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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3.10 관광옵션 5
  2. 2011.11.03 꼬꼬면이 뭐라고 21
  3. 2011.10.24 꽃파는 마트 12
  4. 2011.10.14 어떤 결혼식 12
  5. 2011.08.26 캘리포니아 우리문화나눔회 돕기 11
  6. 2011.08.01 지금도 좋아 11
  7. 2011.06.29 머리숱 염원 7
  8. 2011.06.22 오르세미술관 전 11
  9. 2011.05.27 의무 7
  10. 2011.03.02 개학/개강 5

관광옵션

하나마나 푸념 2012. 3. 10. 06:29

사대문에서 그리 멀진 않되 꽤 후미진 동네이기 때문인지, 동네 근처에 '이상한 곳'이 꽤 많다. 도로도 넓지 않은데(겨우 왕복 4차선), 오전오후 따질 것도 없이 관광버스가 떼로 몰려와 한 차선을 점령하고 주정차할 만큼 붐벼, 가끔 경찰차가 슉슉 마이크 소음을 내며 도로정리를 할 정도다. '내국인 출입금지'라고 건물 앞에 팻말이 붙어 있고 시뻘건 간판은 오로지 한자로만 써붙인 <고려인삼 면세점> 이야기다. 내가 발견하기론 1, 2킬로 미터 이내에 네 다섯 군데나 몰려 있는데도, 죄다 성업중인 것으로 보인다. 관광버스 앞에 써붙인 글씨로 보면 대부분 중국인 관광객이고, 가끔 일본 관광객 버스도 보인다. 길을 막고 줄지어 서 있거나 좁은 주차장으로 기다란 버스를 대려고 중앙선까지 넘어갔다 후진하는 관광버스들 때문에 병목현상이 생겨 그 앞을 지나려면 한참 걸리기 때문에 짜증도 나지만, 한편으로는 그곳에 끌려온 외국인 관광객들이 안쓰럽다. 보나마나 저렴한 한국관광 상품으로 놀러와, 실제 관광은 하는둥마는둥 툭하면 이런저런 면세점으로 끌려 다녀야 하는 그들에게 한국은 어떤 인상으로 남을까.

현지 언어에 자신이 없고 낯선 나라로 여행을 갈 때는 나도 더러 패키지 여행상품을 선택하지만, 싼게 비지떡이라는 말이 여행상품만큼 딱 떨어지는 것도 없음을 이젠 나도 잘 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패키지 상품을 선택하더라도, <노옵션, 노팁, 노쇼핑>이라고 처음부터 딱 못박아 놓은 상품을 찾는다. 그런 상품도 가이드에 따라선 슬쩍, 이건 정말 너무 좋은 상품이라 소개 안하면 고객들이 불만을 토로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한 군데쯤은 데려가는 형편이니, 정말 패키지 여행은 편하고 싼맛에 가긴 하면서도 일신의 편안함과 맞바꾸어야 하는 나름의 스트레스가 존재한다.

내가 최초로 패키지 여행상품을 경험했던 것은 아마도 제주도 수학여행이었겠으나, 워낙 돈없는 대학생들의 수학여행이라 물건을 사라고 강요받은 기억은 전혀 없다. 그러나 직장생활 하면서 두번째로 친구들과 간 제주도 패키지는 상황이 달랐다. 관광코스 사이사이에 오전 오후 각 한 군데씩은 특산품 판매장에 끌려다녔던 것 같다. 절대 '옥돔'은 사오지 말고 '귤'이랑 '미역'이나 사오라는 엄마의 당부를 받고 간 상황이었는데, 가이드가 특산품 매장마다 하도 다그쳐대는 바람에 꿀과 로열젤리, 영지버섯 같은 걸 사들고와 엄마에게 혼이 났었다. 제주도는 그때도 아름다웠고 여행은 대부분 즐거웠지만, 이후 다시는 제주도에 패키지 여행으로 가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옵션도 어찌나 많은지, 입장료 저렴한 데는 지들이 내준다고 생색내면서 배타고 좀 비싼 데는 죄다 따로 돈을 걷두만. 쳇...

그러나 십수년 뒤인 2002년, 나는 그 다짐을 깨고 또 한번 제주도 패키지 여행에 따라나선다. LA로 이민간 친구가 언니랑 다니러 오면서 끊은 항공권이 하필 제주도 패키지 포함이었고(이왕이면 제주도 여행도 하고 좋잖아! 라고 친구가 말했을땐 나도 그저 헤벌레 좋아라 찬성했다), 나는 별도 1인용 여행비를 내고 공항에서 만나 그 팀에 합류했다. 허나 제주 공항에 내려 관광버스에 오르는 순간부터 나는 얼굴이 뜨거웠다. 버스엔 '고국방문단 환영'이라는 큼지막한 플래카드가 옆구리에 붙어 있고, 비디오 촬영기사가 계속 일행을 따라다니며 동영상을 촬영했다. ㅠ.ㅠ 대부분 십여년 만에 한국을 방문한 이민자들이라 '역사적인' 현장을 기록으로 남길만한 상황인지 어쩐지 모르겠으나, 나와 친구 일행은 거의 미칠 것 같았다. 우리는 절대로 그 비디오 테이프를 사지 않을 테니 찍지 말라고 가이드와 촬영기사에게 극구 당부해보아도, 같은 여행 팀이니 그냥 자연스럽게 촬영에 협조해달라는 말만 돌아왔다. 우웩~~!!

어쨌거나 때는 가을이 한창이라, 나는 버스에서 제주 오름 근처의 억새밭이 정말 장관이겠다고 미리부터 운을 띄웠다. 가을 제주 바다는 또 얼마나 예쁜 옥색인지 몰라. 바닷물도 아직 따뜻할 걸... 그러나, 아무리 패키지 여행이라지만 고국방문단을 위한 제주 관광 코스는 정말 너무 심했다. 관광지 하나 건성으로 휙 보고 특산품 판매점에 가면 1시간 반씩 머무는 걸 3일 내내 번갈아할 줄이야! 특산품도 내가 예전에 소개받던 것과는 가격대가 아예 달랐다. 대부분 하나에 수십만원을 넘어 백만원에 가까운 말뼈(관절염과 골다공증에 특효라나)! 동충하초(설명만 들으면 거의 만병통치약이두만)!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아가리쿠스 버섯(항암과 당뇨치료제라고 들은듯)! 워낙 고가인지라 그런 상품을 사면 자연산 꿀이랑 로열젤리(십수년 전엔 내가 돈 깨나 주고 사왔었는데!)를 덤으로 막 준다고 했다. 일행중 우리만 삼십대였고, 동영상 촬영거부에다 쇼핑은 전혀 할 마음이 없어 상품설명할 때 일부러 휘휘 농장 구경이나 다니고 있으니 가이드에겐 미운털 깨나 박힌 상황이었다. 하지만 싫은 데 어쩌라고!

관광지라도 제대로 데려가면 좋겠는데, 어쩜... 바다라곤 용두암과 외돌괴 두 가지만 딱 보여주더니 잠수함, 유람선 타는 것도 옵션, 몽고인들의 조랑말 쇼도 옵션(제주도 가서 왜 몽고 조랑말 쇼를 보라는 건지!), 조랑말 시승도 옵션, 무슨무슨 박물관도 옵션... 죄다 돈내고 하는 것만 강요했다. 물론 억새밭 구경과 제주 해수욕장 구경 따위는 아예 코스에 없었다. -_-; 오죽하면 사흘간 제주 관광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으로 친구가 꼽은 것이, 호텔 마당 앞 풍차 카페에서 밤에 맥주랑 칵테일 마신 거였다. 우리는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을 보려고 간 거라규~! 결국 우린 관심없는 옵션 코스 때 관광버스에 그냥 남아있겠노라고 고집을 부리기도 했으나, '안전 관리상 불가'하다는 말에 한숨을 쉬었다. 다 이민자인데 유일하게 신분이 다른(?) 내가 가이드에게도 골칫거리였을 테지만, 아니 말이 안통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제주도엘 벌써 몇번째인데! 어휴!

