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덜일기'에 해당되는 글 503건

  1. 2012.12.20 월동준비 10
  2. 2012.12.04 병원 유감 7
  3. 2012.11.23 잘 될까 15
  4. 2012.10.28 노는 건 좋구나 14
  5. 2012.10.10 아등바등 2
  6. 2012.10.06 수시
  7. 2012.09.18 환절기 10
  8. 2012.09.11 양동이 4
  9. 2012.08.30 비오는날 푸닥거리 2
  10. 2012.08.22 시끄러워도 참아야 해 1

월동준비

투덜일기 2012. 12. 20.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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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가 들어간 유일한 영어단어라나 뭐라나(이는 확실히 틀린 주장이므로 오해 없도록 미리 밝혀야겠다;; ㅋ), 그래서 누구에게든 선물하기 딱이라는 장갑. 우산이나 스카프처럼 사도사도 욕심이 생겨 겨울마다 기웃거리게 된다. 가죽장갑은 끼나마나 손시려울 것 같아 처박아둔지 오래고, 여러가지 장식 요란한 벙어리장갑은 아무래도 끼고 나서기 민망해진 나이라는 자격지심이 앞서고... 

결국 작년에 회색 털실장갑을 하나 사 끼었다. 또 '스님용' 장갑을 산 거냐고 놀림 좀 받았지만 내 마음에 들면 그만이지 뭐. 게다가 언젠가 쓸모가 있을 것 같아 사두었던 옷핀모양 단추도 직접 달아놓고는 어찌나 뿌듯하게 끼고 다녔는지.

그런데 지난번 영하 십몇도 혹한에 나가보니 안에 부숭부숭 안에 털이 든 이중장갑 끼고 온 사람이 몹시 부러워 올해 또 한 켤레 사들였다. 겨울엔 그저 오리털 패딩이 최고라며 기럭지 넉넉한 깜장 패딩과 함께 월동준비는 완벽하게 끝냈노라고 흐뭇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어젯밤 돌연 평범한 월동장비로는 버틸 수 없는 빙하기가 시작됨을 느꼈다.

그렇다면 답은 결국 상식이 통하는 따뜻한 곳(그런 곳이 정말로 있다면;;; 이라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지구 다 망가뜨리고 나면 다른 행성 개척해 떠나 살겠다는 허황한 꿈과 뭐가 다른가 싶긴 하다)으로 떠야하는 게 아닐까, 상투적이고 가볍기 짝이 없게도 그것이 제일 먼저 든 생각. 감상적 패배주의에 빠지면 안된다는데 난 꼭 그런 심정이다. 희망이 있나? 5년 전과 똑같은 기시감이 가장 두렵다. 절대로 깨어날 수 없는 악몽이 되풀이되고 있는 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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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유감

투덜일기 2012. 12. 4. 18:03

지난번에 이어 벌써 두번째인데도 불쾌감이 들어 고발감(어디에?)이라는 생각에 사진을 찍었다. 사진의 정체가 무엇인고 하니... 대학병원 채혈실에서 울 왕비마마께 하달된 임무 가운데 소변 샘플을 받아내라는 앰플이다. 뒤에 놓인 비닐에도 식후 채혈을 위한 혈액 앰플 한 개가 들어있다. 본인이 들고 다니다가 식후 2시간 지나 시간 맞춰 들고 오라고...

예전엔 단순히 종이컵과 플라스틱 컵 두개를 주고 적정량을 반반씩 나눠 담아 검사실 앞 쟁반에 넣어두라고 했었는데, 얼마전부터 저렇게 본인이 소변을 일단 컵에 받아서 저 작은 앰플 뚜껑을 열고 직접 채워넣으란다. 시료의 오염을 막고 악취도 줄이고, 운반하다 쏟거나 하는 문제를 방지하기 위함일 것이라고 이해는 된다. 그러나 결국 병원 관계자들이 지들 편하자고 환자들을 더 불편하게 시시콜콜 귀찮은 일을 시켜먹는 처사가 아니고 무언가! 식후 채혈용 앰플도 왜 굳이 환자더러 들고 다니다가 가지고 오라고 하는지?

왕비마마는 심신이 건강해지면서 자신감마저 넘쳐 간단한 진료과는 혼자서도 동네 의원이나 대학병원을 찾을 정도가 되었지만, 기계에서 처방전 따로 뽑아 멀리 떨어진 약국 가서 약타고, 식전 식후 시간 맞춰 채혈 및 소변 채취하는 것까지는 너무 복잡해 내가 함께 가야하는 상황이다. 대학병원 채혈실에도 저런 복잡한 소변채취 과정이 불편하면 직원에게 말하라는 안내문이 적혀 있었고, 채혈이 끝난 뒤 저렇게 앰플과 소변컵을 울 엄니께 내밀며 직원은 딸더러 시키라고 말했단다.

