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 해당되는 글 56건

  1. 2007.02.16 설날 준비 4
  2. 2007.02.15 흑백 사진의 추억 7
  3. 2007.02.01 내력 2
  4. 2007.01.22 멸치 생각 16
  5. 2006.10.17 신데렐라 귀가시간 4
  6. 2006.10.16 할머니의 마음은 바다처럼 넓어라 5

설날 준비

삶꾸러미 2007. 2. 16. 16:58
8남매 장남이신 울 아부지의 자랑스러운 '고명딸'로 태어나
나는 명절에 대한 기억이 아스라히 남아 있을 때부터 명절 노동에 손을 보탰던 것 같다.
제일 쉬운 단계인 "생선 전 밀가루 묻히기"부터.. ^^;;

이제 그 일은 작년부터 정민공주의 몫이 되었으니..
정민이도 나중에 커서 명절이면 자기도 엄마랑 고모 거들어서 포뜬 생선에 밀가루 묻혔다고 추억하게 되겠지.

"남들 다 가는"(?) 시집을 안 가고 버티기에 들어간지 꽤 됐지만
명절은 며느리가 아닌 나에게도 제법 버거운 노동의 장이다.
부실한 엄마 대신, 장보기부터 명절음식 총감독을 해온 연차가 제법 되기 때문...
음식 솜씨 좋으신 작은엄마들이 명절이며, 제사 때마다 미리 와서 도와주시지만, 이젠 환갑을 바라보시는 그분들은 좀 쉬실 때가 된 것 같아서, 올케들에겐 좀 미안하지만 작년부터 우리끼리 음식준비 다 해보자고 다짐했다.
우리식구만 달랑 먹는 음식을 준비하는 것과
3, 40명쯤 되는 친척분들이 드실 명절 음식을 준비하는 건 역시나 부담이 크다.
하지만 몇년간의 전적으로 보아, 올해도 무사히 맛있고 푸짐하게 잘 지나갈 것이라 여기며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다만... 명절 때 다 팽개치고 훌쩍 여행을 떠나고픈 나의 "로망"이 과연 언제나 이루어질까.. 하는 것이 서글플 뿐. ^^;;
하긴 그런 로망이 있긴 해도, 일년에 몇번 우글우글 다들 모이시는 친척분들이랑 맛있는 거 나눠먹고 세뱃돈 받고(요샌 부모님 밖에 안 주시지만 ㅜ.ㅜ;;)
고스톱 치시는 작은 아버지들 옆에서 개평 얻어내고, 애들 끼리 윷점치고 그러는 게 나는 싫지 않은 정도가 아니고 제법 즐기는 편이다.
명절의 즐거움이 여성들의 가열찬 노동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 속상한데... 그거야 아부지를 비롯한 모든 남자들을 자꾸 부려먹으면 되지 않을까...(라지만 막강한 설거지를 좁은 부엌에서 해치우는 건 아무래도 동생놈들한테 역부족이더라. 쩝..)

암튼 오늘은 난생처음 수정과를 끓이고 있다.
마음 같아선 조카들이 좋아하는 식혜도 만들고 싶지만, 아무래도 엿기름과 밥알 띄우는 게 자신 없어서, 그냥 계피와 생강을 푹푹 끓이기만 하면 되는 수정과에 도전했다.

온 집안에 풍기는 계피 냄새가 그럴듯하게 명절 분위기를 만들어주고 있다.
과연 제 맛이나 나주려는지.. 슬쩍 걱정이 든다.

오늘 안에 대청소도 해야하는데...쩝.
청소는 아무래도 나보다 더 꼼꼼하신 아부지를 닥달해봐야겠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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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봤더라.
흔히 얘기하는 사회적 잣대로 본인의 나이가 꽤 많은지 아닌지 가늠해 보려면 몇 가지 질문에 대답을 해보라는 데가 있었다.
다 기억나진 않지만, 로터리식으로 채널을 돌리는 TV의 존재를 혹시 아는지...
영화 <타이타닉>을 명절특집 TV 영화가 아니라 극장에 직접 가서 봤는지...
어린시절 흑백사진이 있는지...
뭐 이런 질문이었는데, 물론 난 그 질문에 다 해당이 되었고 ^^
피식 웃으며, 그래 나 나이 많은 거 안다, 된장. 그랬던 것 같다.

