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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3.09.04 환절기 11
  3. 2013.08.21 에어컨 4
  4. 2013.08.15 어떤 고모 8
  5. 2013.08.12 말문 글문? 5
  6. 2013.07.20 허허허허 ㅠㅠ 10
  7. 2013.07.17 교무실 4
  8. 2013.07.11 공항 10
  9. 2013.06.25 다시마의 용도, 정말일까? 9
  10. 2013.06.10 손수건 12

포쇄

투덜일기 2013. 9. 12. 16:55

포쇄 (曝曬): 젖거나 축축한 것을 바람에 쐬고 볕에 바램.   [출처: 국립국어원]

 

아열대성 기후로 바뀐 한반도에서 이제 제습기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 생활가전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난 외면했다. 좁아터진 집에 무슨 제습기까지! 가끔 트는 에어컨 제습기능과 물먹는 하마 몇통이면 잘 넘어갈 수 있을 것을 웬 호들갑. 재작년과 작년 옷장에 보관한 옷들에 죄다 허연 곰팡이가 피어 세탁비를 수십만원도 더 날렸다며 냉큼 제습기를 장만한 지인들은 옷장문 활짝 열어놓고 제습기를 가동시킨 뒤 외출했다 들어오면 온통 보송보송한 집안 느낌을(그러나 그 후끈한 온도는 어쩌고!) 모를 거라며 제습기 예찬론을 펼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태 난 옷장에 곰팡이 핀 적 없거든!

 

그 장담이 무색하게도 조금 전 옷장에서 오래된 가죽옷을 꺼내본 나는 질겁을 했다. 진짜 곰팡이가 피었잖아! 작년보다 올해가 더 습했다는 증거다. 물먹는 하마는 똑같이 물높이 봐가며 제때 갈아주었는데... ㅠ.ㅠ 다행히도 본격적으로 곰팡이가 핀 건 십수년된 그 가죽재킷뿐이고 그 앞뒤에 있던 옷 두개만 덩달아 곰팡이의 피해를 보았다. 하나는 오리털 파카, 하나는 가을 재킷. 오리털 파카는 원래도 물세탁 가능이니 물걸레로 대충 닦아 세탁기로 직행. 재킷은 세탁소로 보내야하나 좀 고민하다 귀찮아서 울샴푸에 주물러 빨았다. 옷에 배 오는 드라이클리닝 기름냄새를 싫어하기도 하고, 그거 하나 들고 세탁소 가긴 더 싫고, 보나마나 곰팡이 잘 안지워진다고 먼저 연막부터 칠 게 뻔한 말많은 세탁소 아저씨를 상대하기도 싫었다. (옷장에서 곰팡이 피어 세탁비는 세탁비대로 날리고 결국 옷 여러벌 버려야 했다는 얘기도 익히 들은 바 있음) 재킷 차려입을 일도 별로 없으니 아마 올 가을에도 안입고 넘어갈 확률이 높은 옷이므로 망가져도 그만이다 싶다.

 

뜻밖의 푸닥거리를 한판 해치우고나서 문득 떠오른 것이 저 '포쇄'라는 낱말. 주로 팔만대장경이나 조선왕조실록 같은 거창한 서적 유물에만 쓰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려운 한자라서 그렇지 용례를 보니 곡식도 포쇄를 하고 의복도 포쇄를 한단다. 그러니까 내가 소홀했던 건 바로 옷가지의 포쇄. 옛날엔 요즘처럼 볕좋은 가을에 집집마다 빨랫줄을 매고는 옷이며 이불 호청을 빨아 널고 두툼한 솜이불도 햇볕에 소독했는데 요샌 그런 모습을 좀체 볼 수가 없다. 그냥 대충 덮고 깔고 살다 껍데기만 벗겨 빨거나 통째로 세탁소에 맡겨 드라이클리닝를 하기 때문일까? 아파트 베란다에 가끔 이불 널어놓은 집을 본 것 같기도 하고...

 

옛말 틀린 게 하나도 없다고, 장마철에도 한여름에도 가끔은 군불을 때 구들장의 습기를 말려줘야 한다고 들었지만 진짜로 올해는 여름 내 단 한번도 난방을 하지 않았다. 차가운 방바닥이 뜨거운 체온에 더워지면 얼른 시원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며 버텨야했거늘 어떻게 보일러를 돌릴 생각을 했겠나. 그러다 어젯밤에 처음으로 발 시려움을 느끼고 난방으로 스위치를 돌리고보니 따뜻하고 보송보송해지는 방바닥 느낌이 놀랍도록 상쾌했다. 진짜 가을이구나 싶었달까. 안타깝게도 어제 내린 비와 오늘밤에 예고된 비 때문에 날씨가 눅눅하고 습기도 많아 제대로 포쇄하긴 글른 날이지만, 오늘밤엔 옷장까지 다 열어놓고 보일러를 좀 돌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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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절기

투덜일기 2013. 9. 4. 00:36

아침저녁으론 확실히 가을이 왔구나 싶다가 낮엔 다시 잠깐 여름으로 돌아가는 환절기. 아직 한폭짜리 얇은 여름이불로 버티고는 있는데 짧은 내 한 몸이 간신히 가려지는 크기라 새벽엔 어디 한 군데 밖으로 나올세라 꽁꽁 조심스레 감싸야 할 정도로  밤기운이 서늘하다. 인견으로 된 좀 더 큰 여름이불로 갈아타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중.

 

환절기보다는, 수많은 인터넷 쇼핑몰에서 흔히 눈에 띄는 '간절기 최적 핫아이템'처럼 '간절기'라고 해야 여름과 가을 사이의 요즘 같은 때를 콕 찝어 가리키는 것 같지만, '간절기'는 당연히 표준어도 아니고 더욱이 일본어에서 들어온 말이라는 듯하니 이왕이면 쓰지 말아야지.  