물론 왕비마마는 저 정도는 본인이 할 수 있다고 코웃음치며 홀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몇년 전처럼 상태가 별로 안좋아져 손이라도 떨리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내가 같이 들어가야 했을 것이다. 지팡이 짚고 오신 홀로 할머니 환자들도 많던데 그분들은 대체 어떻게 하라는 건지? 정말로 부탁하면 직원들이 화장실까지 따라들어가서 앰플에 붓는 걸 도와줄까? 병원측에선 저걸 '시스템 개선'이라고 여겼겠지만, 환자 입장에선 분명 '개악'임을 모를까? 병실 입원 환자한테도  보호자나 간병인이 없으면 절대 안되는 상황이고, 간호사들의 존재 이유는 대체 뭔가 싶은 때가 많은데 이젠 진료 환자들에게도 연로한 경우엔 반드시 보호자가 필요한 상황을 만들려는 걸까? 짜증이 치밀었다.

그래도 이 나라의 건강보험이 미국 같은데 보다는 훌륭하다 생각하지만, 대형병원 시스템은 일반진료든 입원치료든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병원직원 노조가 1년에 한번씩은 꼭 농성을 벌이며 처우개선을 요구하던데, 소변 앰플 자가처리도 그들의 요구사항이었을까, 아니면 인원삭감으로 어쩔 수 없이 저런 시스템을 도입하게 된 것일까,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유감은 유감! 다른 대학병원들도 저런 식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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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될까

투덜일기 2012. 11. 23. 22:54

이젠 어느 동네엘 가도 잘 찾아볼 수 없는 소형 서점이 최근 우리 동네에 생겼다. 제법 큰 플래카드를 두어 군데나 붙여놓고 개업을 알리는 서점이 걱정스럽고도 신기해서 일부러 언덕을 넘어 구경을 갔었다. 옛날 내가 다니던 학교앞 책방처럼 학습지 교재와 잡지가 주요품목이고, 잘은 모르지만 베스트셀러 신간 정도는 갖추어 놓은 것 같았다. 늦은 오후, 비좁은 책방에 당연히 손님은 한명도 없어서 차마 들어가도 될까, 인사 받고 들어가서 구경만 하고 나오면 안될텐데, 누구든 손님이 들어가면 따라 들어가야지 마음먹고 버스 기다리는 척 한참을 기다렸으나 손님이 한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괜히 들어갔다가 읽지도 않을 책이나 잡지를 집어오기도 뭣하고, 딱히 사고픈 책(있느냐고 물어볼;;)도 생각나지 않아서 결국 줏대없이 그냥 돌아섰다.

 

얼마전엔 오래도록 비어있던 동네 입구 상가 한 귀퉁이에 '이탈리아 수제 버거'집이 생겼다. 응? 햄버거가 이탈리아 음식이었나? 의문도 잠시, 입구에 나무데크를 깔고 인테리어에도 꽤나 신경을 쓴 그 가게가 걱정스러워서 나는 오갈 때마다 안을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주민이라고는 노인들이 대부분인 강북의 오래된 주택가가 하루 중 활기를 띠는 때는 언덕 꼭대기에 있는 중학교 여학생들이 등하교를 할 때 뿐이고, 하나 있는 치킨집마저도 장사가 잘 안될 지경인데 햄버거집이라니. 마치 영화 <카모메 식당>을 보듯 매번 부지런히 빈 테이블을 닦거나 주방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두 여인을 슬쩍 훔쳐보며 안타까웠다. 이미 '수제 햄버거'로는 동생이 뜨거운 맛을 본 뒤라 남일 같지가 않았다. 여중생들이 먹어봤자 떡볶이랑 김밥일 텐데 대체 누굴 대상으로 가게를 열었을까?

 

처음 한달은 통 손님이 든 모습을 못보겠더니 그래도 두어달 지난 요즘엔 커피잔을 앞에 두고 수다를 떠는 사람이나 유치원 끝난 아이를 데리고 들른 엄마 손님 한 둘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가끔 보였다. 나만큼이나 그 햄버거집을 염려하던 울 엄니('수제' 햄버거집은 웬만해선 곧 망한다고 굳게 믿고 계심;;)는 오지랖 넓게도 바로 옆에 있는 미용실 아줌마를 통해 정보를 입수해왔다. '수제' 햄버거가 '단돈 천원'부터라 여중생들이 곧잘 사먹긴 하는데 그래봤자 임대료나 나오겠느냐고, 인건비까지 뽑긴 어려울 거라고. 커피는 맛있다더냐는 내 질문에는 대답을 얻지 못했다. 하기야 나도 커피 한 잔 안팔아주면서 말로만 걱정은!  

 

부디 내가 볼 때만 유독 그런 것이라면 좋겠으나 대부분 '개점 휴업' 상태가 분명한 두 가게를 보며 요즘 내 상황과 뭐가 다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서, 주로 자고 먹고 놀고 쉬고를 반복하는 나날을 본격적으로 즐긴지 한달이 좀 넘었다. 말로는 거창하게  나도 안식년이라는 것 좀 누려보자고 했지만, 엄밀히 따지면 개점휴업, 그냥 일이 없어 노는 것과 뭐가 다른가?

