개구리 반찬을 떠올리는 식탐 모녀를 위해 적어두는 반성의 기록이다. 



적고 보니 아무래도 한우는 비싼 가격 탓에 국으로 끓여먹지 않으면, 장조림 해먹는 게 다인듯. 오리고기는 훈제오리 제품을 사다가 살짝 데워서 무쌈에 싸먹으면 되므로 요리랄 것도 없다. 이렇게 먹고도 어제 왕비마마는 또 삽겹살을 구워먹고 싶다 하셨다. 으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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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생일

투덜일기 2010. 3. 7. 18:13
떠들썩한 환갑잔치를 내가 처음 목격한 것은 스무살 무렵이었다. 당시 수원에 살던 같은 과 친구 하나가 어렵사리 말문을 열더니 난데없이 주말에 시간 되면 밥을 먹으러 오라며 수원의 어느 갈비집을 알려주었다. 터울이 많은 손위 형제들을 둔 막내였던 친구는 부모님이 옛날 분들이라 환갑엔 꼭 동네잔치를 한다고 했다. 내 조부모님의 경우 환갑은 물론이고 칠순도 조촐하게 집에서 가족모임으로 치렀던 터라, 환갑잔치의 실체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했던 나는 흔쾌히 그러마고 약속했는데, 그날 목도한 사건이 워낙 인상 깊었던 모양으로 같이 간 친구와 내가 축의금 봉투를 가져갔는지 그냥 입만 가져갔던 건지도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무슨무슨 가든이었던 수원의 갈비집엔 큼직한 방마다 온통 잔치음식들이 차려져 있고 한 가운데 불판에선 갈비가 익어갔으며 마당으로 연결된 스피커에선 계속 흥겨운 풍악이 흘러나왔다. 결혼한 큰오빠와 큰언니가 낳은 자식들이 친구와 또래일 정도였으므로 잔치상 앞에 앉으신 부모님께 술잔을 올리며 차례로 절을 하던 자손들의 수가 꽤나 많았던 기억이 나고, 식사 후 여흥이 시작되자 춤과 노래가 쉴새없이 이어졌다. 잔치 주인공의 자손들 뿐만 아니라 자손의 친구들도 다들 앞에 나가 술잔을 올리고 축하인사를 드리는 게 예의인 모양이었지만, 숫기 없는 우리의 난감함을 알아차린 친구는 싫으면 굳이 안해도 된다고 말해주어 어찌나 고마웠던지 모른다.

친구 부모님의 환갑이나 칠순에 초대받았던 경험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데, 말로만 듣던 동네 잔치를 처음 경험한 때문인지 나는 그날 온종일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하고 순간순간 불편하면서 재미있기도 하고 막판엔 지겹고 곤혹스러웠다. 노래를 잘하든 못하든 사회자가 지목하면 무조건 나와서 마이크를 잡고 목청껏 고함을 질러야하는 상황도 그렇고 떼로 몰려나와 춤을 추는 모양새도 처음엔 흥겹더니 술판이 무르익으면서는 취객들 때문에 눈쌀이 찌푸려지는 장면이 자주 연출되었다. 수시로 잔치판에 불려다니느라 우릴 챙겨줄 시간이 별로 없었던 친구는 그제야 지루해하는 우리 태도를 눈치 챘는지, 먼저 가도 된다며 우릴 배웅했다.