 

선풍기도 플러그를 아예 뽑아놓은지 며칠 되었다. 햇빛에 뜨거워진 차안은 아직 더워서 에어컨을 틀어야할 때도 있지만, 싸늘한 에어컨 바람이 돌면 금방 목이 싸아 해지면서 목감기에 걸릴 것만 같은 조바심이 든다. 겨울이 찾아와 또 영하 십몇도의 강추위가 기승을 부려도 올 여름의 습하고 뜨거운 날씨는 절대로 그립지 않을 거라 지금부터 장담하고 있지만... 활짝 열어두고 살았던 베란다와 방 창문을 슬며시 닫으며 아, 계절은 왜 이렇게 무정한가 참담한 기분마저 든다. 가을 싫은데!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환절기는 또 나에겐 털갈이의 계절인지 탈모의 계절인지... 아님 여름내 꽁꽁 잡아당겨 묶고 살았던 머리칼의 급격한 피로 때문인지(이런 걸 견인성 탈모라고 할 수도 있다는 걸 오늘에서야 알았다) 머리칼은 또 왜 이리 숭숭숭 빠지나말이다. 머리를 감을 때마다 양손에 뒤덮인 머리칼이 너무 많아서 조금 무서울 지경이다. 분명 작년 이맘때도 그랬다고 위로하며 어쩐지 더욱 휑해진 정수리를 이리저리 쓸어넘겨 가려본다.

 

그러고는 또 다시 옷타령. 요샌 뭘 입고 나가도 마뜩찮다. 아직 긴팔 셔츠로 종일 버티는 건 덥고 반팔로 버티자니 썰렁하고 그간 입었던 카디건은 왜 너무 길거나 너무 짧은지? ㅋ 많은 식구들의 와글와글거리는 체온으로 분명 에어컨 바람이 필요할 듯한 이른 명절엔 또 추석빔으로 뭘 입고 손님맞이를 해야하나 벌써부터 머리를 굴리고 앉았다. 

 

 

어쩔라고 쓰기 시작했는지 마무리가 안돼서 얼렁뚱땅 노래 링크. ㅋ

 

거짓말 같이 맑은 하늘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나면

무더운 날이 없던 것처럼 그렇게 새로운 계절은 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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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

투덜일기 2013. 8. 21. 18:12

해마다 겨울엔 겨울대로 사상 최악의 한파라고 떠들어대고, 여름엔 여름대로 사상 최악의 폭염이라고 떠들어대는지 몇년 된 것 같다. 다 지구온난화 탓일 게다. 괜히 언론에서 더 떠들어대는 바람에 덩달아 휘둘리는 기분이 아니라, 올 여름은 정말 더웠다. 작년까지만 해도 잘 때 선풍기 타이머를 두어시간 쯤 해놓고 잤던 것 같은데, 올해는 타이머가 아예 필요없었다. 계속 틀어놓아야 겨우 잠을 잘 수 있었고, 그러고도 더워서 곧잘 깨어나 잠을 설쳤다. 자는 내내 에어컨을 돌릴 수야 없는 노릇 아닌가. 깨어있는 동안은 말할 것도 없었다. 선풍기를 너무 오래 틀어놓아 모터에서 불이나는 건 아닐까 종종 걱정이 들어 선풍기 뒤통수를 만져보곤 했다.

 

게다가 뉴스에선 하루가 멀다하고 발전소가 고장이 났네, 전력수급량에 비상이 생겼네, 블랙아웃이 예상되네 어쩌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니 온 국민이 절전하라고. 하지만 이제 한국의 여름날씨는 에어컨 없이 견디기 정말로 어려운 지경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착한 국민이신 왕비마마는 언론의 절전 권유에 적극 동참하여 최대 전력량 소모가 예상되는 오후 다섯시까지는 온몸이 땀에 절어도 끙끙 참았다가 5시 이후에 에어컨을 틀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일단 전기요금은 둘째 문제였다. 하루에 옷을 두번이나 갈아입을 정도로 땀을 흘려대니 노친네 기력이 어지간히 허해지는 것 같아서 나는 한낮에도 그냥 막 에어컨을 틀어댔다. 사람이 살고 봐야지 말이야.

 

왕비마마가 전력관련 국가정책에 적극 동참하고 따르는 건 아마 한전 자회사에 다니는 막내아들 때문일 것이다. 한전과 자회사들은 여름 내 에어컨을 안튼지 오래 됐대고, 조금이나마 전력 균형을 맞춘다며 점심시간도 아예 11시부터로 바꿨다고 한다. 특히나 천박한 취향 때문에 죄다 유리로 뻔드르르하게 지어 더욱 뜨거운 관공서도 에어컨 설정기온이 28도라지 아마. 하지만 대형 건물에서 에어컨을 28도에 맞춰놓으면 실내온도는 기껏해야 30도밖에 안 내려간다규! 옛날엔 한여름엔 은행이나 백화점으로 피서를 갔지만, 거기도 요즘엔 별로 갈 데가 못된다. 가뜩이나 자동화기기 사용을 유도하는 추세라 은행엔 가서 앉아있을 일도 없고 읽어볼 잡지책도 거의 없는 형편 아닌가. 가서 괜히 앉아있으면 직원이 다가와서 무슨 볼일로 왔느냐고 물어 내쫓기(민망해서 자진 퇴각하는 수밖에;;) 일쑤고 말이지. 백화점엔 가뜩이나 현란한 조명때문에 머리 위가 뜨끈뜨끈한데 냉방온도가 시원찮으니 오후가 되면 사우나가 따로 없다.

 

집집마다 에어컨을 잘 안트는 이유는 아마도 전기요금 폭탄 때문이겠지만, 전기요금을 감수하고라도 일단은 쾌적하게 사는 게 우선이라고 하더라도 나 역시 혼자 있을 땐 에어컨을 켤 엄두를 내지 못한다. 에어컨 한대 전력소비가 선풍기 22대와 맞먹는다나 뭐라나 하는 이야기도 들었고, 일단은 실외기에서 뿜어대는 열기를 생각하면 새삼 지구에 미안한 생각이... 환경파괴의 악순환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삶과 욕망이란 참...

 

하지만 그건 인간의 선택 문제라고 치고, 국가적인 전력난 사태의 책임을 늘 국민한테 떠넘기고 같이 고통을 분담하라는 식의 논리는 마음에 안든다. 발전소가 걸핏하면 고장나고 멈추고 했던 건 제대로 관리도 안하고 뇌물 받아처먹은 뒤 불량부품을 쓴 한수원 직원들 잘못 아니냐고! 게다가 해마다 전력소비량이 비상이라고 하는데(이건 난방기 많이 쓰는 한겨울에도 마찬가지다), 한 나라의 살림살이를 기획하고 예상하려면 최소한 점점 늘어나는 전력소비량도 미리미리 대비했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정말로 전력난이 가정집과 상업시설에서 펑펑 써대는 전기 때문이냐고! 새 원전건설이 계속 주민반대에 부딪쳐 수급량에 차질이 생겼다는 변명은 듣고싶지 않다. 대안없이 원전 건설만을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정했다면 그 또한 정책기획자들의 잘못이니까. 후쿠시마 사태를 보고서도 그런 말이 나오나? 

