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에 해당되는 글 85건

  1. 2010.03.18 마지막 선물 14
  2. 2009.12.26 친구 전화 8
  3. 2009.12.14 타락마을 엠티 후기 19
  4. 2009.12.08 서글픈 고백 21
  5. 2009.11.05 지인과 지기 사이 13
  6. 2009.11.05 축의금 12
  7. 2009.06.15 그럴듯함 27
  8. 2009.04.04 관계의 강요 23
  9. 2009.04.02 4월인데 8
  10. 2009.03.03 한풀이 16

마지막 선물

삶꾸러미 2010. 3. 18. 15:30

"따지고 보면 '베푸는(?)' 사람의 자기 만족인것 같아요. 준혁의 마음을 알고 있었고, 또 그 마음을 한번도 제대로 돌아봐준 적 없는 세경으로선, 그렇게 해서라도 추억 한가지라도 더하고 싶었는지도 모르죠. 준혁이가 준 것에 비해 자신이 준게 너무 없다고 생각한 세경이 그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었을 거란 점에선 그 '선물'은 결국 자신에게 주는 것인 듯." - 미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문상의 절차가 어렵고, 낯선 이들과 홀로 애도의 인사를 나누어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웠지만 나 말고는 거의 아무도 갈 사람이 없을 것이 확실한 친구의 빈소에 나만은 가야한다고 마음을 다잡으며, 친구의 마지막 가는 길에 인사는 해야하지 않겠느냐고 스스로를 다그쳤는데 다녀오고 보니 그 역시 나를 위한 행동이었다. 마지막 인사도, 마지막 선물을 대신한 조의금도 결국엔 나를 위한 위로의 행동이었던 거다. 내쪽에서 단 한번도 먼저 연락한 적이 없었던 최근에도 그렇고 그 옛날에도 친구에게 받은 것에 비해 준 게 너무 없다고 느끼므로 그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어서. 그러고는 또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일상으로 돌아가 살아가기 위한 방편이었던 거다. 어쩌면 모든 선물이 받는 사람의 기쁨을 지켜보며 흐뭇해지고 싶거나 마음 빚을 갚고 홀가분해지려는 이기적인 행동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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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전화

투덜일기 2009. 12. 26. 15:38

어제 크리스마스라고 LA근처 사는 오랜 친구가 전화를 했다.
"크리스마스인데 너 왜 집에 있니?"
"요란한 날 나가 노는 거 사람 많아 복잡하고 싫다. 조용히 집에 있는 게 상책이지."
"드디어 OOO도 늙었구나. 예전엔 크리스마스 파티 다 따라다니고 종각 종치는 거도 보러 다니더니만."
"그러게, 그땐 미쳤었나봐."
일년에 몇번은 우체국 가야 하는 편지를 주고받던 이 친구와도 요샌 거의 몇달에 한번 전화통화 뿐이다. 그나마도 시간대를 잘 못맞춰서 생각만 하다 세월 다 보내고.

돌아보니 확실히 나이들어가며 매사에 시큰둥하고 게을러진다. 다른 데는 몰라도 멀리 있는 친구들에겐 카드든 선물이든 챙겨보내던 과거의 나는 사라지고 없다. 친구 선물 뿐만 아니라 그 언니들, 아들들, 남편 선물에다 그들이 사족을 못쓰고 좋아하는 오징어며 쥐포까지 바리바리 선물상자를 포장해 배보다 배꼽이 더 클지언정 꼬박꼬박 기념일을 챙겼던 정성과 에너지는 대체 어디에서 나왔을까? 미즈키님이 일본서 받은 선물 상자들 사진을 보면서도 아주 살짝 뜨끔했다. 10년전의 나였다면 아마도 오지랖 넓게 당장 강냉이 챙겨보냈을 텐데, 당연히 무심하고 딱딱해진 심장은 요동도 하지 않더라.
올해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딱 한장 쓰고 받았다. 문자는 꽤 여럿 받았는데 그런 거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좀 뜸들이다 몇시간 지난뒤에 하는 수 없이 답장 보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선배들한테는 내가 먼저 새해인사 문자 날렸던 것 같은데, 이젠 받는 것도 짜증스럽다니! 그때 내 문자 받았던 지금 내 나이 정도의 선배들도 아마 짜증났을 것 같다. 다 귀찮아! 그러면서 ㅋㅋㅋ
 
1, 2년에 한번은 내가 가든 친구가 오든 했던 먼거리 왕래도 벌써 3년이 넘어간다. 미서부로 이민간지 내년이면 25년인데 아직도 뉴욕엘 가보지 않은 친구는 해마다 휴가 때면 뉴욕에서 나와 만나 캐나다까지 다녀오자는 계획을 세워보지만, 친구에게든 나에게든 매번 크고 작은 일이 생겨 그 계획은 여전히 계획 단계다. 작년부턴 이왕 가는 휴가 까짓것 이탈리아에서 만나자는 원대한 꿈을 5개년 계획쯤으로 잡아보자 했는데, 그 친구도 나도 딸린 식구가 있으니 사실 쉽지 않은 꿈임을 잘 안다. 게다가 이놈의 불경기는 왜 이렇게 오래가는지 원! 

이러다 내년, 내년 미루기만 하는 거 아니냐고 풀죽어 하는 나에게 친구는 "설마 10년 안엔 보겠지!"라며 큰 인심쓰듯 말했고, 그 뒤에서 친구 언니는 "고수한테 안부전해줘!"라고 외쳐 함께 웃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통화할 땐 무슨 드라마가 재미있는지 의견교환을 빼먹었다. 지난번엔 일본 드라마를 잔뜩 추천 받았었는데. 다음 통화할 땐 내가 먼저 <미남이시네요>랑 <지붕뚫고 하이킥>을 꼭 보라고 권해줘야겠다. 벌써 봤는지도 모르겠지만.

크리스마스 이브에 근무시간 끝까지 일하고 퇴근한 친구와 크리스마스날 오후까지 자다말고 전화를 받은 나의 통화는 특별한 일 없이 재미없게 사는 게 어쩌면 <잘> 사는 걸지 모른다며 그렇게 또 잘 지내라는 말로 끝이 났다.  정말 잘 지내고 있는 건지, 이불속에 누워 한참 멍하니 있자니 한숨이 나왔다. 어쨌거나 요란한 날 빨간날은 무사히 지나갔고 주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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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2 엠티 날이 밝았다. 보란듯이 날씨는 쾌청. 타락마을 주민들이 움직이기만 하면 비가 오거나 날씨가 나빠진다는 징크스는 몇몇 새 주민들의 영입으로 깨진 게 틀림없다. 담날에도 춥기는커녕 하늘에 거의 구름 한점 없이 맑고 영상의 날씨라, 명색이 겨울 엠티인데 눈 쌓인 풍경 한 번 못 본 건 아쉬울 정도였다.

