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82건

  1. 2009.05.04 도서관 18
  2. 2009.04.24 약력 25
  3. 2009.03.30 기억력 21
  4. 2009.03.27 담백하다/담박하다 23
  5. 2009.03.14 욕먹을 두려움 21
  6. 2009.02.24 여행 열망 21
  7. 2009.02.05 금기 14
  8. 2009.01.06 2008년 정리 10
  9. 2009.01.04 내 인생의 책 14
  10. 2008.12.31 2008년에 읽은 책 25

도서관

투덜일기 2009. 5. 4. 16:52

집주변에 장서량이 훌륭하고 시설도 좋은 도서관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몹시 부럽다.
그나마도 근방에 도서관이 아예 없는 이들도 있겠지만, 원래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니까.
원래 빌리고 빌려주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더욱이 빌린 책은 괜스레 남는 게 더 없는 느낌이라 읽기 전부터 허기가 든다. 이미 뇌조직이 느슨해진 것인지 뭐든 읽고 나면 책장을 덮는 순간부터 아스라이 잊혀지는 마당이라 더욱 그럴 것이다. 책등에 적힌 제목이라도 가끔 보면 아하 저런 책을 읽었던 적이 있었지, 기억을 되살릴 수 있지만 빌려 읽고 난 책은 흔적도 없으니 도무지 내것이라 챙겨 놓을 방도가 없다. 꼼꼼히 다이어리나 독서노트, 독서후기 따위를 쓰는 기록형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아직도 예전에 사놓고 안읽은 책들엔 먼지만 쌓이는데 새로운 책을 사고싶은 마음이 들어 또 몇권 사들이고도 얇은 귀를 팔랑이며 누가 인상깊게 읽었다고 하는 책은 또 욕심이 나니 하는 수 없이 이젠 도서관에서 좀 더 많이 책을 빌려 읽기로 마음을 먹었다. 좋아서 읽고 싶은 책 말고 일 때문에 필요한 자료 책들은 예전부터 빌려보았기 때문에 대출카드도 만들어둔 지 오래다. 그래도 여전히 빌려 읽는 책들은 새책이어야 읽을 마음이 생긴다. 대체 어떤 인간들이 만졌을지 모를 흔적들이 그다지 깨끗하지 않게 남아 있는 책에 내 손길을 보태기가 영 꺼려지기 때문이다. 공부 때문에 학교 도서관에서 빌리는 책들엔 짜증스럽게 줄까지 쳐 있어도 그다지 더럽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는데, 좀 이상한 강박증이다. 그땐 저작권 문제에 아무 거리낌 없이 복사나 제본을 해서 봤기 때문일까? 그냥 읽어보기만 한 책도 더러 있었는데... 아무튼 헌책방에서 구한 오래된 책은 이제 내것이란 소유의 심리 때문인지 누렇게 변했어도 꺼림칙한 생각이 들지 않으면서 도서관 책은 좀체 적응하기가 어렵다. 뭐든 새것만 추구하고 좋아하는 마음을 버려야 할 텐데, 난 아직도 멀었다는 얘기다.
반성은 반성이고 아무래도 찜찜한 마음을 버릴 수가 없던 차에 좋은 방법을 찾아냈다. 아직 도서관에 들어오지 않은 책을 신청하는 것! 그러면 책이 들어오자마자 제일 먼저 빌려가라고 문자메시지가 온다. 책에 바코드를 붙이고 도장을 찍은 도서관 직원들 말고는 아직 그 책을 주물럭거린 사람들이 드물다는 얘기니까 거의 새책이다. 문자 메시지가 오면 이틀 안에 찾으러 가야하는 번거로움을 이기는 것이 나 같은 게으름뱅이에겐 꽤나 큰 도전(?)인데 그래도 도서관 책이면서 내가 처음 책장들을 펼친다는 착각에 훨씬 마음이 놓인다. 어쩌면 빌린 책으로도 구멍 뚫린 두뇌에 좀 더 깊은 인상을 새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생겼다.

오늘은 그렇게 빌렸던 책을 반납해야 하는 날이라고 또 문자메시지가 오는 바람에 도서관엘 갔는데 2주 전 비오는 날엔 초록 잎도 제대로 눈에 안들어 왔던 등나무에 연보랏빛 꽃이 잔뜩 매달려 있었다. 그 등나무꽃 아래엔 흡연자들을 위한 벤치 한두 개밖에 없었지만, 옛날 학교의 등나무 아래 벤치가 떠오르며 그리움으로 가슴이 잔뜩 부풀었다. 바야흐로 5월, 축제의 계절이겠구나 싶어서.
시설은 노후했고 책도 별로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동네 산기슭에 자리잡은 터라 위치는 좋은 편이니 다음엔 아카시아 꽃 향기 그윽할 무렵 또 도서관엘 가봐야겠다. 아직 도서관에 들여놓지 않은 주옥같은 책이 뭐가 있을까 열심히 찾아 신청도 해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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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2009. 4. 24.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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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력

투덜일기 2009. 3. 30. 16:59

머리가 좋은 것과 기억력이 비상한 것은 특별히 상관 없단 얘기를 들은 것도 같다. 하지만 나는 머리가 좋지도 않고 기억력도 좋지 않으니 그런 얘기를 들어도 별 위로는 되지 않는다. 특히 요사이 깜빡깜빡 잊는 것들이 하도 많아 자괴감에 빠질 때가 많은데, 나이 분포가 위아래로 다양한 편인 주변 지인들도 거의 비슷한 증세를 보인다고 하는 걸 보면 건망증은 그냥 스트레스 속에 사는 현대인들의 습관 같은 것일지 모른다는 근거없는 생각을 잠시 품기도 한다.
어쨌거나 어디 잘 둔다고 둔 물건을 찾지 못해 쩔쩔매는 것은 다반사이고, 메모를 해두지 않으면 전날 계획했던 일도 까맣게 잊는 게 많다. 하물며 몇년 전 일이야 오죽할까. 이 친구한테 들은 이야기를 저 친구 이야기로 재구성해서 엉뚱한 기억으로 갖고 있는 경우도 많아서,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에게는 아예 내가 먼저 뭘 아는 척 하지 않는 게 유리하다는 생각에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때도 있다. 특히 시시콜콜한 이야기들까지 귀신같이 잘 기억하고 있는 똘똘한 지인들에게 나의 건망증과 무덤덤함은 때로 배신감을 안기거나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하기야 내쪽에서 더 잘 기억하고 있는 지인들의 에피소드도 더러 있긴 하다. 서로에게 각인되는 사건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나는 사람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는데 취약하다. 나와 사적으로 상관없는 유명인의 얼굴과 이름이야 잊어도 해될 것은 없지만, 한두번 대면한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이 그저 공백으로 남은 상태에서 다시 만날 일이 있으면 뜨끔하다. 심지어 서너번 만나고도 얼굴이 희멀건 윤곽선으로 남은 사람들이 많다. 스스로 <면치>라고 인정하기로 한 나의 기억력을 통 믿을 수가 없게 된 뒤로, 그래서 나는 일 때문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처음 뵙겠습니다"라는 인사를 삼가고 있다. 안전하게 무조건 "안녕하세요"다. 상대쪽에서는 반갑게 알아보는데 내쪽에선 '누구더라, 누구더라, 누구더라...' 초조하게 아득한 머릿속을 헤집고 있노라면 진땀이 날 지경이다.
얼굴은 알아보겠는데 이름이 통 기억나질 않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차라리 그쪽에서도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서로 민망하게 웃으면 마음이 편한데, 상대편은 나름 특이한 내 이름을 기억하는 반면 나는 그러지 못할 때 참 미안하다. 다시 안볼 사람이면 상관없지만, 일 때문에 만나는 관계망 안에서 나는 얼굴 알아보기에 관한 한 분명 칠칠하지 못한 인간으로 분류되어있을 것이다.  

