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에 해당되는 글 85건

  1. 2011.02.28 선물 고민 12
  2. 2011.01.09 모피 유감 8
  3. 2011.01.06 자리 9
  4. 2011.01.04 인지상정 14
  5. 2010.12.22 우표 9
  6. 2010.12.14 1900분 8
  7. 2010.11.25 소셜 네트워크의 끝은 어디일까 23
  8. 2010.11.09 어떤 친구 4
  9. 2010.06.09 어울림 5
  10. 2010.05.26 친구와 쟁반과 엄마 14

선물 고민

투덜일기 2011. 2. 28. 16:51

1900분짜리 전화카드를 샀다는 친구랑 요 며칠 계속 통화를 했다. 친구의 언니가 부탁한 화장품 때문이다. 미 서부지역엔 웬만한 한국 제품이 다 들어가있는 것 같아 보여도, 세부품목이 거의 기함할 정도(손바닥 두개로 가려지는 얼굴에 발라야 한다고 사람들이 '주장'하는 화장품은 왜 그리 많은 건지! 나는 다 무시하는 쪽이다 ㅋㅋ)인 화장품은 아직 온갖 브랜드가 다 수출되진 않나 보다. 더구나 요즘엔 피부과 병원이랑 연계해서 만드는 기능성 화장품도 좀 많은가. 암튼 친구 언니와 딸들이 한국 사이트에 들어와 수많은 사용후기를 읽어본 뒤 골랐다는 *앤* 화장품을 사보내는 건 내겐 일도 아니다. 친구는 예전부터 로션도 잘 안바르고 다니는 사람이고, 그 언니들도 화장을 열심히 하는 이들은 아닌데 작은언니는 유독 피부에 신경을 쓴다. 원래 미인은 다 그런듯. 한국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 작은언니의 교복입은 모습이 워낙 아름다워, 하도 남학생들이 쫓아다닌 탓에 친구 어머니(몹시 보수적이신 분;)께서 이를 갈았던 역사는 나까지 알고 있을 정도.

암튼 종종 작은언니가 고르는 화장품을 사보낼 때면 나는 또 고민에 빠진다. 친구 말로는 자기는 아무것도 필요한 게 없다지만 그래도 뭔가 또 덩달아 같이 보내야 내 마음이 뿌듯하지 않은가. 근데 진짜 사보낼 품목이 마땅하지가 않다. 일과 집, 잠밖에 모르는 친구라서 특별히 기호품도 없고... 오죽하면 지난번 작은언니 화장품 보낼 때는 아줌마스럽게 그냥 멸치(볶음용 및 국물용)와 오징어, 쥐포를 보냈다. 가끔 내가 친구한테 다니러 갔을 때에도, 친구 역시 한국에 왔다가 돌아갈 때에도 멸치와 오징어, 쥐포는 빠지지 않는 쇼핑 품목이었다. ㅠ.ㅠ 2년전엔가 친구가 남편과 함께 다녀갈 때엔 그 세  품목에다 맥심 커피믹스까지 바리바리 사서 아예 이민가방 하나를 꾸렸었다. 물론 LA 한인마트에도 다 파는 물건이지만 여기 거랑은 맛이 다르다는데 어쩌랴.

노상 보는 친구의 선물도 역사가 길어지면 품목과 아이디어가 고갈되어 고민스러운 마당에 태평양까지 건너가려면 정말이지 난감하다. 좀 민망해도 제일 만만한 건어물은 무게가 많이 나가서 물건 값이나 부치는 비용이나 비등비등해서 좀 억울하긴 하다. 그래도 친구와 그 가족들이 제일 반기는 선물인 것 같아서 요번에도 염두에 두고는 있지만, 그거 말고 또 뭔가 참신한 선물을 보내면 좋겠는데 아무리 머리를 짜도 생각이 안난다. 작은언니가 오매불망 물건을 기다리고 있으니 화장품 배송되어 오는대로 나 역시 우체국으로 직행해야할텐데 뭘 사야하나. 친구가 이민간 초기엔 책도 많이 보냈는데, LA 인근 한인서점에 가면 웬만한 책은 다 있다. 초창기에 내가 번역한 책을 그곳 서점에서 발견하면 친구가 감격해하며 전화도 할 정도였지만, 요즘 새로 나온 책 증정본이 와도 우리 가족이 시큰둥한 것처럼 친구와 언니들 역시 이젠 **이 책 또 나왔네 하며 그냥 지나친단다. ^^; 미국에서 살며 굳이 번역서를 읽을 이유는 없잖은가.

최근 왕래가 뜸해지긴 했어도 친구 역시 한국 나올 때마다 선물 때문에 고민이란다. 한국에 수입 안되는 물건이 어디 있어야 말이지. 그래도 내가 커피를 좋아하니까 십수년년 전까지는 코스코에서 대용량으로 산 인스턴트 봉지커피를 사 나르다, 그 담엔 원두커피를 대형 깡통으로 안겨주었었는데 와서 커피를 먹어보더니 여기 커피 원두가 더 맛있다고 인정한 뒤엔 주로 육포로 승부를 걸었다. 그러나 또 광우병 광풍이 부는 바람에...  그 뒤로 서로 짬을 내지 못한 수년 사이, 몇번은 아주 실용적으로 서로의 계좌에 마음에 드는 선물 사라고 송금을 하기도 했으나, 하면서도 찝찝한 느낌이라 친구와 합의 하에 관두고 말았다. 미국에 살며 볼펜도 한국 걸로 사서 쓰는 친구에겐(디자인이 예쁘단다) 현금보다는 역시 여기 물건을 보내야 제대로 선물했다는 기분이 든다.

그러고 보니 만우절인 친구 생일도 머지 않았다. 화장품 보내면서 이참에 미리 챙겨야 마음이 편하겠는데 과연 뭐가 좋을까나. 그다지 무겁지도 부피가 크지도 않으면서 유용하고 뿌듯한 선물 뭐 없을까? -_-; 예쁜 메모지와 필기도구는 부록이니 제외하고, 목걸이는 지난번에 해봤으니 건너뛰고, 친구에게도 기능성 화장품을 보낼까? 그렇다면 어떤 종류로? 화장품에 대해서 나 잘 모르는데... 으으으. 이러다 또 멸치랑 오징어 냄새 안나게 비닐과 랩으로 꽁꽁 싸고 앉았는 내가 그려지는 것 같다. 뭐 없을까????? 이웃 여러분의 뾰족한 아이디어 대환영합니다. -_-;
Posted by 입때
,

모피 유감

투덜일기 2011. 1. 9. 16:15

왕비마마와 내가 옷에 대한 취향이 사뭇 다르긴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의견통일이 이루어진 부분은 모피 코트에 대한 거부감이다. 젊어서는 모피를 싫어하던 사람들도 나이가 들고 특히 노년에 접어들면 모피, 특히나 밍크 코트 한벌쯤은 갖고 있어야 면이 선다는 말을 많이 들었으므로, 엄마가 예순살 즈음부터는 겨울마다 나도 아버지도 계속 왕비마마의 의향을 물었다. 한벌 사줄 테니 골라보시라고 말이다. 한벌에 몇천만원까지 한다는 초고가의 모피는 못 사줘도 '까짓것' 몇백만원짜리는 사주겠다며 몇번이나 백화점엘 모시고 나가 입혀본 적도 있었다. 엄마가 내심 갖고 싶은데 괜히 사양하는 '척'하는 거라면, 백화점까지 가서 입어본 다음에야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이실 것이라는 게 우리의 짐작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그때마다 억지로 걸쳐는 보았으되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원래 우리 모녀는 웬만큼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옷을 잘 입어보지 않는다. 입어보고 나면 소심한 성격에 점원에게 미안해 마음에 안들어도 얼떨결에 사버리는 우를 범하기 때문이다. 모피 코트가 워낙 고가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 왕비마마의 거절 이유는 우리가 듣기에도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첫째로는 불자로서 수백마리 짐승을 죽여 만든 옷을 걸치고 절에 다니는 것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고, 둘째로는 당신 몸이 뚱뚱해서 그렇게 짐승털가죽 옷을 입은 본인의 모습이 한 마리 곰처럼 흉측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연말 부부동반 모임에 참석할 때마다 모피코트를 입지 않은 사람은 울 엄마밖에 없더라면서 그게 속이 상했는지 아버지는 잊을만 하면 한번씩 계속 백화점 모피 매장으로 왕비마마를 이끌었다. 그리고 그 때마다 왕비마마는 밍크 코트 대신에 밍크털이 깃과 소매에 장식된 무스탕이나, 오리털, 모직 코트를 대신 사거나 차라리 아버지랑 세트로 등산 점퍼를 장만해 들어오셨다. 그러고 나서는 지난 몇년간 나는 왕비마마의 모피 취향이 변했는지 아닌지 떠보기를 잊고 살았다. 그런데 유난히 혹독한 추위가 이어지고 있는 올 겨울, 왕비마마의 나들이라고 해봤자 한달에 한번 동창모임 아니면 절에 가는 것 이외엔 죄다 병원 정기검진이긴 하지만 노친네들이 교복처럼 입고 다니는 '밍크 코트'를 보니 새삼 또 찔려 왕비마마에게 물었다. 엄마도 이젠 밍크코트 한 벌 입으시지, 라고. 그랬더니 단박에 싫으시단다. 더 뚱뚱해보일 거라나. 그럼 살 빠지면 입으실 거냐고 했더니 그도 아니란다. 오히려 입고 싶으면 너나 입으라고, 통 크게도 한벌 사주시겠다고, 요즘엔 젊은 애들도 많이들 입나보더라고, 한 술 더 뜨는 거다. -_-; 징그러워서 개털도 잘 못쓰다듬을 뿐더러, 특히 실감나게 생긴 밍크털은 더 소름끼쳐서 소매나 깃장식도 못 견딜 판국인데 무슨!

