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덜일기'에 해당되는 글 503건

  1. 2014.03.31 3월 31일 11
  2. 2014.03.28 호박이 뭐 어디가 어때서 1
  3. 2014.03.16 안산
  4. 2014.03.03 아래층 남녀와 하얀 개 2
  5. 2014.02.24 흰머리 1
  6. 2014.02.19 입시지옥 2
  7. 2014.02.14 일주일이...
  8. 2014.02.12 기록 2
  9. 2014.02.11 종돈과 입춘 부적
  10. 2014.02.05 이산가족 4

3월 31일

투덜일기 2014. 3. 31. 15:45

연말에 한해를 돌아볼 때 3월은 아마 '아무것도' 하지 않은 달로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대체 한 가지도 '마무리'를 한 게 없는 듯. ㅠ.ㅠ

암튼 마음만 급한 3월 말일. 게으른 나를 조롱하듯 만개한 집앞 벚꽃은 벌써 잎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전국적으로 오후부터 비가 내린다던 그저께. 전날만 해도 가지마다 꽃이 서너 개나 벌어졌을까말까 다 피려면 며칠 걸리겠다 여겼지만 밤새 홀라당 다 핀 걸 보고 안타까워했다. 비와서 하루만에 떨어지는 거 아냐! 그러면서 안타까워 비오기 전에 베란다 문 열고 후딱 찍어둔 사진. 

3월 29일

 

그러나 다행히도 이슬비가 내리는둥 마는둥 빗줄기가 가늘었던 덕분인지, 벚꽃은 무사했고  하루하루 더 예뻐졌다. 어제도 예뻤지만 오늘이 피크인듯, 벌써 하나 둘 꽃잎이 날리기 시작.

3월 31일

 

다 피었다고 여겼어도 이틀 전 사진엔 덜 핀 봉오리들이 꽤 많았다는 걸 이제야 비교하며 깨달았다. 송이송이 탐스럽고 예쁘다...  누가 하라는 것도 아닌데 해마다 벚꽃 다 핀 날짜를 왜 기록하고 있나 모르겠지만 집앞 벚꽃은 암튼 다른 해보다 보름이나 일찍 피었다. 날씨가 너무 더운 거다. 진짜로 며칠 전부터 반팔 입고 지내는데 안 춥다. 세월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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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을 볼 때 지구를 위해선 푸드 마일리지가 적은, 이른바 '로컬 푸드'라는 걸 골라야 한다는 건 알지만 실천에 옮기기란 쉽지가 않다. 일단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걸 어쩌라고! 그냥 '국내산'이라고만 적혀있지 정확한 재배지까지 표기된 채소도 많지 않지만, 포항초, 제주 무, 제주 당근, 제주 감자... 같은 건 먼데서 왔어도 사고봐야 되는 걸 뭐. 한단 천원짜리 시금치와 그 세배 가격인 포항초 시금치는 맛이 워낙 달라서 비싸도 포항초나 섬초를 사먹게 된다. 게다가 난 또 시커먼 제주 흙이 묻어 있는 당근이나 감자를 보면 또 엄청 맛있을 것 같아서, 혹시 '파주'나 '강원도' 꼬리표를 단 다른 제품이 있더라도 제주도 먹거리를 사고 싶은 마음이 든다. 비행기나 배를 타고 왔을 텐데... 하는 생각에 좀 찔려하면서도.

 

단호박도 마찬가지다. 제철음식만 먹고 산다면, 굳이 태평양 건너 날아온 뉴질랜드산 단호박을 사지 않아야 하는데 단호박을 워낙 좋아한 나머지 통 그냥 지나치질 못한다. 요리랄 것도 없이 쪄서 치즈랑 아몬드만 얹어 먹어도 얼마나 훌륭한 맛이 나는데 ㅠ.ㅠ (물론 쪄서 그냥 먹어도 좋다.) 게다가 단호박을 찌기 전에 긁어낸 호박씨도 좀 말렸다가 까먹으면 얼마나 맛있다규!  일일이 껍질을 까기가 좀 귀찮기는 하지만, 어려서부터 앞니로 호박씨를 오독오독 까먹는 재주를 익혀둔 덕분에 크게 성가실 것도 없다. 씨가 좀 덜 여물었을 땐 아쉬워하면서 그냥 버리지만, 단호박을 딱 쪼갰는데 튼실한 씨앗이 다닥다닥 매달려 있으면 말렸다가 밤참으로 까먹을 생각에 흐흐흐 므흣해진다.

 

혹 어려서 부르던 이런 노래를 기억하는가? (심지어 학교에서 배웠다!)

'사과 같은 내 얼굴 예쁘기도 하지요, 눈도 반짝 코도 반짝 입도 반짝반짝'

'호박 같은 내 얼굴 미웁기도 하지요, 눈도 삐뚤 코도 삐뚤 입도 삐뚤삐뚤'

'오이 같은 내얼굴  길기도 하지요, 눈도 길쭉 코도 길쭉 입도 길쭉길쭉'

(미모 지상주의를 부추기는 이런 노래는 완전히 사라졌기를 빈다 -_-; 하긴 조카들이 부르는 거 통 못들어봤으니 다행)

그런데 나는 이 노래를 배우면서도 호박이 삐뚤삐둘 못생겼다는 사실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눈엔 호박 예쁜데? 게다가 호박꽃도 못생긴 꽃의 대명사로 통하는데, 내 눈엔 샛노랗고 통통한 것이 이쁘기만 한 걸! 대체 왜? 비슷하게 생긴 나리꽃이나 수선화보다 못할 게 뭔가!