 

굳이 변명을 하자면 친구의 휴가에 맞춰 일을 빼느라 꼼수를 부리긴 했다. 허나 휴가가 한두달도 아니고 겨우 2주였으니 핑계거리밖에 안된다는 걸 잘 안다. 그러고는 순전히 일을 하기가 싫어서, 이미 너무 늦어버린 계약마감에 쫓기는 게 숨막혀서, 아니 나도 나를 도저히 믿을 수가 없고 출판 담당자만 계속 물먹이는 상황이 죄스러워서, 결국 두 건은 계약금 돌려주고 일을 포기했다. 사실 한권은 절반 이상 진행된 상태라 아까운 마음도 들었지만 멀미가 나서 다시는 부실한 원고륻 들춰보고 싶은 마음도 안드는 상황을... 과연 누가 이해해줄 수 있을까. 출판 담당자에겐 천인공노할 죄를 진 셈이지만 암튼 그땐 그랬다.

 

 그런데 그러고도 이상스레 마음은 편했다. 막연한 불안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17년간 번역일을 해오면서 한번도 사라지지 않은 조바심과 다를 바 없다. 아무도 내게 일을 주겠다고 찾는 사람이 없으면 어쩌나, 과연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은 모든 프리랜서의 숙명적인 고민이 아니겠나. 원숭이 줄타기의 법칙을 아무리 고수한들 언제고 한두 번은 떨어지게 돼있다. 더욱이 단군이래 최대불황이라는 출판계의 비명은 그저 엄살이 아니라 해마다 변함없이 현실로 나타난다는 걸 왜 모르겠나. 그런데도 이 엄혹한 마당에 안식년을 즐겨보겠다는 용기가 참 가상할 지경이다. 

 

잠자리에 들어서 오늘 과연 뭘 했나 돌이킬 때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을 만큼 무위도식하며 사는데도(어쩌면 그러기 때문에;;), 생각보다 하루는 참 빨리도 지나간다. 컴퓨터와 인터넷 없이는 단 하루도 못 살것 같더니만, 일하기 싫어서 게으름 부릴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며칠씩 컴퓨터를 켜지 않아도 아무렇지가 않다. 대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긴 하지만, 부쩍 심해진 노안 덕분에 작은 화면으론 뭘 오래 보기도 어려우니 그 문제는 저절로 해결이 됐다.

 

뭘 좀 배울까, 운동을 할까, 텅빈 머리는 어떻게 채울까, 여행을 갈까, 빈한기의 삶은 어떻게 유지해야 좋은가, 별로 힘들이지 않고 허투루 하는 생각들은 당연히 아무런 결과도 낳지 못한다. 그저 궁금할 뿐이다. 우리 동네 서점과 동네 수제햄버거집처럼 나의 안식년도 과연 잘 될까, 하고. 그러고는 이내 눈을 질끈 감는다. 잘 되겠지 뭐. 서점과 햄버거집 주인들도 아마 그렇게 믿고 있을 것이다. 누구나 결국엔 죽지만 죽으려고 사는 사람은 없듯이, 잘 안되려고 뭔가를 벌이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나. 나는 다만 뭔가를 '벌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되는 일이다. 해보니 그건 퍽이나 쉽다. 무위도식, 이게 딱 내 적성이었는데 그간 몰랐던 게 한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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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 건 좋구나

투덜일기 2012. 10. 28. 15:33

 

 

7년만에 한국에 다니러 온 친구 덕분에 나도 2주간 꼬박 관광객 모드로 마냥 먹고 놀러다녔다. 몇달 전부터 꼼꼼하게 다닐 곳과 먹을 것과 볼 것을 주르륵 뽑아놓고 하나하나 지워나갈 계획이었으나 돌이켜보니 큰 얼개만 맞아떨어졌을 뿐 소소한 곁가지는 도통 생각대로 되질 않았다. 여행지에선 어쩜 그렇게도 시간이 잘 부서져나가는지 원.

 

친구는 다시 열세시간을 날아 왔던 곳으로 돌아갔고 남은 것은 몇장의 사진과 내몸에 붙은 살... 살...

매일같이 얼마나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고 잘 쉬었는지, 빵빵해진 얼굴에 주름살이 다 펴졌음은 물론이려니와 숱 적은 머리칼에 자르르 윤기마저 도는 걸 보며 노는 게 이리도 좋은 것임을 새삼 실감했다.

 

계속 이렇게 탱자탱자 여행다니며 놀 수 있는 방법은 역시나 로또 1등 당첨 밖에 없다는 서글픈 현실을 인정하고 내년 휴가나 또 기약하자고 마음을 다잡고 있다. 터키. 칠레. 쿠바. 파리. 아를. 더블린. 프라하. 빈. 바르셀로나. 가고픈 곳은 많은데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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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등바등

투덜일기 2012. 10. 10. 10:51

 

 

지난 여름 생일에 지우가 선물한 그림.

