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증

투덜일기 2008. 12. 24. 20:17
크리스마스 이브라서 무조건 기분좋게 보낼 수야 없는 일이고 사실 나와는 별 무관한 날이니깐
그냥 평소 까칠한 성격대로 혼자 구시렁거리며 털어버려야겠다.

소소한 짜증의 원인이야 누구에게나 늘 있으며 얼마간 마음 끓이다 잊어버리면 그만이지만
요 몇주일 증폭되는 짜증의 원인은 결국 내가 뿌린 씨앗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단기간에 끝날 것도 아니어서 더욱 속이 곯는다.

첫번째는 지난번에도 자아비판이랄까 제발등 찍기랄까 민망한 고백을 한 적이 있었던 번역건.
4권짜리 시리즈물을 두 권 번역한 뒤 세번째 책의 계약을 앞두고 있었을 때 담당자들이 바뀌면서 트집을 잡혀 이후 계약이 무산되었던 일이 있다. 그  사람들이 제 아무리 예의나 출판개념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사소하든 말든 내가 빌미를 제공하여 일이 불거졌으니 다 내 잘못이라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그들과는 두번다시 상종하지 않으면 그만이고, 앞으론 바쁜 마감에 시달리더라도 번역에 좀 더 신경쓰라는 채찍질로 받아들였으니까.
그것으로 그냥 덮어두고 잊을 수 있으면 좋겠으나 상황이 또 여의치가 않다.
처음 상하 두권으로 냈던 소설을 단권으로 재출간하고 내가 번역한 두번째 시리즈가 출간된 뒤, 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개봉되었으며 출판사에선 영화개봉과 더불어 특별판을 제작 판매하기에 이르렀다.
작년 말에도 몇년 전 내가 우리말로 옮겨 출간된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가 나오긴 했지만 워낙 흥행이 안되는 바람에 곧장 극장에서 내려와 주변에서 아무도 알은체한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 영화는 할리우드에서도 그렇고 한국에서도 꽤나 흥행에 성공한 모양이다. 비수기인 요즘 관객수 백만을 넘어섰다나 어떻다나, 뉴스에서도 다뤄지는 상황이니 뭐.
설상가상, 영화나 드라마가 뜨면 원작도 덩달아 팔리는 법이어서 책도 엄청나게 팔리고 있는 눈치다.
그걸 배 아파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인세계약도 아닌 책이 수십만 부(실제로 수십만 부가 팔렸을 거란 얘기는 결코 아니다!) 팔린들 나한테 더 돌아오는 금전적 이득은 없으니까.
아 그런데, 속 모르는 사람들이 자꾸만 인사랍시고 그 책과 영화에 대해서 알은체를 하며 축하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게 짜증스럽다는 얘기다!
별 문제 없었던 책이라면, 그런 연락을 받더라도 후후 낮게 웃으며 "많이 팔리고 장사 잘 되도 저랑은 상관 없는 거 아시잖아요"라고 한 마디 대꾸하면 그뿐이겠는데 이번 책은 상황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잖아!
더욱이 고약한 출판사에서는 재출간된 첫권과 나중에 출간된 2권의 증정본도 보내주지 않았다. 2권의 경우 계약철회 통보와 출간일정이 얽히면서 역자교정도 없었고 심지어 역자후기도 싣지 않은 채 출간된 상태.
당시에 기가 막히고 열이 받쳤지만, 내 의무는 다하려고 역자후기와 교정 문제를 문의했지만 저들은 내 이메일에 아무런 회신도 하지 않았다.
그런 예의없는 인간들과 더는 상종하고 싶지가 않아서 나중에 서점에 나온 책을 보고도 증정본을 요구하는 대신 나는 씁쓸하게 한권씩 주문을 해서 책꽂이에 꽂아두었으며, 완전히 마음을 비웠다는 의미로 책과 함께 받은 휴대폰 액정클리너도 달고 다녔었다.
그런데, 이번주 내내 몇번이나 영화흥행과 더불어 예약판매까지 하고 있는 세번째 시리즈(다른 사람이 번역한!) 출간 때문에 덩달아 나한테 공연히 축하전화 비슷한 것이 걸려오니 그야말로 짜증스럽다. 출판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책 잘 팔린다고 옮긴이가 떼돈 버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는 걸 잘 알 텐데 왜들 그러는지 원!!
(제목 언급을 교묘히 회피하긴 했지만 이쯤하면 내 정체가 다 드러난 걸까? 아닐까? 에라 모르겠다.)

