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12 엠티 날이 밝았다. 보란듯이 날씨는 쾌청. 타락마을 주민들이 움직이기만 하면 비가 오거나 날씨가 나빠진다는 징크스는 몇몇 새 주민들의 영입으로 깨진 게 틀림없다. 담날에도 춥기는커녕 하늘에 거의 구름 한점 없이 맑고 영상의 날씨라, 명색이 겨울 엠티인데 눈 쌓인 풍경 한 번 못 본 건 아쉬울 정도였다.

약속시간에 맞춰 넉넉히 집을 나서려던 계획은 현관에 놓인 고구마 봉다리를 보며 쿠킹호일에 싸가지고 갈까 말까 또 다시 고민을 하며 무너졌다. 잠자기 전엔 분명 호박고구마가 아니라서 주민들에게 쿠사리를 먹을 게 뻔하다며 안가져가기로 해놓고선 또 망설이는 건 뭔지! 정말 우유부단한 인간... 그래도 고구마 고민으로 마루에서 얼쩡거리느라 하마터면 빠뜨리고 갈 뻔 했던 달력과 증정본은 잘 챙길 수 있었다.
암튼 약속시간 15분 전에 벌써 도착했다는 부지런쟁이 미아의 문자가 날아올 무렵 내 위치는 화곡동. 신호등 운만 잘 맞으면 정각에 도착할 것이라 오만한 자신감을 품었으나 그건 오산. 김포공항에 들어가서도 이마트 찾아 헤매느라 공항을 다시 한바퀴 돌아야 했으니 일행을 만났을 땐 이미 10분 지각한 시간. 된통 키드님의 꾸지람을 들을 줄 알았으나, 다행히 더 늦게 오고 있는 벨로 때문에 무사히 넘어간 듯.
이번 엠티를 기회로 <홀로서기>를 강요받게 된 키드님이 적어온 쇼핑 목록에 따라 각개전투를 하듯 순식간에 쇼핑을 마치고 강화도로 출발한 시간이 얼추 세시 반이었다. 우리의 목적지는 강화도라고는 하지만, 약도상 강화대교 건너자 마자 나타나는 초입. 김빠지게 30분 만에 도착하는 게 아닐까 염려했으나 그래도 1시간 가까이 걸렸던 것 같다.
문제는 인간 네비게이션을 자랑할 때 필수인 약도 메모지를 집에 두고 온 것. 그래도 강화도는 여러번 가봤고, 비교적 간단한 약도 내용을 다 기억하고 있는 듯 해 잘난 척 앞장을 섰다. 내 기억으론 <강화대교 지나 강화 버스터미널 쪽으로 좌회전. 계속 직진하다가 인산저수지 앞 횡단보도에서 우회전. 바로 목적지>였다. 내 기억에서 한 가지 빠진 기점이 있었으니 바로 <안양대학교>. 버스터미널 쪽으로 좌회전한 건 좋았는데 중간에 삼거리가 나오며 여러 관광지 표지판이 적혀 있어 잠시 머뭇대느라 시뻘건 노선버스 아저씨한테 길 막았다고 빵빵 위협 구박을 먹기는 했지만 그래도 키드님과 파피의 문자 조언으로 그만하면 선방했다.

다락방까지 갖추어져 있는 펜션은 꽤나 흡족. 안에 들어가자마자 따뜻한 느낌이 참 좋았다. (그러나 이 지나친 난방은 밤새도록 몇몇 사람들에게 괴로움을 안겨주었으니... 으으으) 순식간에 과자 몇봉지와 귤을 까먹으며 저녁 먹을 시간을 기다린 우리는 놀랍게도 손이 빠르신 키드님의 양상추와 오이 씻기의 신공으로 <먹고 마시기> 준비를 일사천리로 끝냈다. 반드시 <강화도 호박고구마>를 먹겠다는 일념으로 마트에서도 고구마를 안 사고 근처에서 조달하기로 했던 우리의 염려 또한 키드님의 수완으로 해결되어 주인 아주머니로부터 깔끔하게 제공받았으며, 홀로 고기 굽고 자르고 소금/후추 뿌리는 솜씨까지 모두를 만족시켰으니 그의 홀로서기 프로젝트는 완벽하게 완수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대는 하산하시오~.