째뜬 덕분에 나는 제주도에 그토록 수많은 특산품 면세점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수정은 익산이 유명하다고 알고 있었는데 아 글쎄, 제주도에서도 팔더군! ㅋㅋ 정말로 또 LA 부자 교포아주머니들은 이따시 만한 자수정 금반지와 목걸이를 막 척척 사주시고... 가이드는 싱글벙글...  촬영기사 아저씨는 그들을 열심히 비디오카메라로 찍어대고... 정말 우리에겐 악몽이나 다름없는 제주여행이었다.

동네 근방에 있는 <고려인삼 면세점> 앞에 선 관광버스 행렬과 외국인들을 보며, 자꾸만 그 때의 '고국방문단' 패키지 여행이 떠올라 유심히 사람들 얼굴을 살피는데 내 선입견 탓인지 표정들이 다 좋질 않다. 명동은 물론이고 이대앞과 홍대앞에도 와글와글 지도 들고 삼삼오오 돌아다니는 중국인, 일본인 관광객들의 표정과는 사뭇 다르다. 들어보면 개인으로 찾는 일부 한류관광객들이 아닌 한, 그들도 하루쯤 시내 자유관광을 하는 것일 뿐 역시나 저렴한 패키지 상품으로 여기저기 특산품 면세점에 끌려다니는 것이 분명하다고 한다. 과연 그렇게 한국과 서울을 '관광'하고 나면 또 다시 오고 싶은 애틋한 마음이 들까? 어차피 패키지 상품이라는 것의 특징과 단점을 그들도 알고 오긴 했겠지만, 한류를 업고 여행사마다 싸구려 상품으로 외국인들 데려다가 망신만 시키는 건 아닌지 퍽 궁금하다. 내가 아무리 제주도는 그런 데가 아니라고 나중에 변명해 보아도, 친구와 언니에게 제주도는 음식도 별로 맛없고, 구경할 데도 별로 없으면서 바람만 엄청 불고, 야자수는 말라죽는 곳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오죽하면 수년 뒤 다시 온 친구에게  내가 제대로 제주여행 가자니깐, 차라리 일본엘 가자고 했을라고. +_+ 친구는 올 가을쯤 다시 한국으로 놀러올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제주 올레길 한번 걸어볼래? 라는 나의 질문에 역시나 방사능 괜찮은 곳으로 골라서 일본 온천이나 가자니깐! 하고 대답했다. 첫인상은 이렇게 중요한 것일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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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먹진 않지만 나 역시 <라면은 역시 신라면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한달에 한두번 끓여먹는데도 집에 신라면이 떨어질 일은 없다. 그밖에 우동과 소면, 인스턴트국수, 떡국떡도 상시 준비되어 있다. <점심끼니는 웬만하면 간단히 분식으로>가 나의 모토이기 때문이다. 점심에 제일 자주 끓여먹는 건 떡만두국과 가쓰오부시 우동(생면으로 인스턴트 제품이 나온다). 최근 맵지 않아 만만한 후루룩 국수도 꽤 애용했다(엄마는 매운 음식을 못드신다). 그런데 몇달 전 꼬꼬면이 등장한 거다. 별로 맵지 않다니 점심끼니 후보로 올릴 만했다. 헌데 엄청 인기라서 품귀현상이 빚어진다나 뭐라나 뉴스에도 나오고, 거의 암거래를 연상케 할 만큼 어렵사리 구해야 하는 라면으로 루나파크 에피소드에도 등장했다. 동네 마트에 가보니 정말로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또 괜히 빈정이 상하면서 맛도 보기 전에 먹기가 싫어졌다. 닭비린내 난다잖아! 일부러 유통을 제한해서 사람들 감질나게 만드는 꼼수 마케팅 수법 아냐? 라면이 맛있어 봤자지... 

그러고 잊고 있었는데 얼마전 LA사는 친구가 통화하다가 문득 물었다. 아 참, 너도 꼬꼬면 먹어봤니? 그렇게 맛있어? 여기 사람들 그거 먹어보고 싶다고 난리다 너.. -_-; 나도 아직 구경 못했다고 했더니 친구가 말했다. 너도 못먹어 봤으면 여기 들어와도 엄청 비싸고 사기 힘들겠다 야. 너 내년에 놀러 올 때 한 박스 사와! 킥킥 웃으며 알았다고 대답은 했지만, 나는 다음번 친구와 통화할 때 먹어보니 별 맛 아니더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 그 담번에 장보러 갔을 때 열심히 라면류 선반을 뒤졌다. 어느 구석에 한개라도 남아있을지 몰라, 그러면서... 그러나 없었다. 나는 또 다른 음모론을 상상했다. 꼬꼬면의 물량이 부족해 공급 안되는 게 아니라, 혹시 농심에서 마트에 압력을 넣는 거 아닐까? 그 마트가 원래 이름 없는 중소기업의 신선식품이 들어와 좀 인기를 끄나 싶으면 이내 대기업 제품에 쫓겨나곤 했기 때문이다. 국내산 쌀로 만들어 정말 맛있고 부드러운 데다 가격도 저렴해 내가 애용했던 떡국떡이 몇달만에 비싸고 찔깃해서 별로인 풀*원 떡국떡에 밀려나는 식이었다. 물론 한국야쿠르트가 힘없는 기업은 절대 아니겠지만... 암튼 꼬꼬면에 대한 나의 열망이 그리 큰 건 아니라 없으면 말지 하는 정도였다. 게다가 가끔씩 마트에서 행사로 구매액이 몇만원 넘으면 주는 사은품이 노상 오뚜기 '진라면'이더니 '신라면'을 줬다. 농심 마트 외압설(?)에 괜히 더 심증이 갔다.

그런데 요번엔 미중부에 사는 후배가 꼬꼬면과 나가사키 짬뽕이 드디어 들어왔다고 신나하는 감탄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목하 흰국물 전쟁중인 라면업계에서 나가사키 짬뽕은 삼양이 꼬꼬면의 대항마로 내놓은 제품이다. (나 이런 거 왜 일케 잘 알지? ㅋㅋ) 유학생 및 교민들에게 한국 라면류의 인기야 익히 알고 있는 거지만, 한국에 있으면서도 몇달째 아직 맛도 보지 못하고 있는 나는 이유없이 조바심이 났다. 해서 마트에 가 또 다시 꼬꼬면을 찾아 헤맸다. 이번에도 없었다. 대신에 나가사키 짬뽕은 특설판매대에 엄청 쌓여 있었다. 흠... 꿩대신 닭이라는데...

적어간 쇼핑목록에 있지도 않던 나가사키 짬뽕을 결국 꾸역꾸역 사오긴 했지만 뭔가 기분이 찜찜했다. 어쩐지 업자들의 담합 농간에 넘어간 느낌도 들고...... 대체 꼬꼬면이 뭐라고! 그래서 반항(?)의미로 오늘은 소면을 삶아 건강에 좋은 콩국수(물론 두부와 우유로 만드는 간단식)를 새삼 만들어먹었다. 날씨도 다시 더워져 아주 딱이두만. 그러나... 아마 나는 담번 장을 보러 가서도 혹시 꼬꼬면이 있나 기웃거리게 될 것 같다. 이런 걸 도달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끊임없는 욕망이라고 하는 건가. 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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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파는 마트

투덜일기 2011. 10. 24. 05:08

찾아보니 벌써 7년전이다. 부산으로 놀러간 적이 있었는데, 서울에서 KTX타고 셋이 내려가면 울산에 사는 한 사람이 역으로 마중을 나오기로 했다. 금요일 저녁 회사를 마친 직딩 둘을 서울역에서 만나 설레는 마음으로 부산으로 떠났고, 9시쯤 반가운 상봉 후 곧장 숙소를 잡아놓은 해운대로 향했다.

