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 해당되는 글 56건

  1. 2009.08.07 오래 된 선풍기 13
  2. 2009.06.15 그럴듯함 27
  3. 2009.05.21 품위있게 죽을 권리 3
  4. 2009.01.24 사진 7
  5. 2008.12.09 남산 케이블카 27
  6. 2008.09.25 맘마미아 13
  7. 2008.05.28 앵두나무 13
  8. 2008.05.16 마지막 장조림과 우족탕 17
  9. 2008.02.04 헤이리와 공동묘지 8
  10. 2008.01.24 뜬금없는 여행 8
내 기억속의 가장 오래된 선풍기는 지금처럼 온통 몸체가 플라스틱이 아니라 튼튼한 철제 구조에 드르르륵 로터리식 손잡이를 돌려 20단계쯤 풍량을 조절할 수 있고, 회전조절 장치는 둥그런 날개판 뒤쪽의 목덜미에 배꼽처럼 달려 있는 것으로 아마도 상표가 <도시바>였던 것 같다. 그 선풍기는 어찌나 튼튼한지 30년쯤을 쓰고도 멀쩡했고 풍량을 미세하게 조절할 수 있어 제일 느린 바람으로 틀어놓으면 밤새도록 바람을 쐬어도 문제가 없어 해마다 5월부터는 무조건 선풍기를 끼고 사셔야 하는 열혈남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었다. 당연히 110볼트 제품이라 트랜스로 감압을 해야 쓸 수 있다는 단점이 있긴 했으나 몇년 전까지도 멀쩡히 사용했는데, 그 선풍기가 어쩌다 우리집에서 사라졌는지 그 부분이 기억에 없다. 결국 망가지고 말았었나??
여름이면 방방마다 TV와 선풍기를 각자 돌려대는 건 우리집 식구들의 고질병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에어컨을 설치하고 난 뒤에도 우리집엔 선풍기가 늘 석 대는 완비되어 있었다. 에어컨은 두세 배로 뛸 전기요금을 감당해도 좋겠다는 마음이 들 만큼 못견디게 덥거나 동생네 식구들까지 모두 와 좁은 집에서 득시글거릴 때나 트는 물건이니까.
사라진 <도시바> 선풍기만큼 오래되진 않았어도 아직 멀쩡한 우리집 선풍기 가운데는 이제 LG로 이름을 바꾼지 오래인 <골드스타> 선풍기가 있다. 금성, 골드스타에서 LG로 이름을 바꾼 게 최소한 10년은 넘은 듯하니, 그 녀석의 수명은 그 이상이란 얘기다. 작년 여름 끝무렵에 멀쩡히 돌아가던 날개가 깨져버리는 바람에 그만 버려야 하나 고민하던 나는 모델 번호로 LG 전자제품 AS센터 사이트를 찾아보았는데, 고맙게도 모델명이 아직 남아 있었다. 작년엔 그냥 날개 없는 선풍기를 잘 닦아 넣어두었고 올 여름이 시작되면서 나는 굳이 AS센터엘 가서 날개를 사다 끼웠다. 원래 여름마다 아버지는 제일 신제품이고 디자인이며 색깔도 화사한 LG 선풍기를 내방에 놓아 주셨는데, 이제 그건 왕비마마가 쓰셔야 할 것 같아 곧 골동품 반열에 들게 될 골드스타 선풍기를 내가 차지한 거다. 
그런데 이 선풍기가 요즘 들어 어째 좀 시원치를 않다. 큰 이상은 없는데 회전할 땐 멀쩡하다 고정만 시켜두면 뭔가 틱틱 걸리는 소리가 들리는 거다. 마감모드랍시고 몹시 예민해져 있는 상태에서 그런 미묘한 소리는 이상스레 내 신경을 긁기 때문에 참을 수가 없는데, 모니터와 컴퓨터 본체에서 뿜는 열기를 하루 열몇시간씩 견디려면 선풍기는 필수고 그렇다고 종일 에어컨을 틀자니 아침저녁으론 꽤 선선한 날씨에 나만 뭐하자는 짓인가 싶다. 
마감 스트레스 때문에라도 갑자기 확 열이 오르면 대낮엔 간간이 에어컨을 틀기도 하지만 컴퓨터 열기를 날려보내는 방향으로 고정시켜두는 선풍기의 존재는 밤낮으로 나에겐 필수적. 틱틱거리는 소음이 싫어 휘휘 회전시킨 선풍기로는 성에 안찬다는 얘기다.
하는 수 없이 어젠 또 하나의 선풍기를 꺼냈다. 망가진 <도시바> 선풍기의 대체품으로 사들였거나 어디선가 포인트 사은품으로 받은 듯한 선풍기엔 <더위사냥>이라는 제품명과 **해상 1억 배상책임보험을 자랑하는 문구가 적혀 있지만 처음 들어보는 브랜드다. 산지 몇년 된 듯하지만 여전히 새것처럼 말끔해 보여 반색을 하며 선풍기를 작동시켰더니...
ㅋㅋㅋ 미풍 버튼을 누르면 날개가 용을 쓰듯 천천히 돌아가며 시동을 걸다가 한참이 지나야 제 속도를 내며 돌아간다. 거의 종일 틀어놓고 있으니 상관없을지도 모르지만,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는 이 선풍기 갑자기 서버리면 어쩐다 걱정이 들 수밖에 없다. 예전엔 모든 전자제품을 수리해주는 <전파상>이 동네마다 있었지만 요샌 웬만한 전자제품 AS는 모두 자체 회사가 운영하는 곳에서 담당하니 <전파상>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럼 이렇게 이름 없는 회사에서 만든 전자제품은 어디에서 수리를 하라고? 싼맛에 사서 쓰다 고장나면 버리는 1회용이란 뜻인가?
틱틱 소리를 내는 <골드스타> 선풍기는 아마도 LG AS센터에 가면 수리를 받을 수 있을 것도 같다. 대형 가전과 달리 선풍기는 들고 가서 수리를 받아야한다는 난점이 있어 과연 내가 그런 수고로움을 극복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집안내력상 아마도 쉬이 내다버리진 못할 거다. 최소한 회전으로 틀어놓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볼 수도 있고, 오래된 물건엔 어쩐지 이런저런 역사가 담겨 있는 것 같아 선뜻 내다버리지 못하는 성향은 나의 우유부단함과 함께 혈통에 잠재된 DNA의 결과인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식구가 30년 가까이 이 좁은 집에서 오래된 짐을 그대로 껴안은 채 살고 있지 않았겠지.
생각해보니 오래된 추억의 <도시바> 선풍기가 30년 넘게 여름을 지켰던 데는 솜씨 좋은 아버지와 전파상 아저씨의 거듭되는 손질이 주효했던 것 같다. 누렇게 변한 전선과 플러그 연결부분에 검은 테이프가 감겨 있던 게 생각나는 걸 보면 말이다. 드르르륵 둥근 손잡이를 오래 돌려야하는 그 <도시바> 선풍기가 여름마다 마루를 차지하고 있는 걸 창피하게 여기던 때도 있었는데, 지금의 나는 그나마 제일 오래된 <골드스타>가 완전히 고장나면 어쩌나 걱정을 하고 있다. 겉보기엔 아직 멀쩡한데... 아직 10년은 더 쓸 수 있겠는데... 그러면서. 
노인들이 오래된 물건을 차마 버리지 못하는 건 자신의 처지를 물건에 투사하기 때문이란 얘기를 어디선가 들었다. 망가지고 생채기 나 쓸모 없어지게 되어 외면받는 물건에서 늙고 병들어 가는 자신들의 종말을 바라보기 때문에 어떻게든 고쳐 쓰고 싶어 하거나, 그냥 끌어안고 산다는 의미다. 
나는 옛날부터 오래된 물건을 못 버리는 사람이었고 아직도 낡은 물건의 처지에 스스로를 투사할 만큼 늙은 건 아닌데도 어쩐지 이렇게 나이들어가는구나 하는 실감이 든다. 오래 된 선풍기 하나 때문에 이렇게 구질구질 시시콜콜 넋두리를 늘어놓는 것만 봐도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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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듯함

