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손가락'에 해당되는 글 27건

  1. 2022.02.02 엄마들은 왜 그럴까 5
  2. 2021.12.25 엄마들은 왜 그럴까 4 6
  3. 2021.11.14 엄마들은 왜 그럴까 3 11
  4. 2021.09.13 엄마들은 왜 그럴까 2 2
  5. 2021.09.04 엄마들은 왜 그럴까 1 1
  6. 2020.10.02 시든 꽃 1
  7. 2020.04.20 엄마의 미투 3
  8. 2020.02.19 다시 훈련 4
  9. 2020.02.06 아는 병 3
  10. 2020.01.16 닷새만에

설날 차례 준비와 노동을 완전 독박으로 마무리했기 때문인지, 무심한 엄마한테 자꾸 짜증을 부리다가 버럭 화 나는 원인을 분석했다.

모든 엄마들에게 함부로 일반화할 수 없는 주제일 수도 있겠지만 암튼 나와 (친구의) 엄마들은 왜 자식을 편애하는 걸까?! 특히 울 엄마는 당당하게 속 마음을 내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은 없지만, 특히 아픈 손가락은 따로 있다고. 울 엄마의 경우 그건 막내아들이다. 시어머니에게 맡겨두고 직장생활을 병행 하느라 밤에만 끼고 살았던 나나 큰동생과 달리 막내는 출산부터(병원에서 출산한 첫째, 둘째가 너무 수월했는지 아니면 병원비를 아끼기 위함이었는지--아마도 둘 다 였겠지--셋째는 집에서 낳음) 육아를 완전히 도맡아 지켜보았을 터이니, 막내라는 필연적인 이유+오랜 애착이 더해져 편애의 당위성(?)은 아주 공고한 것으로 보인다.

함께 살면서 당연히 의견이 부딪칠 수밖에 없고 특히나 건강 관련하여 온종일 잔소리를 해대는 존재가 되어버린 나는 그냥 공기 같은 자식이고, 일주일에 한번 안부 전화를 하는 것이 효도의 전부인 막내아들은 너무나도 고맙고 기특한 존재다. 상대적으로 맏아들인 큰동생은 웬만해선 안부전화를 하지 않아서 늘 욕먹는 편. 전화보다 찾아뵙고 싶은데 그걸 못하는 게 미안해서 아예 전화도 못 건다는 것이 큰아들의 같잖은(그러나 전화기피증이 있는 나로선 일견 이해가 되는;;) 변명이다. 암튼 친구들의 엄마도 함께 살며 옆에서 온갖 수발 다 들고 궂은 일 도맡아 하는 자식들에게 당연하다는 듯이 "원래 못생긴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말씀하셨다는 얘기에, 기막혀 한 적이 있다.

옆에선 아무리 잘해드려도 지지고볶는 애증의 관계가 될 수밖에 없으니 미운털이 더 많이 박히기 일쑤이고, 1년에 몇번 안부전화라든지 삐쭉 얼굴 들이밀며 용돈 봉투 드리는 자식들은 너무나도 장하고 기특한 자식으로 생각되는 아이러니.

더욱이 나를 포함한 K장녀들의 희생은 너무도 당연시된다. 아까 저녁때 새삼 옛날 얘기를 끄집어내며 화를 냈던 건, 엄마가 당뇨관리에 신경 안쓰고 과일을 너무 많이 드신 것에 꼭지가 돌았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경도인지장애로 깜박깜박 본인이 먹은 걸 기억 못하는 상황에서 과일 탐닉은 더욱 심해져, 내가 정량 따져(사실 병원 의사들은 과일 금지! 토마토만 드시라고 함)  챙겨드렸는데도 그건 그것이고 당신은 게으른자의 최애과일인 귤을 자꾸만 꺼내드신다는 것이 문제다.

조울증이 극심했을 때 혈당관리가 아예 안 돼, 급성신부전증으로 중환자실에서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을 간신히 넘긴 전적이 있는 분이 왜 과일을 자꾸 꺼내먹냐고 신경질을 내다가, 그 황망했던 두달의 간병기가 떠올랐다. 물론 엄마가 중환자실에 계실 땐 울고불며 그저 무사히 깨어나시기만을 기원했었지만, 이후 일반병실로 옮겨 하지마비가 풀리기까지 온갖 수발을 2달 내내 하면서 나도 극한 스트레스에 시달렸었다. 처음엔 출판사에 양해를 구해 마감일을 연기하고 병간호에만 매달렸지만 그 기간이 2달까지 길어질 줄 아무도 몰랐고, 아버지가 매일 아침 병실에 와 저녁까지 곁을 지키는 애정을 쏟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보조침대 쪽잠은 2달 꼬박 내 차지였다. 낮엔 종종 후다닥 집에 가서 아빠 먹을 반찬 만들어놓고 와야했고, 이젠 좀 간병인을 쓰자는 동생들과 나의 제안에 아빠랑 엄마는 버럭 화를 냈다. 아니 어떻게 네 엄마를 남의 손에 맡길 수가 있느냐고! (애처가인 아빠 본인도 옆에 앉아 엄마 손이나 쓰다듬을 뿐, 기저귀 갈기라든지 소변주머니 비우기라든지 이런 건 손도 못대셨음. 욕창까지 심하게 생긴 상황이라 안쓰럽고 무서워서 자긴 손을 댈 수가 없으시다고... +_+)

당시 큰동생 부인이 나를 안쓰러이 여겨 하룻밤 당번을 교대해주겠다고 나섰으나... 한달 만인가 집에 와서 처음으로 편한 잠을 자던 새벽 3시 30분. 엄마가 빨리 오라고 전화를 했더랬다. 밤새 아예 눕지도 못하고 병상을 지켰던 큰며느리가 도통 못 미더워서 안 되겠다나. 아직까지도 주변에 효녀로 손꼽히는 나도, 그 당시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은 진리임을 깨달았다. 큰딸이자 외동딸이자 하나밖에 없는 만만한 프리랜서 싱글 자녀인 나의 희생과 봉사를 엄마 아빠가 어찌나 당연하게 여기시던지...  아들들은 일주일에 한두 번 퇴근해서 병문안만 와도 막 고마워하는데, 종일 붙어서 누렇게 떠가는 나한테는 고마워하지도 않고 말이지! (이런 상황에 네가 있어 참 다행이다, 너 밖에 없다, 너 때문에 내가 산다.. 이따위 말은 사실 세뇌이자 부담 전가일 뿐, 감사의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조울증 때문에 2달 내내 1, 2인실을 고집한 터라 한달에 천만원도 넘게 나왔던 병원비도 결국 절반은 내가 냈던 걸로 기억한다. 여행 가려고 모아둔 몫돈 있는 줄 어케 알고!

결국 엄마가 무사히 퇴원했던 건 감사한 일이지만 딸로서 몹시 마음 상했던 그 두 달의 간병기는 이후에도 화날 때 엄마 아빠를 공격하는 빌미가 되곤 했었는데, 부모님께 제대로 사과를 받았는지 기억이 영 나질 않는다. 좀 전에도 엄마한테 십수년전부터 엄마 입원할 때마다 당연히 간병한 나한테 왜 미안하고 고마워하지 않느냐고 따지니까.... 당신께선 기억에 없단다. 헐. 아니 그래서 내가 기억을 상기시켜드렸으면 미안하다고 하셔야죠. ㅠ.ㅠ 미안해, 안 미안해? 막 따져서 겨우 사과 받았다. 에효.