시간이 넉넉했던 울산 친구는 일찌감치 부산에 도착해 우리가 2박3일간 먹고 지낼 먹거리 장만까지 미리 다 해둔 터였다. 해운대 횟집에서 거나하게 배를 채우고 숙소엘 가보니, 화장실 세면대에 분홍색 장미 한 다발이 비스듬히 물에 잠겨 있었다. 광안대교가 바라다보이는 밤풍경에 이미 신이 나 있던 나는 너무 좋아서 꺅 소리를 질렀던 것 같다. 울산 친구는 낑낑대고 혼자 미리 장을 보며 마트에서 파는 장미다발을 충동적으로 샀다고 했다. 마트에서 꽃을 판다고? 환영의 의미로 장미를 마련해둔 친구의 센스도 만점이었지만, 꽃파는 마트에 대해선 금시초문이었던 나는 부산 마트가 서울보다 좋다고 술김에 막 감탄했다. 그랬더니만 친구가 울산 마트에서도 꽃 판다고 했던 것도 같고...

암튼 그날 우리는 다시 본 술상 한 가운데 장미를 꽂아놓고 기분을 냈고, 다음날부턴 우리가 마신 빈 맥주병에 장미를 꽂아 창가에 놓아두었다. 이렇게...

떠나오는 날, 비가  많이 내렸는데, 아깝지만 저렇게 꽂아두고 방을 나서며 빗방울 맺힌 유리창과 맥주병에 꽂힌 장미가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나도 마트에서 장볼 때 기회 되면 꽃도 같이 사야지 마음 먹은 게 이때였을까나...

작업실 있던 시절엔 코앞에 이마트가 있어 자주 갔었지만 매장 규모가 서울에서 제일 크다는(확실한지 모르겠다) 그곳에서도 생화는 잘 팔지 않았다. 꽃이 핀 화분(주로 양란이나 포인세티아 정도)과 알록달록 조화 파는 건 많이 봤어도, 한다발씩 묶어놓은 꽃을 파는 건 본 적이 없었다. 그나마도 최근 이마트는 조카들 장난감과 레고를 사러 가는 일이 없으면 아예 가질 않는다. 대형마트는 너무 정신없고 피곤하고 무엇보다 이상하게 숨이 가쁘다. 특히 멀미나게 지하6, 7층까지 뺑글뺑글 내려가 주차를 시켜놓고 나면 벌써부터 호흡곤란을 느끼는 듯.

그래서 내가 주로 다니는 마트는 동네 근처에서 주차가 그나마 편한 곳이다. 대형 유통업체의 프랜차이즈기는 하지만 매장이 단층이고 멀미나게 넓지도 않아 빠르게는 30분, 길어야 1시간내에 후다닥 장을 보기에 딱이다. 그러니 당연히 생화까지 갖춰놓았을 리가 없지 않은가. 재래시장 쪽으로 가보면 화원이 하나 있기는 해도 소박한 다발꽃을 파는 것 같지는 않다. 동네 꽃집도 다 문을 닫는 바람에, 내가 가끔 전철역 근처 좌판에서 꽃을 만나면 반색하고 사는 이유도 다 워낙 꽃보기가 드물기 때문이다.

헌데 요번에 노상 다니는 굿모닝마트(혹시나 담당자가 검색하고 들어와 보고 또 꽃화분 기획하길 바라는 흑심에 밝혔다;; ㅋㅋ)엘 갔더니 입구에 꼬맹이 소국 화분이 좌르륵 놓여 있었다. '국내산 1990원'이라고 찍힌 가격표까지 붙어있는 걸 보니 어찌나 기쁘던지 쇼핑카트에 제일 먼저 소국을 두 개 실었다. 나중에 안고가기 번거롭겠지만 어떠랴. 우리동네 마트에서도 꽃을 팔다니. 아니, 마트에서 가을을 파는 것도 같았다. 1990원짜리 가을. ^^

절화는 생명줄을 똑똑 끊어 파는 거라는 말을 들어놔서, 일주일이나 열흘 쯤 눈요기 삼자고 사긴 사면서도 가슴 한 구석이 찔린다. 뭐 그렇다고 살아 있는 꽃화분을 사서 결국 말리거나 썩혀 죽이는 것도 별로 나은 짓은 아니겠으나, 꽃화분을 사는 건 절화 다발을 사는 것보다는 좀 덜 찔리는 행동 같다. 분홍과 노랑, 두 종류를 품에 안고 돌아와 엄마한테 자랑하니, 엄마 역시 어느쪽을 고를까 잠시 고민하다 (처음엔 분홍을 선택하셨다) 꽃이 많은 노랑을 곁에 놓고 보겠다 하셨다.  


재주없이 따로 찍은 사진을 편집하렸더니 영 시원찮다.

꽃파는 마트로서의 위상을 계속 유지할지 어떨지는 모르겠으나 암튼 동네 마트에서 꽃을 사왔더니 고릿적 여행추억까지 떠올라 두루두루 기뻤다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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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결혼식

투덜일기 2011. 10. 14. 23:47

지난주 다녀온 친구 결혼식 때문에 뭔가 끄적이고 싶긴 한데 스스로도 뭔가 입장정리랄까 생각이 마무리되질 않아 갈팡질팡했다. 오늘은 신부가 보낸 의례적인 답례 문자도 받았으면서 뭐가 이리도 불만인가. 그 이유가 정확하게 뭔지, 어쩌면 알것 같은데 편협한 자신에게 실망스러워 인정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여기다 일러바치다 보면 결론이 나지 않을까.

흥미진진한 쇼 이벤트를 보러가는 양 즐겁게 시작했던 결혼식 참석의 뒷맛이 씁쓸한 사유로 추정되는 몇 가지.
1. 데미 무어처럼 심히 어린 남편감을 짠~하고 선보일 것이라 늘 기대했던 친구의 배우자가 오십대 중반의 법조인이다.
2. 친구가 내게 "미안하다. 시집 나 먼저 간다!"라고 말했다. (-_-; 뭐가 미안한데?)
3. 가을밤 낭만적인 정취가 물씬 풍기는 아름다운 야외 결혼식장의 둥근 테이블엔 뜻밖의 팻말이 많았으나 정작 '신부 친구'가 앉을 자리는 표시되지 않아 우릴 방황하게 만들었다.

근래 참석한 식장중 단연 아름다웠다


4. 신부 친구로서 축사를 한 두 사람이 다 외국인이었다. (추워죽겠는데 영어 축사를 어찌나 길게 하던지!)
5. 신랑 친구로서 축사를 한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특정 정당의 정치인이었다.
6. 주례가 없는 대신 두명이나 나선 사회자 소개부터 시작하여, 결혼식 내내 '모대학 법대'라는 말을 최소 30번쯤 들었다.
7. 축가로는 신랑이 직접 My way를 열창했다.
8. 이 친구의 결혼으로 인하여 마치 금지된 봉인이 풀리기라도 한 듯, 최근 10년간은 감히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던 결혼독촉(너도 늦지 않았어! 넌 언제 할래? 등등)을 지인들이 내게 서슴없이들 해댔다. 푸하하하. .ㅜ.,ㅡ
9. 아무리 봐도 내가 심히 소인배다.

