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치고 교무실에 가는 걸 즐기는 사람이 있을까? 내 생각으론 심지어 교사라고 해도 교무실이란 공간을 사랑하게 되진 않을 것 같다. 교사에게 교무실은 곧 직장인에게 사무실과 같을 테니까. 엄청 좋아하는 일을 하는 회사가 아니고서야 사무실이 뭐 그리 좋겠나. 게다가 사무실처럼 칸막이가 있다고는 해도 학교 교무실처럼 무방비로 노출된 공간이 또 있을라고. 마지막으로 내가 교무실이란 공간을 속속들이 경험한 건 오래 전 교생실습 때였는데, 무슨 실습실을 임시로 쓰던 교생실과 달리 교무실에 들어갈라치면 한숨부터 나왔다. 매일아침 담당과목 선생님 자리 옆에 의자 놓고 참석하던 교무회의도 멀미나게 지루했던 것 같고...
암튼 조카 출국 때문에 나의 모교이기도 한 중학교 교무실에 전격 방문할 일이 있었다. 그것도 출국 당일 공항가는 길에, 현장학습 확인서를 제출하려고. ㅠ.ㅠ 계속 기말고사가 있었고, 시험 끝나자마자 곧장 며칠 수련회를 다녀왔고 수련회 바로 다음날이 출국일이라, 늦어도 사흘 전에는 제출하라고 적혀 있는 확인서와 비행기표 사본을 미리 제출하지 못한 정황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관련서류를 담임샘의 재촉을 받고서야(전날 저녁과 당일 아침에 담임샘이 절대 그냥 가면 안된다고 신신당부하는 전화가 조카에게 걸려왔단다) 공항 가는 길에 내밀러 가는 나의 입장은 몹시 민망했다. 교무실에 같이 들어가 서류 늦어진 상황을 나더러 설명하라던 조카는 아예 자기는 차에 있을 테니 고모가 내고 오라고 슬쩍 떠넘기는데, 그럴 수야 없지!
뭔가 잘못해서 교무실로 불려온 학생 같은 기분으로 조카 곁으로 슬며시 다가가 담임샘한테 우물쭈물 인사와 변명과 사죄를 하는데 아뿔사, 바로 옆자리가 조카의 1학년때 담임샘이었다. ㅈㅁ이 어머니 오셨으면, 자기도 할 말이 많다며 어머니도 좀 혼나셔야겠다고 나서는 게 아닌가. ㅠ.ㅠ 꾸벅 인사하며 애엄마가 아니라 고모라고 했더니 'OO동 고모'냐고 아는 척까지! 언젠가 여기도 썼지만 조카의 1학년때 담임샘은 무려 30년전 내가 그 학교 다닐 때 막 부임해 온 신참 한문샘이었다. 모범생 코스프레를 하던 까마득한 옛 기억이 발현되었는지 제발이 저려서 얼떨결에 졸업생임을 밝혔는데, 하핫 그나마 그게 신의 한수였던 것 같다. 지각대장에 벌점대장인 조카의 근태에 대하여 한말쌈 길게 하시려던 것 같더니만, 내가 30년전 제자라는 걸 밝힌 순간 이내 어디론가 모습을 감추셨다! ㅎㅎㅎ
아무튼 현 담임샘께는 해외의 경우도 현장학습은 공휴일 포함 7일밖에 인정되지 않는데, 그토록 장기간 학교를 비우는 마당에 어머님이 출국 전에 전화 한통 미리 하지 않았다고 대신 혼도 좀 나고(내 생각에도 그건 좀 혼날 상황이라고 판단; 암말 못했다), 거듭 사죄하는 비굴모드로 일관한 뒤 진땀을 닦으며 잠시 후 교무실을 나올 수 있었다. 교장샘 책상이 요새도 교무실 한 가운데 있을 줄이야! 그리고 하필 그 앞 회의탁자에서 조카에게 각오와 다짐을 적게 할 줄이야! -_-;
잔뜩 긴장해서 제대로 둘러보지도 못했지만, 교무실은 그 옛날과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 듯했다. 좁아터진 교사용 책상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답답한 느낌까지도... 재단에 돈 많은 학교인데 참 투자를 안하나보다.
차로 돌아와, 제대로 말 못하고 왜 부끄러운 척 했느냐고 구박하는 조카에게 내가 대꾸했다. 고모는 어렸을 때 교무실 들락거리는 거 싫어서, '서기' 하라고 하면 절대 안한 사람이란다. 그리고 교무실은 말이지, 어른들도 쉬운 공간이 아니거든! 정식 학부형도 아니고 학부모 대신 찾아간 고모는 더더욱 민망하지 않겠니?!
부모 노릇은 정말 어려운 일이란 걸 항상 느끼는데, 그 가운데 학부형 노릇은 더 난감하다는 걸 딱 5분만에 실감한 경험이라 기록으로 남겨야겠다 생각했다. 다시는 교무실에 갈 일이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