약속시간에 맞춰 넉넉히 집을 나서려던 계획은 현관에 놓인 고구마 봉다리를 보며 쿠킹호일에 싸가지고 갈까 말까 또 다시 고민을 하며 무너졌다. 잠자기 전엔 분명 호박고구마가 아니라서 주민들에게 쿠사리를 먹을 게 뻔하다며 안가져가기로 해놓고선 또 망설이는 건 뭔지! 정말 우유부단한 인간... 그래도 고구마 고민으로 마루에서 얼쩡거리느라 하마터면 빠뜨리고 갈 뻔 했던 달력과 증정본은 잘 챙길 수 있었다.
암튼 약속시간 15분 전에 벌써 도착했다는 부지런쟁이 미아의 문자가 날아올 무렵 내 위치는 화곡동. 신호등 운만 잘 맞으면 정각에 도착할 것이라 오만한 자신감을 품었으나 그건 오산. 김포공항에 들어가서도 이마트 찾아 헤매느라 공항을 다시 한바퀴 돌아야 했으니 일행을 만났을 땐 이미 10분 지각한 시간. 된통 키드님의 꾸지람을 들을 줄 알았으나, 다행히 더 늦게 오고 있는 벨로 때문에 무사히 넘어간 듯.
이번 엠티를 기회로 <홀로서기>를 강요받게 된 키드님이 적어온 쇼핑 목록에 따라 각개전투를 하듯 순식간에 쇼핑을 마치고 강화도로 출발한 시간이 얼추 세시 반이었다. 우리의 목적지는 강화도라고는 하지만, 약도상 강화대교 건너자 마자 나타나는 초입. 김빠지게 30분 만에 도착하는 게 아닐까 염려했으나 그래도 1시간 가까이 걸렸던 것 같다.
문제는 인간 네비게이션을 자랑할 때 필수인 약도 메모지를 집에 두고 온 것. 그래도 강화도는 여러번 가봤고, 비교적 간단한 약도 내용을 다 기억하고 있는 듯 해 잘난 척 앞장을 섰다. 내 기억으론 <강화대교 지나 강화 버스터미널 쪽으로 좌회전. 계속 직진하다가 인산저수지 앞 횡단보도에서 우회전. 바로 목적지>였다. 내 기억에서 한 가지 빠진 기점이 있었으니 바로 <안양대학교>. 버스터미널 쪽으로 좌회전한 건 좋았는데 중간에 삼거리가 나오며 여러 관광지 표지판이 적혀 있어 잠시 머뭇대느라 시뻘건 노선버스 아저씨한테 길 막았다고 빵빵 위협 구박을 먹기는 했지만 그래도 키드님과 파피의 문자 조언으로 그만하면 선방했다.

다락방까지 갖추어져 있는 펜션은 꽤나 흡족. 안에 들어가자마자 따뜻한 느낌이 참 좋았다. (그러나 이 지나친 난방은 밤새도록 몇몇 사람들에게 괴로움을 안겨주었으니... 으으으) 순식간에 과자 몇봉지와 귤을 까먹으며 저녁 먹을 시간을 기다린 우리는 놀랍게도 손이 빠르신 키드님의 양상추와 오이 씻기의 신공으로 <먹고 마시기> 준비를 일사천리로 끝냈다. 반드시 <강화도 호박고구마>를 먹겠다는 일념으로 마트에서도 고구마를 안 사고 근처에서 조달하기로 했던 우리의 염려 또한 키드님의 수완으로 해결되어 주인 아주머니로부터 깔끔하게 제공받았으며, 홀로 고기 굽고 자르고 소금/후추 뿌리는 솜씨까지 모두를 만족시켰으니 그의 홀로서기 프로젝트는 완벽하게 완수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대는 하산하시오~.

약간의 문제는 그래도 겨울이라고 쌀쌀한 날씨에 얼른 방으로 돌아와 시작된 2차 음주 자리부터 시작된 듯하다. 연일 이어진 야근으로 피로가 쌓인 벨로는 차안에서부터 틈틈이 눈을 붙이더니 방에 들어와서는 아예 소파에 누워 맥을 못추며 사방에 잠가루를 뿌려대기 시작했다. 피곤벨로가 초저녁 내내 눈을 반짝이며 깨어있던 순간은 달력 뽑기 이벤트와 타락마을 싼타 키드님의 선물공세 때 뿐이었다. 다크호스로 기대하던 지다님도 배가 아프다며 이불을 배에 두르고 누워 술마시기 보다는 아이팟과 놀기에 더 흥을 보이질 않나, 이미 이전 엠티에서 구토키드의 별명을 습득한 키드님도 초반부의 강세가 급격히 기울며 11시도 되기 전에 살짝 취해 같은 질문 또 하기 신공을 발휘하질 않나, 기대주 파피 또한 술집에서 마실 때는 강해도 엠티에선 은근히 약하다며 일찌감치 쓰러질 것을 예고했으니, 이번 엠티를 위해 집에서 간간이 캔맥주로 미리 간을 단련해온 나로서는 맥이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벨로를 엠티 내내 <잠만 처자게> 할 수는 없다며 파피가 불끈 주먹을 쥐고 달려나가 주인아주머니에게 커피믹스 세 통을 공수해 와 얼른 타먹인 덕분에 뒤늦게 커피파워로 버티기 시작한 벨로를 마구 독려하며, 나는 은근 다크호스 미아와 파피를 술동무 삼아 최소한 2, 3시까지는 술자리를 이어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 무렵 구토키드는 계속 들락날락 홀로 괴로워하고 있었고, 지다님은 일찌감치 방에 들어가 취침 중.
허나 이미 세력을 장악한 잠의 기운은 한 사람씩 쓰러뜨리기 시작하였으니, 벨로의 커피파워를 깨워놓은 파피가 제일 먼저 자리에 눕고 잠깐 눈을 붙이겠다던 미아도 그 옆에 드러눕고, 남은 사람은 바깥 계단에 홀로 앉아 괴로워하는 키드님과 치뻗는 커피파워를 주체 못하는 벨로와 나뿐.
"실망이야, 실망이야, 다 실망이야"를 외치고 있던 나도 어지간히 취해 있던 터라 키드님을 집안으로 들여 놓고는 자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는데, 그 사이 초인적인 커피파워를 발휘한 벨로는 재빨리 뒷정리를 하고 설거지까지 해놓지를 않나 놀라운 뒷심을 발휘했다.

나의 잠자리는 키드님이 예고한 대로 격리실 다락방. ^^; 가파른 계단을 한발씩 올라가 누운 건 좋았는데, 아 곧이어 느껴지는 타는 목마름. 아슬아슬 다시 계단을 내려가 벌컥벌컥 물을 마시고 한 컵 떠가지고 다시 위로 올라가보니 실내 기온이 무려 29도였다. 하필 내 머리맡에 있던 온도계는 계속해서 틱, 틱, 보일러 작동음을 알려주고, 온도를 내려도 여전히 방은 숨막히게 덥고, 목은 마르고... 하는 수 없이 나는 생수병에 물을 잔뜩 담아갖고 올라와 자다 깨서 마시고 또 자다 깨서 마시고... 자는둥 마는둥 괴로워하며 문득 깨달은 것은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작게 코고는 소리! 아... 나 말고도 누군가 살살 코를 고는구나 누워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너무 더워서 다락방 창문을 좀 열어놓고 또 깜빡 잠이 들었을까 갑자기 누군가 내 귓가에 대고 막 떠드는 소리가 들려 벌떡 일어났다. 아직은 깜깜한데 밖에서 일렁이는 손전등 불빛. 건너편 펜션에서 사람들이 왁자지껄 잔뜩 쏟아져나왔다. 시간은 겨우 5시. 미친 인간들이 새벽낚시라도 가는 듯... 다시 드러누웠지만 여전히 방은 덥고 머리는 아프고 속은 괴롭고... 아 왜 그리도 과음을 했던고. 후회막급이었다.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또 다시 나를 깨운 건 난데없는 알람. 파피가 혼자 상경을 시도해보려는 욕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파피야, 가지마." 미아의 간청이 들리고 그래도 가겠다고 나서는 듯한 파피. 아직 날도 새지 않은 캄캄함 속에 어딜 가겠다는 건지! 나는 또 다시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파란 털모자를 쓰고 굳이 먼저 가겠다고 나서는 파피에게 손을 흔들었다. 잘 가.. 혹시 버스 못 타면 다시 와라. 분홍색 곰돌이 탈을 뒤집어 쓰고 자고 있던 키드님도 벌떡 일어나 파피에게 손을 흔들었다. 잘 가요....

