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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2.22 반듯함의 이면 12
  2. 2008.09.24 목욕탕 주인 12
  3. 2008.07.08 회복 12
  4. 2008.05.07 5월 6일 14
  5. 2008.04.05 자신감 13
  6. 2008.02.29 변함없음 10
  7. 2007.12.10 같은 고민 8
  8. 2007.10.14 취향 11
  9. 2007.04.19 친구의 범주 10
  10. 2007.04.18 동창회 6

반듯함의 이면

삶꾸러미 2009. 2. 22. 00:45


반듯하다01 : 「1」작은 물체, 또는 생각이나 행동 따위가 비뚤어지거나 기울거나 굽지 아니하고 바르다.
                  「2」
생김새가 아담하고 말끔하다.

번듯하다:   「1」큰 물체가 비뚤어지거나 기울거나 굽지 않고 바르다.
                「2」생김새가 훤하고 멀끔하다.
                「3」형편이나 위세 따위가 버젓하고 당당하다.


얼마 전 작업을 끝낸 책이 이런 식으로 사전의 낱말뜻을 적어놓고 단상을 풀어나가는 형식이었는데 재미 있어서 따라해보고 싶었다. :)

돌아보면 반듯함은 어려서부터 나를 규정하는 틀인 동시에 채찍이었던 것 같다. 친동생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촌동생들한테도 <반듯한> 언니누나로서 모범이 되어야한다는 건 분명 알게모르게 동기를 부여했을 터이고 어느 정도 스트레스로 작용하긴 했겠지만 본인의 성격상으로도 심하게 흐트러지고 비뚤어지는 건 용납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애써 <반듯함>을 추구하느라 특별히 삶이 고달플 것은 없었다. 
약간의 문제는 본인이 인정하는 반듯함과 남들이 자신의 바람까지 담아 투사하는 나의 반듯함 사이에 생겨난 틈이랄까 공백 같은 것이었다. 예를 들어, 독서를 좋아하긴 하지만 집에 있던 동화책과 문학전집류가 따분해지고 난 뒤, 내가 만화방에서 빌려보는 만화책에 재미 들렸을 때 같은 동네 모여 살던 친척 어르신들이 만화책을 쌓아놓고 낄낄대거나 심각하게 책에 고개를 파묻은 나를 보고는 깜짝 놀라 우리 엄마에게 한 소리를 해댔다.
"어머머! 라니는 좋은 책만 보는 줄 알았더니, 만화책도 보네? 저러다 만화책에 빠져 공부는 뒷전으로 밀려나면 어쩌누. 우리 애들한테 만날 라니 언니 좀 보고 배우라고 잔소리하는데 저런 것까지 따라할까봐 걱정이야. 언니가 좀 말려봐요."
당시 만화방과 만화책의 위상이 워낙 나쁘기는 했지만, 좋은 만화 나쁜 만화 작품성 따져서 가려볼 줄 아는 안목 정도는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던 조숙한 나로서는 친척 어른들의 간섭과 그에 따른 엄마의 개입이 참 못마땅했다.