삶꾸러미 2009. 6. 15. 17:39

당신은 속설이나 미신, 사람들이 근거의 여부와 상관없이 그럴듯하다고 여기는 이야기들을 잘 믿는 편인가, 아닌가? 누가 이런 질문을 나에게 한다면, 대번에 <안 믿는 편이다>라고 대답<은> 할 것 같다.
현재 가장 널리 퍼져 있고 마케팅에도 이용되고 있는 듯한 <혈액형별 성격 분류>의 경우엔 정말이지 웃긴다고 생각하니까. A형은 소심하고 O형은 외향적이니 하는 게 정설처럼 여겨지고 있지만, 어떻게 모든 인류의 대표적인 성격과 심리를 단순히 네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단 말인가! 
모든 인간은 밖으로 드러내는 부분이 다를 뿐, 온갖 심리와 특징을 내포하고 있기 마련이다. 그 성격이 드러나고 개발되는 경향은 환경과 교육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와 일본 국민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세계인들은 평생 자기 혈액형이 뭔지 모르고도 잘만 살아가는데, 혈액형별로 공부법, 성공법, 옷입는 법, 연애법까지 버젓이 엄연한 진리로 회자되고 받아들여지는 상황을 보면 너무도 신기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도 어려서부터 혈액형별 성격 및 심리 유형에 노출된 나머지 그렇게 재교육되고 길들여지는 게 틀림없다. 내 주변에서도 참 많은 지인들이 혈액형 속설을 깊이 신뢰하며 친구끼리도 궁합과 코드가 서로 맞느니 안맞느니 할 때 혈액형을 들먹이다 나한테 쓴소리를 듣는다. 그래봤자 그들은 결국 "역시 언니는 A형이라 까다롭고 따지길 좋아해.."라고 일갈하며 내 말문을 막아버리지만.
물론 철석같이 믿진 않아도 재미삼아 보는 사주풀이라든지 타로점, 이름풀이 같은 기회를 나 역시 마다하진 않는다. 그러고 나서 그 결과가 내가 믿고 싶은 방향이거나 놀랍게도 내 생각과 일치하는 경우, 감탄과 함께 희희낙락 역시 타고난 운명이었어, 라며 잠시 즐거워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나도 말로는 속설이나 미신을 안 믿는다고 하면서 뒷구멍으로 솔깃해 하는 의지박약인이란 얘기일 수도 있다. 뭐라는 거냐냐, 이랬다 저랬다.
어쨌거나 얼마 전 블로그 이웃인 해리님의 전생과 관련한 포스팅을 보고 나도 재미삼아 내 이름 한자를 넣어 보았는데 그 결과가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 화면을 저장해두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난주 아버지 제사 때, 조카들이 대낮부터 깎은 밤이며 여러가지 제사 음식들을 먼저 먹고 싶어 안달복달을 하는 걸 본 엄마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말했다. "그런 거 보면 귀신 없다는 소린 못한다니까...."
영문을 몰라 내가 설명을 요구하자 엄마는 예로부터 아이들이 제사 때 제사음식을 먼저 탐하면 혼백들이 와서 먹을 준비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단다. 아이들의 영혼이 가장 맑아 통하는 구석이 있는 거라나 뭐라나.
물론 논리적인 사고로는 상황이 빤히 짐작되는, 말도 안되는 미신이다. 옛날엔 당연히 제사음식들이 귀했을 테고, 일년에 겨우 몇번 보는 귀한 음식을 접한 아이들이 입맛이라도 다셔보려면 자정 이후에 지내는 제사때까지 기다려야 했을테니 얼마나 안타까워 엄마를 졸라댔을까. 그걸 본 어른들이 만들어낸, 조상의 혼백이 정말로 제삿날 찾아와 차려놓은 음식을 즐기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조합한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짐작을 하면서도, 나 역시 제사를 지낼 때 정말로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의 혼백이 와서 지켜보고 계시는지 아닌지 확인할 수 없으되 마음속으로는 정말로 그런 것처럼 인삿말을 되뇌이며 절을 한다. 성묘를 갔을 때도 마찬가지고, "고수레~"라고 외치면서 땅신이든 부엌신이든 귀신에게 먼저 먹을 것을 바치고 그런 다음에 인간이 준비한 음식을 먹는 민간신앙도 꽤 그럴듯하고 재미나다 여겨 따라하는 편이다.
공포영화는 절대 못보고 보지도 않으며 인간을 괴롭히는 <무서운 귀신>이 있다는 건 믿지 않지만, 모든 사물에 혼이 깃들어 있을 수 있다는 범신론엔 또 고개가 끄덕여진다. 과학적인 사고로는 죄다 헛되다 손가락질해야 하는 것들임에도 그냥 내가 그때그때 느끼기에 그럴듯하면 귀가 솔깃하고 안 그럴듯하면 코웃음친다는 뜻이다.
나 또한 그렇기 때문에 별자리 운명이나 혈액형별 심리분석을 철저히 신봉하는 이들을 나무랄 수만도 없다. 내가 보기엔 100퍼센트 사기꾼이고 뚜렷한 증거도 있는 범죄자인데, 그런 사람을 <믿고> 한 나라의 지도자로 뽑기도 하는 세상에서 사람에 따라 어떤 믿음인들 그럴듯하지 않겠나. 결국 사람들은 그냥 <믿고싶은> 것일 뿐이다. 내 현재의 두뇌엔 정말로 놀 욕망과 돈 벌 걱정이 가득 차 있다고 믿고 싶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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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 대법원에서 존엄사 권리를 인정한 원심을 확정하는 판결을 내렸다는 뉴스를 보았다. 소송중이었던 환자는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것 같은데, 얼마 전 서울대병원에서도 말기암 환자의 경우엔 별 의미 없는 연명치료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겠다고 발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도덕적으로 지탄받지 않을 존엄사의 범위와 관련법 제정 문제는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그나마도 다행스러운 방향으로 진척이 있는 듯 해 기쁘다. 소모적인 중병으로 오래 앓지 않고 편히 자연사를 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으나, 사람 일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고 수명이 나날이 길어지면서 말년에 온갖 병마에 시달릴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 게 사실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죽음을 맞게 되어 있지만, 자살을 제외하곤 그 운명의 순간을 자기 의지대로 결정할 방도가 없었다. 갑작스레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는 물론이고 이제껏 중병에 걸린 환자의 치료방향에 대한 결정권은 언제나 의사와 보호자의 몫이었다. 입원할 때부터 치료비를 담보할 수 있는 연대보증인을 반드시 세워야 하고, 아주 간단한 수술에도 각종 의료사고에 대한 온갖 책임을 다 짊어지겠다는 보호자의 동의서가 필수적인 이 나라 의료체계에서는 무엇 하나 환자 본인의 적극적인 의지대로 되는 것이 없다.
그런데 회생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황에 의미도 없고 소모적이기만 한 연명치료를 무작정 이어가며 환자 본인과 가족들을 경제적,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뜨릴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치료비가 없거나 병상이 모자라다는 이유로 살아날 가망성이 있는 환자의 목숨을 비정하게 끊어버려도 괜찮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건 당연히 살인이고 파렴치한 범죄임을 모르는 이가 어디 있겠나. 하지만 치료의 단계가 아예 불가능해져서 진통제로도 고통을 제대로 줄여줄 수 없고, 전적으로 기계장비에만 의존해 고통스럽게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터라 죽음의 순간을 억지로 지연시키고 있을 뿐이라면, 그 환자가 바로 나라면 나는 환자의 인권따위를 운운하는 게 하찮게 보이는 중환자실의 숨막히는 공기를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을 것이고, 기꺼이 편한 죽음을 선택할 것이다.