 

할아버지댁에 살 때 마당에서 애호박과 늙은 호박, 화초 호박을 종류별로 키웠기 때문에 내가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데, 탐스러운 샛노란 꽃이 피었다가 꽃이 시들면서 그 끝에 콩알만하게 열매가 맺혀서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모른다. 노끈을 매달아 덩굴손이 뻗어나가 자라도록 기른 애호박은 적당히 크면 뚝 따서 된장찌개도 끓이고, 새우젓 넣고 볶아도 먹고, 송송 썰어 칼국수나 수제비도 해먹었는데, 요즘 마트에서 보는 인큐베이터 애호박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단맛이 났었다. 늙은 호박은 어린 내가 들 수도 없을 만큼 크게 자란 걸 광에 쌓아두었다가 '한 놈씩 잡아서' 호박죽도 쑤고, 호박고지로 만들어 시루떡에도 넣고... 또 뭘 해먹었더라.

 

하여간 할머니가 늙은호박에서 긁어낸 굵은 호박씨도 잔뜩 말려놓았다가 간식으로 오독오독 까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어렸을 땐 '뒷구멍으로 호박씨 깐다'는 말이 생긴 이유도 하도 맛있어서 몰래 먹는다는 의미로 이해될 정도였다. 진짜로, 이 속담의 유래는 뭘까나. 내숭떨고 앞뒤가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 말일텐데 왜 하필 호박씨? 앞니로도 까기가 어려운데, 뒷구멍으로? ㅋㅋㅋ

 

하여간 오늘 저녁에도 단호박을 쪘는데 호박 자체는 단단하고 맛이 있었느나 안타깝게도 씨가 덜 여물어 그냥 긁어버려야했다. 눌러보니 죄다 쭉정이. 단단하고 맛있는 단호박을 고르는 눈은 이제 얼추 익혔는데, 아직도 겉으로 봐서 씨앗의 여물기까지는 장담할 수가 없다. 색이 진하게 잘 익었어도 씨앗이 덜 큰 이유는 뭐람. 그나마도 바다건너 오느라 탄소마일리지 팍팍 늘렸을 뉴질랜드 단호박은 다른 수입 농산물에 비해 거부감이 덜하다. 나라에 청정지역이 많다고 그곳 농부들이 농장에서 키우는 수출용 호박에 농약이니 비료니 안 쳤을 리 없지만 그냥 나의 편견. 뉴질랜드 농부들은 어쩐지 먹거리에 심한 장난까지 치지는 않겠지...

 

나무샘 블로그에서 강요배의 호박꽃 그림을 본 순간 포스팅 거리가 생각나서 시작은 했는데 결론은 나의 식탐으로 끝나누만. 째뜬 오늘 밤참은 찐 단호박이고, 호박과 호박꽃은 언제 봐도 예쁘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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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

투덜일기 2014. 3. 16. 17:00

내가 올 들어 조금씩 산책겸 올라가보기 시작한 동네 뒷산은 부르는 산은 엄밀히 집 앞에 있으니 '앞산'이고 버젓이 이름도 두 개나 있다. 안산 또는 무악산. 이름의 유래는 여러번 들었는데 또 홀라당 다 까먹었다. '안산'이라는 말은 흔히 풍수지리에서 쓰는 말이니 그와 관련이 있으려니... 검색해보면 금세 나오겠지만 귀찮아서 패스~.

 

하여간 남들은 버스타고 지하철 타고 부러 '등산'을 하러 오기도 한다는 얘기에 괜한 자극을 받아, 언젠가는 나도 정상에 오를 일이 있겠지 여기며 힘 닿는대로 마음 내키는대로 중간까지만 갔다가(정상까지 998미터 남았다는 표지판 앞에서) 돌아오기를 두달여. 그러다 어제 전격적으로 욕심을 내 봉수대가 있다는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집안에서 볼 땐 햇살이 따사롭고 화창해보였으나 밖에 나가보니 수시로 바람이 쌩쌩. 혹시 추울까 든든하게 입고나갔기에망정이지 안그랬으면 추워서 10분만에 귀가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산 중턱 팔각정 앞 개울에서 두꺼비 발견! 겨울잠을 자고 일어난지 얼마 안 되어 그런지 기운도 없고 살가죽이 쪼글쪼글 느릿느릿 걸어다니고 있었다. 차가운 개울과 황량한 풀숲에서 녀석이 뭘 먹을 게 있으려나... 

숨을 헐떡대며 오르다 보면 후끈 덥다가 또 바람계곡으로 들어서면 춥다가 종잡을 수 없는 날씨에 콧물을 훌쩍이며 올라가려니 어디선가 내 뒤에서 홀연히 나타나 쏜살같이 앞으로 차고 나가는 외국인 미녀. ㅠ.ㅠ 내가 입은 오리털 조끼가 무색하게 그녀는 반팔에 반바지 차림이었다. 허거걱...  도촬이 미안하기도 해서 머뭇거렸지만 어찌나 빠른지 순식간에 저 앞으로... ㅋㅋ

산꼭대기에는 방송 중계용인듯 철탑도 있고, 헬기장도 있고, 조선시대에 평안도부터 남산까지 이어졌다는 봉수대가 복원되어 있었다. 계단 아래쪽 기단부는 오래된 느낌이 나는데 봉수대 돌은 너무 하얗고 새것이라 어쩐지 졸속 복원의 냄새가 풀풀... -_-; 남산에 복원해 놓은 세 개짜리 봉수대랑 모양이 똑같은지 잘 어울리는지 아닌지 모르겠다.