어떻게 보면 그간 줄곧 살아오며 남들이 생각했던 나의 <반듯함>은 순전히 그들의 오해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정말로 자타공인 <반듯한> 사람이라면,  "어머나, 너한테 그런 면이 있었니, 의외다" 라는 반응을 그리 자주 들을 일이 없어야 정상 아니겠나. 하지만 나는 어린 시절의 만화책 사건을 비롯해, 몇몇 나의 행동에 뜻밖이라는 평가를 퍽이나 자주 들었던 것 같다.
가령,  놀기 좋아하는 사촌언니 따라서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이른바 '나이트클럽'이라는 데를 꽤나 자주 드나들며 그런 데서 술이 아닌 콜라(콜라텍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를 마시고도 신나게 춤추며 놀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당시 유행하는 춤을 얼추 따라출 수 있는 경지에 올랐는데, 대학 1학년때 과에서 단체로 나이트클럽에 갔던 날 내가 고등학생처럼 보이기도 했고 실제로도 미성년자라 입구에서 나를 데리고 들어가느라 퍽이나 애를 써야했던 동기들은 물만난 고기처럼 플로어에서 노는 나를 보며 다들 거의 경악하는 수준이었다. "세상에나, 너 나이트 죽순이였니!"라고 외치면서... -_-; 다들 내가 나이트클럽이라곤 가본 적도 없을 거라 예상했다나. 하지만 4살 많은 사촌언니랑 다니면서 친구라고 얼렁뚱땅 넘기면(사촌언니가 늙어보이게 미리 화장도 해주곤 했다) 주민증 보자는 얘기도 없이 그냥 들여보냈음을 그들이 알 리가 없긴 했다.
운전을 시작하고 난 뒤에도 그랬다. 처음 수동 자동차를 몰고 다니던 초보시절의 우여곡절이야 그렇다 치고, 어느정도 겁이 없어지고 나선 하필 회사가 본사 공장으로 몽땅 들어가는 바람에 경기도 안산으로 1년여 출퇴근을 해야 했는데, 수인산업도로를 오가는 난폭한 트럭들 사이에서 출퇴근을 하다보니 나 역시 입과 운전이 거칠어질 수밖에 없었고 어쩔 땐 괜히 작은 차를 무시하는 트럭 운전수에게 화가 나 소모적인 싸움(쫓아가 추월해서 코앞에서 브레이크 밟아 식겁하게 만들기 따위;;)에 마구 응수했다. 욕도 당연히 거침없이 늘어났고, 사실 아직도 운전할 땐 나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오는 경우가 많다.
어쨌든, 그 시절 출근 시간에 나와 어느 덤프트럭의 위험한 실갱이를 하필 나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은 회사 직원이 목격한 바람에 난 또 내 의도와 상관없이 구설에 올라야 했다. "안 그렇게 생겨갖고 운전 엄청 난폭하게 하더라. 여자애가 죽으려고 겁도 없이..." 
난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소리쳐 주고 싶었지만,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입방아를 찧어대든 상관이 없었기 때문에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진 않았었다. 회사생활 막바지라서 무서울 게 전혀 없기도 했지만, 더는 남들이 보는 <반듯함>의 허울에 나를 얽매고 싶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서 그 오해를 깨주고 싶은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내가 의외적인 모습을 보인다 해도, 주변 사람들에겐 내가 대부분 <반듯해> 보이는 모양었고 때로는 그 <반듯한 이미지>를 억지로 강요받기도 했다. 이십대 후반 즈음에 가장 싫었던 건, (겉모습 뿐이든 아니든) <반듯한 친구>로 <이용> 당할 때였다. 특히 연애사가 복잡하거나 <날나리> 이미지를 갖고 있는 친구들의 경우, 진지하게 사귀는 사람이 생겼거나 결혼을 앞두고 있을 때 나는 친구들이 자기도 <착하고 반듯한> 친구가 있다는 생색이 필요할 때 꼭 데리고 나가는 선택품목 같은 존재였다. 물론 당시엔 어리숙한 내가 그 사실을 알 리 없었고, 연애질 열심히 할 때는 코빼기도 안비치다가 뜬금없이 불러내는 친구들이 그저 사랑과 연애에 충실해 그러는 것일 뿐이라고 애써 이해하려 노력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런 친구들 가운데는 나중에도 지속적으로 나를 지들의 양다리를 감추려는 <알리바이 증명용>으로 이용한다거나, 거짓말의 도구로 사용하는 이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기가 막혔다. 문제는 놀랍게도 나를 팔면 그들의 거짓말이 통한다는 사실이었다. 
아, 내가 그렇게 꽉 막히고 얌전하고 바른생활을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는 말인가!

다행스럽게도 나이가 많아짐과 함께 보편적인 사회적 잣대로 가늠되는 <정상적인> 삶의 궤적과는 멀어지는 비혼의 세계로 접어들면서 더는 남들의 강요로 포장된 <반듯함>에선 벗어날 수 있게 된 듯 하다. 어디까지나 때가 되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아파트 평수 넓혀가며 살아가는 게 요즘의 <반듯함>이고 곧 <번듯함>으로 확대되기 때문이다. 그나마 <번듯함>까지 강요받는 삶은 아니었으니 천만다행이라고 여기고는 있는데, 아직도 가끔 나의 <반듯함>을 칭찬하거나 과대포장하려 드는 사람들을 만나면 난감하다. 나는 그저 인간으로서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파렴치함을 멀리하려는 양심의 범주에서 살아가려고 애쓸 뿐, 정말로 모범생같은 인물은 절대로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늘 불만 많고 투덜거리고 뒤에서 구시렁거리고 벌컥벌컥 현실에 짜증을 내는 평범 이하의 비뚤어진 인간이라, 어떻게 해야 쓸데없이 제 맘대로 높여 부르는 타인들의 기대치를 낮출 수 있을지 그게 고민이거늘.

아주 오랜 만에 "나한테 반듯한 친구가 너 밖에 더 있니. 니가 한 번 봐줘."라고 하는 청을 듣고나서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졌다. 만나서 확 "나 그런 사람 아니거든!"이라고 외쳐줄까 어쩔까. 내가 뭐하러 만나느냐고 처음부터 거절 못한 내가 모자란 것도 확실하고, 실제로 그렇게 외쳐줄 위인도 못되고, 결론은 내가 바보란 얘기다. 이런 인간이 뭐가 반듯하다고.. 나 원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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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탕 주인

투덜일기 2008. 9. 24. 00:51

신경숙의 작품이었는지, 강석경의 작품이었는지 모르겠는데 아주 오래 전 읽은 소설에서 <목욕탕 주인> 같은 존재라는 표현이 퍽 인상적이어서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다. 얼마 안되는 돈에 열쇠를 내주고는 사람들이 입던 남루하고 허름한 옷을 보관해주는 동네 목욕탕 주인 같은 존재로 주인공이 자신을 묘사했던 것 같은데, 요즘이야 목욕탕도 찜질방을 끼고 거대한 기업처럼 운영하는 추세이니 그때의 그 느낌을 지금 독자들은 아마 과거의 나처럼 공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려나 나는 요즘도 가끔 그 구절을 떠올리며 나도 주변 사람들에게 그렇게, 편하다못해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는 <목욕탕 주인> 같은 존재가 아닌가 슬며시 화가 치밀 때가 있다.
오래도록 변하지 않은 나의 신변, 그러니까 아직도 속박에서 자유로운(?) 상태라는 점과 밤에도 늘 깨어있기 십상인 직업 특성이 더해져 나는 지인들이 한밤중 찾아온 난데없는 불면을 가눌 길 없어 괴로워한다거나 취중 귀가길에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술주정이 발현했을 때 종종 통화상대로 낙점되고 만다.

