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에 해당되는 글 85건

  1. 2007.03.17 전공과 직업 7
  2. 2006.12.13 송년모임 2
  3. 2006.11.24 만남의 습관 4
  4. 2006.11.14 기벽 2
  5. 2006.11.01 친구 4
얼마전 까마득한 학교 후배 하나가 우는 소리를 했다.

"언니, 영문과 나와서 이렇게 취업이 어려울 줄 알았으면 진작에 다른 과를
선택할 걸 그랬어요.."

입학할 때부터 학과를 결정했던 나와 달리
요즘 유행하듯 학부제로 입학해서 2학년 때인가 제일 인기 높은 영문과를 선택했던 후배는 착실히 학점관리도 했을 테고, 영어연극반에서 배우와 연출도 맡았을 만큼 활동도 많았으니 취업에 별 어려움이 없을 줄 알았는데 역시나 청년실업 문제가 심각하긴 한 모양이었다.

하긴 주변을 돌아보면 갓 대학을 졸업했거나 작년에 졸업하고도 백조나 백수 생활을 하는 지인들이 꽤 된다.
학교를 다니고 있더라도 4학년이 되기 전엔 일단 휴학이 필수라고도 했다. 취업준비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 어학연수든, 취업공부든 미리 해두어야 한다나.
그나마 대학원 후배들은 석사 마치고 나서 계속 공부를 하든, 취업을 하든, 엄연한 직업인 전업주부로 활약하든지 하고 있으니 청년실업자의 대열에 속한 건 아니지만
그 가운데서도 절반쯤은 현재의 직업과 처지에 불만을 품고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은 것 같다.
특히 "영문학" 전공이라는 공통적인 한계를 지닌 사람들에게 주어진 미래의 경우의 수는 너무도 좁기만 하단다.

자기 직업에 100퍼센트 만족하는 사람이 사실 몇명이나 되겠냐고 위로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와는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나는 고등학교때부터 국문학자가 되고 싶었고, 특별히 가고 싶은 학교도 따로 있었지만
이런저런 사정 끝에 "등록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교원자녀 혜택이 있는 학교엘
입학했고  "문과대학에서 제일 성적이 높고 취직이 잘 되는 영문학과"를 가야한다는 부모님의 강압에 따라 영문도 모르고 전공을 정했다.
사실 입시 즈음 나는 "재수필수"를 외치며 단식투쟁 중이어서 ^^;;
대입원서를 쓸 때 방문 잠그고 집에 있다가 담임과 아부지의 독단적인 행동에 허를 찔리고
말았었다.

하지만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렇게 "영어로 밥벌어먹고" 있으니 그분들의 결정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내 바람대로 국문과를 갔더라면 아마도 기껏해야 중학교 국어선생 정도로 살고 있지 않겠나 싶은데, 누군가를 가르치는 게 싫어서 과외 알바도 거의 한 적 없는 내가 교사를 직업으로 평생 살아야 했다면 늘 불행하다 외치지 않았을까?  ㅎㅎ

암튼...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쯤엔 나라 경기가 그리 나쁘지 않은 탓도 있었겠지만
정말로 영문과를 나오면 취업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토익 시험 따위 단 한번도 본 적 없는 주제에 대기업 공채에 원서를 넣었다가 서류전형부터 쓴맛을 보기는 했지만, 그런 걸 미리 준비해둔 친구들은 더러 대기업에 입사를 했고
별 준비 없이 4학년 내내 미래 걱정을 안주삼아 매일 술이나 마셔대던 나 역시 4학년 가을, 취업이 결정돼 11월부턴 회사로 출근을 했더랬다.

영문과 구성비로는 유례없이 여학생보다 4배나 많았던 남자동기들이 군대 다녀와서 3년 뒤 졸업을 할 때도 희한할 정도로 대기업, 중소기업 할 것 없이 너도나도 직장인 대열에 합류했고, 최악의 경우(?)가 학원강사로 빠지는 케이스였던 것 같다.