깨질 것 같은 두통 때문에 다시 눈을 떠보니 드디어 아침. 미아와 파피가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고 키드님은 간간이 일어나 밖에 나갔다 와선 다시 끙끙대며 앓고... 어라.. 파피 안 갔네? 그제야 내가 손을 흔들어주었던 파피가 못보던 새파란 모자를 쓰고 있었고, 키드님의 분홍색 곰돌이탈도 떠올랐다. 그게 꿈이었구나. 키키키. 하지만 얼굴과 뱃속은 웃을 형편이 아니었다. 으으윽 머리아파~~

아침 시간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깊은 잠을 자면 금방 나아질 것 같은데 이미 날은 밝았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세상의 소음... 부지런쟁이들은 배가 고프다며 아침까지 챙겨먹었지만 나는 슬며시 날아드는 라면국물 냄새도 거북할 정도.. 뇌와 두개골이 따로따로 출렁이는 느낌이었다. 이 얼마만에 느껴보는 극심한 숙취인지. 어휴... 생각해보니 제주도는 <여행>이라 밤마다 몸을 사렸고, 이토록 음주에 매진한 타락마을 엠티 경험은 처음이었다. 키드님을 제외하고 엠티 경력이 꽤 되는 다른 분들이 왜 전날밤에 몸을 사렸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몸을 안 사렸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으니까! 가장 극심한 숙취에 시달린 키드님과 나도 다음번엔 확실히 살살 달리겠지.

지다님의 젤리카메라에 찍힌 담날의 몰골은 아마도 십수년전 과음 후 새벽 백사장을 달린 뒤끝에 온종일 팅팅 불어 있던 모습과 다르지 않을 것 같아 두렵다. 그러면서 드는 의문. 타락마을 엠티 담날은 다들 그렇게 빌빌대다 암것도 못하고 헤어지는 것이 전통인가요? 멀미지다님 때문에 크게는 바라지 않았지만, 12시 전에 체크아웃하면 귀가하기엔 너무 일러 외포항에 가서 석모도 가는 배라도 타고 갈매기한테 새우깡주기 같은 것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었음(물론 나는 갈매기 무서워서 새우깡 주는 거 싫어하지만!). ㅋㅋ 그런데 굳이 친절 베풀겠다며 배웅 나온 아저씨가 경치 좋은 해안도로로 잠시 돌아서 귀경하라는 데도 단박에 거절하는 타락마을 주민들! 다시 출발점에 일행들을 내려주고 집에 도착한 시각이 무려 2시. 나의 엠티 역사상 가장 빠른 귀가시간이었다. 

구구절절 쓸데없이 길게 썼지만, 타락마을의 1박2일 엠티를 한 줄로 요약하면 맛난 고기와 술먹고 수다떨다 꽥.
 ^^; 하기야 엠티가 다 그렇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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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글픈 고백

투덜일기 2009. 12. 8. 16:19

나이가 늘어날수록 자신감도 늘어나던 때가 있었는데, 이젠 확실히 나이와 함께 자신감이 줄어듬을 느낀다. 어쩔 수가 없다. 각별히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마흔을 넘기고 난 뒤의 나이듦은 성숙을 지나 노화를 향할 수밖에 없나보다.
지난 몇년 새 내 자신감을 특히 좀먹기 시작한 신체적 노화 증상은 바로 노안, 코골이, 흰머리다.

사람에 따라 30대 중반부터 시작되기도 한다는 노안은 <중년안>으로 이름을 바꾸어 불러야 한다는 이야기도 들리지만 어쨌거나 그게 그거다. 노안 대신 <중년안>이라고 박박 우기는 게 더 서글픈 느낌이다. 몇년 전부터 친구들이 휴대폰을 최신형으로, 최대한 액정 큰 기종으로 바꾸면서, 작은 액정에 뜨는 글씨는 당최 보이질 않는다고 할 때는 나도 별 생각이 없었다. 내가 문자를 보내면 답 문자 보내는 게 골치아파 대신 전화를 걸어오는 친구들을 늙은이라고 놀리며 그들보다 한두 해 젊은 걸 기뻐했던 것 같다. 그때 친구들이 장담했었다. "너도 금방이다! 두고봐라."
아직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받는 게 어려운 정도는 아니지만, 이제 나도 명함에 박힌 제일 작은 글씨라든가 화장품 상자 구석에 적힌 작은 글씨들을 읽으려면 안경을 벗고 초점을 맞춰야 한다. <노안>이란 안구와 수정체, 각막 따위의 탄력이 떨어져 순식간에 초점을 맞추기 어려운 현상을 말할 거다. 처음엔 안경을 벗거나 눈을 찌푸려 애써 초점을 맞춰야 하고, 좀 더 지나면 돋보기의 힘을 빌어야 하는... 
벌써부터 휴대폰 문자를 보낼 때 휴대폰을 코앞에 두는 게 아니라 멀찌감치 떨어뜨리고 느릿느릿 문자판을 찍는 친구들의 모습이 곧 내 모습이 될 거라 생각하면 그야말로 서글프고 괜히 억울하다. 어려서부터 눈이 나빠 고생했으면 노안이라도 건너뛰어야 공평한 거 아닌가!

노안 만큼이나 보편적인 노화현상인 코골이도 나에겐 제법 충격적이었다. 지나치게 예민해서 누가 옆에 있기만 해도 잠을 못잔다고 타박하던 인간이 코를 골다니. 평소에 코를 골지 않던 사람들도 심히 피곤하면 코를 고는 수도 있다고는 하지만, 어쨌거나 어려서부터 얌전한 잠버릇으로 유명했다던 내가 자기 코고는 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을 때의 놀라움과 슬픔은 이루말할 수가 없다. 코골이는 목젖이 늘어지거나 비강이 좁아져 생기는 현상이라고 알고 있다. 마흔 넘어 뺨이 쳐지는 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보이지 않는 목구멍 살까지 쳐지고 말았다는 얘기가 아닌가! 옆에서 확인해줄 사람이 없으니 나의 코골이가 얼마나 심한 정도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나 또한 코고는 여자가 되고 만 것이다. (코골이가 얼마나 심한지 궁금해서 녹음기를 틀어놓고 자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걸 확인하는 마음은 더 무거울 것 같아 관두고 말았다.)
요가 강습은 매번 맨 마지막에 팔다리를 약간씩 벌린 채 힘을 쭉 빼고 가만히 누워있는 자세로 끝이 난다. 어둑한 조명과 따뜻한 열기 속에 낑낑대며 몸을 쓰다 드러누워 있노라면 그 3분에서 5분 사이가 참으로 평화롭게 느껴지긴 한데, 놀랍게도 그 짧은 시간에 잠드는 사람이 (가끔 잠드는 어린 정민공주 말고도!) 있다. 의식적인 호흡에는 소리가 나지 않지만 누군가 까무룩 선잠이라도 들라치면 쌕쌕 숨소리가 달라지고, 간혹 가늘게 코고는 소리가 들린다. 5분 뒤 요가 강사가 손가락발가락을 살살 움직이라고 하면서 휴식에서 일깨워주어도 모른 채 잠들었다가 다들 일어나 앉는 소리에 퍼뜩 깨어나는 이를 보노라면 얼마나 피곤했을까 안쓰럽기 보다는 거기서 코까지 골며 잠들 수 있는 무던함이 부러울 정도다. 그러면서 코골다 깨어난 강습생의 나이를 유심히 가늠하며 나를 위로한다. '그래... 쟤는 20대 후반밖에 안됐는데 벌써 코를 골잖아. 넌 40대에 접어든 중년이야. 코 고는 게 큰 흉은 아닐 나이잖니...' 하지만 아무리 자위해 보아도 슬픔은 가지지 않는다. 
게다가 ㅌㄹ 마을 엠티도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조심스러워서 어디 잠이라도 잘 수 있겠나. 생각 같아선 이번 기회에 나의 코골이 수준이 어느정도인지 확인해달라고 하고 싶지만, 오랜만의 떼 취침에 내가 먼저 잠들 수 있을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얼마 전엔 흰머리를 한꺼번에 일곱개나 뽑았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나보다 네 살 어린 막내동생은 20대 중반에 이미 염색이 필요할 만큼 흰머리가 많았고, 큰동생 역시 이젠 머리숱이 적어져 흰머리를 뽑는 게 아까운 지경이 되었으니 같은 유전인자를 타고났을 동생들에 비해선 내 상태가 양호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새치를 한둘씩 보이는 아이들과 달리 얼마 전까지는 새치 하나 없던 사람에게 생겨나는 중년의 흰머리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몇년 전부터 여기저기 가끔씩 보이는 흰머리를 하나 둘 뽑을 때는, 흰머리가 아니라 <새치>라고 극구 우겨보았지만 요번에 양쪽 귀언저리에서 집중적으로 서너개씩 흰머리를 뽑고 나니 귀밑머리부터 센다는 전형적인 노화현상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사실 친구들 가운데는 스스로 스컹크가 되었다며 염색을 하지 않고는 절대 나다닐 수 없을 정도로 백발이 성성해졌음을 토로하는 이도 있으며, 흰머리를 뽑기는커녕 한 오라기라도 소중히 보호해야한다면서 두드러진 흰머리를 중후함의 상징이라 자랑하기 시작한 친구도 있다. 하지만 흰머리에 대처하는 방식이 누구나 다르듯, 몇가닥이든 수십가닥이든 수백가닥이든 본인이 느끼는 충격의 정도는 다를수밖에 없다는 것이 문제다.

