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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2.24 짜증 22
  2. 2008.09.10 혁명의 매력 10
  3. 2008.08.07 불경기 10
  4. 2008.07.23 어렵다 19
  5. 2008.07.11 뒹굴뒹굴 어슬렁 10
  6. 2008.06.30 본전치기 10
  7. 2008.05.27 책구경 15
  8. 2008.03.09 나그네 14
  9. 2008.02.16 주종목 19
  10. 2007.11.12 책이 왔다 9

짜증

투덜일기 2008. 12. 24. 20:17
크리스마스 이브라서 무조건 기분좋게 보낼 수야 없는 일이고 사실 나와는 별 무관한 날이니깐
그냥 평소 까칠한 성격대로 혼자 구시렁거리며 털어버려야겠다.

소소한 짜증의 원인이야 누구에게나 늘 있으며 얼마간 마음 끓이다 잊어버리면 그만이지만
요 몇주일 증폭되는 짜증의 원인은 결국 내가 뿌린 씨앗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단기간에 끝날 것도 아니어서 더욱 속이 곯는다.

첫번째는 지난번에도 자아비판이랄까 제발등 찍기랄까 민망한 고백을 한 적이 있었던 번역건.
4권짜리 시리즈물을 두 권 번역한 뒤 세번째 책의 계약을 앞두고 있었을 때 담당자들이 바뀌면서 트집을 잡혀 이후 계약이 무산되었던 일이 있다. 그  사람들이 제 아무리 예의나 출판개념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사소하든 말든 내가 빌미를 제공하여 일이 불거졌으니 다 내 잘못이라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그들과는 두번다시 상종하지 않으면 그만이고, 앞으론 바쁜 마감에 시달리더라도 번역에 좀 더 신경쓰라는 채찍질로 받아들였으니까.
그것으로 그냥 덮어두고 잊을 수 있으면 좋겠으나 상황이 또 여의치가 않다.
처음 상하 두권으로 냈던 소설을 단권으로 재출간하고 내가 번역한 두번째 시리즈가 출간된 뒤, 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개봉되었으며 출판사에선 영화개봉과 더불어 특별판을 제작 판매하기에 이르렀다.
작년 말에도 몇년 전 내가 우리말로 옮겨 출간된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가 나오긴 했지만 워낙 흥행이 안되는 바람에 곧장 극장에서 내려와 주변에서 아무도 알은체한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 영화는 할리우드에서도 그렇고 한국에서도 꽤나 흥행에 성공한 모양이다. 비수기인 요즘 관객수 백만을 넘어섰다나 어떻다나, 뉴스에서도 다뤄지는 상황이니 뭐.
설상가상, 영화나 드라마가 뜨면 원작도 덩달아 팔리는 법이어서 책도 엄청나게 팔리고 있는 눈치다.
그걸 배 아파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인세계약도 아닌 책이 수십만 부(실제로 수십만 부가 팔렸을 거란 얘기는 결코 아니다!) 팔린들 나한테 더 돌아오는 금전적 이득은 없으니까.
아 그런데, 속 모르는 사람들이 자꾸만 인사랍시고 그 책과 영화에 대해서 알은체를 하며 축하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게 짜증스럽다는 얘기다!
별 문제 없었던 책이라면, 그런 연락을 받더라도 후후 낮게 웃으며 "많이 팔리고 장사 잘 되도 저랑은 상관 없는 거 아시잖아요"라고 한 마디 대꾸하면 그뿐이겠는데 이번 책은 상황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잖아!
더욱이 고약한 출판사에서는 재출간된 첫권과 나중에 출간된 2권의 증정본도 보내주지 않았다. 2권의 경우 계약철회 통보와 출간일정이 얽히면서 역자교정도 없었고 심지어 역자후기도 싣지 않은 채 출간된 상태.
당시에 기가 막히고 열이 받쳤지만, 내 의무는 다하려고 역자후기와 교정 문제를 문의했지만 저들은 내 이메일에 아무런 회신도 하지 않았다.
그런 예의없는 인간들과 더는 상종하고 싶지가 않아서 나중에 서점에 나온 책을 보고도 증정본을 요구하는 대신 나는 씁쓸하게 한권씩 주문을 해서 책꽂이에 꽂아두었으며, 완전히 마음을 비웠다는 의미로 책과 함께 받은 휴대폰 액정클리너도 달고 다녔었다.
그런데, 이번주 내내 몇번이나 영화흥행과 더불어 예약판매까지 하고 있는 세번째 시리즈(다른 사람이 번역한!) 출간 때문에 덩달아 나한테 공연히 축하전화 비슷한 것이 걸려오니 그야말로 짜증스럽다. 출판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책 잘 팔린다고 옮긴이가 떼돈 버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는 걸 잘 알 텐데 왜들 그러는지 원!!
(제목 언급을 교묘히 회피하긴 했지만 이쯤하면 내 정체가 다 드러난 걸까? 아닐까? 에라 모르겠다.)

국내외 흥행에 힘입어 이미 할리우드에선 2번째 시리즈 영화 제작을 결정했다고 하니, 돌아가는 꼬락서니로 봐서는 다음 영화개봉 때도 나 역시 덩달아 일부인들의 입에 오르내릴 가능성이 높아졌다.
문제는 또 있다. 단권으로 출간된 1, 2권 원고를 아무래도 출판사측에서 나의 동의 없이 문장에 손을 댄 모양인데, 대체 누구의 손을 거쳤는지 모르겠으나 나의 번역문장이 훼손되었을 확률이 더 높고 그에 대한 욕도 내가 먹어야한다는 사실이다.
출판사에서 애당초 문장 스타일로 꼬투리를 잡아 옮긴이를 <잘랐>으니 지들이 고쳐놓은 문장에 대한 비난 역시 내 탓으로 돌릴 거라 생각하면 심장이 벌렁벌렁 분노가 치민다. 으으으.