늘 시국이 시끄러웠던 80년대 중간에 입학했던 친구들의 현재 직업을 따져보면
교수, 교사, 시간강사, 학원강사, 학원원장, 사업가, 자동차 세일즈맨, 주식 분석가, 무역회사 직원, 그냥 회사원, 은행원, 전업주부, 번역가, 고액과외 선생, 마을버스운전기사(전직 학원강사였다 -_-;;), 목사, 스님(!), 외교관, 기자 따위가 있고
지금은 직업이 바뀌었지만 스튜어드나 스튜어디스인 친구도 있었다.

따져보면 대강이나마 전공을 살려 직업을 선택한 경우는 절반도 안되는 듯하니, 영문학이라는 전공이 우리 때는 취업의 걸림돌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대학 후배들 뿐만 아니라, 몇몇 대학원 후배들의 말을 들어보면
영어는 누구나 잘해야 하는 필수 자질이 되고 보니, 특별히 내세울 것이 없는 영문학 전공은 전혀 취업에 도움이 되질 않을 뿐더러 심지어 석사학위는 '가방끈이 너무 길다'는 걸림돌로 작용한다고 한다.  

연일 날아오는 취업 낙방 소식에 기운이 쭉 빠져 있는 후배의 푸념을 들으며
나 역시 기분이 암울해졌다.

나는 지금도 대학을 다니던 4년이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황금기였다고 여기며
그 4년이 단순한 취업준비를 위한 준비기간이란 생각은 한순간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요즘 아이들은 1학년때부터 이미 장기적인 취업 준비를 착착 해두지 않으면
졸업 후 고스란히 실업자 대열에 합류할 수밖에 없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대학원 다니며 조교하던 시절
내가 얼핏 잘못 체크한 출석표를 눈에 불 켜고 확인하며 펄펄 뛰던 학부생들의 태도에도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으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20대 후반에야 비로소 찾을 수 있었는데
아무것도 모른 채 정신없이 입시준비에만 바빴을 19살, 20살 아이들이 어떻게 미래를 짐작하고 계획하며 전공을 선택하고 직업을 준비할 수 있을까?
인생의 행복과 상관 없이 단순히 '취업'과 '돈버는 것'이 목적인 대학생활은 과연 얼마나 낭만적이고 알찰 수 있을까?

내 주변엔 30대 후반이나 늦게는 40줄에 들어서 비로소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며
다시 굳은 머리를 두들겨 공부를 시작하는 이들도 있는데...
긴 인생에서 겨우 3, 4년간 정해진 대학 전공 따위로 삶이 좌우되는 건 정말 너무하다.
최소한 그들에게 미래에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는 기회라도 주어져야 하는 게 아닌가 말이다.

일년 내내 아무 때나 동기며 후배들 취직턱 얻어먹으러 다니던 그 때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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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모임

삶꾸러미 2006. 12. 13. 17:22
바야흐로 연말이다.
그래서 자주 만나온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 대로
만남이 뜸했던 이들은 또 그들대로
올해가 가기 전에 만나 회포를 풀어야하지 않겠느냐고 모임을 청한다.

옛날엔 그런 걸 당연하다 여겼다.
그래서 12월의 마지막 두 주일은 거의 매일 음/주/가/무 가운데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요란한 송년모임 약속을 잡았고, 스스로도 몹시 그걸 즐겼더랬다 ^^;;
직장생활 7년간 거친 회사 3군데에서 사귄 절친한 지인들과는 당연히 만나야 했고
좀 각별히 친한 출판사의 경우엔 직원 회식 자리에도 초대를 받곤 했다.
그뿐인가, 뜻하지 않게 사회에서 만나 깊은 정을 나누게 된 이들, 학교에서 만난 선후배들,
가족 송년모임까지...
지금도 만나자는 대로 다 약속을 잡으면 남은 2006년을 또 다시 흥청망청 보내야할 것 같다.