역시 써내려가며 결론이 났다. 답은 9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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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또한 뜬금없는 홍보성 글이라 민망하지만, 한번 해보니 얼굴에 철판깔기 그리 어렵지도 않은 듯하여 그냥 저지른다. 새벽이라 정신도 몽롱하겠다... -_-;

아는 분(실은 친구 남편이시다)이 LA에서 NGO활동(KIWA라는 단체임)을 오래 해오고 계신데, 최근 역점사업이 한인교민들을 위한 생활공동체같은 나눔농장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그간 순전히 기부금으로 농장부지 마련에 힘을 써온 끝에 7만불이 모였지만 아직은 기금이 많이 모자란 상황이고, 그 타개책으로 기부금 대신 <희망벽돌 쌓기>라는 이름으로 씨앗기금 출연을 하고 있단다. 간단히 말해서 벽돌 한장(2천 달러 이상)씩 품앗이를 하듯 2년간 무이자로 빌려주시는 분께, 정확히 2년 후 원금을 갚겠다는 뜻이다. 씨앗기부자들에게는 일년에 몇번 농장 내 숙소를 이용할 수 있는 혜택이 주어지고(이거 핑계 대고 놀러가야지!), 법적으로 권리를 보장하는 일종의 담보권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아래는 메일로 받은 제안서 일부에 적혀 있는 혜택 부분.

고향을 떠나온 이민자들에게 고향 같은 공간을 마련해보겠다는 것이 이 사업의 취지인 것 같다. 문제는 한달 아내로 기한이 상당히 촉박하다는 것. 십시일반으로 마지막 벽돌을 쌓을 수 있도록 주변인들에게 널리 알려달라는 취지에서 나한테까지 연락이 닿았다. 도대체 뭘 믿고 이런데 투자를 하라는 건지 빗발치는 비난이 예상되는 것도 같지만, 친구든 친척이든 캘리포니아쪽에 이민하신 분들을 주변에서 찾아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는 생각에 무례를 무릅썼다.

이민 역사가 상대적으로 짧은 탓이겠지만 LA에 가보면 코리아타운이라고 해봤자 한국 상점들이 군데군데 모여있을 뿐 진짜로 고향의 느낌 따위는 전혀 없다. 반면에 일본인들의 리틀도쿄 거리엘 가보면 확실히 다르다. 심지어 일본 이민사 박물관도 있더라니까!(궁금해서 들어가봤는데 친절한 일본인 할머니가 끝까지 쫓아다니며 설명을 해주더라 -_-;) 한인공동체는 세계 어느 지역엘 가든 교회가 아니고선 좀체 결집되지 않는 것 안타까웠는데, 이런 나눔농장 같은 움직임이 있다는 게 나는 그저 반갑다.

내가 제대로 설명을 잘 했는지 모르겠는데, 더 궁금한 게 있으신 분들은 우리문화 나눔회 사이트(www.nanum.us) 게시판에서 직접 확인해보셔도 좋을듯. 사이트 정비한지 얼마 안되는 듯, 단체 홍보내용은 많지 않지만 게시판엔 사업내용과 요지가 잘 적혀 있다. 아래는 농장 위치와 주소가 들어 있는 제안서 부분이다.

요즘 부쩍 방문자수가 많아서 두렵고 불편했는데 의외로 그 덕을 캘리포니아에 계신 분들이 보게 될지 어쩔지 모르겠다. 사기극은 절대 아님을 보장하는 바이니 혹시 관심 있으신 분은 참여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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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좋아

투덜일기 2011. 8. 1. 02:00

10년이 넘도록 생일카드에 덕담으로 "올해는 꼭 좋은 분 만나서 결혼하시길 빌게요, 화이팅!"이라는 말을 빠짐없이 적는 친구가 있다. -_-; 해마다 푸하하하 비웃어주는데도 참 끈질기고 열심이다. 주변에 결혼을 굳이 해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회의파>와 태도가 어중간한 <중도파>, 그래도 결혼은 반드시 하고 봐야한다고 믿는 <결사파>가 있는데 이 친구는 결사파에 속한다. 해서 선과 소개팅에도 열심이다. 말로는 부모님의 성화로 어쩔 수 없다지만 내가 과거 겪어봐서 아는데 몇년 결혼 시장에 끌려다니다 영 싹수가 없어보이면 부모님도 포기하기 마련이다. 본인이 포기를 안했다는 뜻이다. 

여러 모로 나와 공통점이 많은 비혼족이면서 내년이면 꼭 예순이 되는 선생님 한분과 셋이 종종 만나는데, 셋이 다니면 친구 사이가 아니라 두 딸 데리고 외출한 엄마 같아 보일 거라 자조하시는 그 선생님께도 이 친구는 내게 하는 것과 똑같은 덕담을 고수한다. 짚신도 짝이 있다는 인연설을 굳게 믿는 눈치다. 보아하니 내가 예순살, 일흔살이 되더라도 이 친구와 관계를 지속하는 한은 매년 같은 덕담을 들어야 할지 모른다.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이 친구가 얼른 결혼을 해서 결혼생활의 비애(행복한 결혼에도 비애는 있기 마련이니까;;)를 뼈저리게 느껴, 다른 기혼 친구들처럼 결혼관에 균열이 생겨 "그래, 혼자 사는 게 속편하지! 무자식이 상팔자라더라!"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는 거다. ㅎㅎ

어제도 친구는 저보다 한참 나이많은 우리 둘을 앞에 두고 인연설을 강조하며 또 다시 <좋은 분> 타령을 이어갔다. 대개는 킥킥 웃으며 알았다고 얼버무리는 걸로 화제를 종결짓는데, 어젠 그 수법이 안통했다. 결혼이 정 싫으면 애인이라도 꼭 만들어야 한다고 성화(?)였다. 하는 수 없이 선생님이 진화에 나섰다. 잊고 살던 본인 나이를 생각하면 참 싫지만, 그 나이의 늙은 남자를 생각 하면 너무 혐오스럽다고. 그러니 애인 따위 전~~~혀 필요 없다고. 까탈스럽지만 우아하고 순수함을 잃지 않은 나이 예순의 비혼녀는 쉽게 그려지는 반면, 예순살의 비혼남이라고 하면 벌써부터 추레하고 구질구질한 모습이 상상되지 않나? (나의 비뚤어진 편견이라도 어쩔 수 없다;;) 나는 반색하며 맞장구를 쳐, 우릴 좀 내버려두라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려 했으나 친구는 완강했다. 그럼 연하의 젊은 남자친구를 만들라는 것. 우어~~~~!!! >.,<

친구는 진정 우리의 행복을 빌어주는 마음으로 그러는 것임을 알기에 속으로 부아가 나도 화를 낼 순 없다. 그저 가치관의 차이일 뿐이다. 비혼을 미혼이라 부르는 건 나이가 어찌됐든 미완성의 인생이자 결핍을 의미한다는 함의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야 그렇게 여기더라도 워낙 보수적인 가치관에 젖어 살았으니 그러려니 하겠는데, 가만 보면 젊은축에서도 혀를 끌끌 차며 나 같은 처지(?)를 안쓰러워하는 태도를 보인다. 결혼과 자녀를 엄청난 성취로 여기는 기혼자 친구들 중에 더러 그러는 이들이 있는데, 가끔은 이렇게 별종 같은 친구도 존재한다. 내 인생이 <꽃피려면> 반드시 <좋은 분> 만나 결혼을 해서 아이도 낳아야한다며, 이제는 울 엄마도 친지들도 감히 안하는 잔소리를 턱턱 해댄다. 