약간의 문제는 그래도 겨울이라고 쌀쌀한 날씨에 얼른 방으로 돌아와 시작된 2차 음주 자리부터 시작된 듯하다. 연일 이어진 야근으로 피로가 쌓인 벨로는 차안에서부터 틈틈이 눈을 붙이더니 방에 들어와서는 아예 소파에 누워 맥을 못추며 사방에 잠가루를 뿌려대기 시작했다. 피곤벨로가 초저녁 내내 눈을 반짝이며 깨어있던 순간은 달력 뽑기 이벤트와 타락마을 싼타 키드님의 선물공세 때 뿐이었다. 다크호스로 기대하던 지다님도 배가 아프다며 이불을 배에 두르고 누워 술마시기 보다는 아이팟과 놀기에 더 흥을 보이질 않나, 이미 이전 엠티에서 구토키드의 별명을 습득한 키드님도 초반부의 강세가 급격히 기울며 11시도 되기 전에 살짝 취해 같은 질문 또 하기 신공을 발휘하질 않나, 기대주 파피 또한 술집에서 마실 때는 강해도 엠티에선 은근히 약하다며 일찌감치 쓰러질 것을 예고했으니, 이번 엠티를 위해 집에서 간간이 캔맥주로 미리 간을 단련해온 나로서는 맥이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벨로를 엠티 내내 <잠만 처자게> 할 수는 없다며 파피가 불끈 주먹을 쥐고 달려나가 주인아주머니에게 커피믹스 세 통을 공수해 와 얼른 타먹인 덕분에 뒤늦게 커피파워로 버티기 시작한 벨로를 마구 독려하며, 나는 은근 다크호스 미아와 파피를 술동무 삼아 최소한 2, 3시까지는 술자리를 이어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 무렵 구토키드는 계속 들락날락 홀로 괴로워하고 있었고, 지다님은 일찌감치 방에 들어가 취침 중.
허나 이미 세력을 장악한 잠의 기운은 한 사람씩 쓰러뜨리기 시작하였으니, 벨로의 커피파워를 깨워놓은 파피가 제일 먼저 자리에 눕고 잠깐 눈을 붙이겠다던 미아도 그 옆에 드러눕고, 남은 사람은 바깥 계단에 홀로 앉아 괴로워하는 키드님과 치뻗는 커피파워를 주체 못하는 벨로와 나뿐.
"실망이야, 실망이야, 다 실망이야"를 외치고 있던 나도 어지간히 취해 있던 터라 키드님을 집안으로 들여 놓고는 자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는데, 그 사이 초인적인 커피파워를 발휘한 벨로는 재빨리 뒷정리를 하고 설거지까지 해놓지를 않나 놀라운 뒷심을 발휘했다.