오빠만 하나 있는 친구라든지, 5남매중 막내만 남동생인 친구의 경우 어머니들의 편애는 더욱 극단적이다. 팔십이 넘은 친구 어머니는 아직도 오십대 후반인 이혼남 아들의 아침상을 정성스레 차리느라 새벽부터 친구를 가사도우미처럼 부리신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넌 안 낳으려다가 낳았으니 고마워하라고 하신다든지, 무조건 오빠한테 잘해라고 하신다든지... ㅠ.ㅠ 외아들의 큰누나인 친구도 엄마를 안쓰러워하기는 하지만 매사에 아들아들 위하는 모습에 상처를 받는 경우가 많다. 아니 해외여행이든 국내여행이든 모시고 다니는 건 내 친구인데 왜 막내아들만 예뻐하시냐고! 

3, 40년대에 태어난 엄마들은 뼛속 깊이 남아선호사상이 박혀있고 본인도 어려서부터 딸이라는 이유로 가사노동에 시달려왔음에도 그게 부당하다고 여기기는커녕 다음 세대의 딸 역시 부가노동력으로 여기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열살무렵부터 명절이면 생선전, 동그랑땡에 밀가루 묻히는 것부터 배우며 잘한다, 잘한다는 말이 정말 칭찬인 줄 알고 송편빚기 만두빚기에 자원한 옛날의 어린 나를 돌이겨보면 너무도 억울하고 속상하다. 남동생들은 옆에서 딱지치기 팽이치기나 하고 놀았는데! 난 음식 거들지 않으면 어린 사촌동생들 포대기로 업고 달래주고 있었고 흑..  박수근의 <애기 업은 소녀>에서 울 엄마의 모습을 떠올렸지만, 사실은 그 친숙함에 내 모습도 담겨있기 때문일 수도!  

한껏 비뚤어져 있는 내 심정으로 판단컨대 확실히 엄마들은 자식들에 대해서 얼마간 편애를 한다. 편애 받는 자식들도 아픔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암튼 편애에서 제외된 자식들은, 그 중에서도 보살핌 노동력으로 당연시되는 딸들은 특히 억울하다. 연로한 병든 부모의 보살핌 노동에 대한 실태 조사에서 1순위는 비혼딸, 2순위는 기혼딸, 3순위는 비혼아들, 4순위는 기혼아들(사실은 며느리) 순이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이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권의 공통점이라고 들은듯. 어차피 후대 아이들은 부모 보살핌을 의무로 여기지도 않겠지만, 심정적으로 딸이 더 부모를 잘 모실 거라는 편견이 어쩌면 요즘 딸 선호사상과도 맞물리지 않나 싶어 소름이 끼친다. 편애하는 자식 따로 있고, 보살핌 노동자로 당첨되는 자식 따로 있고, 공평하지 못하다! 요즘 세대의 사상으로 봐서는 아직도 한참 멀었다 싶지만, 후대의 딸들은 부디 더 자유롭기를... 나는 이미 이번 생에 글렀으니... 사랑하는 나의 조카 ㅈㅁ이 같은 딸들을 위해서 세상이 더 확확 바뀌기를 소망한다. 엄마들부터 제발 바뀌어야한다고! (설마 바뀌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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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들은 왜 속마음을 선뜻 털어놓지 않으실까. 표본의 수가 엄청 적기는 하지만 친구들과 노모 얘기를 하다보면 역시나 공통되는 푸념 하나가 엄마의 말뜻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한국인은 최소한 세번은 권해야한다는 쓸데없는 '국룰' 때문일까? 바쁘게 돌아가는 21세기에, 모녀지간에 아직도 그러는 건 시간낭비 감정낭비 아닌가?!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요번 엄마 생일에 맛있는거 외식할까요? 아니 됐다. 귀찮게 뭘 나가 먹니. 간단히 집에서 먹자.... 근데 또 열심히 설득에 나서면, 영 싫은 눈치도 아니다. 물론 까칠한 딸의 설득이라는 것이 조근조근 양해를 구하는 게 아니라서, 아 몰라! 집에서 밥 차리기 내가 힘들다고요! 뭐든 나가서 먹을 거야! 한중일양식 중에 고르세요. 안 고르면 내 맘대로 정할거야!... 이런 식으로 반협박을 하면 엄만 또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선다. 솔직히는 원래도 그럴싸한 데 가서 외식하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

사실 울 엄만 본인의 욕망을 늘 감추고 살며 인고의 삶을 표방하는 어머니상은 아니다. 오래 우울증, 조울증을 겪으시면서 자기방어기제가 생겼는지, 아니면 늘 엄마를 중심으로 (이건 작고하신 아버지의 아내 사랑 영향이 크지만) 위해바치는 태도가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종종 내가 "울 엄만 모성애가 부족해!"라고 투덜거릴 만큼 본인 중심의 사고방식을 시전하실 때가 많다. 나의 두 할머니들이 극진한 손주사랑으로 뭐든 손주 먼저 챙겼던 태도와 너무도 달라서 나로선 신기할 정도다. 또 예를 들자면, 울 할머니들은 과일이든 간식이든 웃 어른으로서 제일 먼저 챙겨드리면, 그걸 대체로 나나 어린 손주들에게 양보하셨다. 아니면 아껴두었다가 우리더러 더 먹어으라고 주신다든지. 근데 울 엄만 혹시라도 옆에서 빨랑 먹고 싶어 징징 우는 조카들에게 먼저 간식이나 과일을 챙겨주었다가는 엄청 뭐라고 하셨더랬다. 어른(당신)이 먼저지! 애들이 어디 버릇 없이!!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고는 실제로도 엄마 입으로 가장 먼저 들어감. ㅠ.ㅠ 딸기공주였던 큰 조카와 왕비마마 울 엄마의 은근한 알력 다툼 때문에 ㅋㅋ 옛날엔 따로따로 담은 딸기와 케이크를 동시에 딱 가져다 드리거나, 큰 접시에 공유용으로 내갔을 땐 양손으로 동시에 포크로 찍어 나눠드렸을 정도다.

모든 엄마들이 자식을 위해 언제나 희생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모성애도 결국 사회를 위한 세뇌이자 이데올로기라는 데 동조함. 그렇기에 울 엄마의 당당한 가모장 태도를 응원하긴 하는데, 먹거리 장유유서와 관련된 원칙은 중시하면서 그 외 사안엔 왜 본인의 속마음을 단번에 내보이는 건 어려워하시는지 모르겠다. 모녀 여행이라도 떠났다가는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반응 때문에 얼마나 속이 터졌던가. 이거 먹을까, 저거 먹을까, 여기 더 들렀다 갈까, 말까, 뭘 살 것인가 말 것인가의 선택 앞에서 엄마의 첫 대답은 늘 "됐어." "괜찮아." 였던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짜증나서 쌩 돌아서기라도 해보면 섭섭한 눈치시고! 어휴.  