윌리 호니스 사진 전시회를 보면서 그토록 흐뭇하고 뿌듯했던 건
거창하고 대단한 느낌의 사회적 이슈를 찍은 사진들보다 (7월 혁명 기념일이라든가..
역시 잘은 기억 안나지만 주먹 불 끈 쥔 아빠의 무동을 탄 어린이의 사진 같은 것도 있긴 했다)
그냥 일상에서 느껴지는 기쁨과 행복을 담은 소박한 느낌의 사진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나는 인생을 따라 움직였다.
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과 동네를 사랑한다"라고 말했다는 그의 사진 철학은 정말로 많은 작품에서 고스란히 느껴져 절로 미소가 흘러나왔다.
게다가 현대까지도 고집스럽게 흑백사진만 고집했던 그의 작품들은 어쩐지 낯익고
정겨워, 그간 여기저기에서 볼 기회가 있었던 사진들 이외에도 혹시 우리 집에 그의 낡은 작품집이라도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
새로운 기계 따위를 사들이는 걸 좋아하시던 아버지가 한 때 수동 카메라로 열심히
우리 삼남매를 찍어주시면서 혹시나 참고한 작가는 아니었을까 하는 멋진 상상까지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집에 와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가 찍은 사진과 비슷한 느낌의 흑백사진을 앨범에서 본 것도 같았고, 결국 나는 며칠이 지난 오늘 가장자리가 누렇게 변색된 옛날 앨범을 뒤적이며 흐뭇한 추억에 젖었다.

물론 내 느낌은 그저 개인적인 비약에 불과하고 사진의 구도나 질도 큰 차이가 있겠지만,
꼬마 삼남매의 모습을 담아놓으신 아부지의 사진들에서 나는 꼬마 뱅상의 모습을 찍었던 아버지 윌리 호니스의 흐뭇한 시선을 느꼈고, 그래서 참 행복했다.
이제는 조카들 사진이 아니면 굳이 사진을 공들여 뽑고, 앨범에 넣어 정리하고 그러는 수고를 하지 않게 됐지만, 또 몇십년이 지난 뒤 요즘 남긴 사진을 보며, '아 그래.. 이땐 그래도 제법 창창했구나..'라고 중얼거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싶더라.

암튼...
잠깐이라도 흑백사진 속의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그리고 그 소중학 흑백 추억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몇장 스캔도 해봤는데, 스캐너가 영 시원치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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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력

추억주머니 2007. 2. 1. 23:36
찍어놓은 붕어빵처럼 똑같이 닮은 모녀나 모자, 부녀, 부자를 보면
유전자의 힘은 참 무섭고도 놀라운 것이로구나 느끼게 되는데
단순히 생김새뿐만 아니라 어느 순간 가족간에 하는 행동까지 똑같다는 걸 깨닫게 될 때는,
시대와 삶의 질이 달라진 듯해도 결국 인생은 핏줄을 매개로 돌고 도는 것인가 보다는 생각까지 든다.
다른 집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우리 집은 그렇다는 얘기다.
생김새는 별로 집안 내력 따질 만큼 닮은꼴이 아닌데(내가 키 작은 거랑 눈 나쁜 거 말고 다른 생김새도 아부질 닮았다는 말을 나는 아직도 믿을 수가 없다!) 습관이나 행동은 어느 순간 놀랍도록 세대간의 동일함이 느껴진다.
예를 들어....


사례 1)
우리 친할머니는 나른한 오후쯤 가만히 앉아서 꾸벅꾸벅 조시는 일이 많았는데
베개 꺼내드리고 좀 누워 주무시라고 하면 한사코
"나 안 졸리다"고 손사래를 치셨고, 억지로 이불이라도 덮어드리면 곧장 박차고 일어나 집안일을 하셨다.

나이 드니 정말로 잠이 준다고 투덜대시는 울 아부지,
나른한 오후가 되면 꼭 TV 앞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꾸벅꾸벅 조시는데
요즘처럼 추운 날엔 감기 걸리니 잠깐이라도 방에 들어가서 주무시라고 내가 잔소리를 하면
이상하게도 방에 들어가면 잠이 달아난단다.
꾸벅꾸벅 졸다가 정작 누우면 잠이 달아나는 것이 노인의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여길 수도 없는 것이, 울 엄마는 똑같은 상황에서 방으로 자리를 옮기라고 하면 아예 코까지 드르렁드르렁 골면서 낮잠을 주무시기 때문이다.
할머니와 아버지만의 모전자전이란 말인가?

사례 2)
우리 친할아버지는 그야말로 '한량의 삶'을 사신 분이라 할머니가 고생을 무던히도 하셨고, 장남인 울 아부지는 대단한 효자였음에도 당신 아버지의 삶의 방식은 몹시 못마땅해 하셨다.
할아버지는 '돈벌이'와는 상관없는 재주가 참 많으신 분이어서
서예, 그림, 한시(쓰기 뿐만 아니라 "처엉~~~~~산~~~~~~~~~~~~~~~~~~~이 어쩌고.."하는 한시 읊는 솜씨도 참 구성지셨다), 애완 조류 키우기, 화분 가꾸기 같은 일에 탁월하셨다.
특히 이웃에서 죽어가는 화분을 버리려고 내놓거나 할아버지께 맡기면 기필코 살려내는 '신의 손'에 가까웠다. *.* (그 재능이 나에겐 이어지지 않음이 안타깝다 ㅠ.ㅠ)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작은 화분에 키우는 무화과 나무에서 해마다 토실토실한 무화과를 '수확'해 우리도 맛을 볼 수 있게 하실 정도였으니까..