이렇게 모피 혐오증 환자처럼 굴고는 있지만 나도 짐승털이 얼마나 따뜻한지는 알고 있다. 할머니 유품 중에서 스웨터 말고도 내가 또 챙긴 물건이 하나 있는데, 바로 밤색 토끼털 목도리다. 다행스럽게도 토끼 눈과 꼬리까지 실물처럼 재현해놓은 그런 모양이 아니라(그런 거라면 무서워서 절대 갖겠다는 소리 안했을 거다. 할머니 밍크 코트를 외면했던 것처럼;;) 둥글게 코트 깃처럼 생긴 집게형 목도리라 모직코트를 즐겨 입던 시절엔 정말 거의 매일 두르고 다녔다. 비록 이제는 몇년째 장농에 그저 매달려 있기만 하지만... 그 뿐만 아니라 가죽코트 사면서 안에 입는 토끼털 조끼가 덤으로 생겨 입어본 적도 있다. 그나마 변명이라면 내가 일부러 모피를 추구해서 장만한 건 아니라는 정도지만, 토끼털은 괜찮고 밍크 코트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과연 나도 더 '늙으면' 취향이 바뀔지 그건 모르겠으나, 어려서는 모피가 징그럽다고 나와 동감하던 친구들도 중년에 접어들더니 슬슬 모피에 눈길이 가고 호피무늬가 좋아진다고들 고백하는 걸 보면 참 신기하다. 나는 요즘 모피 코트 디자인이 제 아무리 세련되게 바뀌었다고 해도, 깜찍 발랄하게 새하얀 모피를 입은 젊은 아가씨들을 보아도 전혀 예쁘다는 생각이 들지 않던데 말이다. 호피무늬 싫은 거야 예전에도 포스팅했던 적이 있을 정도고! (좋아하는 배우가 배역 때문이 아니라 그저 좋아서 호피무늬 걸치고 나오면 호감도는 바닥으로 떨어지거나 선호 배우 명단에서 제명될 수도 있다) 얼마 전 혹독하게 추운날 잠깐 만나 밥을 먹었던 친구는 나 싫어할까봐 제일 뜨뜻한 모피 코트를 못입고 나왔다고 툴툴거렸다. 그 친구는 그 옛날부터 걸어다니면 반드시 팔짱을 껴야 하는데, 모피 걸치고 나온 날은 내가 내내 사모님이라고 놀려줄 뿐만 아니라 팔짱도 금지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내 취향을 고려해 하루쯤 모피를 포기한 건 고마운 일이었지만, 긴 것, 짧은 것, 색깔 연한것, 조끼형까지 일일이 갖고 있는 모피 코트를 들먹이며 효용성을 피력하는 사모님에게 결국 나는 '고급스러운' 취향을 존중해 줄 터이니 그만 입닥치라고 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그 친구는 까마득한 옛날에 결혼할 때도 시어머니 혼수로 모피코트를 해드리고 저도 모피를 받았던 것 같다. 어차피 물려받을 거라 생각하고 좋은 걸로 바치기로 했다던가.

암튼 그렇게 뜨뜻하다는 모피 코트에 대한 왕비마마의 거부감이 진심인지 아닌지, 진심이었더라도 혹시 변하는지 나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떠볼 작정이다. 왕비마마가 계속 싫다고 하시면 몹시 뿌듯하고 자랑스러워 하겠지만, 못 이기는 척 입겠다고 하셔도 매몰차게 친구에게 하듯 팔짱을 못끼게 하지는 말아야지 마음먹고 있다. 곰 한마리나 바야바 같은 왕비마마를 모시고 다니는 일은 정말 싫겠지만, 뭐 그렇게 또 따뜻하다니까... 원시 시대엔 겨울에 누구나 모피를 몸에 두르고 다녔을 텐데 뭐... 암... 혹시 내가 하도 질색팔색을 하니까 왕비마마가 모피 입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계신 건 아닌가 슬며시 걱정스럽기도 하다. 빤딱이 여우털 프린세스 라인 패딩을 사다 입으라고 강요 받았을 때 내가 난감했던 것처럼, 나 또한 내 취향을 노친네에게 강요하고 있는 건 아닐까. 
Posted by 입때
,

자리

추억주머니 2011. 1. 6. 14:14

전에도 쓴 적이 있지만 버스에서 내가 가장 선호하는 자리는 뒤에서 두번째 줄, 혼자 앉을 수 있는 자리다. 요샌 거기도 두 좌석이 놓여있는 버스가 많지만, 몸체가 낮고 하차문이 안쪽으로 열리는 신형 버스에도 맨뒤에서 둘째 줄엔 한 좌석짜리 버스들이 더러 있어서 드물게 거기 앉을 수 있는 날이면 몹시 기분이 좋다. 아무래도 나는 모든 공간에서 구석자리를 선호하는 모양으로 카페나 음식점에 가서도 선택의 여지가 있다면 한가운데보다는 주로 모퉁이에 콕 박혀 있는 게 좋다. 요가학원에서도 마찬가지다. 단연코 내가 원하는 자리는 사람들 사이에 끼지 않아도 되는 벽쪽 가장자리 자리다. 하지만 공주마마를 보필하고 다니는 무수리로선 가장자리 자리를 차지하기가 쉽지 않다. 벽쪽은 언제나 낼름 조카가 앉는다. 그래서 둘이 티격태격할 때도 있는데 내가 차지하고 싶은 요가매트는 가장자리 중에서도 버스 자리처럼 뒤에서 둘째 줄이다. 사람들이 꽉 차는 경우가 별로 없기 때문에 뒤에서 둘째 줄에 앉아도 뒷사람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첫째 이유고, 두 번째 이유는 워낙 촘촘하게 요가매트를 깔아놓았기 때문에 맨끝줄에선 구르기 같은 동작을 할 때 잘못하면 벽에 부딪친다. 하지만 공주는 무조건 맨끝줄에만 앉으려고 든다. 앞쪽은 나도 절대 사절이지만 맨끝줄에 앉아서 설렁설렁 딴짓하며 동작도 어설프게 하다가 걸핏하면 잠들어버리는 조카녀석을 보노라면, 과거 맨뒷줄에 앉아서 노상 꾸벅꾸벅 졸던 친구들이 생각난다. -_-; 

학창시절 내 자리는 거의 언제나 앞쪽이었다. 국민학생 때는 그나마도 키와 상관없이 중간쯤까지 진출했었고,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십몇번대라 둘째 줄이었으나 고등학교 올라가선 가차없이 맨앞줄에 앉아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고2땐 키와 상관없이 제비를 뽑아 자리를 정하는 바람에 나중엔 슬쩍 번호표를 바꿔 친구들끼리 앉을 수 있었고, 나는 드디어 염원하던 대로 맨 뒷자리를 몇달간 경험할 수 있었다.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가 따로없다며 친구들끼리 다닥다닥 앞뒤로 옆으로 붙어앉아 지냈던 그 시절엔 정말로 하루하루 학교 가는 게 즐거웠다. 맨앞줄에선 등잔밑이 어두운 교탁 바로 코밑자리(거기선 교탁에 교과서를 기대놓는 척하고 딴 책을 숨겨보는 게 가능했다)아니고서야 딴 책 읽기가 불가능했지만, 맨뒷줄에 앉으니 온종일 교과서에 숨겨 만화책을 비롯한 딴 책을 읽어대도 걸릴 염려가 없었다. 돌아가며 망보는 친구도 있었기 때문이다. 더러 선생들이 필기를 시켜놓고 교실 앞뒤로 돌아다니긴 했지만, 우린 교실이 좁다는 핑계로 의자를 벽에 바짝 대놓고 우리 뒤쪽으론 못다니게 했다.