예전에도 한탄한 바 있는 부실한 기억력 타령을 새삼 또 하고 있는 이유는 키드님의 블로그에서 언급된 <책 읽어주는 남자> 포스팅 때문이다. 케이트 윈슬렛이 <더 리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탔단 얘기를 듣고는 영화를 한번 봐야겠다 생각을 했었다. 원작도 있으며 부제가 각기 <책 읽어주는 남자>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줄곧 과거에 내가 읽은 책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내 기억 속의 <책 읽어주는 남자>는 프랑스 책이었고, 당시에 그 책을 읽은 친구들과 우리도 책 읽어주는 귀여운 남자가 있으면 좋겠다는 농담을 했던 기억도 남아 있었다. 크게 베스트셀러가 되진 않았지만 알음알음 꽤 읽혀, 어느 출판사에서는 그 제목을 본따 <~ 해주는 남자> 시리즈물을 기획하기도 했었다.  
오늘 문득 똑같은 제목의 책을 프랑스와 독일 작가가 썼단 말인가 싶어, 찾아보니 아니다. +_+
이번에 영화화 된 <책 읽어주는 남자>는 10년 전에 내가 읽은 그 책인 모양이다. 다른 책은 없다. 그런데도 내 기억엔 책을 읽어주는 귀여운 남자와 사랑에 빠진 여자의 이미지만 남아 있을 뿐, 전쟁이니 나치니 하는 주변 상황은 하나도 없고 기막히게도 프랑스어로 책 표지에 적힌 원제를 본 것만 같다. 큭.

하기야, 어떤 책이나 영화는 예전에 본 것인줄도 모르고 끝까지 보다가 기적적으로 기억을 해낸 경우도 있으니 아마 두번째 보면서도 두번째인줄 몰랐던 것들도 더러, 어쩌면 꽤 많이 있을 것 같다. 책이야 두고두고 여러번 보며 감동할 수 있으면 당연히 좋은 것이니 억울할 일은 없는데, 그래도 이렇게 정신머리없고 기억력 나쁜 내가 한심스럽다는 사실은 피할 수 없다. 어차피 인간의 기억이란 게 자기 좋을 대로 재편집되는 모양이지만, 그나마 뇌리에 남아있는 나의 기억들이 내 마음대로 휘저어 믿음직하지 않은 재구성의 산물임을 깨닿게 되는 이런 순간을 맞닥뜨릴 때마다 슬쩍 겁이 난다. 차라리 그냥 까맣게 잊어버리는 쪽이 낫지 않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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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백한 사람이 되고 싶고, 낙서장에 가까운 블로그지만 담백한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 있다.
문득 내가 알고 있는 뜻과 속속들이 맞는지 궁금해져 사전을 찾아보니, 또 하나 배우게 됐다.
<담백하다>는 원래 담박(淡泊)하다에서 나온 거란다.
1. 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하다.
2. 아무 맛이 없고 싱겁다.
3. 음식이 느끼하지 않고 산뜻하다. 
사전에 <담백한 글>이라는 용례는 없지만, 담백함의 반대말은 느끼함이라고 내 맘대로 생각하며 글에도 비유적으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하련다.

요 며칠 또 괜히 머리가 시끄러워서 잠도 잘 안오는 밤과 새벽 머리맡에 책을 쌓아두고 정서불안 환자처럼 이 책 저 책 들춰보다가 느낀 게 있다. 나도 접속사로 연결된 복잡하고 긴 문장을 습관적으로 많이 쓰는 편인데, 확실히 간결한 문장이 더 설득력있고 마음에 오래 남는다는 사실. 문장이 긴 것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유려한 글쓰기를 하는 이들도 물론 있지만, 대부분은 호흡이 길어지면 시선과 이해력이 흐트러져 다시 되돌아가야할 때가 많다. 특히 요즘의 나처럼 정신 시끄러울 때 하는 독서의 경우는 더더욱. 거기다 젠체 하는 거들먹거림까지 버무려진 느끼한 글을 만나면 아예 참을 수가 없다.
어디선가 소개글을 보고 한번 읽어보고는 싶은데 내 돈주고 사기는 아까운 책이라 마침 그 출판사에 다니는 지인에게 한권 얻어놓은 책이 있었다. 이참에 한번 읽어볼까 싶어 몇달만에 드디어 들춰보려니 좀처럼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무거운 주제도 아니고, 인간의 <쇼핑> 욕망에 대한 잡다한 단상을 적은 것임에도 그렇더라. 조사와 접속사 빼고는 죄다 외래어인 패션잡지를 멀미나서 잘 못 읽는 나의 개인취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유없이 거슬리는 꼭지들을 건너뛰어 뒷장으로 넘어가도 문장들이 딴죽을 걸듯 자꾸 턱턱 걸렸다. 어찌나 멋을 부리셨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패션전문가의 손을 빌려 꾸미고 명품으로 휘감았는데, 진품인지 모조인지 구분하기는커녕 명품 브랜드에 무지한 나는 그게  명품인줄도 모르는 격이랄까. 아니지, 내눈엔 진짜도 죄다 가짜로 보인다는 게 더 맞겠다.
아무튼 결국 난 그 책 읽기를 포기하기로 했다. 다 읽진 못했어도 나도 쓸데없이 기교와 멋부리는 문장은 쓰지 말아야한다는 교훈을 주었으니 그마저도 성공적인 독서라고 할 수 있으려나. ㅎ

상대적으로 수전 손택, 서경식의 글과 생각들은 어찌나 명징(나는 이 단어가 참 좋다!)한지 하나같이 밑줄 그어 두고 싶은 주옥같은 표현이다. 우리말로 옮긴이들의 공도 당연히 있겠지만 저들은 삶부터 겉치레 따위에 연연하지 않았기에 원래 글도 담백하고 간결했을 거라 믿는다. 
한 두어달 일은 관두고 장서욕심에 사두고 밀린 책들이나 죄다 읽으면 좋겠건만 마음만 바빠서 독서도 초조한 메뚜기처럼 자꾸 이 책 저 책 옮겨다니게 되니 어쩌면 좋으냐. 으휴. 하기야 그런 욕심을 품으면 담백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건가? 이래저래 딜레마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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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먹을 두려움

책보따리 2009. 3. 14. 16:31

실제로 욕하는 사람들과 대면할 일은 없다는 게 천만다행이긴 하지만 번역가 역시 대중에 노출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직업이기에 어느 정도 욕 먹을 각오는 하고 있어야 한다. 특히 요즘처럼 검증과 검색 수준이 뛰어난 독자들을 상대로는 더욱 그렇다. 나 역시 과거에 번역서들을 읽으며 통 내용 이해가 잘 되지 않거나 문장 호흡이 길어 심히 얽힌다 싶으면 <번역이 뭐 이따위야!> 또는 <번역이 엉망이군>이라는 말을 아무 생각없이, 수없이 외쳤던 것도 사실이다. 솔직히 지금도 내노라하는 이름난 번역가들이 옮긴 책에서도 혹시 제자를 대리 번역시켰나 싶은 의혹이 드는 이상한 문장이나 비문을을 발견하는 일이 더러 있을 정도이니 오죽하랴.