하지만 몇해 전부터는
그렇게 요란하게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게 귀찮고 민망해졌다.
내가 그리워 만날 사람은 반드시 올해 만남을 되돌아보며 갈무리하지 않더라도
내년 역시 만남을 이어갈 테고
어떤 이유로든 만남이 뜸해진 이들은 그렇게 스르르 서로에게서 멀어지거나, 또 다른 계기로 다시 연이 이어지거나 하지 않겠나 말이다.

물론 꼭 만나서
굳이 '송년모임'이라는 꼬리표를 단 만남의 자리에 모여
올 한 해 우리 참 잘 지냈지 않느냐고, 또는 참 힘들었지만 잘 견뎠노라고
서로 어깨 토닥여주고 격려하고 편한 이야기를 나누고픈 이들도 있다.
다만 그런 모임은 나의 12월에 두어 번으로 족하다는 뜻이다.

나머지는 그냥 반갑게 만나서 2006년이든 2007년이든, 12월이든 1월이든 특별히 뭔가를 마무리하고 매듭지어야 한다는 의무감 따위 없이 즐겁고 행복한 수다와 교감을 나눴으면 좋겠다.
어차피 시간은 연속적인 것이고, 달력으로 구분해 놓은 건 인간의 편의 때문인데
꼭 그렇게 시간의 틀에 얽매일 필요는 없잖아?

그래서 어제 오늘
'올해가 가기 전에 소주나 한 잔 해야지..'라며 송년 모임 날을 받자고 다그치는,  
조금 '먼' 지인들에게는 비겁하게 '어, 내가 시간 봐서 다음 주쯤  전화할게...'라고 말꼬리를 흐렸다.
좀 찔리긴 하지만, 소모적인 연말을 보내고 싶진 않단 말이지..
물론 다음주에 내 연락을 기다리다 또 다시 만남을 청하는 이에겐
당연히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날을 잡아주겠지만 말이다. ㅎㅎ

어느새 내가 이렇게 친구들 사이에도 엄연한 금긋기를 해놓았는지 참...
폭넓은 인간관계를 자랑삼아온 게 좀 부끄러워지는 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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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의 습관

삶꾸러미 2006. 11. 24. 02:31

'시간 내서 밥 한 번 먹어야지..'라는 진부한 대사를 거의 1년쯤이나 반복한 끝에
드디어 친구 하나를 만나 정말로 '밥'을 먹었다.

그 친구와 만날 약속을 정하면서 나는 너무도 당연하게
그동안 늘 하던 대로 다른 친구들에게도 연락을 하려 했었다.
너무 여럿이 모이는 건 이제 나도 좀 피곤한 것 같아 조촐하게 두엇 쯤 더 부르려고
친구들 이름을 주워섬기던 나는 그냥 단둘이 보자고 하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돌연 정신이 퍼뜩 들었다.

생각해보니, 그 친구와 단둘이 약속을 해서 만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늘 '동창'이라는 테두리로 엮인 다른 친구들과 당연히 한 자리에 뭉쳐 만나곤 했던 것.
그러면서 그런 자리가 언제부턴가 약간은 시끄럽고 피곤하다고 느껴져
늘 모임을 주동했던 내가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자 다들 만남이 소원해졌던 게 사실이다.

인복이 많아 다행이라 여기며 지인들과의 이런저런 만남을 즐기는 편이긴 한데
정말로 단둘이 오붓하게 나누는 정담을 즐기는 이들도 있는가 하면
'늘' 왁자지껄 여럿이 모이는 걸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만남도 있다.
물론 단둘이 만나고 연락을 주고받을 만큼 친하지 않은 이들이라 그런 경우도 있지만,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으면서도 단둘이 만나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기이한 습관에 길들여진 만남도 있는 것이다.

