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이 예쁜 휴대폰을 보면 탐이 나긴 하지만 나는 웬만한 디카보다 성능 좋은 카메라에, 전체 화면이 터치식이고 동영상 재생 화질도 엄청 뛰어나게 만들었다는 초고가의 최신 유행 휴대폰에 별로 마음이 가질 않는다. 일단 기능이 많아지면서 꽤나 무거워졌다는 것이 첫째 이유이고, 내가 그 많은 기능을 거의 사용하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 둘째 이유다.
내가 휴대폰에서 쓰는 기능은 전화 걸고 받기, 카메라, 문자 메시지, 알람, 전화번호부, 메모장, 단순한 게임 하나(스토니^^), 아주 가끔 계산기와 스톱워치, 깜깜할 때 랜턴 대신(그나마 플래시 기능은 얼마 전에야 알았지만 귀찮아서 그냥 액정 불빛만 비춘다), 역시나 아주 가끔 DMB 시청(주로 차에서 엄마 드라마 보여드리느라)이나 몇곡 안되는 mp3 듣기가 전부다.
앞으로 휴대폰 기술이 엄청 더 진화한다고 해도 난 이 이상의 기능을 쓸 것 같지 않다. 휴대폰 화면이 아무리 좋아져봤자지, 고 작은 화면으로 뭘 보겠다고 오래오래 들여다보며 집중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신기하다. 난 멀미나던데...

암튼 휴대폰 기능 중에 음성메모도 있음을 알면서 그걸 써볼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영리한 친구들은 메모할 게 마땅하지 않을 때 통화내용을 아예 녹음해 나중에 확인한다는데 나는 운전중이 아니라면 굳이 메모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던 적도 없는 듯하고, 나중에 메뉴 버튼 눌러 음성메모 찾아가서 그거 확인하는 게 귀찮아서라도 상대에게 문자로 한번 더 보내달라고 부탁하고 만다. 실제로 음성메모 기능을 파악해 유용하게 써먹는 사람이 과연 주변에 얼마나 될까?

그런데 <자신도 모르게> 음성메모 기능을 열심히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휴대폰 회사마다 기능 버튼이 다 다르겠지만 몇년 전에 나온 모 회사의 휴대폰은 통화중에 기기 옆면에 달린 여러 버튼을 누르면 통화음을 크게 하거나 줄일 수도 있고 또 어떤 버튼을 아주 길게 누르면 통화 내용이 녹음된다. 요즘 대세라는 터치폰도 기기 옆쪽에 그런 기능 버튼이 달려있는지 어쩐지 안 써봐서 잘은 모르겠는데, 통화중 음성메모 기능을 사용하려면 손쉽게 작동할 수 있어야 하므로 비슷한 원리가  적용됐을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주로 휴대폰 사용에 서툰 어르신들이 자기도 모르게 통화내용을 음성메모함에 녹음해 놓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완전히 기계치인 분들은 또 곤란하고, 휴대폰 통화음을 조절할 수 있다는 정도는 알아야한다는 전제가 필요하긴 하다.

지금 왕비마마가 쓰고 계신 휴대폰은 둘째 조카인 준우왕자 탄생 기념으로 아버지가 장만하신 거라 만 7년이 지난 구형 슬라이드폰이다. 액정이 좀 작아 문자메시지를 읽고 보내는 게 불편하긴 하지만 원래부터 기계치인 영자씨는 전화를 걸고 받기만 하면 그뿐이고 문자가 와도 일일이 무수리가 읽어드려야 하니 사용엔 전혀 문제가 없다. 오히려 거기 달린 카메라를 전혀 못쓰는 걸 안타까워하실 정도. 깨끗하게 써서 아직도 새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휴대폰은 혹시 나중에 왕비마마가 다른 휴대폰으로 바꾸게 된다해도 영영 버릴 수 없는 보물이 되었다.
거기 녹음된 음성메모 때문이다. 왕비마마는 전화 받다가 잘 안들려도 휴대폰 통화음을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시므로, 거기 녹음된 내용은 모두 이전 사용자가 무의식중에 남기신 거다.
주로 등산 갔다 오시면서, 어디쯤 왔노라고, 엄마에게 저녁 반찬 거리로 무얼 사갈 것이 있느냐고 묻거나, 일일 드라마 잘 보고 있다가 나중에 내용 들려달라고 당부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열 개나 휴대폰 음성메모에 담겨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거의 1년이나 뒤에 알게 되었다. 그것도 할머니 휴대폰으로 장난을 하던 정민공주의 발견으로. 더 오래된 엄마 휴대폰을 해지하고 아버지 유품을 엄마가 쓰시도록 결정하지 않았더라면 영영 그 존재도 모르고 지나갔을 것이라 생각하면 참 놀랍다. 

아버지의 청년시절 일기장을 장농에 넣어놓고 잘 꺼내보지 못하는 것처럼 아버지의 목소리도 너무 슬퍼서 좀처럼 듣게 되질 않는데, 추석 전 성묘를 갔다가 어차피 울 거니깐 까짓것 하면서 다시 듣고 나서 생각해보니 누가 개발해낸 것인지 몰라도 휴대폰에 음성메모 기능을 그렇게 쉽게 작동하도록 넣어둔 기술자에게 대단히 고맙다. 그리고 블로그 이웃들과 지인들에게도 그런 기능과 어르신들의 오작동 가능성에 대해서 알려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의 휴대폰 음성메모함에 의외의 추억이 담겨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이번 추석에 고향에 내려가거나 연휴동안 집에서 부모님의 휴대폰에 접근하게 된다면 슬쩍 한번 찾아보시길 권한다. 우리 아버지 말고도 무심코 휴대폰 음성메모함에 통화내용을 녹음해둔 분이 또 계시면 정말 나도 기쁠 것 같다. 특히 무뚝뚝하게 툴툴대는 자식과 정겨운 부모님의 대화가 녹음된 소중한 보물을 건진 분이 계시다면 꼭 알려주시기를. 나 또한 통화중에 휴대폰 음량을 자주 조절하는 편이라 실수로 녹음해놓은 게 없나 살펴봤지만, 아쉽게도 내 휴대폰 음성메모함은 텅 비어있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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