난 무대체질도 아닌데, 내 평생 외발자전거는 타본 적도 없는데, 그림 속의 나는 외발자전거를 타고 높은 언덕을 오르내리며 저글링까지 하고 있다. 운동신경 젬병인 고모를 저런 모습으로 담아준 것이 그저 고맙고, 녀석의 뛰어난 상상력을 신기해하며 줄곧 냉장고에 붙여두고 흐뭇해하기만 했었다.

 

그런데 요즘 문득 쳐다보며 어린 조카의 혜안(?)이 참 놀랍구나 싶어졌다. 잘 타지도 못하는 외발자전거에 올라 공을 세개나 허공으로 던지고 받느라 아등바등... 얼굴은 웃고 있지만 언제 넘어질지 위태롭기만 하다. 딱 요즘 내 모습이 아닌가. 이 다음 장면에서 난 분명 저 높은 언덕을 오르지 못하고 자빠져 피를 철철 흘리고 있을 거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당분간 아등바등 몸부림은 그만둬야겠다. 철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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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시

투덜일기 2012. 10. 6. 16:20

얼마전 친구가 자기랑 딸을 하룻밤 재워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우리집에서 가까운 대학에 고3딸이 수시입학원서를 넣었는데 수리논술고사를 보러 아침일찍 와야한단다. 근데 경기 신도시에 있는 그 집에서 오기엔 너무 멀다고... 당연히 그러마고 했다. 재워도 주고 라이드도 해줄게. 다만 궁궐처럼 넓은 새아파트에 살던 아이가 30년 넘은 낡은 집에 와 방바닥에서 자는 것이 좀 낯설겠지만서도, 라고 토를 달았더니 둘 다 머리만 닿으면 자는 유형이라 염려 없단다. 수십년 전인 대학 1학년때 친구가 딱 한번 놀러온 적이 있었는데, 맙소사 바로 그 동네 그 집으로 수험생 딸을 데리고 오다니 그 세월을 붙박이로 산 내가 참 징하다 싶었다.

 

문제의 논술고사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어젯밤 광역버스와 시내버스를 갈아타고 2시간도 넘게 걸려 온 친구와 딸을 버스정류장으로 마중 나갔다. 친구는 결혼 전 살던 친정도 천호동이었던 지라, 간만에 보는 강북의 구불구불한 도로와 언덕길과 언덕배기에 서 있는 주택 단지 구경을 신기해 했다. 대범하고 진중해서 늘 부모에게 아무런 걱정도 끼치지 않는 아이는 그래도 심적인 부담이 컸던지 밤중에 체기가 있었다. 손과 등을 주물러주다가 결국엔 찬바람 쏘이러 밤동네를 걸어다니다 편의점에서 물약 소화제를 사먹였다. (그나마 '의약외품'이라며 이름이 '가스 활'로 끝나는 소화제를 팔아서 얼마나 다행스럽던지. 간단한 소화제나 감기약은 진짜 편의점 판매를 법적으로 허용해야 한다규!! 의사, 약사들은 쫌!!)

 

시험시작은 8시 반이라는데 입실제한은 7시 50분. 차로 가면 우리집에서 늦어도 15분이면 가니깐 염려 말라고 해도 집에서 6시 반에 나서야 하나 말아야 하나 두 모녀는 걱정이 컸다. 작년 수시때 학교앞 도로가 완전 꽉 막혀서 4.5km 가는데 한시간 반이나 걸려 결국 눈썹 휘날리게 뛰는 아이들이 엄청 많았다나 뭐라나. 후문으로 질러 들어갈 거라서 그럴 염려 없다고 큰소리는 쳤어도, 결국 다섯시 반을 기상시간으로 정했다. 아침은 6시에 먹는 걸로.

 

6시에 아이를 깨워 (나름 심혈을 기울인) 밥상을 안기고 6시 50분에 집을 나섰다. 늦는 것보다는 일찍 가서 기다리는 게 낫단다. 후문을 들어섰을 때만 해도 간간이 안내하는 ROTC와 경비원 아저씨들이 보이긴 했으나 아무래도 너무 일찍 왔다 싶었는데 웬걸, 본관 앞 인문관 근처부터는 길 몰라 헤매는 차들이 벌써 엉켜 빌빌대고 있었다. 7시를 갓 넘긴 시간인데도 구름처럼 몰려 걸어들어오고 있는 인파, 인파들... @.,@ 등교시간에도, 졸업식 날에도 캠퍼스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건 본 적 없었는데, 정말 난생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하기야 친구 딸이 원서를 넣은 학과만 따져도 시험보는 애들이 무려 3천명이란다. 이과라서 오전 시험이지, 문과는 11시 반까지, 사회과(?)는 1시까지 나누어 등교시켰으니, 첫 시험 끝나고 나가는 아이들 들어오는 아이들 겹쳐지는 시간 무렵엔 인파가 더욱 어마어마할 거라고 했다. 어휴... 벌써부터 인근 호텔에 방을 잡아놓은 친구들이 더러 있다는 말도 들었는데, 시험장에서 만난 아이의 반친구는 방을 구하지 못해 엄마와 함께 찜질방에서 자고 왔다고 했단다. 그간 대학 입시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만 여겼는데, 그 치열한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보니 아이들의 무한경쟁이 실감났다. 그 많은 아이들 중에서 수시로 뽑혀 그 학교에 다닐 아이들은 과연 몇이나 되려는지...