실제 나이가 어떠하든 누구나 동안을 추구하고 젊고 튼튼한 육체가 아니면 손가락질 받는 연령주의가 팽배한 이 사회 분위기에 편승할 필요는 없다고 나의 이성은 부르짖고 있지만, 두드러지는 노화의 증거 앞에 이토록 맥이 빠지는 걸 보면 속으론 그 흐름을 거스르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이라는 의미다. 사회적 잣대를 들이대는 <나이값>이라는 말이 싫어서 나이와는 상관없이 <나답게> 사는 걸 무모한 철없음과 동격으로 여기며 살고 있다 여겼는데, 이런 두려움은 결국 사십대의 나이값인 듯해서 마음이 아프다. 더욱이  내 정신은 아직 중년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데 내 육신은 이미 앞서 노년을 준비하고 있으니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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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 아는 사람
친구: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
벗: 비슷한 또래로서 서로 친하게 사귀는 사람
동무: 1. 늘 친하게 어울리는 사람.  2. 어떤 일을 짝이 되어 함께 하는 사람
지기: <지기기우>의 준말. 자기를 잘 알아주는 친구. 자기를 잘 이해해 주는 참다운 친구.

쓸데없이 개인사를 많이 털어놓는 블로그라 부지불식간에 글에 등장하는 <지인>들이 꽤 되었는데, 결국엔 나에게 그만큼 쓸데없이 <지인>들이 많다는 이야기도 되는 듯하다. 물론 나의 블로그에 자신이 등장했음을 아는 <지인> 정도라면 그냥 아는 사람이 아니라 <친구>이거나 <지기>인 경우가 많아, 뭉뚱그린 <지인>의 호칭에 슬며시 불만을 표하기도 한다. 하지만 <친구>라고 하면 어쩐지 <벗>과 비슷하게 비슷한 또래여야 할 것 같은 강박증이 들어 나이가 밑이거나 위인 친구에게는 막연하게 거리를 두는 <지인>이라는 표현을 들먹이고 말았던 것 같다.
이번에 새삼 <지인>부터 친구를 뜻하는 여러 낱말을 찾아보고 나니 반성이 필요하긴 하다. 영화 <아는 여자>에서 <그냥 아는 여자>라는 정재영의 소갯말에 이나영이 얼마나 상심했는지 남녀관계를 떠나서 얼마나 공감했던가. 이쪽에선 뭔가 특별한 관계라고 여겼는데 저쪽에선 <그냥 아는> 사이로만 규정하고 있거나 믿음을 저버리는 해악행위까지 서슴지 않는 위해인물임음을 깨달았을 땐 마음의 상처를 피할 수가 없다. 얼른 관계 재수정에 돌입해 처리하면 그만일 수도 있겠지만, 기대에 대한 배신감이랄까, 인간 자체에 대한 실망까지 겹쳐 그간의 모든 다른 관계까지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게 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 쪽에선 정말로 <그냥 아는> 사이로 남았을 뿐인 관계인데도 상대쪽에서 뭔가 특별한 관계로 인식하고 있다는 낌새를 보이면 차마 냉정하게 쳐내지 못하고 뒷구멍에서나 구시렁거리게 된다. 세월이 좀 더 지나면 어떻게든 정리가 되겠지, 그런 한심한 바람이나 품으면서.

작년에 휴대폰을 바꾸면서 전에 있던 휴대폰에 저장됐던 번호를 모조리 옮기긴 했지만 상당수의 번호를 과감히 지우고 정리한 뒤엔 <가족> 외에 딱히 유용하게 정리해두진 못했던 그룹별 번호 정리에 돌입했었다. 휴대폰을 을 잃어버려 나쁜 사람 손에 들어가는 경우를 대비하여 <가족> <친구> 따위의 솔직한 그룹명은 피하는 것이 좋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설마 그런 일이 나에게 벌어지겠어 싶은 생각에 난 고집스레 가족/친구/동창/후배/선배/er/비즈니스/기타/받지마 9개의 분류를 정했다. 물론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이들은 첫 그룹인 <미지정>에 남겨둔 채로. (예를 들어 ㅌㄹ 주민들은 아직 미지정 그룹에 속한다 ^^; 블로그이웃이라는 그룹을 만들 수도 있겠지만, 좀 더 세월을 견디다 고민 없이 친구 그룹에 넣을 수 있는 사이가 될 날을 꿈꾸는 중이다;;)

처음 그룹을 일일이 나눌 땐 벨소리도 다르게 해서, 전화오는 소리만 듣고도 척, 어떤 부류의 인물인지 알아보겠다는 심사였으나 당연히 뻘짓이었다. 내가 9종류나 되는 벨소리를 기억할 리가 없지 않은가.
우선은 가장 많이 울려대는 <가족>의 전화를 차별화하고, 자다가도 안잔 척 목소리를 맑고 씩씩하게 내야 하는 <비즈니스> 전화의 벨소리만 식별하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친구>와 <동창>을 굳이 나눈 이유야 뻔한 것일 텐데, 내 경우는 <후배>와 <친구>의 분류에서 이리저리 고민을 좀 해야했다. 나이로는 밑이지만 이래저래 연이 닿은 지인들과 차츰 동등한 우정을 쌓아가다 보면 그냥 <후배>라고 칭하기 미안한 느낌이라 <친구>라고 불러야할 것 같기 때문이다. 나이로는 선배뻘이지만 당연히 친구 폴더에 정리된 사람들도 물론 존재한다. 하기야 싸이월드 시절 일촌에도 급수를 나눠야한다고 여겼던 것처럼, <친구>도 사람마다 심리적 거리감이 퍽 다르다. 사전상의 뜻처럼 가깝게 오래 사귀었어도 새삼 멀어지는 과정에 있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오래 사귀지 않았어도 누구보다 가까움을 느끼는 친구도 있으며, 멀찌감치 오래 사귀어 친구로 여겨지는 이들도 있다. 유독 <지기>라고 마음속에 꼽아두게 되는 이도 있음은 물론이다.