선생님과 나는 둘만 아는 미소를 지으며 결국 고개를 끄덕끄덕, 알았으니 눈씻고 주변을 잘 둘러보겠다고 다짐을 한 뒤에야 그 화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우린 정말로 지금 그대로도 별 부족함 없고 좋은데, 참 좋은데 그것 참 말로 설명해줄 수도 없고 안타깝다(나름 광고 패러디 한 거다 ㅋㅋㅋ). 친구가 더 나이를 먹고 생각이 넓어져 우릴 이해하는 날이 오기를 기다려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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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숱 염원

투덜일기 2011. 6. 29. 00:29

지난 겨울 쥐뜯어 먹은 것처럼 너무 짧게 커트를 해놓는 바람에 미용실 가는 게 두려워 7달이 넘도록 방치하다시피한 머리칼이 꽤 많이 자랐다. 집에 있을 땐 머리가 짧을 때도 거치적거리지 말라고 앞머리를 넘겨 실핀으로 꽂고 있는 편이라, 머리가 길어진 뒤로는 늘 질끈 동여매고 산다. 여름엔 확실히 숏커트보다도 가뜬하게 하나로 묶은 머리가 시원하다. 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노란 고무줄로 묶었었는데 가뜩이나 숱 적은 머리칼이 뽑혀 나오는 것 같아 머리끈도 몇 개 샀다. 예전부터 간간이 쓰던 검정 고무줄은 형편없이 늘어져 버려야 했다.
 
머리칼이 길어서 머리 고무줄을 상용하는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머리끈도 규격이라는 게 있는지 크기는 거의 일정하고 고무줄의 굵기만 좀 차이가 있다. 거기에 장식이 달렸거나 안 달렸거나의 차이. 사람 머리숱이 저마다 다른데 왜 고무줄은 일정한 길이로만 나오는지 새삼 불만이다. 물론 '고무줄'이므로 탄력성이 있어 두번 돌려 묶든 세번 돌려 묶든 묶는 사람 마음이니 상관없다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일정한 고무줄의 탄력성이란 게 뻔한 수준이라 무한정 늘어날 리 없다. 보통 시중에서 파는 고무줄로 숱이 꽤나 많은 조카의 머리를 하나로 묶어보면 딱 두겹으로 돌리면 적당하다. 느슨하지도 않고 너무 팽팽해서 머리칼이 뽑혀나오는 느낌도 없을 정도로. 그러나 똑같은 고무줄로 포니테일을 해도 알량한 내 머리숱엔 최소 세번은 돌려야 고정된다. 고무줄이 좀 느슨해 많이 늘어나는 건 네번도 돌려진다. 허나 그렇게 쓰다보면 고무줄이 금세 늘어나 헐거워져 망가지고 만다. 고무줄도 소모품인지 몇달 쓰다보면 힘없이 늘어지거나 안쪽의 고무줄이 끊어져 바깥쪽 실만 연결되어 있는 형상이 종종 발생한다. 그렇게 규격이 허물어진 고무줄로는 도무지 내 머리를 묶을 수가 없다. 한번 더 돌리자니 모자라고 그냥 두자니 헐겁고...

거의 매일 일어나자마자 손가락으로 슥슥 빗어 머리를 질끈 동여매며 염원한다. 나도 고무줄을 두번만 돌려 묶을 수 있을 정도로만 머리숱이 많으면 좋겠다고. 고등학교 때 아침마다 내가 늘 머리를 땋아주던 친구가 있었다. 머리숱이 하도 많아서 아침에 머리를 감고 나면 드라이를 쪼여도 다 마르길 기다리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물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말린 뒤 그냥 산발을 해가지고 학교에 오는 아이였다. 샴푸도 엄청 든다고 했다. 긴 머리칼을 이리저리 모양내서 땋는 놀이를 즐기던 나는 하루는 디스코머리, 하루는 반고정 머리, 하루는 이단 땋기, 하루는 양갈래 머리, 하루는 그냥 포니테일, 하는 식으로 열심히 스타일을 바꿔주었다. 그 친구의 머리를 손으로 잡으면 한움큼이 넘어 일반 고무줄로는 제대로 묶을 수가 없었다. 파는 규격 고무줄로는 절대 두번 돌려지지 않는 굵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다란 검정 고무줄을 적당한 길이로 잘라 칭칭 동여 매 묶는 방식을 택했다. 고무줄 한쪽 끝과 머리칼 한손으로 잡고 다른 끝을 빙빙 돌려 마지막에 팽팽하게 딱 묶는 기술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_-v

당시엔 사복을 입을 때라 검정 고무줄로는 마음에 차지 않아 그 위에 리본을 덧묶었다. 헤어밴드나 머리장식으로 쓸 수 있는 체크무늬, 땡땡이 무늬, 민무늬 리본을 각종 넓이로 팔던 시절이었다. 친구는 빨간색 체크무늬 리본을 좋아했던데 반해 나는 하늘색 바탕에 하얀 물방울 무늬가 있는 리본을 좋아해서 티격태격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아침 조회 시작 될 때까지 머리칼을 다 못 묶어서 담임한테 핀잔을 듣기도 했던 것 같고. (지금도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머리 길이가 어깨에서 어느정도 넘어가면 반드시 묶어야 하는 두발 규정이 있었다)

나는 스무살 무렵에도 속알머리 없다고 놀림을 당할 정도였으니 지금 머리숱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오늘도 최근에 산 제일 짱짱한 고무줄로 세번 돌려 머리를 묶고 풀리지 말라고 머리채도 빼다 말고 접어 끼워두었는데도 금세 느슨해지는 걸 보며, 문득 그 친구가 떠올랐다. 그 친구는 머리를 땋으려고 세 갈래로 갈라놓은 한 묶음이 내 전체 머리보다 굵었으니 최소한 머리숱이 내 세 배라는 뜻이다. 동년배 친구들 모두 이젠 흰머리도 소중해서 함부로 뽑지 않는다는 나이가 되었는데, 그 친구의 머리숱은 여전할지 궁금해졌다. 고등학교 졸업 후 단 한번도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는데 그 숱많은 머리를 지금은 어떻게 하고 다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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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세미술관 전

놀잇감 2011. 6. 22. 16:47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 전시작품에 포함됐다는 소식에 가야겠구나 벼르고는 있었다. 오르세미술관 전시회는 잊을 만 하면 몇년에 한번씩 기획되는데다가 몇해 전엔 <고흐의 방>과 밀레의 <만종>이 왔다고는 해도 작품수가 하도 알량해 보이코트했던 것과는 상황이 달랐다. 오르세 미술관 내부수리 때문에 작품을 '대거' 빌려올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렸기 때문이다. 134점이면 소품이 포함됐다 해도 예술의 전당까지 흔쾌히 가줄 수 있는 작품량이었다. 6월 4일에 시작해 9월 25일까지 하는 전시라 '언제' 갈 것인가 그것만이 의문이었는데, 마침 어제 저녁약속이 예술의 전당 안에 있는 벨리니에서 잡혔다. 여름밤 산책도 하자면서. 이런 걸 하늘의 뜻이라고 하는 거야, 라며 설렘을 안고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별이 빛나는 밤> 말고는 또 무슨 그림이 왔는지 일부러 알아보지 않고 갔는데 그러길 잘했던 것 같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고, 꽤 유명한 그림은 10분의 1도 되지 않는듯했다. 오르세에서 빌려주는 작품만 가져오다보니 일관되는 주제나 사조로 전시실을 꾸미기에도 역부족이었던 것 같고...
고흐, 세잔, 르누아르, 밀레, 드가, 모네, 고갱, 피사로, 보나르, 로트렉, 쇠라, 루소 등등 그림책에서 봤다 싶은 화가들의 작품이 한두 개씩은 전부 포함되긴 했으나 이른바 오르세가 자랑하는 대표작은 많이 빌려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도 난 뿌듯했고 만이천원이 아깝지 않았다. 실물 알현을 못했던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을 실컷 보고 왔기 때문이다. ^^; 데생과 스케치류의 소품도 꽤 많고, 대중화되기 시작한 20세기초의 사진 작품들도 더러 포함되어 있으므로, 134점 모두 대작일거라는 오해는 하지 않는게 좋겠다. 나는 최근 한국과 일본 근대문학을 좀 읽었더니 20세기초 사진과 작품들이 남다르게 다가왔고, 거리의 신문팔이 소년들이나 공장장에서 일하는 소녀들의 노동현장 포착 모습이 짠했다.  