 

수리논술은 워낙 대학에서 낸 출제 문제가 어려워서 80%가 0점(!)이고, 1문제만 풀어 18점만 맞으면 합격이 보장된다고 했다. 시험장인 공학관 바로 앞에 친구와 딸을 내려주고 행운을 빌었다. 평소 실력대로만 해! 후문과 달리 아수라장으로 변해 경찰 수십 명이 빨간봉을 휘두르고 호루라기를 불어대는 정문을 어렵사리 빠져나와 집으로 오며 한숨을 푹 쉬었다. 나 학력고사 보던 옛날엔 대학입시도 참 간단했는데 요즘엔 뭐든 참 복잡하고 어려운 것 같다. 수시 입학원서는 여섯 군데로 제한이 있고, 수시 합격생에게도 학교별로 수능 과목 등급 제한이 있으며, 정석검사니  특기니 해서 모집 분야도 다양하단다.

 

아까 시험 끝나 집으로 돌아간다는 친구의 연락을 받고, 일부러 시험 잘봤더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한달 밖에 남지 않은 수능인데 뭣하러 나까지 스트레스를 주나 싶어서. 이제껏 나는 '수시' 얘기를 들으면 반사적으로 '스시' 생각이 나면서 군침이 돌았었다. 그런데 이제는 '수시'란 낱말과 함께 오늘 아침에 본 그 어마어마한 인파가 떠오를 것 같다. 옛날에 입시 치러서, 옛날에 취직해서 좋았었다는 말을 입에 올리는 일이 점점 잦아지는데, 그렇다고 '요즘'을 살지 않을 수도 없으니 참, 이래저래 맥이 빠진다. 과거를 황금기로 추억하는 것보다는 지금 여기 현재를 사는 게 중요하다는  걸 새삼 떠올려야 하나. 10년, 20년 후에 또 오늘을 떠올리며 그때가 팔팔하고 좋았지, 그럴 인간이 분명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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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절기

투덜일기 2012. 9. 18. 18:09

무서운 고양이 사진이 너무 많기도 하고 가끔 고양이 물품과 관련하여 어쩐지 마음에 안드는 구석이 있어서 즐겨찾기에서 지워버렸던 스노** 사이트. 지금도 즐겨찾기에 들어있지는 않지만 이따금 궁금해져 찾아가본다. 어차피 주소도 어렵지 않고... 아마도 이유는 그곳 주인장이 스스로 우울증, 조울증 심증을 고백하며 블로그는 아예 닫아버렸기 때문인 듯하다. 그냥 남들이 지나가는 말로 증상이 그렇다고 하니까 겉으로만 인정하는 건지, 진짜로 상담이나 약물치료라도 받는 건지 염려스러운 마음이 드는 건 역시나 내가 환자의 가족이라는 점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심리적,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사람은 계절이 바뀌는 시기를 남들보다 조금 민감하게 넘기는 편이라는 것이 나의 오랜 관찰 결과인데, 일년에 네번이나 되는 환절기가 다 문제는 아니고 가장 불안함이 두드러지는 시기는 역시나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점과 가을에서 다시 겨울로 넘어가는 시점이다. 아마도 줄어든 일조량과 호르몬의 관계라지. 사실 나도 이거 우울증 아닌가 싶게 가을은 좀 힘들다.

 

암튼 낮이 하염없이 길었던 여름이 지나고 저녁이 좀 일찍 찾아온다 싶은 가을이 되면 어김없이 불안이 감지되는데, 그 시작은 지나친 씩씩함과 활동성이다. 외출할 일이 있으면 거기에 덧붙여 더 많은 '건수'를 만들어 온종일 돌아다니고 안하던 쇼핑도 막 하러 다니고, 양손 가득 무거운 찬거리를 들고 들어오기도 한다. 갑자기 집안일에 열의를 보이며 새벽부터 구석구석 먼지를 파내기도 하고 오래된 물건 정리도 하며, 그 어떤 잔소리를 해도 하하호호 기분이 좋다. 어떤 날은 집에 있으면서 종일 사방에 전화를 걸어 호호깔깔 목청 높여 대화를 한다. 잘 모르는 사람은 활기차고 건강해졌다며 반기는데, 절대 그게 아니다. 이른바 조증 상태이기 때문. 무기력한 울증 상태보다 더 나쁜 상황이고 곧이어 수렁같은 울증이 찾아올 것이라는 암울한 예고편이다.