따지고 보면 다 내탓이다.
옛날부터 나는 쓸데없이 친구들의 고민들어주기 및 상담에 뛰어난 척 행동했고, 연애도 잘 못하는 주제에 지인들의 연애사엔 언제나 처음부터 억지 조언자가 되어야 했다.
사실 모든 문제는 본인이 풀어나가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냥 귀담아 들어주다 간간이 맞장구를 쳐 용기를 북돋아주면 내 역할은 끝이 나는 셈이다. 물론 과거에는 강력하게 나의 주장과 충고를 해결책이랍시고 들이민 적도 있었지만, 파란 많은 연애로 고민하는 지인에게 <그딴 놈/년이랑 당장 헤어져!>라고 조언했는데 며칠 뒤에 도저히 못 잊겠다며 재결합하는 커플들을 몇번 겪은 뒤로는 특히 남녀문제의 경우 섣불리 내 의견은 섞지 않게 되었고 몇년 전부터 연애 상담은 골치아파서 아예 거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와 더불어 나이 지긋해진 주변 지인들이 차라리 결혼의 위기를 겪을망정 연애질을 하는 건 드문 상황이 한편으론 서글프면서도 어쩔 땐 오히려 반갑달까. -_-;;

물론 측근들에게 가장 속 깊은 이야기까지 털어놓는 상대가 된다는 건 친구로서 의미있는 일이고, 나 역시 앞뒤 잴 것 없이 고민거리를 주절거림으로써 그것만으로 속이 후련해지는 지인들이 곁에 있음을 다행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친척에도 촌수가 있듯 관계에도 급수가 있으니, 모든 지인들에게 똑같은 관심과 부담의 정도를 할애할 순 없는 일 아닌가.

취중이든 맨정신이든, 뜬금없이 몇달만에 전화를 걸어선 다짜고짜 자기 삶의 하찮음과 짜증을 나에게 같이 짊어져주기를 바라거나, 무조건 그 때가 좋았지, 옛날이 그리워 따위의 하소연을 늘어놓는 <급수 먼> 지인들의 투정은 이제 정말이지 버겁고 짜증스럽다. 그렇다고 확 관계를 끊어버릴 만큼 하찮은 급수의 사람들은 아니니, 앞으로도  나는 고요한 한밤중에 갑작스레 울려대는 전화벨을 무시하지 못하고 휴대폰이 뜨끈뜨끈해질 때까지 반복되는 푸념을 들어주어야 하는 목욕탕 주인 같은 운명이란 말인가. 젠장.

간만에 면벽하여 도닦듯 분위기 잡고 일 좀 해보려고 앉았다가 완전 기분 잡쳤다.
한밤중에 울려도 반가운 전화도 있으니 아예 전원을 꺼놓을 수도 없고 이거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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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

삶꾸러미 2008. 7. 8. 18:36
인생 뭐 별 거 있어!?
맞다. 별 거 없다.
사소한 것으로 기쁘고 행복하면 그만이다.
연이틀 발가락에 물집 생기도록 놀러다니며 그간 못했던 것들 하고 있는데
세상이 다시 만만하고 아름답고 그럴싸해 보인다.

아직 치렁치렁 9개월째 방치하고 있는 머리는 어쩌지 못했지만
하늘하늘 쉬폰 원피스에 꽃단장까지 하고 반가운 이를 만나러 나가는 외출은 준비부터 즐거웠다.
늘 그렇듯 약속시간보다 조금씩 늦는 지인들을 기다리며 백화점을 휘휘 돌아보고
고소한 냄새가 나는 프레첼을 썩썩 잘라 한 봉지 들고 씹으며 시간을 죽이면서도 나는 티파니 앞에서 쇼윈도를 들여다보던 오드리 햅번이 안부러울 정도였다.

반가운 친구, 내가 만들지 않은 맛있는 음식, 수다, 예쁜 찻집, 맛있는 커피, 달콤한 쿠키, 올 여름 처음 맛본 빙수, 뜻밖의 선물, 식탐, 여행계획, 또 수다, 수다.

신나게 웃고 떠들며 행복해 하다 들어왔더니, 거의 두달 동안 찌들고 구겨졌던 몸과 마음이 이틀만에 단박에 회복되었음을 느낀다. 음, 아직 펴지지 않은 구석도 분명 있기는 하지만, 계속 놀다보면 차츰 그 구석도 감쪽같이 다림질이 되지 않겠나. 그럼 또 한참, 인생 뭐 별 거 없다고 큰소리치며 살 수 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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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6일

투덜일기 2008. 5. 7. 00:27
사흘만에 집밖을 나섰다가, 연휴 마지막에 추워진 날씨 때문에 방심하고 있던 사이 온 동네가 아카시아 꽃향기로 점령당한 걸 뒤늦게 깨달았다. 토요일은 여름 같더니만 다음날부터 내리 추워서 창문도 꼭꼭 걸어닫고 있는 바람에 아카시아 꽃이 피고 있다는 건 상상도 못했다가 완전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내가 아카시아 꽃 피기를 얼마나 기다렸는데!!
향기로운 꽃냄새를 실컷 맡으며 외출하긴 했지만 어쩐지 하루쯤 손해본 것 같아 속상하다.
며칠 지나면 또 말라 떨어진 꽃잎이 바스락거리며 바람에 흩날려 사라질 텐데...