두번째 짜증의 원인 역시 일 때문이다.
지금은 거의 중견 출판사들과 일을 하지만 초창기엔 나도 당연히 작은 출판사에서 번역을 시작했고 경력 없는 번역자를 키워주다시피한 곳에 대한 고마운 마음은 지금도 그대로다. 오랜 출판불황을 겪으며 안타깝게도 그 출판사는 몇년 전 부도를 맞았고 사업등록은 유지하고 있지만 사장님 혼자 고군분투하며 재기를 꿈꾸고 있다. 그 회사에서 알게 된 편집자며 기획자, 번역자들은 지금까지도 친한 친구로 남아 있기 때문에 가끔 모이면 그 회사와 사장님 걱정을 잊지 않았고, 가능하다면 조금씩 일을 거들어줄 수 있기를 바랐다. 시간이 되는 대로 번역이든 편집이든 디자인이든 도와드리자는 식으로.
그러다 나는 정말로 몇년 전 운좋게 작업스케줄이 비는 틈에 그 출판사를 위해 얇은 책 한권을 번역해주었다. 언제 출간될지 기약도 없는 일이었고, 원고료는 혹시 책이 대박나면 주세요, 라고 흔쾌히 제안할 정도로 처음엔 순수하고 기꺼운 마음이었다.
그런데... 몇년이 지난 지금 새삼 그 일의 뒤치다꺼리를 짬짬이 해야하는 상황에 놓이니 왜 이리 짜증이 날까. 그때도 긴급하게 출간일정을 잡겠다 하여 몇날몇일밤을 홀딱 지새워 번역을 마치고, 힘겹게 역자후기까지 써서 보냈는데 몇년이나 소식이 없었던 전적이 있기 때문인지, 더욱 미적지근한 마음이 드는 것 같다.
몇년 새 간사하게 변해버린 내 마음도 부끄럽고 잔뜩 밀린 다른 일은 어떻게 하나 한숨이 나오면서 과연 얼마나 걸릴지 모를 <공짜 일>의 순서를 어떻게 잡아야할지 갈피가 안잡히고, 이 모든 상황이 그저 짜증스럽기만 하다. 

이달들어 걸핏하면 "나 요즘 슬럼프인가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좋아하는 일이고 재미있게 평생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이어서 선택했는데 왜 요샌 만사가 다 시큰둥하고 열정이 일지 않을까.
결국 가장 큰 짜증은 바로 나 자신에 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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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매력

책보따리 2008. 9. 10. 23:12
세계사에 몹시 취약한 내가 요즘 어쩔 수 없이 러시아 혁명사를 공부하고 있다.
1년 넘게 미루고 미뤄두었던, 볼셰비키 혁명부터 세계 1차대전에 이르는 대하소설을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상은 했지만 작업은 멀미나게 힘들고 온종일 용을 써도 진도는 눈곱만큼씩 나가는 중이라 앞이 캄캄하다.
그런데 나 같은 무식쟁이에게도 러시아 혁명의 역사는 몹시 매력적이다.
물론 비러시아인의 비판적인 사관으로 쓰인 책과 트로츠키 같은 혁명의 주동 인물이 기록한 책은 느낌이 전혀 다르고, 양쪽의 견해를 모두 받아들인다 해도 순수한 의미의 인민 혁명은 결국 불가능하다는 허무한 결론에 도달하기 십상이지만 그래도 혁명은 (유혈폭력을 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유혹적인 변화의 시도인가.

혁명을 꿈꾸었던 수많은 역사적 인물과 실패를 맛본 인간들의 기록을 들여다보며 갑자기 혁명가를 만나고 싶다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온종일 했다.
세상은 늘 혁명가가 필요한 냄새나는 부패를 떠안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결국엔 혁명가도 늘 부패하거나 권력에 숙청당하는 역사가 반복되긴 했지만
퇴폐 낭만주의에 빠지거나 말거나, 아무리 봐도 '혁명'은 참 멋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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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기

하나마나 푸념 2008. 8. 7. 17:35

피부로 마구 실감하는 건 아니지만 워낙 심한 불경기라 오히려 IMF 차관을 들여와야 했던 외환위기 때보다
더욱 살기가 어렵다고 난리다. 언론에서 괜히 부추기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조그맣게 장사나 사업을 하는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말이 맞는 것도 같다. 일을 하기는 하는데 좀처럼 이윤을 남길 수가 없다니 말이다.

불경기엔 당연히 사람들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지갑을 닫으니 소비는 위축되고 경기는 더욱 악화되는 악순환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위정자들이 내놓는 '경기부양책'이라는 것들이 과연 힘을 발휘하긴 하는지도 사실 나는 관심이 없다. 과거 외환위기 때 국민들이 나라를 살리겠다며 금모으기 행사 같은 걸 벌이기도 했지만, 그 때 돈을 번 건 이스라엘 금업자라던가. 나중에 우리나라에선 웃돈을 주어가며 다시 금을 사들여야했다고 들었다. 뭐든 떠들썩하고 요란하게 벌이는 생색내기엔 언제나 구린 구석이 감추어져 있고, 이면엔 겉보기와 다른 고도의 계략이 존재하는 듯하다.

어쨌거나 불경기에 사람들이 줄이는 비용엔 문화비가 포함되니, 학습지와 아동물을 제외한 출판물은 불경기에 속수무책으로 타격을 받는다. 안 그래도 워낙 망하는 출판사도 많고 새로  생겨나는 출판사도 많은 곳이 출판계이긴 하지만 조만간 또 수많은 소형 출판사들이 떼거지로 도산했다는 소식이 들릴까봐 걱정이다.
몇달 전부터 프리랜서로 출판계에 종사하는 지인들은 재정상태가 어려워진 출판사가 많아 결제가 미뤄지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귀띔을 해주었었다. 꽤 탄탄한 규모의 출판사에서도 편집료나 번역료 지불을 마냥 끌고 있다나.