엄마도 이젠 내 더러운 성질머리 아실 때도 됐는데, 아직도 습관처럼 "엄만, 됐다. 니 마음대로 해."라고 하는 반응 때문에 속이 문드러진다. 그래서 요새 내가 도입한 방법은 질문하기 전에 먼저 협박(?)을 한다는 거다. 엄마, 딱 한번만 물을 거예요. 잘 생각하고 대답하세요.... ㅎㅎ (물론 이 방법도 잘 안 통할 때가 많다. +_+) 내가 너무 못됐나? 엄마들도 제발 이제 좀 자기가 원하는 것, 바라는 것, 좋고 싫은 것을 단숨에 입밖으로 내뱉으셨음 좋겠다. 여든살에도 맘대로 못하고 살면 넘 억울하지 않으시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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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멀리즘을 실천하기는 어려워도 암튼 물건 정리하기 원칙 중 1년간 안 입은 옷은 버려라, 가 정답이라는데 동의하지만 코로나 시국에 외출을 삼가다보니 1년간 안 입은 옷을 추려낸다면 아마 절반도 넘을지 모른다. 그러니 옷 버리기는 코로나 시국에서 벗어난 다음으로 하기로 하고...

그래도 엄마옷들 중에는 1년이 아니라 3, 4년간 꺼내보지도 않은 옷들이 더러 있어서 몇 개 버리려고 꺼내놓았다가 한판 싸움이 났다. 모녀간의 싸움이라는 것이 뭐 서로에게 잔소리를 연달아 늘어놓고 반항하는 정도이긴 하지만, 엄마는 내가 안 입는 옷 좀 정리해서 버리자고 하면 꼭 "나도 갖다 버려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웃기는 건 또 내가 엄마 안 계실 때 몰래 버린 옷은 없어진 줄도 아예 모르신다는 점! 

노인들이 오래된 물건을 자신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 자신도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느끼신다고 -- 함부로 버리지 못한다는 말은 들었는데, 아니 진짜로 어깨뽕이 어마어마하게 들어간 연두+주황 체크무늬 재킷 같은 건 안 버리면 대체 어쩌시겠다는 건가? +_+  그나마도 요샌 버리는 게 아니고 아름다운가게에 기부할 거다, 옷 수거함에 넣어두면 수출된다더라 살살 달래서 설득해 엄마의 허락을 받을 때가 많지만, 도무지 입을 일 없을 것 같은 여우털 달린 (무거운) 롱코트라든지 엄청 비싸게 장만했으나 10년도 넘게 안 입은 무스탕이라든지, 버버리 롱트렌치코트 같은 건 아직도 옷장을 차지하고 있다.

"아예 나도 갖다 버려라!"와 함께 세트로 엄마가 부르짖는 말 또 하나는 "앞으로 죽을 때까지 옷을 절대 사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그간 못 버린 옷들을 다 껴안고 계시니 옷장이며 서랍장이며 옷방에 옷이 오죽 많겠나. 그러니깐 유행 지나서, 혹은 너무 무거워서 안 입는 옷들 싹 다 정리하고 새로 갑삭하고 편한 옷들로 몇 개 새로 장만하시자고 아무리 얘길 해봐야 소용이 없다. 지금 있는 옷만 다 돌려 입어도 죽을 때까지 다 못입겠다나. 

그치만 오십대인 나도 이젠 무거운 옷 어깨 허리 아파서 못 입겠고 아무리 예뻐보여도 꽉 끼는 옷은 손이 안가게 마련인데 팔십대 노인이 무거운 옷들을 대체 어떻게 입으시겠다는 것인지... 엄마 옷 정리 문제로 싸웠다고  친구들에게  푸념했더니 역시나 그들도 깔깔 웃었다. 칠, 팔십대 엄마들 죽을 때까지 옷 안 사시겠다는 레파토리는 왜 다들 똑같으냐면서. 쳇.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작년 겨울에 편하게 입을 경량패딩을 사드렸고, 당연히 엄만 요새 가끔 병원 나들이 할 때 갑삭하니 거추장스럽지 않은 그 옷만 입으신다. 새옷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어휴. 

아끼는 삶이 습관과 태도가 되신 엄마들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이제 좀 그러지 마십시다. 계속 좀 누리고 사시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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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친가든 외가든 할머니댁에 놀러 가보면 온 집안이 깜깜했다. 전깃불을 아끼느라고 혼자 계시거나 할아버지랑 두분만 계시면 낮엔 좀처럼 전등을 켜지 않는 게 일상이었던 거다. 역시나 전쟁 세대의 습관인 것 같다. 7, 80년대까지도 종종 비가 많이 오거나 벼락치면 정전사태가 났으니 학교에서 전기 절약에 관한 표어를 만든 적도 있다. 

암튼 여름방학때 외가에 놀러가 며칠 지내다보면 외할머니는 심지어 전깃불을 켜면 덥다고 얼른 끄라고 소리치셨다. 예전 30촉, 20촉, 100촉짜리 (이런 말 아는 사람은 옛날 사람이다. ㅠ.ㅠ) 백열등에 익숙한 사고방식이었을 거다. 진짜로 백열등은 오래 켜두면 뜨거워서 손을 델 수도 있다. 그치만 형광등은 안 뜨거워진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외할머니에겐 안 통했다. 해서 여름 낮엔 어둠컴컴한 방안에서 선풍기만 휘휘 돌아가는 풍경이 그려진다.

문제는 우리 엄마도 여전히 전깃불을 몹시 아끼신다는 거다. 이번 여름에 하도 더워서 에어컨을 밤새 트는 날은 있었을지언정, 방에 전등 켜는 건 잘 볼 수가 없다. 집이 동남향이라서 오후엔 좀 거실이 어두워지는 편이라 글씨라도 읽을라치면 난 전등을 켜야 속이 시원한데 엄마는 굳이 베란다 창에 비춰가며 그냥 뭔가를 읽으신다. 화장실 갈 때도 낮엔 전등을 켜지 않으신다. 문 닫으면 당연히 어두우니 볼 일 보면서 문을 열어두는 식이다. ㅠ.ㅠ 엄마나 나나 각자 공간에서 따로 살지만 난 혼자 있어서 화장실 문 열고 볼 일 보는 건 상상도 안 되는데, 엄만 참....  

짜증이 나는 건 엄마가 뭔가 안방이나 옷방에서 물건을 찾아야할 때다. 낮에도 옷장이나 서랍에 든 물건을 찾으려면 전등을 켜야 마땅하건만, 엄만 깜깜한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뒤져놓곤 "암만 찾아도 없다"고 그냥 나오신다. 내가 전등 스위치만 올려도 바로 보이는 물건을 도대체 왜?!!

놀랍게도 전등을 잘 안 켜는 것 역시 친구의 어머님들도 공통으로 보이시는 행동이다. 노화가 진행될수록 시야가 좁아지는지 물건을 잘 찾지 못하면서도, 굳이 전기요금을 아끼는 습관... 참으로 괴롭다. 우리나라만큼 전기요금 싼 데도 없다고, LED등이나 형광등은 전기요금도 얼마 안 나온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소용없다. 반면에 조카들은 가는 곳마다 전등을 켜두는 게 일상이다. 어두운 걸 못 견디는 거다. 혼자 있을땐 더더욱! 그래서 조카 ㅈㅁ이가 우리집에서 지낼 땐 전등 스위치 안 내린다고 할머니한테 잔소리를 엄청 들었다. 화장실도 늘 켜놓고 냉장고 들락날락해야하니 부엌도 켜놓고...  ㅎㅎ

신체리듬을 자연에 맞추려면 낮엔 태양광으로만 살고 밤엔 전등의 도움을 약간 받다가 깜깜하게 끄고 잘 자는 게 좋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하냐고! 전등은 잘 안켜고 깜깜하게 사시지만 그보다 전기요금은 훨씬 더 많이 나오는 TV는 온종일 틀어놓으신다는 것 또한 엄마들의 공통점이다. 아 진짜, 엄마들은 왜 그럴까. (그렇지 않은 어머님들의 사례 구함! ^^)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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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부터 비혼 친구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노모를 봉양하며, 혹은 여전히 노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함께 살고 있다. 독립해서 20년도 넘게 홀로 잘 살던 친구는 엄마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자의가 3할, 타의가 7할의 비율로 집에 다시 들어갔고 무급 가사도우미로 구박 받으며 살고 있다고 종종 푸념을 한다. 