외출 장소는 간만에 홍대앞.
생각보다 버스가 빨리 와서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바람에 일부러 골목골목 구경을 다녔다. 운이 좋아 일찍 나온 바나나빵 장수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랐으나, 지금 생각해보니 이미 날씨가 더워져서 바나나빵은 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아직 해도 지지 않은 주차장길엔 노점상이 하나도 없어서 아쉬웠다. 다만 새로이 생겨나고 바뀐 가게들이 어찌나 많은지 관광객처럼 두리번두리번 기웃기웃 실컷 구경하며 실실 웃어댔다.
이젠 너무 방대하고 요란해진 느낌이지만 그래도 홍대앞 골목골목엔 뭔지 모를 묘한 매력이 아직 살아넘친다. 나중에 가보고 싶은 카페와 아기자기한 가게들을 마음껏 찜해두었더니 전혀 돈 될 거리가 아닌 짓임에도 통장에 저축해둔 것처럼 마음이 든든하다. ㅋㅋ

이요님과 해리님 블로그에서 알게된 리&키키봉에도 가봤다. 너무 잔뜩 기대를 했던 탓인지 막상 들어가선 손님이 많은 것도 아닌데 앉고 싶은 자리를 찾는데 조금 어려움을 겪었다. ^^;; 내가 선호하는 구석자리는 너무 구석이라 창고 같고, 아늑해 보이는 다락 같은 방석 좌석은 신발벗기 귀찮고...
동행에 따라서 어떤 날은 퍼질러 방바닥에 앉는 자리를 선호하기도 하고, 어떤 날은 신발 벗는 게 귀찮을 때도 있는데 오늘은 신발 벗는 게 번거로운 날이었고, 내가 앉은 쪽에서 빤히 들여다보이는 천장 낮은 방석자리에 앉은 남녀가 계속 별로 아름답지 않은 영화를 찍어대는 바람에 불편하고 민망했다. -_-;; 어쩌면 선택의 여지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커피랑 카모마일 차는 맛있었고, 화장실 벽장식 타일이 예뻐서 그 공간이 제일 마음에 든다고 동행과 입을 모았다. 다른 의자도 다 그런지 확인해보진 않았지만 의자가 푹신하질 않아서 꼬리뼈가 조금 아팠던 것도 마음 쓰였는데, 다음에 또 가게 되면 가지런히 접혀 있던 무지개 담요를 깔고 앉아야지.

외출해서 말을 많이 하고 듣다가 돌아오면 공연히 허허로운 날이 있고 속 시원하고 뿌듯한 날이 있는데 오늘은 후자쪽이다. 침묵이든 대화든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만남은 확실히 영혼의 자양분인 듯.
문화생활을 한 것도 아닌데 간만에 머릿속이 채워진 것 같아서 이렇게 일기로 남겨두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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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감

삶꾸러미 2008. 4. 5. 22:51

벨로를 시초로 블로그 이웃분들의 연이은 <자신감> 포스팅을 보면서
약간은 자아비판 비슷한 고백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겠지만 나도 스스로를 돌아보고 싶어졌다.
그런데 그간 바쁘기도 했지만 자꾸 뜸을 들이게 됐던건
과연 내 인생에서 자신감 100개인 시절이 있었던가, 아닌가 판단이 잘 서지 않아
그냥 내 인생에서 가장 자신감으로 충만했던 시기를 정점이자 100개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것일까
우유부단한 고민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미즈키님이나 키드님처럼 살아오는 동안 자신감이 100개로 온전히 채워진 적은 없다고 인정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생각하면서도, 내가 가장 자신만만하고 심지어 오만불손하기까지 했던 시기를 억지로라도
100개라고 우기고 싶은 마음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아마도 그건 <나를 믿는 마음>인 자신감이 앞으로 더더욱 고개를 숙이거나 고작해야 수평선을 유지할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일 게다.
그러므로 <자신감 백개>라는 말을 처음 뱉은 11살 이쟁그만 양이나 벨로의 <자신감 백개>와 비교한다면 나의 자신감 백개의 수준은 최소한 다섯개쯤 부족한 기준의 정점임을 미리 털어놓고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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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함없음

삶꾸러미 2008. 2. 29. 22:03

사람들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스무살 시절엔 도저히 알 수 없던, 사람들의 변함없음을 서른살이 되고 마흔살을 넘어서면서
새삼 깨닫는다.

돌이켜보면 아득하기도 하고 눈깜짝할 새에 지난 세월 같기도 한 시절에 처음 만나
10년, 20년을 함께, 또는 따로 보낸 사람들과 한 자리에 모이면 친근함과 낯설음을 동시에 느낀다.
어깨를 휘젓는 걸음걸이, 듣기 좋은 낮은 목소리, 까르르 귀를 찌르는 독특한 웃음소리, 언제나 썰렁하기만 한 유머, 수줍은 듯 빙그레 웃기만 하며 술잔을 드는 손길, 시비를 거는 것 같은 거침없는 말투, 못마땅한 사회에 대한 투덜거림과 불평, 술자리에서 먼저 일어나는 건 절대 용서 안되는 고집 같은 것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변한 건 운동화 대신 정장과 구두가 더 어울리는 외모의 까닭모를 반듯함, 그들이 내미는 명함에 새겨진 어마어마한 직함, 눈가에 살짝 내려앉은 주름살, 솟아오른 배나 숱이 엷어진 정수리와 넓어진 이마, 서로 다투듯 술값을 계산하겠다고 내미는 법인카드, 휴대폰에 저장해놓고 보여주는 아이들 사진, 가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흘러나오는 재테크와 골프 이야기 등이다.