잔치집을 나오며 나는 당시에 아직 멀게 느껴지는 부모님의 환갑잔치를 염려했던 것 같다. 혹시라도 우리 부모님이 그렇게 떠들썩하고 요란한 잔치를 원하면 어쩌나 싶었다. 무엇보다도 구경꾼처럼 모여든 하객들 앞에서 한복을 떨쳐입은 채 무대처럼 마련된 잔칫상 앞에 나아가 술잔과 절을 올린 뒤 나중엔 큰딸이랍시고 노래까지 한자락 불러야 하는 상황을 내 숫기로는 못견딜 듯했다. 세월이 흘러 부모님의 환갑잔치를 고민해야하는 시기가 닥쳤다. 다행히도 우리 부모님은 요란한 걸 싫어하시는 분들이었고, 환갑은 청춘이라며 다들 잔치대신 여행을 떠나는 세태도 나를 도왔다. 하지만 30년 넘게 다닌 직장의 정년퇴직과 맞물린 아버지의 환갑을 그냥 멀뚱히 넘길 순 없었다. 평소 생신에도 몇몇 친지들이 모여 <밥>은 먹어왔으니, 날 잡아서 조촐하게 <밥은 먹어야 한다>는 것이 어르신들의 의견이었다. 외할머니는 우리 아버지가 아무리 마다해도 환갑 기념이라며 맏사위를 위해 고운 한복까지 맞춰 보내셨다.  

환갑 안한다는데 왜 귀찮게 구느냐며 화를 내다시피 했던 아버지는 결국 친가, 처가 가족들이 모여 <간단히 밥을 먹는> 그 자리에 장모님 소원대로 엄마와 나란히 한복을 입고 참석하셨다. 음식점에 미리 부탁해서, 그간 은밀하게 아버지의 옛날 앨범을 뒤져 어릴 때부터 최근까지 사진을 모아 삼남매와 올케들의 영상편지까지 담은 영상물을 틀었던 그날 우리 삼남매와 다른 친척들은 다들 뿌듯해했지만 정작 주인공인 아버지는 몹시 민망해하셨던 것 같다. 바로 다음해였던 엄마의 환갑은 연달아 민폐를 끼칠 수 없다는 엄마의 완고한 고집으로 부부동반 여행으로 대체되었고, 또 10년은 안심해도 좋을 듯했다. 

그런데 오래 걸릴 것만 같던 10년이 어느새 흘러 엄마의 칠순생신을 고민해야 하는 때가 도래했다. 친척분들 모두 환갑은 건너뛰는 분위기여도 칠순에는 다들 모여 맛있는 밥을 먹어왔고, 가뜩이나 홀로 남은 엄마의 칠순 생신은 그냥 넘겨선 안된다는 것이 역시나 집안 어르신들의 의견이었다. "늬 아버지를 봐라. 그렇게 빨리 갈 줄 아무도 몰랐지만 그때 억지로라도 늬 아버지 환갑 안 챙겼으면 어쩔 뻔했니? 니들이 두고두고 마음에 한이 됐을 거다."

아버지 환갑 때도 음식점을 알아보고 친척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해 초청하는 과정을 내가 주동한 전적이 있었으며, 그땐 부모님 몰래 큰동생이 영상물 만드느라고 사진 고르고 녹화하고 제법 법석을 떨었는데도 즐겁기만 하더니 이번엔 왜 모든 과정이 온전히 스트레스로만 여겨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이번에도 주인공이신 왕비마마가 민망하다며 모임 같은 거 절대 하고 싶지 않다고 버티고 계시긴 하다. 하지만 "남편 앞서 보낸 여자가 무슨 염치로 생일잔치를 하느냐"는 엄마의 자학성 핑계는 용납되기 어려운 발언이다. 친척 어르신들은 엄마가 혼자 남았기 때문에 더더욱 칠순을 그냥 넘기면 안된다는데!