물론 가족의 입장에선 또 마음이 달라짐을 나 역시 잘 안다.
2년 전 응급실에 도착해서도 멀쩡히 걸어다니며 농담을 하시던 아버지가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져 다시는 깨어나시지 않았을 때, 우리 가족들은 냉정하게 가망성을 낮춰 말하는 의사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우린 의사들을 믿느니, 일주일에 세번씩 꼬박 등산을 다니시던 울 아버지의 의지력과 건강을 믿는다며, 고집을 부렸다. 겨우 2주만에 뇌손상으로 적극적인 치료는 전혀 할 수 없는 상황이니 요양병원 같은 곳으로 모시고 나가라는 세브란스 병원측의 몰인정한 통보를 받고도 우린 아버지가 곧 깨어나실 것이기 때문에 믿음직한 의료진이 없는 요양병원 같은 곳은 절대 갈 수 없다고 버텼다. 결국 온갖 연줄과 인맥을 동원해 다른 대학병원으로 아버지를 옮기고 나서도 우린 희망을 버릴 수 없었고, 의사들은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든말든 우리 가족들은 아버지의 장기 입원에 대비해야 한다고 의논을 했었다. 그땐 정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고, 그렇게 온갖 주사와 약물로 버티고 있으면 기적 같은 게 일어나 아버지가 조만간 번쩍 눈을 뜨실 거라고 믿고 싶었다. 나날이 약물과 주사의 양이 늘어났고, 체액순환이 거의 안되는 아버지의 체중도 늘어났다. 의사들은 <뇌사 직전의 상태>라고 말하며 우리에게 포기를 종용하는 눈치였지만, 우리는 <아직 뇌사는 아니지 않느냐>고 항변했다.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해달라고 우기는 우리들에게 의사들은 그나마 아버지가 그 어떤 고통도 느끼실 수 없으니 다행이라는 식으로, 아버지를 우리가 쓸데없이 괴롭히고 있는 것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며 말했었다. 마지막엔 거의 협박처럼 들리는 말을 들어야 했다. 보호자들의 고집 때문에 무리한 치료를 계속하게 되면 나중에 임종후에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될 수도 있다고. 우리 아버지도 그 병원으로 옮긴 뒤부터 따져도 이미 10kg이나 체중이 늘었다고. 나중에 후회하지 말라고.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의사들이 냉혹하게 퍼센티지로 말하는 가망성에 연연하지 않고 온갖 치료방법을 동원해 아버지를 살려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 틀림없다. 최선을 다해보지도 않고 쉽사리 처음부터 포기할 가족이 어디 있겠나. 야속한 우리 아버지는 그렇게 한달도 채 버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는데, 너무 많이 부어 평소의 모습과 퍽 달라진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마음 한켠에 죄송한 마음이 들긴 한다. 억지로 온갖 약물과 주사액을 주입하던 과정에서 혹시 아버지가 고통을 느끼셨던 건 아닐까, 내 마음 편하자고 심한 고집을 부린 건 아니었을까. 하지만 죄송한 마음은 마음이고, 가족으로서 품는 희망은 쉽게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어느쪽을 선택했더라도 후회는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여한없이 노력하고 버텨보는 쪽을 택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환자의 입장이라면 생각이 달라진다. 아버지가 세브란스병원 심장혈관센터 중환자실에 계시는 동안 그곳 의료진들은 무의식인 환자의 치료를 편하게 하겠다는 생각 때문인지 아버지에게 환자복도 입히지 않은 채 얇은 시트로 덮어놓기만 했었다. 중환자실에서도 홀로 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고, 체온이 수시로 오르내리고 해당 바이러스에 맞는 항생제를 찾는 게 시급한 상황이긴 했어도,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중환자실에서 환자의 인권을 찾는 게 사치일 순 있어도, 평생 점잖으셨던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나는 몹시 안타까웠다. 내가 아무리 의식이 없는 환자라도 발가벗겨져 아무렇게나 의료진의 손길에 몸을 맡겨야 하는 상황은 상상하고 싶지 않으니까. 품위 있게 죽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조목조목 따질 순 없지만, 마지막까지 인간으로서 제대로 대우받으며 삶을 마무리할 수 있다면 기필코 나는 그 방법을 택하겠다. 타인이 주체가 되어 거의 의도적인 살인의 의미마저 풍기는 <안락사>라는 말 대신 <존엄사>라는 말이 쓰이게 된 배경에도 환자 본인의 주체성을 인정하는 태도가 들어있을 것이다. 존엄사 결정권에 대한 엄밀한 법적 통제와 의사들의 정직한 직업윤리, 환자 및 보호자의 인권을 모두 감안한 도덕적인 존엄사의 존재는 정말로 환영할 일이다. 부디 엄숙한 생명의 존엄성과 관련된 이 제도가 맹목적인 종교 윤리를 앞세운 무작정 반대나 패륜의 도구로 이용되는 일 없이, 진짜로 품위있게 죽을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길이 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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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꾸러미 2009. 1. 24. 22:52

나이든 어르신들이 죽음을 대하는 방식은 크게 두가지가 있는 것 같다.
(나이들어 죽음을 반기는 사람이야 극단적인 고통에 시달리는 말기환자 이외는 아무도 없으리라 믿지만)
적극적으로 죽음을 대비하고 언급하며 자연스러운 수긍의 태도를 보이는 분들과
철저한 금기사항이나 불경스러운 일처럼 입에 올리기조차 꺼려하는 분들.
"오래살면 뭐하누. 내가 빨리 죽어야지 니들이 편할 텐데."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는 분들이 오히려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는 말도 있으나 실제로 그런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몸소 늙고 병들어 경험해보지 않고는 말이다.