여럿이 만나서 더 즐겁고 에너지로 충만하여 서로에게 힘이 되는 만남이 확실히 있긴 하지만
어제 친구와 오붓하고 긴 수다 끝에 돌아오며 느낀 건
역시 '단둘이' 대화의 심도가 훨씬 깊고 이해의 폭도 넓어진다는 점이었다.

단지 익숙하다는 것 때문에 그간 편한 습관처럼 반복했던 내 소홀한 인간관계와 만남을 새삼 돌아보는 계기가 생겼으니, 이젠 한 사람 한 사람 따로 떼어 보며 소중한 인연맺기에 좀 더 정성을 들여야할 것 같다.  

이런 걸 이제야 깨닫는 주제에 맨날 인복 많다고 자랑삼아 떠든 게 새삼 민망하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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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벽

삶꾸러미 2006. 11. 14. 16:38
기벽: 이상야릇한 버릇. 남과 다른 특이한 버릇.

국어사전 찾아봤는데, 내가 하려는 이야기가 이 테두리에 속하는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다. 암튼.. 맞다고 생각하고 일단 써보자.

어제,
만나면 늘 웃음이 끊이질 않는 세 여자가 모여 이런저런 수다를 떨던 중에
놀라운 공통점을 발견했다.
셋 다 싱글이면서도 집안살림에 몹시 신경을 써야하는 처지라는 것.
하나는 동생 데리고 자취중이어서
하나는 엄마가 바쁘셔서
하나는 엄마가 편찮으셔서.

그렇다고 셋 다 잡다한 가사일을 좋아하느냐 하면 그건 또 절대로 아니어서
상당히 귀찮아하고 짜증스러워하는 편이다.
(나만해도 가사노동이 싫어 결혼을 혐오해온 인간이 아니던가!)
게다가 각자 고집대로 살아온 세월이 만만치 않은 나이다 보니
절대로 용납 안되는 자기만의 기준이 있는데, 그게 사소한 것 같아도
남들 눈엔 상당한 '기벽'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어제 깨달은 거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은
설거지를 하고 나서 싱크대에 절대로 물기가 있으면 안된단다.
마른행주로 완전히 물기를 말려두어야 한다는 것.

나머지 두 사람은 이 얘기를 듣고 마구 웃어댔다.
나 같은 경우, 설거지 하고나서 마지막에 행주를 빨아 엄청나게 튀긴 물을 닦아주긴 하지만
그러고 나서 다시 행주 빨면 물이 또 튕기던데!?
그러면 그냥 그 물방울들은 저절로 마르라고 '내버려두고' 행주를 너는 걸로 설거지가 끝이다.
근데 이 친구는 마른 행주로 싹싹싹 물기를 완전히 훔쳐야 직성이 풀린다는 것인데
그간 다른 동거인들이 그렇게 안해놓는 것 때문에 몹시 스트레스를 받았었다고...

그리고 또, 방바닥에 떨어진 머리칼을 절대로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박스 테이프로 늘 찍찍.. 붙여 버려야 직성이 풀린단다.

그 얘길 들은 또 한 사람...
자기는 화장실 휴지가 반드시 2칸 정도 내려오게 잘려 있어야지, 안 그러면 못참고
같이 그 화장실을 쓰는 동생에게 소리를 지른단다 *.*
욕실 슬리퍼도 '언제나' 들어갈 때 곧장 신을 수 있게 나오면서 돌려놓고 나와야한다나.

크하하하... 참 별난 습관도 다 있지 않나?
나는 화장실 휴지 끊기를 무슨 속도전 하듯 다다다다 손가락에 말아서 탁.. 튕기듯 끊는 편이라 어쩔 땐 두세 칸 내려와 있기도 하고, 휴지걸이 덮개 속에 끝이 들어가기도 하고 그때그때 다르던데...
그러고 보니, 세면대는 물론, 화장실 바닥에도 물 한방울 있으면 안되던 친구가 떠올랐다.
그친구네 집에 가면 화장실 가서도 어찌나 조심스러운지... 워낙 사방에 물흘리기가 주특기인 나는 손 씻고 나서 화장실 바닥을 휴지로 여기저기 닦다가 돌연 확~ 짜증이 나기도 했었다.