그런 자리에서 나는 정말로 20년전으로 돌아가 탁자를 두들기며 웃다가도
금세 또 유체이탈을 해서 자기 몸을 내려다보는 혼령처럼 전혀 낯선 이들의 대화를 천장쯤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느낌을 수시로 오간다.

어딜 가나 제일 변하지 않았다는 소리를 듣는 게 이젠 뒤떨어졌다는 소리로 들리니
내게도 확실히 변한 건 있다.
뭐든 할 수 있다고 떵떵거리던 자신감과 낙천적인 사고는 이제 씁쓸한 자괴감에 쉽사리 자리를 내주고 만다.
그래도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약간 허황된 꿈과 로맨스를 기다리고
휘황찬란하고 복잡한 무대 한 가운데서 조명을 받는 것보다 어둑한 구석에서 소박하게 즐기는 게 더 좋고
재테크로 골치아프게 벌어들인 재산보다 인복 많은 게 더 기쁘고
편한사람들과 함께하는 술자리가 기대되고 지금껏 맺어온 인간관계 속에서 행복을 느낀다.

들여다 보면 하나도 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세월과 함께 확실히 성숙한 사람들 틈에서
본래의 미숙함과 치기를 마냥 갖고 살면서, 나 하나쯤 그런 사람도 있어야지, 하고 위로하는
내 목소리에 점점 힘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세월의 무게일까.

변함없고 한결같다는 게 자랑일 수도 있지만
어쩐지 미련스런 집착처럼 느껴지는 날, 그게 바로 오늘이다.
그러고 보니 날씨따라 펄럭거리는 감상주의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이러니 내일은 또 펄럭펄럭 행복할 수도 있겠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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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고민

하나마나 푸념 2007. 12. 10. 14:47
작년 12월에도 분명 똑같은 고민을 여기 적어두었던 기억이 있다.
12월이라서, 한해를 마감해야 하므로 꼭 만나서 밥이든 술이든 나눠먹자는 지인들의 청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고민.

돌이켜보면 다사다난하지 않았던 해가 한 해도 없었고
연속되는 시간 속에 나이 한 살 더 먹는 것이 '까짓거'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는데
왜 꼭들 그렇게 '연말연시'를 외쳐대는 것인지 원.

'송년'과 상관없이 만날 일이 있으면 그냥 만나고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냥 만나서 먹으면 그만인데...
솔직히 나 역시 한해 자알 살았으니 굳이 꼭 만나서 등 두들겨주고 어깨 토닥여 받고 싶은 이들이 있기는 하다.
올해는 엄마 지킴이 핑계로 집에 콕 박혀 지낸 시간이 많았던 터라
계속 만남을 미뤄온 미안함이 앞서는 지인들도 없지 않으니
더욱 무거운 마음으로 연일 달력만 째려보고 있다.

남은 날은 겨우 스무날.
반드시 2007년에 못을 박아 나를 채근할 친구는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갑자기 마음이 바빠지는 12월이다.
인간 관계가 역시 어려운 것인지, 어려울 필요는 없는데 나 홀로 소심하게 어려워하며 고민하는 것인지
일단 모두에게 나중에 다시 연락하겠노라고 말미를 받아놓고는
사방에 전화 걸고 연락하는 게 또 귀찮고 싫어서 진저리가 난다.
촌스럽게 난 왜 전화하는 게 이리도 어려울까.

작년 재작년 말미에도 한 고민을 올해도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고
내년, 후년에도 어김없이 우유부단하게 고민하고 있을 내 꼬락서니가 퍽이나 한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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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

삶꾸러미 2007. 10. 14. 17:30
친구, 지인, 또는 그저 '아는 사람'의 범주로 분류되는 사람들과 나의 취향이
꼭 맞아 떨어질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성격이 정 반대인 사람들끼리 만나야 잘 산대"라는 말은 걸핏하면 툭탁거리는 커플들을 위해
확실히 조작된 위로이며, 실제로 잘 지내려면 친구든 가족이든 공통점도 많고 취향도 엇비슷해야 한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때로는 비슷한 취향과 공통점 때문에 뜻밖의 상황에서 친구가 되기도 하지 않는가 말이다.
친구라 해도 당연히 취향이 같아야 우정의 깊이도 더 깊어지는 듯하다.
다만 친구의 경우엔 가족이나 파트너와 달라서, 이해심과 봐주기의 여유가 한껏 늘어나기 때문에
비록 취향이나 성격이 다르더라도 참아주고 넘겨주고 눈감아주게 되는 것 같다.