절에서 흔히 여신도들을 <보살님>이라고 부르는데, 여든여섯에 돌아가신 우리 외할머니는 부처에 대한 믿음이 삶의 중심이었고 실제 삶에서도 보살처럼 자식들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늘 베푸는 분이셨다. 불교든 기독교든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은 극락과 천국엘 간다고 믿으니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데는 신앙의 힘이 크게 작용하는 것도 같다. 암튼 내가 지켜본 바에 의하면 우리 외할머니만큼 죽음을 자연스레 대한 분도 없었던 느낌이다.
"나 죽으면 꼭 화장해서 산에다 휘휘 뿌려라."는 외할머니의 말씀은 어려서부터 익히 들었고
환갑 즈음에는 손수 수의를 장만해두었다가 볕좋은 가을날엔 가끔 샛노란 삼베 수의를 툇마루에 내놓고 거풍과 일광욕을 시키셨다.
처음엔 그게 수의인 줄도 눈치채지 못했다가 하필 내가 놀러간 날 툇마루에 놓여 있는 삼베옷을 만나게 되면 공연히 화가 났다. 인간이 나이들면 언젠가는 세상을 떠나야 하겠지만 굳이 그렇게 자손들 코앞에 죽음을 들이밀어 환기시키는 할머니의 태도가 야속했던 것 같다. 묘자리와 수의를 미리 장만해 놓으면 오히려 노인들이 더 장수한다는 속설도 있으나, 우리 외할머니는 장수를 바라며 수의를 장만해놓으신 건 확실히 아니었다. 그냥 그 날을 당신이 손수 준비해두고 싶으신 듯했다.
중한 병환 때문에 이십여년이나 간수해온 수의를 정말로 입게 될 날이 머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을 때, 외할머니는 또 자진해서 영정사진을 찍으라 하셨다. 마당에 흐드러지게 핀 진분홍색 철쭉을 배경으로 의자를 놓고 앉아 나의 사촌동생에게 찍으라고 하셨다는 할머니의 영정사진은 액자에 담겨 1년 넘게 대형TV 위에 놓여 있었고, 나는 입퇴원을 반복하시는 할머니를 뵈러 집에 갈 때마다 그 사진을 보며 꽃속에서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외할머니의 모습에서 정겨움과 함께 얼마 남지 않은 날의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끼며 차마 오래 바라볼 수가 없었다.

손수 죽음을 꼼꼼히 준비하셨던 외할머니와 달리, 그보다 10년이나 먼저 돌아가신 우리 친할아버지의 경우엔 남은 가족들이 참 많이 허둥댔던 것 같다. 워낙 정정하셨다가 갑자기 쓰러지시기도 했지만 할아버지는 당신의 죽음을 예상하는 말 따위를 입에 올린 적이 거의 없었다. 여든 중반에 접어드셔선 예전보다 기력이 떨어지시긴 했지만, 그래도 나는 식사량이나 거동의 정도로 볼 때 우리 할아버지가 백살까지 거뜬히 사실지 모른다는 생각을 무작정했다.
이북5도청에서 실향민들을 위한 묘지를 분양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는 작은아버지들과 논의해 조부모님의 묘자리를 장만했지만 할아버지께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살아계신 노인들의 수의나 묘자리를 미리 장만하는 건 곧이곧대로 빨리 돌아가시기를 바라는 자식들의 불효가 담긴 행동이라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때 우리는 여든을 넘기고 장수하시는 두분의 존재에 그저 감사할 뿐 머지않은 사별에 대해서는 각별히 신경을 쓰지 않았거나 일부러 생각을 거부했던 듯하다. 그저 오래오래 사시기를 빌며...
그러다 황망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우린 당장 할아버지의 영정사진부터 고민을 해야 했다.
동네 사진관에서 찍으신 듯한 주민증 사진은 너무 마음에 안들고, 가족사진을 오릴 순 없는 상황이라 결국엔 칠순때 찍으신 기념사진으로 영정사진을 만들어야 했다. 앓지도 않으시고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져 하루만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초상을 치르는 일은 온 가족에게 충격이었고 기막힌 슬픔도 슬픔이지만 장례절차도 낯설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친할머니때도 마찬가지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우리집으로 거처를 옮기신 할머니와 수십년 만에 다시 동침 파트너가 된 나는 할머니의 매끈매끈한 살결을 어루만지며 잠드는 행복을 최소한 몇년은 더 누릴 수 있을 줄 알았었다. 하지만 겨우 여섯달 만에 또 그렇게 갑자기 쓰러져 의식을 잃으신 할머니는 야속하게도 끝내 할아버지 곁으로 떠나시고 말았다. 멍청하게도 우린 그때도 영정사진을 마련해두지 않은 상태였다.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골라보려는 노력을 기울일 여유도 없었고, 우린 또 15년도 넘은 너무 젊은 할머니의 낯선 사진을 장례식장에 모셔놓고 속앓이를 했다. 왜 예쁜 할머니의 모습을 미리 담아놓을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자책하면서...

죽음을 대비하지 않는 성품도 유전인지 우리 아버지 역시 우리 앞에선 당신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시는 일이 거의 드물었고, 우리들 또한 아직 젊고 건강하시다고 굳건히 믿은 터라 언젠가 다가올 일을 대비해야한다는 걸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다만 늘 병치레를 하는 우리 엄마보다 하루만 더 살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시긴 했다. 그래야 자식들한테 부담을 덜 주면서 병든아내를 보필할 수 있으리라는 의미였다.
어쨌든 갑자기 쓰러진 아버지가 대단히 위중한 상태임에도 우린 도저히 희망을 버릴 수가 없었다. 혼수상태가 한달 가까이 이어지며 의사들이 포기를 선언하기에 이르자 집안 어르신들은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우리 삼남매에게 넌지시 이르셨지만 그래도 우리는 아버지의 죽음을 준비하기보다 아버지의 의식이 돌아와 오래도록 병원생활을 하는 경우를 상상하며 고집스레 그에 대한 대비를 의논했다.
결국 아버지의 임종 후 우리는 또 허둥댈 수밖에 없었다.
식구마다 디지털카메라를 사들여 그렇게도 사진을 많이 찍어댔는데, 막상 아버지의 멋진 모습을 담은 독사진은  드물었다. 간혹 퍽 멋진 사진 속에서 아버지는 선글라스를 쓰고 계셨기 때문에 영정사진으론 사용하기 곤란했다. 집안 어르신들은 양복을 입은 모습의 여권사진을 쓰라고 조언하셨지만, 나와 동생들은 아버지가 그렇게도 좋아하시던 등산 나들이 차림의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모든 이들에게 선보이고 싶었다. 숱적은 머리는 반드시 등산모자로 가린 채로.