하지만 문제는 있었다. 당시엔 아직 과외금지령이 내려져 있을 때라 학원이니 과외니 하는 것도 전혀 없었고 순전히 학교 공부로만 버텨야 하는 시대였다. 나는 예습복습을 거의 하지 않고 수업중에 바짝 정신차려 집중하는 걸로만 대충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맨 뒷줄에 앉아서 그렇게 노상 딴짓만 하다보니 성적에도 당연히 티가 날수밖에 없었다. 단순암기, 찍기의 여왕이 되려면 일단 수업중에 선생이 중요하게 언급한 부분에 형광펜이라도 칠해놓아야 하는데 그 몇달간은 망보는 임무를 맡은 수업이 아니고선 교과서며 요점정리 유인물이 그저 하얗기만 했다. 사실 딴짓하는 친구들을 위해 망을 보느라 대표로 수업을 들을 때도 맨뒷줄에선 앞줄에 앉았을 때와는 공부의 질이 달랐다. 선생에게 시선을 집중해 보아도 시야에 들어와 거슬리며 움직이는 다른 아이들에게 신경을 빼앗겼고(맨앞줄에선 선생과 나의 시선을 가리는 장애물이 중간에 없다! ㅋㅋ ) 목소리가 작은 선생의 설명은 맨뒤까지 잘 들리지도 않아 수시로 졸렸다. 키가 커서 늘 뒷자리에만 앉아 지냈던 친구들은 아마도 그런 악조건을 극복하고 수업에 집중하는 노하우를 꾸준히 쌓아왔을지 몰라도, 앞줄 붙박이였던 나는 암튼 그랬다. 그렇다고 친구들 배신하고 다시 맨앞줄로 갈 수도 없으니, 공부엔 자포자기 심정이 됐다. 그래도 고2때 아니면 언제 놀아보겠냐며, 고3 올라가서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고3때 다시 맨앞줄로 회귀한 뒤에도 그랬지만, 대학엘 가서도 강의실에서 내 자리는 거의 앞쪽이었다. 맨앞줄은 단호히 거부했어도 거의 두세째 줄에 늘 앉았던 이유는 워낙 거구의 친구들이 많아서 뒤쪽에 앉으면 아예 앞이 보이지도 않았고 200명씩 듣는 합동강의실이든 영문과 단독 강의실이든 뒤쪽엔 요란하게 사투리를 쓰는 '무섭고 시끄러운' 남학생들이 너무 많았다. 물론 가끔 졸릴 때면 일부러 덩치 큰 친구 뒤에 앉아 잘 가리라고 당부하기도 했고, 싫어하던 교직과목의 경우엔 가려주는 사람 없이도 뒷줄에서 빌빌 졸았지만.

사실 고2때 찍은 저 기념비적인 사진 속엔 뒷줄에 앉았든 아니든 전교1등 하던 친구도 있었으니 교실에서 앞줄과 뒷줄 여부로 공부나 집중도의 차이를 단정할 순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처럼 얼치기 범생에겐 확실히 지리적인 차이가 성적과 수업집중도에 분명 영향을 미쳤으니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말도 할 수없다. 요가원 원생들을 봐도 그렇다. 언제나 맨앞쪽을 차지하고 앉은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 열심히 몸을 늘이고 유려한 동작을 보여준다. 수업 맨 마지막에 편하게 드러누워 휴식을 취하는 자세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쿨쿨 잠을 자다가, 그만 휴식에서 깨어나라는 요가 강사의 말을 못듣고 끝까지 누워 있다가 얼떨결에 일어나는 사람들은 나의 조카를 비롯해 꼭 뒷줄에 있던 사람들이다. 나도 이젠 확실히 어떤 자리든 뒷줄이 편하고 앞장서서 주장을 펼치기보다는 뒷자리에서 구시렁거리는 걸 즐기는 사람이지만, 벌써부터 맨 뒷자리만 고집하는 조카의 기호는 너무 일찍 자리잡은 게 아닐까 염려스럽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학교에서도 만날 맨뒷자리에 앉아 딴짓하고 조는 거 아니니, 공주야? ㅠ.ㅠ 물론, 맨 뒤에 앉아 빌빌 졸거나 만화책만 읽어대도 행복하고 바른 아이로 잘만 자라준다면 걱정이 없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된다. 다 부질없는 욕심 탓이다.
Posted by 입때
,

인지상정

삶꾸러미 2011. 1. 4. 22:16

늦깎이로 다시 공부하던 시절 '인지상정'이 별명이었던 황당한 인물이 하나 있었던 터라, 미안하게도 한동안 '인지상정'이라는 말은 내게 본래의 의미('사람이면 누구나 가지는 보통의 마음';;)와는 상관없는 비아냥거림의 뉘앙스를 담고 있었다. 탈식민 담론이 오가던 이론수업에서 발표를 하며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인종차별이 인지상정이라고 했던가, 암튼 앞뒤가 맞지 않는 짜깁기 발제문을 설명하며 터무니 없이 사용한 '인지상정'이란 말이 던진 파문과 충격이 어찌나 컸던지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이없는 시선을 주고받았던 기억이 있다.

벌써 그 시절도 까마득한 추억이 돼가고 있다보니, 나는 또 내 나름대로 그 의미를 변용해서 쓰고 있는 듯하다. 누구나 가지는 건 아니겠지만 나로선 이러저러한 마음을 품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는 식으로. 택시 기사분에게 오히려 커피값을 받았다는 파피의 포스팅을 읽고 생각난 건데, 여전히 우유부단함과는 별도로 '불의'라고 여기는 점에 대해서는 까칠한 쌈닭의 면모를 갖추고 있는 반면에 나와 어떻게든 관련이 있는 직업군의 사람들에게는 질끈 눈을 감아주는 너그러움이 생겨났음을 실감한다.

예를 들어 이런 거다.
오늘 오후에도 겪은 일인데 아주 경미한 접촉사고의 경우, 범퍼에 살짝 흠집만 난 정도는 그냥 너그러이 보내준다. 아까 병원 갔다가 갈림길에서 막무가내로 후진하던 BMW에게 앞범퍼를 받혔다. 자기가 받은 줄도 모르고 그냥 가려던 어리바리 운전자를 빵 소리로 일단 잡아 세운 다음 "우쒸..."하면서 기세 좋게 차에서 내렸다. 마침 주차안내요원 코앞이라 확실한 목격자도 있었다. 콩 하고 받힌 거라 페인트가 살짝 묻어나긴 했던데, 상대 운전자가 따라 내리자마자 "죄송합니다"하는 순간, 그냥 보내주자 싶었다. 전에도 그렇게 보내준 적 많지만 평소 외제차 모는 인간들의 고압적인 태도에 열받을 때가 많았던 터라 얼굴부터 찌푸리고 내렸다가, 범퍼가 망가진 건 아님을 확인하기도 했으니 금세 마음이 풀렸다. 나의 선의(물론 나도 비슷한 선의를 받은 적 있다)가 내 주변의 모든 운전자들에게 퍼져나가 혜택을 비는 마음이랄까.

