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언론인과 사진작가 부부가 있다. 언론인인 남자의 취재 도구는 볼펜과 작은 수첩, 소형 녹음기가 전부다. 남자는 가방도 없이 여기저기 다니다 뭔가 기록할 일이 있으면 재킷 주머니에 넣어둔 수첩과 볼펜, 소형 녹음기를 꺼낸다. 가끔은 노트북 컴퓨터를 소지하고 다닐 때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땐 기사를 바로 송고하거나 자료를 참고해야 하는 경우이고, 대부분은 양손을 자유롭게 하고 다니는 걸 좋아한다. 그와 동반 기사를 취재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어쨌든 언론인 남편보다 상대적으로 촬영도구가 많은 여자는 작은 체구에 여러 종류의 카메라와 렌즈가 들어 있는 큼지막한 가방을 늘 어깨에 짊어지고 다닌다. 본격적인 촬영이 있는 날 쫓아다녀본 적이 있는데, 웬만한 택배상자보다도 큰 카메라 가방엔 각종 카메라와 렌즈, 빛의 느낌을 확인하기 위해 먼저 찍어본다는 폴라로이드 카메라까지 들어 있어 무게가 20킬로그램은 족히 될 듯 했다.

특별히 전문적인 취재나 촬영이 있는 날은 아니지만 둘이 같이 관련된 행사 때문에 두 부부가 같이 외출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남자는 맨몸에 빈손이고, 여자는 예의 그 묵직한 카메라 가방을 들었다. 남편은 아내의 카메라 가방을 들어주어야 할까, 아닐까? 더욱이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인 남자는 185센티미터의 장신에 100킬로그램은 나가는 거구인 반면, 프리랜서 사진작가인 아내는 150센티미터의 단신이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둘과 동행하게 됐을 때 나는 빈말로라도 카메라 가방을 대신 들어주겠다는 말 한 마디 안하는 남자의 태도에 분개했고, 복잡한 인사동을 함께 거닐며 나 역시 비슷한 단신임에도 사진작가 친구에게 가방을 같이 들자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헌데 친구는 괜찮다며 내 호의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마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어깨가 아파 가방 매는 쪽을 자주 바꾸면서도.  

가끔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은 나는 반나절을 지켜보다 참다못해 덩치 큰 남편에게 왜 부인 짐을 대신 들어주지 않느냐고 묻고 말았다. 넌 짐도 하나 없으면서, 가냘픈 아내가 끙끙거리며 그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혼자 들고 다니는 게 가엾지도 않냐고. 남자는 오히려 내 질문을 의아하게 여겼다. 사진작가로서 무거운 촬영도구를 들고 다니는 건 어디까지나 당연한 일인데, 왜 자기가 간섭해야 하느냐고. 자기 아내가 사진작가라는 직업을 선택했을 땐 그에 수반되는 모든 수고로움까지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므로, 온전히 본인의 책임이라고. -_-; 논리적으로 너무도 맞는 말이었지만, 나는 그들이 '외국인'이기 때문에 그런 '쿨'한 사고방식과 행동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국인 부부였다면 둘 다 아무리 '프로'다운 직업인이라고 해도, 둘이 같이 움직일 땐 상대적으로 힘 센 남편이 아내의 짐을 잠시라도 들어주지 않았겠나 말이다.

이번엔 예순 살의 아버지와 열일곱 살의 늦둥이 딸이 있다. 역시나 이들도 미국인이다. 방학을 맞아 이혼한 아버지의 집에 다니러온 십대의 딸은 올 때보다 더 빵빵해진 큼지막한 가방을 낑낑거리며 짊어지고 아버지의 배웅을 받는다. 가방의 무게 때문에 딸은 걸음걸이가 휘청거릴 정도다. 아버지는 시원섭섭함을 느끼며 딸을 위해 현관문을 열어주는 친절을 베푼다. 그의 배웅은 아파트 현관에서 끝이 난다. 주차장까지 함께 나가는 건 아버지 본인도, 딸도 상상조차 하지 않는 모양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예순 살이라고는 하지만 깡마른 십대 딸보다는 그래도 아버지가 주차장까지 짐을 옮겨다주어야 '자연스럽지' 않을까? 물론 어디까지나 이건 내 생각이지만. 