과거 뒤통수를 치듯 결제문제로 몇몇 출판사와 골머리를 썪은 뒤로는 사실 나도 부끄럽지만 <좋은 책>을 번역하겠다는 욕심보다 <안정적인 결제조건>을 우선으로 계약을 추진하는 게 사실이다. 사장님과 편집자까지 속속들이 친하고 애정을 갖고 있어도 회사가 어려워져 문을 닫게 되거나 몇년씩 지불을 끌면 자선사업 하는 셈 치고 번역료를 포기하지 않는 한 서로 민망한 관계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정말로 어떻게든 돕고 싶은 마음으로 무상 번역을 해준 출판사도 있기는 하지만, 가뜩이나 부정기적이고 불안정한 프리랜서의 수입체계에 자선사업을 자주 할 수야 없으니 조직을 떠나 좋아하는 일을 하네 마네 평생 자유를 추구하네 마네 그럴듯한 겉모습을 자랑하긴 해도 결코 재정적인 관계를 소홀히 할 순 없다.

내 나름대로 약삭빠르게 운신했던 덕분에 최근 몇년 사이엔 번역료를 망연하게 <떼인> 경험이 없긴 한데
작년부터 번역료 지불여부와 상관없이 무작정 출간이 마냥 보류, 지연되는 사태가 더러 생기더니
급기야 출간을 아예 포기하는 책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굳이 제작비를 들여 출간을 할만큼 책에 대한 자신이 없다는 이야기인데, 작년까지 우후죽순으로 임프린트를 늘려 이름 다른 자회사를 대거 만들어낸 출판사들일 수록 그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어차피 휴짓조각으로 변할 상업적인 책이니, 아예 만들지 않는 것이 인쇄비며 광고비며 인건비며 크게 절약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생각은 들지만 실컷 공들여 번역해놓고 엎어지는 책들이 늘어나는 건 번역자로서 몹시 입맛이 쓰다. 으휴.

올들어 벌써 두 번째로 <죄송하지만 회사 여건상 책을 출간을 하지 않게 되어 송구하다> 내용으로 출판사가 보낸 이메일을 열어보니 새삼 불경기는 불경기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막연한 위기감과 불안감에도 긴장할 줄 모르고 지속되는 일 거부감은 또 어쩐 일인지 원.
오늘은 맥이 빠졌다는 핑계로 또 슬며시 작업할 책을 저만치 밀어놓았다.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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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다

투덜일기 2008. 7. 23. 23:51

또 시작됐다.
나의 옮긴이의 말 울렁증.
일주일 내내 고민해도 가닥이 잡히질 않아 며칠째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옛날에 읽으며 주옥같은 문장에 반해 따로 챙겨두었던 책도 읽고 최근에 사들여 쌓아두고만 있던 책들도 읽으며, 뭔가 그럴듯한 화두가 떠오르길 빈다기보다는 글솜씨 뛰어난 작가들의 <글발>이 어떻게든 전염병처럼 내게 옮겨오길 빌었다.
그런데 별 소용이 없다.
그나마 밤이 내리면 감상의 과잉에 허덕이게 될까 싶어 일부러 연일 진한 커피를 들이키며 밤의 마법을 기대했건만 눈주변만 시커매질 뿐 그마저 효험이 없다.
오늘은 급기야 술의 힘을 빌어볼까 캔 맥주를 땄다.

번역가도 작가랍시고 꼬박꼬박 나를 선생님이라 추어올리는 이들은 내 이런 부끄러운 고통을 알까.
당연하겠지만 우리말로 옮기면서 애정이 많이 생긴 책일수록 역자후기 쓰는 게 어렵다.
번역하며 내가 즐긴 만큼 그 매력과 묘미를 독자들도 알아주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 마음을 몇 문단의 진솔한 글로 전할 재주가 내게는 참 멀기만 하다.

종일 마셔댄 카페인에 맥주의 알코올 기운이 더해져 알딸딸 뇌가 뜨거워지니 기분은 아삼삼 좋기만 한데,
종일 열어둔 한글 문서엔 좀처럼 글자수가 늘어나질 않고
애꿎은 블로그만 들락거리고 있다.

전에도 술기운에 옮긴이의 말을 쓴 적이 있던가 없던가.
오늘은 다행히도 밤의 마법에 촉촉한 비의 효과까지 겹쳐지니 뭔가 결실이 있으려나 어쩌려나.
으휴.
새삼 느끼는 글쓰기의 어려움.
정말이지 난 아직 멀었다.
수많은 작가들의 글 재주에 불타는 질투심을 느끼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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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일짜리 회복 프로젝트 풀가동중.
어제의 목표는 무작정 <뒹굴뒹굴하기>였다.
열대야 때문에 모자랐던 잠도 보충할 겸 오후 내내 뒹굴뒹굴 낮잠도 자다가 책도 보다가 TV 리모컨 놀이도 하다가 보니, 컴퓨터 앞엔 잘 앉지도 않게 되고 시끄러운 세상과는 담을 쌓는 기분이었다.
밤중에 이리저리 리모컨을 돌리다 맥주선전에 시선이 팍 꽂혀선, 냉장고에 몇달동안 방치되어 있던 코로나도 한 병 마셔주었다. 마실땐 시원하고 좋았는데, 음주를 너무 멀리했던 탓인지 30분 뒤부턴 두통에 시달렸지만... 지끈거리는 두통도 기꺼이 즐겨줄 생각이 들 만큼 마음이 기특하게도 너그러워졌음을 느꼈다.
휘휘 돌아가는 선풍기 앞에서 한 여름 더위를 식힐 책이 뭐가 있을까 고민해보니
한옥 구경만한 게 없더라.
나의 한옥열망을 오롯이 담고 있는 소중한 책 세권. <한옥에 살어리랏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한옥>, <한옥이 돌아왔다>를 방바닥에 펼쳐놓고, 마치 한옥 대청마루에 누워있는 양 최면을 걸며 사진을 들여다보며 차게 식힌 수박을 먹는 기분을 어디에다 비할까!
아아아.. 한옥에 살고파라. ㅠ.ㅠ