 

민자고속도로나 삐까번쩍한 다리를 건설할 때도 국가에선 항상 타산성과 교통량을 예측해 사업을 진행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대부분 엄청난 적자를 양산할 뿐 영낙없는 돈지랄만 한 경우가 많다. 도대체 어떤 근거로 예측 계산을 하길래?? (관계자들끼리 다 미리 짜고치는 고스톱이었겠지! 흥!)  쌩돈 들이고 쓸데없이 애먼 돈지랄만 한 국책사업의 단적인 예가 바로 아라뱃길이라고 생각하는데, 경인고속도로가 둘이나 뻥뻥 뚫려 있는데 서해에서 물길로 실어나를 물동량이 얼마나 된다고 한강 뱃길에 돈을 처들인단 말인가. 전문가가 아니라도 너무 빤한 일을 무작정 고집스레 시도하는 공공사업을 보면 정말 기가 막힌다. 국민 세금을 그토록 허망하게 허투로 다 써놓고는 또 만만한 서민들한테 세금이나 올려받으려고 하고! 

 

암튼 서서히 더위가 물러가려고 하고 있는 이때, 어딘가 발전소가 또 섰든 말든, 뉴스에서 뭐라고 떠들어대든 나는 공연히 더 화가 나고 열이받아서 오늘도(사실은 무던히 오래 참다가 못견디고 4시쯤) 에어컨을 켰다. 지들이 나랏일 잘못해놓고 노상 국민들한테 이래라 저래라 공동책임 지우려는 짓 좀 그만 보고싶다. 나라에 돈 없다고 하면 거국적으로 금모으기 하는 순진한 국민들 좀 그만 이용하란 말이닷! 블랙아웃, 전기요금 무서운 것보다 울집 노친네 병나는 게 더 무섭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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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고모

투덜일기 2013. 8. 15. 18:22

'기집애', '가시나' 소리만 들어도 엄청나게 모욕적인 욕이라고 생각해 눈물을 쑥 빼던 어린 시절. 내가 유독 싫어하는 친척 할머니가 있었다. 말끝마다 애어른 할 것 없이 누구 이야기를 하든 '요년, 조년, 망할년' 따위를 추임새로 넣으니 당연했다. 그 양반 입에서 가장 많이 흘러나온 욕은 뭐니뭐니해도 '베라먹을년'이어서, 뜻이 궁금해진 내가 엄마한테 물어본 적도 있었다. 알고보니 '빌어먹을년'이라는 뜻이었다. 나 원 참. 그뿐인가. 귀엽다며 아이들 볼을 꼬집는 어른들은 원래도 있었지만 그 할머니는 그냥 쥐는 정도가 아니라 진짜로 아프게 꽉 잡고 마구 흔들어 빨갛게 만들거나 심지어 뽀뽀를 한답시고 뺨을 깨물어 애들을 울렸다. '정말 이상한 할머니'였다. 그러고는 또 매사에 생색을 어찌나 내는지, 옛날 전쟁 피난시절 굶는 이 집(울 외할머니네)식구들을 자기가 쌀퍼다 먹여서 살렸다는 둥(남편이 군무원이라 살림이 늘 넉넉했단다), 특히 울 엄마를 두고는 내가 재를 다 먹여살려 키웠노라, 그 어려운 시절에 입히고 먹인 건 물론이고 학교 공부는 내가 다 시켰노라 입만 열면 똑같은 레퍼토리의 반복이었다. 조카딸 학교 보내주는 고모가 세상에 어디 흔한 줄 아느냐고. (그렇다, 나에게 '고모할머니' 되는 양반이다) 우리 외할머니를 비롯해 다른 친척들은 그 양반의 호언장담에 맞장구도 치지않고 반박도 하지 않으면서 그냥 묵묵히 듣고 넘기는 쪽이었다. 하기야 누가 말대답이라도 할라치면 괜히 막 쌍욕을 해대며 언성을 높였던 것 같다. 나로선 몇년에 한번 볼까말까 하는 사람이라는 게 다행스러웠다. 나랑 동생들한테도 제대로 인사 안한다고(인사를 왜 안했겠나. 넉살좋게 큰소리로 반기지 않았다는 뜻이다;;), ㅂ가네 애들 저래 숫기가 없어서 어디 가서 빌어먹기라도 하겠느냐고 보기만 하면 면박을 줘대니 얼굴 보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내가 커서 어른이 되는 동안에도 그 양반의 큰소리는 변함이 없었다. 특히 'ㅇㅈ년(울 엄마)은 나한테 평생 잘해야한다'는 소리는 잊을 만하면 들려왔다. 아 정말, 사람 이름에 왜 '년'자를 접미사로 붙이는지! 암튼 나는 또 궁금해져서, 진짜로 외갓집 식구들이 그 양반 덕을 많이 봤는지, 특히 울 엄마가 어떤 은혜를 입었는지 물어보았다. 기막히게도 사연은 이러했다. 

 

전쟁통 피난시절, 울 엄마네는 피난을 내려가다 이미 인민군 세상이 된 걸 알고 이천인가 안성 쯤에서 서울로 되돌아갔단다. 그러고 한참 뒤, 서울 수복이 된 후 부산으로 피난갔던 그 양반 남편이 서울로 찾아왔더란다. 집에 먹을 것도 부족할 테니 군입 하나 줄이는 셈 치고 울 엄마(당시 10살)를 부산으로 데려가겠다고. 부산엔 학교도 열렸으니 학교도 보내주고 배불리 먹여주겠다고 했다나. 외할머니는 울 엄마한테 그럼 너라도 굶지 않게 따라가라 명했고, 착한 엄마는 고모부를 따라 부산으로 먼길을 떠났다. 이 대목에서 이미 짐작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부산에서 울 엄마가 전쟁으로 중단했던 학교를 다닌 건 맞지만 엄밀히 따져 그 양반네 집안에서 울 엄마의 위치는 '더부살이 식모'였다. 군무원이라 집에 쌀이며 기타 양식이 풍족하면 뭐하나,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애보고(어린 사촌동생들이 둘이라나 셋이라나;;)... 아침에도 학교를 가려면 열살짜리 어린애가 군불을 피워 밥을 손수 해서 상차려 바치고 가야했단다. 나중에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나는 정말 피가 거꾸로 솟는 것처럼 화가 났다. 결국 제몸 편하려고 조카딸 데려다 식모살이 시켰다는 거 아닌가! 악당이 따로 없다. 그러면서 무슨 생색은! 미친 거 아닌가?