이 장면은 지금 작업중인 소설의 이야기인데, 나는 이 부분에서 몇년 전 친구 부부의 에피소드가 떠올랐고 확실히 내가(심히 비약하자면 한국인이) 의존적이구나 하고 느꼈다. 책 속에서 아버지가 무거운 딸의 짐을 스스로 옮기도록 내버려두는 장면은 그의 매몰찬 성격이나 무정함을 묘사하려는 뉘앙스가 전혀 없고, 그저 자연스러운 작별의 장면일 뿐이었다. 물론 유별난 딸의 독립심과 괴력을 강조한 것도 아니다. 다만 가족 안에서도 개인주의가 통용되는 미국 사람들의 사고가 드러났을 뿐이다. 부녀 사이에도 자기 일은 자기가 책임지는 게 원칙상 옳긴 하다. 그럼에도 나는 어느 틈엔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 같으면 당연히 나 대신 짐을 옮겨다 줬을 텐데, 라고. 위에 적은 친구 부부의 에피소드에서 내 주변 남자들 같으면 당연히 아내의 카메라 가방을 대신 들고 다녔을 텐데, 라고 생각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나는 무겁든 가볍든 남자들이 여자의 핸드백을 대신 들고 다니는 걸 혐오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며(다만 책가방은 인정 ^^;), 사사건건 "여자는 약하니까 이런 건 못해!"라고 핑계대는 여자들을 줄곧 혐오하며 집밖에선 늘 괴력을 발휘해온 이른바 돌쇠형 여자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묵직한 아기 캐리어와 기저귀 가방, 시장바구니 따위는 남편이 매고 들어야 '옳다'고 생각한다. 물론 남편이 아내보다 더 힘이 세다는 전제 하에. 요즘엔 인식이 많이 바뀌어서 별로 그런 커플이 눈에 띄지 않지만 몇년 전까지도 흔하게 보았던, 아내에게 아기와 기저귀 가방을 모두 들게 하고 본인은 빈손으로 한가로이 걸어가는 뻔뻔한 남편들의 뒤통수를 내가 얼마나 째려보며 욕했던가.

돌이켜보니 나는 양성평등과 성별역할 구분의 철폐를 집밖에서만 엄중이 부르짖었던 것 같다. 집안은 마치 그런 원칙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으니 마음껏 응석을 부리거나 편협한 태도를 취해도 용서될 수 있다는 듯이. 물리적인 힘을 쓰는 부분에서도 양성평등을 주장하는 건, 무조건 남녀 공히 군대에 가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어린이든 성인이든 하나의 인간 개체임은 마찬가지이므로 모든 사회적 의무를 똑같이 져야 한다고 우겨대는 억지논리와 다를 바가 없다는 걸 잘 안다. 그럼에도 어쩐지 집 안과 밖에서 성별 문제에 대한 나의 이런 태도가 모순처럼 느껴지는 걸 피할 수가 없다. 험악하게 운전하는 것조차 여성에 대한 편견 타파와 양성평등을 향한 내 나름의 노력이라고 우스개 소리를 하면서, 정작 집안의 영역에선 상당히 '연약한' 여자라 '특별히' 더 존중받아야 한다는 특권을 자임했다. 물론 나의 이런 태도는 맏딸이면서 고명딸이라는 지위에서 오는 프리미엄이 작용한 덕분이다. 상대적으로 두 남동생들은 나 때문에 역차별을 당하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행스럽게도 체중과 체구에 상관없이 어느덧 집안에서 '힘쓰는' 인물이 되면서, 그리고 '딸이고 첫째'이라서 더 예쁨을 받는 건 엄연한 '차별'임을 눈 동그랗게 뜨고 지적하는 똘똘한 조카들 덕분에 집안에서도 성 역할의 경계는 확실히 무너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런데 또 불쑥 걱정이 든다. 가족적 온정주의는 양성평등과 꼭 상충되어야만 하는 것인지? 제대로 공부는 안하고 몸으로 부딪치고 느끼는 현실로만 나름의 원칙과 이론을 정립하려니 생겨나는 부끄러운 헷갈림이다. 언제고 제대로 여성학 공부 좀 해봐야할 터인데, '과연' 언제나... 만날 해야할 일, 하고 싶은 일을 뒤로 미루고 한탄만 하는 이런 태도야 말로 진정 모순!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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