오늘 만난 지인들과 오랜 수다를 나누던 중에 친구와 떠나는 여행 이야기가 나왔다.
한국사람은 제대로 친해지려면(또는 그 사람을 잘 알아보려면) 밥(때론 술) 같이 먹고, 여행 같이 가고, 고스톱 한 판 쳐봐야 한다는 말이 있듯, 여행은 친구에 대한 새삼스러운 발견의 경험일 때가 많다.
절친한 친구가 아니면 쉽사리 동행을 결정하지 않겠지만, 어쨌든 '잘 안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여행길에서
의외의 골칫거리나 '웬수'로 돌변하는 경우도 있고, 우정과 이해의 폭이 더욱 돈독해지는 때도 있다.

나는 두 부류의 친구를 모두 경험해 보았는데,
솔직히 고백하건대 여행길에서 *웬수* 같은 존재임을 깨달았던 친구는 나와의 역사가 가장 오래된 친구임에도
그뒤로 많이 멀어졌다. 최소한 내쪽에선 그렇다는 뜻이다. ^^;;

여행뿐만 아니라 그저 사소한 만남의 자리에도 취향과 배려는 중요하다.
어떤 만남에서도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약속을 선도하는 주축이 있기 마련인데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내가 그런 역할을 도맡는 건 꽤나 드문 일이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그런 역할을
담당했을 경우 상대방의 취향에 맞을지 장소와 먹거리를 고민하는 일은 쉽지가 않다.

가령, 중년 아저씨가 되어버린 친구들은 주문하기도 복잡한 커피전문점이나 파스타집을 죽도록 싫어한다.
심지어 나이 40 넘도록 스파게티를 단 한번도 안 먹어본 이도 있을 정도다. ^^
그들이 선호하는 곳은 뻔하다. 편안하게 방바닥에 앉을 수 있는 고깃집이나 찜, 탕 같은 음식을 취급하는 곳이면 어디나 합격점이니, 이렇게 좋고 싫음이 분명한 친구는 차라리 별 문제가 없다.
골칫거리는 "네 마음대로 해. 난 아무데나 좋아."라고 *말*은 해놓고 가타부타 트집을 잡는 친구다.

지인들 중에선 그나마 활동범위가 많은 내가 아는 곳도 많을 것 같다며
가끔은 만나자마자 괜찮은 맛집이나 분위기 좋은 찻집, 커피집을 데려가라는 요구를 받는 경우가
드문드문 있다.
취향을 빠삭하게 아는 절친한 지인이라면 어딜 데려가든 걱정할 것도 없지만
어중간한 관계에선 은근히 고민스럽다.
나름대로 신경써서 데려간 곳인데도 취향에 따라 반응은 천차만별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사방에서 주워온 듯 똑같은 의자가 드물고, 테이블이라야 몇개 되지도 않아 긴 탁자에 남들과 나눠 앉아야 하지만 커피와 코코아 맛은 일품인 찻집엘 가서도
어떤 이는 분위기 독특하다, 탁자의 나뭇결이 마음에 든다, 코코아랑 와플 맛있다, 소품이 아기자기해서 재미있다...라고 내 선택을 칭찬해주는 반면에
어떤 이는 인테리어가 거칠어서 분위기가 을씨년스럽다, 이러고도 장사가 되는 게 신기하다, 와플와플 난리라서 어떤 맛인가 궁금했더니 별 맛도 없는 게 가격만 비싸다, 자기 같으면 20년 전에 갖다 버렸을 물건들을 빈티지라면서 생색내는 게 웃기다... 따위의 타박만 하기도 한다.

아 그럼 독특한 분위기의 찻집을 데려가라고 하질 말든가!!! -_-;;

농담삼아 늘 반어법을 쓰는 친구라든가, 매사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씹어대는 걸 사심없는 취미로 삼은 친구라면 또 나 역시 아무렇지도 않다. 취향이 촌스럽고 감각이 없다고 웃으면서 된통 빈정거려주면 그뿐이다. 상대 역시 내 반응을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내 취향과 노력을 감안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최소한 상대방에 대한 배려마저 잊은 채 시종일관 구시렁구시렁 타박을 일삼는 지인에겐 정이 똑 떨어질 수밖에 없다.
물론 나와는 맞지 않는 본인의 취향을 강요하는 이 또한 경계 대상이다.

책이든 영화든 먹거리든, 사람마다 취향은 가지각색임을 잘 안다.
그리고 나란 인간은 특별히 고급스럽거나 까다로운 취향을 지니지도 못했고, 최신 유행을 좇아서 차를 마시러 다니고 맛집을 찾아다닐 만큼 부지런하고 엽렵하지 못하다. 다만 뭔가 맛있고 멋스러운 곳을 '발견'하면 그 기쁨을 가족이나 지인들과 나누고 싶을 뿐이다.
그들도 나에게 그래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고.

말로는 모든 측면에서 사회구성원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부르짖으면서
뒷구멍에서는 은근히 주변 이들에게 취향의 공유까지 바라는 내 마음이 모순이란 것도 인정한다.
그렇기에 취향의 다름이 인간에 대한 실망이나 감탄으로까지 이어지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자꾸만 마음이 좁아지고 너그러움마저 줄어드니 안타깝다.
살면서 점점 더 편협한 인간으로 변해가진 말아야 할 터인데,
아무리 돌아봐도 가는 방향이 딱 그쪽이다.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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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범주

삶꾸러미 2007. 4. 19. 16:06
"치부를 드러내고도 불편하지 않을 친구가 몇명이나 되겠냐는.." 미아의 댓글에
또 댓글을 달고 나서도 한참 멍하니 블로그 화면을 바라봤다.
으음...