오늘의 목표는 <어슬렁거리기>.
밀린 숙제 하듯 서점도 둘러봤고, 지인과 함께 맛있는 점심도 먹었고, 오래오래 별렀던 머리도 잘랐다!
꿈의 미용실을 찾아 헤매는 나의 탐색은 아직도 진행중이기에 오늘은 불쑥 생각난 곳을 찾아갔었는데
머리 손질이며, 서비스와 퍼머약의 질은 마음에 들지만, 값이 너무 비쌌다. -_-;;
그리고 헤어디자이너와 조수가 건물 입구까지(미용실은 3층인데 엘리베이터도 없었다) 내려와 배웅을 해주는 엄청 부담스러운 광경을 연출하는 바람에 마지막에 점수가 몹시 깎였다. 혹시 팁을 달라는 것인가 고민스러웠지만 퍼머값이 너무 비싸서 지갑을 다시 꺼내야할 것인가 말것인가 30초쯤 고민하다 그냥 얼굴에 철판 깔고 버텼다. ㅜ.ㅡ;; 팁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나 같은 인간에게, 가끔가다 맞닥뜨리는 이런 상황은 정말이지 곤혹스럽다. 그래서 내가 더 미용실 가기를 꺼려하는지도 모르겠다.
암튼 <커트+영양+퍼머+트리트먼트>를 모두 해주는 여름 이벤트가 있다고 꼬드기길래, 거의 10개월간 버려둔 채 내가 손수 앞머리만 가위질했던 내 머리칼에 대한 보상과 예우의 차원에서 그러마고 동의는 했지만, 아마도 역사상 가장 비싼 머리손질비용이 되지 않겠나 싶다.
과연 거길 또 가게 될지... 그건 샴푸 후 내가 손질한 뒤의 머리 꼬라지에 달려있을 듯.

아 참, 그리고 어슬렁어슬렁 길거리 가게를 기웃거리다,  길거리 화원에서 꽃도 한 다발 샀다.
언제부터 꽃 사기가 나에게 그리 큰 호사가 되었는지 원, 서글프기 짝이 없지만 가끔 길바닥 양동이에 꽂힌 아이들을 한다발 달래서 들고 들어오는 기분은, 열 달 만에 머리 손질해서 만끽한 기쁨과 견주어 조금도 쳐지지 않는다. 비용대비 효과로 따지면 무려 50배가 넘는데!!
그렇다면 꽃이 일주일 간다는 전제 하에, 머리 한번 할 돈이면 오늘 사온 꽃다발 정도의 소박한 꽃을 일년 내내 꽂을 수 있다는 얘기다. +_+
게을러서 머리 손질도 잘 안하러 다니고, 그렇다고 꽃도 잘 안 사다 꽂는 인간이 되어버린 나는 뭐냐. 으휴.

역시 노는 건 즐겁다.
스스로를 호되게 혹사시키고 난 뒤끝의 휴식이라 더욱 뿌듯해서, 다음주부턴 다시 슬슬 워밍업을 해야한다고 마음 먹었는데 자꾸 일주일만 더 놀고 싶은 유혹이 생긴다. *_*
이러다 또 다음 일 스케줄에 차질이 생기는 거라니깐!
하여간 이번주엔 의도적으로 절대로 단 한자도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고 있는데 자꾸만 전화가 오고 책들이 날아오고 있다. -_-;;
작년에 게으름 좀 덜 부렸으면 푹푹 찌는 여름 한 달 완전히 땡땡땡 놀 여유도 있었을 텐데, 양치기 소녀 노릇도 유분수이니 배째라 나동그라질 수도 없는 일이고 담달에 헐떡거리지 않을 정도만 쉬엄쉬엄 일해야지.

에효.. 회복주간이 이제 겨우 이틀 남았다니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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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전치기

2008. 6. 30.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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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구경

책보따리 2008. 5. 27. 16:13
언뜻 떠오른 글의 제목으로 <난산>이라고 적으려다가 말았다. 가끔 자기 책을 자식으로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책 한권 나오는 과정에 어찌 감히 생명의 신비와 어미와 자식 간의 오묘한 공감대까지 끌어다 붙일 수 있겠나 싶어서.
어쨌거나 <난산>이라는 말이 떠올랐다는 얘기는 요즘 내가 옮긴 책구경 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 원래 출판이라는 것이 시의적절한 것 같아 기획했다가도 교묘한 <타이밍>을 놓치면 아예 통째로 엎어지기도 하고, 시리즈로 기획했다가 초반에 생각만큼 판매가 되지 않으면 뒤에 만들려던 책들은 다 준비해 놓고도 마냥 썩히기 일쑤이며, 저자나 번역자가 속을 썩이며 원고를 넘기지 않아 질질 출간이 지연되는 예도 허다하다. 물론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출간이 미뤄지거나 영업전략상 출판 순서가 뒤바뀌는 때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번역자 입장에서 제 아무리 성실하고 부지런히, 꾸준하게 번역을 해도 어떤 해엔 책이 가뭄에 콩나듯 두어 권 나오다 말더니 그 다음해엔 한꺼번에 여기저기 출판사에서 마구 쏟아져 나와 한달에 한꺼번에 세권이나 신간코너에 내 이름이 박힌 책이 깔릴 때도 있었다.

