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덜일기'에 해당되는 글 503건

  1. 2013.03.08 벼락치기 17
  2. 2013.02.08 다시 그 자리 11
  3. 2013.01.24 정신머리 6
  4. 2013.01.17 사람들 11
  5. 2013.01.16 나는 무수리가 아니었다 16
  6. 2013.01.04 과연 11
  7. 2013.01.02 눈이 와도 너~무 온다 7
  8. 2012.12.31 2012년 12월 31일 7
  9. 2012.12.27 산타는 있는가 8
  10. 2012.12.21 책 비닐 3

벼락치기

투덜일기 2013. 3. 8. 23:40

다섯번의 현장답사를 빼고도 18번이나 이론수업을 받은 내용을 하루아침에 벼락치기로 몰아서 공부하면 과연 결과가 좋게 나올까? +_+ 왕릉답사 가는 날은 사촌동생 결혼식이랑 겹쳐 당연히 못갔고, 지난주 화요일엔 몸도 안좋고 강의내용도 별로라서(대인 예절과 자기관리법 같은 거였다) 두번째 결석을 했다. 개근상 받을 것도 아니고 뭐 어떤가.

 

궁궐지킴이 활동을 정식으로 할지말지, 그것 역시나 여전히 고민중이라서 내일 시험도 보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지난 두달 넘게 계속 마음이 변덕을 부렸다. 아 다 귀찮아, 그간 배운 걸로 충분해. 그런 마음이었다가 또 과연 시험을 보면 결과가 어떨지 궁금하다. 왜 사서 간을 졸이려는지 모르겠으나, 내 실력을 평가받고 싶은 기분이랄까? 하지만 또 시험에 떨어지면 쪽팔리고 자존심 상할까봐 아예 응시하지 않아야하는 게 아닌가 싶은 마음도 든다. 아우 이놈의 변덕과 우유부단함!

 

학창시절에도 워낙 벼락치기의 여왕이었던 터라, 한 사나흘 빡세게 벼락치기로 공부를 하면 시험에 떨어지진 않겠지, 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건 어디까지나 며칠 전 상황이었고, 실제 며칠동안은 놀러 나가거나 오늘아침까지 애먼 일(애물단지 동생을 돕는 일;;)로 밤샘까지 해야 했다. 결국 오늘은 온종일 시체놀이를 하다 이제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밤중이다. 심지어 내일은 저녁때 왕비마마 생신 파티가 있어서 저녁먹고는 간만에 또 대청소도 했다. ㅠ.ㅠ

 

두툼한 교재와 그간 깨알같이 적어놓은 필기노트와 궁궐 답사 갔을 때마다 집어온 안내책자를 책상에 쌓아놓고 앉아있긴 한데, 언제 다 읽어보나 싶은 것이 한숨이 푹푹 나온다. 객관식 문제만 있으면 대충 찍는 걸로 밀어부쳐 보겠는데, 주관식도 있단다. 이걸 해, 말어? ㅋㅋㅋㅋ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순전히 저 좋아서 시작한 일이 맞기는 한데,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나답고 깔끔한지 그걸 모르겠다. 어흑...

 

오매불망 선망하던 궁궐 전각에 그나마 좀 자유로이 출입하려면 궁궐지킴이 활동을 하는 수밖에 없겠으나, 또 다시 몇 달 수습기간을 거친 뒤 부족한 숫기로 사람들 앞에 나서야 하는 일인데 과연 내가 그 자부심 돋는 '자원봉사'를 이어갈 수 있을까? 자원봉사가 진정 타인을 위한 것인지 본인의 허영심 만족을 위한 것인지 아직도 갸웃갸웃 하는 사람으로서 자격이 되는가 말이다. 100명이나 되는 교육생들과는 두달반 동안 완전히 생까고 잘 지냈지만, 수습이랍시고 궁궐에 배정되고 나면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어야 할텐데 아무리 궁궐애호가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해도 나름 '조직'에 속해서 사람들과 부대끼게 되는 걸 내가 잘 감당할 수 있을까. 

 

벼락치기든 아니든 '시험'을 위한 공부는 정말이지 하기 싫다는 진리를 또 한번 깨달으며, 여기 끼적이다보면 뭔가 답이 나오지 않을까 했는데 여전히 잘 모르겠다. 이제부터 예상되는 나의 행동이 대강 그려지기는 한다. ㅋㅋㅋ 일단 밤샘을 해서라도 벼락치기에 힘을 써보겠지. 그래서 시험범위를 다 끝내면 시험을 보는 쪽에 더 무게를 둘 것이고, 범위를 다 못 끝내면 아마 시험시작 직전까지(1시부터 마지막 교육과 수료를 마치고 시험은 3시부터 본다 ^^;;) 볼까말까 계속 전전긍긍하지 않을까. 에라이 소심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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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 자리

투덜일기 2013. 2. 8. 14:15

 

가구 옮기고, 집안 구석구석 찌든 때 벗기고
커튼 갈고 이불 빨고
나박김치 담그고...
체력은 국력!! 튼튼해져서 다행.

물긷는 건 안했으니 무수리 역할만 빼고 온갖 노동에 힘쓰느라 계속 책상 앞에 앉을 새가 없었는데 급히 이메일 하나 보내려고 간만에 컴퓨터 켠 김에 블로그도 들어와봤다. 덕수궁 답사도 다녀왔고 프라하의 추억과 낭만 전시회도 봤지만 후기는 설날 지나고 심신의 여유가 있을 때 써야지... 