쓸데없이 넓고 얄팍한 인간관계는 과감히 청산하는 것이 나에게 이롭다는 생각은 이미 10여년 전부터 해왔지만 게을러서, 매몰차지 못해서, 맺고 끊음이 불명확해서 질질 이끌려온 관계로 엮인 <지인>들이 아직도 꽤나 많은 것 같다. 가끔 나를 친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인맥확장을 위한 디딤돌이나 그밖의 쓸모로 <이용>하려는 지인들에게 뒤통수를 맞은 적도 몇번이나 되면서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는 생각에 씁쓸하다. 이제부턴 정말로 서로 마음 다치지 않을 사람들로만 벗과 동무를 삼아 <지기>로 발전시키는 데 노력을 기울일 테다. <그냥 아는> 사람들에게 허투루 쏟아부을 에너지와 감정이 이젠 몹시 아까워졌다. 드디어 내게도 방만한 인간망 정리의 시기가 왔나보다(사실 이 말도 10년전부터 되뇌긴 했다. ㅠ.ㅠ). 늦었더라도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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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의금

투덜일기 2009. 11. 5. 14:55

이번주말에 이틀에 걸쳐 축의금을 내야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토요일은 돌잔치, 일요일은 결혼식.
원래 나는 주변인들의 대소사에 무조건 참석하는 편이었다. 좋은일이든 궂은일이든, 무얼 받을 걸 계산하고 미리 밑밥을 뿌린다는 생각 따위는 해본 적도 없다. 인간관계를 이어가다 보면 생일 같은 날을 챙기는 각별한 사이도 있고 <그냥 아는> 사이로 수년을 이어가다 스르르 잊혀지는 사이도 있기 마련인데, 내가 얼만큼 주었으니 또 얼만큼 받아야겠다는 계산이 깔린 관계만큼 서글픈 건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냥 문득 생각나고 뜻깊은 날엔 뭘 좀 챙겨주고 싶고 기쁜 일 있다면 달려가 축하해주고 슬픈 일엔 위로해주는 일이 <당연>하다고 느끼는 관계와 그런 감정적, 경제적 소모행위를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는 관계로 칼같이 나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제는, 청첩장이나 돌잔치 초대장을 받을 정도로 상대에게 비중있는 존재로 여겨졌다면 무조건 참석하는 걸 원칙으로 삼았던 과거의 나와 달리 요샌 뜬금없이 날아드는 <축의금 독촉장>이 괘씸해 버럭 화를 내는 일이 더러 일어난다는 점이다.

이번 토요일 대낮에 열리는 돌잔치를 갈까말까 고민하는 이유는, 장소가 워낙 멀고(분당선 종점이다) 혼자 가야한다는 것 때문인데 만약 장소가 강남쯤만 됐더라도 이렇게 고민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요번이 셋째인데 내가 학수고대했던 대로 공주님(!)이고, 위로 둔 두 아들 녀석도 나를 <고모>라고 부르며 함께 노는 걸 몹시 좋아하기 때문에 얼마 전엔 용인까지 가서 온 가족과 놀다 올 정도이니, 말로는 고민한다고 해도 갈 확률이 80%는 되는 듯하다. 요번에 돌을 맞은 아기공주가 태어났을 때 또 아들이면 아들 셋을 키워야하는지라 모두들 조마조마했었는데 딸이 태어나 나까지도 얼마나 기쁘던지, 그간 못해본 한풀이를 하듯 예쁜 여자아기옷을 사들여 택배로 보내주기도 했었다. 나의 지인은 엄마 쪽이 아니라 아빠쪽임에도. 이번 토요일에 혹시라도 돌잔치에 못가게 된다면 난 아마 미안함까지 겹쳐 대신 백화점에 쪼르르 달려가 돌잔치 주인공 선물은 물론이고 그 오빠들의 선물까지 사야한다며 객기를 부릴지 모른다. 차라리 멀고 외로워도 돌잔치에 참석하는 것이 빈약한 내 주머니를 위해선 이로울 듯;; -_-

하지만 이번 일요일에 결혼식을 맞는 지인을 생각하면 날이 갈수록 기분이 나빠진다. 결혼식장이 부산이라 당연히 갈 생각은 없었지만, 아마 서울에서 식을 올렸더라도 나는 누구에겐가 마뜩찮은 축의금을 들려보냈을 거라 여길 정도로 앞으로의 관계에 대한 희망은 전무하다. 별로 기대할 것 없는 인물이라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요번 결혼식을 앞둔 그녀의 행태를 보니 참 이기적이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결혼식장이 부산이면 초대하는 쪽에서 교통편을 마련해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과거 부산 결혼식에 두세번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매번 나는 새마을호(그땐 KTX가 없었다) 왕복표는 물론이고 두번은 호텔까지 잡아주어 전날 내려가거나 결혼식 당일날 신랑신부와 뒤풀이를 거나하게 한 뒤 아침에 다시 만나 해장국을 먹고 작별해 올라온 적도 있었다. 경상도 어드메쯤에서 있던 결혼식에 갔을 땐 아침 일찍 주최측이 마련한 관광버스를 타고 내려갔는데, 식이 끝나고 돌아오는 우리들에게 신랑신부는 관광버스에 올라와 막무가내로 하얀 봉투를 하나씩 나눠주기도 했다. 너무 멀리 오시게 해 죄송하다면서 올라가다 휴게소에서 군것질이라도 하시라는 의미라고 했다. 감격한 우리는 그 돈을 모아 간직했다가 나중에 집들이 선물 사이에 용돈으로 끼워주었고, 축의금도 주말 하루를 온통 소모한 시간도 아까운 줄을 몰랐었다.

헌데 이번 일요일 결혼식은 정말 축의금이 아깝다. 돌려받을 가능성이야 원래부터 염두에 없었으니 다 괘씸죄 때문이다. 그렇게도 최측근이며 절친임을 자랑하던 친구들에게도 그녀는 교통편을 마련해주지 않았단다. 오히려 친한 사이니까 그 정도 희생은 감수해야되지 않느냐는 식인 모양이다. 물론 지기의 경우라면 나 또한 내돈들여서라도 축하해주러 달려갈 용의가 있을 것도 같다. 간 김에 부산구경이나 하자, 그러면서 들뜬 여행계획을 세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초대할 때부터 서로에 대한 신뢰와 정이 돈독해야 가능한 게 아닌가! 
축의금을 들려 보내려고 내가 아는 그녀의 측근들을 접촉해보니, 그들 역시 마음이 몹시 상해 자기네도 갈지 말지 모르니, 축의금을 보내려거든 본인 계좌로 보내라고 권했다. 최측근에게도 <일단 부산에 내려오면 좀 보태주든지 하겠다>는 태도를 보인다니 대체 결혼식을 앞둔 신부로서 진정한 축복을 받고 싶기는 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혹시나 정말로 꿩먹고 알먹고, 호텔 밥값은 줄이고 축의금만 낼름 받아 챙기려는 이기심의 발로는 아닌가 하는 쪽으로 심증이 굳어지는 중이다.
어쨌거나 이번 결혼식 이후로 다시는 연락올  가능성이 없음을 간파한 나는  <옛다, 먹고 떨어져라>하는 심정으로 축의금을 보내기 위하여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축의금 전달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듯 하니 민망하지만 계좌번호를 알려달라고.  그랬더니 이런 답장이 왔다.
<언니.. 민망해하지 마세요! 계좌로 마니들보내셨어요..ㅋ저도첨엔참민망했는데..^^>
다음 메시지엔 당당히 계좌번호가 날아왔다.
생각해보니 축의금을 신랑신부 본인의 계좌로 보낸 건 이번이 처음이다. +_+
작년엔가 울산에서 결혼한 후배의 경우엔, 본인이 싫다는 걸 억지로 주소를 물어 우편환을 보내긴 했었다. 직접 가보지 못하는 대신 미안함과 축하의 말을 담은 카드를 써서 우체국에 가 전신환으로 바꾼 종이를 넣고는 등기로 부쳐야 했는데, 그런 잠깐의 수고도 거치지 않은 <인터넷 축의금 송금>이라니 정나미가 뚝뚝 떨어진다. 일생일대의 대사를 앞둔 신부로서 그렇게라도 축의금을 챙기고 싶었을까?