장례식장에서 다급히 집에 돌아와 내가 골라간 등산복 차림의 사진은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인화지만 있었던 사진이라 확대하는 과정에서 많이 흐려졌고, 아주 최근의 모습은 아니라 나는 또한번 속앓이를 했다. 조카들 사진은 그렇게도 많이 찍었으면서 왜 아버지 사진은 제대로 찍은 적이 없었을까 마음이 아팠다.
물론 가장 멋진 모습의 아버지는 우리들 마음과 머릿속에 들어있지만 그래도 마지막 가시는 고인의 모습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는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외할머니, 아버지, 그렇게 네번째 장례를 치르며 비로소 깨달은 듯하다.
이번에 아버지를 모신 납골당에 세라믹으로 사진을 붙여달게 되면서 또 다시 사진고민에 빠졌던 우리는(그나마도 영정사진으로 썼던 인화지 사진은 돌려받지도 못했다) 아버지의 옛날 디카파일부터 모든 사진파일들과 앨범을 다시 뒤져야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도 드물었던, 산에서 찍은 아버지의 독사진을 이번에 찾아냈다는 사실이었다. 새로 저장해둔 폴더의 날짜를 보면 2007년 7월 1일,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니 그건 분명 내가 컴퓨터 파일들을 뒤져 노트북으로 옮겨 장례식장으로 들고갔던 사진들이었다. 그런데 왜 그 땐 그 사진을 고르지 않았을까 영문을 알 수가 없다. 아니, 그 당시 그 사진을 본 기억도 남아있지 않았다.
슬퍼하느라 다들 경황이 없기는 했지만 노트북에 든 사진들을 나만 본 것도 아니고 동생들과 같이 뒤졌던 것도 같은데;;;

암튼 화질이 그리 좋지도 않고 크기도 작아 마음에 쏙 드는 건 아니지만, 살아생전 우리 아버지의 모습이 가장 잘 담긴 도봉산 오봉 사진을 새삼 발견한 날 나는 슬피 울어야 했지만 그래도 많이 기뻤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이제부턴 엄마 사진도 내 사진도 많이많이 찍어야겠다고.
독사진은 영판 쑥스러워 거부하던 것도 이젠 좀 덜해야겠다고.
아직 죽음을 대비하기에 이르다면 이른 나이지만 이왕이면 나는 준비된 상태로  언제일지 모를 내 마지막을 맞고 싶다.
남은 이들이 최대한 덜 허둥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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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였다.
볕이 좋은 일요일, 가난한 부부는 계획했던 대로 올망졸망 어린 삼남매를 데리고 남산으로 나들이를 떠났다.
결혼식을 마치고 속리산으로 신혼여행을 떠나기 전에 택시를 대절해 친구들과 올라가 기념사진을 찍었던 것이 벌써 6, 7년 전의 일이었다. 그땐 평생 단 한번의 호사라 택시를 타고 남산을 올랐지만, 이번엔 두 아이를 걸리고 막내를 아내 등에 업힌 채 당연히 버스를 타고 회현동으로 향했다. 
탈 것들을 담은 그림책에서만 보던 케이블카를 태워주겠다고 아이들과 오래 전부터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케이블카를 타보는 것은 젊은 부부도 처음이었기에 폴짝폴짝 뛰며 흥분해 좋아하는 아이들 못지않게 마음이 설렜다. 편도 표를 끊어 무쇠로 만든 작은 버스 같은 케이블카에 오르자 정말로 거짓말처럼 케이블카는 줄에 매달려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케이블카 창에 매달리듯 유리에 얼굴을 대고 내다보는 남산의 초록빛 녹음은 더욱 아름다운 듯했고, 아이들이 손가락질하는 곳의 동네이름을 어림짐작으로 가르쳐주며 새삼 서울이 참 넓구나 싶었다.
아쉽게도 케이블카는 몇분만에 정상에 도착했다. 특히 둘째 아이의 목표는 남산구경이 아니라 오로지 케이블카 타기였기에 아쉬움이 더했다. 녀석은 케이블카에서 내리자마자 또 타자고 졸라대기 시작했다.
남편은 주머니에 든 돈을 만지작거리며 셈을 했다. 예정했던 대로 남산 팔각정 주변을 둘러본 뒤 아이들과 우동을 한그릇씩 먹고 나면 집에 돌아갈 차비 정도밖에 남지 않을 터였다.
일단은 말 잘 들으면 또 태워주겠다고 달래자 아들녀석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얌전히 아빠의 손을 잡았다.
굵게 불어터진 우동 면을 멸치 국물에 말고 유부 몇조각을 얹어주는 것이 전부였지만 남산을 쏘다니다 먹은 늦은 점심은 행복의 맛이었고, 다섯 식구의 일요일 나들이는 평화롭게 끝나가고 있었다.
둘째녀석이 내려갈 때도 케이블카를 타야겠다고 고집을 부리기 전까지는.

남편은 남은 돈을 계산해보았으나 집에 돌아갈 버스비를 제외하면 솜사탕 하나를 사먹거나, 어린이용 반표를 끊을 수 있는 돈이 남을 뿐이었다. 한번 고집을 부리면 매를 맞고도 좀처럼 꺾이지 않는 둘째의 막무가내 성격을 잘 아는 그는 길바닥에서 큰소리로 아이를 혼내는 남부끄러운 광경을 연출하고 싶지도 않았고 기분 좋은 가족 나들이를 망치고 싶지도 않았으므로 아내와 의논 끝에 아들녀석만 케이블카에 태워 내려보내자고 결론을 내렸다.
아들 녀석에겐 꼼짝도 하지 말고 케이블카 내리는 곳에서 엄마아빠를 기다려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고, 케이블카 차장에게도 아이를 잘 간수해달라고 부탁을 한 뒤 부부는 그저 좋아라 손을 흔드는 아들을 배웅했다. 뒤이어 남은 두 아이를 하나씩 업고 안은 부부는 부지런히 뛰다시피 남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허나 케이블카를 탔을 땐 눈깜짝할 새에 정상에 당도했으므로 동네 언덕쯤으로 어림짐작했던 남산 길은 막상 걸어보니 내려가도 내려가도 끝이 보이질 않았다. 둘째를 잃어버릴까봐 더럭 겁이난 젊은 부부는 부디 아들녀석이 케이블카 정류장에서 꼼짝않고 기다려주기를, 나쁜 마음을 먹은 누군가 데려가는 일은 없기를 기도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드디어 케이블카 승강장이 보여 길잃을 염려가 없게 되자 남편은 큰아이 손을 아내에게 쥐어주고는 홀로 먼저 승강장 건물로 달려갔다. 다행히 아들녀석은 잔뜩 겁먹은 얼굴에 눈물자국이 두 줄기 말라붙은 채로 얌전히 나무의자에 앉아 있었다. 멀고 먼 남산 길을 숨가쁘게 달려온 부모의 수고를 알 리 없는 녀석은 심통이 나서 제 아빠를 반기기는커녕 입술을 잔뜩 빼물고 눈을 흘겼다.
엄마는 금방일 줄 알았는데 걸어내려오려니 너무 멀어서 오래 걸렸다는 설명 끝에, 다음에도 또 케이블카 혼자 탈래? 라고 물으니 아이는 말없이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막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일을 겪기는 했지만, 다섯식구는 손에 손을 맞잡고 나란히 남산 입구 길을 내려오며 또 다음 나들이를 꿈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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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케이블카가 수십년만에 새것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뉴스를 보니 또 문득 떠올라, 우리 가족이 차를 타고 남산 옆을 지나간다거나 이야기 도중 남산이 언급될 때 늘 되풀이되던 어린시절의 추억을 적어보았다.
사실 나는 저 날을 기억하지 못하며, 전부 엄마 아빠한테 들어서 알게 된 이야기다. 나름 꽤나 놀랐을 법한 동생녀석도 그날의 기억을 갖고 있진 않는 듯하다.  
저 날 이후 나는 거의 30년쯤 뒤에야 비로소 다시 남산 케이블카를 타보았는데, 동생들은 어땠는지 모르겠다. 그들도 아이들 데리고 남산에 놀러갔단 이야기는 들어보았는데 케이블카 얘긴 없었던 걸 보면 안탔단 얘긴가? 자동차를 가져갔을 터이니 그랬음직도 하다.
어느해였나 송년모임에서 굳이 남산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야경을 보자던 후배의 주장에 촌스럽다고 툴툴거리긴 했지만, 안 그랬으면 새것으로 바뀌기 이전의 케이블카를 타볼 기회를 영영 놓쳤겠구나 싶어 새삼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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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마미아