 

째뜬 중요한 건 내가 꼭대기에 올랐다는 것. 집에서부터 1시간 정도 걸린 듯하다. 두꺼비 구경에 몇분이나 허비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꼭대기까지 오르는 길이 하도 여러 갈래이고 여러 동네에서 올라갈 수 있도록 길을 닦아 놓아 몇번 익숙해지면 가장 수월한 길, 또는 가장 험난한 길을 골라 선택할 수도 있겠다. 중간중간 얼었던 길이 녹아 진창도 있고 등산화 없이는 꽤나 미끄러울 법한 바위 구간도 있었는데, 음마야, 플랫슈즈에 반바지 입고 남친이랑 손잡고 가뿐하게 올라온 커플도 발견했다. ㅠ.ㅠ

 

나 같은 주민들에겐 동네 뒷산 또는 앞산이고

어떤 이들에겐 등산 스틱까지 찍고 올라가야 하는 서울 근교의 만만한 등산코스이고, 일부 커플들에게는 그냥 데이트 산책 코스라는 얘기. ㅎㅎ

 

 

 왼쪽 사진에서 저 멀리 아득하게 보이는 산이 바로 북한산. 가운데 사진에선 인왕산 능선을 따라 한양 성곽도 보인다. 오른쪽 사진 중앙에 서 있는 게 남산. 서쪽으로는 여의도와 한강도 눈에 들어오는데 역광인데다 미세먼지 탓에 온통 뿌옇게 찍혔다. 등산의 묘미 중 하나가 정상에 올라 산 아래를 굽어보는 거라고 하던데, 그 잠깐 좋자고 꾸역꾸역 낑낑대며 꼭대기까지 올라가야할 '의미'를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고, 정상을 '정복'한다는식으로 말하는 심리도 통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쨌든 어제는 뭔가 '숙제'를 다 마친 기분이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얼어붙은 방죽 1월 모습 얼음 풀리고 봄이 오는 방죽, 어제

게다가 눈 쌓여 꽁꽁 얼어붙었던 겨울 산길부터 조금씩 변해가는 계절의 변화를 비교해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앞으로 곧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날 봄과 신록이 우거질 여름도 기대중. 누가 산에 가자고 하면 그렇게 싫다고 미쳤냐고 펄쩍 뛰던 내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운동삼아 산엘 오르게 되다니 참... 느낌이 묘하다. 나이가 들면 원래 산이 좋아지는 건지... 어느 산에나 득시글거리는 중장년 등반객들을 보면 그런 것도 같아서 좀 씁쓸.  

 

 

올라갈 땐 대부분 땅바닥만 보며 헉헉대느라 놓쳤는데 내려오다 신기한 나무를 발견했다. 군데군데 동글동글 붙어있는 건 이끼인가? 암튼 솔잎이 뭉쳐진 듯한 이끼무더기 끝에 방울방울 물기가 맺혔다. 뭔가 나무도 이끼도 열심히 봄을 준비하고 있는 느낌.

 

오후들어 점점 밀려든 미세먼지 때문에 기분을 좀 잡치긴 했어도, 약간 팍팍한 느낌의 장단지와 허벅지가 엄청 건강해진 듯한 착각을 안겨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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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 생각만 하며 이불 속에서 밍기적거리는데 딸깍. 현관 자물쇠 따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엄니 벌써 나갔다 들어오시누만. 점심 때나 되서야 일어나는 게 민망해 얼른 이불을 벗어났다. 점심상 차려바치려면 서둘러야겠군. 근데 현관 자물쇠가 열리고도 도무지 노친네 올라오시는 소리가 안들렸다. 뭐지? 꾸물꾸물 우편물 챙기시나? 어랏, 현관문 앞에 보여야할 그림자가 사라졌다. 우편물도 아니고 뭐람? 마당 쓰는 소리도 안들리는데...

 

오랜 정적에 호기심을 못 이기고 베란다 창으로 내다보니 귀가하던 노친네가 다시 집앞 계단 아래 골목에 서서 야쿠르트 아줌마랑 소곤대고 있었다. 뭐래... 또 우유 바꿔먹으라고, 혹은 야채주스 배달해 먹으라고 설득당하시는 중인가? 암튼 왜 안올라오나 알았으니 부리나케 우동을 끓였다. 새벽에 밤참을 대충 먹은 탓인지 일어나 돌아다니자 마자 돌연 허기가 느껴졌다. 설마 우동 다 끓이기 전에는 올라오시겠지...

 

그릇에 우동을 담아 점심상 차리기를 마쳤는데도 노친네 기척이 없어 공복으로 인한 분노가 버럭 치밀려는 찰나,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계단을 올라오느라 숨을 헐떡거리던 노친네는 숨도 채 고르기 전에 방금 들은 정보를 내게 쏟아놓았다. 하도 드나드는 기색이 안 보여, 남자는 밤근무를 하는 사람이고 아마도 여자는 지방에서 오가는 젊은 주말부부일 거라고 나름대로 우리가 상상했던 아래층 남녀에 대한 정보였다. 나는 아직 한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여자는 '조기 언덕 너머 아랫집'에 사는 아무개네 딸이고, 남자는 그 여자의 남자친구인 모양이다. 안 그래도 말 많고 참견 많은 야쿠르트 아줌마는 동네 창피하게 어떻게 애인을 몰래 이웃에 불러들여 동거를 하느냐고, 잔뜩 흉을 봤다는데(울 노친네도 맞장구를 친 눈치;;), 남자친구 자기네 동네로 이사하게 한 게 뭐 어떻다고 난리?