그렇게 찝찝하고 불쾌한 관계라면 축의금도 보내지 말고 무시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조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또 마음이 그렇지가 않다. 이것으로 완전히 청산될 관계라면 내쪽에서 조금도 찜찜하지 않게 개운한 마음으로 잘라버리고 싶은 심정이랄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조금 전 인터넷 송금하며 괘씸하고 불쾌했던 마음도 진정이 되는 것 같다. OO야, 소원대로 X사 부인 되었으니 잘 먹고 잘 살렴. 앞으로 다시는 우리 서로 연락하지 말자.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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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듯함

삶꾸러미 2009. 6. 15. 17:39

당신은 속설이나 미신, 사람들이 근거의 여부와 상관없이 그럴듯하다고 여기는 이야기들을 잘 믿는 편인가, 아닌가? 누가 이런 질문을 나에게 한다면, 대번에 <안 믿는 편이다>라고 대답<은> 할 것 같다.
현재 가장 널리 퍼져 있고 마케팅에도 이용되고 있는 듯한 <혈액형별 성격 분류>의 경우엔 정말이지 웃긴다고 생각하니까. A형은 소심하고 O형은 외향적이니 하는 게 정설처럼 여겨지고 있지만, 어떻게 모든 인류의 대표적인 성격과 심리를 단순히 네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단 말인가! 
모든 인간은 밖으로 드러내는 부분이 다를 뿐, 온갖 심리와 특징을 내포하고 있기 마련이다. 그 성격이 드러나고 개발되는 경향은 환경과 교육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와 일본 국민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세계인들은 평생 자기 혈액형이 뭔지 모르고도 잘만 살아가는데, 혈액형별로 공부법, 성공법, 옷입는 법, 연애법까지 버젓이 엄연한 진리로 회자되고 받아들여지는 상황을 보면 너무도 신기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도 어려서부터 혈액형별 성격 및 심리 유형에 노출된 나머지 그렇게 재교육되고 길들여지는 게 틀림없다. 내 주변에서도 참 많은 지인들이 혈액형 속설을 깊이 신뢰하며 친구끼리도 궁합과 코드가 서로 맞느니 안맞느니 할 때 혈액형을 들먹이다 나한테 쓴소리를 듣는다. 그래봤자 그들은 결국 "역시 언니는 A형이라 까다롭고 따지길 좋아해.."라고 일갈하며 내 말문을 막아버리지만.
물론 철석같이 믿진 않아도 재미삼아 보는 사주풀이라든지 타로점, 이름풀이 같은 기회를 나 역시 마다하진 않는다. 그러고 나서 그 결과가 내가 믿고 싶은 방향이거나 놀랍게도 내 생각과 일치하는 경우, 감탄과 함께 희희낙락 역시 타고난 운명이었어, 라며 잠시 즐거워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나도 말로는 속설이나 미신을 안 믿는다고 하면서 뒷구멍으로 솔깃해 하는 의지박약인이란 얘기일 수도 있다. 뭐라는 거냐냐, 이랬다 저랬다.
어쨌거나 얼마 전 블로그 이웃인 해리님의 전생과 관련한 포스팅을 보고 나도 재미삼아 내 이름 한자를 넣어 보았는데 그 결과가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 화면을 저장해두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난주 아버지 제사 때, 조카들이 대낮부터 깎은 밤이며 여러가지 제사 음식들을 먼저 먹고 싶어 안달복달을 하는 걸 본 엄마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말했다. "그런 거 보면 귀신 없다는 소린 못한다니까...."
영문을 몰라 내가 설명을 요구하자 엄마는 예로부터 아이들이 제사 때 제사음식을 먼저 탐하면 혼백들이 와서 먹을 준비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단다. 아이들의 영혼이 가장 맑아 통하는 구석이 있는 거라나 뭐라나.
물론 논리적인 사고로는 상황이 빤히 짐작되는, 말도 안되는 미신이다. 옛날엔 당연히 제사음식들이 귀했을 테고, 일년에 겨우 몇번 보는 귀한 음식을 접한 아이들이 입맛이라도 다셔보려면 자정 이후에 지내는 제사때까지 기다려야 했을테니 얼마나 안타까워 엄마를 졸라댔을까. 그걸 본 어른들이 만들어낸, 조상의 혼백이 정말로 제삿날 찾아와 차려놓은 음식을 즐기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조합한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짐작을 하면서도, 나 역시 제사를 지낼 때 정말로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의 혼백이 와서 지켜보고 계시는지 아닌지 확인할 수 없으되 마음속으로는 정말로 그런 것처럼 인삿말을 되뇌이며 절을 한다. 성묘를 갔을 때도 마찬가지고, "고수레~"라고 외치면서 땅신이든 부엌신이든 귀신에게 먼저 먹을 것을 바치고 그런 다음에 인간이 준비한 음식을 먹는 민간신앙도 꽤 그럴듯하고 재미나다 여겨 따라하는 편이다.
공포영화는 절대 못보고 보지도 않으며 인간을 괴롭히는 <무서운 귀신>이 있다는 건 믿지 않지만, 모든 사물에 혼이 깃들어 있을 수 있다는 범신론엔 또 고개가 끄덕여진다. 과학적인 사고로는 죄다 헛되다 손가락질해야 하는 것들임에도 그냥 내가 그때그때 느끼기에 그럴듯하면 귀가 솔깃하고 안 그럴듯하면 코웃음친다는 뜻이다.
나 또한 그렇기 때문에 별자리 운명이나 혈액형별 심리분석을 철저히 신봉하는 이들을 나무랄 수만도 없다. 내가 보기엔 100퍼센트 사기꾼이고 뚜렷한 증거도 있는 범죄자인데, 그런 사람을 <믿고> 한 나라의 지도자로 뽑기도 하는 세상에서 사람에 따라 어떤 믿음인들 그럴듯하지 않겠나. 결국 사람들은 그냥 <믿고싶은> 것일 뿐이다. 내 현재의 두뇌엔 정말로 놀 욕망과 돈 벌 걱정이 가득 차 있다고 믿고 싶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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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강요