나는 어떤 기벽이 있더라??
어서 실토해보라는 두 사람의 성화에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나도 물론 방바닥에 떨어진 기다란 머리카락이 구렁이처럼 느껴져서 자꾸 집어버리는 습관이 있기는 하지만, 워낙 탈모가 심한 인간이라 수시로 머리카락 집느라 끙끙대진 않는데...

하지만 생각해보면 분명 나만의 기벽이 있을 거다.
남들도 나처럼 할 거라 짐작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은 뭔가 있긴 할 것 같은데
그게 뭘지 딱히 꼬집어낼 수가 없다.

치약도 중간에 꾹꾹 눌러 쓰다가 마지막이 돼서야 끝으로 모으는 인간이고
(결혼해서 치약 때문에 싸웠다는 신혼부부 얘기 너무도 많이 들었다!)
샴푸나 샤워젤도 늘 두던 자리에 안 둘 때도 많고
청소도 별로 안 좋아하고..
설거지도 마구 쌓아놨다 한꺼번에 몰아서 하는 거 좋아하고(좋아한다기 보다는 마지못해 하는 거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참 되는대로 마구 사는 인간이라는 생각도 드는데
분명 까탈스럽게 구는 부분이 있을 것 같아 그게 너무도 궁금하다.
뭘까..
뭘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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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추억주머니 2006. 11. 1. 23:58
내일 21년만에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설레기도 하고 어쩐지 떨리기도 하고... 그 오랜 세월을 훌쩍 건너뛰어 이야기가 잘 통할 것인지 조금 걱정도 된다.
미니홈피를 통해 그간 좀 변한 친구의 모습도 확인했고, 대강이나마 어떻게 지내는지 분위기는 파악했으니 화제거리가 궁해 어색한 침묵 때문에 진땀을 흘릴 리는 없을 거다.
하지만... 정말로 세월의 거리감을 완전히 잊을 만큼, 우린 과연 그때처럼 통하는 게 많고 든든한 정을 느낄 수 있을까?

중고등학교때 난 덩치로 보나 외모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그리 눈에 띄는 아이는 아니었다.
그저 별로 속 안썩이고 착한 척을 하는 편이어서(가령 환경미화 같은 거에 동원되면 밤을 새서라도 시간표 꾸미기나 게시판 디자인에 힘썼다. 그렇다고 환경미화로 상을 받을 만큼 아이디어가 뛰어난 것도 아니면서.. ㅡ.ㅡ;;) 크게 미움을 받거나 화려한 관심의 대상이 되지도 않았고, 고만고만한 앞번호 아이들과 폭 좁은 교우관계를 유지했다.
가끔 제비뽑기로 자리배정을 하는 경우 뒷번호 아이들과 같이 앉게 되면 나를 귀여워하는 그들에게 여전히 토실토실한 뺨을 내주거나 슬쩍 안기며 드물게 친구를 만들어 갔는데, 이 친구도 그렇게 사귀게 된 '뒷번호' 친구였다. ^^*
내가 그렇게도 싫어하고 괴로워했던 체육시간을 이 친구는 참 좋아했고
100미터 달리기 따위를 하면 가늘고 긴 다리를 날렵하게 움직이며 얼룩말처럼 달려 내 탄성을 자아냈다.