 

남자친구 집에 드나드는 게 무슨 동거냐, 설사 동거라 쳐도 요샌 살아보고 결혼하는게 추세인 걸 모르냐, 젊은이들 너도나도 세상 팍팍해 결혼 안하는 게 유행인데 동거라도 하면 땡큐지 뭘, 대부분 수십년씩 붙박이로 살고 있는 이웃 사정 너무 잘 안다고 오히려 흉보고 다니는 야쿠르트 아줌마가 나쁜 거다, 라고 내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자 노친네는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미 야쿠르트 아줌마가 시키는 대로(방금 여자가 개 안고 들어갔으니 확인해보라고;;) 우편물 핑계로 아래층 여자와 대면을 하고 온 듯, 노친네는 아래층 여자 얼굴이 이상하게 생겼다는 둥, 아니 마당에 매어둔 개도 건사 못하면서 집안에서 개를 또 키우면 어쩌냐는 둥 다시 구시렁거렸다. 엄밀히 아래층 남녀가 울집 노친네에게 미운털이 박힌 건 바로 그 하얀 개 때문이었다. 올케가 집에 다니러 올 때마다 귀엽다고 자지러질 만큼 예쁘게 생긴, 삽살개를 닮은 하얀 개가 작년 가을부터 다시 우리집  뒷마당에 터를 잡았는데, 아래층 남자 출퇴근이 일정하질 않은 건지 암튼 울 엄니가 볼 때마다 그 귀여운 개가 똥이 가득 깔려 발 디딜 틈도 없는 펜스 안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는 것. 며칠 째 사료와 물이 바닥 나 없을 때도 많고! 하지만 서로 얼굴을 봐야 뭐라고 한마디 할 텐데, 통 마주칠 수가 없어 노친네가 전전긍긍하는 걸 (애완견 굶기고 똥 안치워주는 건 학대라고 신고할 수 없는 거니? 냄새나게 개똥은 왜 안치워?! 뒷마당이 지네 혼자 쓰는 건가?)  보다 못해 내가 또 다시 '메모지' 신공을 발휘한 적이 있었다. 악취 문제로 괴로우니 개똥은 제발 수시로 치워주길 바란다고 적어서 문앞에 붙여놓았던 것. (차마 개 밥 잘 챙겨주라는 참견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개는 통 짖는 법도 우는 법도 없이 얌전해서 드나들며 문득 없어졌나 들여다봐야할 정도인데다 축 쳐진 귀가 생긴 건 또 얼마나 귀여운지 큰올케는 마당 있는 집에 살면 자기가 당장 데려다가 기르고 싶다고, 족보 있는 개 같다고 안타까워했었다. 잘 생긴 개를 관리 통 안 해줘서 털은 회색으로 변해 마구 엉키고... 얼마 전 겨울엔 글쎄 아래층 남녀가 직접 개털을 확 깎아놓은 적도 있었다. 깎은 털을 치우지도 않고 마당 한 구석에 수북하게 쌓아놓아 우린 눈이 온 줄 알았음. ㅠ.ㅠ 털을 깎았으면 옷이라도 입혀주지 분홍 살갗 비치게 그냥 놔뒀다고, 엄동설한에 얼어죽으면 어쩌냐고 노친네는 개 근처에 얼씬도 못하면서 나더러 개집에 담요를 더 깔아주라는 둥, 우리라도 강아지 옷을 사다 입혀줘야 되는 거 아니냐는 둥 걱정을 했었다. 하지만 나더러 어떻게 개 옷을 입히라고? 더구나 그 개 이름도 모르는데... +_+

 

아무려나 계속 그 집 개 때문에 속을 끓였던 터라, 아랫집 여자가 안고 있는 강아지를 보자마자 엄니는 "어머나, 개가 또 있네요..."라고 말했다나. 그나마 고무적인 정보는 곧 마당의 큰개를 어디론가 보낼 거라는 예고였다. 그나마 다행. 그런 인간들은 개를 키울 자격도 없다고, 개 혐오자를 자처하면서도 노친네는 한동안 또 개 걱정을 했다. 짖지도 않는 똘똘한 개가 주인 잘 못만나 생고생한다고... 그에 비하면 파랑이(조카네 개)는 엄청 호강하는 거라고.  

 

그러고는 개를 마당에 묶어놓고 거의 방치하는 주제에 또 개 훔쳐갈까봐 염려되는지 개집 앞에 CCTV는 달아놓았다고, 아래층 남자가 타고다니는 호피무늬(!) 오토바이(정확히 말하면 스쿠터다)도 그게 뭐냐고 날나리 같다고, 정화조 청소했다고 말한 지가 언제인데 가구당 분담금 만오천원 아직도 안 내놓았다고, 우편물도 왜 꼭 챙겨서 문앞에 꽂아줘야 들여가냐고, 노친네는 끊임없이 아래층 남녀를 흉봤다. 내가 보기엔 다 그들이 하얀 개를 제대로 건사 못한 잘못에서 비롯된 미운털 값이다. 그러니 하얀 개가 없어지고 나면 노친네의 미움도 사그라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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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머리

투덜일기 2014. 2. 24. 17:09

외출 직전 옷을 다 차려입고서 전등 스위치를 끄기 전 마지막으로 거울을 한번 봤는데 정수리에서 뭔가 반짝. 손가락 한마디 만큼 자란 흰머리다. 또 그 자리네. 쪽집게를 찾아들고 새치 소탕작전. 급한 마음에 그 옆 검은 머리칼 한올을 먼저 뽑고서야 성공.  아까비. 어릴 때부터 머리숱이 적고 올이 가늘어 정수리가 훤했는데, 그 정도가 점점 더 심해진다. 이러다 대머리 되는 거 아닌가. 요샌 여성 대머리도 흔하다던데.