반면에 우리집은 늘 화분이 죽어나가는 집이었다.
아부지가 직장생활 하시는 동안에 받아온 값비싼 난 화분이나 분재는 몇달을 넘기지 못하고 빈 화분만 남겨지기 일쑤였고, 정년퇴직 직후 선물받은 각종 화분도 다 죽였을 거다.
그래서 역시 울 아부지는 오종종한 생김새부터 할아버지(옛날 분치고는 키도 크고 멋지게 생기셨다!)랑 닮은 부분이 없구나 생각했는데, 그건 나의 착각이었고...
아부지가 본격적으로 화분에 관심을 가지면서 하나 둘 씩 집에 초록 식물을 늘려가더니, 해마다 한식 때 성묘 다녀오는 길에 사온 화분들이 나날이 번창해 우거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간 죽어나간 화분은 전적으로 엄마와 내 "악의 포스" 때문이었음 증명하듯,
아부지는 내 작업실에서 죽어가던 산세베리아도 살려내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고는 거실 한 귀퉁이에 화분들을 "모셔놓고" 손주들이 뛰어다니다 잎이라도 다칠라치면 버럭~ 화를 내셨던 울 할아버지처럼, 아부지도 거실 한 귀퉁이에 줄지어 세워놓고 달력에 날짜 표시해가며 물주고 키우는 화분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조카들이 놀러오면 녀석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혹시 애지중지하던 화분이라도 쓰러뜨릴까봐 전전긍긍하신다. -_-;;
올 한식엔 또 새 화분을 몇개나 사자고 하실까...

사례 3)
홍시 얘기를 할 때도 외할머니와 울 엄마의 유사함을 적은 적이 있는데,
참외도 마찬가지다.
외할머니는 참외를 참으로 좋아하셨고, 외출했다 돌아오셨거나 야외로 소풍 같은 걸 갔을 때 참외를 드시고 싶은데 과도가 빨리 준비되지 않거나 여의치 않을 때는
그냥 손으로 참외를 퍽~ 쳐서 깨뜨려 껍질째 드시기도 했더랬다.
일제 강점기에 쬐끄만 일본 순사들이 '6척 장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는 우리 외할머니가 그렇게 크고 긴 손으로 참외를 쩍 잘라 나에게도 한 쪽 주시면, 난 그게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 *.*

과일을 깎아 대령하는 걸 차마 못 기다릴 만큼 참외에 대한 탐닉이 강한 건 우리 엄마도 마찬가지다. ^^;;
참외는 내가 별로 좋아하는 과일도 아니지만 (먹게 되면 속 다 파내고 먹는데, 울 엄만 그럼 무슨 맛이냐!고 막 퉁박이다), 내가 껍질 벗긴 참외를 작게 자르느라 뜸을 들이면, 대뜸 "난 자르지 말고 통째로 내놓으라"고 하셨더랬다. ㅋㅋ
그나마 당뇨 발병 후엔 하나를 다 통째로 내놓으란 소린 못하고, 절반만 통째로 내놓으라고 하시며 "역시 참외는 손으로 먹어야 제맛"이라고 중얼거린다.

참외 탐닉의 내력은 이상하게도 딸인 나에게 이어진 것이 아니라
큰 동생에게 흘러갔고, 그 녀석도 외할머니, 엄마 닮아서 참외를 몹시 좋아하는데
내가 예쁘게 과일 깍는답시고 참외를 조각조각 반달썰기하면 막 화를 낸다.
먹을 게 없다나 뭐라나... -_-;;
그러면서 자기도 통째로 반쪽 내놓으라고 하는 게 보통이다.
그래서 여름 참외철이 되서 큰동생네가 놀러오면 장유유서고 뭐고 없다.
얼른 참외를 깎아 울 엄마 반쪽, 큰 동생놈 반쪽 먼저 손에 쥐어주고
그 다음에 먹기 좋게 한 접시 잘라 아부지께 드리는 순이다. ㅋㅋ
 
사례 4)
무슨 일이든 코앞에 닥쳐야 하는 버릇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습관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다들 방학숙제는 어떠했는지 모르겠다.
암튼 우리 집 삼남매는 어린 시절 방학숙제마저도 개학이 코앞으로 다가와야만,
그것도 급기야 부모님께 손바닥이나 종아리를 맞고 혼이 난 다음에야 전전긍긍 밤샘작업으로 개학 전날까지 가까스로 마치는 부류였다. ㅜ.ㅡ;;
그런데 문제는 방학 내내 배짱좋게 놀다가 해가는 숙제이니 '대충대충' 시늉만 하면 좋으련만 빌어먹을 소심함과 완벽주의 탓인지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거다.
한달이나 두달치 일기를 한꺼번에 쓰는 주제에, 날씨 좀 틀리면 어떻다고 지난 신문을 죄다 뒤져 일일이 확인하는 식이니 시간이 오죽 더 많이 걸릴까.
내 경우는 그림이나 글짓기, 만들기 숙제도 심혈을 기울여야 직성이 풀렸고, 뒤늦은 후회를 하며 홀로 눈물을 흘리면서도 악착같이 숙제를 다 해갔던 것 같다. ㅎㅎㅎ