잔치가 아니라 그냥 밥 한끼 먹는 것 뿐이라며 엄마를 계속 달래는 한 편, 두 동생 부부와 의논하여 마땅한 장소를 물색하고 음식을 정하고 참석인원을 확인해 연락을 취하며, 나도 모르게 어린 시절의 치기 어린 소망이 다시 떠올랐다. 어쭙잖게 니체를 읽고 전혜린을 읽던 중고등학생 시절 나는 왠지 모르게 친구들에게 "딱 예순살까지만 살고 죽겠다"고 장담하고 다녔었다. 생존해 계셨던 할머니 할아버지의 삶과는 상관없이, 단지 나의 노년이 너무도 끔찍하게만 생각됐던 것 같다. 조부모님이나 부모님은 최대한 오래 사시는 게 좋겠지만, 나는 홀로 씩씩하게 딱 예순살 까지만 살다가 깨끗하게 죽겠노라고 말하면 친구들은 "그래 어디 두고보자"며 나를 흘겨볼 뿐이었다. 그런데 요번에 엄마 칠순을 준비하며 문득 세월이 흘러 나중에 누가 내 칠순 때문에 고민하고 스트레스 받는 것도 싫고 칠순이라며 주인공으로 떠밀리는 게 싫어서라도 차라리 <일흔살 되기 전에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저도모르게 하고 앉았더라는 뜻이다.

예순살까지 살겠다던 어린 시절의 나는 분명 환갑 잔치 따위는 염두에 둔 적이 없었고 다만 그 이후 노년의 삶이 막연히 구질구질할 것이라 상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칠순 생일의 부담으로 또 다시 내 수명을 재단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되살아나다니. 나란 인간은 도대체 어디가 잘못된 것일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엄마의 칠순을 <가족모임> 행사로 치르는 게 맞는 것 같기는 하다. 밥먹기 행사 대신 칠순에도 가족여행을 떠나는 집이 있다지만, 울 엄마의 건강으로 보나 시기적으로 보나 그건 실행되기 어려운 대안이다. 어차피 매년 우리끼리 생신밥은 먹어왔으니 그걸 좀 확대시킨 것뿐이라고 여기면 될 일이다. 문제는 부모님 형제가 많아놔서 그 자손들까지 모이면 4, 50명이나 된다는 점이다. 삼남매가 나누어 분담한다고는 해도, 규모가 그리 만만치는 않다. 분위기며 음식 맛, 입을 옷까지 시시콜콜 미리 걱정하는 나 같은 소심증 환자에게는 더더욱!

사실 욕을 좀 먹을 각오만 한다면, 친척 어르신들이 아무리 들쑤셔도 엄마 본인의 뜻대로 칠순같은 거 안 챙긴다고 통보한 뒤 시치미 뚝 떼고 그냥 조용히 지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엄마 건강이 좋지 않아 그렇게 되었다는 쓸만한 핑계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남들(친척도 남이라고 치면) 눈 의식해서 자식으로서 속물스럽게 생색을 내려는 태도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옛날부터 환갑이나 칠순 때 잔치를 여는 목적은 장수를 축하하기 위함도 있지만 자손들이 그 정도 거나하게 잔치를 해줄 수 있을 만큼 번창했음을 자랑하려는 노인들의 허세에서 비롯된 게 아니던가. 해서 일부 노인들은 자식들의 능력이 되든 말든, 잔치 때문에 빚을 지든 말든 남부끄럽지 않게 소리꾼들까지 불러다가 왁자지껄 노는 잔치를 강요한다던데, 울 엄마가 그런 부류의 노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깊이 감사할 일이지만 그냥 조용히 밥 한끼 먹는 것뿐이라고 여기래도 난감해하며 지레 생병을 앓아 속을 썩이는 상황도 녹록치가 않다.

과연 울 엄마의 진짜 속마음은 무얼까. 말로는 모임 안 했으면 좋겠다지만 내심 뿌듯해하며 잔칫날을 기다리고 계시는 건 아닐까. 아니면 내 의지에 반하는 칠순잔치의 억지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면 차라리 일흔살 되기 전에 죽어버리겠노라는 생각이 들만큼 회의를 느낀 내 마음처럼 엄마도 정말로 싫은 걸까. 그렇게 싫다는데 연회 예약을 취소하는 대신 엄마에게 그냥 못 이기는 척 따라오라고 말하는 나의 태도는 과연 옳은 것일까. 홧김에 다 확 취소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몇번씩 드는데, 정말로 그러면 울 엄만 잘했다고 칭찬을 해줄까.