내 인간관계의 집약이라고 할 수 있는 휴대폰을 지금 눌러 그룹별 검색을 해보니
친구 항목에 무려 51명이 들어있단다.
물론 그 친구 항목엔 10여년 넘게 얼굴도 못 본 채, 통화만 몇번 한 그야말로 이름뿐인 친구도 들어있으며, 저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나이와 상관없이 내가 친구로 생각하는 선배나 후배도 포함되어 있으니, 친구 많다는 자랑을 하려는 건 절대로 아니다.

미아 말대로 그 가운데 내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홀라당 까발려서 보여주고도
아무렇지 않은 친구를 쏜꼽으려면 또 한참 걸려야할 테니까.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친구에 대한 내 마음가짐은 그렇다.
처음부터 모든 걸 다 드러내기가 어디 쉬운가.
내 경우는 가능한 한 처음부터, "난 원래 이러이러한 인간이니 싫음 말고 좋으면 어울리고 알아서들 하셔.." 라는 잘난 체를 보이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결국엔 함께 세월을 보내며 기회가 닿을 때마다
하나하나 드러운 성질, 치욕적인 약점, 취향 따위를 드러내게 되는 게 당연하고
그걸 최대한 받아들여주거나, 수용은 못해도 최소한 이해하려고 노력해주는 관계가
친구라는 테두리를 만들어주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니까 내 휴대폰 친구 폴더에 저장된 이들은 모두가 내게 이상적인 친구의 가능성을 지닌 후보자라는 뜻이다.
나와 함께 하는 시간과 만남의 깊이에 따라
아직은 "후배"나 "동창", 또는 "미지정" 폴더에 들어 있는 이들도 언젠가는 "친구" 폴더에 올라올 수도 있을 것이고, 몇년 후 "친구" 폴더에서 "동창" 폴더로 내려갔다가 슬며시 전화번호부에서 삭제될 친구도 있을 것이다. 아니지.. 삭제될 만큼 마음 상하는 일이 있었다면, 전화를 따돌리기 위해서라도 번호를 삭제는 못하겠군 -_-;;

암튼 내게 친구의 범주란...
지난 40년의 세월을 속속들이 이미 알고 있는 친구도 포함되어 있지만
아직 삶의 연이 닿질 않아 깊은 속내를 드러내놓고 상처를 같이 쓰다듬을 기회는 없었으되, 혹시 그럴만한 때가 되면 깊이 공유할 부분을 갖고 있는 사람들까지도 포함된다.
물론 나 혼자만의 짝사랑이자 턱도 없는 기대감일 수도 있으니, 몽상가스러운 나의 친구 개념을 누군가 손가락질을 하며 비웃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난 그렇게 믿으련다.

아메리카인디언의 속담이라던가.
친구는 내 짐을 대신 짊어지고 가는 사람이라는 뜻이라는 말을 처음 접하고
가슴이 찡했었다.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에서도 친구라면, 친구가 살인을 했더라도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이해해주는 마음을 갖는 거라는(정확한 대사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런 맥락이었던 듯..) 얘기에도 돌연 눈물이 핑 돌았던 기억이 있다.

두 경우 모두 퍼뜩, 내 짐을 대신 짊어지고 갈 친구는 내게 몇명이나 되나..
극단적으로 내가 살인을 했을 때 내 편이 되어줄 친구는 몇명일까 손꼽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이내, 반대의 경우에도 내가 과연 그 친구들에게 선뜻 친구라고 나서줄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나란 사람은 관계에 늘 집착하고 꿈과 환상을 품고
그래서 또 상처받고
다행히 위로도 받고 그러는 가운데 기쁨을 누리는 것 같다.
다분히 인간집착적인 성격이랄까...

하지만
삶의 방향이 달라져서, 이젠 부동산과 애들 교육에만 열을 올리는 흔한 아줌마가 되어버려,
아직도 문방구 학용품과 잘생긴 남자배우에 열을 올리는 나와는 대화의 공감대가 사라져
어느새 많이 멀어졌다 느끼게 되는 사이라 해도
모든 걸 다 떨치고 나서 오롯이 혼자만 남게 되는 본원적인 상태에선 다시 친구임을
깨닫게 되기에

가끔씩 배신감에 땅바닥에 나동그라지게 되더라도
내게 가장 소중한 재산은 여전히 사람이라고 믿는다.

친구들이여, 앞으로 계속 추한 꼴 보이더라도 제발이지 너그러이 봐주게나.
나 또한 그러도록 노력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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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회

하나마나 푸념 2007. 4. 18. 23:34

드물긴 하지만 평일 점심무렵에 백화점 식당가엘 가면
아주 곱게 차려입으신 어르신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연세가 최소한 일흔은 넘으셨을 것 같은 할머니들이지만, "어머, 얘 너 어쩜 옛날이랑 그렇게 하나도 안 변했니, 호호호.."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대로 소녀같다.
그래서 대부분 비싯 웃음이 나오는데...
백화점에서 단체로 곱게 차려입고 (그 분들 중 서넛은 대개 엘리자베스 여왕이 쓸 것 같은
멋드러진 모자까지 쓰셨다) 만나서 점심 먹고 차 마시고 수다떠는 여유로움을
누릴 수 있다는 건 분명 그 어르신들의 특혜란 생각이 든다.
같은 나이에 아직 재래시장 입구나 전철역 앞에 쪼그리고 앉아
푸성귀를 파는 할머니들도 있는데, 그 분들은 한달인지 두달인지 모를 동창회 모임을 위해 그날따라 유독 옷장을 뒤져가며 성장을 하셨을 테고, 오찬이 끝나면 우르르 백화점에서 단체로 쇼핑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늙어서도 그렇게 '격식차려서' 친구들을 만나러 다니는 모습을 보면 처음엔 미소를 짓더라도 슬며시 기분이 묘해진다.
왜 '동창회'라는 건 늘 그렇게 자기과시의 장이어야 하는지.