나의 잠자리는 키드님이 예고한 대로 격리실 다락방. ^^; 가파른 계단을 한발씩 올라가 누운 건 좋았는데, 아 곧이어 느껴지는 타는 목마름. 아슬아슬 다시 계단을 내려가 벌컥벌컥 물을 마시고 한 컵 떠가지고 다시 위로 올라가보니 실내 기온이 무려 29도였다. 하필 내 머리맡에 있던 온도계는 계속해서 틱, 틱, 보일러 작동음을 알려주고, 온도를 내려도 여전히 방은 숨막히게 덥고, 목은 마르고... 하는 수 없이 나는 생수병에 물을 잔뜩 담아갖고 올라와 자다 깨서 마시고 또 자다 깨서 마시고... 자는둥 마는둥 괴로워하며 문득 깨달은 것은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작게 코고는 소리! 아... 나 말고도 누군가 살살 코를 고는구나 누워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너무 더워서 다락방 창문을 좀 열어놓고 또 깜빡 잠이 들었을까 갑자기 누군가 내 귓가에 대고 막 떠드는 소리가 들려 벌떡 일어났다. 아직은 깜깜한데 밖에서 일렁이는 손전등 불빛. 건너편 펜션에서 사람들이 왁자지껄 잔뜩 쏟아져나왔다. 시간은 겨우 5시. 미친 인간들이 새벽낚시라도 가는 듯... 다시 드러누웠지만 여전히 방은 덥고 머리는 아프고 속은 괴롭고... 아 왜 그리도 과음을 했던고. 후회막급이었다.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또 다시 나를 깨운 건 난데없는 알람. 파피가 혼자 상경을 시도해보려는 욕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파피야, 가지마." 미아의 간청이 들리고 그래도 가겠다고 나서는 듯한 파피. 아직 날도 새지 않은 캄캄함 속에 어딜 가겠다는 건지! 나는 또 다시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파란 털모자를 쓰고 굳이 먼저 가겠다고 나서는 파피에게 손을 흔들었다. 잘 가.. 혹시 버스 못 타면 다시 와라. 분홍색 곰돌이 탈을 뒤집어 쓰고 자고 있던 키드님도 벌떡 일어나 파피에게 손을 흔들었다. 잘 가요....

깨질 것 같은 두통 때문에 다시 눈을 떠보니 드디어 아침. 미아와 파피가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고 키드님은 간간이 일어나 밖에 나갔다 와선 다시 끙끙대며 앓고... 어라.. 파피 안 갔네? 그제야 내가 손을 흔들어주었던 파피가 못보던 새파란 모자를 쓰고 있었고, 키드님의 분홍색 곰돌이탈도 떠올랐다. 그게 꿈이었구나. 키키키. 하지만 얼굴과 뱃속은 웃을 형편이 아니었다. 으으윽 머리아파~~

아침 시간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깊은 잠을 자면 금방 나아질 것 같은데 이미 날은 밝았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세상의 소음... 부지런쟁이들은 배가 고프다며 아침까지 챙겨먹었지만 나는 슬며시 날아드는 라면국물 냄새도 거북할 정도.. 뇌와 두개골이 따로따로 출렁이는 느낌이었다. 이 얼마만에 느껴보는 극심한 숙취인지. 어휴... 생각해보니 제주도는 <여행>이라 밤마다 몸을 사렸고, 이토록 음주에 매진한 타락마을 엠티 경험은 처음이었다. 키드님을 제외하고 엠티 경력이 꽤 되는 다른 분들이 왜 전날밤에 몸을 사렸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몸을 안 사렸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으니까! 가장 극심한 숙취에 시달린 키드님과 나도 다음번엔 확실히 살살 달리겠지.

지다님의 젤리카메라에 찍힌 담날의 몰골은 아마도 십수년전 과음 후 새벽 백사장을 달린 뒤끝에 온종일 팅팅 불어 있던 모습과 다르지 않을 것 같아 두렵다. 그러면서 드는 의문. 타락마을 엠티 담날은 다들 그렇게 빌빌대다 암것도 못하고 헤어지는 것이 전통인가요? 멀미지다님 때문에 크게는 바라지 않았지만, 12시 전에 체크아웃하면 귀가하기엔 너무 일러 외포항에 가서 석모도 가는 배라도 타고 갈매기한테 새우깡주기 같은 것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었음(물론 나는 갈매기 무서워서 새우깡 주는 거 싫어하지만!). ㅋㅋ 그런데 굳이 친절 베풀겠다며 배웅 나온 아저씨가 경치 좋은 해안도로로 잠시 돌아서 귀경하라는 데도 단박에 거절하는 타락마을 주민들! 다시 출발점에 일행들을 내려주고 집에 도착한 시각이 무려 2시. 나의 엠티 역사상 가장 빠른 귀가시간이었다. 

구구절절 쓸데없이 길게 썼지만, 타락마을의 1박2일 엠티를 한 줄로 요약하면 맛난 고기와 술먹고 수다떨다 꽥.
 ^^; 하기야 엠티가 다 그렇지 뭐;;
Posted by 입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