작년엔 개정판으로 다시 나온 2권 말고 새로 작업한 번역서는 겨우 2권이 출간되었는데, 개인적으로 사정이 있어 하반기엔 일을 거의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가 이번에 세금정산 때문에 작업 스케줄을 확인하니 놀랍게도 2007년 1년 동안 번역을 완성해 넘긴 원고가 5권이나 되었다. 개인적으로 생계유지를 위한 1년 번역 목표량을 6권으로 잡고 있기 때문에 5권이면 얼추 목표를 달성했다는 뜻이다.
작년에 출간된 2권 가운데 하나는 그나마도 재작년에 작업한 책이었으니, 작년에 일해서 제대로 빛을 본 책은 달랑 1권. 4권의 책은 세상구경을 할 날이 2008년으로 넘어갔다는 얘기인데, 연초부터<곧> 출간할 계획이라던 두어 권의 책들은 차일피일 편집이 미뤄져 얼마 전 들으니 6월에나 나온다는 것 같다(그 마저도 확실하지 않다. 실제로 나와야 나오는 거지 뭐. -_-;;)

결론은 5월이 다 가도록 2008년도엔 버젓이 옮긴이로 내 이름을 달고 출간된 책이 한 권도 없었다는 점.

기획이 아예 엎어져 원고가 사장되는 경우(심하면 원고료를 홀라당 떼먹히기도 한다 ㅠ.ㅠ)도 겪어 보았기에, 일단 원고를 넘기고 번역료까지 챙겨받고 나면 책이 나오든 말든 내 소관이 아니라 여기며 모른체 하고 싶지만 사람 마음이 또 그렇지가 않다. 편집자의 교정과 표지 디자이너의 정성스런 손길을 거쳐 떡하니 책으로 인쇄되어 세상에 선을 보여야 그간의 모든 노고와 정성이 제대로 보답을 받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들이는 품과 에너지와 정성을 감안할 때, 대한민국 출판계의 번역료 수준은 그리 후한 게 아니므로 나처럼 부끄러운 공명심으로 그 모자란 성취감을 채우려는 인간은 해마다 내 이름을 달고 차곡차곡 늘어나는 번역서의 권수가 꽤나 중요하다. 번역하는 사람들이 더러 모이는 자리가 생기면 우리나라도 얼른 일본처럼 출판계가 발전하여 매절 번역료가 원고지 장당 최소 만원은 돼야 한다고 별 희망도 없는 이야기로 핏대를 세우기도 하는데, 정말로 그런 날이 오지 않는 한 생계를 위해서라도 <질보다 양>으로 승부하려는 나 같은 치졸한 번역가의 욕심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을 것 같다. ㅎㅎ

어쨌거나 새해 들어서도 내내 작업은 늘어지기만 하여, 책구경 하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로 원고 넘기기도 죽도록 힘들어 허덕이고만 있었는데 기쁜 소식이 날아들었다. 무려 4년전에 한두 꼭지 번역에 참여했던 문학선집이 드디어 출간된다는 것. 교수님 소개로 얼떨결에 맡는 바람에 당연히 주최측도 아니었고, 그간 통 소식이 없어서 완전히 까맣게 잊고 있었기 때문에 책이 출간된다는 것만으로도 기쁜데, 얼마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번역료와 해설료도 지급되는 모양이었다. 당연한 것인데도 어찌나 고마운지 내심 몹시 뿌듯해 하며 이제나 저제나 책구경 하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었더니 오늘 증정본이 배달되었다. ^^;;

신비주의 블로그를 표방하는 터라 이곳에 본격적으로 책자랑을 할 날은 요원하리라 생각하지만, 이 책은 공역이니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리도 없고 ^^ 문학선집이라 작가들도 십여 명이어서 옮긴이들 이름은 아예 표지에서 구경도 할 수가 없으니 막 자랑하고 싶어졌다. 일반 서점에서도 판매가 될 책인지 어쩐지도 잘은 모르겠으나 도서관에나 보급될 확률이 높은 듯하고, 엮은이의 이름도 하도 거창하여 공동 번역자 이름으로 검색될 가능성도 별로 없을 듯하니 더더욱 금상첨화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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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투덜일기 2008. 3. 9. 17:24
나그네, 참 매력적인 말이다.
사주에 역마'살'이 끼었다는 말을 굳이 듣지 않더라도 떠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물론 집 떠나면 고생이며 제 아무리 멋진 휴양지를 가더라도 편하기로 따지자면 집에서 취하는 휴식이 제일 푸근하고 달콤함을 알지만, 여행이 주는 묘한 긴장감과 낯선 곳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막막함,
그리고 떠난 곳에서만 실감할 수 있는, 떠나온 곳에 대한 뭔지 모를 막연한 그리움과 깊어지는 상념 같은 것 때문에라도 나는 늘 여행을 동경하며 나그네의 삶을 꿈꾼다.
돌아와선, "역시 집이 최고야"라고 중얼거리더라도 떠나지 않은 자라면 그 기분을 어찌 알까.
(키드님의 블로그 대문에 그려진 루나파크 그림을 보며, 난 늘 그걸 떠나고 싶은 자의 반어법으로 읽는다.^^ 물론 안 그런 이들도 있겠지만..)