5년만에 우리집으로 돌아온 명절 준비, 드디어 이제 나가서 장 봐오고 대청소 한판 하면 얼추 사전준비는 끝이다. 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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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머리

투덜일기 2013. 1. 24. 14:23

황망하게도 신용카드 한 장을 잃어버렸다. 요즘 계속 스트레스 때문에 잠을 잘 못잤다는 핑계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더욱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정확히 언제 어디에서 사라졌는지 통 알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어젯밤에 잠도 안오고 괜히 지갑정리가 하고 싶어져서(주로 커피집에서 나눠주는 종이 쿠폰이 너무 많이 쌓였다 싶었다) 똑딱이를 열고보니 가장 많이 쓰는 OO카드가 보이지 않았다. 어라? 이게 어디갔지?

 

당연히 코트 주머니에 들어있을 거라고 짐작했지만 없었다. 어디에서 흘린걸까. 문제는 제일 마지막으로 그 카드를 언제 썼는지가 확실히 기억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지난주였던가? 이번주 월요일이었던가? ㅠ.ㅠ 그나마도 다행인 것은 신용카드 사용내역을 문자로 받고 있다는 사실이고, 안타까운 건 사용내역 문자가 오면 확인후 금방 지워버리는 나의 조급함이다. 영수증도 지갑에 쌓아두는 거 싫어해서 대부분 금세 찢어버린다. 구매내역은 어차피 신용카드 사이트 들어가면 언제든 확인가능하니까... 

 

한참 정신머리 없어지는 나이라서 신용카드 여러장 분실신고 하고 난 뒤 엉뚱한 곳에서 되찾았다는 사연을 주변에서 익히 들었기 때문에 나도 어젯밤에 바로 분실신고는 하지 않았다. 일단 수상한 신용카드 사용 문자를 받은 적이 없으니 잃어버렸더라도 누군가 악용하고 있지는 않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십수년전 종로통 지하철에서 지갑을 소매치기 당했을 때는 거의 30분만에 신용카드 석장이 각각 청량리와 명동 소재 백화점에서 가전제품을 사들이거나 서울역에서 기차표를 여러장 구매하는 사태를 맞이했었다. 학원수업 끝나고 집에 가려다 지갑이 없어진 사실을 알고 나름 서둘러 두어 시간만에 신고를 한 셈이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이번엔 지갑째 잃어버린 게 아니므로 내가 어디선가 카드를 사용하고 나서 장갑낀 손으로 주섬주섬 영수증과 카드와 물건을 챙기다 어딘가 떨어뜨렸을 확률이 가장 높은데 그게 어딘지를 통 모르겠다. 흑흑흑... 곰곰이 더듬어본 끝에 마지막 카드 사용처가 이번주 월요일 잡화점이라고 결론을 내렸건만, 신용카드 사이트에 들어가보니 그날은 현금으로 계산을 했는지 최근 구매내역이 지난주 금요일이다. 그럼 지난주부터 사라진 카드를 여지껏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_-;; 실은 그날의 내역을 보면서도 상호가 완전히 낯설어 가슴이 순간 쿵 내려앉았었다. 훨씬 오래전부터 카드를 잃어버렸던 게 아닌가 싶어서... 하지만 그건 내가 쓴 게 맞았다.

 

금전적 피해가 없는 게 어디냐고 위로하며 분실신고를 마치기는 했지만, 이런 정신머리로 뭘 하겠다는 건가 싶어서 맥이 쭉 빠졌다. 뭔가를 깜빡깜빡 까먹고 잊고 잃어버리는 일은 건망증 탓이라고 하겠지만 이번 사태는 나사가 어디 하나 빠진 듯한 부주의함까지 더해져 일어난 일이란 생각에 참담하다. 왜 어디에서 빠뜨렸는지도 모르겠느냐규~!! 총명탕이라도 끓여먹어야 할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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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투덜일기 2013. 1. 17. 00:47

언제 어디서든 사람들을 관찰하는 건 즐겁다. 간만에 새로운 사람들이 백명이나 득시글거리는 공간에 자주 출입하면서 뭔가를 배우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사람 구경하는 재미도 만만치가 않다. 물론 얼굴치라서 이제껏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 얼굴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매번 다른 자리에 앉기도 했었고...

 

첫 수업에서 뒷줄 구석자리에 앉았다가 두시간 반 내내 담배쩐내에 혼줄이 난 뒤로는 비교적 중간 이전 구석을 노리고는 있으나, 나로선 아무리 일찍 가도 넷째 줄 이상은 다가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생각보다 볼일이 일찍 끝나 40분이나 일찍 강당에 가보았는데 맙소사, 맨앞 세줄은 이미 다 차 있었다. 주최측에선 이름표를 달기를 권하고 옆자리 앉은 사람과는 통성명과 인사를 나누라고 하는데, 어우 그런 거 민망하고 싫어서 나는 10분 전쯤 가서 될 수 있는대로 고개를 푹 수그리고 열심히 예습복습하는 척 하며 강의를 기다린다. 때로는 가방만 내려놓고 밖에 나가서 시간을 보내다 들어가거나...