음식점도 그렇다. 작은아버지들을 비롯해 친구, 후배들 중에서도 '요식업계'에 종사하는 주변인들이 점점 많아지다보니 위생에 심히 문제가 있다거나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은 한 음식점에서 웬만해선 까탈을 부리며 불평을 터뜨리지 못한다. 내가 쓸데없이 음식점에서 진상을 떠는 유형은 아니지만, 그리고 그분들은 물론 친절이든 위생이든 맛이든 어느 면에서나 훌륭히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겠지만, 일부 음식점에서 몇몇 종업원의 무개념 행동에 벌컥 화가 났다가도 예전처럼 전투적인 태세로 항의하질 못하겠다. 내 아무리 소심하고 우유부단해도 불의는 참지 못했거늘! 요번 통큰 치킨 사태 때도, @@치킨에 입사한 사촌동생을 떠올리며 통큰 치킨 판매 중단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프랜차이즈 치킨이 다 비싼 건 아니다>라고 애써 주장했다. ^^; 

비행기를 타도 승무원을 수시로 불러대 괴롭히지 않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항공승무원이 얼마나 고된 직업인지 지인들에게 익히 듣기도 했지만, 사무장으로 승진했다던 선배가 상당한 거구로 좁은 통로를 왔다갔다 오가며 양손에 적, 백포도주를 나눠들고 따라주는 모습을 직접 보면서 어이쿠 찔렸다. 장거리 여행땐 초반에 술 팍 마시고 잠드는 게 최고라면서 한때 꽤나 성가시게 땅콩 달라, 치즈 있냐며 호출버튼을 눌러대거나 치솔 내놔라 베개 달라 슬리퍼 없냐 진상떨던 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_- 물론 이젠 승무원들 쉬는 시간엔 절대 귀찮게 하지 않는, 아주 착하고 얌전한 승객이 되었다. (설마 승무원 안 괴롭히려고 최근 몇년 간 장거리 여행을 못떠나는 건 아니겠지;; ㅠㅠ)

버스 운전하는 친구 생각해서 버스 운전기사 아저씨들한테 꾸벅 인사도 잘하고, 택시 운전하시는 지인 떠올리며 우수리는 미리 동전으로 챙겨 거슬러받기 좋게 돈을 내거나 3백원 미만은 거스름돈 안받는 원칙을 세웠으며, 은행다니는 지인 생각해서 창구업무는 웬만해선 회피하고 현금지급기만 상대하며, 스님된 친구 목사된 친구 생각해서 땡중이란 말도 사기꾼 목사라는 말도 삼가는 중이다(워낙 타락한 종교인이 많아서 그쪽 욕은 '아예 중단'할 수가 없다;;). 까먹어서 그렇지 내가 각별히 신경쓰게 된 직업군이 또 있을텐데.... 물론 한두번의 나쁜 경험으로 무작정 싫은 눈으로 짜증스레 바라보는 편견의 직업군도 어마어마하겠지만서도.

제발이 저려서 책을 읽으며 남의 번역에 대해서 함부로 왈가왈부하지 못하는 것도 같은 범주에 드는 느낌인데 그건 나만의 인지상정이 아니라 동병상련에 더 가까운건가, 아님 혹시 제 밥그릇 감싸기? 암튼 세월이 흐르면서 몇가지 면에서는 유해진 것인지 통이 커진것인지 확실히 너그러워졌다. 다만 이런 태도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의 어물쩡 타협이나 비리 옹호로 변질되지 않도록 경계도 게을리해선 안될 것이다. 나이 드는 것도 서러운데, 어려서 내가 혐오했던 '중장년'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건 절대 안될 일이다. 그러려면 계속 까탈스러움을 잃지 말아야하는 건가... -_-a 
흐이구 왜 이렇게 어려운 얘기를 쓰기 시작했는지 마무리가 안 되누만. 뭐 그렇다는 얘기다. 이러다 내 별명도 조롱의 뜻을 지닌 인지상정이 되면 안되는데!  
Posted by 입때
,

우표

놀잇감 2010. 12. 22. 01:38

마지막으로 우표를 사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니 우표값을 모르는 건 당연했다. 우편으로 무언가를 보낼 일이 간혹 있기는 했지만 단순한 편지나 카드가 아닌 것들이라 늘 우체국엘 가서 서류 무게를 달고 해당 금액을 지불해야 했다. 예전엔 등기나 일반 우편으로 서류를 보낼 때도 요금에 해당하는 우표를 잘라주고는, 우리에게 우표를 붙여 해당 함에 넣으라고 했지만, 요샌 컴퓨터로 뽑은 스티커를 직원들이 직접 붙여 접수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아, 요즘도 외국으로 보내는 편지엔 우표를 붙이라고 주려나 모르겠군. 나 역시 우표를 붙인 우편물을 받아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마도 올 초쯤 미국에서 친구가 보내온 편지에 붙어 있던 스티커 우표를 본 게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250원. 요즘 우표값이란다. 내가 부쳐야할 카드는 규격봉투가 아니라 정사각형이고 내용물도 좀 묵직해서 넉넉하게 우표를 두 장 샀다. 원래 나는 우표를 붙일 때 혀를 내밀고 침 묻히는 과정을 싫어했기 때문에, 예전에 더러 편지를 써서 부칠 때는 우표를 미리 집에 많이 사다 놓았다가 반드시 풀로 붙여 우체통에 넣었다. 침으로 대충 붙였다가 우표가 홀라당 떨어져버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늘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동네 입구의 잡화점에서 우표를 사 길거리에서 혀를 내밀고 얼른 우표에 침을 묻여 봉투에 붙이고는 우체통에 넣는 과정까지가 모두 정겨운 행사 같았다.

중고등학교 시절 연말이면 꼭 크리스마스 씰을 팔았는데, 요즘도 그렇게 학생들에게 강매를 하는지 문득 궁금하다. 설마 아직도 그러진 않겠지. 강매는 괘씸했지만, 그땐 집집마다 거의 우표를 수집하던 시절이어서 디자인만 예쁘면 크리스마스 씰도 같이 모아두곤 뿌듯해했다. 별로 예쁘지 않은 크리스마스 씰이 발행되면 아끼지 않고 카드에 죄다 붙여보내며 소비했었고. 생각해보니 할아버지가 모으시던 우표책도, 아버지와 동생들이 모으던 우표책도 모두 내가 갖고 있다. 갖고 있다기 보다는 그냥 책장에 보관해두고 있다는 것이 옳은 말이다. 옛날엔 명판이니 시트니 해서 주요 우표가 발행될 때 새벽같이 우체국에 가서 줄서 기다렸다가 우표를 사오던 때도 있었으나, 그야말로 까마득한 옛날 일이다. 요즘도 우표를 모으는 사람들이 있을까.

난데없이 우표 타령을 하게 된 건 뜻밖에 날아온 반가운 크리스마스 카드 때문이었다. 옆구리를 찔리고서야 답장 보낼 생각을 한 건 민망하지만, 손글씨로 무언가를 적어 보내는 게 점점 어렵게 느껴지긴 하지만, 그래도 기쁜 마음으로 카드를 적었고 덕분에 간만에 우표를 구경하게 되어 좋았다. 종교적인 인물의 탄신일과 상관없이, 그냥 한 해의 끄트머리에 달린 특별한 명절 같은 느낌, 이런 게 바로 나의 크리스마스 정신이었지 하는 깨달음이 빨간 봉투의 크리스마스 카드를 우체통에 넣으며 비로소 찾아들었다. 그리고, 조카들에게도 나에게도 올해부턴 크리스마스 선물 없다고 큰소리를 쳐놓은 마음이 슬며시 약해졌다.

Posted by 입때
,

1900분

투덜일기 2010. 12. 14. 11:59

발신 번호가 길고 복잡한 것으로 보아 국제전화임이 분명한 전화가 두번이나 오다 받으면 아무말 없다가 끊기고 또 받으면 아무 소리도 안하다 끊어졌다. 해서 또 그놈의 보이스피싱인가 지레 겁을 먹고 이맛살을 찌푸린 채 전투태세를 취하고 전화기를 노려보며 기다렸더니, 이번엔 또 컴퓨터방 전화가 울렸다. 아침 댓바람부터 이리로 전화를 거는 이 역시 대부분 텔레마케터들이라 번호부터 확인했다. 아하. 이번에도 국제전화는 분명한데, 지역번호가 낯익은 친구 전화였다. 

미서부에 사는 친구가 아는 사람에게 새로 전화카드를 샀는데, 대체 얼마 짜리인지 몰라도 아 글쎄 한국이랑 1900분이나 통화할 수 있는 카드란다. +_+ 한국으로 전화할 사람이 나밖에 없다고 했더니만 아예 휴대폰에 핀번호를 다 입력해주었으나, 그 단축번호로 전화를 거니 자꾸 에러가 나서 운전하다 말고 수첩 꺼내 일일이 그 번호를 다 눌렀단다. 아무리 핸즈프리로 통화를 하는 거니 상관없다지만, 그래도 운전중엔 위험하다고 일단 끊고 다시 통화하자고 추임새처럼 반복하면서도 수다가 길어져 LA에서 고속도로 탔다는 애가 통화 끝날 때쯤엔 집에 다 와간다고 했다.