 

다행히 울 외할머니네도 1.4후퇴 때 부산으로 합류를 했고 드디어 모녀상봉을 했더란다. 맏딸만은 끼니 안굶고 배불리 먹으며 학교에 잘 다니고 있을 거라 짐작했던 외할머니는, 그 추운 겨울에 개울가에서 맨손으로 그집 식구들 빨래하느라 손등이 다 터져서 피가 줄줄 나는 딸의 손을 보고는 즉각 사태파악을 한 뒤 그 길로 도로 데려갔단다. (울 엄마 손등엔 그 때 동상에 걸려 터진 흉터가 아직도 남아있고 요새도 가끔 가렵다고 하신다) 그러니까 그 괴상한 양반이 울 엄마를 학교 보내고 먹이고 입히고 했으니 평생 잘해 받아야 한다는 '은혜'를 베푼 기간은 기껏해야 1년 남짓 되는 것 같다. 하지만 비단 옷 입고 드러누워(울 엄마의 묘사다;;) 피둥피둥 놀면서(주로 화투를 쳤단다) 열살짜리 조카딸한테 무임금 가사노동 전담시킨 죄값은 어떻게 하느냐고! 그 양반의 만행은 세월이 흘러 울 엄마가 여고입학할 때 다시 속개된다. 가난한 집에서 '기집년'이 무슨 고등학교엘 가느냐고 길길이 날뛰며, 돈 벌어 남동생 뒷바라지나 하라고 울 엄마의 교복을 진탕에 집어던졌다나 뭐라나...  자기한테 월사금 보태달라고 할 생각은 얼어죽어도 하지 말라면서... 아니, 자기가 왜 무슨 참견??

 

내 어린시절 기억 속의 그 양반 모습도 참 가관이다. 짜리몽땅한 키에(145센티미터쯤 되는 것 같다) 부를 과시하기 위함인 듯 요란한 양단 치마저고리에 주로 털배자를 떨쳐입고 동그란 얼굴엔 나비모양의 뿔테안경을 걸치고 나타나선 우리 외할머니댁에서 며칠 묵어가곤 했는데, 나를 보면 최대한 방정맞게 혀를 쯧쯧쯧쯧 차면서 '기집년'이 공부를 잘하면 뭐하니, 팔자만 세진다.. 따위의 악담을 덕담처럼 던져댔다. 평생 가족에게든 남에게든 제대로 이로운 일을 하고는 살았는지 어쩐지도 잘은 모르겠으나, 정말로 그 양반 입에서 좋은 이야기가 나오는 건 들어본 일이 없었던 것 같다. 울 엄마의 우울증이 심해지자, 그 양반은 또 귀신 들린 거라면서 굿을 해야한다고 난리를 피워서(굿을 안하면 화가 온 집안으로 퍼져 자기네도 해를 입는다나 뭐라나;;) 외할머니가 하는 수 없이 울 엄마를 데리고 굿당을 찾기도 했단다. (이날의 장면은 어린 시절 나의 뇌리에도 충격적으로 새겨졌다. 그 양반이 울 엄마를 끌어다가 마당 한 구석에 꿇어앉혔고,  무당이 울 엄마한테 살아있는 수탉을 확 던져셔 내가 막 울었음;;내가 다섯 살 때라는 것 같다)  심지어는 시집살이 때문에 울 엄마의 정신이 병들었으니 울 아버지와 갈라놓으라고도 한 적도 있단다. (진짜 그 양반 정신분석 한번 해보고 싶은 대목이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망발을? 울 엄마의 우울증 역사는 미혼시절부터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른이 되어 그 양반의 실체를 알고 난 뒤로 나는 가능하면 그 양반과 마주치는 자리를 피했고 울 엄마와도 상종을 막았으며 최근까지 거의 교류가 없었다. 잘은 몰라도, 아무리 전쟁통이라지만 10살에 엄마와 떨어져 배불리 학교 보내줄 줄 알고 따라간 고모 집에서 졸지에 식모살이를 하게 된 건 울 엄마에게 트라우마로 남지 않았을까? 그러고도 자기 잘못한 줄 모르는 양반이니, 그런 사람과는 떼어놓는 게 상책이다. 

 

아들 선호사상이 엄청난 데 하필 딸만 셋 둔 양반이라 나의 외숙과는 예로부터 쿵짝이 잘 맞아서 수시로 드나드는 모양이었지만, 울 엄마도 어린시절부터 평생 싫은소리를 들었던 상처가 워낙 컸던지 언제부턴가는 그 양반 돌아가도 문상을 가지 않겠노라고 선언했다. 그 양반이 불행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건 다 인과응보라고 나 역시 매몰차게 악담을 했다. 딸 셋은 각기 호주와 캐나다로 이민간 지 오래였고, 혈육들도 그 양반의 더러운 입과 안하무인 태도를 못견뎌한다고 들었다. 그러니 딸들이 보내주는 일정액의 생활비로 독거노인으로 사는 수밖에. 아흔이 다 된 나이라 얼마 전부터는 거동이 불편해 요양병원에서 지내지만, 정신은 말짱하여 목에 휴대폰 걸고 다니며 사방으로 전화를 건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번인가 집으로 온 전화를 내가 받아서 대충 통화하고 끊었다. 여전히 고압적인 자세였다. 니 엄마는 아파서 그렇다 치고 니년은 젊은 년이 왜 얼굴 한 번 안 뵈주러 오느냐고 했던가. 다행히 왕비마마는 집에 안 계셨고;;) 자식들에게도 버림받은 노인에게 인간적인 동정심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뜬금없이 욕설을 퍼붓는 그 양반이 울 엄마의 '고모'이며 나에겐 '고모할머니'라고 생각하면 연민보다는 짜증이 더 치밀었다. 더는 상종하고 싶지 않은 귀찮은 존재 정도? 차라리 남이었다면 안타깝고 불쌍히 여길 수도 있었을까? 