추억주머니 2009. 4. 4. 22:01

국민학교 4학년때의 일이다.
그 시기에 특히 또래 집단들과의 긴밀한 우정이 형성되는 모양인지, 반엔 유독 끼리끼리 어울리는 무더기들이 많이 생겨났던 것 같다. 꽤 조용한 아이였던 나는 우정을 과시하듯 서너명씩 몰려다니는 그 아이들이 꼴같지 않기도 했고, 당시 유행하던 고무줄 놀이에 낄 수 없을만큼 엄청난 실력(밑바닥이란 의미다) 때문에 어차피 같이 놀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유독 나를 자기네 무리에 끌어들이려고 공을 들이는 아이가 하나 있기는 했다. H는 나와 집이 같은 방향이 아닌데도 괜히 빙 돌아서 시장 언저리까지 나와 동행하기도 하고, 친구들에게 막 우겨서 나를 고무줄 놀이 깍두기로 껴주었다. 나는 그 아이의 마음이 고맙다기 보다는, 1, 2단을 넘기지 못해 놀림감이 되기 쉬운 내 고무줄 실력을 아이들 앞에 보여야 한다는 게 곤혹스러웠지만, 그래도 나랑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의향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H의 바람대로 학기초에 써내는 가정환경조사서에 그애의 이름을 적어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기가 막히지만, 부모의 학력과 직업은 물론이고 집에 TV 따위의 가전제품이 있는지 없는지, 말도 안되는 항목까지 써내야 했던 그 종잇장에는 친하게 지내는 학우관계에 관한 항목도 있었고, 그 종이를 내기 전날 H는 나에게 다가와 "나는 친한 친구 이름에 니 이름 쓸 거니깐, 너도 내 이름 써야한다. 알았지?"라고 말했었다. 
H가 특별히 내 마음에 드는 것도 싫은 것도 아닌 상태에서 나는 그냥 귀찮아서 그애와 친구로 지내는 걸 <눈감아주기로> 했던 것 같다. 도시락을 먹을 때나 점심시간 이후 운동장에서 놀 때, 방과후 집에 갈 때도 난 오히려 요란하게 휩쓸려 놀기를 강요하는 분위기가 불편했음에도 거의 모두 끼리끼리 무리를 이룬 반 분위기 때문에 차마 싫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4월 중순쯤 우리반에 전학생이 등장했다. 뿔테 안경을 써 모범생 분위기가 나고 꽤 얌전해 보이던 그 아이는 전학생이 흔히 겪어야 하는 따돌림의 운명을 고스란히 겪기 시작했다. 학기초이긴 해도 이미 <파벌>이 형성된 이후에 전학을 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느 점심 시간 짓궂은 남자애들이 그애를 확 밀어 넘어뜨리는 장난을 한 순간 그애가 "아부지!"라고 외치며 울음을 터뜨린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대부분 아이들은 깜짝 놀라거나 위험에 처한 순간 본능적으로 "엄마!" 또는 "엄마야!"라고 하는데, S는 그러지 않았다는 사실이 모든 아이들에게 이상하게 비쳤던 거다.
육성회 임원인 엄마를 둔 H는 당장 자기네 엄마를 통해 S의 뒷조사에 돌입했고, 전학시키던 날 학교에도 온 적 있던 S의 예쁜 엄마가 친엄마가 아닌 새엄마라는 사실, 그날 등에 업혀 있던 유난히 어린 아기동생은 배다른 남동생이라는 사실까지 알아내 온 반아이들에게 떠들어댔다. 이혼율이 높아진 지금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당시엔 이혼이든 사별이든 재혼 가정이나 홀부모 가정은 무조건 <결손가정>이라며 잠재적인 문제아를 양산하는 가정으로 손가락질 했던 것 같다.
나도 2학년때 그 학교로 전학을 와 한동안 빙빙 겉돌던 기억이 있기도 했지만, 나는 새엄마와 함께 사는 S를 안쓰러워하진 못할망정(사실 나의 무작정 동정심도 문제였지만;;) 괜히 따돌리는 반아이들에게 분노했고, 마침 집도 서로 그리 멀지 않은 S를 우연히 등교길에 만난 날 나도 모르게 먼저 말을 걸었다. 그때도 친구를 본격적으로 사귀는 건 꽤나 뜸을 들이는 성격이라, 내가 S의 친구가 되어 주겠다는 의협심 같은 건 전혀 없었고 그냥 편견없이 전학생을 지켜보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와 S가 몇번 등하교를 같이 하는 것을 목격한 아이들은 즉각 수군대기 시작했고, H는 나를 운동장으로 불러내 <절교선언>을 했다. "S랑 같이 다니면 너랑 절교할 거야. 어쩔래?"라는 식으로 말하는 H에게 나는 기가 막혀서 니 마음대로 하라고 대꾸하고는, 보란듯이 S와 친한 척을 했다. 당연히 나까지 따돌림을 당하는 추세였는데, 어린 마음에도 나는 그들의 패거리 횡포가 부당하다고 느끼며 분노했다. 다행히 한동안 지켜본 결과 S는 나와 책읽는 수준도 비슷했고, 나처럼 운동도 싫어하는데다 나처럼 아기들을 예뻐해서 자기네 아기동생을 만날 업어준다고 자랑을 했다. 우리집보다 훨씬 책도 많은 S의 집에 놀러가 보니, 동화속의 악독한 새엄마들과 달리 S의 새엄마는 특별히 다정스럽진 않아도 그저 평범한 엄마였다.
내 인생의 책 첫권으로 꼽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도 바로 이 친구가 선물해준 책이었다. 여자애들의 전반적인 따돌림 속에서 나는 얼떨결에 S와 단짝이 되고 말았지만, 나에게 정말로 각별한 친구의 존재는 S가 처음일 정도로 반발심이랄지 분노에서 시작된 우정은 퍽이나 성공적이었다. 한편, 나에 대한 H의 응징은 단순히 절교로 끝난 게 아니었다. ^^; 자신의 우정을 <감히> 거부한 배신자(실제로 H는 고무줄 놀이에 나를 끼워주었던 무리들에게 나를 <배신자>라고 칭했다)를 가만둘 수 없었는지, 따돌림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은 듯 H는 화장실 낙서사건을 공모했다. 당시엔 재래식 화장실인 <학교 변소>에 남녀 학생의 이름이 나란히 쓰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스캔들이었다. 그런데 하트 속에 내 이름과 나란히 적힌 남자애가 우리반에서 제일 말썽쟁이에다 잘 안씻어서 더럽고 공부도 못하는 또 다른 왕따였다는 사실이 H가 꾸민 복수극의 핵심인 모양이었다.
화장실 벽에 분홍색과 노란색 분필로 그린 하트 속에 이름이 적히는 사상최대의 스캔들을 직면하고 엄청난 놀림을 받기 시작한(내가 지나다닐 때마다 아이들이 떼지어 "얼레리 꼴레리, 라니하고 OOO하고 얼레리 꼴레리~"라고 놀려댔다) 나는 처음엔 화가 나서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하지만 욱하는 성질머리와 삐딱한 반항심은 그때도 여전했는지, 스스로도 잘난 척하며 나와는 터무니 없는 조합이라고 생각하던 코찔찔 말썽쟁이 OOO에게 일부러 보란듯이 연필도 빌려주고 전에없이 다정하게 구는 것으로 대처하기 시작했다. 왕따들의 연대감이라고나 할까? 그때부턴 유독 잘난 아이들이 못되게 따돌리던 힘없는 아이들에게 마음이 쓰이기 시작했다. 유독 뚱뚱해서, 말을 더듬어서, 잘 안씻고 꾀죄죄해서, 숙제를 잘 안해와서, 그밖에 사소한 이유로 따돌림을 받던 아이들은 각자 받은 마음의 상처 때문에 쉽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드러내놓고 엄청 친한척을 하진 않았지만 심정적인 지지와 응원을 보내는 사이였던 셈이다.
마침 그해 담임은 2학기부터 이상하게 좌석배치를 자율에 맡기겠다며 조장 몇명을 임명하곤 마음에 맞는 친구들끼리, 대신 남녀 비율은 반반씩 섞어 조를 꾸리게 했다.  폐품수집이든, 환경미화든, 용의검사든, 학예회 준비든 모든 경쟁평가는 조별로 한다는 것이 원칙이었다. 조장으로 뽑힌 내가 멍하니 앉아 있는 사이, 이미 패거리는 정해졌고 나는 굳이 조원을 선별할 필요도 없었다. 아무데도 뽑히지 않은 왕따 아이들은 전부 우리 분단에 앉으면 되는 거였다. ^^
그래서 우리 왕따 조가 모든이들의 예상을 뒤엎고 전분야에서 최고 평가를 받았다든가 하는 드라마 같은 일은 물론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단언컨대 꼴찌 조는 우리가 아니었다. 육성회 임원 자식들이 대거 모여있던 H의 조가 단연 극성스러운 1등을 차지한 건 말하나 마나일 것이다. 하지만 왕따들도 모이면 힘이 세지는 걸 우린 느꼈고, 근거없이 화장실 벽에 이름을 적혀 스캔들을 내는 복수극 같은 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반에서 제일 키 큰 코찔찔 OOO이 주먹을 휘두르며 누군지 들키면 죽을 줄 알라고 으름장을 놓은 것도 효과가 있기는 했지만, 스캔들 당사자인 내가 바락바락 아니라고 하며 울고불고 해야 재미가 있을 텐데 오히려 의연하게 구니까 소문은 더 빨리 잦아들었던 것 같다.