 

머리칼을 자꾸 뽑으면 모근이 아예 죽어버려 어느 순간 다시는 새 머리칼이 나지 못한단다. 좀 더 지나면 흰머리 한 오라기도 아쉬워 절대 뽑지 않는다는 말도 들었기에 나중엔 나도 그냥 백발을 염색도 않고 자랑삼아 다니리라 마음 먹어보지만 아직은 반사적으로 흰머리 소탕을 시도한다. 특히 쭈뼛 서듯 홀로 삐죽이 튀어나오는 정수리 흰머리는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어! 아 글쎄 지난 번엔 지하철 타고 가다 내리려고 문앞에 섰는데 유리창에 비친 정수리 부분이 또 반짝. 어찌나 거슬리는지 개찰구 빠져나가 화장실까지 가기도 전 벽에 걸린 거울 앞에 얼른 서서 흰머리를 뽑았다. 남들이 보면 미친여자인가 하겠구나 싶으면서도 참을 수가 없는 걸...

 

염색 않고 버틸 수 있는 수준이어서, 맏이 주제에 3남매 중 흰머리가 제일 덜 나는 편이어서 고맙지만 욕심은 끝이 없는 법. 50살 될 때까지 좀 참아주라, 하고 흰머리한테 애걸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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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지옥

투덜일기 2014. 2. 19. 16:51

주변에 입시생이 없어진지 꽤 되서 수능이 언제인지 별 관심도 없는 삶이 죽~ 이어지고 있었는데, 작년부턴가 친구들이 하나 둘 수험생 부모노릇을 시작했다. 운 좋게 제 앞가림을 알아서 잘 하는(달리 말해 공부를 잘하는;;) 자식을 둔 부모든 아니든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입시 때문에 다들 골머리를 앓았다.  A형 문제를 선택하면 어떻고 B형이면 어떻고, 과목별 등급 컷이 어쩌고 저쩌고... 우웩~!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은 정보였지만, 들어도 통 모를 소리만 해대는데... 덩달아 한숨이 나왔다. 몇년 째 고3 담임을 맡고 있는 선배 하나는 매년 바뀌는 입시정책을 대학별로, 해당 학생 별로 따로 '열공'해야 하기 때문에 수업 준비는 할 시간도 없다고 푸념했다. 어차피 수능영어는 애들도 학교에서 배우겠단 기대도 하지 않는다나.

 

암튼... 지켜보는 사람으로서 명심할 건 단 하나라고 했다. 입시 과정이든 결과에 대해서 아무것도 묻지 말것. 대학 어떻게 됐느냐고 괜히 물으면 향후 '20년간' 계속 재수가 없단다. ㅎㅎ 얼마나 싫으면 그런 속설을 만들어냈을까. 모범생 딸 둘의 입시를 연이어 치른 친구가 얼마전 만났을 때 그랬다. 2년 간 지켜보니 드디어 알겠더라고. "대한민국 입시의 정답은 무조건 특목고, 자사고야! 거긴 내신이며 모의고사 점수 바닥인데도 대부분 수시로 합격하더라고." (그 조언에 힘입어 다른  친구들은 요번에 죄다 애들을 특목고, 자사고에 밀어넣었다. 물론 애들도 실력이 되고, 뒷바라지 할 경제력도 되니깐 보냈겠지만;;)

 

친구의 두 딸은 경기 지역에서 일반고를 다녔다. 고교평준화 이전의 마지막 세대였다는 것 같다. 특목고, 자사고 특유의 강압적인 분위기가 싫다며 성적이 우수한데도 일반고를 선택한 아이들이었다. 듣자하니 그런 학교에 다니려면 학비며 기숙사며 비용이 대학 등록금에 버금가게 든단다. 좋은 기업에 다니면 자녀 학자금 지원도 받을 수 있다지만, 암튼 그 아이들은 일반고를 선택했고, 줄곧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는 듯했다. 이른바 '좋은 대학'에 수시 원서를 넣을 정도로.

 

하지만 둘 다 수시는 모두 낙방. 결국 정시로 대입에 성공했다. 서울 소재 대학이긴 하되 부모도 아이도 별로 성에 차지는 않아 했다. 나도 좀 놀랐다. 일반고에선 전교 10등, 20등 안에 들어야 마음 놓고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을 겨우 갈 수 있는 수준이라더니 정말이로군... 입시 뒷바라지 내내 아이들 얘기는 일언반구 하지 않았던 친구들(그래서 수험생인 줄도 몰랐던;;)은 한참 지나고 나서야 지방 사립대를 보내놓고 걱정을 토로했다. 요샌 SKY 나와도 취직이 안된다는데... +_+ (심지어는 '하바드'를 나와도 문과 전공이면 실업자가 수두룩하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대학 진학률에 목매는 부모들은 너도나도 특목고, 자사고를 보낼 수밖에 없겠단 생각이 든다. 하물며 이젠 예고도 예체능 특기로 가는 곳이 아니란 놀라운 사실. 미술학원에 다니며 예고 준비를 했던 나의 조카는 중3이 되자, 그림 실력은 다 거기서 거기니깐 미술 실기 중단하고 내신성적이나 올리라는 학원 선생의 조언을 들어야했다. 아니 공부 잘 하는 애가 뭐 아쉬운 게 있어서 예고를 가냐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고, 예고는 이제 대학 가기 유리한 방편으로서 일종의 '특목고'에 불과한 듯했다. 어차피 이미 예중 출신이 아니라면 예고도 반에서 5등 안엔 들어야 수월하게 갈 수 있다네. ㅠ.ㅠ 맙소사.