1시간 가까이 통화를 했는데도 친구가 음화화홧 웃으며 아직도 1800분 넘게 남았으니 염려 말란다. 앞으론 자기가 전화할 테니까 쓸데없이 내쪽에서 전화하지 말라고도 당부했다. 셈에 약한 나는 1900분이면 대체 몇시간인지 감도 잡히질 않는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휴대폰 요금제에도 무료음성통화가 200분 들어 있는데, 워낙 전화질을 꺼려하다보니 노상 남아돌아간다. 데이터용량처럼 음성통화도 다음달로 이월되면 좋겠다고 생각해보지만, 지지난달엔 무려 130분이나 남았다고 말일날 문자가 왔었고, 지난달엔 분발하는 의미로 악착같이 휴대폰을 써댔어도 40분이나 남았던 걸 감안하면, 나 같은 사람은 음성통화량을 이월시켜줘도 다 못쓰고 점점 불어나 오히려 부담만 느낄 것 같다. 

85년도에 친구가 이민갔을 때만 해도 서로 말소리가 한참 뒤에 전달되는 션찮은 통화품질의 국제전화로 몇분 얘기 안했는데도 전화요금이 몇만원씩 나왔으므로, 그땐 정말 급한 일이나 친구 생일날 축하 전화가 아니고선 선뜻 전화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요샌 대체로 국제전화 요금이 싸져서 TV 광고처럼 굳이 저렴한 회사를 찾아 누를 필요도 없다. 자주 걸지도 않는데 무엇하러 숫자 하나라도 더 눌러서 실수의 가능성을 높인단 말인가. 헌데 알뜰한 친구는 나와 다르다. 얼마 전까지 친구는 나와 통화를 하려면 반드시 국제전화 정액제를 쓰고 있다던 언니네 집에 가서 전화를 걸었다. 한달에 10불쯤 내면 100분이 무료통화라던가. 그 이전에는 홍보용으로 나눠주는 전화카드를 주로 이용해 전화를 걸었다. 나도 여행갈 땐 전화카드를 사가지고 가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일일이 핀번호를 입력해야 하는 게 귀찮아서 나중엔 그냥 신용카드 전화기를 찾아 쓰거나 좀 비싸도 짧게 끝내지 싶어 호텔전화를 그냥 썼다. (그러고 보니 휴대폰 로밍 같은 거 불가능하던 시절 얘기다 ^^;)

새로 전화카드 사업을 시작한 지인을 돕느라 산 거라지만 1900분짜리 전화카드는 항상 검소하고 알뜰한 친구에겐 엄청난 소비가 틀림없다. 그리고 우리 둘의 요즘 통화 빈도수로 볼 때 그 시간을 다 쓰려면 아마 몇년이 걸릴지도 모르겠다. -_-; 그 카드 다 쓰기 전에 꼭 내가 가든 니가 오든 2주짜리 휴가계획을 잡아보자고 아련한 꿈을 수다로 풀어내다 전화를 끊었다. 1900분. 단순한 계산도 서툴고 아둔한 내 머리로는 거의 영원한 시간처럼 느껴지는 든든한 쌈짓돈 같은 게 생긴 기분이다. 친구가 돈 버렸다고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새해 인사 전화는 내가 먼저 걸어야겠다. 크리스마스 카드 겸 편지라도 새삼 쓰면 더욱 좋겠지만. 
Posted by 입때
,

오랜 친구가 있다. 19살부터 알고지냈으니 이 친구와도 모르고 지낸 인생보다 알고 지낸 인생이 더 길다. 고등학생 때 지루한 수업시간에 쪽지를 보내던 버릇이 대학 때도 이어져 이 친구랑도 어쩌다 보니 강의실에서 시답잖은 쪽지를 주고받았다. 친구는 악필로 유명하면서도 연습장이나 공책 한 가득 적은 기묘한 일기나 만화 같은 것을 보여주기도 했고 (정말 싫었다 -_-;;), 당시 유행대로 시집을 끼고 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시를 골라 보고서 용지에 적어 주기도 했다. 친구가 군에 간 뒤엔 당연히 위문편지를 써주었다. 카투사라 용산에 배치돼 수시로 휴가를 나오기는 했지만. 

학교 졸업후 각자 회사에 들어가선 전화가 유일한 연락방법이었다. 몇달에 한번씩은 만나서 맛있는 걸 먹고 수다를 떨었었는데, 친구가 덜컥 영국 지사로 발령이 났다. 다시 편지 왕래가 시작되었다. 크리스마스 같은 때는 서로 선물도 보냈다. 내쪽에선 주로 영국에서 몹시 비싼 '담배' 같은 걸 보내는 게 고작이었지만. 내가 회사를 관두고 번역일을 시작하며 팩스 기계를 장만한 뒤로는 편지를 우편으로 보내는 대신 감열지가 삐직삐직 기어나오는 팩스가 이용되었다. 친구를 지사로 보내며 주재원들의 품위유지를 위해 좋은 집과 BMW 5시리즈를 내주었던 한국 대기업이 망해 그 무렵엔 영국 회사로 옮겼기 때문에 친구 이름만 영어로 쓰면 편지 내용을 아무도 몰랐으니 상관 없었다.

(중간에 '새롬 데이터맨'을 사용하던 pc 통신 시절이 있기는 했는데, 한때 주말이면 그 불안한 전화모뎀으로 밤샘 채팅에 열을 올리기도 했으나 이 친구와는 거리 때문에 사용하지 못한 것 같다.)

어느덧 세월이 바뀌어 이메일이 일상화되었으므로, 친구와의 소통은 팩스에서 이메일로 발전했다. 영국에서 귀국한 뒤로는 휴대폰도 이용됐으나, 친구도 나도 전화를 그리 자주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집이든 회사든 노상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이들을 위한 MSN 메신저라는 유용한 물건이 나타났다. 친구와도 메신저 채팅이 주요 창구가 되었다. 그 즈음이었던가 그보다 먼저였던가 잘 기억은 안나지만 싸이월드에도 대학동기들 클럽이 생겨났다. 내가 수없이 도토리를 사들여가며 미니홈피도 열심히 꾸밀 때였다. 대학시절 연습장이나 보고서 용지에 서너장씩 빼곡하게 채워 편지를 써보내던 친구는 여전한 '글빨'로 클럽 게시판에 주옥같은 글을 올리기 시작했고 나는 열심히 댓글을 달았다. 

한때는 MSN와 네이트온을 동시에 로그인해놓고 사방에서 말을 걸어오는 지인들과 수다떠는 것이 낙이었지만, 쓸데없이 방만한 인간관계로 나는 금세 피곤해졌다. 급기야 나는 메신저 세상을 등지기로 했다. '오프라인 표시'라는 훌륭한 기능이 있기는 했지만, 싸이월드 '일촌' 사이에도 등급이 필요하다고 느꼈듯이 어설프게 알려준 메신저 아이디로 아무 때나 뜬금없이 "올만요! 안녕하삼. 방가방가!"라며 말을 걸어오는 아이들이 슬그머니 두려웠다.

내가 메신저질을 '끊은' 이후, 전화 통화보다는 글로 쓰는 수다가 더 편했던 친구와 나는 확실히 소통이 뜸해졌고, 이젠 가끔 안부 문자를 주고 받거나 클럽 게시판의 댓글로, 드문 통화로 지금껏 우정을 이어가고 있다. 블로그다 트위터다 페이스북이다 뱁새 주제에 따라가느라 가랑이가 찢어질 지경인 나와 달리 친구는 스마트폰을 장만했으니 발을 들여보겠다던 소셜네트워크 세상을 거부하겠다고 했다. 신상이 위험해진다나 뭐라나. -_-;

'집요하고 무섭다는' 페이스북까지는 손대고 싶지 않았지만 바다 건너 있는 지인들의 권유로 얼마전 시작하고 보니 신상이 위험해질 거라는 친구의 말이 차츰 실감난다. 트위터도 노상 추천 친구들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팔로우' 하고 있는 사람들의 네트워크를 보여주는 데 반해, 페이스북은 '너 얘랑 아는 사이 아니냐'고 의외의 인물까지 수시로 사진까지 보여주며 옆구리를 찔러댄다. 일부러 입학이나 졸업 년도 같은 정보는 올리지도 않았는데! 지금까지는 무서워라 싶어서 계속 무시하고 있었으나, '미아니'의 헐벗은 사진을 계속 보여주면서 '너 얘랑 아는 사이일걸!'이라며 부추기는데는 나도 모르게 '넵!' 하며 친구 추가를 클릭하고 말았다.

