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고모

투덜일기 2013. 8. 15. 18:22

'기집애', '가시나' 소리만 들어도 엄청나게 모욕적인 욕이라고 생각해 눈물을 쑥 빼던 어린 시절. 내가 유독 싫어하는 친척 할머니가 있었다. 말끝마다 애어른 할 것 없이 누구 이야기를 하든 '요년, 조년, 망할년' 따위를 추임새로 넣으니 당연했다. 그 양반 입에서 가장 많이 흘러나온 욕은 뭐니뭐니해도 '베라먹을년'이어서, 뜻이 궁금해진 내가 엄마한테 물어본 적도 있었다. 알고보니 '빌어먹을년'이라는 뜻이었다. 나 원 참. 그뿐인가. 귀엽다며 아이들 볼을 꼬집는 어른들은 원래도 있었지만 그 할머니는 그냥 쥐는 정도가 아니라 진짜로 아프게 꽉 잡고 마구 흔들어 빨갛게 만들거나 심지어 뽀뽀를 한답시고 뺨을 깨물어 애들을 울렸다. '정말 이상한 할머니'였다. 그러고는 또 매사에 생색을 어찌나 내는지, 옛날 전쟁 피난시절 굶는 이 집(울 외할머니네)식구들을 자기가 쌀퍼다 먹여서 살렸다는 둥(남편이 군무원이라 살림이 늘 넉넉했단다), 특히 울 엄마를 두고는 내가 재를 다 먹여살려 키웠노라, 그 어려운 시절에 입히고 먹인 건 물론이고 학교 공부는 내가 다 시켰노라 입만 열면 똑같은 레퍼토리의 반복이었다. 조카딸 학교 보내주는 고모가 세상에 어디 흔한 줄 아느냐고. (그렇다, 나에게 '고모할머니' 되는 양반이다) 우리 외할머니를 비롯해 다른 친척들은 그 양반의 호언장담에 맞장구도 치지않고 반박도 하지 않으면서 그냥 묵묵히 듣고 넘기는 쪽이었다. 하기야 누가 말대답이라도 할라치면 괜히 막 쌍욕을 해대며 언성을 높였던 것 같다. 나로선 몇년에 한번 볼까말까 하는 사람이라는 게 다행스러웠다. 나랑 동생들한테도 제대로 인사 안한다고(인사를 왜 안했겠나. 넉살좋게 큰소리로 반기지 않았다는 뜻이다;;), ㅂ가네 애들 저래 숫기가 없어서 어디 가서 빌어먹기라도 하겠느냐고 보기만 하면 면박을 줘대니 얼굴 보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내가 커서 어른이 되는 동안에도 그 양반의 큰소리는 변함이 없었다. 특히 'ㅇㅈ년(울 엄마)은 나한테 평생 잘해야한다'는 소리는 잊을 만하면 들려왔다. 아 정말, 사람 이름에 왜 '년'자를 접미사로 붙이는지! 암튼 나는 또 궁금해져서, 진짜로 외갓집 식구들이 그 양반 덕을 많이 봤는지, 특히 울 엄마가 어떤 은혜를 입었는지 물어보았다. 기막히게도 사연은 이러했다. 

 

전쟁통 피난시절, 울 엄마네는 피난을 내려가다 이미 인민군 세상이 된 걸 알고 이천인가 안성 쯤에서 서울로 되돌아갔단다. 그러고 한참 뒤, 서울 수복이 된 후 부산으로 피난갔던 그 양반 남편이 서울로 찾아왔더란다. 집에 먹을 것도 부족할 테니 군입 하나 줄이는 셈 치고 울 엄마(당시 10살)를 부산으로 데려가겠다고. 부산엔 학교도 열렸으니 학교도 보내주고 배불리 먹여주겠다고 했다나. 외할머니는 울 엄마한테 그럼 너라도 굶지 않게 따라가라 명했고, 착한 엄마는 고모부를 따라 부산으로 먼길을 떠났다. 이 대목에서 이미 짐작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부산에서 울 엄마가 전쟁으로 중단했던 학교를 다닌 건 맞지만 엄밀히 따져 그 양반네 집안에서 울 엄마의 위치는 '더부살이 식모'였다. 군무원이라 집에 쌀이며 기타 양식이 풍족하면 뭐하나,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애보고(어린 사촌동생들이 둘이라나 셋이라나;;)... 아침에도 학교를 가려면 열살짜리 어린애가 군불을 피워 밥을 손수 해서 상차려 바치고 가야했단다. 나중에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나는 정말 피가 거꾸로 솟는 것처럼 화가 났다. 결국 제몸 편하려고 조카딸 데려다 식모살이 시켰다는 거 아닌가! 악당이 따로 없다. 그러면서 무슨 생색은! 미친 거 아닌가?