놀잇감 2008. 9. 25. 21:32


영화본지 일주일이 지나 그 감동이 이미 가물가물해지려고 하고 있으니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어서 끼적여야겠다.
뮤지컬 <맘마미아>는 본 적이 없다. 아바 음악에 대한 남다른 추억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그 뮤지컬이 몹시 보고싶으면서 동시에 어쩐지 꺼려지는 양가적인 감정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섣불리 뮤지컬을 보러갈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 집에 전축은 없고, 카세트플레이어와 라디오로만 음악을 듣던 내가 중학교 때 처음 아버지가 장만하신 워크맨으로 이른바 <스테레오> 음악을 처음 영접한 충격적인 경험을 한 순간 내 귀에 울려퍼졌던 노래가 바로 아바의 주옥같은 명곡들이었다.
왼쪽 귀에서 시작해서 오른쪽 귀로 뇌를 통해 연결되는 듯한 오묘하고 강렬한 스테레오 사운드를 헤드폰으로 들으며 아버지를 비롯해 우리 삼남매는 앞다투어 서로 음악을 듣겠다고 줄을 서다시피했다. 아버지가 즐겨 들으시던 폴모리아 악단의 다른 영화음악들은 비교적 따분하게 생각되던 반면, 아바의 음악들은 열세살 짜리 계집애가 들어도 마냥 좋고 신이 났다.

그런데 그 소중한 아바의 명곡들로 만든 뮤지컬이라니... 뮤지컬 배우들이 과연 그 아름다운 <오리지널> 음악들을 제대로 소화나 할 것인가, 겁이 날 정도였고 성량 떨어지는 배우들이 노래들을 망치면 막 화가 날 것 같았다. 더욱이 스무살 된 딸을 결혼시키는 중년의 주인공 엄마 역할을 맡은 배우들도 하나같이 마음에 안들었고 심지어 내가 싫어하는 배우들이 줄줄이 출연하기도 했다.
브로드웨이 오리지널 팀의 공연이 왔을 때도 나는 줄곧 외면하는 태도를 유지했다. 지들이 어떻게 아바의 노래를 제대로 표현하겠어, 라며. ^^;
물론 내심으론 뮤지컬 맘마미아에 대한 혼자만의 상상과 기대를 마음껏 펼치고 있었다. 배우들은 입만 벙긋거려 립싱크를 하고, 아바의 노래들이 흘러나오는 식으로.

그러다 영화 맘마미아의 소식이 들려왔다. 주인공이 메릴 스트립이라는 사실을 안 순간, 나는 드디어 맘마미아를 볼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피어스 브로스넌의 캐스팅엔 심히 걱정이 들기는 했지만, 영원한 나의 미스터 다아시 콜린 퍼스까지 나온다는데 더 망설일 것도 없었다. ^^;

실제로 뚜껑을 열어보니 우려했던 대로 피어스 브로스넌의 노래솜씨는 아슬아슬했지만, 흥미진진한 스토리와 자연스레 어우러진 소중한 아바의 노래들은 전혀 훼손된 느낌이 없었다. 어쩌면 그간 뮤지컬 맘마미아를 멀리 했던 내 편견이 전혀 근거없는 아집이었을 것이다.
스무살 소피는 매우 사랑스럽고 예쁜데다 가창력도 뛰어났으며, 메릴 스트립은 연기로든 노래로든 이번에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으며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했다. (아.. 나도 메릴 스트립처럼 아름답고 멋지게 늙어야 할 텐데!)
아참, 콜린 퍼스의 노래 솜씨는 세 미중년 가운데 단연 돋보일 정도였고, 뱃전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리드하는 장면은 남들에겐 몰라도 나에겐 그저 흐뭇한 백미였다. 
게다가 그리스와 지중해의 아름다운 풍광은 또 어떻고!! +_+
영화관을 나서던 나는 입으로는 Thank you for the music을 흥얼거리며, 머릿속으로는 어서 지중해를 가봐야해, 그리스를 가봐야해... 라고 부르짖고 있었다.

아바의 추억 때문에 더욱 점수를 많이 땄을 수도 있지만, 내겐 정말 좋았던 영화.
DVD가 나오면 당장 살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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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두나무

삶꾸러미 2008. 5. 28. 17:05
콘크리트 계단 옆에 말 그대로 손바닥만한 크기의 마당에서 자라는 앵두나무엔 올해도 어김없이 하얀 꽃이 피더니 다닥다닥 열매가 달렸다가 어느 틈에 앞다투어 빠알갛게 익어가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색이 진해지는 앵두를 보며 곧 따먹을 수 있겠구나 생각했는데, 그저께 저녁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건너 동네에 집을 새로 짓는 동안 잠시 아래층으로 이사를 와 작년부터 살고 계신  젊고 착한 목사님이었다. 마당에 있는 앵두가 익어서 좀 땄는데 아무래도 올해의 첫 수확인 듯하여 제일 어르신이신 울 엄마부터 드리려고 가져왔단다. 괜찮다고 아이들이랑 그냥 드시라고, 우리는 나중에 따먹으면 된다고 아무리 마다해도 막무가내라 하는 수 없이 두손을 바가지처럼 오므려 앵두를 받아들고 올라와 제법 맛이 든 앵두를 엄마랑 둘이 맛있게 음미했다.

앵두가 일단 익기 시작하면 한 열흘은 계속해서 심심찮게 따먹을 수가 있는데, 어제 일기예보를 들으니 비가 온다고 하여 괜스레 낭패감이 들었다. 이제 막 익기 시작한 앵두가 비를 맞고 다 떨어지거나 맛이 싱거워지면 어떻게 하나 공연한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밤새 천둥 번개가 치고 굵은 빗줄기가 지붕과 창문을 때리는 소리를 들으며, 앵두는 과연 무사할까 염려하다 비가 그치자 마자 내다보니 모든 게 쓸데없는 걱정이었던 듯 다닥다닥 붙은 앵두들은 여전히 건재했다. 다만 초봄에 가지치기를 해주었어야 하는데 그냥 방치했던 터라 정신없이 사방으로 뻗어난 가지들이 비를 맞고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축축 바닥으로 늘어져 있었다. 생각해보니 앵두나무 뿐만 아니라 잎이 돋기 전에 지저분한 무궁화와 사철나무도 가지치기를 해주었어야 했다. 다급한 마음에 전정가위를 들고 나가 빗방울이 무겁게 맺힌 쳐진 가지들 중에서 앵두가 달리지 않은 것들로만 일단 잘라주니 순전히 내 상상뿐이겠지만 앵두나무가 무거운 짐을 좀 내려놓은 듯 가뿐해 보이는 듯도 했다.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는 소망과,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려면 계절마다 부지런히 품을 들여 마당을 가꾸거나 돈을 써서 정원 가꾸는 사람을 고용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문제는 늘 내게 별개로 다가온다. 그래서 겨우 나무 세 그루 있는 한 뼘짜리 마당도 돌보지 않는 주제에 과연 내가 어떻게 넓은 마당 있는 집을 감당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오늘 같은 순간에나 내 뒤통수를 친다. 물론 작년까진 화분 물주기와 더불어 귀찮은 가지치기 따위는 당연히 아버지의 임무였고, 앞으로 내가 마당 있는 집에 살게 되더라도 그 마당에 있는 나무와 식물을 가꾸는 일손 또한 당연히 아버지 몫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당연하겠지만 엄마와 나는 아직도 매 순간 아버지의 부재를 인정하지 않는 듯 살다가 문득 허망한 상실감에 멍해진다.