문제는 또 있었다. 아이폰에 페이스북 어플리케이션을 깔고 난 이후로는 딩동딩동 친구들이 뭔가를 끼적일 때마다 친절하게 또 내 옆구리를 찌르기 시작한 것이다. 남들과 다른 시간에 자는 나에게 아무 때나 날아오는 문자와 전화는 미움의 대상이거늘, 이젠 페이스북까지! 카카오톡 어플은 또 어떻고! 암튼 휴대폰 알림이야 설정을 모두 바꾸면 되는 것 같기는 하다만, 1억명 이상이 하고 있다는 페이스북의 절묘한 관계찾기는 좀 으스스하다. 아직은 그다지 부지런하지 않은 친구들 열명 뿐이라 '관리 가능' 수준이지만 멍하니 있다가 또 메신저 꼴 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조심해야지. 블로그를 시작하면서도 암흑 세계에 발을 들이는 느낌이었고, 염려대로 중독 수준으로 열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에 부끄럽단 말이닷.

돌아보면 정말 세상은 놀랍도록 변하고 있다. 누가 우스개 소리로 십년 뒤면 스마트폰이 작아져 머릿속에 마이크로칩으로 심어지게 될 거라던데, 앞으로 소셜 네트워크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지 두려우면서 약간 궁금하긴 하다. 아무려나 현재로선 두려움이 더 크다는 의미로 티스토리의 '소셜네트워크 플러그인 3종세트'는 설정 보류다. ㅋㅋ
Posted by 입때
,

어떤 친구

투덜일기 2010. 11. 9. 12:58
고1때 짝이었다. 학교졸업후 이민을 가버린 또 한 명의 친구와 셋이 3년내 단짝이라 계속 반이 달라졌는데도 하교는 꼭 같이 하는 충성을 서로에게 보였고, 각자 삶이 달라진 대학시절에도 줄곧 자주 만났다. 고3때도 내내 수시로 학교 등나무 벤치로 불려나가, 교회 오빠와의 연애상담을 도맡았던 터라 이후에도 친구의 연애고민을 들어주는 것이 내 주된 임무였다. 주변에선 둘의 키가 작다는 것 말고는 공통점이 하나도 없는데 같이 어울리는 게 신기하다고 했다. 남자친구가 늘 우선순위라 약속을 하고도 걸핏하면 바람을 맞히는(그땐 삐삐도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라, 약속장소에서 기다리며 공중전화로 친구 집에 계속 전화를 걸어 가족에게 메시지를 남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 친구를 내가 왜 늘 참아주는지 나도 신기했다. 그래도 고등학교 때 친구는 평생 가는 거니까, 라고 믿었던 것 같다. 며칠 뒤 눈물과 애교로 참회하며 사과하는 친구의 변명에 넘어가기도 했다. 남자친구가 채워줄 수 있는 부분이 있고, 동성친구가 채워줄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그날은 남자친구가 필요한 날이었다나. (아 그럼 미리 전화해서 약속을 취소하거나 자기는 못나온다고 하던지!)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것을 즐겼던 친구는 대학시절부터 대학로 카페에서 피아노를 치는 아르바이트를 했고, 몇 번의 편입과 전과를 거치느라 학교를 세군데나 옮긴 뒤에도 결국 최종 직업은 피아니스트였다. 피아노를 치는 공간도 대학로나 미사리 카페에서 강남에 있는 별 다섯개짜리 호텔로 격상되었다. 그럴 거면서 굳이 수학과는 왜 졸업했는지 원. 내가 피아노 치는 남자에 대한 선망이 있듯, 공주 드레스를 입고 피아노 치는 여자에 대한 선망을 품은 대다수의 남자들 덕분에 친구는 주변에 남자가 끊이질 않았다. 집이 갑자기 기울어 빚쟁이들에 쫓기느라 친구의 가족들이 야반도주로 뿔뿔이 흩어져야 했을 때 친구는 동생을 하나 데리고 우리 집에 들어와 코딱지 만한 내 방에서 함께 몇달 지내야 했는데, 심지어 그 기간에도 심야에 울리는 전화는 모두 그 친구의 남자친구에게 걸려온 것이었다. 9시 이후엔 남의 집에 전화를 걸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가르쳤던 우리 아버지가 주무시다 말고 일어나, 딸 남자친구도 아니고 딸 친구의 남자친구 전화를 받아 바꿔주시는 상황이(당시 전화기는 안방과 거실에만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얼굴 뜨겁지만, 친구는 예의 애교 넘치는 말투로 생글생글 웃으며 죄송해요, 아버님, 한 마디로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스물여덟살 때였던가. '니가 한번 봐 달라'며 수없이 내게 소개했던 애인들 가운데서 친구는 드디어 한 남자와 결혼을 결심했다. 이상하게 나쁜남자가 매력적이라면서 늘 날나리 같은 남자를 선호하던 친구는 대기업에 다니는 검소하고 성실한 남자를 선택했고, 나는 드디어 친구의 방황이 끝나나 보다며 진심으로 기뻤다. 결혼식날 토요일 12시 예식에 맞춰 아침 7시까지 신랑신부를 픽업하는 역할이 내게 주어졌을 때도 기쁘게 승락했다. 그 남자는 친구도 없나, 하는 의문도 그땐 들지 않았다. 다만 전날 눈이 내리는 바람에 안산까지 출퇴근길에 흙탕물을 홀라당 뒤집어쓴 차에 신랑신부를 태울 수가 없어서, 깜깜한 새벽에 일어나 양동이에 뜨거운 물을 퍼담아 들고 나가서 골목 가로등 불빛 아래 손수 세차를 하면서 약간 서글프긴 했다. 친구 결혼식 때문에 세차하랴 꽃단장 하랴 새벽부터 부산을 떠는 나를 보며 부모님은 혀를 끌끌 찼다. ㅁㅅ이가 너 이 고생 하는 거 알아주기는 하냐고.

아직도 해가 뜨지 않아 어두웠던 오전 7시, 이미 살림집에서 함께 살고 있던 친구의 집 초인종을 누르자 신랑이 부스스 새집을 지은 머리로 문을 열어주었다. 심지어 신부는 자고 있었고... 그제야 일어난 두 사람이 부리나케 씻는 동안 나는 신랑신부 예복과 폐백 때 입을 한복 따위를 영차영차 미리 차에 실었다. (친구가 아니라 머슴이었나?) (내 생각에) 남성편력 및 방황 끝, 행복 시작이라 여겼던 친구의 결혼생활은 3년을 채우지 못했다. 남자의 성실함과 검소함은 친구에게 따분함과 궁상으로 비치기 시작했다. 화려하게 즐기는 삶의 습관을 친구는 포기하지 못했고, 꼼꼼히 모든 수입을 관리하는 남편 몰래 딴 주머니를 차느라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를 팔아 야밤에 놀러다니기를 거듭하던 친구는 결국, 무려 열살이나 어린 아르바이트생(수능 끝나고 호텔 주차요원으로 일하던)과 바람을 피우다 들통나 이혼했다. 결혼이라는 제도나 한 남자와의 약속 따위에 얽매일 수 없는 친구란 걸 나도 그 무렵 깨달았던 듯하다.

친구는 놀랍게도 그 문제의 남자친구와 거의 10년간 만남과 헤어짐을 거듭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은 친구에게 진리였다. 몇달씩 심지어 1년 가까이 연락이 없으면 연애든 일이든 잘 진행된다는 뜻이었다. 그러다 뜬금없이 연락이 와 만나자고 해 나가보면 어김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헤어짐의 아픔을 토로했다. 그러고는 어김없이 일주일 쯤 뒤에 헤헤거리며 전화를 걸어 다시 만나기로 했다는 기쁜 소식을 알렸다. 드물게 곁에 애인이 없을 때만 찾는 친구로 전락한 나 역시 그 친구를 어느 정도는 포기하고 있었다. 그냥 세월의 힘과 관성으로 견뎌주는 관계랄까.