 

어쨌거나 엊그제 그 양반의 뒤늦은 부음을 들었다. 지난 설날에도 그 양반을 집에 모셔와 며칠 지냈다던 외삼촌도 나중에 일처리가 다 끝난 뒤 통보만 들었다는 걸 보면, 장례를 위해 딸자식들이 귀국하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남보다 못한 '어떤 고모'의 일생이 끝난 셈이다. 내가 왜 이 이야기를 여기다 시시콜콜 적고 앉았는지, 그 이유를 나도 잘 모르겠다. 가깝든 멀든 집안 어르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나 도리도 외면했던 것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 글쎄... 그건 아닌 것 같다. 진정코 하나도 찔리지 않는 걸. 그보다는 그 양반 문상도 안가겠다 장담하던 왕비마마가, 다음번 절에 가는 날 '영가등'('영가'는 망자를 의미한다)이나  하나 켜야겠다고 한 말 때문인 것 같다. 그 또한 울 엄니 마음 편하자고 하는 일이겠지만, 암튼 딸들도 안 들여다보는 노친네의 죽음을 결국엔 어린 시절 노동력을 착취당했던 조카딸이 챙기누나 싶어져서 나는 또 좀 화가 난다.

 

이런 부끄럽고 시시콜콜한 가족사를 이런 공개적인 공간에 적어놓아도 되는지, 내 얼굴에 침뱉기는 아닌지 생각되지만 그럼에도 결국 공개하는 건 울 엄마가 절에 가서 평생 미워한 고모를 위해 재를 올려 마음을 씻으려는 것처럼 나도 옹졸하게 마지막으로 실컷 망자를 욕해 꽁한 마음을 풀려는 시도가 아닐까나.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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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문 글문?

투덜일기 2013. 8. 12. 01:17

 

 

블로그를 처음 시작했을 땐 대문에 떡하니 사진부터 나타나면이 그렇게 어색하고 이상해만 보이더니 요즘엔 사진없는 포스팅은 좀체 쓸 엄두가 나질 않는다. 은둔하는 나날의 비중이 커지면서 말솜씨도 엄청나게 줄어들어 종종 뭔가를 설명해야 할때 말문이 한참이나 막혀 고생을 하고 있는데, 말문만 꽉 막힌 게 아니라 글문도 꽉 막혔구나 느낀다. 이래가지고 어떻게 밥벌이를 하겠다고 참... 당연히 작업의 질과 진도도 형편없다. 가끔은 벌써 뇌가 쪼그라든 건 아닌가 고민스러울 정도. 설마 디지털치매? +_+ 딱히 별일이 없어 포스팅 거리가 없기도 하지만 영화를 보고 책을 읽어도 좀 깊이 생각하고 그걸 말이나 글로 풀어내는 능력은 현저히 떨어졌다. 아니, 무더위를 핑계로 멍하니 아예 아무 생각없이 사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슬럼프 때는 일하기 싫고 놀고 싶다는 '고민'이라도 했지, 요즘엔 그냥 다 귀찮아서 머리고 몸이고 까딱하기가 싫다. 글씨조차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이 기분은 뭔가 말이다. 째뜬 이렇게라도 시답잖은 몇줄로 꽉 막힌 글문을 풀어보겠다는 것이 월요일을 맞이하는 이 순간의 결심. 근데 참... 덥긴 너무 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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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허허 ㅠㅠ

투덜일기 2013. 7. 20. 16:45

조금 전 동네 도서관에 다녀오는 길에 마트엘 들렀다 나오니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곧 그칠 것 같아서 마트 천막 밑에 서서 비를 피하고 있는데, 빗속에서 노인 한분이 비틀비틀 걸어오고 있었다. 풍을 맞으셨는지 몸놀림이 어딘가 부자연스러운데다 목발까지 짚고서 절뚝절뚝 쏟아지는 비를 피해 마트 입구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여든 살은 넘으셨을 듯한데 점퍼가 이미 다 젖었다. 나도 모르게 빗속으로 나가 손을 뻗었다. 순간 웬 오지랖인가 싶으면서도 그냥 지켜보고만 있기가 심히 찔렸던 것 같다. 우리 할아버지도 말년에는 지팡이를 짚으시고도 균형잡기가 어려운지 종종걸음으로 걸으셨다.
암튼 목발을 짚지 않은 노인의 손을 잡고 마트 천막아래로 모셔다드리고나니 노인이 나직이 말씀하셨다.

아주머니, 고마워요.

그러고는 마트 안으로 절뚝절뚝 들어가시는데... 천막아래 서 있던 나는 돌연 서글픔에 휩싸이며 웃음이 실실 나오면서 '웃프다'는게 이런 거구나 생각했다. 나름 야구모자에 땡땡이 배낭도 매긴했지만 민낯에 허름한 티셔츠 차림으로 뭘 바란거냐! 아무리 낮춰보아도 기껏해야 마흔 안팎일텐데 아주머니지 그럼 니가 학생으로 보일줄 알았냐! ㅠㅠ 어머님이나 사모님 호칭보다야 낫지 뭘...
그러면서도 여든살 노인한테 아주머니라고 불린 충격(? 아 왜?)에 아직 덜 그친 소나기 속으로 나서고야 말았다. 혹시... 손에 들고 있던 방울토마토 상자 때문일지도 몰라... 라고 애써 변명하면서.

앞으로도 점점 늘어나는 내 나이와 그에 상응하는 사람들의 반응에 적응하는 날이 과연 올까... 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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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무실

투덜일기 2013. 7. 17. 16:34

학생치고 교무실에 가는 걸 즐기는 사람이 있을까? 내 생각으론 심지어 교사라고 해도 교무실이란 공간을 사랑하게 되진 않을 것 같다. 교사에게 교무실은 곧 직장인에게 사무실과 같을 테니까. 엄청 좋아하는 일을 하는 회사가 아니고서야 사무실이 뭐 그리 좋겠나. 게다가 사무실처럼 칸막이가 있다고는 해도 학교 교무실처럼 무방비로 노출된 공간이 또 있을라고. 마지막으로 내가 교무실이란 공간을 속속들이 경험한 건 오래 전 교생실습 때였는데, 무슨 실습실을 임시로 쓰던 교생실과 달리 교무실에 들어갈라치면 한숨부터 나왔다. 매일아침 담당과목 선생님 자리 옆에 의자 놓고 참석하던 교무회의도 멀미나게 지루했던 것 같고...  