 

세상 꼬라지가 어떻게 되려고 이 모양인가 아주 다양한 분야에서 한심스럽기 그지없지만, 입시 관련해선 더더욱 기가 막히다. 선행학습 금지법이 국회에서 통과됐다지만 과연 그런다고 사교육이 줄고 교육이 정상화될까? 애들은 학교 교사의 무능력을 탓하고 교사는 또 애들의 방만함을 탓하고.. 악순환만 지속될 뿐인 것 같던데. 순진하게도 나는 조카들이 클 무렵엔 다들 공부에 목매지 않아도, 대학따위 가지 않아도 제 인생을 펼쳐나갈 수 있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상상했었다. 그런데 이놈의 빌어먹을 학벌주의 사회는 이 나라가 망하는 날까지도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얼추 학교만 졸업하면 다들 '정규직'으로 취직해 제 앞가림은 하고 살던 때 역시 다시 돌아올 것 같지도 않고.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며 성적을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게 당연한 풍토 속에서 난 중뿔나게도 "어떻게 모든 아이들이 다 공부를 잘할 수 있냐! 공부가 싫고 못하는 애들도 있는 거지!"라고 투덜대자니 괜히 욕만 들어먹는다. 니 자식 아니니까 함부로 말하는 거라나. 그래도 난 모두들 입시와 성적과 성공을 목표로 아예 초등학생 때부터 노선을 정해 애들을 잡는 부모들을 도통 이해 못하겠다. 알바까지 해가면서 애들한테 들이는 사교육비만큼 따로 떼서 차라리 노후 준비나 하라고, 그게 미래를 위한  나은 투자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어차피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며! (혹시 이젠 성적순이 맞는 건가?)

 

덩치만 컸지 아직 정신연령은 애기처럼 느껴지는 큰조카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다고 하니 너도나도 '이제 입시지옥 시작이구나' 한다. 지옥이란 걸 안다면 거기 발을 내딛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내 자식 일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흔히 100세 시대라고 하는 길고 긴 인생에서 굳이 다 똑같은 길을 가야하는 건지, 튀지 않는 평범한 삶을 위해선 그냥 대세를 따르기만 해야 하는건지, 뭔가 다른 길이나 미래는 없는 건지, 대답 없는 질문만 머리를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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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이...

투덜일기 2014. 2. 14. 17:35

일주일이 아직 다 가지 않았는데, 직딩 시절 월요일부터 연일 야근에 시달리다 맞은 금요일처럼 축 늘어진 파김치 신세다. 그간은 약간씩 '기운'만 돌다 말았을 뿐 매번 내가 먹어대거나 푹 쉬거나 하는 수법으로 늘 물리쳤던 감기가 드디어 내 면역력을 넘어섰다. 다행히 요즘 유행한다는 독감은 아니고 그냥 지저분한 콧물감기. 요란한 재채기 몇번 이후 코찔찔 흘리느라 목소리가 변했다. 코를 풀다풀다 지쳐 코주변에서 껍질이 벗겨질 때쯤이면 감기가 떨어지겠지.

 

조카의 중학교 졸업식에 갔었다. 삐까번쩍 멋지게 들어선 아트센터 건물에서 거행된 졸업식은 어쩜... 수십년 새 그렇게 하나도 안변했을 수가 있나. 심지어 더 나빠진 것 같다. 예전에도 애국가를 4절까지 다 불렀던가? 어쨌거나 저 아래층의 학생들도 2층 객석의 나도 몸을 배배 틀며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개그콘서트에서 박지선이 늘 "몸이 고생을 기억해요~" 따위의 대사로 웃기는데, 30년 넘게 부를 일 없었던 교가와 졸업식 노래가 다 기억나서 깜짝 놀랐다. 하와이 민요에 붙인 그 졸업노래는 딴 데 가서도 진짜 들을 일 없을 텐데 ㅋ.

 

식이 끝난 후 멀고먼 교실 건물까지 또 낑낑대고 따라가서 보니 여전히 복도는 좁아터져 학부형들로 발디딜 틈조차 없었고, 저 안에 어떻게 70명이 바글거리고 앉았나 싶게 교실도 작았다. 이제는 학생 수가 그 절반도 안되는 30명이라던가. 왁자지껄한 교실엔 그래도 누군가 풍선도 매달고 '선생님 사랑합니다'라고 적힌 종이도 붙여 놓았고 교탁에 케이크도 놓여 있었다. 하지만 앞에서 담임이 뭐라고 하건 말건 지들끼리 수시로 왁왁 괴성을 질러대는 아이들이 나는 조금 무서웠다.

 

모든 게 끝나고, 싫다고 도망치는 조카를 애써 담임 옆에 세워놓고 사진을 찍었지만 당연히 흔들려 하나도 건질 게 없다. 괜히 찍으라고 그랬나.

 

 

 

돌아오는 길에 봐온 장으로 어젠 또 종일 대보름 먹거리를 준비했다. 여름부터 엄마가 말려놓은 호박, 가지, 시레기, 나물 3종세트에 콩나물과 시금치를 더해 5종 세트 완성. 9가지엔 못미쳐도 그나마 작년보다 한 가지 더 많아졌다. 냉장고가 그득하니 안먹어도 배가 부른 것 같은 느낌이다. 물론 지금 배가 부른 건 오곡밥을 하도 많이 먹어서지만...