어쨌거나 올해도 변함없이 앵두가 익었듯, 올해도 변함없이 조카들이 오면 재잘재잘 떠들며 함께 앵두를 따서 나누어 먹게 될 것이다. 살다보면 변하는 것도 있고 변하지 않는 것도 있음을 새삼 실감하며 빗물 젖은 앵두가 예뻐서 전정가위를 내려놓고 카메라를 들고 내려갔다. 빨간 앵두들이 이슬을 머금은 빨간 보석처럼 어찌나 예쁜지 모른다. *_*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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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으면 안 먹으면 될 것 아니겠느냐던 멍청한 어느 인간의 말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는 쇠고기를 웬만해선 안먹게 될 것이란 생각이 강하게 든다. 유기농이라고 표시 되어 있는 채소들을 장바구니에 넣으며서도 과연 유통업체와 상인들을 철썩같이 믿을 수 있을지 속으로 떨떠름한 마당에 수입 쇠고기의 원산지 표시를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벌써부터 한우든 호주산이든 쇠고기 매장이 썰렁하다는데, 이런 꼴로 가다간 경제를 살리기는 커녕 소비는 날로 위축되고 축산업 농가는 FTA 비준되기도 전에 다 망해 쓰러질 판국이다. 그게 걱정은 되는데, 나로선 어떻게 해야하는 건지 정말이지 모르겠다.
원래 우리 식구들은 최소한 일주일에 한번은 거하게 고기를 먹어줘야 기운이 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산다. 채소와 푸성귀로만 차려진 밥상은 <저 푸른 초원>이라고 야유하며, 고기를 든든히 먹어줘야 계단 오를 때도 힘이 안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최소한 달걀이라도 상에 올라야 하고 어쩔땐 일주일에 사흘 이상 고기(생선은 고기가 아니다)를 먹기도 한다. 미역국, 무국엔 반드시 쇠고기를 넣어 끓여야지 그 밖의 조개나 버섯만 넣고 끓였다간 나 혼자 꾸역꾸역 6박7일동안 먹어야 한다. 느끼한 곰탕은 일주일 내내 맛있다고 드시면서도, 멸치로 맛 낸 된장국은 2끼 이상 내놓으면 외면당하는 것이 우리 집안 내력.

연일 광우병 쇠고기 광풍이 몰아치던 지난주말, 엄마는 마지막이될지도 모른다며 장조림을 해먹자고 한우 사태와 메추리알을 사오셨다. 나이로는 4.19 세대지만 그 때도 무서워서 밖에 안나가봤고, 68년 평생 데모란 건 처음이라며 벌벌 떨면서도 딸 성화에 덩달아 직접 청계천 촛불집회를 다녀오시고 보니, 광우병 쇠고기와 정부 해명은 죽어도 못 믿겠는데 결과적으로는 놈들이 밀어붙이기로 광우병 위험 쇠고기를 수입하고 말 것이라는 게 울 엄마의 결론인 듯했다. 그러고는 그날 저녁, 엄마는 언덕에서 발목을 접질려 복숭아뼈에 금이 가는 사고를 당했고 5주간 기브스를 해야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_-;; 그래서 우리집의 마지막 장조림은 눈물의 장조림이기도 하다.
정말로 칼슘이 많이 우러나는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엄마 복숭아뼈가 얼른 붙기를 바라는 마음에 냉동실에 아껴두었던 마지막 우족 하나를 꺼내 곰탕을 끓였다. 반나절 이상 곰솥에 우족을 끓이며, 나도 모르게 엄마한테 <마지막 우족탕>이니 맛있게 드시라고 해버렸다.

며칠째 장조림 반찬에 우족탕을 기본으로 내놓는 데도 엄마는 아무 불평이 없다. 푸성귀 반찬을 매일 똑같이 내놓으면 손도 안대는 양반인데, 장조림이랑 곰탕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아쉬워서 더 맛있게 느껴지나보다. 사실 장조림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줄곧 한번도 해먹지 못한 음식이었다. 아버지가 짭조름한 쇠고기 장조림을 워낙 좋아하셔서 밑반찬으로 거의 떨어뜨리는 일이 없었는데, 메추리알 삶아서 일일이 까는 것이 귀찮다고 엄마랑 내가 하도 투덜거리니까 최근 몇년동안은 삶은 메추리알을 까는 것이 아버지의 임무가 되었더랬다. 냉장고에 장조림이 떨어지면 며칠 지나지 않아, 이제는 없어진 동네 농협마트 정육점에서 맛있는 사태로 쇠고기를 고르고 메추리알을 두어 판 집어 사들고는 아버지가 휘파람을 부르며 돌아오시면 두 모녀는 얼굴을 찌푸리며 귀찮은 티를 팍팍 냈지만, 아버지는 씩 웃으며 어서 메추리알 까게 삶아놓기나 하라고 하셨다.

일요일 저녁, 발은 퉁퉁 부어오르는데 엄마는 식탁에 앉아 삶은 메추리알을 까며 아버지는 메추리알을 살점 하나 안 떨어뜨리고 껍질을 잘 까셨건만 왜 자기는 알이 다 너덜너덜해지는지 모르겠다고 막 신경질을 부렸다. 엄마의 발목을 잡아먹은 장조림이라서 밉게 느껴졌는지, 오랜만에 만드느라 거의 태울뻔하기도 했던 장조림은 내 입엔 뻣뻣하고 별로 맛이 없다.

그러면서 버럭 화가 났다. 가슴이 아파서 차마 못 해먹는 것도 속상한데, 좋아하는 음식도 공포에 질려 못 먹게 만드는 정부라니! 대체 어떻게 해야 쓸개빠진 무뇌아들한테 진실을 납득시킬 수 있을지 암담하기만 하다. 고기 좋아하는 울 엄마한테 귀찮은 티 안내고 다음엔 더 맛있는 쇠고기 장조림을 해드리고 싶단 말이다, 이놈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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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를 따라 문산쪽으로 얼마간 달리다 보면 통일전망대가 나타나는데, 그 근방은 언제부턴가
'통일동산'이라는 이름으로 개발이 이루어져 지금은 헤이리 예술마을이니, 영어마을 파주캠프니 해서
꽤나 복잡한 곳이 되고 말았다.
사진이 예쁘게 나오고 볼 거리가 있다면 전국 어디든 달려가는 열성을 보이는 사람들은
예쁜 카페와 갤러리가 있고 책 전시장이며 멋진 건축물이 있다는 헤이리에 꾸역꾸역 참 많이도 찾아가는 듯하다.
나 역시 일년에 서너 번 이상 그들과 같은 길을 따라 달려가긴 하지만
언제나 내 목적지는 헤이리가 아니라 그 번듯한 '예술마을'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펼쳐져 있는
동화경모공원, 쉽게 말해 '공동묘지'다.
어찌된 경유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동화경모공원은 이북5도 출신의 실향민을 위해
그나마 고향인 이북땅을 바라보는 듯한 자리의 강가 언덕배기에 조성된 공원묘지였고
평안북도가 고향이신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도 나란히 그곳에 누워계신지 13년째다.
그러니까 헤이리니 영어마을이니 해서 그 동네가 북적이기 이전부터 우리 가족은 간단한 먹을거리와
술을 싸들고 소풍삼아 공원묘지를 찾았다는 뜻이다.