어차피 입맛 다양한 독자들을 일일이 다 만족시킬 수 있는 번역문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로 위로를 삼기는 하지만, 굳이 지난번 시리즈물 번역건으로 속쓰렸던 일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특히 잘 팔렸으면 싶은 책이거나 잘 팔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책의 경우는 욕먹을 두려움 때문에라도 점점 최종 원고를 넘기는 일이 망설여진다. 물론 그래야 번역의 질이 높아지고 더 정성들인 문장이 태어날 터이니 나에겐 도움이 되는 고민이긴 한데, 아무리 고민을 해봤자 딜레마는 깊어만 간다는 데 문제가 있다.

과거 출판사들은 대부분 독자들을 위해 가독성이 뛰어난 매끄러운 번역문장을 선호하여 너무 복잡한 문장은 번역이나 편집 단계에서 <알아서> 정리했지만 최근들어선 가독성이 좀 떨어지더라도 원문의 문체와 느낌을 그대로 살리는 번역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다. 쉽게 술술 잘 읽히는 문장만이 능사는 아님을 책만드는 사람들도 책 읽는 사람들도 깨닫기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나 역시 골머리가 썩을지언정 쉽게 번역하자고 대여섯줄씩 이어지는 복잡한 문장을 생선 토막치듯 난도질해 편히 옮기는 것보다는 기필코 유려하게 원문과 <최대한> 유사한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고 나서 회심의 미소를 짓는 걸 더 즐기는 편이다. 복잡한 만연체로 쓴 작가의 작품을 선택해 읽는 독자라면 호흡이 더뎌 진도가 느리더라도 문장을 곱씹어 읽는 정도의 수고는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닌가 말이다.

글을 다듬는 과정을 <윤문>이라고 하는데, 번역서의 경우 윤문의 정도가 얼만큼이 적당한지, 원작 훼손과 가독성의 문제를 어느 정도까지 양보를 할 수 있을 것인지의 논란은 아마도 인류가 다른 언어권의 책을 읽어대는 행위가 끝나지 않는 한 영원히 지속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옷을 바꿔입으면서 이미 원전은 훼손을 피할 수 없지만, 그 훼손의 정도를 최소로 줄여 전달하는 것이 번역자의 의무이자 책임이라고 할 때 번역가의 존재는 눈에 띄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지은이와 독자 사이의 소통에 옮긴이의 개입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독서를 이끄는 번역. 냄새 고약한 정로환에 분홍색 껍질을 입혀 냄새를 없앤 정로환 당의정 같은 느낌의 번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약효는 똑같으니 본질은 같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겠지만, 일단 다른 언어로 먼저 쓰인 책을 만들고 읽겠다고 생각한 사람들이라면 거북한 냄새가 나는 정로환은 냄새 나게, 달콤하고 알록달록한 새알 초콜릿은 또 그렇게 경쾌하고 달콤하게, 번역가도 편집자도 독자도 그대로 인정하고 삼킬 의무가 있다.

그러나 내 경우도 이 생각은 어디까지나 내가 번역작업을 하며 목표로 삼는 <이상>일 뿐, 현실에선 끊임없는 유혹을 느낄 때가 많다. 이왕이면 좀 더 그럴듯하게 유려하게 문장을 다듬고 싶은 유혹. 읽다가 턱턱 걸려서 짜증났던 과거의 수많은 번역서 독서 경험도 원인으로 작용했겠고, 일단은 쉽게 풀어 독자 입에 쏙 넣어주는 매끄러운 번역을 선호했던 과거의 번역경향에 이미 내가 꽤 길들여진 탓도 있을 것이다. 다행히 원문이 워낙 유려하다면 오히려 그 느낌을 온전히 전달하지 못할까 염려해야 하는 형편이니 더욱 공을 들이면 될 일이다. 하지만 원문이 의도적인 비문이라면?

이번에 번역한 책이 그랬다. 중국인 지은이가 <고의로> 서툰 영어로 쓴 일기식 소설. 초반부엔 완전한 문장이 단 한줄도 없는 단어의 나열이고, 맞춤법을 틀리게 쓰는 건 유머스러운 애교 수준이었으며 중반 이후에도 주어와 동사가 마구 생략되거나 시제는 무시되었다. 물론 처음엔 재미있는 작업이라 여겼고, 점점 문장력이 향상되는 지은이의 글쓰기 과정을 독자들도 생생히 실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원전의 비문을 온전한 문장으로 만들려는 관성 같은 것이 되살아났고, 몇번이나 서술어를 지우고 다시 눈에 거슬리게 비문을 만들어야 했다. 그것은 출판사 및 담장자와 의논하여 결정한 번역방향이기도 했고, 그 책의 독특한 특징이므로 옮긴이로선 당연히 지켜야할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_-;; 그렇게 어렵사리 고민하고 넘긴 원고가 교정지 형태로 다시 되돌아온 지난주 내내 나는 역자교정을 하며 새삼 두려움에 떨었다. 책속의 수많은 비문과 불온전한 문장, 서툰 글쓰기와 표현을 과연 독자들이 순순히 원전 때문이라고 여길 것인가? 아니면 옮긴이의 역량부족이라고 불평하며 짜증이 나서 책을 집어던질 것인가?

어찌나 걱정이 되던지 하마터면 역자후기에 수많은 비문과 서툰 글쓰기 및 표현은 지은이의 의도이니 옮긴이의 책임이 <절대> 아니라고 티나게 유치한 변명을 적어넣을 뻔했다가 참았다. 욕을 할테면 하라지. 나만 떳떳하면 되는 거니까, 라고 마음을 다잡고는 있는데 그래도 슬며시 되살아나는 두려움은 어쩔 수가 없다. 욕 먹는 거 너무 싫은데. 온당한 욕이라면 발전의 밑거름이라도 삼겠지만, 부당한 욕은 나같은 소심생이 투덜이에겐 큰 상처와 좌절을 남긴다. 잘해야 본전인 번역 인생에서 앞으로도 욕 먹을 일은 수없이 많을 텐데 햇수가 거듭될수록 대범해지기는커녕 점점 더 고민이 많아지는 것 같다. 그나마 발전적인 고민이라고 새삼 위로를 하고는 있지만, 이 책 잘 팔렸으면 좋겠는데...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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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열망

삶꾸러미 2009. 2. 24. 13:00

역시나 얼마전 작업한 책에서 주인공은 내키지 않는 여행을 떠났다가 어느 한가로운 소도시에서 이런 생각을 한다.
어떤 이들이 짧게 머물려고 낯선 도시로 여행을 갔다가 한달이 지나고, 그러다 석달이 지나고도 여전히 그곳에 있다 왜 결국 남은 평생 그곳에서 살게 되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겠다고. "이상한 힘. 제 아무리 야성적인 사람이더라도 상관없이, 한 사람을 외국 땅에 정착하게 만드는 기운. 나는 그 이상한 힘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모험과는 반대되는 무언가, 살아가는 습관에서 비롯되는 무언가이며, 단조로운, 매일 같은 일상의 단조로움에 대한 수긍이다."