 

그렇게 사전차단을 하는데도 며칠 전 옆자리에 앉은, 사교성 뛰어난 아주머니 한분은 자기 원칙이라며(옆에 앉은 사람 얼굴 익히고 연락처 받아내는 게;;) 굳이 내 이름과 전화번호를 '따갔다'. 교육 끝나도 주최측에서 주소록이나 명단 같은 거 만들어주지도 않는다니 나중에 수업 내용 물어볼 거 있으면 연락하겠다고... 헐... ㅠ.ㅠ . 째뜬 이 아주머니 말에 따르면, 앞자리에 좀 앉아보려고 자기가 1시간 일찍 온 적도 있었다는데 그 때도 겨우 셋째줄에 자리를 잡았다고 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대부분 15분 전부터 슬슬 나타나는데 20여명의 열혈 학생들이 앞자리 다툼을 엄청 한다는 얘기다.

 

좀 일찍 가방으로 자리만 맡아놓고 사람이 오래 나타나지 않으면, 과감하게 가방을 치우고 앉는 대신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도 있는 듯하다. 자기 가방을 분명 몇째 줄에 놓았는데 엉뚱한 데 가 있다고 씩씩대는 사람을 여럿 보았다. 놀라운 친화력으로 벌써 뭉친(혹은 원래도 서로 아는 사이였거나;;) 몇몇 아주머니들은 서로 자리도 잡아주고 그러는 모양이어서, 그러지 말라고 핀잔 주는 사람도 보았다. ㅎㅎㅎ 시험기간에 피튀기며 도서관 자리잡던 때와 별 다를 바가 없다.

 

맨앞 세줄에 앉은 이들은 대부분 중년이상이고, 그들 중엔 매번 휴대폰으로 강의내용을 동영상으로 촬영하는 사람도 있다. 과연 집에 가서 그걸 매번 다시 볼까? 녹화된 화질과 강의 내용은 쓸만할까? 챙겨보니까 계속 촬영하겠지만서도... 나로선 참 신기하다. 모르긴 해도 아마 크게 티 안나게 녹음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놀라운 학구열;; 중간에 쉬는 시간에도 강사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고 꼬치꼬치 질문을 해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 수업시간 끝날 무렵 괜히 질문해서 강의시간 넘기게 하는 애들 진짜 미워했었는데, 그나마 수업 끝나고 공개질문하는 사람은 아직 없었다. 천만다행. ^^; 

 

반면에 평일엔 강의시간이 7시부터다보니 꾸벅꾸벅 졸거나 곤하게 자는 사람도 보인다. 지난주엔 내 바로 뒤에 앉으신 어느 밍크코트족 아주머니께서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골며 주무셨다. 아직 친한 사이들이 아니다보니 누가 깨우기도 뭣하고 아주머니 스스로 놀라 깨어나 잠시 소리가 멎었다 싶으면 이내 다시 드르렁 드르렁... 신경에 거슬려 짜증나기도 하면서 또 어찌나 웃기던지. ㅋㅋㅋ 옛날 요가 다닐 때도 느낀 거지만 젊으나 나이드나 여자들 중에도 코 고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요가 마무리 때 송장자세 하고 있으면 시간이 몇분 되지 않는데도 드르렁 드르렁 코골며 자는 사람이 두셋은 꼭 있었다. 요가원도 그렇고 이곳 강당도 그렇고 워낙 따뜻하고 어두컴컴하니까 까무룩 잠드는 거야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코 까지 골며 숙면을 취하다니. ㅎㅎ

 

이십대로보이는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강의 직전에 나타나 뒷자리에 앉는 경우가 많다. 어르신들의 열기를 못 따라가거나 양보하거나 둘 중 하나겠지. 강의 내용에 대한 리액션도 아주머니들이 가장 열정적이다. 한번은 강의 끝나고 그날 담당 교수가 안식년이라 다음주에 외국으로 연구 여행을 떠나므로 문의사항이 있으면 이메일로 해달라고 했더니, 대뜸 아쉬움의 '어우~~~' 소리가(순간 방청석인가 착각할 뻔했다 ㅋ) 크게 일었다. 아니 언제 봤다고???? *_* 어차피 모든 강사진이 맡은 부분을 딱 한번씩 강의하는 체계라 두번 볼 사람도 없구만...

 

강의를 듣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강의를 하는 교수, 강사들도 스타일이 다채롭다. TV 특강에서도 본 적 있는 엔터네이너형 강사가 있는가 하면, 두서없이 어려운 건축용어만 잔뜩 주워섬기다 만 사람도 있었다. 연구를 잘하는 학자가 다 강의를 잘하는 건 아니지만, 몇년째 거의 같은 교재로 거의 같은 수업을 하면서 횡설수설하는 건 좀 심했다. 같은 한옥 건축 이야기라도 재미있는 예를 들어가며 귀에 쏙쏙 들어오게 가르치는 사람도 있더구만...  강의는 횡설수설하면서 대뜸 자기 책 참고하라고 광고한 이도 있었다. 그런 책이라면 절대 안 산다 안 사!  반면에 강의 교재도 그렇고 설명도 짜임새 있어서 책을 사보고 싶은 사람도 있다. 대뜸 사들이지 말고 일단 서점에 가서 들춰보고 결정할 작정이긴 하다만.