타고난 사교술과 수완으로 친구는 꾸준히 사업 규모를 늘려가는 모양이었다. 피아노 연주도 현악기 편성을 늘려서 호텔 로비에서 연주하는 것뿐만 아니라 결혼식이나 여러 행사에도 불려다녔다. 그야말로 엔터테이너의 길로 접어든 친구는 후배 연주자들을 거느리고 양성하는 사업가로 변신해, 몇년 전엔 법인을 차렸다고 했다. 행사 연주 한번에 최소한 몇백만원을 벌어들이는 그 친구의 시각으론 골머리를 써가며 컴퓨터 앞에 앉아 '푼돈'을 버는 내가 한심했는지, 몇년 전까지도 내게 '차라리' 고액과외를 하지 그러냐고 안타까워했다. -_-;

우리 집에서 가까운 호텔에 행사가 있을 때나 간간이 서로 얼굴을 볼 수 있었던 친구가 연애고민 이외의 난감한 부탁을 해오기 시작한 건 작년부터였다. 엔터테인먼트 사업이란 것이 원래 열악한 자본금으로 시작해 인적자원으로 외부의 투자를 끌어들여 운영하는 것이라는데(친구의 설명이 그렇다), 당연히 수입이 불규칙할 수밖에 없어 간혹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한다는 길고 긴 푸념 끝에 친구가 화끈하게 말했다. 천만원만 빌려달라고. 보름 있다가 투자금 들어오면 갚겠다고. +_+ 누구나 통장에 그 정도 여윳돈은 늘 갖고 있어서 수시로 뺄 수 있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과거에 몇 차례 몇몇 친구에게 돈을 빌려준 경험으로 미루어, 친구에게는 그냥 주겠다는 마음이 없는 한은 돈을 빌려주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는 걸 알고 있는 나는 고민을 꽤 했다. 빌려줄까 말까의 고민이 아니라(물론 그럴 돈도 없었지만!), 어떻게 '잘' 거절해야 할까 고민이었다. 그냥 선뜻 선물로 줄 상황이 아니고서야 친구와는 돈 거래를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는 것을 납득시켜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나는 비겁하게 여윳돈이 없다는 변명과 사과로 친구를 돌려보내고 말았다. 그러면 할 수 없지 뭐, 라며 돌아간 친구는 그 일로 삐쳤는지, 또는 내가 필요 없어진 때문인지 몇달이 넘도록 연락이 없었다. 원래도 내 쪽에서 먼저 연락하는 법이 잘 없기 때문에 문득 생각이 나더라도 나 역시 잘됐다 싶을 정도였다. 오랜만에 만나서 돈 얘기나 하는 친구라니! 차라리 연애 고민 상담이 낫지... -_-; 그러다 올초에 또 한번 '딱 일주일만' 필요해서 그러는데 5백만원만 빌려달라는 연락이 왔다. 어휴... 급히 돈거래를 청하는 사람들은 어쩜 그렇게 변명거리가 다들 그렇게 똑같은지.

결국 나는 친구와 관계정리의 위험을 무릅쓰고 (어쩌면 그쪽을 바란 것인지도!) 미안하지만 친구와는 돈거래를 하지 않기로 했다는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말로는 이해한다면서, 그래도 자기를 그렇게 못 믿는다는 게 섭섭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던 친구는 알았으니 내게 다시는 돈 얘기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또 몇달이 지났건만 친구는 며칠 전 또 다시 '5백만원'의 용건으로 나를 찾았다. 그리고 이번엔 레퍼토리도 달라져 있었다. 요번 쇼케이스 진행하느라고 생각보다 비용이 많이 들어가서 그래. 오백이 안되면, 일단 삼백도 괜찮아. 너 설마 그 정도는 있지? 당장 너한테 없으면, 일주일 뒤에 드린다고 너희 엄마나 동생한테 얘기 좀 해봐라. 10일에 1억 투자 들어오기로 되어 있으니까, 딱 일주일만 쓰면 돼. 응?

친구의 억지에 기가 막혀서 성의 없이 대꾸하다 미안하다고 전화를 끊으려니 서글픔이 밀려들었다. 친구의 상황이 정말로 어떠하든, 그간의 역사가 어찌 되었든 이 친구에겐 내게 여유가 아주 많더라도 선뜻 천만원, 오백만원을 내어줄 수 있는 '관계'가 아니란 생각 때문이었다. 전화를 끊고 잠시 씩씩대던 마음으론 번호를 스팸등록 해놓을까도 싶었지만 그러지는 않기로 했다. 정말로 절실하게 돈이 필요한 상황은 누구에게도 닥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젠 친구의 번호가 뜨면, ' 또 애인이랑 헤어졌나?'라는 의문 대신 '또 돈 빌려달라고 할 건가?'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오를 것이고, 그래서 이미 우리의 관계는 무너져버렸음이 안타깝다. 수십년 된 우정이 겨우 요거냐고, 친구랍시고 그럴 줄 몰랐다고 그녀가 나를 욕하든 말든, 하는 수 없다. 나는 이만한 그릇의 사람인 것을. 고등학교 친구든 아니든 평생 가는 친구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고, 멀어지는 친구 또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만만한 대부업자로 여기는 친구 따위 나도 사절이다. 
Posted by 입때
,

어울림

투덜일기 2010. 6. 9. 16:23

세상 사람들 누구나 자기가 꼭 원하고 바라는 일을 할 형편은 안되는 것이 현실임을 잘 알지만, 그래도 내가 품고 있는 그 사람의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직업을 선택했다고 하면 공연히 속이 상하다.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결정을 존중하는 마음을 품으면서도 혼자 속앓이를 하듯 한동안 그런 생각이 든다는 얘기다. 가령, 낯 많이 가리고 사교성이 심히 부족하다고 스스로도 인정하던 친구가 돌연 아는 사람이 하던 호프집을 인수해 해보겠다고 나섰을 때처럼. 친구 중에 누구든 하나쯤 술집이든 카페든 주인이 되면 덩달아 나도 참 좋겠다는 막연한 바람을 노상 품었으면서도, 좀 더 씩씩하고 강한 친구라면 모를까 그 친구는 못 해낼 것 같다는 생각부터 앞서는 바람에 친구의 인생에 간섭할 권리도 없는 주제에 뜯어말리려고 했던 적이 있다. 사업자등록증을 내느라 보건소에 가서 기막힌 검진을 받아야 했다며 거의 울것 같은 표정을 하는 친구 앞에서 속으로는 여전히 "너랑 호프집 주인은 정말 안 어울려!"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누누히 말려도 해보겠다는데야 결국 다 잘 될 거라고 위로하는 수밖에 없긴  했지만. 

오래 전부터 나를 아는 친구들은 심지어 지금의 내 직업도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기며 내심 아직도 염려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처음 회사 때려치우고 집에 들어앉아 번역을 해보겠다고 나섰을 때, 지인들의 절반쯤은 나를 말렸다. 나처럼 사람들과 어울리며 노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떻게 홀로 조용히 틀어박혀 심심하게 하는 일을 하겠느냐고. 만날 놀러다니느라 분명 일은 뒷전으로 밀어뒀다가 결국 욕만 잔뜩 먹거나, 심심해서 못 견디고 다시 회사생활을 하게 될 거라고 장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16년째 이 일을 하고 있으니 일단은 그들이 틀린 셈이다. 표면상 이 일이 나에게 어울리든 말든.

결국 남들이 생각하는 직업의 어울림은 그저 타인으로서의 느낌일 뿐이라는 얘긴데도, 요번에 공인중개사로 부동산사무실을 개업한다는 어느 친구 소식에 또 한번 나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대학 다니던 시절 그 친구는 유치하든 말든 자기가 쓴 글을 빼곡히 실은 문집을 만들었다며 씩 웃으면서 조악하게 인쇄된 그 개인 문집을 내게도 한 부 쥐어줬던 부류였다. 일상적인 안부와 푸념밖엔 없는 내 답장이 민망할 정도로 그 친구의 편지엔 깊은 사색과 주옥같은 글귀가 가득했으므로 나는 부디 그가 글로 밥벌이를 하면 좋겠다는 염원을 계속 품었던 것 같다. 흔한 회사원으로 살더라도 가끔은 글쓰기를 잊지 않기를 말이다. 이 땅에서 글쟁이로 밥벌이를 한다는 게 얼마나 팍팍한 일인지 잘 알지만, 그래도 그게 그 친구와 '어울리는 직업'일 듯한 나만의 착각을 아직도 못 버렸다는 뜻이다. 서비스업에 대한 나의 편견도 문제이긴 하다. 공인중개사라면 모름지기 활달한 사교성과 드넓은 대인관계를 갖춘 사람이어야만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헌데 주변의 얘기를 들어보면 공인중개사로서의 성공 여부는 그런 성격적인 부분보다는 정확한 분석력과 기획력에 달려 있단다. 주절주절 수다떨며 어중이떠중이 고객에게 설레발을 치는 것보다는 매물 분석을 잘해서 계약 성공률을 높여야 한다나 뭐라나.