낯선 도시로 여행을 떠났다가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아니 영영 그곳에 정착하고 싶은 생각을 품는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나로선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물론 나도 여행에서 돌아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품은 적은 많았다. 나에겐 여행의 동기라는 것이 도피였거나 휴식, 애쓴 나에게 주는 포상 같은 것이었으므로 멍에 같은 현실이나 일상의 번잡함이 싫어서 가능한 한 여정을 길게 늘여 돌아감을 지연시키고 싶은 마음은 늘 있었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 손꼽아 기다려진 적은 단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낯선 곳에 정착이라니.

언젠가 멕시코에 갔을 때였다. 떠나기 전에 내가 기대했던 건 칸쿤 같은 편한 휴양지의 빌라에서 수영장 선베드에 누워 마가리타를 마시거나 새하얀 요트에 누워 눈부시게 파란 바다를 즐기는 휴식이었지만 일행이 나를 데려간 곳은 골수 낚시꾼들이나 찾아가는 태평양 연안의 작은 어촌이었고, 수영장이 딸린 호텔 따위는 아예 없었으며, 일행이 트럭 뒤꽁무니에 매달고 간 배는 물론 요트가 아니라 작은 고기잡이 배였다. 40도를 넘는 폭염에 새벽 6시에 깨어나 찬물을 틀어도 달궈진 지붕과 물탱크 때문에 화들짝 놀랄 만큼 뜨거운 물이 쏟아지는 열악한 환경의 모텔에서 친구와 나는 망연자실했다. 친구의 남편이 우리 키만큼이나 큰 방어를 끔찍이도 많이(그때 잡아서 아이스박스 몇 개에 담아온 방어는 최소 석달은 먹고도 남음이 있었다) 잡아와 자랑을 늘어놓아도 우린 둘 다 시큰둥했다. 그나마 현지인들에게 방어를 나눠주고 바꿔먹는 생굴과 클램차우더, 짝퉁 레몬 대신 진짜 싱싱한 라임을 넣어 먹는 코로나 맥주가 맛있어서 참을 뿐이었다. 
그런데 거기, 낚시꾼들을 상대하는 아주 작은 포장마차 비슷한 음식점엔 뜻밖에도 스웨덴 여자가 허드렛일을 거들고 있었다. 멕시코인 부부와 올망졸망한 십대 자녀들이 충분히 운영하고도 남을 만큼 한가한 그곳에서 과연 그 여자는 무슨 일을 하며 얼마나 돈을 받을까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전직 교사였다는 그 여자는 방학동안 남미로 여행을 왔다가 몇년 전 다 때려치우고 그곳에 그냥 눌러앉았다고 했다. 이미 안면이 있던 친구 남편의 설명에 따르면, 특별한 직업 없이 낚시철엔 낚시꾼들이 흔쾌히 주고 가는 생선으로 연명하고 주말에는 그 포장마차에서 서빙을 거들어주고 끼니와 맥주를 제공받는 것이 전부라고 했다. 그간의 저축과 연금을 쪼개서 궁핍하게 살면 늙어 죽을 때까지도 그곳에서 얼마든지 살 수 있을 거라나. 차마 나이를 물어볼 순 없었지만 오십대는 된 것 같은 여자였다. 
나는 도저히 그 여자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텔에서도 발전기를 돌려야 겨우 에어컨과 전등을 켤 수 있으며 더위 때문에 어떤 날은 해저물 때까지 길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정도로 지독히 심심하고 한가한 그 <깡시골 어촌>에서 그 여자는 어떤 매력을 발견했기에 무턱대고 눌러 앉기로 작정을 했을지. 맑고 푸른 바다는 오대양 주변이라면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을 터였고, 순박한 시골 사람들도 나라마다 없는 곳은 없지 않겠나? 
어쨌거나 지금은 이름도 까먹은 바하캘리포니아 끝자락의 어느 어촌엔 그 여자 말고도 여행으로 흘러들어왔다가 정착한 외국인들이 두어 명 더 있다고 했다. 친구 남편의 꿈 역시 은퇴해서 그곳에 정착해 남은 평생 낚시를 하며 사는 것이었지만, 친구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책을 번역하다 저 구절을 만난 순간, 십년도 넘게 까마득히 잊고 있던 그 스웨덴 여자가 불쑥 떠올랐지만 그때도, 지금도 나는 여행을 떠났다가 뜻밖에 인생의 전환점을 맞아 낯선 곳에 정착했다는 사람들을 좀체 이해하진 못하겠다. 나에게도 여행은 새롭고 낯선 것들의 경험이 큰 의미를 차지하지만, 결국엔 익숙한 장소와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지연시키고픈 현실임과 동시에 든든한 <빽>인 것만 같은데 말이다.
내가 아직 인생의 연륜을 덜 쌓아 낯선 여행지가 풍기는 <이상한 힘>을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인지, 사주에 역마살이 있기는 하지만 늘 원점으로 돌아오는 역마살이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사주팔자 때문인지, 낯선 곳과 낯선 삶을 두려워하는 우물안 개구리이기 때문인지 그건 알 수 없지만, 내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게 하나는 있다.
낯선 곳에의 정착은 꿈도 안 꿀 터이니, 그저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을 만큼 여러가지 여유를 지니고 살고 싶다는 사실.
봄바람 살랑살랑 부니 슬슬 역마살이 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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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