 

아참, 요즘 사람들은 낯선 사람에게 가장 궁금한 사항이 '어디에서' 사는 것인가 보다. 내 전화번호를 따갔던 아주머니도 그렇고 지난번 수업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도 목례 후에 잠시 머뭇거리며 말을 걸까말까 하는 듯하더니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사는 동네 같으면 같이 가자고 할 리는 없겠지만, 동네 이름 말해주면서 기분이 묘했다. 뭐냐, 요샌 소개팅 나가서도 첫 질문이 어디 사느냐는 거라던데, 사는 동네로 사람을 판단하겠다는 건가? 그러더니 둘 다 자기네는 OO구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나도 다음에 똑같은 질문을 들으면 OOO구에서 왔다고 대답해야지. 대개 옆자리엔 시선도 안주기 때문에 같은 사람이 앉아도 몰라보기 십상이지만 이제까지는 한번도 같은 사람들과 나란히 앉은 적이 없는 것 같다. 최소한 공책이나 수첩 정도는 본다규. 과연 내일 수업 땐 또 어떤 사람이 내 옆에 앉을지, 어색한 대화 없이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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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왕비마마라고 칭하되 딸이면서도 나에겐 스스로 '무수리'라는 칭호를 붙여 비하하고 자학하는 건 꽤나 오래 된 버릇이다. 아마도 직장을 관두고 번역일을 시작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부모님에게 '프리랜서 번역가'란 곧 백수나 마찬가지로 여겨졌고(실제로 첫해 6개월은 그러했다;;), 늘 시간이 남아도는 인력이므로 언제 어디서든 부모님이 명하면 동원되는 것이 마땅한 잉여 존재 취급을 받았다. 주로 운전수, 심부름꾼의 역할이다가, 엄마의 우울증 와병 기간이 길어지고 잦아지자 밥순이의 임무와 강도도 예전보다 커졌다. 그러다 심한 우울증에 당뇨 합병증까지 겹쳐 엄마가 생사를 넘나드는 지경까지 갔다가 극적으로 회복되고 나서는 당연히 가사일이 모두 내 차지였다. 물론 아버지 생전에는 청소며 설거지, 세탁까지 종종 거들어주시면서, 이 집안엔 왕비마마 하나, 무수리 하나, 머슴 하나가 산다고 우스갯소리를 하셨지만서도.

 

째뜬 신데렐라와 함께 무수리는 주변에서 흔히 나를 부르는 별칭이었다. 특히 내가 궁궐에 다니는 걸 좋아하면서 아무래도 전생에 궁에 사는 공주였나보다고 킥킥대면 친구들은 공주가 아니라 무수리였겠지! 라며 놀렸다. 무수리는 궁궐에서 궁녀를 보필하는 최하층 하인이지만,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무수리 출신으로도 승은을 입어 왕의 어머니가 되었으니 신세 고단한 이름이라 해도 뭐 어떤가 싶었고, '왕비마마 엄마를 보필하는 무수리 딸'의 조합이 더욱 재미나게 느껴지기도 했다. 엄마가 왕비면 딸은 공주가 맞다면서, 왕비마마는 제발 딸 부려먹는 못된 엄마 만들지 말라고 나의 무수리 드립을 몹시 싫어하시지만 자조적인 나의 무수리론(?)은 물러서지 않았다.

 

헌데 궁궐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배운 오늘 수업에서 나의 무수리론이 끝장나고 말았다! 궁궐의 각 처소에 소속된 내인(=나인)들이 거느린 하인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 가운데 무수리는 궁녀들이 공동으로 부리는 하녀 중 '물 긷기 담당'을 칭하는 이름이란다. 당시 궁궐엔 처소별로 전각마다 우물이 없었기 때문에 물 긷는 일이 퍽 중요한 임무여서 '수사(水賜)' 또는 '급수인'(汲水人)'이라고도 했다. 특별한 선발기준은 없었으나 내인들의 소개로 민간 아낙네들 중에서 일 잘하는 여인으로 뽑았다고. 게다가 그들은 대개 기혼자들로 출퇴근을 했단다! 헐...궁궐에 출퇴근하며 물긷는 튼실한 아낙네가 무수리였다니. 어려서부터 내가 보아온 사극에선 젊은 궁녀들더러 죄다 무수리라고 했던 것 같은데! 결국 나의 무수리론은 고증 없이 대충 쓴 사극 대본의 폐해였던 모양이다. ㅠ.ㅠ

 

그러므로 영조에게 적잖은 출신 컴플렉스를 제공했던 어머니 숙빈 최씨가 무수리였다는 설도 잘못된 것이라고 오늘 수업을 맡은 교수님이 지적하셨다. 숙빈 최씨가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게 된 이유가, 나인 시절 폐서인 된 인현왕후의 생일날 한밤중에 방에서 기도를 올리다 밤궁궐을 거닐던 왕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무수리라면 일단 퇴근을 했을 터이니 밤중에 궁궐에 있을 수가 없다는 것! 당연히 무수리 주제에 궁궐 안에 자기 방도 가질 처지가 아니었다. 혼자서 쓰는 방도 아니고 궁녀 둘이 함께 쓰는 방이 배정되는 것도 입궁 후 15년이 지나 관례를 치른 이후였으며, 단독 처소를 갖게 되는 건 입궁후 무려 25년, 35년을 지내 상궁에 올라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무수리를 비롯한 궁녀의 하인들은 궁녀 처소에서만 움직이므로 아예 왕족을 만날 일조차 없었단다. 따라서 숙빈 최씨 무수리 설 또한 극적인 신데렐라 성공 스토리를 위한 후대인들의 과장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고.