 

암튼 조카 출국 때문에 나의 모교이기도 한 중학교 교무실에 전격 방문할 일이 있었다. 그것도 출국 당일 공항가는 길에, 현장학습 확인서를 제출하려고. ㅠ.ㅠ 계속 기말고사가 있었고, 시험 끝나자마자 곧장 며칠 수련회를 다녀왔고 수련회 바로 다음날이 출국일이라, 늦어도 사흘 전에는 제출하라고 적혀 있는 확인서와 비행기표 사본을 미리 제출하지 못한 정황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관련서류를 담임샘의 재촉을 받고서야(전날 저녁과 당일 아침에 담임샘이 절대 그냥 가면 안된다고 신신당부하는 전화가 조카에게 걸려왔단다) 공항 가는 길에 내밀러 가는 나의 입장은 몹시 민망했다. 교무실에 같이 들어가 서류 늦어진 상황을 나더러 설명하라던 조카는 아예 자기는 차에 있을 테니 고모가 내고 오라고 슬쩍 떠넘기는데, 그럴 수야 없지!

 

뭔가 잘못해서 교무실로 불려온 학생 같은 기분으로 조카 곁으로 슬며시 다가가 담임샘한테 우물쭈물 인사와 변명과 사죄를 하는데 아뿔사, 바로 옆자리가 조카의 1학년때 담임샘이었다. ㅈㅁ이 어머니 오셨으면, 자기도 할 말이 많다며 어머니도 좀 혼나셔야겠다고 나서는 게 아닌가. ㅠ.ㅠ 꾸벅 인사하며 애엄마가 아니라 고모라고 했더니 'OO동 고모'냐고 아는 척까지! 언젠가 여기도 썼지만 조카의 1학년때 담임샘은 무려 30년전 내가 그 학교 다닐 때 막 부임해 온 신참 한문샘이었다. 모범생 코스프레를 하던 까마득한 옛 기억이 발현되었는지 제발이 저려서 얼떨결에 졸업생임을 밝혔는데, 하핫 그나마 그게 신의 한수였던 것 같다. 지각대장에 벌점대장인 조카의 근태에 대하여 한말쌈 길게 하시려던 것 같더니만, 내가 30년전 제자라는 걸 밝힌 순간 이내 어디론가 모습을 감추셨다! ㅎㅎㅎ

 

아무튼 현 담임샘께는 해외의 경우도 현장학습은 공휴일 포함 7일밖에 인정되지 않는데, 그토록 장기간 학교를 비우는 마당에 어머님이 출국 전에 전화 한통 미리 하지 않았다고 대신 혼도 좀 나고(내 생각에도 그건 좀 혼날 상황이라고 판단; 암말 못했다), 거듭 사죄하는 비굴모드로 일관한 뒤 진땀을 닦으며 잠시 후 교무실을 나올 수 있었다. 교장샘 책상이 요새도 교무실 한 가운데 있을 줄이야! 그리고 하필 그 앞 회의탁자에서 조카에게 각오와 다짐을 적게 할 줄이야! -_-;

 

잔뜩 긴장해서 제대로 둘러보지도 못했지만, 교무실은 그 옛날과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 듯했다. 좁아터진 교사용 책상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답답한 느낌까지도... 재단에 돈 많은 학교인데 참 투자를 안하나보다.

 

차로 돌아와, 제대로 말 못하고 왜 부끄러운 척 했느냐고 구박하는 조카에게 내가 대꾸했다. 고모는 어렸을 때 교무실 들락거리는 거 싫어서, '서기' 하라고 하면 절대 안한 사람이란다.  그리고 교무실은 말이지, 어른들도 쉬운 공간이 아니거든! 정식 학부형도 아니고 학부모 대신 찾아간 고모는 더더욱 민망하지 않겠니?!

 

부모 노릇은 정말 어려운 일이란 걸 항상 느끼는데, 그 가운데 학부형 노릇은 더 난감하다는 걸 딱 5분만에 실감한 경험이라 기록으로 남겨야겠다 생각했다. 다시는 교무실에 갈 일이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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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

투덜일기 2013. 7. 11. 21:53

<비포 미드나잇> 초반부에 에단 호크가 열네 살(열세 살이었던가?) 난 아들 헨리를 홀로 그리스 공항에서 떠나보내며 몹시 불안하고 안쓰러워하던 장면이 나온다. 거의 해마다 여름방학 때 그래왔던 아들녀석은 퍽이나 심드렁하고 의연한 태도를 보이는데, 속으로 난 심히 에단호크에게 공감하고 있었다. 어린애가 홀로 영국가서 비행기까지 갈아타고 대서양을 건너가야 가야하다니.. 아우.. 녀석, 정신 바짝 차려야하겠다. 녀석은 영어라도 잘 하니 큰 걱정은 없겠구나.. 그래도 히드로 공항 꽤나 복잡하던데... 그러면서.

 

중학생 조카가 곧 홀로 미국행 비행기를 탈 일이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 나이로는 열여섯살이고 화장'빨'과 머릿'빨' 때문에 꽤나 성숙해보이긴 하지만, 서양나이로 따지면 조카도 겨우 열네살인데... 더 어린 아이들도 조기유학이다 어학연수다 해서 혼자 비행기 태워 멀리 보내는 강심장 부모들 많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소심쟁이 고모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가뜩이나 영어도 못하는 애를! ㅠ.ㅠ

 

그러다 심지어는 공항 픽업까지 내 차지가 되었다. 애 엄마와 동생은 이미 2주 전에 현지에 가있는 상황이고 애 아빠는 지방출장 중.  하필 비가 억수로 내려 와이퍼를 최고 속도로 작동해야 앞이 보이는 빗길을 달려 공항으로 향했다. 국제선 공항 터미널은 출국이든 마중이든 배웅이든 대체로 늘 설레고 기분 좋은 공간이었는데, 오늘처럼 짠하고 불안하고 못미더운 느낌에 복합적으로 휩싸인 건 처음이다. 왜 하필 또 아시아나 비행기는 최근에 사고가 나가지고 말이지...