책보따리 2009. 2. 5. 23:05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주변 어른들에게 퍽 인상적인 충고를 들은 적이 있다.
원만한 사회생활을 하고 싶다면 세 가지 화제를 금하라는 것.
정치, 종교, 출신지.
시국이 어지러웠던 대학시절 정치는 곧 현실인 것처럼 생각되었지만, 직장인으로 탈바꿈한 순간 정말로 정치 문제는 어디서든 섣불리 꺼내드는 순간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는 효과를 나타내거나 끝없고 피곤한 논쟁을 일으켰다.
종교와 출신지 문제도 마찬가지. 드디어 호남 출신의 대통령이 배출되긴 했어도 여전히 뿌리 깊은 지역감정은 쉽사리 치유될 수 없는 뜨거운 감자 같은 느낌이었다.
종교색이 그리 심각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명색이 미국회사라며 누군가 재치기를 하면 옆에서 꼭 "Bless you!"(신의 가호를 빈다고??)라고 해주어야 예의바른 것이라는 양 행동하는 직원들과 한국말을 하다가도 걸핏하면 "Oh my God!"이라고 추임새를 넣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일년에도 몇번이나 엄마따라 절에 간다는 사실을 입밖에 내지 않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 세 가지 금기는 아직도 쓸모있게 통용되는 대인관계의 비법인 것도 같다. 섣불리 상대방을 설득할 수도 없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같은 입장이 아니고선 상대를 심도 있게 이해하는 것조차 어려우니까.
특히나 종교에 대해서는 나 자신도 불교니, 천주교니, 기독교니 선택을 하기는커녕 유신론자인지, 무신론자인지, 애매한 불가지론자인지도 정립되지 않은 상태가 아닌가. 
언젠가 내 블로그에 들렀던 막내동생이 "누나 요새 너무 정치적인 거 아니야?"라고 언급해서 뜨끔했을 정도로 
가끔 이곳에 못마땅한 정치에 대한 나의 푸념을 늘어놓긴 하지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약간은 조심스러우며,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괜히 금기를 깨뜨린 건 아닌가 염려스럽다. 
그러지 말아야지 내심 다스리고는 있지만, <너무> 열심히 종교생활을 하거나 자신의 종교를 심히 드러내는 언사를 일삼는 사람을 보면 나는 덜컥 인간적인 실망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나에게 종교란(특히 대부분의 기복종교) 냉철한 이성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비합리의 궁극이라 생각되는데, 또 남들은 이런 나의 <비인간적>이고 회의적인 시각에 새삼 실망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언제부턴가 모든 종교가 다 그 나물에 그 밥 같이 여겨졌고 몹시 못마땅했으며, <종교의 자유>를 앞세워 휘두르는 <종교인>들의 권력과 횡포가 혐오스러웠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종교 자체가 아니라 종교의 배타성과 일부 인간들이라는 생각도 했지만, 가만 들여다보면 결국 종교 역시 인간들이 필요 때문에 만들어 낸 제도일 뿐이니 종교 자체에 대해서 좋고 나쁨의 판단을 내리는 것도 내 자유라는 결론에 어렵사리 도달할 수 있었다. 
내가 사회생활과 인간관계에서 금기라는 저 세 가지 주제의 구속을 너무 심하게 받은 탓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나마도 얄팍한 지식이나 견해로 주장을 펼칠 가능성이나마 있는 정치나 출신지 문제와 달리 신앙과 신의 영역은 워낙 아는 것이 없는 터라 더더욱 피해야 할 부분이었다.

대체로 나는 주변 사람들의 신앙에 동조할 순 없지만, 각 종교의 배타성에 물들지 않은 공평무사한 교양인으로서 그들의 신앙을 존중하고 인정해야 한다는 태도를 취했던 것 같다. 엄마 따라 절에 가면 부처가 신인지 아닌지 고민없이 그냥 예를 올리는 차원에서 기도와 절을 했고, 친구 따라 교회나 성당에 가게 되더라도 그들의 신을 믿는다기 보다는 역시 존중과 예의 차원에서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얄팍하나마 현대 교양인으로서 보여야 할 관용이 아닐까 하면서.
"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만에 하나 있다면 혹시 모르니깐 기도는 해보지 뭐. 신실하지 않다고 내 기도는 안들어줄 옹졸한 신이라면 까짓것 나도 상관없어. 싫음 말고!" 정도의 속셈이었달까.

그러던 차에 TV를 보다가 알게 된 책이 <만들어진 신>(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김영사)이었다.
2007년엔가 KBS 책소개 프로그램에서 다루어졌는데(아쉽게도 내가 애청하던 이 <TV 책을 말하다>라는 프로그램은 최근 폐지됐다) 신의 존재 유무를 하나의 가설로 접근하는 과학자의 논증 방식이 흥미로워 보였다.
한번 읽어봐야겠다고 작심했던 이 책은 일단 책값이 비싸 매번 온라인 서점에서 쇼핑카트에 담았다가 슬며시 빼놓기를 반복하다가는 우선 도서관에서 빌려보았는데, 속 표지를 넘기자마자 적힌 글귀부터 쿡 웃음이 나왔다.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 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
- 로버트 퍼시그 -

 맞아, 맞아... 그러면서 읽던 책은 결국 끝을 보지 못하고(재미 없어서가 아니라 중간에 내가 게으름을 부려서;;) 독촉을 받아 도서관에 반납해야 했지만, 작년 말 같은 TV 프로그램에서 주목할 만한 책인가로 다시 소개된 걸 보고는 마저 읽어봐야겠다 싶기도 하고, 내가 몸소 읽어본 바로도 소장해서 두고 볼 값어치를 한다는 결론을 내려 정가 25000원이라는 거금임에도 결국 사들이고야 말았다.
(역시 나는 정말 북리뷰를 못쓰는 게 맞다. 이건 뭐;; 책 구매의 역사도 아니고;;)

리처드 도킨스 본인도 이 책은 신은 있다고 철저하게 믿는 신앙인들을 위한 책이 아니라 어중간한 입장에서 섣불리 속마음을 밝히지 못하는 이들을 목표 독자로 삼는다고 밝혔다는데, 신은 반드시 있다고 일말의 의심도 없이 믿는 사람들이라면 <신은 없다>는 가설에서 출발한 지은이의 과학적 논증을 제대로 객관적으로 따라갈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하다. 어쨌거나 유신론자들이 주장하는, 전지전능한 창조주 즉 모든 세계의 지적인 설계자로서의 신, 초자연적인 지성으로서의 신은 없다는 <과학자> 도킨스의 주장은 나에게 깊은 공감을 끌어냈다.
그 이유는 내가 종교보다 과학을 더 진리를 찾는 도구에 적합하다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과학이 내게 더 믿음직한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치밀한 검증을 추구하지만 스스로 오류나 실패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과학은 우리가 우리 믿음을 확인하게 위해 주도면밀하게 실험적으로 되짚어 보다가 실패로 돌아간다면 기꺼이 믿음을 포기할 것을 요구한다."[각주:1] 황 모 박사가 인간의 야망 때문에 사기극을 이어갈 때 거짓을 밝혀낸 이들 또한 과학자가 아니었던가. 심지어 세계적인 지성 호킹 박사도 연구를 거듭하다 자신의 과거 이론에 오류를 발견하면 순순히 인정하고 이론을 뒤집기도 한다. 100퍼센트 확실한 진리가 아니라 현재까지 오류라고 알려진 바 없기 때문에 진리라고 <인정>하는 것이 과학이므로, 오히려 오류없는 진리와 가치를 지닌 종교보다 못미덥다는 시각도 당연히 존재하지만 꼼꼼한 검증과정을 거쳐 진리라고 <인정된> 수많은 과학적 가설들이 내겐 인류의 초베스트셀러 <성경> 글귀보다 진정성을 갖는다. 지구가 둥글다는 <미친> 가설이 오랜 과학 검증의 역사를 거쳐 급기야 우리는 우주선에서 찍은 동그란 지구의 사진을 보아 진리로 알고 있듯이, 또한 다윈의 진화론이 허무맹랑한 가설이 아니라 확고한 증거를 갖추어 진리로 입증되었음을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정하듯이.