암튼 뭐 그건 각자 집안의 사정이 있을테고 내가 왈가왈부할 자격은 없는 것 같으니 그저 셋이 모였을 때 서로 어쩜 그리 똑같냐고 놀라워했던 공통점을 적어본다. 

엄마들은 대체 왜 그러는지 잘 모르겠는데, 양념 간장을 너무나도 아끼신다. 예를 들어서 두부 부침이라든지 부추전이라든지 뭔가 부침개라도 만들어 먹는 날  양념 간장을 만들어 찍어 먹고 나면 기름도 둥둥 뜨고 당연히 버려야 맞지 않나? 근데 노모들께선 그걸 절대 못 버리게 한다. 랩으로 씌워 냉장고에 넣어뒀다가 담에 또 찍어먹어야한다고. 아깝다고. 버리겠다고 하면 펄펄 뛰신단다.

해서 어느 날은 대여섯 개 쯤 되는 간장종지가 그릇장에서 한개도 보이지 않는 사태가 생겨난다. 찾아보면 다 냉장고에 들어 있고, 어떤 건 간장이 다 말라붙어 소금기만 남아 있기도 한다. 고추장 양념은 검게 굳어 언제부터 냉장고 구석에서 굴러다녔는지 알 수 없다.  물론 친구들의 어머니는 친구와 함께 살림살이를 분담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고 우리집은 내가 거의 전담하기 때문에 간장종지가 몽땅 다 냉장고에 들어가는 일은 없다. 울 왕비마마께서는 랩을 씌워 반찬을 치운다든지 하는 가사일을 절대 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 내가 바빠서 설거지라도 해달라고 부탁드리고 식탁에서 미리 벗어나 외출이라도 하고 돌아오면, 식탁에 양념장 간장종지만 고대로 놓여 있다. 반찬 뚜껑을 대충 덮은 채로...

궁상 떨지 말고 양념장 좀 버리시라고 버럭 소리치면, 엄마의 반응은 똑같다. "아깝잖아." 

나름 추측한 이유는 몇 가지 있다.

1) 전쟁을 겪으신 세대라서 엄마들의 절약정신이 몸에 배어 있다.

2) 음식을 함부로 버리면 죄받는다, 나중에 죽어서 지옥에 가 버린 음식을 다 먹어야 한다는 믿음. (울 엄마와 H의 어머니는 불교신자이시지만, Y의 어머니는 아닌데?)

3) 메주를 쑤어 간장 된장을 만들어 먹던 세대 분들이라 간장 한 종지가 너무나도 소중하다. 저렴한 양조간장 사먹는 우리와는 시각부터 다른 거다. (그러나 말라붙은 종지에 든 간장은 분명 양조간장이라는 점)

간장종지뿐만 아니라 울 엄마는 김치 탕기에 담긴 김칫국물도 못 버리신다. 간편하게 사느라 자른 포기 김치를 밀폐용기에 담아두고 매 끼니마다 꺼내먹고 또 넣어놓고 반복하는데 김치는 다 먹고 국물만 남아도 당연히 뚜껑을 덮어 고스란히 냉장고 행이다. 아 대체 왜??? 엄만 그릇을 씻지 말고 거기다 다시 또 김치를 잘라 넣으면 되지 않냐고 하신다. 김치국물 아깝잖아... 

어휴. 난 지옥 같은 거 믿지도 않아! 실제로 있다면 나중에 지옥에 가서 내가 다 먹을 게요. 제발 버립시다! 엄마 몰래 오늘도 나는 남은 김치국물과 두부 찍어먹은 참기름 간장을 설거지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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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든 꽃

아픈 손가락 2020. 10. 2. 18:58

간만에 리시안서스 한다발을 사다가 꽂아두고 하도 예뻐서 연일 감탄하고 있다. 주로 식탁에 놓아두고 밥 한숟갈 먹고 씹으며 쳐다보면 기분이 절로 좋아지는데, 희한하게도 엄만 나와 계속 시각이 다르다.

원래도 엄만 꽃을 좋아하면서도 '절화'를 별로 탐탁히 여기지 않으신다. 생명을 똑 잘라 죽여서 꽃아놓기 때문이란다. 불자의 마음이라 그러려니 하면서도, 예쁜 꽃 좀 곁에 두고 보려고 사온 나로선 좀 심술이 난다.

이번에도 신이 나서 꽃다발을 꽂아두고 이쁘지, 이쁘지? 묻는 내게 엄만 대뜸 "꽃이 꼭 조화같다"고 대꾸했다. +_+ 꽃도 잎도 모두 조화처럼 생겨서 신기하다고. 시니컬하시기는...

리시안서스가 좀 하늘하늘한 꽃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리어카 좌판에서 산 거라 덜 싱싱했는지 사온지 사흘째부터 한두 송이씩 좀 말라가며 시들기 시작했다. 난 가끔 시든 꽃도 거꾸로 말려 오래 두고보는 인간인지라 별 생각 없이 보고 있는데 엄만 연일 가위를 들고 시든 꽃을 솎아내기 시작했다. 내 눈엔 아직 멀쩡해보이는 꽃도 꽃잎 가장자리가 말랐다며 어서 잘라버려야겠다고. 아니 왜?!

오늘로 닷새째. 아침 저녁으로 두번씩이나 시든꽃을 솎아낸 꽃은 처음 저날보다 거의 3분의 1은 줄어들었는데;; 오늘 저녁 식탁에서도 엄만 밥을 먹는 내내 매의 눈으로 또 잘라버릴 꽃을 찾는 눈치였다. 아 놔 진짜! 아직 다 멀쩡하구만. 엄마, 그냥 제일 싱싱하고 예쁜 꽃만 보면 안돼? 왜 예쁜 꽃 놔두고 계속 시든 꽃만 쳐다봐요? 내가 따지듯이 물었다. 누가 우울증환자 아니랄까봐! 설마 완벽주의 성향 때문인 거야? 

사과를 한 상자 두고 먹을 때 썪은 사과부터 먹는 사람과 제일 잘 익고 맛있는 사과부터 먹는 사람이 있다나 뭐라나, 그게 삶의 태도일 수도 있다는 우화를 읽은 기억이 난다. 썪은 사과는 물론 미리 다 골라내 멀쩡한 사과를 보호해야겠지만... 좋은 거, 맛있는 걸 늘 제일 마지막에 먹으려고 아끼는 사람이 바로 우리 엄마다. 그러다가 다 썪히기 십상이고.

디저트로 과일을 먹을 때도 엄만 젤 덜 단 과일부터 먹는다. 예를 들면 방울토마토, 사과, 참외 등의 순서. 먼저 단 과일을 먹으면 다음 과일은 맛이 없어진다나. 의도적으로 노력을 했던건지 아닌지 모르겠는데, 나는 제일 먼저 좋아하는 과일을 먹는다. 새콤달콤한 과일을 좋아하므로 사과, 참외, 토마토의 순이기 쉽다. 달지 않은 토마토를 맨 마지막에 먹어야 입가심도 될 것 같고. 