2월 1일 개학을 하루 앞둔 어젯밤, 조카 정민공주네가 집으로 쳐들어(!) 왔다는 전화가 왔다.
ㅋㅋㅋ 역시나 방학숙제 때문이었다.
방패연과 꼬리연을 만들어 가야하는데 할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했고,
동시를 지어 꾸미는 숙제엔 컬러 프린터가 필요하다는 것이 그들의 이유였다.
일기는 그나마 미리미리 다 써두었으니, 어쩌면 제 아빠나 삼촌, 고모보다 훨씬 훌륭한 조카였지만, 동시 꾸미기 숙제를 하면서 드러난 성격은 놀랍게도 판에 박은듯이 고모와 똑같았다.
이미 다 지어온 동시를 세 편이나 한글 프로그램에 앉히고
각종 그림으로 시화를 꾸미는 것이 숙제인 모양인데, 정민공주는 한글97 그리기 마당에 마음에 드는 그림이 없으면 절대로 대충 아무거나 선택하지 않았고....
인터넷 이미지를 다 뒤져서라도 결국 마음에 드는 그림을 찾아냈다.
울 올케의 짐작으론 '타이핑만 하면' 되니 금세 끝날 숙제였지만, 실제론 동시 한 편에 시간이 30분도 더 걸렸고, 결국 조카는 시간도 없는데 꾸물거린다는 제 엄마의 꾸지람과 호통에 결국 눈물을 보였으며, 공주의 방학숙제는 밤 11시가 다 되어 끝이 났다. *.*

오밤중에 숙제를 끝내놓고도 고모랑 더 놀다 가지 못해 안달하는 조카들을 내쫓다시피
집으로 보낸 뒤, 엄마가 한 말씀 하셨다.
"쯧쯧쯧.. 어떻게 방학숙제를 개학 전날까지 밤새다시피 해가는 것까지 집안 내력이라니..."

내가 <내력>이란 제목으로 포스팅을 하게 된 이유였다. ㅎㅎ
(사례 하나 추가했다. 이것들 말고도 더 많지만.. 너무 길어지면 지루할 테니까..^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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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 생각

식탐보고서 2007. 1. 22. 20:16
도시락 반찬으로 멸치를 싸와서 먹고 보니
피식 웃음이 난다.

사람마다 집집마다 기피하는 음식, 먹지 않는 반찬이 있기 마련인데
이제는 거의 몬도가네 수준으로 못 먹는 것이 없는 내가 그닥 즐기지 않는 몇 안되는 반찬엔 원래 '멸치'가 속했다.
그건 워낙 '편식대마왕'이란 별명에 걸맞게 가리는 것도 많고 비린것을 몹시도 싫어하시는 울 아부지의 영향이었다.
온갖 날것은 물론이고, 익힌 등푸른 생선마저도 못 먹는 것이야 그러려니 하지만, 이북에서 피난 내려와 바닷가인 부산에서 고등학교때까지 다니셨다는 분이 쬐끄만 멸치까지 못 먹는 것은 좀 이상하다 싶지 않은가?
하지만, 멸치배가 들어와 덕장에 삶은 멸치를 마구 널어 말리고 있는 동네 입구를 지나다 보면, 마음 좋은 아줌마 아저씨들이 집에 가서 반찬 해먹으라고 어린 우리 아버지한테 멸치를 한 보따리씩 싸주셨다는데, 8남매 장남 답게 살림살이를 염려한 아버지는 동생들이라도 먹이려고 그 멸치를 집까지 가져가며 비린내 때문에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고 했다.

암튼 멸치와 등푸른 생선의 비린내를 못견뎌하시는 아부지 때문에
우리 엄마는 젊은 시절 아부지가 안 계실 때만 그런 '비린' 반찬을 해먹었는데,
지금이야 아부지의 인내심과 비례하여 엄마와 내 목소리가 무진장 커졌으므로 당당히 등푸른 생선을 굽거나 조려먹기도 하고, 멸치볶음을 상 위에 올려놓지만,
예전엔 아예 울 엄마가 그런 반찬거리를 사들일 엄두도 내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고 했다.
해먹고 난 뒤의 비린내마저도 못 견뎌, 아버지가 추운 겨울에도 냄새 다 빠질 때까지 온통 방문과 창문을 열어놓고 시위를 벌이는 통에 '차라리 안먹고 만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나.