오래 전 그랜드캐년에 갔을 때의 일이다.
전직 사회 교사였으리라 의심할 할 정도로 쓸데없이 박식했던 여행사 가이드는 그랜드 캐년의 실물을 보여주기에 앞서 우리를 먼저 그랜드캐년의 사계와 생성역사 따위를 담은 영상물 상영관으로 몰아 넣었다. 입체 안경을 쓰고서 마치 실제로 헬리콥터를 타고 협곡 사이를 지나는 양 그랜드캐년 곳곳을 구경하고 난 뒤 드디어 관광 포인트에 사람들을 풀어놓았을 때, 나는 아득히 보이는 드넓은 협곡과 단층의 모습을 보며 퍽 담담했다. 
수십만년(수백만년이던가?) 동안 변한 지표면의 모습이 장엄하기는 했으나, 그것 역시 과학적으로 설명 가능한 현상이자 시간이 만들어낸 마술 같은 현실이라 의심없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와 다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이른바 순진한 기독교인들이었는데 그랜드캐년의 가장 넓은 협곡이 내려다보이는 지점에 서서 어느 부부는 손을 맞잡고 눈물을 주루룩 흘리며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행하실 수밖에 없는 기적의 현신이라고 말했다. 조금 전 나와 똑같은 영상물을 본 이들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들은 겹겹이 쌓인 단층이며 어마어마한 협곡의 깊이가 도저히 <단순한> 지층 부식의 결과일 리 없다고 나를 설득하려 들어 난감했다.
 
내가 보기엔 <만들어진 신>을 읽는 이들의 입장도 그랜드캐년을 바라보는 것과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겠다.
다윈주의를 출발점으로 하는 논증의 기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과학의 시각에서 도킨스의 논증을 담담히 받아들이거나, 종교인의 입장에서 분개하거나.
아무려나 나는 인간이 신을 믿는 게 아니라 <믿음을 믿는다>는 지은이의 주장에 더 고개가 끄덕여진다.
세상엔 수많은 종교인들과 신을 연구하는 무수한 신학자들이 있어 마치 신의 존재가 당연한 것 같으며,
내 주변에도 직접 신의 목소리로 기도의 응답을 들었다는 신실한 이들이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는 신이 없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데 방점을 찍어왔고
그 방점을 좀 더 진하게 만들어주는 데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 기여했음은 인정할 수 있다.

존레논의 노래처럼,
천국도 지옥도 국가도 종교도 없다면 인류는 훨씬 더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니깐 그래!

(그나저나 원제는 The God Delusion이다. delusion은 망상의 뜻. 원제가 더 충격이라 <만들어진 신>으로 다듬어진 것이 아닌가 싶은데, 인위적인 느낌이 들어 더 훌륭한 것 같기도 하고 어쩐지 <만들어진 전통>의 아류작 같기도 하다. 나 같으면 번역하며 가제를 어떻게 붙였을지 한참 고민하다 머리아파져 관뒀다. 독자로서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나더러 번역하라고 했더라면 멀미 깨나 하며 머리칼을 쥐어뜯었겠다. 그야말로 과학 <전문> 번역가이신 옮긴이가 존경스러울 따름) 
  1. [자오선 여행] 16쪽, 쳇 레이모 지음, 사이언스북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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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정리

놀잇감 2009. 1. 6. 21:38

토룡마을 주민들이 대거 보이코트할 양상을 보여 2008 베스트 포스팅 릴레이가 존폐위기에 놓였다니
측은지심이 발동하여 나라도 동참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2008년을 이런 식으로나마 정리해두는 건 나 같은 비기록형 인간에게 퍽 훌륭한 갈무리방법이므로, 옆구리 찔려서라도 적어두면 십년쯤 후에 차곡차곡 돌아볼 때 굉장히 흥미로울 듯하다. ^^;

 
_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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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책

책보따리 2009. 1. 4. 22:16
하루하루 연속되는 날들의 연장이라지만
새해엔 그래도 마냥 투덜거리기만 하는 잡문으로 블로그를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이왕이면 책만드는 업계에 한 다리 걸치고 사는 인간으로서 책 관련 포스팅이 제격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힘든 회상이었다.
어쨌거나 블로그 이웃이신 노나또님키드님의 바통을 이어본 내 인생의 책.


기억하고 있는 최초의 책은? 언제, 어떤 책인지? 

대여섯 살 무렵, 버스, 택시, 삼륜차, 케이블카, 비행기 따위의 탈것과 동물, 꽃 등이 소개된 딱딱한 그림책 시리즈다. ^^
우리 삼남매는 그 책을 <읽으며> 놀기 보다는 주로 집을 짓거나 방 한 가운데에 성을 둘러치고 그 안에서 놀았는데, 총 대여섯권쯤 되는 그 그림책은 제법 탄탄하게 생긴 빨간 가방 안에 들어 있어서 다 놀고 나면 큰누나인 내가 낑낑거리며 어렵사리 책을 그 가방 안에 넣느라 애를 먹었다. 
그때만 해도 워낙 옛날이라 책이 꽤 귀했던 것 같은데, 나중엔 그것 말고도 그림책 시리즈가 또 한 질 생기는 바람에 집짓기 재료가 많아져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책 읽는 습관은 어떻게 들이게 됐는지?

취학전부터 책을 줄줄 읽었다는 신동 이웃들도 계시지만, 그 옛날의 나는 7살에 제 이름 석자 쓸 줄 아는 것만으로도 어른들이 대견스러워하는 상황이라 연년생 동생과 터울을 두기 위하여 입학식도 못하고 뒤늦게 덜컥 국민학교엘 입학했다. 다른 아이들도 대개 그런 수준이긴 했지만, 할머니와 엄마의 증언에 따르면 1학년땐 꽤나 늦된 아이라 칠판에 적힌 알림장 내용을 <적는>게 아니라 <그려> 오느라 다른 애들 청소할 때까지 홀로 책상에 앉아 낑낑대며 베껴 그리고 있었다고 한다.
7월생의 아이를 덜컥 입학시켜놓고 담임으로부터 한글 배우기가 늦어 <이해력>이 약간 딸리는 것 같다는 평을 들은 엄마는 뒤늦게 후회를 하며, 큰 마음 먹고 월부로 동화책 전집을 사들였다. 
계몽사에서 나온 50권짜리, 어린이 명작동화 전집이었다.
각권마다 사전처럼 빳빳한 책껍데기가 갖추어진 양장본에다 빤질빤질한 노란색 표지, 책등이 빨간색인 그 책이 어찌나 마음에 들었던지 나는 수시로 동화책을 꺼내 읽었다. 처음엔 이야기가 짤막한 안데르센 동화, 이솝 이야기 등부터 읽었고 차츰 장편도 무리없이 읽게 되었던 것 같다. 고학년이 된 후에도, 심지어 중학생이 된 뒤에도 가끔 심심하면 뽑아 읽을 정도로 계몽사 동화전집은 내 유년 독서의 중심이었다.
동화책을 열심히 읽은 덕분인지, 늦된 아이였다가 2학년부터 비교적 우수한 학생의 범주에 속하게 된 맏딸의 선례에 고무된 울 엄마는 어려운 살림에도 간간이 월부로 전집류를 사주셨다. 재미있는 건, 나와 달리 두 남동생들이 독서를 별로 즐기지 않았다는 사실인데 특히 큰 동생 녀석은 책읽는 걸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동네에 월부 책장사가 나타나면 꼭 우리집으로 데려와 엄마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남들은 대문도 잘 안열어주는 판국에 앞장서서 장사꾼을 데려오는 아들녀석이라니...  워낙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인 울 엄마는 동생녀석의 너스레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월부 책을 들일 때도 있었는데, 내 기억으론 굉장히 두꺼운 백과사전 세트(아마도 4권짜리), 위인전집류도 그래서 생겨났던 것 같다.
독서에 맛을 들인 나는 일단 책을 잡으면 옆에서 누가 불러도 모를 만큼 빠져들었다. 엄마가 밥먹으라는 소리도 못 알아듣고, 만날 책만 본다고 혼이 나기도 했지만 그땐 밥먹는 것보다 책의 뒷이야기가 정말이지 더 궁금했다.