 

궁녀 처소에서 물만 긷는 하녀가 무수리였다니... 어휴. 궁녀의 역할과 임무를 배우다가 십수년도 더 이어온 나의 무수리론이 단숨에 뒤집혀 폐기될 줄이야! ㅋㅋㅋ 오늘 배운 내용으로 다시 내 역할에 그나마 잘 맞는 배역을 고른다면, 궁녀 중 가장 어린 나이에 입궁하여(4-5세) 제일 먼저 상궁이 되며, 왕의 측근에서 보필하기에 궁녀 중 가장 엘리트라는 '지밀상궁', 또는 왕 본인이나 정승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궁녀들의 수령격인 '제조상궁'이라 하고 싶으나... 나는 왕을 보필하는 자가 아니라 왕비를 보필하는 자라는 것이 문제다. 그러니 그냥 소주방 나인이 제격인가 싶기도 하고... ㅋㅋㅋ 어쨌든 이로써 그간 나는 무수리가 아니었으며 무수리가 될 수도 없었음이 드러났다. 왕비마마의 조석 수라를 주로 담당하고 간간이 세탁과 청소, 가마 수행, 의녀 놀이, 심지어 손톱발톱까지 깎아드리는 전천후 소임을 맡고 있지만 결정적으로 출퇴근직이 아니지 않은가! ^^;; 오늘은 재미난 역사공부와 더불어 놀라운 깨달음까지 얻었으니 특히나 일석이조의 수업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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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투덜일기 2013. 1. 4. 18:09

새해들어 과연 마무리를 잘 할 수 있을까 궁금해하며 시작한 일이 하나 있다. 자원봉사 따위와는  완전 담쌓고 살아온 사람이지만, 궁궐 청소 같은 일은 해보고 싶다는 바람에서 비롯된 모종의 기획이라면 기획. 궁궐과 문화재 지킴이를 모집하는 단체가 꽤 여럿인 모양인데, 여기저기 기웃대다 한 군데서 마침 연말에 모집기간임을 극적으로 발견하고 마감일 하루 전에 허겁지겁 신청했다. 00명 모집에다 선착순 마감이라고 적혀있어서, 안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름 조마조마했다. 돌이켜보니 이 얼마만의 '응시'인가.

 

교육대상자 발표를 보니 무려 100명. 내가 막연하게 바랐던 궁궐 전각 청소 소임과는 사뭇 다르게, 해설사 양성 교육이라서 좀 어마어마한 느낌은 있지만 궁궐과 한옥, 우리 문화재에 대해서 뭔가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아 꽤나 뿌듯하게 소정의 교육비를 냈다. 그러고는 어제 첫 강의가 있어 27년만에 찾아왔다는 강추위를 뚫고 수업을 들으러 갔다. 6시반부터 시작되는 평일 저녁에 수업을 들으러 올 수 있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이들일까 자못 궁금했다. 방학 맞은 대학생들이 좀 있을 테고 나머지는 나처럼 죄다 백수? ^^;

 

아직 어떤 이들이 모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연령비율로 보니 20대부터 60대까지 제법 골고루 분포하고 있었고 남녀 성비는 25대 75로 압도적으로 여자들이 많았다. 하기야 궁궐 해설사치고 여자 아닌 사람을 나는 입때껏 한번도 못봤다. 창덕궁도 그렇고 나는 궁궐 해설사들이 죄다 문화재청 소속 공무원이거나 계약직 직원인 줄 알았는데 다들 자원봉사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아직은 확실치 않지만 암튼, 사람들 앞에 나서야 하는 해설사로 활동하고픈 마음은 없다해도 그만큼 교육내용이 알차려니 싶어서 기대중이다. 3월까지 일주일에 세번이나 교육이 있는데 끝까지 남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것도 궁금타. 그렇다면 과연 나는 끝까지 버틸까? ㅎㅎㅎ

 

흥미로운 주제라고는 해도 강의 방식이 따분하고 지루하면 어쩌나 염려스러웠는데 세계 건축 통사를 훑어주었던 첫 강의는 퍽 재미있었다. 반사적으로 강의 내용을 공책에 열심히 필기하며(교육 끝나면 나중에 필기시험도 본다!), 구석진 자리에 앉은 걸 후회했다. 파워포인트로 비추는 스크린이 앞좌석에 가려져 주요 사진 캡션을 하나도 못 읽은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내일 수업땐 같은 구석자리라도 한 세쨋줄 정도로 노려볼 생각이다. 그럼 담배냄새 쩌는 지각생 아저씨가 옆자리로 파고드는 일도 없겠지. ㅠ.ㅠ 어젠 정말이지 수업 내용은 흥미진진한데 숨쉬기가 어려워서 죽는 줄 알았다. 얼마나 골초면 옆사람한테까지 그토록 호흡곤란을 일으킬까나. 한껏 몸을 틀어 앉아 수업 내내 내가 스카프로 입과 코를 가리고 있었던 걸 옆자리 그 골초 아저씨도 눈치챘을까? 생김새도 못봤으니 미리 알아서 피할 순 없을 테고, 무조건 중노년의 아저씨 주변엔 앉지 않겠다고 첫날 수업 한번으로 결심이 섰다.