어린시절엔 '공동묘지'라는 말이 참으로 무서운 말이었다.
TV에서 <전설의 고향>을 할 시간이 되면 겁이 나서 채널도 잘 못 돌리는 겁쟁이였던 나는
무서운 이야기에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공동묘지'의 실체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하얀 유골이 굴러다니고 파란 도깨비불이 날아다니며 어디선가 불쑥 머리를 길게 풀어헤진 소복입은
여자가 입가에 피를 흘린 채 나타나는 공포의 장소로만 인식했다.
그래서 가끔 '망우리 공동묘지' 앞을 지나가는 차라도 타고 있으려면 화들짝 놀라 시선을 돌렸고
전국 어느 곳을 가나 만날 수 있는, 야트막한 산이나 언덕배기에 동그랗게 봉분을 올린 가족묘를 보고서도
무서움에 떨었던 것 같다.

이북 출신이신 할아버지, 할머니가 장수하셨기 때문에 서른이 다 되도록 제대로 성묘란 걸 하러
공원묘지를 찾은 경험이 전혀 없었기에 더욱 그런 편견이 자라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가족에게도 한식때, 추석때, 설날에 찾아갈 묘소가 생긴 뒤로는
죽음이 삶의 연장이듯 공동묘지도 그저 삶의 한 공간임을 깨닫게 되었다.
동그란 봉분이 모여있는 것만 보고도 무서움에 떨던 어린시절의 나와 달리
어린 조카들은 공원묘지에 줄지어 있는 봉분 사이를 뛰어다니며 신나게 놀고 메뚜기를 잡고
고모에게 술래잡기를 하자고 청한다.
처음 몇년은 성묘하러 갈 때마다 슬픔에 겨워 눈물을 흘리느라 다들 분위기가 무거웠지만
이제는 어른들도 소풍나온 사람들처럼 두 분 묘소 앞에 깔아놓은 자리에 앉아
왁자지껄 이야기를 나누다, "엄마, 아버지, 또는 할머니, 할아버지, 몇달 있다 또 올게요!"라고 큰소리로 인사하고는 돌아설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우리 식구들에게 헤이리 예술마을은 난데없이 공원묘지 앞에 생겨난 '이상한 동네'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전국이 묘지화되는 추세라고는 하지만 돈많은 예술인들이 돈자랑을 하듯 세운 공동체 마을이
드넓은 공원묘지 코앞이라는 사실에 아무렇지도 않을까 의문이 들기도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그리고 최근엔 아버지를 그곳 납골당에 모셨으니
우리 가족 같은 사람들이야 '묘지'보다 '공원' 느낌으로 친근해졌음에도
헤이리에 놀러간다는 건 어쩐지 배신 같기도 하고
어차피 돈이 많아 끼리끼리 모여든 그곳 예술인들에게 비싼 입장료까지 내며 그들을 배불려주고 싶은
생각 또한 없기에 지금껏 나는 한번도 헤이리에 들어가본 적이 없다.

물론 헤이리를 마뜩찮게 여기는 건 나 뿐인듯
어제도 설날 성묘를 미리 당겨 공원묘지를 찾았더니, 헤이리 마당엔 사방에서 몰려든 차들이 빼곡했고
주변에 마련된 식당 마을에도 사람들로 버글거렸다.
그들은 모두 일찍이 삶과 죽음이 바로 이어지는 연장선 위에 있음을,
그래서 공원묘지 바로 옆의 아트갤러리에서 우아하게 차를 마시고 멋진 사진을 찍는 것은
마치 시신을 떠내려보내는 갠지스강에서 바로 그 물로 태어난 아기의 몸을 닦으며 신의 축복을 비는 것과
같은 행위임을 깨닫고 있기에 아무렇지도 않은 것인지,
아니면 예술인 마을 바로 옆에 거대한 공원묘지가 있다는 건 전혀 알지 못했고 신경쓸 겨를도 없었기에
마냥 즐겁기만 한 것인지 문득 몹시 궁금했다.
어쩌면 공원묘지에 큰 의미를 두는 건 <전설의 고향> 세대인 나 같은 노땅에게나 해당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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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는 여행

삶꾸러미 2008. 1. 24. 23:23
한파가 몰아치는 이 엄동설한에 뜬금없이 여행을 간다.
따뜻한 남반구...로 가는 것이면 좋겠지만 ^^
그것은 아니고 최소한 남쪽으로 향하긴 한다.
한가로이 떠나는 여행을 계획해보자는 막내동생네의 의견에 그러마고 대답한 게
꽤 됐는데, 그때 정해진 날짜가 하필 이번 주말이었고 공교롭게도 날씨가 협조를 안하는 것 뿐이다.
지난주말까지도 까맣게 잊고 있었기에 내게는 뜬금없는 여행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아주 오래전부터 계획된 여행이기도 하다.

행선지는 경주.
온 가족이 까마득한 수학여행의 추억으로만 간직한 그곳에 나는 어른이 된 뒤에도 두어번 여행을 갔고
수학여행 때 놓쳤던 옛도시의 정취와 놀라운 볼거리에 늘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다녀올 때마다 늘어지는 나의 경주 자랑에 부모님 역시 솔깃해 하셨고
고등학교 때 본 느낌과 얼마나 다른지, 불국사와 첨성대, 안압지, 석굴암, 남산의 일출 따위를
다 같이 한번 꼭 보고 오자고 우린 막연한 약속을 했었다.  
그리고, 어딜 한 번 가려면 두 동생네가 마음쓰여 그냥 나가서 밥 한 번 먹는 자리에도 결국엔 꼭 죄다 불러들여 거국적인 대사로 만들고 마는 아버지에게 부디 경주 여행은 단출하게 엄마랑 꼭 셋이 떠나자고 해두었는데
그 약속은 결국 지키지 못했다.

벛꽃 만발한 봄과, 단풍이 아름다운 가을에 경주 모습이 제일이긴 하지만
눈이 쌓였을지 어쩔지는 모르겠으나 한겨울의 경주는 나 역시 처음이라 살짝 가슴이 설렌다.
운동부족에다 체중은 나날이 늘어나 걸음걸이마저 시원찮은 엄마 역시
짐스러울까봐 걱정을 하면서도 소풍 앞둔 아이처럼 퍽 기대하는 눈치다.
엄마랑 조카들이랑 같이 아버지 몫까지 최대한 실컷 보고 먹고 찍고 돌아올 생각이다.

음... 해서 내일부터 일요일까지 블로그 개점휴업이라고 간단히 알리려던 것인데,
늘 나의 수다는 참 길기도 하다. -_-;;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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