게다가 뜻밖의 그림들도 몇점 만나는 바람에 마음에 드는 작품만 집중적으로 몇번씩 감상하며 눈호강을 할 수 있었다. 방마다 주제를 정해놓기는 했던데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서 모르겠고, 암튼 인물화를 모아놓은 전시실에서 맞닥뜨린 르누아르의 <소년과 고양이>, 모네의 <고디베르 부인의 초상>, 로트렉의 <여자 어릿광대 샤 위 카오> 세 작품은 거의 나란히 걸려 시선을 끌었다.

르누아르, [소년과 고양이]

포스터에 담긴 오른쪽 그림이 바로 르누아르의 초기작이라는 <소년과 고양이> 일부인데 정말 예쁘지않은가! @.@ 
르누아르는 항상 예쁘고 아름다운 대상을 화폭에 담아 눈을 푸근하게 해주는 그림을 그렸지만, 척 보면 르누아르 그림이라고 알 수 있을 듯한 특징이 작품마다 두드러진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초기작이라도 이게 르누아르 그림이라니 의외였다. 평소 보던 르누아르 작품과는 색감도 뭔가 다르고 분위기도 한층 어두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도슨트의 말을 들으니 누드화 가운데서도 남자 누드는 이 작품이 유일하단다. 고양이 표정까지 어쩜 저리도 사실적일고. 꽃소년에 열광하는 본성을 못속이고 이 그림 앞에서 한참이나 헤벌쭉 미소를 지으며 서 있다가 돌아섰다. ㅎㅎㅎ

상당히 작품 크기가 큰 모네의 <고디베르 부인의 초상>도 워낙 아름다워 한참을 감상했는데, 좀 더 인상적이었던 건 그 바로 옆에 걸린 로트렉의 작은 인물화였다. 어딘가 퇴폐미와 서글픔이 철철 넘치는 것 같은 로트렉의 그림도 꽤나 좋아하는데 공단 드레스를 떨쳐 입은 단아한 귀족 여인의 전신상 옆에서 더욱 초라하게 대조되는 어릿광대의 뒷모습이라니...
로트렉의 그 그림 사진 찾아올리려고 나름 검색해보았으나 못 구했다. 하기야 구한다고 해도 전시실에서 그 순간 느꼈던 기분을 전달할 순 없을 테니 그냥 통과.

그 방에 같이 걸려 있던, 처음 들어보는 아르망 스갱이라는 화가의 인물화 <가브리엘 비앵>도 눈빛이 오래 잊히질 않을 만큼 좋았고, <빨래하는 여인>의 뒷모습을 그린 폴 기구의 그림도 마음에 들었다. 미술 교과서에 실렸던 것으로 생각되는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도 볼 수 있었다. 생각보다 그림이 작군, 했다. 드가의 발레리나 그림도 한 점 왔다. 나로선 처음 보는 <계단을 오르는 발레리나들>이긴 하지만. 가장자리 인물을 가차없이 잘라 표현한 드가의 기법이 당시로선 대단히 선구적인 시도였으며, 그게 일본 판화의 영향이라는 도슨트의 설명에 조금 놀랐다. 화투의 새 그림까지 예로 들어 설명하던데 그 부분에선 시끄럽고 듣기 싫어서 딴그림에 정신을 팔았다. 그림을 볼 때 설명을 들으면 더 많이 세세한 부분까지 보여서 좋을 때도 있지만, 때로 그냥 아무 설명 없이 나 혼자만의 느낌에 사로잡히고 싶을 때도 있어 변덕이 부글부글 끓는다. 일부러 도슨트 시간에 맞춘 것도 아닌데 그림 설명을 만나 약간 반가운 느낌과 구름처럼 몰려다니는 사람들 때문에 짜증나는 기분 사이에서 어제도 오락가락했다. 

풍경화 가운데선 뭐니뭐니해도 고흐 그림이 인기 폭발이었지만, 밀레의 <봄> 앞에도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었다. 저 유명한 <만종>이나 <이삭줍기>보다(이번에 이런 작품이 왔다는 얘기가 아님;;) 나도 밀레의 <봄>이 훨씬 좋았다. 먹구름 잔뜩 낀 왼쪽 하늘에 드리워진 무지개도 예쁘고 농촌의 오솔길과 꽃을 피운 과일나무, 멀찌감치 나무 아래 서 있는 아주 작은 농부의 모습까지 정겹지 않은 구석이 없을만큼 최고의 완성도를 자랑하는 작품이 아닐는지. 하트만이라는 고객을 위해 그린 4계절 연작이라는데 겨울은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데고, <봄>이 연작중 가장 마지막 작품이란다. 계절 중엔 뭐니뭐니해도 봄이 최고지...

그밖

펠릭스 발로통, [공]

에 오호라 쾌재를 부르며 기쁘게 만난 그림은 펠릭스 발로통의 <공>. 작품 크기가 큰 것도 아니고 색감이 화려하지도 않은데 마음을 훅 후비고 들어오는 느낌이라 한참을 감상했다.
그림자까지도 행복해 보이는 것 같다가 또 좀 외로움이 풍기기도 하고... 저 멀리 서 있는 두 여인 가운데 이 아이의 엄마가 있을까 아닐까 혼자 한참 시나리오를 쓰다가 말았다.




해외 미술관에서 두서없이 주워담듯 빌려온 전시회는 통일감이 없어서 문제라고 속으로 구시렁거리다가 군데군데 마음에 드는 그림들이 눈에 띄어 불평이 쏙 들어갔다. 메인요리로 고흐의 별밤만 기대하고 갔는데 서비스로 주는 각종 디저트에 감동하고 온 기분이랄까. ㅋㅋ


벽 하나를 온전히 차지하고 있던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을 전시실에서 본 느낌을 그대로 간직해보려고 일부러 그런 사진을 구했다. 별빛을 심히 도드라지게 강조한 복제 그림들과 달린 원래 그림 느낌이 거의 고스란히 담겼다.  

사진 출처: http://moonsoyoung.com/90114994256


고흐가 이 밤풍경을 그리려고 밀짚모자에 촛불을 얹어놓고 작업을 하느라 뜨거운 촛농이 뚝뚝 떨어져도 아랑곳하지 않았다는 도슨트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암튼 하늘의 북두칠성도, 해안도로를 따라 켜진 진노랑색 가스등도, 밤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부부의 미소띤 표정도 다 정겹고 아름답다. 코앞까지 가까이 가서 확인했는데 두 사람 다 웃고 있었다. ^^;


어제 만난 친구에게도 이야기했지만 인생은 참 공교롭다. 97년이었던가, 도서전 때문에 프랑크푸르트에 간 김에 파리와 런던 여행을 계획했다. 파리에서 2박 3일이었나 3박 4일쯤 보내는 동안 마침 파리에 와 있던 친구와 점심무렵 오르세 미술관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세 시간이면 그림 구경 실컷 하겠지 싶어 시간을 안배했으나, 오르세미술관의 작품수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고 나는 인상파 전시관을 절반도 다 못돈 채 눈물을 머금고 약속시간에 맞춰 밖으로 나가야 했다. 그때 못봐서 제일 아쉬웠던 그림이 바로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이었다. 그날 친구는 오후에도 미팅이 잡혀있었다. 그래서 아마도 차를 마셨던가 간단히 점심을 떼우고 헤어져야 했으므로, 같이 지하철을 타다가 나는 뻬르라세즈로 친구는 미팅 장소로 향했다. 아쉬운 마음에 나는 파리일정을 하루 더 늘려 오르세 미술관을 마저 보겠다고 마음 먹었으나 런던행 비행기표 변경이 불가능했다. 하는 수 없이 다음날 파리를 떠나며 몇년 안에 다시 오리라, 파리 뿐만 아니라 유럽여행을 제대로 하리라 결심했다. 다시 가기는 개뿔. 그 결심은 지금껏 이루어지지 못했다.