 

공부는 나와 맞지 않는다고 진즉 깨달았으면서도 또 뭔가를 배운다고 생각하니 설레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어제 수업에서 인류는 사냥과 채집으로 생존하던 본능이 남아 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역마살, 노마드 가질이 있어 여행을 좋아하며, 어딜 가든 현지에서 뭘 꼭 사오는 것도 채집 본능이라고 설명하던데, 공부 싫어하면서도 배움에 대한 선망을 버리지 못하는 건 무슨 본능일까 문득 궁금했다. 학이시습지면 불역여호아라는 공자님 말씀에 그리 깊이 세뇌된 건 아닐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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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그믐날 써놓은 일기대로 새해 첫날엔 그간 계속 내린 눈을 고스란히 쓰고 있는 차에 눈도 치우고 집앞 계단에 얼어붙은 얼음도 삽으로 팍팍 찍어 깨뜨렸다. 뭔가 세상에(최소한 아래층 포함 이 집에 사는 몇 안되는 식구들에겐;;) 도움이 된 일을 한 것 같은 뿌듯함 속에 들어와 특별히 맛있게 커피를 만들어 마셨다. 얼마 간의 비질, 삽질, 판때기질(?)로 오늘치 운동량을 채울 수 있을까말까 알량하게 계산도 하고... 물론 그림일기 용 사진도 찍었다. ^^v

 

 

 

겨울마다 차에 쌓인 눈을 치울 때 쓰는 물건은 흔히들 책상에 올려놓고 쓰는 초록색 고무판때기다. '판때기질'이라 함은 그러니까 그 초록색 고무판으로 까치발을 들어가며 차 지붕에 있는 눈까지 밀어내고 퍼버리는 노동이다. 그러나 주말엔 날씨가 풀리면서 진눈깨비가 내려서 유리창엔 온통 얼음이 들러붙어있어 말끔하게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차문도 얼어붙어 열려면 잡아 뜯어야하게 생겼으나, 어차피 토요일까진 탈 일 없으니 패스~

 

후련한 마음으로 들어와 있는데, 저녁먹고 나니 또 다시 온 동네 비질 소리가 들려왔다. 창밖으로 내다보니 눈이 또 내렸다. ㅠ.ㅜ 서울 적설량은 3.1cm. 한숨 쉬며 다시 내려가 마당과 계단에 쌓인 눈은 다시 처치했으되, 차를 덮은 눈은 그냥 냅두고 들어왔다. 밤새 또 내릴 지 몰라.

 

올 겨울 들어선 거의 사흘꼴로 눈이 내리는 느낌이다. 눈이 많이 오면 풍년이 든다지만 작작 좀 내리시지...

 

말하자면 이건 그러니깐  밀렸다 쓰는 '어제 일기'다. 핑계라면 어젯밤에 다시 내린 눈 때문에 김이 샜다는 사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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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31일

투덜일기 2012. 12. 31. 23:17

2012년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포스팅으로 마무리하면 참 좋은 날이겠으나, 게으름뱅이는 한해 마무리도 꼭 새해로 넘겨서 하는 버릇이 있는 고로 그냥 로그인 한 김에 몇 자 적고 끝내련다.

 

잦은 눈 때문에 집앞 계단과 마당이 온통 얼어붙어 왕비마마한테는 절대 출입금지를 명해놓았으되, 나까지 그럴 순 없었다. 우체국도 가야하고 눈을 찔러대는 머리칼도 좀 잘라야하고 진짜 설날은 아니지만 내일 떡만두국이라도 끓여먹으려면 간단히 장도 봐야하고...

 

동네 간이 우편취급소를 향해 종종걸음을 치다 길모퉁이를 돈 순간 문득 눈이 부셨다. 한겨울 노을 속 태양에도 눈이 부실 수 있다는 사실이 왜 그리도 신선하던지. 그러고 보니 2012년에 마지막으로 보는 태양이로구나. 문득 감상이 돋아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냈다. 장갑을 빼자마자 순식간에 바싹 얼어붙는 듯한 손가락을 얼른 놀려 얻은 올해의 마지막 해 사진.

 

머리 위로 지나는 고가도로와 지저분한 전깃줄과 전봇대와 앙상한 가로수 사이로 보이는 햇빛은 당연히 사진보다 강렬하고 아름다웠다.

 

한시간 45분만에 눈길을 뚜벅뚜벅(사실은 뒤뚱뒤뚱;;) 걸어 목표한 일  세가지를 모두 마치고 산뜻한 기분으로 돌아오며 부디 새해엔 덜 방황하고 덜 망설이고 덜 좌절하기를 빌었다. 사소한 일이든 큰 일이든 제발이지 마음 먹은 건 막 일주일씩 한달씩 미루고 그러지 말기를...

 

하루하루 아무 기억도 흔적도 없이 보낸 날들 가운데 그래도 오늘 12월 31일엔 우체국에도 갔고 머리칼도 잘랐고 배달아저씨의 도움 없이 낑낑 대며 홀로 식량도 날랐고, 아주 간만에 그림일기도 썼노라고 기억하고 싶었다. ^^;

 

 

이왕이면 그림일기의 형식을 끝까지 빌어서;;

오늘의 날씨: 맑고 추움

오늘의 기분: 홀가분

내일의 할 일: 떡만두국 끓여먹기 & 차에 쌓인 눈 치우기

 

이러면 새해 첫날인 내일도 그림 일기 하나 올라오지 않을까나.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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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는 있는가

투덜일기 2012. 12. 27. 16:22

열살짜리 조카랑 얼마전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놓고 나름 심도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어쩌다가 종교 이야기가 나왔는지 잘 모르겠는데, 녀석이 뜬금없이 고모는 왜 옛날엔 할머니 따라서 절에 다녔는데 이제는 신을 안믿느냐고 물었다.