 

다행히 울 외할머니네도 1.4후퇴 때 부산으로 합류를 했고 드디어 모녀상봉을 했더란다. 맏딸만은 끼니 안굶고 배불리 먹으며 학교에 잘 다니고 있을 거라 짐작했던 외할머니는, 그 추운 겨울에 개울가에서 맨손으로 그집 식구들 빨래하느라 손등이 다 터져서 피가 줄줄 나는 딸의 손을 보고는 즉각 사태파악을 한 뒤 그 길로 도로 데려갔단다. (울 엄마 손등엔 그 때 동상에 걸려 터진 흉터가 아직도 남아있고 요새도 가끔 가렵다고 하신다) 그러니까 그 괴상한 양반이 울 엄마를 학교 보내고 먹이고 입히고 했으니 평생 잘해 받아야 한다는 '은혜'를 베푼 기간은 기껏해야 1년 남짓 되는 것 같다. 하지만 비단 옷 입고 드러누워(울 엄마의 묘사다;;) 피둥피둥 놀면서(주로 화투를 쳤단다) 열살짜리 조카딸한테 무임금 가사노동 전담시킨 죄값은 어떻게 하느냐고! 그 양반의 만행은 세월이 흘러 울 엄마가 여고입학할 때 다시 속개된다. 가난한 집에서 '기집년'이 무슨 고등학교엘 가느냐고 길길이 날뛰며, 돈 벌어 남동생 뒷바라지나 하라고 울 엄마의 교복을 진탕에 집어던졌다나 뭐라나...  자기한테 월사금 보태달라고 할 생각은 얼어죽어도 하지 말라면서... 아니, 자기가 왜 무슨 참견??

 

내 어린시절 기억 속의 그 양반 모습도 참 가관이다. 짜리몽땅한 키에(145센티미터쯤 되는 것 같다) 부를 과시하기 위함인 듯 요란한 양단 치마저고리에 주로 털배자를 떨쳐입고 동그란 얼굴엔 나비모양의 뿔테안경을 걸치고 나타나선 우리 외할머니댁에서 며칠 묵어가곤 했는데, 나를 보면 최대한 방정맞게 혀를 쯧쯧쯧쯧 차면서 '기집년'이 공부를 잘하면 뭐하니, 팔자만 세진다.. 따위의 악담을 덕담처럼 던져댔다. 평생 가족에게든 남에게든 제대로 이로운 일을 하고는 살았는지 어쩐지도 잘은 모르겠으나, 정말로 그 양반 입에서 좋은 이야기가 나오는 건 들어본 일이 없었던 것 같다. 울 엄마의 우울증이 심해지자, 그 양반은 또 귀신 들린 거라면서 굿을 해야한다고 난리를 피워서(굿을 안하면 화가 온 집안으로 퍼져 자기네도 해를 입는다나 뭐라나;;) 외할머니가 하는 수 없이 울 엄마를 데리고 굿당을 찾기도 했단다. (이날의 장면은 어린 시절 나의 뇌리에도 충격적으로 새겨졌다. 그 양반이 울 엄마를 끌어다가 마당 한 구석에 꿇어앉혔고,  무당이 울 엄마한테 살아있는 수탉을 확 던져셔 내가 막 울었음;;내가 다섯 살 때라는 것 같다)  심지어는 시집살이 때문에 울 엄마의 정신이 병들었으니 울 아버지와 갈라놓으라고도 한 적도 있단다. (진짜 그 양반 정신분석 한번 해보고 싶은 대목이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망발을? 울 엄마의 우울증 역사는 미혼시절부터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른이 되어 그 양반의 실체를 알고 난 뒤로 나는 가능하면 그 양반과 마주치는 자리를 피했고 울 엄마와도 상종을 막았으며 최근까지 거의 교류가 없었다. 잘은 몰라도, 아무리 전쟁통이라지만 10살에 엄마와 떨어져 배불리 학교 보내줄 줄 알고 따라간 고모 집에서 졸지에 식모살이를 하게 된 건 울 엄마에게 트라우마로 남지 않았을까? 그러고도 자기 잘못한 줄 모르는 양반이니, 그런 사람과는 떼어놓는 게 상책이다. 