게다가 YS가 집권한 뒤였던가?
YS 아버지가 거제도에서 멸치 사업을 한다나 어쨌다나 해서 멸치값이 엄청나게 올랐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 멸치 한 상자에 십만원도 넘는 가격표가 붙어 백화점에 진열되어 있는 걸 보며, 우리집은 멸치를 안먹으니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암튼 그렇게 특별한 사정상 자주 안 먹다 보니 멸치는 우리 삼남매 모두 별로 좋아하지 않는 반찬으로 전락하고 말았다가, 갱년기 이후 여성의 골다공증 문제를 예방하려면 칼슘을 꾸준히 먹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자주 방송을 타면서 슬그머니 우리집에도 멸치 반찬이 재등장한 것 같다.

물론 그런 뒤에도 나는 멸치 반찬에 그리 손이 가지 않았다.
어린 시절 엄마를 도와  중간 크기 정도의 멸치 내장을 따내면서 꼭 '멸치 똥을 딴다'고 표현했는데, 아버지의 편견을 그대로 답습하여 무조건 손에 배는 그 비린내가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덩달아 멸치를 싫어했던 남동생들이 자식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는 아버지가 되고,
나도 덩달아 훌륭한 역할 모델 노릇을 하고 싶은 고모가 되면서
'고모는 아무거나 잘 먹는 어린이가 제일 이뻐!'라고 조카들에게 언제나 큰소리를 치려면
싫어하는 익힌(!) 당근도, 멸치 볶음도 퍽퍽 집어먹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물론 요즘도 다른 반찬과 달리 멸치 볶음은 '절대로' 내가 손수 만들 수 없는 음식이라고 우기고는 있으며, 조리법을 아무리 똑같이 해도 본질적인 질이 떨어지기 때문인지, 보관이 잘못된 때문인지 비린내가 심히 나는 멸치 볶음은 여전히 씩씩하게 먹어줄 수가 없지만 ^^;;
적당한 크기의 잔멸치를 바삭하고 달달하게 볶은 멸치 반찬은 이제 나도 맛을 알고 즐기게 된 것 같다.

돌이켜보면 예전엔 죽어도 못 먹겠다 생각했다가 이제는 탐닉하게 된 음식이 한둘이 아니다.

- 무지막지 뼈다귀가 무서워 보였던 감자탕: 20살 때까지만 해도 이런 음식이 있다는 것도 몰랐고, 선배들이 감자탕집 끌고가면 이맛살 찌푸리며 '무식한' 음식도 다 있다 여겼는데 ^^;;
이제는 사먹는 것은 물론이고 가끔 정육점에서 돼지 등뼈 사다가 내 손으로 집에서도 끓여먹는다! ㅋㅋ

- 는질는질 씹히는 느낌이 소름끼쳐서 못 먹던 생선회: 맨날 회사 회식으로 횟집만 가는데 혼자 곁다리 반찬과 값싼 오징어회만 먹는 게 억울해 조금씩 시도하다  이제는 없어서 못 먹지 아마.

- 꿈툴꿈틀 애벌레처럼 보였던 산낙지: 잔인하게 느껴지지만 어쩔 수 없다. ㅜ.ㅜ;; 참기름속에서 허우적대며 놈들의 힘이 살짝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초고추장에 찍어먹는 그 맛이란.. 흑..

- 코가 핑 뚫리는 암모니아 냄새의 삭힌 홍어: 사실 지금도 무진장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삭힌 홍어 파는 식당에 오래 앉아 있지도 못했던 예전에 비하면 ^^ 지금은 그 오묘한 맛을 좀 알 것 같다.

- 특유의 냄새를 좀체 참을 수 없던 양고기: 양고기 역시 나의 기호식품엔 들지 못하지만, 양고기 굽는 옆에서 애써 욕지기를 참느라 눈물을 흘리던 때도 있었는데;;; ㅋㅋ 지금은 그럭저럭 잘 먹는 편이다.

특별한 이유 없이 파피는 콩국수를 못 먹겠다고 하고 ^^;;
지다님과 벨로는 미더덕을 먹어본 적도 없으며
키드님은 미더덕을 싫어한다는 걸 보면

이상한 혐오식품을 제외하곤 못 먹는 음식이 이제 달랑 셋--보신탕, 추어탕, 곱창(보신탕은 그냥 싫고, 추어탕과 곱창은 수차례 노력했음에도 극복할 수 없는 맛이 느껴진다)--밖에 남지 않은 나는 그야말로 엄청난 탐식가인듯.
어른이 된 뒤로 주욱 변화 및 발전(?)해온 나의 식생활을 따져볼 때
결국 식성과 식탐은 개인의 사회화 과정과도 유사하지 않나 싶다.
사회적 관습이나 전통의 옳고 그름을 떠나, 개개인이 그걸 얼마나 받아들이고 심취하느냐의 정도 차이랄까.