 

헨리와 달리 조카는 다행히 직항이긴 하다. ^^ 미성년자는 일정 비용을 내고 도착지까지 공항 가이드 서비스를 받을 수도 있다는데, 강하게 키우는 걸 신조로 삼은 올케가 알면 핀잔 줄 것 같아서 약간 망설이다 마다했다. 조카도 완전 어린애 취급 받기는 싫었는지 기특하게 괜찮다고 했다. 한편으론, 그래도 입국심사 예상 질문까지 연습시켰는데 뭔가 보람은 있어야지 않겠나 싶기도 했고. -_-;

 

째뜬 창가 좌석 배정받느라 비행기 앞쪽에 못 앉고 뒤쪽에 앉힌 것도 찜찜하고 (설마... 비행기 사고가 또 나지는 않겠지;;), 옆 사람 잘 사귀어서--부디 힘 좋고 친절한 젊은 사람이 앉기를-- 나중에 짐 찾을 때 컨베이어 벨트에서 여행가방 꺼내달라고 부탁하라고 했는데 파트너를 잘 만났는지도 걱정이고, 입국심사에서 좀 친절한 직원을 만나야 할텐데 라며 걱정하고 앉았다. 무사히 도착해 픽업나온 사람과 만났다는 연락이 오기까지 잠 자기는 다 글렀다. ㅠ.ㅠ

 

애들 해외 여름캠프 스케줄을 스스로 짜고 아예 따라가서 밥 해먹이고 운전기사 노릇까지 하는 애들 엄마도 나름 고생이겠지만, 난 아무래도 옛날 사람이어서 이렇게까지 학교도 왕창 빼먹고 방학도 하기 전에 어학연수인지 썸머캠프인지를 꼭 다녀야하는지 잘 모르겠다.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도 미지수고...  가능한 한 재미있고 신나게 '놀다' 오라고 일러두긴 했지만, 하여간에 열네 살에 홀로 열두 시간 쯤 지겹게 비행기를 타고 다른 나라엘 가는 건 나 같으면 절대로 안하고 싶을 것 같다. 선뜻 홀로 합류하겠다고 동의했으니 조카는 마음이 다를까? ㅎㅎ 그럼 다행이고. 

 

어느덧 시간이 흘러, 도착까지 이제 여섯 시간 남았는데 지상에 있는 내 어깨가 왜 결리는 걸까. 크헉, 못살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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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 장을 보러 가면서 먼저 건어물 가게에 들러 이것저것 달랬더니 금액이 꽤 나왔다. 아주머니가 그밖에 제사에 필요한 물건 빠뜨린 거 없느냐고 막 챙겨주면서 탕국에 넣을 다시마는 있나? 하고 물었다. 마침 집에 다시마는 똑 떨어지고 없었기에 도리질을 했더니, 하나 '서비스'로 챙겨 봉투에 담아주며 중얼중얼 읊조리듯 말했다. 탕국엔 왜 꼭 다시마를 맨 위에 얹나 몰라...

 

엇, 그러고 보니 뼈대있는 집안도 아니고 제사 전통도 대충 이어온 우리집에선 탕국에 딱히 다시마를 얹지 않는다. 근데 다시마 조각을 얹은 탕국을 본 기억은 대단히 또렸했다. 어디에서 봤더라...(종묘 답사 갔을 때 본 것도 같고;;;) 궁금해하며 집에 돌아와, 서비스 다시마 얻어온 사연을 자랑삼아 이야기하며 왕비마마한테 물었다. 탕국엔 다시마를 얹는 거라던데 이유가 뭐냐고. 왕비마마의 입에선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나왔다. 아 글쎄, 조상신이 제사음식 묶어가라고 다시마를 좀 기름하게 잘라 탕국 위에 올리는 거란다. 푸핫. 푹푹 끓인 다시마로 어떻게 음식을 묶어간다고! 게다가 우리집 탕국엔 다시마를 올려놓아본 적이 없는데!

 

근데 쇠고기 무국 끓이면서 생각해보니 참 재미있는 발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왕비마마의 말이 맞다면 옛날 사람들 진짜 아기자기하지 않나? ㅋㅋㅋㅋ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지만, 전주이씨 XXX파 후손이신 왕비마마가 질문을 듣자마자 1초도 안돼서 내놓은 답이니 상당히 신빙성이 있을 것 같긴 한데, 폭풍검색을 해보아도 탕국 다시마의 유래에 대해선 잘 확인이 안된다. 지방마다 탕국에 넣는 재료도 좀 다르고 해서...

 

어쨌거나 나는 킬킬대며 얻어온 다시마를 좀 길게 잘라 넣고 국을 끓였고, 탕국을 풀 때 제일 두툼한 다시마 조각을 하나 골라 수북하게 쌓은 고기와 무 위에 척 얹어 들여보냈다. 종교도, 영혼의 존재도, 사후세계도 믿지 않지만 어쨌든 제사를 빙자해 친척들 모여서 다 같이 밥먹는 데 깊은 의미가 있다는 쪽에는 나도 동의하는 바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짧은 다시마로 음식을 묶어간다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신묘한 귀신이 뭘 못하겠어! 라지만 창살도 문도 못 뚫고 들어와 제사 전에 문을 열어주어야 하는 건 어쩌라고? ㅎㅎ) 앞으로도 탕국에 다시마 올리는 건 재미 삼아서라도 빼놓지 말아야겠다. 누군가가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라고 일러주더라도 뭐, 다시마 넣으면 국물 맛이 깊어지는 거야 진리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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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건

투덜일기 2013. 6. 10. 17:52

거창하게 환경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언제부터인가 손수건이 좋다. 누가 구세대 아니랄까봐 손수건에 얽힌 추억도 많다. 국민학생 때 어버이날 동네 시장에 가서 난생처음 산 부모님 선물도 손수건이었던 것 같다. 품목을 바꿔보겠다고 양말이나 부채로 선물을 바꾸었던 해, 예나 지금이나 사시사철 땀 때문에 손수건 없으면 곤란한 지경인 엄마는 그냥 손수건 사오지 그랬냐고 타박했다. 중학생 시절 똑같은 꽃무늬로 손수건과 부채 선물세트를 발견하고 반색한 적도 있는 것 같은데, 그걸 받고 엄마가 기뻐했었나 어쨌나는 또 기억나지 않는다. 암튼 엄마가 좋아하는 꽃무늬 손수건은 좀 낡았다 싶으면 내 도시락 보자기로 사용되었다. 얄팍한 시집과 함께, 이왕이면 백화점에 가서 예쁘게 포장해달라고 해서 사온 손수건은 부담없이 친구에게 선물하기에도 좋은 품목이었다. 시집 한권도 삼천원, 손수건 한장도 삼천원 하던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다.