우울증 환자의 특징인지, 아니면 없이 산 기억이 있고 아끼는 것이 생활화된 구세대 여성의 특징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반찬을 앞두고도 엄마의 태도는 짜증스러울 때가 많다. 내가 기껏 솜씨를 부려 새로 만든 메인 요리를 앞에 두고도 엄마의 첫번째 젓가락질은 '없애버려야 할' 오래된 반찬을 향하기 일쑤다. "저거부터 다 먹어치우자"라는 논리인데, 어차피 그게 마지막이 아닌 경우도 많다. 그냥 새 반찬은 좀 아껴야겠다는 심리일까? 인지능력이 약간 떨어지면서, 시야가 좁아지는지 반찬도 눈앞에 있는 것만 공략하는 느낌이라 요샌 아예 식판처럼 큰 접시에 반찬 할당량을 정해 밥과 함께 담아드린다. 그러면 또 군말없이 새 반찬부터 드시는 걸 볼 수 있다. 

울 엄만 정말 연구대상이다. 나로선 아무리 탐구해도 도달하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  명절을 앞두고 엄마 친구들이 안부 전화를 걸어왔을 때, 엄마의 대꾸방식도 참 여전하다. 엄마 친구분들은 병든 엄마를 오래전부터 챙기는 나를 대견해하고 칭찬하시는데, 엄만 맞장구를 치다가도 곧바로 딸 흉을 본다. 소곤소곤 뒷담화가 아니라,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니 듣건말건 상관없다는 태도다.  "맞아, 내가 딸 때문에 사는 거지. 쟤 없었음 벌써 죽었겠지. 근데 쟤가 성질이 드러워서 나랑 맨날 싸워. 잔소리가 말도 못해..."  거의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매번 대꾸가 똑같다. 저렇게 자기 의견에 솔직한데 왜 우울증이지 싶을 때도 있다. 저것도 방어기제인가?

암튼 난 하필 시든 꽃만 유심히 바라보고 매번 썩은 과일부터 골라 먹는 그 비관적 태도에 물들지 않으려고 계속 노력중이다. 내 눈에 꽃은 대체로 시들어도 예쁜데.  드라이플라워도 있구만요. 남은 것중에 제일 맛있는 사과를 골라 먹으면 매번 끝까지 제일 맛있는 것만 먹을 수 있다는 낙관론, 눈 가리기 아웅이라도 좀 연습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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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미투

아픈 손가락 2020. 4. 20. 18:27

Me too는 '나도 당했다'가 아니라 '나도 말한다'는 의미라고 여성계에서 암만 말을 해도 여전히 언론에선 미투 옆에 괄호 치고 '나도 당했다'라고 적혀 있다. 아무튼 대한민국 여성으로서 이 땅에 살면서 공공장소의 불법촬영 위험과 성추행, 성희롱의 경험에 노출되지 않은 사람은 0%일 거라 확신한다. 너무 흔해서 오히려 황당하고 차라리 없었던 것처럼 살고 싶어 속으로 삭히고 지나간 수많은 상처들.

얼마전 총선을 앞두고 팔순 노모에게 연동형비례제 정당은 어디를 뽑을 예정인지, 어디를 뽑으면 좋겠는지 의논하는 과정에서 N번방에 관해 설명을 드렸다. 파렴치하고 악랄하기 그지없는 성범죄자놈들의 행태와 피해자들의 고통, 언론과 일부 인간들의 2차 가해... "그러길래 좀 조심하지" 따위의 말들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가해자 중심 언사인지. 그러다가 문득 이제까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오래 전 나의 상처가 떠올랐고, 나도 모르게 엄마에게 물었다. 그 옛날 북가좌동 할머니댁에 살 때 우리 이웃에 살던 까까머리 남자애 이름이 해중이 맞아? - 해중이? 아... 정O 동생? 엄마는 종종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며칠인지도 까먹으면서 놀랍게도 옛날 일은 귀신같이 기억한다. 

사실 해중이라는 이름은 나도 요번에 처음으로 기억이 난 거다. 그냥 까까머리 시커먼 얼굴, 더럽고 꾀죄죄한 차림새와 히죽거리는 기분나쁜 웃음, 그리고 뭉뚱그려진 얼굴로만 막연히 기억되는 걸 애써 지우곤 했는데 어쩌다가 퍼뜩 그 이름이 떠올랐을까. 암튼 욕쟁이가 된 지금 난 엄마에게 말했다. 5살 때인지 6살 때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해중이 그 새끼가 나한테 엄청 나쁜짓을 했다고. 그간 애써 지우려고 했던 기억이라 정확하진 않지만 중학생 정도 되었던 그놈은 우리 할머니댁의 안방과 건넌방 사이 거의 창고처럼 쓰이덧 마룻방 깜깜한 공간에서 어린 나의 속옷을 벗긴 뒤, 손으로 성추행을 했고, 무섭고 아파서 우는 내게 그 사실을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말하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을 했었다. 당연히 나는 그 이야기를 당시는 물론이고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랬냐고? 그리고 이제 와서 왜 그 이야기를 하느냐고? 그땐 그런 일을 당한 것이 내 잘못인 것만 같았을 테고, 창피해서 숨겨야할 일이라 느꼈을 테고, 놈의 협박이 무섭기도 했겠지.... 이름도 기억 못하는 그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불안?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나 역시도 그냥 없었던 일로 덮어버리고 싶은 끔찍한 기억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초등학생 때 명절에 한복을 입고 온 가족이 버스를 타고 외갓집에 다녀오던 길, 버젓이 아빠엄마가 옆에 서 있는데도 어떤 나쁜 인간이 공단 한복을 입은 열살 무렵의 내 엉덩이를  쓰다듬던 손길을 느끼고도 얼어붙어 아무말 못했었다고, 그 옛날엔 왜 그렇게 성추행범들이 많았는지, 왜 그런 일을 당하고도 곧바로 부모에게 이르지 못했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지금 같으면 소리를 질러 피해 사실을 알리고 경찰서로 버스를 몰아 (소매치기범이 있는 경우 옛날엔 정말로 기사 아저씨가 버스 문 안 열고 곧장 경찰서 앞으로 버스를 댄 적이 있었던 걸 경험한 바 있다) 현행범으로 놈을 잡아 처넣었을텐데 말이다. 그뿐인가, 대학 신입생 때 버스에서 성기노출범을 만나 옆자리에 앉은 여학생과 둘이 손잡고 엉엉울었던 기억까지 다시 설명하기에 이르렀다.  과거에 출몰하던 온갖 성범죄자들이 이제는 화장실과 지하철에서 불법촬영을 일삼는 것에서 벗어나 무고한 피해자들을 성노예로 만들고 그 영상을 돌려보는 끔찍한 지경에 이르른 것이 N번방의 실태이니, 반드시 성범죄자 관련 처벌법 강화를 공약으로 내세운 후보를 뽑아야한다는 것이 나의 요지였는데... 모녀의 대화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 혐오스럽고 충격적인 이야기가 담겼다고 생각되어 실제 내용은 접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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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엄마도 그런 일이 있었어... 두 번이나. 

