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전화

투덜일기 2009. 12. 26. 15:38

어제 크리스마스라고 LA근처 사는 오랜 친구가 전화를 했다.
"크리스마스인데 너 왜 집에 있니?"
"요란한 날 나가 노는 거 사람 많아 복잡하고 싫다. 조용히 집에 있는 게 상책이지."
"드디어 OOO도 늙었구나. 예전엔 크리스마스 파티 다 따라다니고 종각 종치는 거도 보러 다니더니만."
"그러게, 그땐 미쳤었나봐."
일년에 몇번은 우체국 가야 하는 편지를 주고받던 이 친구와도 요샌 거의 몇달에 한번 전화통화 뿐이다. 그나마도 시간대를 잘 못맞춰서 생각만 하다 세월 다 보내고.

돌아보니 확실히 나이들어가며 매사에 시큰둥하고 게을러진다. 다른 데는 몰라도 멀리 있는 친구들에겐 카드든 선물이든 챙겨보내던 과거의 나는 사라지고 없다. 친구 선물 뿐만 아니라 그 언니들, 아들들, 남편 선물에다 그들이 사족을 못쓰고 좋아하는 오징어며 쥐포까지 바리바리 선물상자를 포장해 배보다 배꼽이 더 클지언정 꼬박꼬박 기념일을 챙겼던 정성과 에너지는 대체 어디에서 나왔을까? 미즈키님이 일본서 받은 선물 상자들 사진을 보면서도 아주 살짝 뜨끔했다. 10년전의 나였다면 아마도 오지랖 넓게 당장 강냉이 챙겨보냈을 텐데, 당연히 무심하고 딱딱해진 심장은 요동도 하지 않더라.
올해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딱 한장 쓰고 받았다. 문자는 꽤 여럿 받았는데 그런 거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좀 뜸들이다 몇시간 지난뒤에 하는 수 없이 답장 보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선배들한테는 내가 먼저 새해인사 문자 날렸던 것 같은데, 이젠 받는 것도 짜증스럽다니! 그때 내 문자 받았던 지금 내 나이 정도의 선배들도 아마 짜증났을 것 같다. 다 귀찮아! 그러면서 ㅋㅋㅋ
 
1, 2년에 한번은 내가 가든 친구가 오든 했던 먼거리 왕래도 벌써 3년이 넘어간다. 미서부로 이민간지 내년이면 25년인데 아직도 뉴욕엘 가보지 않은 친구는 해마다 휴가 때면 뉴욕에서 나와 만나 캐나다까지 다녀오자는 계획을 세워보지만, 친구에게든 나에게든 매번 크고 작은 일이 생겨 그 계획은 여전히 계획 단계다. 작년부턴 이왕 가는 휴가 까짓것 이탈리아에서 만나자는 원대한 꿈을 5개년 계획쯤으로 잡아보자 했는데, 그 친구도 나도 딸린 식구가 있으니 사실 쉽지 않은 꿈임을 잘 안다. 게다가 이놈의 불경기는 왜 이렇게 오래가는지 원! 

이러다 내년, 내년 미루기만 하는 거 아니냐고 풀죽어 하는 나에게 친구는 "설마 10년 안엔 보겠지!"라며 큰 인심쓰듯 말했고, 그 뒤에서 친구 언니는 "고수한테 안부전해줘!"라고 외쳐 함께 웃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통화할 땐 무슨 드라마가 재미있는지 의견교환을 빼먹었다. 지난번엔 일본 드라마를 잔뜩 추천 받았었는데. 다음 통화할 땐 내가 먼저 <미남이시네요>랑 <지붕뚫고 하이킥>을 꼭 보라고 권해줘야겠다. 벌써 봤는지도 모르겠지만.

크리스마스 이브에 근무시간 끝까지 일하고 퇴근한 친구와 크리스마스날 오후까지 자다말고 전화를 받은 나의 통화는 특별한 일 없이 재미없게 사는 게 어쩌면 <잘> 사는 걸지 모른다며 그렇게 또 잘 지내라는 말로 끝이 났다.  정말 잘 지내고 있는 건지, 이불속에 누워 한참 멍하니 있자니 한숨이 나왔다. 어쨌거나 요란한 날 빨간날은 무사히 지나갔고 주말이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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