살면서 가장 책을 많이 읽었던 시절은 언제인가?
우습지만 아무리 따져봐도 중학생때인 것 같다.
국민학교땐 집에 있는 서너 질의 전집류를 읽고 또 읽는 반복독서를 했던 반면, 중학생 때는 드디어 학교 도서실 책을 빌려읽기 시작했고 한권에 300원짜리 삼중당 문고판을 골라 사서 읽는 묘미를 알게 되었으며, 친척 중에 출판사에 다니시는 분들이 생겨나면서 세로판형에 글씨도 깨알같은 한국단편문학 전집, 세계문학전집이 생겨났다.
그뿐인가, 나랑 9살 차이인 막내고모가 읽던 <방황의 끝> <풀잎처럼 눞다> 같은 대중소설도 모두 섭렵했고, 일간지에 연재되던 소설들도 악착같이 찾아 읽었다. 너는 아직 어려서 보면 안된다는 고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린 마음에 꽤나 야하다고 생각하며 신나게 대중소설을 훔쳐 읽고는 친구들에게 조숙한 척, 어른들의 세계를 다 아는 척 하는 게 재미 있었다.
더욱이 내가 다닌 중학교 국어선생님들이 특이했는지 월말고사 국어 과목에 교과서와 상관없는 필독도서 관련 시험이 세 문제씩 꼭 나왔는데, 책만 읽으면 누구나 풀 수 있는 문제들이었다. 시험에 나오는 필독서는 거의 단편소설인데도 아이들은 죽어라 안읽고 시험문제를 찍거나 차라리 컨닝을 시도하는 반면, 나는 해당 단편소설 한편만 읽는 게 아니라 굳이 책 한권을 다 읽느라 오히려 다른 공부를 못하는 형편이었다. 소설책을 읽으면서 월말고사 공부한다고 생각하면 어찌나 기쁘던지. 종이는 갱지처럼 싯누렇고 세로판형에 글씨도 작았지만, 표지에 명작 그림이 자랑스레 들어가고 나름대로 책 껍데기(크기만 작았지, 형태는 반양장인 셈이다)도 있었던 삼중당 문고판은 매달 새 책이 몇권씩 나올 때마다 무얼 골라 살 것인가 행복한 고민을 하게 해주었고, 집에 전집으로 있는 책도 굳이 문고판으로 사서 들고 다니면서 읽는게 좋았다. 
김동리, 김동인, 황순원, 염상섭, 나도향을 비롯해 지금은 이름도 가물거리는 근현대작가들의 책을 나는 모두 중학생때 읽었고 순전히 그 때 읽은 <감>으로 대입 학력고사까지 버틸 수 있었을 정도다. 

좋아하는 작가는?
과연 내가 아무 사심과 조건 없이 좋아하는 작가가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싫증을 잘 내는 편이라 누굴 언급해야 하나 막막하다. 좋아했다가 싫어지기도 하고 존경하지만 종종 너무 어려워서 심술나는 작가도 있으니 원.
마가렛 애트우드는 음울하고 비장하지만 꽤 오래 좋아하는 작가였으나 한동안 멀리했다. 어느 순간 너무 힘들어져서.
제인 오스틴은 번역본으로 읽으면 어쩐지 좀 짜증스러워지는데, 어순도 낯설고 말투가 흥미로운 원서로 보면 시간여행을 하듯 그 때로 되돌아가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이 된 행복한 느낌을 받는다. 
혼불과 최명희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나에게 우리말과 사투리, 옛말 공부 교과서 같은 존재이지만, 성역화, 권력화된 느낌이 싫어지는 중이다. 책은 연구 대상이 아니라 즐기는 대상이어야 하거늘.  
노엄 촘스키, 마루야마 겐지, 수잔 손택, 강준만은 나의 무지를 일깨워 살살 이끌어주는 선생님 같은 느낌이라 좋으면서 동시에 또 너무 거대하고 종종 어려워서 심술난다.

읽다가 포기했던 책은?
<삼국지>, <존재와 시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프루스트는 아직 최종적으로 포기는 안했다).  
그밖에 단권짜리들도 읽다 말고 던져둔 책들 꽤 많다. +_+ 과거의 나는 책이 재미 없어도 악착같이 끝장을 내곤 했는데, 어느 순간 그런 인내와 열정도 사라지더라.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은?
이스라엘의 하마스 공격 뉴스를 본 날, 언젠가 사두고 다 못 읽은 <에드워드 사이드 자서전>을 집어들고 읽기 시작했고 아직 못 끝냈다.
최근에 독서를 마친 책을 의미하는 거라면 <서울은 깊다>.

내 인생의 책은? 많겠지만 다섯 권 이하로 압축해본다면?
<아낌없이 주는 나무>
국민학교 4학년때였을 거다. 활자 빽빽한 동화책과 위인전, 세계명작 전집이 책의 전부인 줄 알던 나에게 친구가 선물했는데 예쁜 그림과 단출한 글귀도 마음에 들었지만, 어린 아이가 서점에 가서 단권으로 책을 살 수도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다.
그 뒤로 좋아하는 친구에겐 나도 문방구 선물 대신 이 책이나 <꽃들에게 희망을> 같은 책을 선물하곤 혼자 뿌듯해 했다. 
<빨간머리 앤>
계몽사의 50권짜리 동화전집 가운데 딱 한권 파본이 있었으니, 바로 <빨간머리 앤>이었다. 잘못된 책을 보낸 뒤 새책을 받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지만 결국 실패하는 바람에 나는 <빨간머리 앤>의 내용을 홀로 상상하며  읽고 싶다고 염원하기만 하다가 중학교에 들어가서 도서실에서 발견한 뒤에야 드디어 읽을 수 있었다. 뒤늦게 읽은 이 책이 어찌나 재미 있던지 책을 훔쳐다가 집에 있는 동화전집 빈자리에 끼워놓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소심해서 훔치지는 못했지만...  <제인에어>와 함께 중고등학생 시절 나의 단골 반복독서용 책이었다.   
<제인에어>
부모님이 사주신 세계문학전집의 <제인에어>말고도 중학생 때 나는 집에서 또 한권의 <제인에어>를 발견했었다. 그때도 이미 종이가 누렇게 변하기 시작했던 그 책은 을유문화사에서 세계문학전집 22권으로 1963년 9월에 발행했고 정가가 290원이라고 적혀 있다(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음). 먼저 읽은 제인에어는 아무래도 청소년용으로 생략된 부분이 있었던 반면, 한 페이지를 상하로 구분해 빽빽하게 세로쓰기로 인쇄된 이 책은 제인과 아델, 소피가 사용하는 프랑스어도 모두 원어로 실리고 주석이 꼼꼼하게 달린 그야말로 <완역본>이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느낌이 너무도 달랐다.
어린 마음에 확실한 이유를 찾아내진 못했지만 막연한 분노와 불편함을 느끼며 못마땅한 구석이 참 많은 소설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속상할 때나 화날 때 이 책을 읽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진정되는 효험이 있었다. 그래서 고등학생 때도, 어른이 된 뒤에도 가끔씩 읽으며 막연한 불편함의 정체를 찾아보려 애를 썼던 것 같은데, 결국엔 20여년 뒤 석사논문을 제인에어로 쓰게 되더라. 
<혼불>
고등학교때 막연하게 대학엘 가면 국문학을 전공해야지 마음 먹고 있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국어선생들을 좋아하려고 노력했었다. 그때 내가 따르던 국어선생님이 은사님이 쓴 책이라며 <혼불> 1권을 선물로 주었는데 대보름날 달맞이 하는 장면의 묘사부터 무척이나 매혹적이었고, 종종 국어사전을 찾아봐야 하는 순우리말 낱말들이 그렇게 마음에 들 수가 없었다. 막연하게 나도 순우리말을 자유자재로 쓰는 소설가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게 했으며 더불어 국어공부에도 자극제가 되었다. 
<태백산맥>
당시 대학생에게 강요되는 사회과학 서적들에 대해 나는 묘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알아야 하는 진실이기는 하지만, 이북 출신에다 빨갱이라면 서슬이 퍼래지시는 할아버지 밑에서 자란 영향 때문인지 '용공불순서적'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금서들이 불편해서 외면했다고나 할까. (80년대 중반 웬만한 사회과학서적은 전부 금서였다^^) 그런데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렇게 긴 대하소설인줄도 모르고 한권한권 눈빠지게 나올 때를 기다렸다가 헐레벌떡 밤새 읽곤 했는데,태백산맥을  몇권 읽고 나자 그제야 <해방전후사의 인식> 같은 책들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음 권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공부하듯 관련 역사책을 찾아읽으며 뒤늦게 정치와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두게 되었으니, 나에겐 다른 독서를 이끄는 좋은 책이었다.