죽도록 싫어하다가 없어서 못먹게 된 음식도 있듯
앞으론 몹시 좋아했는데 죽도록 싫어하게 될 음식도 생기겠지.
내 식탐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새삼 궁금하다. ^^;;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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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피루스의 글엔가.. 해리님이 덧붙인 댓글에서 본 신데렐라 귀가시간 얘기에
문득 자극 받아 하소연이나 해볼까..

나이 40에 아직도 부모님이 정한 통근시간에 구애를 받는다고 하면
다들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면서 "부모는 말이야, 길들이기 나름이야. 니가 길을 잘못 들인 거지!"라고 나무라기 일쑤다.

하지만 비딱투덜이의 삶을 추구하는 내가 그런 길들이기 과정의 몸부림을 시도해보지 않았을 리가 없지 않은가.
시국이 하수상하여 걸핏하면 시위물결과 최루탄이 온 캠퍼스를 뒤덮던 시절에 들어간 대학 신입생 초창기 땐 심지어 '해지는 시간'이 통금이었다. ㅜ.ㅜ
여름엔 얼추 8시까지도 해가 길어지지만
겨울엔 5시반만 돼도 어둑어둑해지는데 그 시간 전에 집에 오라니!

엄마 몰래 나랑 단둘이 영화도 보고 데이트도 하고 (그럴 땐 당연히 통금 시간 해제!), 다 큰 딸이 다리 아프다 그러면 다리도 선뜻 주물러주시고, 집안 청소는 걸레질까지 온통 도맡아 하시는 등, 겉으로는 제법 자유진보주의자의 탈(!)을 쓰신 우리 아버지는 정치를 포함한 일부 분야에선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는 보수주의 가부장으로 돌변하시는데...

그게 가장 표면적으로 두드러진 것이 큰딸의 통금시간이었다.
물론 외박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 (대신 남의 집 딸들은 우리 집에 와서 외박을 해도 무방했다.)
통금시간을 어긴다고 해서 내가 물리적인 체벌을 받는다거나 감금을 당한다거나 하는 건 물론 아니었지만, 우리집안 사람들 특유의 '화나면 말 안하기'의 효과는 물리적인 체벌보다 그 파장이 훨씬 컸고, 당장 주급으로 받던 용돈을 달라는 말도 걸 수가 없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하지만 나는 야금야금 반항을 시작함과 동시에
일단 대학 친구들을 아부지한테 데려가 얼굴을 익혀드림으로써
(당시 내가 다니던 대학의 교직원이셨던 아부지는 학교에 시위라도 벌어지면, 혹시 당신 딸도 그 '뻘건' 물결에 휩쓸리지 않았는지 일부러 순시에 나섰으므로, 그걸 잘 알고 있는 나는 우연을 가장하여 수시로 친구들과 나의 '안전함'을 아부지한테 보여준 뒤, 뒤늦게 물결에 동참했다. 물론 뭐 주로 수업거부, 시험거부 뭐 이딴 이슈에 더 팔려서 ㅡ.ㅡ;;)  
하 수상한 바깥 세상에도 금지옥엽 고명딸을 믿고 맡겨도 좋을 이들이 있다는 걸 강조했다.
(다행히 우리 과엔 남들보다 늦게 입학해 나보다 6살이나 많은 언니가 동급생이었는데, 그 언니에 대한 울 아부지의 신뢰가 대단하여, 1학년 2학기 때는 단식투쟁 따위의 극단적인 반발 없이 엠티도 갈 수 있었다!)

해가 거듭될수록 통금시간은 점점 연장되어 나도 남들처럼 음주가무를 즐길 수도 있게 됐고
4학년 후반부터 이미 사회인이 된 뒤로는 까짓거 용돈 때문에 반항의 수위를 조절해야 하는 필요도 없어졌지만, 아무리 반항을 해도 자정으로 확정된 통금시간 자체를 없앨 순 없었다.

직장생활을 하게 된 뒤로는 '회식'이라는 아주 훌륭한 빌미가 있어 거나하게 술에 취해서도 당당하게 집에 들어갈 수 있었고, 화목한 조직생활을 그 무엇보다 중시하시는 아부지도 '회식'이라는 핑계 앞에선 딱히 트집을 잡아 금주를 명하거나 회사를 관두라거나 하진 않으셨다.
속으로 쾌재를 부른 나는 남들이 얘기하는 "부모님 길들이기 체제"에 돌입해
어울리지도 않는 신데렐라 딱지를 떼어보겠다고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직장에서 굳이 강요하지도 않는 회식자리의 2차, 3차 자리까지 죄다 쫓아다녔고
너무 늦어지겠다 싶으면 슬쩍 집에 전화를 넣어 도무지 자리를 빠져나갈 수가 없으니 먼저 주무시라고 부탁을 했다.
물론 아부지는 마구 역정을 내시며 그냥 도망쳐오라고, 택시비 없으면 큰길에 나가 기다릴 터이니 당장 오라고 난리를 치셨지만,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새벽까지 버텼다.
(어린 사람들은 모르겠으나 당시엔 휴대폰 따위 없었다! ㅋㅋ 삐삐도 상당히 나중에야 생겼던 것으로 생각됨.. 헐... 이래서 측근들과 마구 세대차이 나주시고;;; )