어쨌거나 이젠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고 한달 넘게 나의 스트레스 지수를 극도로 높인 왕비마마의 칠순 모임이 겨우 엿새 뒤로 다가왔다. 토요일이 후딱 지나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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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망증

아픈 손가락 2010. 1. 9. 02:43
윙윙거리는 정적 속에 가끔 컴퓨터 자판 두들기는 소리만 툭탁거리는 새벽, 안방에서 자고 있던 엄마가 난데없이 작업실 방문을 열고 말했다. 자다가 생각하니 암만해도 이상해서 일어났다. 니네 아빠 참 이상하다. 어딜 가서 며칠 째 집에 안 들어오는 거니? 밤마다 신경안정제 기운으로 간신히 잠드는 엄마는 가끔 벌떡 일어나 엉뚱한 잠꼬대를 현실처럼 하는 바람에 사람을 놀래키지만, 그날은 나도 당황해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멍하니 바라보다 드디어 내가 입을 열었다. 잘 생각해 봐, 엄마. 아빠 어디 갔는지 기억 안나? 몹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던 엄마는 그제야 망연자실한 얼굴을 했다. 맞다, 니네 아빠 돌아갔구나. 그걸 어떻게 까먹었을까. 엄마 어쩌면 좋으니...  잠깐동안 더럭 겁이 났던 딸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며 엄마를 데리고 안방에 가 이불을 덮어드리고 나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새벽녘 잠결에 벌어진 그 같은 해프닝을 다음날에 엄마가 전혀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한 사람과 쌓은 50년의 추억과 습관이 단 2년만에 지워질 리 없다고 애써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보지만, 우울증이 심해져 가끔 섬망증까지 보이면 더럭 겁이 난다. 이건 분명 약 탓일 거야. 암. 그렇고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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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 10도

추억주머니 2009. 12. 18. 03:17
요샌 겨울이 돼도 영하 10도씩 내려가는 일이 거의 없었던 것 같은데 연일 강추위다. 이런 추위엔 본능적으로 동면모드에 접어들어 집구석에서 꼼짝도 하지 않아야 정상인데, 그놈의 요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외출을 하려면 아주 귀찮아 죽겠다. 어떤 날은 온종일 눈꼽도 안떼고 있다가 오밤중에 세수 한 번 하고 마는 게으름뱅이가 이틀에 한번은 제대로 씻고 떨쳐입고 나서야 하다니 말이다. 그나마 핫요가라 학원에만 가면 따끈따끈하기에망정이지, 추운데서 옷갈아입고 벌벌 떨어야 하는 요가였다면 애저녁에 관뒀을 거다.
째뜬 영하10도의 날씨는 중무장을 했어도 건물 사이로 휘몰아치는 도시의 칼바람엔 귀떼기가 떨어져나갈 것 같은 무서운 추위임을 새삼 실감했다. 목도리와 장갑으론 부족해 털모자를 썼어야 했다고 어찌나 후회를 했는지. 장갑 낀 손으로 귀와 코를 간간이 보듬다가 오래 전 추억이 떠올랐다. 아침 등교길에 춥다고 징징거리다 아버지한테 귓방망이를 얻어맞았던 사건.