 

오늘 문득 생각이 나 홈피에 가보았는데, 짧지만 비슷한 사연을 올려놓았다. 그래도 발전적이라며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상황으로 보여 다행이다 싶긴 하다. 하지만 붕 떠 있는 듯한 기분을 인정하면서도 아무것도 안하고 무기력하게 늘어져 쓸모없는 인간으로 사는 것보다 훨씬 낫다며 계속 의욕을 보이는 것은 조증 상태의 전형적인 반응. 그런 상황이 되면 나는 붕붕 떠 있는 마음을 끌어잡아내리는데 안간힘을 쓰면서도 대수롭지 않은 태도를 보인다. 늘 겪는 일인데 뭐, 좀 있으면 지나갈 거야, 걱정하지 마슈. 약 조절도 받았고, 일단 잠의 질만 더 나빠지지 않으면 최근 몇년 그래왔듯이 또 다시 수월하게 잘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여름 끝자락부터 내가 버럭버럭 성깔을 부리며 독 오른 짐승처럼 굴었던 건 어쩌면 환절기를 무사히 넘어갔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롯된 지레 겁먹기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계절은 바뀌었고 해는 확 짧아졌고 노친네는 부쩍 부지런해져 노상 바쁘다. 슬슬 체력 떨어질 때도 됐으니 고비도 머지 않았다. 약간 엄살을 부리는 것이면 좋겠으나 스노**도 노친네도 어서 바닥으로 내려왔다 다시 중간즈음의 평온을 되찾기를. 스산한 가을도 싫고 추운 겨울도 싫지만 내가 제일 싫어하는 계절은 역시나 환절기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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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이

투덜일기 2012. 9. 11. 02:41

언젠가 즐겨보는 퀴즈 프로그램 <일대백>을 보다가 의외의 순간이 있었다.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소망을 적은 <버킷 리스트>의 유래를 찾는 문제였는데, 1) 양동이를 걷어차다 2) 양동이에 물을 담다 3) 양동이에 구멍을 뚫다(;;였던가? 그새 보기 까먹었음)  세 보기 중에 답을 골라야 했다. 도전자로 나온 중년의 탤런트는 찬스를 요청했고, 출연자 가운데 정답자와 오답자 둘이 자신이 고른 답의 이유를 설명했다. 공교롭게 두 출연자 모두 명문대(!) 재학생이었는데, 중년의 탤런트가 '버킷'의 뜻이 뭔지 가르쳐달라고 묻자 두 청년 모두 모른다고 대답했다. 엥? 설마, 그 유명한 '바께스'를 탄생시킨 '버킷'을 둘 다 모른다고? 진짜? 방송이라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해 잠깐 생각이 안났을 수 있을 거라고 최대한 양보해보았지만, 보기 세 개에 죄다 '양동이'가 나왔는데, 설사 어쩐지 사람 이름 같은 <버킷 리스트>의 '버킷'이 'bucket'이고 뜻이 '양동이'란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해도 보기를 보는 순간 뜻을 유추하지도 못했다고? 그런 재치도 없으면서 퀴즈 예심은 어찌 통과해 거길 나갔을꼬!

 

옛날 서양에서 교수대에 양동이를 엎어 놓고 그 위에 올라선 죄수에게 올가미를 씌운 뒤 양동이를 걷어 차 교수형을 거행했기에, 'kick the bucket, 양동이를 걷어차다'가 '죽다'의 뜻으로 사용되었고 거기서 <버킷 리스트>가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까지는 대다수 사람들이 모르는 게 당연하다고 나도 생각한다. 그러니까 퀴즈 문제로 출제되었을 것이고, 따지고 보면 영어로 밥벌이 하고 있는 나도 까맣게 모르는 영어 상식이 부지기수다. 하지만 요즘 대학생들이, 그것도 사학의 양대산맥(?)인 명문대생들이 '양동이'를 모른다는 사실이 나에겐 퍽 의아했다. bucket이 수능단어에 안 들어가나? +_+

 

프로그램이 끝난 뒤 문득 궁금해진 나는 포털사이트 사전에 bucket을 쳐 확인해보았다. 영어공부에 열심인 나의 초딩 조카들도 아는 단어일 것만 같아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중1, 중3 단어라고 나왔다. '바께스'가 '버킷'에서 나온 말이라는 건 내가 우리말과 일어의 잔재에 관심이 쓸데없이 많은 사람이라 드물게 아는 걸 수도 있다. 일제시대를 겪으신 할머니, 할아버지와 오래 산 덕분에 그 외에도 '고뿌(컵/cup), 바나(버너/burner), 보께또(포켓/pocket), 도라이바(드라이버/driver), 도란스(트랜스/trans.), 라이방(레이밴/Ray Ban' 따위의 일본식 발음이 영어에서 비롯됐음을 커가며 알고나서 유독 신기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박정희 대통령 때문에 유행된 '라이방'이 선글래스를 통칭하는 외래어가 아니라 순전히 브랜드 이름이란 걸 알았을 때의 배신감이란!