며칠 전 TV 채널을 돌리다 책소개 프로그램에서 또 다시 <산티아고 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야고보 길>이라고도 불리는 유서 깊은 그 순례의 길은 이미 다른 다큐멘터리로도 본 적이 있었다.
2천년의 세월 속에서도 그리 변하지 않은 유럽의 좁은 도로를 수십일간 걸어서 여행하는 나그네들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솔깃하고 동시에 의아하다.
프로그램 패널로 나온 이들이 지적하기도 했지만 도보로 실크로드를 완주했다든지 자전거로 세계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누구나'가 아닌 '특별한' 사람들임에 틀림없기에 범인들의 우러름을 받을만 하다.
하지만 프랑스 어느 도시에서 스페인의 어느 도시까지 '비교적' 짧은 수백킬로미터의 길을
성자의 자취 따라 걷는 순례의 여정은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나'를 찾으려는 사람들 '누구나' 시도해볼 만한 과업이라는 데 방점이 찍히는 듯하다.
그래서 소개된 책 제목도(출판인들은 참 제목도 잘 붙이지!) <그 길에서 나를 만나다>였다.

책의 지은이는 꽤나 유명한 독일의 코미디언 이라는 것 같은데(패널의 말을 인용하자면 '유재석' 정도 되는 만능 엔터테이너라나) 책을 읽어보지 않아 잘은 모르지만, 갑자기 모든 것을 떨치고 산티아고 길로 떠났고
처음엔 그저 불평에 휩싸여 후회와 포기 사이를 오갔지만 결국 순례의 길을 마쳐 순례증서(순례 여정 곳곳에 있는 지정 숙소에서 도장을 모두 받아야만 순례 확인증서 같은 것을 받게 된다)를 받았으며
자신의 삶을 깊이 성찰하는 뜻깊은 기회를 누렸음을 구구절절 기록했단다.

물론 고생스러운 여행은 질색팔색하는 나로선 <산티아고 길>의 긴 여정을 애초부터 시도해볼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나처럼 걷는 걸 싫어하는 인간이 무거운 배낭을 매고 수십일 간 걷는 여행이라니!
지인들 가운데선 팔팔한 대학생 때도 아니고 서른 넘어 국토순례도보 여행을 떠났던 이도 있기는 하지만
그들에게 "장하긴 하다만, 나는 누가 돈주고 등 떠밀어도 절대 안간다, 미쳤니?"라고 했던 사람이 바로 나다.

그럼에도...
자동차 소음에 시달리지 않으면서 한적한 흙길을 유유히 걸으며(이때 반드시 무거운 짐은 없어야 한다 -_-;;)
길가에 핀 민들레나 들꽃도 구경하고 가끔 비라도 만나면 민가에 들러 비를 긋다 두런두런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길을 떠나는 나그네로서의 내 모습을 상상하면
어느새 엉덩이에 슬슬 바람이 들고 날개라도 돋치려는 듯 어깻죽지가 간질간질 하여
당장이라도 떠나지 않으면 막 숨이 막힐 것 같다. +_+

물론 현실은 언제나 묵직하게 나를 다시 주저앉힌다.
떠나고 싶어서 여행기를 찾아 읽는 이들도 있다는데
내 경우 여행지를 담은 책이나 여행기를 읽거나, 여행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는 기회를 애써 피하는 이유는
떠나고픈 나의 나그네 본능을 잠재우는 것이 퍽이나 어렵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족쇄처럼 올해 달력을 채우고 있는 수많은 마감일과 돌봐야 할 가족을
생각하면 유유자적한 나그네의 꿈은 여전히 사치다(어떻게 보면 핑계일 수도 있겠지만).
물론 스스로 자초한 게으름의 결과 탓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1년 스케줄러를 휙휙 넘기다 한숨을 쉬며
다시 덮고 나니 서글프다.
 
봄바람은 살랑살랑 불고 더불어 나그네가 되고픈 욕망도 부풀어 오르는데 이걸 어쩌나.
이번엔 그냥 관심목록에 담아둔 책이라도 읽으며 마음을 달랠 수 있을 것이라고 자기최면을 걸어볼까
어쩔까 블로그와 서점 사이트만 들락날락하고 있는 일요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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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종목

책보따리 2008. 2. 16. 01:56
어느 분야든 전문성을 갖춘 이들만이 각광을 받는 세상이다 보니
'번역가'라는 이름에도 언제부터인가 '전문'이라는 말이 붙었다.
'전문번역가'라는 말은 그러니까 가끔 전천후 아르바이트나 부업으로 번역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번역을 본업으로 삼는 사람이라는 뜻일 게다.
아 참, 번역을 전문으로 하여 생계를 잇는 사람들 중엔 번역가 말고 '번역사'도 있다. ^^
번역사는 출판계 번역이 아니라 주로 계약서와 매뉴얼 등 서류 번역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을 칭한다는 것이
그쪽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친구의 설명인데, 내가 보기엔 의사, 검사, 판사, 세무사 따위와 같은 계급으로
상승하기 위해 (또는 동등한 권위를 지닌 직업으로 인정받기 위해) '사'라는 접미어를 붙인 직업명이거나
혹시라도 번역가와 번역사 집단 어느 한 쪽에서 서로 동등하게 취급받기를 꺼려 차별화한 이름인 것 같아서
좀 우습다. (친구야 미안^^)  

아무튼 누가 제일 먼저 '전문번역가'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내 직업을 지칭하는 이 말이 참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전문'을 떼어버리고 그냥 '번역가'만으로도 얼마든지 '외서를 우리말로 옮기는 것을 생업으로 삼은 이'라는
뜻이 충분이 전달되지 않는가 말이다.
사실 내가 보기엔 '번역가'라는 말보다는 '옮긴이'가 훨씬 더 정겨운데, 옮긴이라는 말은 책에 맨 뒤에 인쇄되는 책만든 사람들의 목록과 책소개 글에나 사용될 뿐 직업명으로 불리기엔 분명 어감상 모자람이 있다.
그렇다고 빈대나 벼룩, 이를 연상시키는 '옮기는 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