 

고된 일주일을 씩씩하게 보낸 나에게 장하다고 뭔가 상이라도 줘야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날짜를 보니 발렌타인 데이. 옳다구나 냉장고를 열어 친구가 보낸 초콜릿을 한귀퉁이 쪼개 우적우적 씹어먹었다. 달콤쌉싸름한 카카오의 맛이 고단함을 달래 잠시라도 영혼을 말랑말랑하게 해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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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투덜일기 2014. 2. 12. 11:15

혈압이 좀 높고 빈혈이 있고 위염 소견을 보인다는 것이 지난 연말 건강검진 결과의 요지다. 몇년 전 위내시경을 했을 때는 흔한 표재성 위염이라더니 역시 '그냥' 위염으로 발전한 것이 간간이 느낀 속쓰림과 소화불량의 이유였구나 싶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위내시경 소견서에도 그렇게 써 있었다. 지속적인 속쓰림이나 불편함이 느껴지면 내원하여 치료를 받고, 별 이상이 없으면 1년 뒤 다시 내시경을 받으라고. 요즘 다시 멀쩡해졌으니 그럼 된 거 아닌가? 혈압이야 뭐 잠 못자고 가서 쟀으니 당연히 높게 나왔고, 집에 와 푹 자고 다시 쟀을 땐 정상이었다. 그럼 그렇지, 새해 들어 며칠 나가서 운동(이라고 쓰고 산책이라고 이해해야;;)도 했단 말이지.

 

암튼 새해들어 담당 보험설계사가 끈질기게 나를 설득했다. 의료실비가 보장되는 보험을 또 들라는 거였다. 친구의 언니이기도 하고 같은 동네 사는 터라 걸핏하면 집까지 찾아와 당근(각종 선물;;)과 채찍을 휘두르며 실비보험의 필요성을 설파한지 벌써 몇년째였고, 요번엔 계약서까지 뽑아들고 와 아주 사인을 해주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을 태세였다. 다 나를 위해서라고... 부모님의 고혈압 유전자도 있으니 미리 대비하는 게 좋겠다고. 처음엔 요리조리 회피를 해보았으나, 우유부단함과 거절 못하는 지병이 도져 결국엔 옛다, 서명을 해주고 말았다.

 

나로선 선심 깨나 베풀었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뒤 보험사에서 또 사람이 나왔다. 나의 건강상태가 보험 가입에 적합한지 일종의 평가를 하러 나온 셈이었다. 오래 전 종신보험과 연금보험을 들 때는 아예 간호사가 나와서 혈압을 재고 혈액 샘플까지 뽑아가더니만, 이번엔 조목조목 건강 상태와 병원 진료 경험을 캐묻다가 내가 귀찮아서 건강검진 결과표를 보고 읽어주자 아예 그걸 사진으로 찍어갔다. 아우 기분나쁘고 찜찜해...

 

그러더니 두둥. 며칠 뒤 친구 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의 건강상태가 보장되지 않아 실비보험 가입이 거절되었다나. 우엑~~~!!!!  왜 가만 있는 사람을 귀찮게 하더니 기분 나쁘게스리!! 해서 보험청약을 철회하고 1회분 보험료를 돌려받고 어쩌구 하는 귀찮은 절차를 거친 뒤, 나는 의료실비 보험도 못드는 중년의 불건강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으으으으 기분 더럽도다!!

 

누군가는 이미 몇년 전 의료실비보험을 들었다가, 건강 우량체로 인정되면 보험료 할인된다는 말에 검진을 받아본 뒤 괜히 고혈압 판정만 받았다느니(병원에만 가면 괜히 혈압이 올라가는 새가슴도 있지 않은가;;), 함부로 건강검진 받을 게 아니라느니, 보험공단에 괜히 기록만 남아 나중에 불리해진다느니(뭐가??) 하는 말이 뒤늦게 이런저런 경로로 귀에 들어온다. 언제는, 건강검진은 정기적으로 받아야 좋다며!! 우쒸....

 

애당초 의료실비 보험 따위 별로 필요 없다고 생각했으니 다시 원점이라고 쿨하게 생각하면 그만인데, 생각할수록 보험사의 행태가 괘씸하고 기분나빠서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이렇게라도 씨부리면 좀 풀리려나.... 생각해보니 그간 내가 건강보험공단의 건강검진을 계속 외면해왔던 것도 일리가 있는 행동이었구나 싶다. 원래 병원에 쪼르르 달려가는 성격도 아니고, 감기 걸려도 약을 먹는 유형도 아니니, 그동안엔 어디에도 기록이 남질 않았잖아! 헌데 이젠... 기록상 그쪽 세계에서 여러가지 병인을 지닌 '환자' 취급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엄청나게 억울하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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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아버지는 설날 전에 은행에 가서 꼭 만원짜리 신권을 바꿔다가 세뱃돈을 주셨다. 95년부터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외할머니가 참 공교롭게도 꼭 한해 간격으로  돌아가시고 나자, 설날 세배드릴 어른들이 확 줄어든 것도 슬펐지만 천원짜리 몇장 푼돈이라도 재미삼마 받던 세뱃돈을 주실 분은 부모님 뿐인 것도 못내 섭섭했다. 직장인이 되고부터 어른들께는 세뱃돈을 드리면서 세배하는 거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마치 물물교환이라도 하듯 할머니 할아버지가 우리에게도 주섬주섬 쌈짓돈 챙겨주시는 게 얼마나 행복했는지.

 

하여간 아버지는 머리 큰 자식들에겐 빳빳한 만원짜리 한장 세뱃돈으로 건네면서 '종돈'(種돈)으로 지갑에 넣고 다녀라, 하셨고 정말로 나는 그 씨앗 돈이 무럭무럭 새끼를 치면 좋겠다고 바라며 늘 다음해 설날까지 지갑에 모시고 다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첫 설날, 엄마는 손주들 세뱃돈 봉투만 챙길 뿐 삼남매와 조카들에게 주는 '종돈'은 준비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 게 어딨어!! 나도 세뱃돈 받고 싶단 말이야! 늙은 딸은 앙탈을 부렸고, 아들 며느리들도 아빠가 하시던 일 엄마가 그냥 이어가기를 바랄 거라고 계속 꼬드겼다. 엄만 어차피 세뱃돈 남는 장사잖아! 협박도 좀 하고...