열살쯤 됐던가, O동 국민학교 다닐 때 동네 뒷산에서 노는데, 어떤 남자가 맛있는 걸  사준다며 따라오라고 하길래 멋 모르고 따라갔더니 그 남자가 으슥한 곳에서 바지를 훌떡 내리더니 '내 고추를 먹어라'고 했다는 것이다.  놀라서 도망쳤는데, 따라간 자기가 잘못했다 생각해 울 엄마도 결국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단다. 무려 70년 만에 처음으로 나에게 털어놓은 이야기였다.

그런 일은 한번 더 있어서, 한국전쟁때 부산으로 피란을 갔던 시절--40년생인 엄마는 부산에 열린 학교에 보내주겠다는 군무원 고모부의 말을 믿고 가족은 서울에 둔 채 혼자서만 먼저 부산으로 갔었고 학교는커녕 못된 고모의 학대를 받으며 11-12살에 고모네집 식모 노릇을 하며 굶주렸던 일이 있다고 다른 포스팅에서 밝힌 바 있다--아이들에게 초콜릿과 사탕 따위를 던져주며 선심쓰던 유엔군 중 하나가 또 다시 어린 엄마를 초콜릿으로 유인한 뒤 성기를 노출했다는 것이다....  엄마는  '영국군인'이라고 정확히 국적까지 알고 있고, 그 뒤로는 외국인  남자들만 보면 도망을 다녔단다. 지금도 성범죄자들은 전세계적으로 어디나 존재하지만, 전쟁통에 남의 나라에 와서도 아이들을 성추행하는 범죄자들이 군인으로 파견되었다니 끔찍하다. 60년대 베트남에 참전한 한국군 중에도 그런 성범죄자들이 수두룩했을 것 같다. 아무튼 엄마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그런 얘기를 어디 가서 하겠니, 창피하게.' 엄마잘못이 아니라니깐요! 역시나 그 일은 엄마가 70여년간 비밀에 붙여둔 또 하나의 끔찍한 기억이었다. 

성추행, 성폭행의 피해자는 생존자이기도 하므로... 나도 더 자세히 캐묻지는 않았다. 그저 다치지 않고 잘 빠져나왔으면 된 거라고, 그 새끼들이 용서 못할 변태성욕자, 소아성애자, 성기노출범, 성범죄자들이라고, 지금 같으면 경찰에 신고해 감방에 쳐넣었어야 한다고 한참 열을 올리며 욕을 해댔지만 그런다고 엄마의 오랜 상처가 단숨에 치유되었을 것 같지는 않다. 엄마도 의아해하셨다. 어떻게 그렇게 오래 전 일인데 그놈들이 입었던 옷 색깔까지 기억이 난다면서...

엄마, 그런 걸 트라우마라고 하는 거예요. 너무 끔찍한 기억은 뇌에 상처를 깊이 새겨놓기 때문에 거기에서 벗어나는 게 쉽지 않아요... 나 역시 그 해중이 새끼를 비롯해 성추행범, 성기노출범 때문에 꾸었던 악몽이 얼마나 많았던지 새삼 몸서리가 쳐졌다. 

 

내가 해중이라는 놈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촉발된 엄마의 미투 고백을 듣고 보니, 나는 또 궁금해졌다. 70년간 말하지 못했던 성추행의 상처와 자책 역시 결국 엄마의 조울증에 원인이 된 건 아닐까. 원래 울 엄마의 성격은 마음에 있는 이야기는 다 터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쪽이시라던데, 엄마 고교동창생들의 증언을 들어보아도 싸우면 곧장 편지로든 대화로든 풀어버려야지 며칠간 말 안하고 꽁하고 있는 건 절대 못참는 사람이라시던데... 한번도 아니고 두번이나 반복되었던 그 끔찍한 기억을 꾹꾹 파묻고 눌러놓았다면...  ㅠ.ㅠ

전문가가 아니어서 나로선 그냥 그때 그 사건은 어린 시절의 엄마 잘못이 절대로 아니에요, 나쁜 놈들이 그때도 너무 많았고 아직도 너무 많아요. 그러니깐 이제 더는 그런 일 일어나지 못하도록, 혹시나 그런 일이 생기면 제대로 처벌하고 재발을 방지할 수 있도록 우리가 다 같이 노력해야 해요... 그런 원론적인 이야기만 나누는 수밖에 없었다. 허나 일단 엄마도 나도 그 옛날의 성폭행 피해를 외부로 '발화'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단계라고 믿는다. 여기에나마 내가 그 개만도 못한 새끼 해중이란 놈의 욕을 쓰면서 제대로 단죄의 욕구와 치유가 시작됨을 느끼기 때문이다.

지난주 초 투표를 하기 직전, 나는 이러저러한 의미로 37개나 되는 비례대표 정당 중에서는 정의당 아니면 여성의당을 찍으시는 게 좋겠다고 추천했었는데... 엄만 과연 그 기다란 투표용지 어디쯤에 기표를 하셨을까. 그간 수많은 어이없는 판결과 솜방망이 처벌을 먹고 자란 N번방 사건수사 과정을 더더욱 유심히 지켜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나도 엄마도 확고하다. 더는 가만히 있지 않아야 옳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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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훈련

아픈 손가락 2020. 2. 19. 16:46

수년전 금강경 사경을 시작으로, 작년 상반기까지 엄마는 꾸준히 거의 매일 불경이나 불교서적을 노트에 필사 하셨다. 처음엔 그냥 종교적인 신심에서 비롯된 자발적 시도였지만, 독서보다도 훨씬 더 두뇌활동에 자극이 되는 게 바로 책을 읽고 중얼거리면서 손을 움직여 쓰고 다시 확인하는 복합과정이기 때문에 내가 강권하다시피 했고 엄마도 곧잘 협조해주셨다. 하지만 5월 22일을 끝으로 방치했던 노트는 나의 닥달로 9월1일에 딱 한번 다시 한 페이지 필사한 뒤 줄곧 외면당하고 있었다.

작년연말부터 병세가 나빠졌을 땐 온전하게 대화만 가능해도 감지덕지할 정도였으니, 필사는 개뿔. 바랄 수도 없었는데 2월 중순 접어들면서 엄마는 거의 안정적인 상태로 회복되었고, 머잖아 다시 약을 줄여야할 거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런데 이번주에 걱정스러운 두번의 에피소드가 발생했다. 일요일인 2월 16일. 화장실에 다녀온 엄마는 대뜸 내일 큰아들 생일이지? 라고 물었다. 네? 뭐라굽쇼? 내일이 며칠인데 큰아들 생일? 엄마의 대답은, 11월 17일이잖아....  (큰아들 생일이 11월 17일인 것은 맞다. 건강한 상태였던 몇달 전 그날을 기념해서 엄마가 아들 가족에게 밥도 사주셨더랬다) 다시 잘 생각해보라고, 냉장고에 붙어 있는 달력을 보시라고, 정신 차리라고, 지금이 11월이 맞냐고 물었다.  