 

수능 보고 대학 들어간 사람들이 어떻게 영어로 '양동이'를 모를 수가 있느냐고, 잠깐 깜빡 했거나 아예 몰랐더라도 보기를 보면 생각을 해냈어야 마땅하다고 괜히 씩씩대다가 문득 민망해졌다. 상대가 명문대 생이라니까 무조건 엘리트주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요즘 입시 시스템에 대해서 전혀 모르지만, 영어는 하나도 공부 안하고 다른 과목 특기생으로 들어갔을 수도 있지 않을까. bucket이 너무 쉬운 기본단어라서 수능 영어에선 안 다루어졌을지도 몰라. 아니, 수능 끝내고 나서 쓸데없는 입시 지식은 머리에서 샥 지워버렸을수도 있지. 게다가 영어단어 좀 모르면 어때! 전국민이 모두가 영어공부에 매달리는 사회가 오히려 이상한 거라고! 

 

그렇게 잠깐의 혼란을 정리하며서도 한편으로는 또 다시 요즘 아이들이 예전보다 공부하는 시간도 훨씬 길고 어마어마한 사교육비를 투자하고 있지만, 오히려 지적인 능력과 지식 수준은 과거보다 현저히 떨어져 이른바 명문대생이라는 아이들도 수업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다는 말이 사실인가보다는 생각이 머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퀴즈 프로그램에 나온 대학생 두명 겨우 본 거 가지고 내가 섣부르게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라면 좋겠는데... 아니면 어떡한다.

 

'문안한 선택, 어의가 없다, 명의회손, 회개망칙, 주최할 수 없는 슬픔...' 따위의 말을 철썩같이 맞다고 생각해 반복해 쓰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무겁다. 내게 '축하들여요'란 메시지를 벌써 여러 번이나 보내 기겁하게 한 후배 하나도 시방 교수가 되려고 공부중이다. 학교에서 발제문 같은 거 만들어 돌릴 때 맞춤법은 제대로 확인하는지 몹시 염려스럽지만 차마 물어볼 수도 없다. <죽기 전에 해야할 OO가지> 어쩌구 하는 책도 한참 유행이었고, 영화나 드라마 소재로도 유행이라 <버킷 리스트>가 뭔지는 알면서, <양동이> <바께스>가 뭔지는 잘 모르는 상황은 과연 괜찮은 걸까. 예나 지금이나 주입식 교육은 하나도 변함이 없고, 아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시간 공부를 강요당하는데 전체적인 지식수준은 하향평준화하고 있다는 혹자들의 개탄은 그냥 기우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떫더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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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집의 낡은 베란다 창문. 안닦은지 몇년인가 기억도 나질 않는다. 원래 그 임무는 내 것이 아니었으니까. 암튼 간간이 들이친 빗방울 맺힌 자리에 다시 흙먼지가 말라붙어 알공달공 희뿌연 창문을 볼 때마다 비오는 날 저거 한 번 닦아줘야 하는데... 하고 마음만 먹었다가 드디어 오늘 해치웠다. 생각은 워낙 오래전부터 했던 터라 지난 장마철에 다이소에서 천원짜리 땡땡이 비옷도 이미 사다뒀었다. 2천원짜리를 살까, 천원짜리를 살까 하다 어차피 한 번 입고 버릴 텐데 싼 거 사자 했더니만 ㅋㅋㅋ 이번엔 완전 싼 게 비지떡. 비닐이 어찌나 얇은지 스냅단추 채우다가 찢어지게 생긴 데다 모자가 작아서 머리가 다 가려지지도 않는다.

 

어쨌거나 비옷에 장화, 고무장갑까지 완전무장 하고서 물조리개에 물을 담아가지고 나가 휘휘 유리창에 물을 뿌리고 나서 문질렀는데, 닦을 땐 말끔한 것 같더니만 들어와서 보니 얼룩덜룩 제대로 안닦였다. 그나마 먼저 닦은 엄마네 마루쪽창문이 좀 더 깨끗하고, 우리집 창문엔 스펀지 지나간 자국이 부채꼴로 선명하다. 내가 하는 일이 그렇지 뭐. 그래도 안한 것보다는 낫다고 위로하고 있다. 일단 심한 흙먼지를 닦아내고 나면 마른 날 마른걸레로 슥슥 창문 닦는 게 수월하겠지. 과연 마른 날 창문닦기에 나서기까지 몇달을 또 벼르게 될지 자신은 없지만서도.

 

이왕 비옷 떨쳐입은 김에 비오는 날 또 하나의 숙원사업이랄까 로망도 실천했다. 다름 아닌 빗물 세차. 언젠가 영국에 살던 친구가  그랬다. 자기네 동네에선 비만 오면 아저씨들이 비옷 입고 나와 슬금슬금 자동차를 닦는다나. 그래서 비록 마일리지 엄청난 고물차일지언정 다들 차가 깨끗하다고. 직딩시절부터 나는 차가 더럽기로 유명했다. 아침저녁으로 출퇴근하는데 대체 세차를 언제 하냐고! (지금도 밤엔 세차장 영업 안 하지 않나?) 주말에는 놀러나가거나 밀린 잠 자야하고 말이지. 준백수인 요즘도 차는 쓰는 날보다 세워두는 날이 더 많아 차안은 깨끗한 편이지만, 차고 바로 위에 가지를 뻗은 앵두나무, 무궁화, 사철나무에서 왜들 그렇게 철철이 잎과 꽃이 떨어지는지 원! 특히나 누렇게 차체에 엉겨붙은 무궁화 꽃은 정말 더럽고 싫다.