그.러.나...
얼큰하게 취해 열쇠를 쩔그럭거리고 현관문을 들어선 순간 나는 자지러지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거실 입구에 떡 하니 서 있는 검은 그림자.
별로 크지도 않은 우리 아버지의 키가 그땐 장승만큼이나 커보였고, 얼핏 보면 저승사자 같기도 했다. ㅠ.ㅠ 물론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싸늘하게 나를 노려보며, 현관에서 미처 신발도 벗지 못하고 망연자실 서 있는 나를 얼어붙게 만드는 울 아부지의 기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몇분간 그런 대치상황을 벌이고 있거나, 약간 혀 꼬인 소리로 내가 말이라도 붙일라 치면 아부지는 차갑게 "실망이다" 따위의 촌철살인으로  나를 넉다운 시켰다. ㅠ.ㅠ

새벽 3시건, 4시건 시간을 불문하고 자식이 귀가할 때까지는 절대로 잠을 자지 않고 기다리는 우리 아부지의 무서운 집념은 때론 큰길까지 뻗치기도 했고
살짝 취해 공연히 기분 좋아 흥얼거리며 생새벽에 택시에서 내린 내 앞에 문득 나타나는 우리 아버지의 모습은 취기를 순식간에 날려버리기에 충분했다.

왜 그렇게 딸을 못 믿느냐고 항변하면 (여러가지 면에서 나는 그간 믿음직한 큰딸이었고 그건 부모님 포함 친척들까지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울 아부진 '너를 못 믿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을 못 믿는 거'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말을 반증하듯, 주기적으로 아녀자 피습사건이나 납치, 강간 따위의 사건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젠장!

그렇게 통금시간을 둘러싼 부녀간의 줄다리기가 이어지던 와중에 결정적으로 나의 패배를 선언하게 된 계기는, 그간 심정적으로 무던히 딸을 지원해주던 우리 엄마의 와병이었다.
몇년에 한번씩 아주 잠깐씩만 찾아오던 엄마의 우울증은 언제부턴가
거의 해를 거르지 않았고, 우울증의 첫 증세는 무엇보다 불면이었는데
내 귀가시간이 좀 늦어질라치면, 예전엔 아부지가 제 아무리 안달을 하셔도 염려없이 먼저 주무시던 엄마까지 동참해 나란히 어두운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부모님을 못본 체 하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렇게...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는 우리 엄마의 불면과 우울증이라는 효과적인, 참으로 서글픈 족쇄 때문에 나의 신데렐라 생활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고,
가끔 반항기가 동하면 지금도 통금시간 12시를 살짝 넘기는 일탈을 벌이기도 하지만, 그러면서도 늘 엄마 걱정에 내 마음 역시 조마조마하기 때문에 어렸을 때처럼 금기를 저지른다는 짜릿함이나 별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ㅡ.ㅡ;;

그리고 늙어가는 딸에 대한 귀가시간 제한을 여전히 고수하시는 이유가
정말로 딸에 대한 불신보다는 무서운 이 세상에 대한 불신이라는 걸 나도 잘 알고 있다.
가끔 음주 모임 때문에 귀가가 늦어지는 아부지를 기다리며, 시간이 많이 늦어지면
이제 할아버지가 되어버린 울 아부지가 술김에 잠들었다가 혹시 아리랑치기 따위를 당하시는 건 아닌지 별별 망측한 상상을 다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하니 말이다.

늘 투덜거리면서도 사실 부모님 품안에서 캥거루족으로 살아가며 온간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게 사실인데, 혹시라도 능력을 키워 독립하는 그날이 오면 드디어 통금시간 따위 없어졌다고 통쾌해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치만 그땐 또 딱히 통금시간을 넘겨 곤드레만드레 음주를 즐기거나
시간 가는줄 모르고 밤새 정담을 이어갈 지인들이 곁에 없어서 일찍일찍 집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건 아닐지...