 

그 덕에 올해도 설날 빳빳한 만원짜리 한장이 든 봉투를 받았고, 작년에 받은 종돈 옆에 나란히 지갑에 넣어두었다. 종돈이 두 장이면 새끼를 더 많이 칠 지도 몰라, 이러면서 ㅋㅋ.

 

어쩐지 미신덩어리가 되어버린 듯한 내 지갑엔 요번 입춘 부적도 새 걸로 개비되었다. 정작 입춘 날엔 낙상 후유증으로 절에도 못가고 끙끙 앓느라 식구들 부적 챙겨놔 달라고 전화만 한 뒤, 노친네가 며칠 지나고 찾아오더니 내껀 작년부터 특별히 삼재 부적이라며 시뻘겋고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아오, 진짜...  교회 다니는 둘째 며느리 것만 빼고 본인이며 자식들 부적을 갯수대로 다 받아와서는 다들 빨랑 바꿔줘야 하는데... 전전긍긍하는 노친네를 보자면 짜증스럽다가도 결국 피식 웃음이 난다. 동생들도 다들 별 군말 없이 부적을 지갑에 넣고 다니는 이유는 미신을 믿어서라기보다는 그냥 노친네 마음 편하시라고 그러는 거겠지.

 

작년에는 절에서 입춘첩도 받아와 현관문에 붙여두었던 터라, 문 여닫고 드나들 때마다 입춘대길 건양다경 한문으로 적혀 있는 한지를 보며 괜히 기분이 좋았으나, 올핸 입춘첩 받아오면 엄청 추웠으니까 거꾸로 붙여야지 생각했던 게 무색하게도 부적만 챙겨준 모양이다. 한해 무사태평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붙이는 입춘첩이나 부적이나 지갑에 돈 많이 들기를 바라는 종돈이나 어떻게 보면 다 터무니 없는 미신이고 허튼 짓인데, 또 한편으론 재미나고 정겨운 풍습이니 손가락질 할 것만도 아니다. 종돈이든 아니든, 이 나이에도 새배하고 세뱃돈 받으면 그저 흐뭇한 걸 어쩌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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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

투덜일기 2014. 2. 5. 17:32

명절 때만 되면 남북 양쪽에서 정치적인 카드로 써먹으려드는 느낌이 강한 이산가족 상봉. 요번에도 실무 접촉이 시작되고는 있지만 꾸준히 연례적으로도 못하고 걸핏하면 중단되는 양상이 참 못마땅하다. 뉴스에 나오는 이산가족 상봉 회담 이야기를 들으며 엄마가 중얼댔다. 이젠 다들 돌아가시거나 너무 늙고 병들어 만나러 갈 사람도 없지 않나...

 

실향민인 우리 할아버지가 아직 살아계셨더라면 올해로 무려 105세가 되시는 셈이고, 10년쯤 전엔가 금강산에서 열린 이산가족 상봉행사에 다녀오신 큰고모님도 어느덧 80대 중반이 되셨으니 정말로 몇년 안에 이산가족 상봉행사는 유명무실한 생색이 되고 말 것이다. 큰 기대를 안고 떠났던 큰고모님 말씀으로는 얼굴 알만한 노인들은 다 사망해 다 그 자손들이랍시고 나와 상봉을 하니 별 감흥이 없으셨다던데.

 

암튼 얼마 전 중국에서 걸려온 전화를 한통 받았다. 돌아가신 울 아버지 성함을 대며 찾는데, 대번에 중국동포 말투가 너무 확연해서 보이스피싱이구나 싶어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표독스럽게 대꾸하다보니 그게 아니었다. 자기는 중국에서 북한을 드나들며 무역업을 하면서 더러 북한 사람들을 돕고 있는데, 북한에 있는 아버지의 친척들이 아버지와 연락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우리 아버지의 연락처는 오래 전 이산가족 상봉 때 큰고모님한테 받은 것이라며 고모님의 이름과 주소 그 아들들 이름을 줄줄이 읊어 신빙성을 주려 애를 썼다. 의도는 알겠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해야할지 난감했다. 이기적이게도 내심 이거 골치아프게 금전적 지원이나 탈북 알선에 연루되는 건 아닌가 걱정스럽기도 했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도, 내가 알기론 아버지랑 실제로 아는 친척은 하나도 없는 것 같던데. 어쨌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전하니, 저쪽에서도 그럼 자기도 뭘 더 도와줄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하는 것 같았다. 죄송하다는 말로 전화를 끊고는 부산 큰고모님께 연락을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며칠 고민하다 그냥 나 혼자 씹고 말았다. 엄마한테 이야기하면 또 괜한 걱정과 공포에 잠이나 설칠 게 뻔하고, 이산가족 상봉 후 큰고모님도 고생스럽게 괜히 갔다고 말씀하셨던 걸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언젠가 통일을 앞두고 당연히 더 많은 탈북자 새터민들이 생겨날 것이고 지금도 여러 민간단체에서 북한 주민을 돕고 있듯이 꾸준한 물밑 교류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어쩌면 남북 정권의 정치적이고 극단적인 결정보다는 차츰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과 바람을 일으키는 것이 중요할 테고 말이다. 그런데 막상 개인적으로 그런 기회가 가능할 수도 있는데 대번에 꼬리를 내리고 움츠러드는 나를 보니 어찌나 한심스러운지. 늦었지만 큰고모님께라도 실토하고 조언을 구해야하는 게 아닐까. 그 고민조차도 며칠째 계속 전전긍긍.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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