잠시 후 11월 아니야? 2월이야? 왜 헷갈렸지? 본인도 의아해하고, 나도 어리둥절함과 속상함 속에서 그냥 넘어가는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어제. 셋째주 화요일. 매달 엄마가 고교동창 친구들과 오찬을 하는 날이지만, 코로나바이러스 창궐로 전날 저녁 취소되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올해는 엄마도 엄마 친구들도 대부분 팔순이 되는 해여서, 1월부터 생일자들이 돌아가서 밥을 사기로 했다는데 1월엔 당연히 엄마 상태가 안좋으시니 불참했다.  2월 오찬은 곧 생일을 맞이하는 울 엄마가 밥값을 내기로 예정되어 있었기에 엄마 본인도 요번엔 꼭 참석하리라 단단히 벼르고 계셨고, 나도 부실한 울 엄마를 종종 보살펴주시는 친구분들(길 잃고 헤매거나 약속장소 헷갈리는 울 엄마 찾으러 출동하기도 하고, 택시 태워 보낸 뒤 나한테 전화도 넣어주시고.. ㅠ.ㅠ)께 뭔가 약소하나마 선물을 하고 싶어서 핸드크림을 사다가 포장을 해두었었다.  엄마 친구분들은 성남시장까지 가서 참기름, 들기름도 짜다가 나눠주시고 막 그러는데 자긴 맨날 받기만 한다고 울 엄마가 징징거린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격 모임이 취소되었다는 전화통화 후, 미리 가방에 넣어두었던 핸드크림은 다음달을 기약하며 옷방 책상에 올려두었는데...  어제 아침에 느즈막히 일어나 보니 엄마가 보이질 않았다.

어랏? 설마... 절에 가는 날도 아니고, 에이, 모임에 가신 건 아니겠지... 생각했으나 핸드크림도 자취를 감춘걸 보며 문득, 취소되었던 모임 상황이 바뀌었나? 생각했으나 그럴 리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집이든 핸드폰으로든 전화가 걸려왔으면 내가 잠결에도 못 들을 리가 없다. 엄마가 우편물 확인하러 내려가셨나보다 했던 현관문 소리가 엄마의 외출소리였던 것이다!

득달같이 카톡을 보내고 전화를 하고 문자를 보내고... 통 답이 없더니 6번째 전화만에 엄마가 휴대폰을 받았다. 예상대로 약속장소인 사당역까지 갔다가 아무도 없어서 친구들한테 전화로 확인을 한 뒤 집에 돌아오시는 중이라고. ㅠ.ㅠ 어제 취소 전화 받은 건 전혀 기억에 없단다. 거의 두달만에 엄마 혼자 감행한 외출이다보니 그간 몇번 억지산책에 끌고 나가긴 했어도 불안했다. 혼자서 집에 잘 찾아올 수 있을까.

결과적으로 엄만 무사히 집에 돌아오셨다. (현관 비밀번호를 엉뚱하게 눌러서 내가 소리쳐 알려드려야 했으나 뭐 그건 전에도 있는 일...) 따로 쇼핑백에 들고간 핸드크림도 손에 꼭 쥐고서. ㅠ.ㅠ (한번도 손에서 놓지 않으셨다고) 근데 모임이 왜 취소되었는지, 전날 모임 취소 관련 통화를 한 기억은 전혀 없다고 했다. 모임 장소에서 홀로 기다리다가 친구들과도 한분한분 다 통화를 한 모양인데, 집에 와서도 또 다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왜 안 만나기로 했는지 물으셨다. 

매달 셋째주 화요일 모임은 당연히 각인되어 있는 정보이니 잊지 않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모임이 취소되었다는 것도 일시적인 정보이고, 내가 친구분들에게 드릴 핸드크림을 사놓았다는 것도 일회성 정보인데 왜 둘 중에 하나만 기억에 남았을까? 인간은 누구나 기억이 선택적이고 중요한 정보만 두뇌에 남는다. 근데 친구들 나눠줄 선물은 중요하고, 모임 취소는 중요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으휴.

2주전 진료때 주치의에게 정밀 뇌진단을 받아보았으면 한다고 의논했을 때, 의사는 좀 더 지켜보고 결정하자고 말했다. 인지기능개선제인 아리셉트를 드시고 계시지만, 지금 복용 용량으로도 알츠하이머 예방은 충분한 건가 불안한 엄마와 내 마음을 의사는 잘 이해 못하는 것 같다. 이런 에피소드도 그냥 일시적인 걸로 무시하고 넘어가도 되는 걸까?

암튼 몹시 불안해진 나는 다시 그 옛날 필사 노트를 꺼내왔다. 재미없는 불경과 책 내용 필사는 별로 흥미가 없을 것 같고 두뇌자극에 제일 좋은 건 외국어 배우기라는 말을 본 적이 있어서 이번엔 영어 문장을 베껴적고 단어를 외우시게 할 작정을 한 거다. 

내 이름은 OOO이고 80살이고, 어쩌고 저쩌고... 10문장쯤 되는 말을 만들어서 반복 읽기를 시킨 뒤 단어를 10번씩 쓰라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1시간쯤 뒤에 가보니, 3단어만 되풀이해서 쓰고 7개 단어는 깡그리 패스, 나머지는 마지막 네 문장을 베껴적어놓으셨다. 내가 나중에 외우기 시험볼 거라고 했더니 열심히 읽고 외우느라 바쁘셨나보다. 그게 아니면 정보 전달이 일부만 머리에 남거나. 흑흑.

암튼 근 6개월간 엄마가 글씨 쓸 일이 없어서 걱정했는데 영어단어 적어놓은 글씨를 보니 손가락 힘이며 인지기능 상태는 많이 나빠지지 않은 것 같아 조금 마음이 놓였다. 알츠하이머 노인들은 힘있게 획을 긋지 못한다고 들어서... 하여간에 너무 한번에 스트레스 주면 안되니깐 나머지 단어들은 오늘 다 10번씩 쓰시라고 숙제를 내주었는데... 어제 간만에 홀로 대중교통수단 외출로 무리를 한 탓인지 온종일 주무신다. 컨디션이 좋아지면서 약도 과도해진듯.  그치만 난 또 못된 사감선생처럼 가서 노친네를 깨워가지고 다시 두뇌훈련을 시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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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도 당신 영어 글씨 흡족해하심.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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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병

아픈 손가락 2020. 2. 6. 16:31

 

다행히 설날을 기점으로 엄마의 병세는 고비를 넘긴 듯하다. 불안증과 의심증도 차츰 줄어들더니 드디어 오늘은 내가 언제 그랬냐 싶게 간간이 기분이 좋으시다. 1년 전에도 12월에 심하게 발병했다가 설날 지나고 2월 들어 진정세에 접어들었었다. 그래도 작년엔 2월 말이었던 79세 생일 모임을 건너뛰었다.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었다는 의미다. 당시 핑계는 내년이 팔순이니 2020년에 거하게 밥을 먹자고, 그리고 곧이어 잡혀 있던 고손녀의 돌잔치 때 얼굴 보면 되지 않겠느냐고 동생들을 설득했다. 

 

2019년 3월9일이었던 돌잔치날 엄마는 도무지 환자로 보이지 않는 건강한 모습으로 파티에 참석하셨다. 심지어 미용실에 가서 머리 드라이도 하고 오셨던 터라 기쁨에 겨워 기념 사진도 남겼었다. 미소가 온화하고 우아하기 이를데가 없다. 평소 내가 왕비마마라고 떠받들어드리는 울 엄마의 모습이다. 남들도 다들 인상 좋으시다고, 엄청 고우시다고 (경복궁 선생님들의 칭찬이다 ㅋ) 하는 얼굴.  