어제 저녁에 만난 친구가 바로 그 때 오르세 미술관 앞에서 만났다가 파리 지하철에서 헤어진 장본인이다. 이 정도면 인생이 공교로운 거 아닌가? 물론 내가 예술의 전당 가는 김에 혼자 전시회를 볼 계획을 세웠지만, 먼저 벨리니로 장소를 정한 건 그 친구였다. 오래 전 그 친구를 만나려고 오르세에서 미처 못본 고흐의 그림을 십수년이 지난 어제 결국 보고 나서 또 그 친구를 만나니 뭔가 하나 빠졌던 퍼즐 조각을 마침내 끼웠거나 어그러졌던 아귀를 딱 맞춘 느낌이 들었다. 그날 파리 지하철에서 헤어지며 내가 친구에게 초콜릿을 주었다는데(나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요번엔 친구가 내게 쿠키를 싸주었다. 부른 배를 꺼뜨리겠다고 예술의 전당 주변을 거닐다 올려다본 밤하늘 색깔은 유난히 푸른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하늘 색깔이 '프러시안 블루'라고 친구가 말했고 나는 오후에 보고 나온 고흐 그림의 밤하늘 색깔을 떠올렸다. 확실히 인생은 오묘하다. 혹은 인간이 같다붙이기 선수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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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

투덜일기 2011. 5. 27. 16:41

우편으로 청첩장을 하나 받았다. 봉투에 적힌 혼주 이름이 영 낯설었으나, 내 이름으로 온 청첩장이니 잘못 왔을 리는 없었다. 대개 봉투엔 신랑신부의 부모님 성함을 인쇄하므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내용물을 보았으나 혼주 이름 아래 적힌 신랑 역시 모르는 이름이었다. 혹시 엄마 친구분이 병 잦은 친구에게 참석 스트레스를 주지 않을 요량으로 내게 보낸 건가,  엄마에게 물으니 역시나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단 하나.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아버지의 지인이라는 의미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절친한 친구분들의 경조사에 나는 계속 부모님 대신 참석하는 걸 의무로 여겼다. 부부동반으로도 모임이 잦았던 친구분들의 경우는 홀로된 엄마라도 불러내어 자꾸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권하는 친절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엄마도 나도 알기에 처음 몇번은 모녀가 동반참석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해보니 못할 짓이었다. 즐겁자고 모인 자리에서 자꾸 고인을 추억하게 하거나 질질 짜는 것도 볼썽사나운 일이고, 동정적인 시선을 감당하기도 싫었다. 가끔 걸려오는 안부전화를 받는 정도가 그나마 딱 좋은 선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뒤론 아버지 친구분들께 연락이 오면 계속 엄마의 건강을 핑계로 웬만한 자리는 다 마다하고, 어쩔 수 없는 경조사의 경우에만 싫든 좋든 내가 홀로 다녔다. 엉겁결에 아버지 친구분들에게 끌려가 내키지 않는 밥을 먹은 적도 딱 한번 있기는 했지만, 대개는 얼른 요식행위만 하고 달아났다. 어려서부터 다 아는 면면이라 해도, 굳이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하고 축의금이나 부의금을 전달하는 일은 숫기없는 내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귀찮은 마음이 들어 불쑥 짜증이 치밀어도 그게 의무이고 도리라고 굳게 믿었다. 그렇다고 돌아가신 아버지 이름으로 떡하니 날아온 청첩장까지 찾아다닌 것은 아니었다. 고인인지 아닌지 모른채, 혹은 고인인 건 알지만 어쨌든 그간 뿌린 축의금은 거둬들이겠다는 욕심에 보냈을 것으로 의심되는 청첩장이 아버지 앞으로 날아든 적이 두어 번 있었으나 그런 건 무시했다. 하지만 이번 청첩장은 내쪽에서 낯설 뿐, 내 이름까지 알고 있고 내가 아버지 대신 경조사에 참석하고 다닌다는 걸 알고 있는 학교 쪽 지인(그야말로 이름만 아는 지인;;)이 틀림없었다. 내가 몰라서 그렇지 그쪽에선 나를 잘 아는 아버지의 친구분이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단언한다. 친구분들 성함은 물론이고, 아버지가 소속된 각종 등산회 모임 연락처를 해마다 다시 뽑아드려 웬만큼 절친한 지인의 이름은 나도 다 아는데 대체 누구일까.  

버럭 짜증이 났다. 이 사회에서 결혼식이란 많은 경우 일종의 흥행을 노린 비즈니스라는 걸 모르는 바 아니다. 결혼식 참석이 대부분 마뜩찮은데도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빚을 갚는 마음으로, 또는 미래의 수확을 기약하며 품앗이 다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고. 하지만 이 경우는 뭔가. 하는 수 없이 아버지의 장례 후 보낸 인사장 명단 파일을 찾아보았다. 거기 들어 있으니 아버지의 '지인'임은 확실하지만, 이름을 확인하고도 찜찜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딸인 나는 그렇다 쳐도 엄마도 이름이 낯선(생전에 아버지는 그날 하루 어디에 가서 누굴 만나 무얼 했는지 시시콜콜 아내에게 다 털어놓는 분이었고, 건강이 나빠지기 전까지는 울 엄마도 아버지의 온갖 등산모임, 동반모임에 다 같이 참석하셨다. 엄마가 모르면 정말 '모르는' 사람이다) 사람의 아들 결혼식까지 참석하는 것이 의무일까? 엄마는 아버지 장례 때 부의금 기록을 확인하여 그 사람이 낸 금액과 동일한 축의금을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보나마나 3만원짜리일 거라면서. +_+ (원래 대학교쪽 인원이 워낙 방대하여 부서별로 부의금을 모아 보낸 경우는 1, 2만원도 흔하다.) 그러나 부의금 기록 따위는 없다. 경조사 때 받은 만큼 갚겠다는 사람들의 계산속이 늘 못마땅했던 나는 아버지 장례 때, 문상객 접수를 맡은 이에게 조문객 명단만 남겨달라고 부탁했다. 나 역시 품앗이를 해야 한다면 그때그때 마음과 형편이 닿는 대로 하면 될 일이라 여겼다. 그런데 이를 어쩐다.

1. 어쩔 수 없다. 묵묵히 청첩일에 결혼식에 참석하여 통상적인 액수의 축의금을 직접 내고 온다. (누군지 서로 얼굴도 모르니 인사는 생략하고 봉투만 불쑥 내밀면 끝이겠다)
2. 시간도 아까운데 직접 갈 필요까진 없다. 참석 못해 죄송하다는 메모를 넣어, 전신환 축의금이나 현금 봉투를 등기로 부친다.
3. 아버지 친구분들에게 참석자를 수소문하여 축의금을 대신 내달라고 부탁하고 송금해드린다. (전화 기피증 환자에겐 가능성 거의 제로;;)
4. 무시한다.

현재로선 1, 2번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런데 계속 부아가 치민다. 본인이 세상을 떠나는 경우 금전적인 채무가 배우자와 자식에게 남는다는 건 알지만, 경조사의 품앗이 빚도 똑같은 의무라는 건 좀 서글프다. 내게 청첩장을 보낸 저 어르신은 대체 어떤 마음이었을까.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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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일이 되는 걸 두려워했던, 아니 두려움까지는 아니더라도 괴로워했던 이들이 주변에 꽤 된다. 배우는 쪽이든 가르치는 쪽이든 학교와 새학기는 기피의 대상이 아닐까. 봄 방학을 끝으로 좋은 시절 다 지나갔다는 아쉬움과 함께. 나야 그런 삶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오늘 뿌듯한 축배를 들어야할 것 같다.