사람이 변하기란 쉽지 않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사실 아직도 그 친구가 부동산사무소에서 화려한 언변으로 부동산 투자나 주택매매를 중개하는 광경이 상상되질 않는다. 하기야 발상을 바꾸면 나처럼 말 많은 거 싫어하는 고객들이 묵묵히 실속있는 매물과 자료로만 승부하는 공인중개사를 반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도... 나 같은 고객이 몇 명이나 되겠느냐고!
재테크라는 말부터 싫어하는 나와 같은 부류라고 생각했던 그 친구가 정 반대 성격의 배우자를 만나 세상물정 모른다고 질책을 받으며 따로 열심히 경제서와 실용서 쌓아둔 채 재테크 공부를 한다고 쑥스럽게 웃을 때만 해도 이런 반전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간만에 얼굴도 볼 겸 개업식에 오라는 친구의 목소리는 확실히 예전과 달리 자신감 넘치고 활기차게 들렸으니, 그의 선택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나 혼자만의 착각일지 모르겠다. 그러니 새로 찍은 공인중개사 명함을 건네는 친구의 모습을 앞두고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은 애써 버려볼 작정이다. 의외로 잘 어울릴지 모르잖아, 라면서. 하지만 축하의 자리를 앞두고 자꾸만 기쁨보다 아쉬움이 샘솟는다. 순전히 내 욕심이고 이기심이란 걸 아는데도 나 원 참. 누가 내 인생에 섣불리 간섭하면 애정의 조언이든 아니든 파르르 떨기부터 하는 인간에겐 영 가당찮은 태도다. 그래서 반성이 필요하다는 의미. 
Posted by 입때
,

서로 바쁨을 핑계로 일년에 한번쯤밖엔 얼굴을 못 보고 사는 친구가 지난번에 만났을 때 내게 말했다.
"너 기억나니? 너희 엄마가 나 결혼할 때 쟁반 선물하신 거. 그거 지금도 열심히 쓰고 있는데 아직도 새것 같아, 꽃무늬도 안 질리고 볼때마다 새롭다. 신기하지? 게다가 요즘 보기 드문 '메이드인코리아'야.... "

15년도 더 된 일이라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신혼부부들이 대개 그러하듯 친구도 여러번 셋집을 옮겨다녔고 심지어 뒤늦은 유학생활을 하는 동안엔 살림살이를 장기 이삿짐 보관소에 맡겨두었다가 귀국 후엔 시댁으로 들어가 아이 낳으면서 분가하는 파란만장한 세월이 지났는데, 그 옛날 '꽃무늬' 쟁반을 잃어버리거나 버리지 않고 친구가 아직도 쓰고 있다니.

그랬다. 요새와 달리 예전엔 엄마들이 딸의 혼수를 미리미리 장만해 바리바리 싸두었다가 시집보내는 걸 즐겨하던 관습이 있었고 울 엄마도 당신 딸이 다른 집 딸들처럼 '때가 되면 가리라' 생각하며 몇가지 혼수를 사두는 우를 범한 적이 있었다. 내 기억으론 반상기와 커피잔 세트, 쟁반 세트, 티스푼 세트, 냄비 세트, 큰 접시 따위였던 것 같다. 나와 의논 절차도 없이 엄마가 마음대로 사들인 혼수의 존재를 나는 짬이 날 때마다 비웃었다. 결혼은 생각도 없는 딸을 위해 무슨 혼수씩이나! 나는 쓸데없는 짓 하지 마시고 어디 되팔 데 있으면 팔거나 남들 줘버리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럴 때마다 나를 째려보던 엄마는 이웃 동네에 살아서 자주 들락거렸던 그 친구가 결혼한다는 소식에 조심스레 나를 떠보았다. "너 진짜로 시집 안 갈 거면, 저거 다 ㅁㅅ이 줄까? 걔 어머니 안계시다면서... 혼수 준비는 혼자서 한다니? 새로 산 선물이 아니라서 기분 나빠할래나 모르겠다만."

소박하게 결혼을 준비하던 친구는 흔쾌히 혼수 구경에 응했고, 마음에 안드는 물건은 반드시 거절하라는 나의 신신당부에 염려 말라고 큰소리를 쳤다. 엄마가 사들인 혼수들은 그때 나도 처음 구경하는 셈이었는데, 촌스러움의 극치일지 모른다는 나의 염려와 달리 다행스럽게도 엄마가 고른 그릇들은 '꽃무늬'가 잔잔해서 대체로 무난하게 예뻤던 것 같다. 사서 바리바리 싸두기만 했던 물건들이 누구에겐가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는 사실에 엄마는 기뻐하는 표정으로 혼수 구입 계기와 사연 따위를 주절주절 늘어놓았고, 착한 친구는 계속 감탄의 말을 내뱉으며 엄마와 장단을 맞춰주었다.

하지만 그날 결국 친구는 쟁반 세트가 든 상자 하나만 들고 우리집을 나섰다. 명목상의 이유는 너무 좋은 물건들이고 엄마가 애써 장만하셨으니 정말로 나 시집보낼 때 혼수로 들려보내는 게 옳다는 것이었다. 친구는 울 엄마한테 이렇게 말했던 듯하다. "제가 다 가지면 안될 것 같아요. 저도 결혼 안할 줄 알았는데 어쩌다 보니 가게 되더라고요. 쟤도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포기하지 마세요. 호호호...." 나는 파르르 떨면서 친구를 째려보았고, 친구를 배웅하며 그릇들이 촌스러워서 니 맘에 안드는 거 맞지 않느냐고 투덜거렸었다.

친구는 사람 일 모르는 거라면서 유행 안타게 생긴 그룻들이니까 나중에 시집 가게 되면 진짜로 가져가라고, 안 가게 되더라도 그냥 집에서 꺼내놓고 쓰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그 골칫덩이 혼수품은 장농 위에 한참이나 붙박이로 있다가 이웃집 막내딸 혼수로 저렴하게 넘기거나 친척들 생일 선물로 쓰였고, 유일하게 남긴 냄비 세트만 하나둘 씩 꺼내 쓰기 시작했는데 십수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비닐도 벗기지 않은 냄비가 두개나 싱크대 수납장에 들어 있다. ^^
헌데 정작 울 엄마는 쟁반 얘기를 물어보니 옛날에 사놓았던 혼수를 ㅁㅅ이라는 친구한테 주기로 했던 사실도, 쟁반만 선물하게 된 사연도 전혀 기억하질 못하신다. 오히려 그 시절에 그 아줌마 참 오지랖도 넓었다면서 민망하단다.
"아무려나 엄마, ㅁㅅ이는 그 쟁반 꽃무늬가 지금 봐도 세련되고 예뻐서 죽을 때까지 쓸 거래. 요즘 흔한 중국산이랑 다르게 튼튼해서 대도 물려 쓰겠대. 그 쟁반 쓸 때마다 '라니 엄마가 주신 쟁반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대. 뿌듯하시겠수?" 

착한 친구는 정말로 별것 아닌 그 쟁반이 인상적이었던지, 나중에 친구들 자식이 장성해서 결혼하게 되면 축의금 대신에 뭔가 뜻깊은 선물을 하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해보자는 이야기까지 했다. 그 친구와 얘기할 땐 그래 그렇겠다, 아무 생각 없이 맞장구를 쳤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못할 노릇이다. 선물 고르기가 얼마나 골치아프고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인데, 늙어서 친구 자식들 결혼선물까지 고민하고 앉았자고!? 그 애들이 퍽이나 반기겠다!

친구와 쟁반과 엄마 이야기는 그저 나만이 간직한 사연으로 족하다. 게다가 어쩌면 친구가 쟁반을 소중히 쓰고 있는 이유가 '메이드인코리아'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만해도 하도 '세계의 공장' 중국 제품이 판을 치고 있는 터라 '메이드인코리아'라고 하면 옷이든 그릇이든 신발이든 새삼 눈여겨 보게 된다. 언제부터 국산 물건이 이렇게 드물게 되었는지 원. 사실 이 글도 메이드인코리아 얘기를 하려고 제목도 그렇게 붙였다가 이야기가 엉뚱하게 전개되는 바람에 제목도 바꾸고 말았다. ㅋㅋ 째뜬 우리집 쟁반은 몇년 전에 내가 죄다 내버리고 새로 개비하는 바람에 말레이지아산 아니면 중국산이다. 그런데 오래 두고 봐도 질리지 않을 그릇에 대한 안목이 부족한 탓인지 벌써 마음에 안든다. 살림에 관심 많은 친구들 말로는 그릇 욕심 내기 시작하면 살림 거덜난다던데, 나야 값비싼 유럽산 명품 식기 같은 데 눈길을 줄 리 없으니 다음엔 혹시 메이드인코리아 쟁반이 있나 한번 찾아봐야겠다.
Posted by 입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