쓰다보니 나 혼자 옛생각에 재미가 들어 쓸데없이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왜 내가 새삼 이런 사연을 적고 있는고 하니, 제목에도 적은, 최근 경험한 어떤 관계의 강요 때문이다. 나는 고집스러운 구석이 많아서 누가 느닷없이 강요하면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수긍하기 보다는 반발심이 먼저 생기는 편이고, 특히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결과적으로 상처를 입더라도 제3자의 판단을 따르기보다는 내가 스스로 겪고 판단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런데 꼭 나를 염려한다는 명분으로 관계를 대신 정립해주려 시도하는 이들이 있다. 지금껏 경험한 바로는, 그렇게 다가와서 간섭한 이들과 오히려 관계가 틀어지고 말았던 것 같다. 이러이러한 사람이 있으니 각별히 친하게 지내라거나, 새삼스레 그 사람 이런저런 사람이니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말을 지인에게 듣더라도, 나는 의심이 많은 성격인 때문인지 덜컥 그 말을 수긍할 수가 없다.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지만 십수년을 겪어도 뜻밖이라 생각되는 면을 발견할 만큼 한 인간을 파악한다는 게 어려움을 알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나는 느닷없는 관계의 강요에 제일 먼저 불쾌감을 느꼈다. S와 놀면 자기와는 절교라는 식으로 극단적인 협박을 한 H와는 전혀 다른 사건이지만, 어쨌든 나는 내 판단력과 관계망을 간섭하려는 그의 시도에 11살 때의 추억이 떠올랐고 부디 그때처럼 순전히 반발심으로 원래 관계가 흐트러지진 않기를 바라고 있다.

하기야, H와는 5학년에 올라가서 그녀의 진심어린 사과를 받아들이고 S와 함께 셋이 다시 친구가 되긴 했었다. 국민학교 졸업 후 그 둘다와 연락이 끊긴지 오래지만.
지금 그들은 또 어떤 관계를 맺고 살고 있을지 문득 궁금하다.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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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인데

투덜일기 2009. 4. 2. 17:42

어제보니 앵두꽃이 활짝 피었더라. 벚꽃보다 앵두꽃이 먼저 피는 거였는지 몰랐다.
그 역시 망할 내 기억력 때문이겠지만.
벚꽃도 며칠 안에 피겠던데...
많이 잘라내 성긴 가지에 핀 앵두꽃을 보며 새삼 멍했다.
봄꽃 피면 왜 꼭 다 팽개치고 꽃놀이 가야한다는 생각이 드는지.

요번엔 책 잘 만들 욕심(잘 팔 욕심?)과 욕 안 먹고 싶은 마음이 옮긴이나 만든이나 똑같아 다행이기도 하고 그래서 피곤하기도 하다. 난생처음 같은 책의 두번째 역자교정을 하며 눈알 빠지게 골치가 아프다. 어제 받은 원고 오늘 퀵으로 보냈어야 하는 일정이었는데 또 여전히 붙들고 낑낑대는 중이다. 카페인 힘을 빌어 잠을 안잤더니 마음이 바쁜데도 계속 멍하다. 머리가 맑아도 시원찮은 판국에!

만우절이 생일인 그리운 친구도 있고, 만우절에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난 장국영 때문에라도 4월의 첫날엔 뭔가 끼적이고 싶었는데 허둥지둥하느라 친구에게 전화 한통 못하고 멍청하게 보냈다. 시차 확인을 해보니 지금 LA는 밤 12시 40분이란다. 너무 늦었다. 서머타임이 시작됐는지 그것도 모르겠고. 이메일조차 없어 편지와 전화 아니면 아예 닿지 않는 아날로그형 옛 친구는 이럴때 야속하다. 다 내 게으름 탓이지만.

어쨌거나 멍하게 무너진 비루한 일상. 그것이 4월의 시작이다.
뭐 그렇다고.
순전히 잠깨기 용 낙서.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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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풀이

투덜일기 2009. 3. 3. 14:11

설날 이후론 계속 마음이 바빴다. 막다른 벼랑끝에 몰리듯 원고독촉을 받는 상황인데도 내 정신상태는 초절정마감모드로의 전환을 계속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약속 잘 지키는 번역가의 평판은 이미 3년전부터 흐지부지 무너져버렸으니 배째라는 고약한 심보가 더 발동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양심은 남아 있어서 지인들이 만남을 청하면 <어차피 밥은 먹어야하니까...>라는 핑계로 아무 때나 짬을 내 외출을 시도하는 일을 마구 저지를 순 없었다. 이런저런 집안 행사로 이미 미루고 또 미뤄줬던 나의 친교생활은 결국 원고마감과 함께 한풀이를 하듯 집중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개강, 개학이 맞물려 있으니 그 전에 만남과 놀이를 <해치워야>한다는 의무감도 불타올랐다. 신학기의 시작인 3월엔 아무래도 다들 학업이든 작업이든 초심을 잡아야한다는 새해결심 비슷한 다짐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말이다(물론 나는 빼고;;) 

결국 지난주는 월요일부터 꼬박 일주일을 넘겨 다시 월요일까지 단 하루도 집에 있었던 적이 없었다. 금요일과 토요일, 이틀은 무려 점심과 저녁으로 나누어 약속을 두탕(!)씩 뛰어야 했다. 연일 집에 틀어박혀 붙박이처럼 지냈던 저질 체력으론 당연히 무리가 왔다. 여드레 동안, 10명의 친구를 거의 각각 만났고(한 친구는 두번이나!) 조카 입학전에 가기로 약속했던 그림책 전시를 봤고, <워낭소리>와 끝났다고 포기했던 영화 <쌍화점>을 봤고, 그 가운데 생일 모임은 네번이나 되었다. 서대문, 서초동, 강남역, 압구정동, 신촌, 홍대앞, 이태원, 일산, 파주, 광화문, 오이도, 다시 홍대앞까지 마치 홍길동이라도 된 양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돌아다녔던 터라 매일 외출에서 돌아오면 당연히 다리허리가 아팠고 연일 기름진 음식을 과식하여 토실토실 살이 올랐다.

그렇게 매일 거의 대중교통수단으로 돌아다녔으니 억지로라도 운동이 되었을 법도 한데, 어제 전철을 두번이나 갈아타고 오이도에 갔던 게 주효했는지 10시간을 자고 일어났는데도 눈이 붙어 잘 떨어지질 않는다. 아참... 오이도엔 이번에 처음 가봤는데 조개구이는 역시 을왕리가 훨씬 낫더라. 가격은 비슷해도(새우+조개구이+칼국수 세트 중간크키 = 7만원) 조개와 새우의 양도 작고 일단 양념맛도, 곁다리 반찬도 형편없었다. 고현정과 천정명이 드라마를 찍었다는 원조뚝방집이 그 모양이니 다른 집은 오죽할까 -_-;; 늘 가던 을왕리 조개구이집에선 조개도 막 더 갖다주고, 공짜로 주는 떡볶이랑 파전도, 조개 찍어먹는 양념도 엄청 맛있었는데 속상했다. 바다냄새라도 맡겠다는 원래 목적에도 을왕리쪽이 훨씬 더 낫다. 오이도는 갯벌위로 솟은 둑방길에서 철조망 쳐진 바다를 내려다보는 것밖엔 없지만, 을왕리는 그래뵈도 해수욕장이니 찰랑거리는 바닷물도 직접 신발에 묻힐 수 있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아무리 노는 게 좋아서 광분했더라도 마감폭풍후의 한풀이는 이쯤에서 한 이틀 맥을 끊어야겠다. 
에구구 삭신이야.
봄맞이 체력강화에 힘쓰려면 어서 자전거에 바람부터 넣어야하는데 에구구 고되다.
간간이 놀아주며 슬슬 다시 초반 작업모드를 가동해야 할 때이지만 지금 생각 같아선 낮잠이나 늘어지게 자고 싶다. 에구구구...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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