5학년 때였나. 내복과 외투를 다 껴입고도 마당에서 얼굴 춥다고 징징대는 딸에게 목도리를 두르고 마스크까지 씌워줬던 아버지는, 내가 "그래도 밖으로 나온 눈이 춥다"고 계속 징징대자 참지 못하고 손지검을 했었다. 아버지는 아마도 뒤통수 정도를 갈기려고 했다가 얼떨결에 뺨을 때린 것도 같았는데, 그 이전까지 매라고는 가끔 동생들과 단체로 손바닥 정도나 맞아보았던 나는 너무도 큰 충격에 징징대던 울음까지 뚝 멎어버렸다. 더 혼나지 말고 얼른 학교나 가라고 채근하는 엄마 말대로 멍하니 집을 나서 학교로 향하며, 나는 아픔보다도 난데없는 배신감에 소리없이 뜨거운 눈물을 계속 쏟았던 것 같다. 아빠는 언제나 내 편이라 여겼던 고명딸의 자존심도 여지없이 무너졌음은 물론이다. 그날 저녁까지도 충격과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린 나는 아빠랑은 눈도 마주치지 않았고, 내 눈치를 보며 자꾸만 말을 거는 아빠에게 단답형으로만 대답했다.
결국 흐지부지 아빠와 화해를 한 건 틀림 없지만 아빠가 내 뺨을 때렸다는 사실은 어린 마음에도, 아니 3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 <대사건>이었다. 아버지도 그렇고 울 엄마도 그렇고 자식들을 사랑의 매로 다스리는 분들이 아니어서, 집에 분명 회초리는 존재했지만 특별한 체벌의 기억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기껏해야 방학숙제 밀렸다고 삼남매가 쪼르륵 서서 손바닥을 몇 대 맞았던 정도였는데, 내가 아빠에게 뺨을 맞다니.
물론 내가 아버지에게 뺨을 맞은 것은 인생을 통틀어 그 추웠던 겨울 아침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귓방망이 맞은 충격 때문에 며칠간이나 화를 풀지 않고 아빠의 눈길을 외면했던 나의 <시위> 때문이었는지 어쩐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삼남매 가운데서 아버지한테 뺨맞은 자식은 내가 유일할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동생들 만나면 한번 물어봐야겠다.

지구온난화 탓도 있지만 주거여건을 따져봐도 확실히 그때 겨울이 지금보다 훨씬 추웠다. 마루엔 널빤지가 깔려 당연히 난방이 안돼 추운 겨울날 맨발로 방에서 나와 디디는 것이 고역이었던 그 옛날의 한옥은 당연히 세수도 마당 수돗가에서 엄마가 솥에 데워놓은 더운물을 떠다가 해야 했다. 요즘 아이들에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처럼 들릴 삶의 모습들이 불과 내 어린시절의 추억이란 게 놀랍다. 자다 말고 내복 바람으로 옥외 화장실에 가야하던 그 때의 매서운 추위를 떠올리며 요즘 추위쯤 <요까짓것> 코웃음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고 본성이 간사한지라 그게 잘 안된다. 추운 거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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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이 예쁜 휴대폰을 보면 탐이 나긴 하지만 나는 웬만한 디카보다 성능 좋은 카메라에, 전체 화면이 터치식이고 동영상 재생 화질도 엄청 뛰어나게 만들었다는 초고가의 최신 유행 휴대폰에 별로 마음이 가질 않는다. 일단 기능이 많아지면서 꽤나 무거워졌다는 것이 첫째 이유이고, 내가 그 많은 기능을 거의 사용하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 둘째 이유다.
내가 휴대폰에서 쓰는 기능은 전화 걸고 받기, 카메라, 문자 메시지, 알람, 전화번호부, 메모장, 단순한 게임 하나(스토니^^), 아주 가끔 계산기와 스톱워치, 깜깜할 때 랜턴 대신(그나마 플래시 기능은 얼마 전에야 알았지만 귀찮아서 그냥 액정 불빛만 비춘다), 역시나 아주 가끔 DMB 시청(주로 차에서 엄마 드라마 보여드리느라)이나 몇곡 안되는 mp3 듣기가 전부다.
앞으로 휴대폰 기술이 엄청 더 진화한다고 해도 난 이 이상의 기능을 쓸 것 같지 않다. 휴대폰 화면이 아무리 좋아져봤자지, 고 작은 화면으로 뭘 보겠다고 오래오래 들여다보며 집중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신기하다. 난 멀미나던데...