이른바 보따리 장수를 하고 있는 지인 하나는 지난 방학동안 생병을 앓다가 개강을 앞둔 며칠 전까지 감기몸살이 낫지 않아 큰 걱정이었다. 사단은 새학기 교양영어 강의에서 이유 없이 떨려났던 일이었다. 연말까지만 해도 강의일정 조정안에 대한 연락을 주고받았던 대학에서 1월이 다 지나도록 강의 계획서 내라는 통보가 없더란다. 15년째 그 대학에서 교양영어를 맡아온 지인은 순진하게 학사일정이 늦어지는 줄로만 알았단다. 헌데 그게 아니라, '코디네이터' 역할을 맡은 영어과 교수가 아무런 이유 없이 강사들 여덟 명을 그야말로 단칼에 잘라버렸더란다. 나의 지인은 자기가 나이도 많고 박사학위 미소지자라서 짤렸나보다 했더니, 박사학위도 소지한 젊은 여자 강사도, 박사학위 소지한 적당한 경력의 남자 강사도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납득할 만한 이유나 원칙도 없는 독단적인 인사행정이었던 셈이다.

일언반구 언질도 없이 그런 만행을 저지른 교수는 그렇게 지시해놓고 방학동안 가족이 있는 호주로 날아가버렸다나. 분노한 나의 지인은 결국 구구절절 설득하는 메일에 이어(읽지도 않더란다) 강경한 메일을 계속해서 그 담당교수에게 보냈고, 메일이 계속 씹히자 담당 조교를 통해 대신 연락을 취해 거의 협박에 가까운--인권위원회와 교과부에 청원함은 물론 학교앞 일인시위도  불사하겠다고--내용을 통보하는 '단독투쟁' 끝에 교무과장의 개입으로 잘렸던 강사들 모두 늦게나마 한 과목씩 강의를 재배당 받을 수 있었단다. 그 일을 겪고 나서 마무리가 되자 덜컥 병이 났던 것인데, 심성 약하고 소녀같기만 하던 그 지인이 그런 싸움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내가 못믿어하자 재미삼아 보라며 증거 메일까지 보내주었다. 

이번 학기야 그럭저럭 다시 강의를 맡기는 했지만, 담당 교수와 정면대결을 했던 자신은 15년 역사를 뒤로 하고 다음학기엔 그 대학을 떠나야할 것 같다고 말하는 지인의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잊을만 하면 한번씩 대학 강사의 자살소식이 들려오는 이유가 딴 게 아니라고. 그리고 하루이틀 겪은 건 아니지만 잘난 전임교수라는 사람들이 더러 부리는 포악이 상상 이상이라고. 그 인간과 학교에서 마주칠 생각을 하면 오금이 저리다고.

제자를 폭행하고 온갖 권력형 교내 비리를 저지른 유명 국립대 교수가 최근 파면되는 사건도 있었지만, 대단히 존경받는 직업으로 생각되는 교수는 사실 내가 보기에 그리 멋진 인간상과 거리가 멀다. 내가 좋아해마지않는 선생님이 자조적으로 원래 교수란 '사회성 부족하고 어딘가 좀 이상하고 외골수인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이 딱 맞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좀 이상한' 성품 부분이 종종 이기심이나 독단으로 발현되는 교수들을 꽤 많이 봤기 때문이다. 그 유형에서 벗어나는 교수들은 또 지나치게 정치적이라 그 조직내에서도 최고자리로의 승진을 꿈꾸거나 최대한 약자들에게 권력을 휘두르거나, 아예 폴리페서가 되어 정계로 진출하는 식이다.

실제로 겪어본 은사님들 가운데 유능하고 존경스러운 교수 유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려서부터 익히 소문으로 듣고 눈으로 보아온 교수들은 절반 이상 부패하고 무능하고 이기적인 군상이었다. 교수 임용때부터 실력보다는 인맥 학맥 동원해 '룸살롱 접대'로 점수를 따는 인간이 없나, 각종 연구비는 그냥 일종의 공짜 보너스로 여기며 논문 한편 가지고 이리저리 제목만 바꿔 돌려 싣기를 하질 않나, 산학협동이라도 해서 대형 프로젝트라도 진행할라치면 제자들 종 부리듯 주무르며 사리사욕을 채우질 않나. 도제식 수업이 이루어지는 예술대학 뿐만 아니라 막대한 연구비가 오가는 공대나 이과대 쪽에서도 교수 비리는 늘 있어왔고, 진로나 눈앞의 이익(매달 학생들에게 지급되는 연구비나 공연, 수상 기회 따위) 때문에 제자들은 함부로 교수에게 대들 입장이 아니었다.

소문으로 듣자니 어느 교수는 자신의 부친상에 대학원생들을 '조'별로 짜서 장례식장 도우미로 보내달라고 당당하게 과사무실에 요구했단다. 지도교수의 부친상에 문상을 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제자 입장에서 막상 문상을 가고보니 일손이 모자라는 것 같아 자진해서 도울 마음이 생길 수는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절대 그런 생각 안하겠지만!) 그러나 노동 분담제도 아니고, 몇시간씩 육개장 쟁반을 나르며 학생들이 노동을 제공하는 걸 당연시하는 교수의 구태가 놀랍다. 하기야 그러니까 문제의 그 음대교수도 팔순 노모의 산수연에 아무 거리낌 없이 제자들을 대거 동원해 합동 공연을 했겠지. 아니, 본인이 굳이 학생들을 동원하지 않았더라도 학생들이 먼저 눈치로 알아차리고 축하공연을 하겠다고 자청했을지도 모르겠다. 안 그랬다간 나중에 무슨 화를 당할지 모르니까.

아직도 진심으로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을 훌륭한 교사/교수가 많다고 믿고 싶지만, 공교육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지면서 이 사회에서 제대로 된 교권은 존재하지 않는 것도 같다. 학교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평가해서 분류하는 행정기관으로 점점 자리잡고 있고, 대학마저도 하는 짓거리를 보면 그냥 고수익사업이지 '배움의 전당' 느낌은 사라졌다. 그러다 보니 교사도 교수도 '스승'이 아니라 그저 한낱 조직원으로서 학생들에게 또는 상대적 약자인 강사들에게 군림하고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 아닐까. 

수년간 보따리 장수를 전전하다 어렵사리 전임자리를 꿰차고 드디어 '교수님' 칭호를 듣게 된 친구 하나는 암암리에 학연지연으로 나뉜 교수패거리들 속에서 현명하게 운신하는 것이 너무도 어렵고, 강의평가제로 학생들 눈치도 봐야하니 교수직이 철밥그릇이라는 얘기는 다 옛말이라고 불평한다. 열심히 수업준비해서 깊이 있는 강의를 이어가면 대번에 어렵다고, 취직해야하는데 학점 짜게 준다고 싫어한다나. 이곳저곳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머리 나쁜 나로서는 어디부터 어떻게 손을 대서 개선해야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저 그런 부패한 조직에 연루되어 개강을 두려워하는 상황이 아니란 것만을 기뻐하기엔 찜찜하다. 그래도 길은 그것밖에 없다며 교수를 꿈꾸는 수많은 친구들, 후배들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뭔가 크게 바뀌긴 바뀌어야 할 텐데 말이다.

하여튼 날씨도 쌀쌀한데 개학과 개강을 맞은 가엾은 모든 이들 씩씩하게 하루를 마치고 돌아오기를 빈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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