생각해보면 요즘엔 정말 술친구 청하는 이들이 줄었다.
술 안마시는 문화가 자리잡아 가고 있다는 얘긴데...
쓸데없이 감정이 넘쳐나고 마음의 빗장이 스스르 풀리긴 하지만, 나는 알콜의 힘을 빌어서라도 가끔 관대해지고 온 세상이 잠깐이나마 근사해보이고 술자리 건너편에 앉은 이가 몹시 예뻐 보이는 순간을 참 좋아하는 인간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마치 대단한 술꾼 같군.. 예전엔 정말로 제법 대단한 술꾼이었는데.. 이젠 맥주 한두 병에 알딸딸해지고 만다. 늙기도 설워라커든... ㅜ.ㅡ;;

하여간 이젠 나도 익숙해져버린 신데렐라 귀가시간...
굳은살처럼 내 몸의 일부가 되어버려서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판단도 잘 안선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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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루시드 폴의 '오 사랑' 앨범을 사서 들은지 좀 됐는데
두번째 수록곡인 "할머니의 마음은 바다처럼 넓어라"를 들을 때마다
10년 전에 돌아가신 우리 친할머니 생각이 많이 나서 이런저런 상념에 젖곤 한다.
정말로 할머니들의 마음은 어쩜 그리도 넓으신지...

영화 <집으로...>를 보면서 허리가 반으로 접힌 깡마른 그 할머니의 체구가 화면에 등장하는 순간부터 통곡하듯 눈물을 흘렸던 이유도 신파스러운 영화에 대한 절절한 감동보다는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의 모습이 이야기 속에 이리저리 겹쳐졌던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루시드 폴이 그리워하는 할머니한테서도 나는 우리 할머니의 체취가 느껴지는 것 같다.


초겨울 추위도 무시 못할 만큼 매섭던
나의 어린 바닷가.
여름엔 바지락 겨울엔 굴을 따다 채운
가난한 호주머니,

시골의 장터,
오늘은 일요일,
해뜨기 한참도 전 대야를 이고 향하는
할머니의 꿈, 우리 건강한 꿈,
빌고 또 비는 할머니의 꿈.

채 익지도 않은 삼백원짜리 수박에도
우린 기뻐했었지.
몹시 아프던 날, 나를 들쳐 업고 달리던
땀에 젖은 등자락.

이제 난 알지. 돌아가셨어도
나에게, 누나에게 살아 있음을.
어머니, 아버지에게서 숨쉬는
할머니의 마음은 바다처럼 넓어라.

마음은 바다처럼 넓어라.

(파피루스 덕분에 익히 루시드 폴이 부른 노랫말의 아름다움을 알고는 있었지만
어쩜 이렇게도 간결하고 절절하게 느낌을 담아냈는지!)

이 노래를 들으면 또 조건반사처럼 덩달아 떠오르는 기형도의 시가 있다.
바로 '엄마 걱정'


시에선 할머니가 아니라 엄마지만,
열무 삼십단 대신 생선 광주리를 이고 행상을 나간 우리 할머니가 해저물고도 돌아오지 않으시면, 열두어 살이었던 우리 아버지가 어두운 골목을 지나 장터로 이어지는 길로 마중을 나갔다는 이야기를 어려서 듣고 마음에 새겨둔 때문인지
기형도의 시를 처음 읽은 순간에도 나는 작은 체구에 커다란 생선 광주리를 이고 다니셨을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라 눈물이 핑 돌았었다.

몸종을 데리고 시집올 만큼 한동안은 어려움 모르고 사셨다는 우리 할머니.
평안북도 정주에서 남편따라 만주로 피난 올라갔다가 다시 부산으로 내려와,
한 몫 단단히 챙겨 온 재산은 대가족이 1년 가까이 여관에서 생활하느라 다 날리고
평생 시나 읊고 기생놀음만 하는 한량이셨던 할아버지 대신 생계를  할머니가 책임지셔야 했던 이야기를 두고두고 손녀딸에게 가만가만 들려주시며,
'내 허리가 이렇게 형편없이 반으로 굽은 건 전부 다 니 할아버지가 고생시킨 탓'이라고...
돌아앉아 담배 피우시던 할아버지를 곱게 흘겨보셨더랬다.

생일이 늦어 취학통지서도 나오지 않은 첫손녀를 굳이 동네 통장에게 막걸리 한 되 뇌물까지 써가며 한 해 일찍 국민학교에 들여보내 놓고선 못내 마음이 안 놓여 한 학기 내내 등하교 때마다 나를 업어 나른 우리 할머니의 정성을 익히 잘 알고 있는 나는
겉으론 흥흥흥 같이 웃어드리면서도
할머니의 굽은 허리에 나도 한 몫 단단히 한 것 같아 늘 마음이 짠 했다.

우리 할머니도 이제는 돌아가셨지만
부산 피난 시절 할머니의 꿈과 한과 희망이 담겼을 생선 광주리의 추억도 나는 알 것 같고
우리 아버지를 거쳐 나와 내 동생들에게까지 이어진
드넓은 할머니의 마음을 지금도 분명 느낄 수가 있다.

루시드 폴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래서 참 고맙고 또 슬프다.
우리 할머니가 많이 보고 싶어서.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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