오랜 세월 함께 엄마의 병증을 겪어온 가족들은 엄마 표정만 보아도 안다. 증세가 나쁠 때는 얼굴의 일부 근육과 신경도 이상해지기 때문에 사나운 표정과 눈빛으로 돌변한다. '호랑이 눈썹'이 되었다고 내가 표현하기도 하는데 눈 주변의 주름이 바깥쪽을 대각선으로 경직되면서 무서운 느낌으로 바뀌는 거다.  뇌의 일부 전달물질이 불균형을 이르면서 신경이 곤두서면 근육도 그에 따라 지배되는 것 같다. 암튼 오늘 엄마의 표정은 완전히 이 모습까지 이완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표독스러워져서 무서울 정도의 느낌에선 확실히 벗어나셨다. 이제 나도 겨우 숨을 편히 쉴 수 있을 것 같다.

 

엊그제 2주만에 다시 진료를 받으면서, 잠자는 게 여전히 불편하다는 엄마의 말에 의사는 세로켈 용량을 200mg으로 더 늘렸다. 연세가 많으셔서 복용량 변화를 심하게 할 수가 없다보니 늘 이런식이다. 입원을 시켜 곁에서 면밀히 지켜보지 않는 한 1, 2주 만에 한번씩 상담후 조금씩 약을 바꾸다 보면 한두달이 훌쩍 지나간다. 요번엔 엄마가 비협조적이어서 중간에 더 먼저 찾아가 약을 바꿀 기회를 놓쳐서 더 기간이 오래 걸렸다. 젠장.

하여간 그래도 역시나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이건 '아는 병'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러면서 참으면 결국 좋아지는 때가 온다. 다시 병세가 나빠지는 주기가 너무 빨라져 그것이 절망스럽긴 하지만, 악화일로에 놓이는 알츠하이머와는 또 다르니까.

연세 때문인지 점점 더 증세가 심해지고 기간도 길어지면서 요번에 특히 역대로 힘들고 괴롭던 차에 신기하게도 인간의 심리 원리를 다룬 책 증정본을 하나 받았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어쨌든 겪어 나가는 당사자로서 삶은 참 공교로울 때가 있다. 엄마한테 난데없는 의심과 비난을 받으며 내가 징징 울며 괴로워할 때 도착한 이 책을 받자마자 양극성 장애 부분을 펼쳐보았다. 그림과 도표로 간단한 정보를 담고 있는 책임에도, 그 간단한 정보가 엄청 위로를 주었다. 어차피 치료약이 있으니 전문가들은 다 아는 병이겠지만, 계속 재발하는 것이 너무 속상하긴 하지만 엄마가 보이는 성격 변화와 온갖 증상들도 결국엔 다 예측범위 안에 들어 있었다.

"기분이 급변할 때는 극단적인 성격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데 이는 사회적, 개인적 인간 관계에 심한 긴장을 유발한다" (<심리 원리> p40)

"일반적으로 양극성 장애의 주요 원인은 뇌 기능에 관여하는 화학물질들의 불균형으로 알려져 있다. 신경 전달 물질이라고 불리는 이 화학 물질에는 노르아드레날린, 세로토닌, 도파민이 포함되며 신경 세포 간에 신호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유전도 원인의 하나로, 양극성 장애는 가족 내에서 유전되고 어느 나이에서나 발병할 수 있다. 100명 중 2명은 살면서 한번 이상의 양극성 장애의 삽화(episode, 우울증이나 조증 같은 특정 증상이 지속되는 기간-옮긴이)를 경험한다고 하는데 그 중 일부는 평생 두어번의 삽화만 겪지만 어떤 이들은 여러 번 겪는다. 삽화를 촉발하는 요인으로는 스트레스, 질병, 인간관계에서의 어려움이나 돈 또는 직장과 관련된 문제 같은 일상 생활 속의 괴로움 등이 있다." (p40-41)

우울증과 조증의 패턴을 나타내는 그림을 보아도, 아 그렇구나 싶다.   

안정기 → 경조증 →우울증(이 시기에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수면장애와 식욕저하를 겪고 망상 환각 불안정한 사고를 경험)  → 약한 우울증 → 조증 → 혼재성 상태  ㅠ.ㅠ

영원한 레아 공주, 캐리 피셔가 남겼다는 말도 위로가 됨. "양극성 장애는 도전이지만, 거의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힘을 줄 수도 있다." 

석달째 엄마를 돌보면서 나도 우울증 환자가 되는 건 아닌가 싶은 순간이 꽤 많았다. 뭔가 다 포기해버리고 싶은 느낌? 아는 게 병이기도 하지만 또 아는 게 힘이기도 해서, 기분이 바닥을 칠 때면 위험신호라는 걸 스스로 인식하고 홀로 뛰쳐나가거나 약속을 만들어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위기를 나름 잘 극복한 것 같다. 스스로 장하다. 물론 장기적으로 볼 땐 엄마의 '삽화'가 매년 같은 시기에 반복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으므로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또 지나갈 것으로 믿어야지 별 수 있겠나.

엄마의 성격변화와 몇몇 이상 증세가 유독 심해서 혹시 조울증 때문이 아니라 알츠하이머의 전조이면 어쩌나 걱정이 되어 - 치매 환자를 겪어본 주변 사람들은 대체로 알츠하이머의 가능성에 손을 들었다 - 주치의에게 두뇌 정밀검사를 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증세가 완전히 회복된 이후에도 그러는지 두고 보자고. 엄마도 나도 가장 두려워하는 그 병만은 진짜로 아니면 좋겠다. 째뜬 보름 뒤로 다가온 조촐한 팔순 가족모임은 별 문제 없이 강행해도 좋을 듯하니 다행이다. 다들 웃는 얼굴로 맛있는 밥 먹고 힘낼 수 있기를.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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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새만에

아픈 손가락 2020. 1. 16. 21:32

일이 바빠 두문불출하고 집에 처박혀 일만 하던 날이 오늘로 꼬박 닷새. 결국 초저녁에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갔다가 돌아왔다. 온종일 수시로 등뒤로 다가와 핸드폰이 어디가 이상하고, 딸년이 이상하고, 통장이, 자동이체가 이상하다고 자꾸 말을 거는 통에 원고에 집중도 안 되고, 말대꾸와 설명을 해주는 것도 한계에 도달해 폭발한 거다.

나도 울고 엄마도 울고. 예전엔 내가 너무 속상해서 엉엉 울고 눈물로 호소하면 엄마는 정신줄을 놓은 와중에도 날 안쓰러워하면서 따라 울다가 조금 안정을 되찾고는 했었는데, 이젠 엉엉 따라 울긴 하지만 딸년인 내가 이상해졌다고, 착한 딸은 어디 가고 저렇게 악독한 애가 됐는지 모르겠다면서, 내가 무섭다고 그런다. 그건 나도 마찬가진데. 서로 한계가 온걸까.

배설이 필요하지만 결국 내 얼굴에 침뱉기 같은 이야기를 이렇게 주절주절 적어놓는다는 게 과연 의미있는 일일까. 노트북과 책을 들고 뛰쳐나가 일부러 몸에 나쁜 정크푸드를 꾸역꾸역 먹은 뒤 스타벅스에 들어가 일감을 펼쳤지만, 결국 몇시간 못하고 들어왔다. 처음에 나갈 땐 엄마가 밥을 먹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큰소리를 쳤지만, 그래도 너무 늦지 않게 밥도 약도 먹게 해야겠기에 꾸역꾸역 들어와 식탁을 차리고 있는 내가 너무 불쌍했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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