울 왕비마마도 예외는 아니다.
한달에 한번씩 셋째 화요일에 동창들이 모여 점심을 먹는데...
백화점파 할머니 일당들처럼 요란하진 않지만, 그래도 꼭 옷과 머리 때문에 신경을 쓴다.
그간 와병 때문에 동창회를 두달이나 빠져서 이번엔 꼭 가야한다던 왕비마마는
어제 아침 댓바람부터 무얼 입고 나가나 옷장과 씨름을 했다.
누구나 계절이 달라지면 입을 옷이 없다고 타령을 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울 엄마의 경우엔 역시나 옷장 가득 옷이 들어 있고 동창회용의 점잖은 옷들도 꽤 된다.
옷 없다고 타령이 시작되면 내가 먼저 짜증이 나기 때문에
내 옷은 잘 안 사도(난 언제부턴가 옷에 거금을 들이는 것의 가치를 잘 못 느끼겠더라^^)
엄마 옷은 턱턱 사드리는 편이라 더욱 그렇다.
그런데 또 카드춤 한 판 요란하게 추어서 옷을 사드리면, 괜히 비싼 옷 샀다고 또 난리다.
아으...
그럼 동창회 갈 때 입을 옷 없다는 소리나 하지 말든지~!

일단 입을 옷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눈에는 있는 옷도 제대로 안보이는 법..
결국 내가 코디까지 다 해서 골라준 옷을 입은 엄마는
별 볼일 없는 내 드라이 솜씨로 그나마 환자모드를 확실하게 탈피하고 동창회엘 갔다.
다녀와선 또 며칠 어떤 아줌마가 어디로 해외 여행 다녀왔고
어떤 아줌마가 어디에 땅을 샀으며... 어떤 운동을 해서(또는 어느 비만 클리닉을 다녀서) 살을 얼만큼이나 뺐다더라...  뭐 이런 얘기를 할 거다.
엄마 친구들이 정말로 얼마나 부유하고 여유로운지는 잘 모르겠지만, 울 엄마가 보기엔 당신이 친구들보다 한참 못살고 재테크 재주도 없어 평생 가난하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얘기다.

완전 대규모 동창회도 아니고, 열명 남짓 모이는 모임에서 아줌마들이 만날
옷 신경쓰고, 머리 신경써서 만나가지고는 늘상 그런 얘기만
한다면 대체 무슨 재미로 한달에 한번씩이나 만나는지 난 도무지 모르겠다.
그나마 엄마의 사회생활이니 막을 생각은 없지만
나라면 그런 동창회 돈주고 나가래도 싫다.

졸업 이후 뿔뿔이 흩어졌던 대학동기들을 모아서 몇년 전 떼거지로 몇번 만나봤지만
결국 서로 코드도 잘 맞지 않는 친구들의 대규모 모임은 역시 역부족이란 걸 느꼈더랬다.
개개인끼리는 서로 소통이 되는 부분이 있더라도, 단체로 모아놓으니
한다는 얘기들이 하나같이 주식, 부동산 따위의 재테크 얘기 아니면
애들 교육얘기, 기껏해야 음담패설이었고, 잘 나가는 것 '같은' 친구와 별 볼일 없는 것 '같은'
친구들의 위화감도 만만치 않았는데, 모아놓은 돈도 없고 재테크할 위인도 못 되며 걱정할 처자식 또는 남편자식 없는 나 같은 한량이 제 아무리 중심을 잡으려 해도, 안되는 건 안되는 일임을 실감했다.

앞으로도 내게 대규모 '동창회'라는 이름의 모임은 없을 거다.
개별적인 옛친구 상봉이라면 또 모를까...
그리고 다 늙어서 친구들을 만나도 절대로 엘리자베스 여왕이 쓸 것 같은 모자에 우아한 성장을 하고 만나는 일은 없겠지. 청바지에 키높이 운동화라면 몰라도... -_-;;
친구가 보고 싶으면 지금처럼 그냥 몇명씩, 때론 일대일로 그리움을 풀어내면서 살리라.
그러다가 혹시라도 나와의 만남을 자기과시의 장이라 여기는 친구가 있으면
단칼에 잘라버려야지. 흥!

아무려나 다음달 셋째 화요일에 또 왕비마마의 옷타령을 들을 생각을 하니 짜증부터 앞선다.
백화점 봄정기세일 할 때 모셔가서 한판 지르시라고 했어야 하는 건데...
아니지.. 그나마 동창회 나갈 정도로 건강해지신 걸 기뻐해야 하는 건가. 흠.
하여간에 동창회.. 말만 들어도 참 싫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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