암튼 휴대폰 기능 중에 음성메모도 있음을 알면서 그걸 써볼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영리한 친구들은 메모할 게 마땅하지 않을 때 통화내용을 아예 녹음해 나중에 확인한다는데 나는 운전중이 아니라면 굳이 메모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던 적도 없는 듯하고, 나중에 메뉴 버튼 눌러 음성메모 찾아가서 그거 확인하는 게 귀찮아서라도 상대에게 문자로 한번 더 보내달라고 부탁하고 만다. 실제로 음성메모 기능을 파악해 유용하게 써먹는 사람이 과연 주변에 얼마나 될까?

그런데 <자신도 모르게> 음성메모 기능을 열심히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휴대폰 회사마다 기능 버튼이 다 다르겠지만 몇년 전에 나온 모 회사의 휴대폰은 통화중에 기기 옆면에 달린 여러 버튼을 누르면 통화음을 크게 하거나 줄일 수도 있고 또 어떤 버튼을 아주 길게 누르면 통화 내용이 녹음된다. 요즘 대세라는 터치폰도 기기 옆쪽에 그런 기능 버튼이 달려있는지 어쩐지 안 써봐서 잘은 모르겠는데, 통화중 음성메모 기능을 사용하려면 손쉽게 작동할 수 있어야 하므로 비슷한 원리가  적용됐을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주로 휴대폰 사용에 서툰 어르신들이 자기도 모르게 통화내용을 음성메모함에 녹음해 놓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완전히 기계치인 분들은 또 곤란하고, 휴대폰 통화음을 조절할 수 있다는 정도는 알아야한다는 전제가 필요하긴 하다.

지금 왕비마마가 쓰고 계신 휴대폰은 둘째 조카인 준우왕자 탄생 기념으로 아버지가 장만하신 거라 만 7년이 지난 구형 슬라이드폰이다. 액정이 좀 작아 문자메시지를 읽고 보내는 게 불편하긴 하지만 원래부터 기계치인 영자씨는 전화를 걸고 받기만 하면 그뿐이고 문자가 와도 일일이 무수리가 읽어드려야 하니 사용엔 전혀 문제가 없다. 오히려 거기 달린 카메라를 전혀 못쓰는 걸 안타까워하실 정도. 깨끗하게 써서 아직도 새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휴대폰은 혹시 나중에 왕비마마가 다른 휴대폰으로 바꾸게 된다해도 영영 버릴 수 없는 보물이 되었다.
거기 녹음된 음성메모 때문이다. 왕비마마는 전화 받다가 잘 안들려도 휴대폰 통화음을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시므로, 거기 녹음된 내용은 모두 이전 사용자가 무의식중에 남기신 거다.
주로 등산 갔다 오시면서, 어디쯤 왔노라고, 엄마에게 저녁 반찬 거리로 무얼 사갈 것이 있느냐고 묻거나, 일일 드라마 잘 보고 있다가 나중에 내용 들려달라고 당부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열 개나 휴대폰 음성메모에 담겨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거의 1년이나 뒤에 알게 되었다. 그것도 할머니 휴대폰으로 장난을 하던 정민공주의 발견으로. 더 오래된 엄마 휴대폰을 해지하고 아버지 유품을 엄마가 쓰시도록 결정하지 않았더라면 영영 그 존재도 모르고 지나갔을 것이라 생각하면 참 놀랍다. 