 

그땐 고모도 어쩌면 신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절에 가면 부처님한테 기도하고, 성당이나 교회에 가면 또 거기서도 신한테 기도를 했었는데 곰곰이 따져보니 없는 것 같더라고 뭉뚱그려 대답했다. 신은 그냥 약한 인간이 기댈 존재가 필요해서 만들어낸 것 같다고. 그 밖에 몇 가지 더 알량한 이유를 들어 자기변명 비슷하게 설명을 했던 것 같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녀석은 선선히 자기도 신은 없는 것 같다고 하더니만, "그런데 산타클로스는 확실히 있는 것 같아"라며 내게 동조를 비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작년부터였나 이미 산타클로스는 없다는 친구들의 폭로에 노출되어 퍽이나 혼란을 겪었음에도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아직은 믿고싶어하는 눈치였다. 작년에도 산타가 정말로 없느냐는 아이의 물음에, "없다고 믿으면 절대 없겠지. 너 믿고 싶은 대로 해."라며 얼렁뚱땅  넘어갔는데, 때가 때이니 만큼 또 다시 고민이 되는 모양이었다. 녀석이 3학년이나 돼서도 아직 산타클로스가 있다는 쪽에 더 무게를 두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첫째, 엄청나게 말을 안들으면  정말로 산타의 선물을 받지 못하더라. - 제 누나와 본인이 그 좋은 예 (오래 전 허구한 날 쌈박질을 하던 남매 모두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지 못한 해가 있었다. ㅋㅋㅋ)

 

둘째, 자기가 다섯 살 때 산타할아버지한테 자기는 장난감 필요없고 꼭 벙어리 장갑을 받게 해달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애들이 놀려서 그냥 말로만 레고 받고 싶다고 했더니만, 진짜로 산타할아버지가 벙어리장갑이랑 조그만 레고 장난감을 같이 선물로 두고 갔었다. (벙어리장갑을 받고 싶은 건 정말로 '자기만 아는 비밀'이었다나 ㅋㅋㅋ)

 

셋째, 작년 크리스마스에는 정말로 갖고 싶은 선물이 하나도 없고(헐, 장난감 과잉의 시대!) 산타가 있는지 없는지도 고민이 많아서 산타할아버지 마음대로 선물을 주려면 주고 말라면 말라고 생각했더니....... ㅋㅋㅋ 5만원짜리를 두고 가셨단다. 차라리 산타가 용돈을 주면 나중에 마음에 드는 선물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자기도 한 적 있었다고! (크핫;; 니네 엄마아빠도 참!!!)

 

 

그럼에도 산타는 없고, 크리스마스 선물은 엄마아빠가 주는 것에 불과하다는 친구들의 주장에 경도되는 이유 역시 존재했다.

첫째, 작년에 '말도 잘 안듣고 못되고 만날 떼를 쓰는' 사촌동생 OO이는 무려 30만원이나 하는 3D닌텐도에다가 심지어 게임팩까지 6개나 한꺼번에 선물로 받았다. 말도 안 된다. 산타 할아버지가 전세계에 있는 어린이한테 선물을 줘야하는데 한 사람한테만 그렇게 비싼 선물을 줄 리가 없다. (오 녀석, 기특하게도 자본과 평등의 문제도 고민하는구나;;)

 

둘째, 자기 친구 @@이가 밤에 몰래 아빠가 트리 밑에 선물 두는 걸 숨어서 봤다. 선물도 @@이가 받고 싶은 게 아니었다.

 

 

산타의 존재를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가짓수도 더 많고 본인의 경험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결론은 산타가 있다는 쪽으로 내려진 모양이었다. 다만 떨칠 수 없는 의구심을 내게 설명해달라는 듯했다. 그렇다면 내 역할은 열심히 '구라'를 쳐서 아이의 동심을 한 해 더 지켜주는 것이 옳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설명은 어렵지 않았다. 녀석의 사촌동생 OO이가 작년에 받은 선물은 산타할아버지가 놓고 간 게 아닐 거다. 정말로 그렇게 말도 안듣고 떼를 쓴 아이였다면 선물을 받을 리도 없고, 정말로 산타할아버지는 공평하게 선물을 나눠줘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비싼 선물은 줄 수 없으니까. 그런데 OO이도 아마 선물 받을 욕심에 12월 들어서는 착한 일을 좀 하지 않았을까? 녀석은 좀 생각해보더니, 진짜 까불기는 하는데 자기 말을 잘 들을 때도 있다면서 스스로 그럴듯한 답을 생각해냈다. OO이가 받고싶은 선물은 너무 비싸서 산타할아버지가 준비할 수 없으니까, OO이네 엄마한테 텔레파시를 보내서 사주라고 했나보다! 그랬더니 이모가 돈이 너무 많아서 게임팩까지 막 사준 거라고.... +_+  (이 설명은 놀랍게도 산타가 아니라 부모에게 값비싼 크리스마스 선물을 대신 받은 수많은 아이들의 문제까지 해결해준다!)