물론 훌륭한 번역가들 가운데는 확실히 자신만의 확고한 전문영역을 갖추고 그 분야에만 매진하는 분들이
있으니, 그분들께는 '전문 번역가'라는 말이 퍽 잘 어울리기도 한다.
환경 관련 서적만 번역한다든지, 과학 서적을 전문으로 옮기기 때문에 출판인들도 독자들도
그 사람의 번역이라면 선뜻 믿게 되는 객관적인 신뢰를 쌓은 분들이다.
'환경 전문 번역가'라든지 '과학 전문 번역가', '추리소설 전문 번역가'로 번듯하게 소개될 수 있는
(책 한 권 달랑 번역한 사람에게도 아무렇게나 뭉뚱그려 너그럽게 붙여주는 '전문번역가'--사이에 띄어쓰기 없음--와는 다르다) 그야말로 '주종목'이 확실한 번역가들이라고 하겠다.

가끔 내게도 주종목을 묻는 출판인들이 있다.
'어떤 분야를 전문적으로 번역하느냐, 또는 어떤 분야의 일을 가장 흥미로워하느냐'는 것이 그들의 질문이다.
다행히도 이미 출간된 책들의 성향을 알고 있거나 이미 여러 번 작업을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과
주로 일을 하기 때문에, "저는 주종목이랄 게 없답니다"라는 민망한 대답을 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물론 초창기엔 주종목이고 자시고 따질 것 없이 의뢰받는 일은 무조건 하겠다고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고(처음부터 소신있게 전문 분야를 개척하시는 분들도 당연히 계시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그렇다는 자기변명이다), 번역으로 꽤 자리를 잡은 사람이라 해도 일이 뜸할 땐 원숭이 줄타기 법칙의 본능에 따라 가끔은 하기 싫은 일(내 경우, 책마다 그 나물에 그 밥 타령인 자기계발서 류와 경제, 경영, 처세서!)도 질끈 눈감고 해내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느 정도 책을 고를 수 있게 된 입장이 된 뒤에도
나는 '주종목'이라고 내세울 수 있는 한 분야(또는 몇몇 분야)를 구축하고 그에 관련된 책만을 주야장천 번역하며 흥미로워할 자신도, 인내심도 없는 '얄팍한' 인간임을 깨달았다.
위에 언급한, 내가 싫어하는 분야의 책이 아닌 한 모든 책은 읽고 옮기기에 흥미로웠던 반면, 비슷한 책을 연이어 옮기다 보면 아무리 재미있는 책도 지루해져 소신과 영혼이 있는 번역가의 작업이 아니라 번역기계가 되어 무의식적으로 자판을 치고 있거나, 막무가내로 일하기가 죽도록 싫어지는 단계에 이른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묘사가 뛰어난 소설을 번역할 때 문장을 매만지는 과정에서 쾌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지만
원서 5백, 6백 페이지가 넘어 우리말로는 1, 2권으로 출간되어야 할 장편소설에 심혈을 기울이고 나서
곧이어 또 그 같은 소설을 작업하려면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럴 땐 좀 더 건조하고 진이 덜 빠지는 교양과학서라든지 인문서 같은 비소설로 눈길을 돌려
그간 한쪽으로만 지친 뇌를 환기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개인적인 무지 탓에 기본 자료조사와 두어줄 건너 한 번씩 정보 검색에 진땀을 흘려야하는
인문서나 과학서도 많지만 일도 하면서 뭔가를 끊임없이 배우는 그 묘미는 확실히 문학작품의 문체와 씨름할 때와 다르다. ^^
그렇기 때문에 내 경우 일을 계약할 땐 일부러 소설과 비소설, 무거운 책과 '말랑'한 책을 적절하게 시기적으로
배분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어느 책이든 번역은 모두 '골빠지는 작업'임엔 틀림없지만 그래도 소모되는 에너지가 조금씩 다른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독자로서, 그리고 동시에 옮긴이로서 섭렵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 번역가가 갖는 특권인 것 같다.

형편이 이러니 혹자들이 바라는 대로 주종목을 키워 명실상부한 '전문' 번역가가 되는 것은
내게 매우 요원한 일이다.
그래서 내게 주종목을 묻는 출판인들에게 나는 얼굴에 한자락 철판을 처억~ 깔고 이렇게 변명한다.
"제가 워낙 싫증을 잘 내서 한 분야만 줄곧 작업하는 건 괴로워하거든요.
게다가 요즘 출판사도 모두 '종합출판'을 목표로 하고 있으니 저도 '종합 번역인'으로 살려구요." -_-;;

사실 회사원 시절 계약서와 매뉴얼, 온갖 서류 번역이 멀미 나게 싫어 '진짜' 번역을 해보겠다고
야무지게 나섰던 초창기엔 번역가로서의 내 주종목이 어린시절 일어판 중역으로 읽었던 수많은 고전작품과
셰익스피어 희곡 같은 이른바 '정전'이 될 것이라 거침없이 믿었음을 이참에 고백하고 넘어가야겠다. ㅋㅋ
하지만 어설프게나마 대학원에서 영문학계의 판세를 들여다보니
대형 출판사에서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번역으로 야심차게 기획 출간하는 고전들의 번역을
대개 진짜 전문가인 '교수들'에게 맡기는 건 너무도 당연하다(물론 해당 교수들이 정말로 손수 번역을 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섣불리 고전작품이나 영문학 교과서들을 번역했다가 고매하신 박사님들이 구구절절 오역이니 아니니 따지고 나서면 어쩌란 말인가!! *_*
하물며 영문학 교수가 번역한 문학작품도 오역 연구 논문이 발표되는 마당인데?