아버지의 청년시절 일기장을 장농에 넣어놓고 잘 꺼내보지 못하는 것처럼 아버지의 목소리도 너무 슬퍼서 좀처럼 듣게 되질 않는데, 추석 전 성묘를 갔다가 어차피 울 거니깐 까짓것 하면서 다시 듣고 나서 생각해보니 누가 개발해낸 것인지 몰라도 휴대폰에 음성메모 기능을 그렇게 쉽게 작동하도록 넣어둔 기술자에게 대단히 고맙다. 그리고 블로그 이웃들과 지인들에게도 그런 기능과 어르신들의 오작동 가능성에 대해서 알려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의 휴대폰 음성메모함에 의외의 추억이 담겨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이번 추석에 고향에 내려가거나 연휴동안 집에서 부모님의 휴대폰에 접근하게 된다면 슬쩍 한번 찾아보시길 권한다. 우리 아버지 말고도 무심코 휴대폰 음성메모함에 통화내용을 녹음해둔 분이 또 계시면 정말 나도 기쁠 것 같다. 특히 무뚝뚝하게 툴툴대는 자식과 정겨운 부모님의 대화가 녹음된 소중한 보물을 건진 분이 계시다면 꼭 알려주시기를. 나 또한 통화중에 휴대폰 음량을 자주 조절하는 편이라 실수로 녹음해놓은 게 없나 살펴봤지만, 아쉽게도 내 휴대폰 음성메모함은 텅 비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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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

삶꾸러미 2009. 8. 10. 16:21

어느 책에선가 국수가 혁명가들의 음식이란 얘기를 봤다. 후루룩 먹고 또 일을 해야하기도 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이 기다란 국수발을 끊지 않고 목으로 넘기며 죽음을 경험하는 거라나 뭐라나. 비약이 심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최소한 국수가 노동자의 음식일 순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입맛 없어도 면발 몇 줄기 삼키는 건 누구나 가능하고, 노동의 중간에 후다닥 끼니를 해치우기엔 국수만한 것이 없는데다 값도 싼편이니까. 물론 전통의 맛을 아직도 이어오고 있다는 우래옥이나 을지면옥의 냉면은 사먹으려면 7, 8천원이나 하는 고가(?)의 음식이 되었지만 몇만원짜리 만찬에 비하면야 뭐. 

국수 애호가였던 이북 출신의 조부모님과 오래 살면서 나 역시 국수를 어려서부터 먹고 자랐고 지금도 퍽이나 좋아한다. 내가 파스타류를 특히 좋아하는 것도 국수와 워낙 친근하기 때문이 아닐까. 암튼 할머니댁에서 살 때나 나중에 분가후 주말에 다니러 다닐 때도 그 옛날 여름이면 점심끼니는 으레 국수였다. 평안도 출신 답게 물냉면 아니면 비빔국수. 멸치다시를 내서 뜨거운 육수에 말아먹는 잔치국수는 아무래도 서울이나 남도쪽 음식인듯 집에서 해먹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그저 매일 냉면냉면... 맛있는 동치미 국물을 늘 마련해놓은 것도 아니어서 인스턴트로 파는 마른 냉면을 사다가 삶고 거기 딸려오는 봉지스프로 육수를 대강 만들어 먹는 건데도 삶은 달걀 하나만 얹어 있으면 어찌나 맛있게 여겨졌던지. 할머니가 신김치 송송 썰어 참기름과 설탕을 약간 넣고 맨손으로 고추장과 함께 조물조물 국수에 비벼 주시던 비빔국수의 맛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어린 시절엔 동네마다 국수가게가 있어서 빨래를 널듯 긴 젖은 국수를 기다란 가로대에 걸쳐 높은 건조대에 척척 올려놓았다가 다 마르면 걷어서 잘라 팔았다. 그땐 쌀이 부족할 때라 혼분식을 장려하기도 했고 안 그래도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집집마다 국수를 참 많이도 먹고 살았던 모양이다. 국수 심부름을 가는 것도 늘 내 차례였는데, 신문지에 크게 한움큼 싸준 국수를 사들고 오며 나는 한줄기씩 그 밀가루 국수를 뽑아 과자처럼 오독오독 끊어 씹어먹으며 즐거워했다. 엄마는 배탈난다고 질색을 했지만, 국수 삶는 걸 기다리는 동안 동생들과 나는 엄마 몰래 얼른 마른 국수 한두 줄기를 뽑아 씹으며 좋아했었다. 여름이면 우리 식구들은 냉면도 좋아했지만 콩국수를 좋아하는 아버지 때문에 유난히 콩국수를 더 많이 해먹었던 것 같다. 학교 급식제도가 막 시작되고 있던 시절이라 그 땐 일주일에 한번씩 우유 대신 유리병에 든 두유가 빵과 함께 나오곤 했는데, 나는 지금이나 그 때나 단맛을 가미한 콩국물을 절대로 못먹는 반면(편식은 안된다며 담임선생이 억지로 먹였다가 다 토해버린 기억이 있다) 소금을 쳐 고소한맛이 더욱 강조된 콩국물은 몹시 좋아했다. 콩을 덜 삶으면 콩비린내가 나고 너무 삶으면 메주냄새가 나기 때문에 콩국수를 맛있게 만드는 건 참 어려운 일이라고 엄마는 늘 푸념을 하면서도 매번 맛있는 콩국수를 만들어주셨던 것 같다. 몇해 전 나도 큰 마음 먹고 흰콩을 사다 삶아 손수 콩국수를 만들어보았지만, 콩이 옛날 콩이 아닌 때문인지 그 옛날처럼 고소하고 뿌듯한 맛은 결코 나지 않았다.