 

두번째 친구 @@이의 경우도 산타를 의심하고 숨어서 지켜본 아이니까 산타할아버지가 찾아올 리 없고, 그걸 안쓰러워 한 아빠가 대신 선물을 준비했으니 엉뚱한 걸 받게 됐을 거라고.... (거짓말도 자꾸 하면 는다 끙;;)

 

 

어쨌든 녀석은 올 크리스마스에 무슨 선물을 받게 될지 고민이 많았다. 정말로 받고 싶은 선물은 3D닌텐도랑 게임팩인데 그건 너무 비싸서 산타할아버지가 사줄 수 없고, 산타가 엄마아빠한테 텔레파시를 보낸다고 해도 자기네 집은 절대 안 사줄 것이라는 점이 함정.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기다려보겠다고 했다. ^^;

 

나는 과연 녀석이 산타에게 무슨 선물을 받을지 자못 궁금했는데 어제 가보니 새까만 재규어 인형(!) 한마리가 트리 아래 누워있었다. 열살인데도 아직까지 복실복실 봉제인형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녀석임은 알지만.... 산타할아버지가 알고 보낸 선물인지 아닌지 원 알 수가 있나. 침대에서 데리고 노는 게 아니라 인형을 트리 밑에 며칠째 얌전히 놓아둔 걸로 보아, 올해로 드디어 산타의 존재에 대해서 산통이 깨진 건 아닌지 겁이 나서 아직 조카와 추후 대화는 하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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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비닐

투덜일기 2012. 12. 21. 16:32

선거날로 부러 시간을 잡아 만나기로 한 날, 친구가 초등학교 1학년인 아들 녀석을 데리고 나왔다. 자기도 엄마 친구 만나고 싶다며 따라나섰다나. 닌텐도를 손에 쥐여주었어도 당연히 껌딱지 붙이고선 왕수다를 이어나가기가 어려웠고, 우린 또 다른 당근 수법을 떠올렸다. 서점에 가서 마음에 드는 책을 하나 사주기로 한 거였다. 장차 과학자가 되고 싶다는 소년은 내가 좀 아는 체를 했더니만 신이 나서 지구와 인류의 역사를 읊어댔다. 그래서 이번엔 세계사책을 읽고 싶다나. 헛, 고놈 맹랑하고 기특할세.

 

우리가 만난 쇼핑몰엔 북스리브로가 있었기에 그리로 내려갔는데 문제는 웬만한 아동서가 대개 책 비닐에 꽁꽁 싸여 있어 펴볼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아니, 내용을 읽어보고 확인을 해야 살 게 아닌가! 버럭 부아가 치밀었지만 소심증이 먼저 동하여 일단은 비닐이 벗겨져 있는 책부터 고르기 시작했다. 대형서점에 가면 어린이 코너 한구석에 마련된 소파나 놀이방 같은 데서 책을 좀 읽어보고 고르는 걸 당연하게 여겼던 소년은 일단 그 서점이 워낙 협소하고 열악하여 그런 공간이 없다는데 급실망을 하였고, 대부분 대여섯권 짜리 시리즈로 나온 두툼한 세계사책을 비닐 벗겨진 걸로 한두 권만 얼핏 보고 고르는 상황을 영 못마땅해 했다.

 

친구와 내가 대강 책을 골라 추천해주고 강권하듯 계산을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아이가 좀 더 살펴보고 싶은 다른 분야의 책들 역시 죄다 비닐에 싸여 있다는 것이 함정! 그제야 쌈닭 정신이 발동한 나는 직원에게 따지기에 이르렀다. 만화는 원래가 펴볼 수가 없다는 대답. 근데 왜 만화가 아닌 과학서나 동화책도 비닐에 싸여있는지? 그런 책들은 자기한테 가져오면 비닐을 벗겨주겠단다. 뭐라? 우리는 비닐도 못 벗기는 하등동물인가?

 

사정을 이야기하며 다시 읽고 픈 책을 골라보라고 달랬지만 결국 아이는 책 비닐의 난관 속에서 훌쩍훌쩍 울음을 터뜨렸다. 고르기 전에 책도 못 보게 하면서 무슨 서점이 이래요? 그러게나 말이다. 아이 물음에 나도 말문이 막혔다. 게다가 요즘 아이들 책은 왜 몽땅 만화책 일색인지?  서점에서 절대 못 펼쳐보게 해서 일단 팔고보자는 상술 때문에 만화책만 진열해 놓은 건가? 친구도 아이 책은 알음알음 주변에서 추천해준 책을 온라인 서점에서 앞장 정도 읽어보고 주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서점에 와선 책구경 겸 놀다 가곤 했던 터라 난감하다고 했다.

 

그 서점이 곧 망하려고 그러는 것인지, 아동서 시장마저도 워낙 불황이라 다른 대형서점에서도 그렇게 죄다 비닐로 책을 사수하고 있는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쓸데없는 수천억대 삽질에 예산 쓰느라 도서관 예산은 형편없이 삭감되어, 이미 올 하반기엔 전혀 신간 구매를 못하고 있는 도서관이 태반이라고 들었다. 헌데 도서관엔 새책이 없고, 서점에서도 책을 못 펼쳐보게 하면 도대체 아이들은 책을 어디에서 읽으라는 건지? 부자 부모만 책을 턱턱 사주라고? 아니지, 무한경쟁 교육에선 어차피 책 읽을 시간도 없으니 그저 공부, 공부, 사교육과 게임에만 심취하라고?

 

만화책과 잡지, 사진집, 그리고 19금 도서만 비닐에 싸서 파는 줄 알았던 내가 무지몽매했던 것인가? 궁금해서라도 다음에 다른 서점에 가면 꼭 살펴봐야겠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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