 

요즘 특히나 걸핏하면 비 내리고 무궁화꽃은 계속해서 떨어져내려 차체에 말라붙었다가 시커멓게 썩어 심하면 똥같아 보인다고 엄마가 며칠 전 병원 가며 언짢아하셨다. 내 돈 내고 시키는 건데도 차가 너무 더러우면 세차장에 맡길 때도 좀 민망하다고 생각. 어차피 계속 내린 비에 먼지는 다 씻겨내려갔으니, 무궁화꽃이랑 잎 말라붙어 시커멓게 된 부분만 닦아주면 되는 일이었다. 역시나 고양이 세수하듯 걸레로 알량하게 얼룩을 지우고 들어와, 아까보다는 확실히 말갛게 변한 베란다 유리창으로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내다보고 있자니 퍽이나 뿌듯하다. 근래들어 처음으로 몸을 이롭게 써서 뭔가 보람있는 일을 한 것 같은 기분. -_-;

 

비오는 날의 마지막 푸닥거리는 아무래도 부침개로 마무리해야 할 것 같지만... 얼굴까지 튀긴 구정물  샥 다 씻고 나왔는데 또 온몸에 기름냄새 배게 하고 싶진 않다규~! 그러니까 오늘의 우천기념 푸닥거리 노동은 여기까지 하는 걸로. 아무려나 덴빈이 몰고온 비바람은 웬간히 하고 지나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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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비가 많이 내리고 있다. 이상하게 밤만 되면 미친듯이 쏟아지기를 여러날. 많은 사람들이 활동하는 낮동안에 내려 오가는 사람들 발목을 잡는 것보다는 그래도 밤새 요란하게 내리다 날 새면서 그치는 게 낫긴 하다. 헌데 밤중에 폭우가 내리니 간간이 동네가 시끄럽다. 요란한 빗소리도 빗소리려니와 저 아래 개천변에서 딩동댕동 경고방송이 들려오기 때문이다. 구청이나 소방서에서 담당자들이 야간 순찰을 도는 것 같진 않고, 최근 천변에 강우량이나 수위 센서 같은 것을 설치한 모양이다. 갑자기 폭우가 내린다 싶으면 발랄경쾌한 방송음악이 들리면서 뭐라뭐라 떠들어대는데 오늘밤에도 벌써 몇번째 반복되는 상황이다.

 

으음, 개천에서 언덕 위 우리집까지는 거리가 얼마나 되려나. 골목 입구에서 내려다보면 내부순환로와 그 아래로 흐르는 개천이 정면으로 보이니 그리 멀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니까 당연히 경고방송이 여기까지 들리는 것이리라. 이렇게 철철 비오는 한밤중이나 새벽에 개천변 산책로엘 대체 누가 나가겠냐고 생각하지만, 그야 보통 사람들의 상식이 그렇다는 것이고 간혹 그 상식을 깨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꼭 있다. 실제로 몇년 전 비오는 날 바로 저 아래 개천변을 산책하던 사람이 하수구에서 쏟아진 물에 휩쓸려 변을 당했고 시신은 강화도 앞 한강에서 겨우 찾았다는 뉴스를 본 적도 있다. 그 사건 이후 폭우 내려 물 불어난 개천에 왜 하필 새벽같이 산책을 나갔느냐며, 그 사람을 미워한  배우자가 일부러 내보내 죽게 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동네에 돌기도 했다. 그러니까 폭우 쏟아질 땐 개천변에 출입하지 말라는 경고방송이 대낮이든 한밤중이든 상관없이 흘러 나오게 만든 건 잘한 일이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언덕 위 우리집에서까지 들리는 저 방송이 개천변 바로 옆에 있는 집에선 얼마나 크게 들릴까. 요즘 빗소리는 자던 사람을 깨울 만큼 요란하던데, 거기다 경고방송까지!

 

저 아랫동네 사는 사람도 아니면서 뭔 쓸데없는 걱정이냐 싶으면서도, 와르르 비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면 자꾸 신경이 그쪽으로 쏠린다. 아 또 짜증나는 딩동댕동 음악과 함께 경고방송 나오겠구나 싶어서. 벌써 몇번째 이맛살을 팍 구기며 짜증을 내다가 문득 생각난 게 있다. 일본 동북지방 대지진 때 쓰나미 경고방송으로 여러 주민의 목숨을 구했으나 본인은 탈출하지 못했던 여공무원 이야기다. 이 동네도 경고방송을 하든 말든 위험한 개천변에 내려갈 청개구리 같은 사람이 또 없으리란 법은 없지만, 경고방송 덕분에 위험을 모면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계속 방송을 이어하는 것도 아니고 정말 효과가 있긴 있나? 정말 유효한 조치였는지는 아마 나도 잘 모르고 이 동네 구청도 모를 것 같기는 하다만, 시끄러워도 참아야 하느니라, 참아야 하느니라 까칠함을 달래고 있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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