 

아들 선호사상이 엄청난 데 하필 딸만 셋 둔 양반이라 나의 외숙과는 예로부터 쿵짝이 잘 맞아서 수시로 드나드는 모양이었지만, 울 엄마도 어린시절부터 평생 싫은소리를 들었던 상처가 워낙 컸던지 언제부턴가는 그 양반 돌아가도 문상을 가지 않겠노라고 선언했다. 그 양반이 불행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건 다 인과응보라고 나 역시 매몰차게 악담을 했다. 딸 셋은 각기 호주와 캐나다로 이민간 지 오래였고, 혈육들도 그 양반의 더러운 입과 안하무인 태도를 못견뎌한다고 들었다. 그러니 딸들이 보내주는 일정액의 생활비로 독거노인으로 사는 수밖에. 아흔이 다 된 나이라 얼마 전부터는 거동이 불편해 요양병원에서 지내지만, 정신은 말짱하여 목에 휴대폰 걸고 다니며 사방으로 전화를 건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번인가 집으로 온 전화를 내가 받아서 대충 통화하고 끊었다. 여전히 고압적인 자세였다. 니 엄마는 아파서 그렇다 치고 니년은 젊은 년이 왜 얼굴 한 번 안 뵈주러 오느냐고 했던가. 다행히 왕비마마는 집에 안 계셨고;;) 자식들에게도 버림받은 노인에게 인간적인 동정심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뜬금없이 욕설을 퍼붓는 그 양반이 울 엄마의 '고모'이며 나에겐 '고모할머니'라고 생각하면 연민보다는 짜증이 더 치밀었다. 더는 상종하고 싶지 않은 귀찮은 존재 정도? 차라리 남이었다면 안타깝고 불쌍히 여길 수도 있었을까? 

 

어쨌거나 엊그제 그 양반의 뒤늦은 부음을 들었다. 지난 설날에도 그 양반을 집에 모셔와 며칠 지냈다던 외삼촌도 나중에 일처리가 다 끝난 뒤 통보만 들었다는 걸 보면, 장례를 위해 딸자식들이 귀국하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남보다 못한 '어떤 고모'의 일생이 끝난 셈이다. 내가 왜 이 이야기를 여기다 시시콜콜 적고 앉았는지, 그 이유를 나도 잘 모르겠다. 가깝든 멀든 집안 어르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나 도리도 외면했던 것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 글쎄... 그건 아닌 것 같다. 진정코 하나도 찔리지 않는 걸. 그보다는 그 양반 문상도 안가겠다 장담하던 왕비마마가, 다음번 절에 가는 날 '영가등'('영가'는 망자를 의미한다)이나  하나 켜야겠다고 한 말 때문인 것 같다. 그 또한 울 엄니 마음 편하자고 하는 일이겠지만, 암튼 딸들도 안 들여다보는 노친네의 죽음을 결국엔 어린 시절 노동력을 착취당했던 조카딸이 챙기누나 싶어져서 나는 또 좀 화가 난다.

 

이런 부끄럽고 시시콜콜한 가족사를 이런 공개적인 공간에 적어놓아도 되는지, 내 얼굴에 침뱉기는 아닌지 생각되지만 그럼에도 결국 공개하는 건 울 엄마가 절에 가서 평생 미워한 고모를 위해 재를 올려 마음을 씻으려는 것처럼 나도 옹졸하게 마지막으로 실컷 망자를 욕해 꽁한 마음을 풀려는 시도가 아닐까나.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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