국내외 흥행에 힘입어 이미 할리우드에선 2번째 시리즈 영화 제작을 결정했다고 하니, 돌아가는 꼬락서니로 봐서는 다음 영화개봉 때도 나 역시 덩달아 일부인들의 입에 오르내릴 가능성이 높아졌다.
문제는 또 있다. 단권으로 출간된 1, 2권 원고를 아무래도 출판사측에서 나의 동의 없이 문장에 손을 댄 모양인데, 대체 누구의 손을 거쳤는지 모르겠으나 나의 번역문장이 훼손되었을 확률이 더 높고 그에 대한 욕도 내가 먹어야한다는 사실이다.
출판사에서 애당초 문장 스타일로 꼬투리를 잡아 옮긴이를 <잘랐>으니 지들이 고쳐놓은 문장에 대한 비난 역시 내 탓으로 돌릴 거라 생각하면 심장이 벌렁벌렁 분노가 치민다. 으으으.

두번째 짜증의 원인 역시 일 때문이다.
지금은 거의 중견 출판사들과 일을 하지만 초창기엔 나도 당연히 작은 출판사에서 번역을 시작했고 경력 없는 번역자를 키워주다시피한 곳에 대한 고마운 마음은 지금도 그대로다. 오랜 출판불황을 겪으며 안타깝게도 그 출판사는 몇년 전 부도를 맞았고 사업등록은 유지하고 있지만 사장님 혼자 고군분투하며 재기를 꿈꾸고 있다. 그 회사에서 알게 된 편집자며 기획자, 번역자들은 지금까지도 친한 친구로 남아 있기 때문에 가끔 모이면 그 회사와 사장님 걱정을 잊지 않았고, 가능하다면 조금씩 일을 거들어줄 수 있기를 바랐다. 시간이 되는 대로 번역이든 편집이든 디자인이든 도와드리자는 식으로.
그러다 나는 정말로 몇년 전 운좋게 작업스케줄이 비는 틈에 그 출판사를 위해 얇은 책 한권을 번역해주었다. 언제 출간될지 기약도 없는 일이었고, 원고료는 혹시 책이 대박나면 주세요, 라고 흔쾌히 제안할 정도로 처음엔 순수하고 기꺼운 마음이었다.
그런데... 몇년이 지난 지금 새삼 그 일의 뒤치다꺼리를 짬짬이 해야하는 상황에 놓이니 왜 이리 짜증이 날까. 그때도 긴급하게 출간일정을 잡겠다 하여 몇날몇일밤을 홀딱 지새워 번역을 마치고, 힘겹게 역자후기까지 써서 보냈는데 몇년이나 소식이 없었던 전적이 있기 때문인지, 더욱 미적지근한 마음이 드는 것 같다.
몇년 새 간사하게 변해버린 내 마음도 부끄럽고 잔뜩 밀린 다른 일은 어떻게 하나 한숨이 나오면서 과연 얼마나 걸릴지 모를 <공짜 일>의 순서를 어떻게 잡아야할지 갈피가 안잡히고, 이 모든 상황이 그저 짜증스럽기만 하다. 

이달들어 걸핏하면 "나 요즘 슬럼프인가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좋아하는 일이고 재미있게 평생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이어서 선택했는데 왜 요샌 만사가 다 시큰둥하고 열정이 일지 않을까.
결국 가장 큰 짜증은 바로 나 자신에 대한 것이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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