 

중고등학생 때는 반짇고리와 함께 여학생 필수품으로 소지품 검사를 당하는 것이 공연히 억울하고 기분나빠서 종종 가방에 처박아 두는 물건으로 전락했지만, 더운 날 체육시간에 손수건을 뒷주머니에 넣고 나갔다가 어푸어푸 세수한 뒤 친구들과 돌려가며 닦은 다음 물기를 꾹 짜서 손목에 묶고 들어오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교실에 선풍기도 없던 시절이니, 덜 마른 축축한 손수건을 교복치마 척 걷어붙이고 무릎에 올려놓아도 좋았다. 겨울엔 할머니처럼 체육복으로 무릎을 감싸더니 여름엔 또 손수건이냐며 친구들은 꽤나 구박을 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손수건 들고 다니는 남자에 대한 로망도 잠시 있었던 것 같다. 좀 닭살이 돋기는 하지만 벤치에 깔고 앉으라거나, 혹은 치마입고 잔디밭에 앉을 일 있을 때 무릎 덮으라고 손수건 꺼내주는 남자라면 무조건 가산점 팍팍 줄텐데, 라고 생각했던 거다. 물론 현실에서 그런 '어린' 남자애를 본 적은 없다. 당연하지! 깨끗한 티셔츠 입고 다니는 것도 어려운 녀석들이 어떻게 손수건씩이나 챙기겠나. 만약에라도 그러는 경우가 있다면, 그건 분명 집안 여자들(손수건 다려주는 엄마나 누이)의 노동을 담보로하기 십상이다.

 

다림질을 워낙 싫어하고 못하는 축이라, 예전에 엄마가 좀 부려먹을라고 하면 요리조리 핑계를 댔지만 다리미 남은 열로 어려울 것도 없는 손수건이라도 문지르라고 하는 것까지 거부할 순 없었다. 이미 엄마는 땀을 한바가지나 흘리고 난 다음이었으니 뭐;;  째뜬 내가 손수건을 대강 다리미로 펴고 있노라면 엄마는 서랍에서 온갖 손수건을 죄다 꺼내놓았다. 다림질도 신부수업이라나 뭐라나. 나 시집 안갈 건데! 버럭 화를 내면서도, 한번 쓰면 금세 망가질 손수건을 왜 굳이 다려야 하냐고 투덜거리면서도 내 손수건까지 다 꺼내 곱게 다려 쌓아놓으면 뿌듯하긴 했다.

 

아버지 정년퇴직 직전까지 몇해 동안 일주일치 와이셔츠와 손수건 한꺼번에 다리기는 당연히 무수리인 내 몫이었다. 아버지 옷들은 전부 다 처분했지만 손수건은 새것 헌것 할 것없이 엄마랑 내가 모두 나눠가졌다. 난 원래도 앙증맞은 꽃무늬 손수건보다는 무늬 단순하고 큼지막한 남자손수건이 더 좋아서 종종 아버지 손수건을 훔쳐 넣고 다녔다. 그리고 손수건은 좀 오래 써서 길이 들어야 잘 닦이고 손에 착 감기는 맛이 있다. 뻣뻣하고 물기도 잘 안먹는 새 손수건을 제대로 길들이려면 최소 열번은 빨아야 하는 것 같다. 작년이었나, 생일선물로 뜬금없이 손수건을 사달라고 했던 후배를 따라 정말로 간만에 백화점 손수건 코너엘 갔었다. 내 돈 주고 마지막으로 손수건을 산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질 않아 통 시세를 몰랐는데, 아 글쎄 손수건 한장에 만원에서 만오천원! 수십년 전 물가를 생각하면 뭐 그럴만도 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백화점 할인매대엔 종종 드러누워있는 만원짜리 티셔츠도 허다하건만 손수건 한장에 만원을 넘다니 ㅎㄷㄷ 어쩐지 아깝단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후배는 예쁜 손수건을 어렵사리 다섯 장 골라 담으며 만원짜리 티셔츠 다섯장 사는 것보다 훨씬 더 만족도가 크다고 장담했다.  

 

암튼 연일 30도를 넘는 무더운 여름이 시작됐고, 겨울엔 종종 들고 나가는 걸 까먹는 손수건을 요샌 나갈 때마다 챙겼더니 세탁기 돌려 널어놓은 빨래 건조대에 알록달록 손수건 세 장이 정겹고 예쁘다. 엄마는 손수건을 매일 세수할 때마다 빨아 너는 분이라 다 내것이다. 두 장은 아버지가 쓰시건 건데, 유독 색깔이 고운 체크무늬 손수건 한장은 열여섯 살 먹은 첫조카 침 질질 흘리던 아기 시절 목에 묶어 주었던 거라는 게 생각났다. 15년쯤 묵은 손수건이라는 뜻이다. 작년에 후배 따라 충동구매한 '비싼' 손수건은 아직도 길이 들지 않아 선뜻 손이 가지 않아 서랍속에서 외면을 당하고 있다. 자꾸 써줘야 길이 들텐데, 선뜻 손이 가는 건 대체로 5년 이상 묵어 촉감이 부드러운 옛날 손수건이다. 하루에 손수건을 두장씩 쓰는 엄마도 자꾸 쓰는 것만 쓰게 된다고 한다. 하도 오래되어 나달나달 올이 다 미어질 정도가 되면 흡수력도 오히려 최고조.

 

얼마 전 너무 낡아 드디어 찢어지게 생긴 손수건 한장을 버리면서 엄마는 본전을 백번은 뽑았겠다고, 그러니 버려도 아깝지 않다고 하면서도 아쉬워했다. 구관이 명관인데... 라면서. 낡은 물건과 본인을 동일시하게 된 노년의 엄마는 그렇다치고, 대체 난 왜 오래된 물건에 미련을 떠는지 참 그걸 모르겠단 생각을 또 한번 하게 된 손수건 이야기. 마무리가 안되서 이걸로 끝. ㅋㅋ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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