좋아하는 구절을 한 구절만 소개해 달라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거나 기록을 하는 습관도 없고 기억력도 나쁜 허당이라 슬프다.
그나마 오래 전 미니홈피 대문에 남겼던 글귀가 있어서 옮겨 적는다.

"네가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내일이 없는 삶을 살아서가 아니다. 오늘이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 마루야마 겐지 <천년동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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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에 읽은 책

책보따리 2008. 12. 31. 21:18

블로그 이웃들이 한해를 갈무리하는 모습 가운데 작년에 제일 부러웠던 게 읽은 책들을 나열하는 것이었다.
열심히 리뷰를 올리시는 분들의 글을 읽고 뒷북치듯 더러 책을 사 읽기도 했지만 
내 경우  읽다 팽개친 책과 오래 전 사둔 책과 새로 산 책들이 서로 뒤엉켜 도저히 한해의 독서 목록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숙제처럼 보였다.
그러나 올해 가을 본의 아니게 작업실을 정리하면서 책정돈을 할 일이 있었던 덕분에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혔고 순전히 탐서용으로 아무렇게나 사들여  되는 대로 꽂아두기만 했던 책과 출판계 지인들이 준 책들을 따로 꽂아두면서 틈틈이 일과 상관 없는 독서열을 높여보려고 애를 썼다.
다른 분들의 책 리스트를 보면서 과연 나도 올해는 정리가 되려나 책꽂이를 살펴보니, 여전히 다 못 읽은 책과 손도 안 댄 책들이 나를 째려보고 있긴 해도 올해 새로 읽은 책들은 기특하게도 대부분 한군데 몰려 있었다.
개인적으로 느끼는 결과는 꽤나 흡족하다. 책 사는 건 좋아해도 읽는 건 등한시 하는 게으름뱅이로서 작년에 반성하며 내가 세운 목표는 평균 <1달에 책 1권 읽기>였는데, 목표를 초과달성했기 때문이다. ^^
빌려준 책도 몇 권 있을 것을 감안하면 더 될 지도 모른다!
책이 열두권 안되면 일 때문에 읽은 참고서도 포함시킬까 고민했을 텐데, 안 그래도 돼서 어찌나 기쁜지. 
내년엔 책으로 밥 벌어먹는 사람으로 부끄럽지 않도록, 좀 더 많이 읽었다고 자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나 하나 책 몇 권 더 읽는다고 과연 해마다 사상 최악 불황의 늪에 빠져들어 허우적거리고 있는 출판계가 반짝 되살아날 리 없겠지만, 좋은 책 만드는 사람들은 이 위기를 잘 버텨내길 빌어본다.


자전거 여행. 김훈 지음. 생각의 나무 - 느루 장만 후 호기롭게 사들였는데, 자전거 얘긴 거의없는 국토순례
오기사, 여행을 스케치하다. 오영욱 지음. 예담. - 역마살 도질까봐 여행기 잘 안읽는데 글이 짦아 좋더라 
여행할 권리. 김연수 지음. 창비 - 재미있게 본 것 같긴 한데 이상 얘기 빼고 기억 잘 안남.  
불안.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이레 - 작년부터 질기게 오래 읽었다. 보통은 당분간 사절.
마놀로 블라닉 신고 산책하기. 백영옥 지음. 위즈덤하우스. - 상 탄 작가래서 읽어보고 화났음.
젠더의 채널을 돌려라. 퀴어이론문화연구모임 WIG 지음. 사람생각 - 루인님이 공동 집필한 책 !
디아스포라 기행.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돌베개 - 올해 꽤 여러번 읽고 반성하고 생각했다.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 권기봉 지음. 알마 - 기자가 쓴 가벼운 근현대사 산책
서울은 깊다. 전우용 지음. 돌베개. - 상대적으로 위 책보다 훨씬 깊고 알차고 재미 있다
유혹하는 글쓰기. 스티븐 킹 지음. 김진준 옮김. 김영사 - 이런 거 읽어도 글쓰기는 늘 어렵더라
뉴요커. 박상미 지음. 마음산책. - 뉴욕에 대한 괜한 그리움을 현실로 잠재워주는 책
취향. 박상미 지음. 마음산책 -  내 취향엔 너무 고급인 듯. 어려워서 심술났다.
젊은 천사. 김원우 지음. 세계사 - 느리게 읽어야 하는 책. 가끔 이런 글 읽어줄 필요가 있다.
혜초. 김탁환 지음. 민음사 - 굴러다니던 책인데 일하기 싫은 어느 날 읽고 불교역사 공부가 땡겼다.
아름다운 밤하늘. 쳇 레이모 지음. 김혜원 옮김. 사이언스북스 - 여행지의 빽빽한 별이 그립다
시간이 멈춰선 파리의 고서점. 제레미 머서 지음. 조동섭 옮김. 시공사 - 못간 유럽여행 대신;;
소박한 정원. 오경아 지음. 디자인하우스 - 마당 염원 때문에 읽으며 행복했다
오늘도 집밥. 서나형 지음. 브레인스토어 - 해리님 꼭 2쇄, 3쇄 성공하시길 ^^
커피홀릭's 노트. munge 지음. 예담 - 커피 아마추어에겐 심심풀이로 딱이두만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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