어쨌거나 푹푹찌는 날씨가 이어지고 있는 요즘도 점심끼니는 거의 언제나 국수다. 더욱이 마트에 나가보면 다양한 국수 종류는 물론이고 평양냉면 육수며 콩국물까지 1인분씩 봉지에 담아 팔고 있으니 금상첨화. 이런저런 브랜드 냉면을 죄다 사먹어 보니 굳이 완제품으로 비싸게 호화포장된 냉면을 세트로 살 필요가 없었다. 그냥 저렴하게 포장된 생냉면을 사고 제일 싼 봉지육수를 골라도 완성후의 맛은 거의 똑같다. 반면에 콩국물은 브랜드별로 가격과 맛의 차이가 심한 편인데, 딱히 내 입맛에 맛는 정말 고소한 콩국물은 발견하지 못했으나 그래도 *무원이가 만든 콩국물이 *정원이네서 만든 것보다 낫더라. ^^

그저께 점심은 물냉면, 어제는 콩국수, 오늘은 크림스파게티. 그끄저께는 열무비빔국수를 해먹었을 텐데, 지난주에 사온 육수와 콩국물을 다 먹었으니 내일은 또 다시 비빔국수 차례. 연일 너무 더워서 입맛이 없으니 자꾸만 차가운 것만 찾아서 그러는지 계속 배탈기가 있어서 오늘은 일부러 스파게티를 해먹었는데도 속이 편하질 않다. 이어지는 밀가루 세례를 감히 내 뱃속이 거부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냥 더위와 스트레스에 심신이 지쳐버린 것일까. 그래도 확실히 국수는 식욕이 없는 와중에도 일단 입안에 넣으면 술술 잘도 넘어가니 신기하다. 말년에 이가 부실해 단단한 음식은 거의 못드셨던 우리 할머니가 유독 소면을 좋아하셨던 눈물겨운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밥먹기 귀찮은 심정으론 저녁끼니도 국수로 대충 때우면 좋겠구만 그럴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내일 점심때 비빔국수는 특히 맵게 비벼먹고 나면 늘어진 정신줄이 좀 팽팽해지려나. 국수 한 그릇 먹자마자 얼른 또 컴퓨터 앞으로 돌아와야 하는 요즘의 나를 보면 국수가 노동자의 음식인 건 맞는 듯도 한데, 왕비마마는 무슨 죄람. 고종황제도 냉면을 즐겨먹었다는 이야기로 위로를 해드려야 할까보다. ㅎㅎ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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