욕심을 부려 내 평생 영문학 정전 가운데 몇 권쯤을 번역하고 오역의 지탄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지금 같아선 당장 내게 셰익스피어나 제인 오스틴, 찰스 디킨스 같은 작품 번역의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선뜻 나서기가 꺼려질 것 같다.
아니, 실제로도 꽤 야심찬 기획으로 영문학 전공 번역가를 대거 찾는다는 모 출판사의  의견타진을 받고
심히 고민중이다. 밀려 있는 일도 일이려니와, 일년 내내 그렇게 피말리는 일만 하고 사는 건 나 같은 얄팍한 인간에게 보나마나 무리임을 왜 모르랴.
역시 난 별다른 주종목 없이 그저 잡다하고 어수선한 번역서 약력 가운데
보석처럼 소중하고 뜻깊은 몇 권의 책이라도 간간히 박혀 있으면 흡족할 작은 그릇인 모양이다.



어쨌거나 이번에 나올 책에도 출신학교와 옮긴 책 목록 밖에 없는 알량한 약력엔
부디 민망한 '전문번역가'라는 말 대신 '이러이러한 책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을 하고 있다'는
구절이 들어가면 참 좋겠으나, 출판사의 성격상 내 바람은 무시될 확률이 대략 8할 이상이다.
차라리 '전문' 대신 '종합'이라는 말을 넣어달라고 하면 미친 사람 취급하겠지?
으음..
주종목도 없는 주제에 쉰소리는 관두고 나는 그냥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것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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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왔다

책보따리 2007. 11. 12. 21:04
언제 다 읽을 것인지 기약은 없지만
주문할 땐 화요일 도착 예정이라더니 하루 일찍 도착한 택배 상자를 열어 책들을 쓰다듬으며
일단 탐서 욕망 한 겹을 잠재웠다.
그러고는 금방이라도 손을 뻗어 읽을 것처럼 컴퓨터 책상 바로 옆에 쌓아놓았다.
지지난달에 사들이고선 몇 페이지씩 들춰본 게 전부인 책들까지 쌓고 보니 모니터 키의 절반쯤이다.
오늘은 그저 이것만으로 족하리라 생각했다.

내가 책 탐하는 욕심만 키우며 제대로 독서를 실천하지 못하는 까닭은
별로 좋지 못한 독서 습관 때문이다.
나는 짬짬이 틈틈이 덮어두었다가 또 다시 책을 읽는 건 감질나서 못 견디겠다.
이왕이면 한번 잡은 책은 내쳐 끝까지 읽거나 중간에 끊더라도 한두 번 정도로 한계를 긋고 싶은 것이다.
물론 그에는 기억력이 몹시 딸려 중간에 휴지기가 길어지면 앞부분의 내용이 완전히 공백으로 돌아가는
두뇌의 탓도 무시할 수 없다.
어쨌거나 소설집이나 수필집 같은 건 얼마든지 한 꼭지씩 읽어도 무방한데도 그러기가 싫다.
어쩌면 그러기 싫은 게 아니라 단순한 꾸물거림의 핑계일 수도 있겠다.

운동도 독서도 시간이 '날 때' 하겠다는 건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다름없다고 한다.
부러 시간을 내서 하지 않으면 절대로 안되는 것이라나.
아무리 바빠도 24시간 가운데 부서져 낭비되는 시간은 꽤 길다.
잘만큼 자고서도 이불속에 드러누워 안 일어나고 꼼지락 거리는 시간.
어렵사리 일어나서도 다시 소파에 드러누워 빈둥거리는 시간.
밥먹고 나서 배부르다는 핑계로 재미도 없는 TV 채널과 씨름하는 시간.
그리고 제일 많게는 일하는 척 자리잡고 앉아서 인터넷'질'하는 시간.

언제부턴가 잠자는 머리맡에 쌓여있다 먼지만 이고서 퇴출 당했던 책들이
컴퓨터 책상에 즐비하게 널브러져 있는 걸 보면
내가 가장 낭비하는 시간이 바로 컴퓨터 앞에서 빈둥대는 시간임을 자각했기 때문일 게다.

책이 손에 들어오면 이상스레 제일 먼저 작가의 나이부터 들여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것 역시 나에 대한 채찍질의 일종일 것이다.
잘 나가는 소설가 은희경은 1959년생. 휴 안심.
잘 나가는 건축가 황두진은 1963년생. 다행히 나보다 많네.
역시 잘 나가는 유럽 작가 알랭 드 보통은 1969년생. 늘 느끼지만 뭐냐 이 놈은.
스위스 출신으로 유엔 식량 특별 조사관이라는 장 지글러는 1934년생. 어르신이로군.
뭐 이런 식이다.
아마도 내가 요즘 반짝반짝 톡톡 튀기는 신예 작가들의 책을 선뜻 구입하지 않는 것도
자괴감을 피하려는 얕은 수작에 불과하다.

흔들리지 않는다는 나이에 흔들리지 않기는커녕 제대로 '이루어' 놓은 것이 없다는 불안감은
벌써부터 나를 연령차별의 편견에 접어들게 했다.
어린 나이에 좋은 글로 감동을 주는 이들에겐 찬사와 존경을 보내야 마땅하거늘
소견머리 좁아터진 나는 그저 질투심만 활활 불태울 뿐이다.

이러다간 조만간 완전 편협한 노털로 취급되는 게 아닐까 두렵군.
철 없다는 핑계로 나이와 상관없이 친구 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데
나이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에서 유연해지는 건 그리 잘 되지 않는다.
이런 열등감을 치유해줄 방법이 담긴 책도 어딘가 있을 텐데...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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