'수업 끝나고 우리집에 갈래?' 따위의 내용이 적힌 쪽지를 주고받기도 했던 것 같고
친구 집에 가서 음악 들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오래 나누기도 했는데
어쩐 일인지 고등학교를 졸업하곤 서로 연락이 끊겼다.
가끔 이런저런 경로로 그 친구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내가 먼저 연락을 해볼까.. 하는 생각은 안해본 것 같다. 그냥 어떻게 사나 궁금하기만 한 정도랄까.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난 소심하고 내성적이고 남들 앞에 나서는 거 싫어하고 감정표현에 그리 능숙하지 않은 본인의 성격을 개조해보려는 노력에 돌입했는데, 원래 인복이 많은 덕분인지 그 뒤론 다양한 부류의 친구들이 마구 불어났다.
물론 어린 시절 친구들을 계속 만나온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는 대학생활과 사회생활을 거치면서 나중에 사귄 친구가 압도적으로 많다.

얼마 전엔가 20년지기 친구들에게 푸념을 했더랬다.
포도주와 친구는 오래 묵을수록 좋다는 말 다 거짓말이라고.
와인 맛에 문외한인 탓도 있지만, 어쨌든 무식한 내 입맛에는 오래오래 묵어 값만 비싼 고급 포도주보다 작년에 갓 수확해 싱그러운 맛이 느껴지는 저렴한 포도주가 훨씬 맛있고,
알고 지낸 햇수는 거창하되 각자 삶의 방식이 크게 달라져, 요즘 만나는 횟수는 일년에 서너번도 안 되는 오랜 친구들은 정작 내가 지금 당장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얼마나 힘들고 아파하는지, 아니면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하나도 모른다고 말이다.
사귄지 얼마 안 됐지만 (물론 그래도 최소 몇년은 된^^;;) 이런저런 소통의 혜택을 받아
심정적으로 더욱 가깝게 느껴지는 '어린' 친구들이 내 인생을 더욱 퓽요롭게 하는 것 같다는 게 내 주장이었다.

그때 내가 내린 결론은, 포도주 맛에 대한 내 취향이 혹시 변덕스레 바뀔 수도 있듯이 앞으로 또 한 20년 지난 다음에도 그 '어린' 친구들이 내 곁에 있는지 둘러본 다음 그때 다시 생각해봐야겠다는 것이었다. ^^;;

살면서 인간관계를 늘 똑같이 유지할 수 없듯이
친구들도 살다보면 저절로 정리가 된다.
소식이 뜸해지다가 서로 더는 찾지 않게되고, 하도 연락한지 오래 되어 갖고 있는 전화번호로 과연 연락이 닿을지 염려스러워 아예 시도조차 안하게 되는 거다.
물론 몇년씩 못 만났어도, 일년에 몇번 통화나 가끔 하면서도 늘 만나온 것 같은 친구도 있고 다시 만났을 때 바로 어제 만났던 것처럼 거리감이 사라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확실히 내가 느끼는 건 가족과 달리 친구는 정성을 들여야 소중히 오래 간직된다는 거다. 자주 만나지 못하더라도 마음 한 구석에 담긴 그 친구의 자리를 가끔은 보듬어주어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뛰어난 나의 건망증이 작용해, 위태롭게 잇고 있던 인연의 줄이 끊어지고 만다.

끊어졌던 연을 다시 이을 기회를 맞게 된 나의 옛 친구는 과연 앞으로 나와 어떤 세월을 쌓게 될까.
어렸을 땐 참 친한 친구였는데, 혹시라도 만나서 아파트 얘기, 아이들 교육 문제, 재테크, 주식 얘기로 나를 소외시켜 슬프게 만드는 일부 친구들 부류로 전락하지나 않을까  벌써부터 걱정이 앞서는 모양이다.
뭐든 사서 걱정하는 버릇은 대책없는 낙관주의 성향과 함께 아직도 나를 양쪽에서 뒤흔든다. ㅎㅎ
일단은 마음을 비워야겠다.
멀지도 않은 동네에 사는 친구이니, 수시로 오다가다 수다 한 판과 차 한 잔 청할 수 있는 친구 하나 되찾았다고 조만간 기뻐하게 될지 또 누가 알겠나.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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