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구경

책보따리 2008. 5. 27. 16:13
언뜻 떠오른 글의 제목으로 <난산>이라고 적으려다가 말았다. 가끔 자기 책을 자식으로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책 한권 나오는 과정에 어찌 감히 생명의 신비와 어미와 자식 간의 오묘한 공감대까지 끌어다 붙일 수 있겠나 싶어서.
어쨌거나 <난산>이라는 말이 떠올랐다는 얘기는 요즘 내가 옮긴 책구경 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 원래 출판이라는 것이 시의적절한 것 같아 기획했다가도 교묘한 <타이밍>을 놓치면 아예 통째로 엎어지기도 하고, 시리즈로 기획했다가 초반에 생각만큼 판매가 되지 않으면 뒤에 만들려던 책들은 다 준비해 놓고도 마냥 썩히기 일쑤이며, 저자나 번역자가 속을 썩이며 원고를 넘기지 않아 질질 출간이 지연되는 예도 허다하다. 물론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출간이 미뤄지거나 영업전략상 출판 순서가 뒤바뀌는 때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번역자 입장에서 제 아무리 성실하고 부지런히, 꾸준하게 번역을 해도 어떤 해엔 책이 가뭄에 콩나듯 두어 권 나오다 말더니 그 다음해엔 한꺼번에 여기저기 출판사에서 마구 쏟아져 나와 한달에 한꺼번에 세권이나 신간코너에 내 이름이 박힌 책이 깔릴 때도 있었다.

작년엔 개정판으로 다시 나온 2권 말고 새로 작업한 번역서는 겨우 2권이 출간되었는데, 개인적으로 사정이 있어 하반기엔 일을 거의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가 이번에 세금정산 때문에 작업 스케줄을 확인하니 놀랍게도 2007년 1년 동안 번역을 완성해 넘긴 원고가 5권이나 되었다. 개인적으로 생계유지를 위한 1년 번역 목표량을 6권으로 잡고 있기 때문에 5권이면 얼추 목표를 달성했다는 뜻이다.
작년에 출간된 2권 가운데 하나는 그나마도 재작년에 작업한 책이었으니, 작년에 일해서 제대로 빛을 본 책은 달랑 1권. 4권의 책은 세상구경을 할 날이 2008년으로 넘어갔다는 얘기인데, 연초부터<곧> 출간할 계획이라던 두어 권의 책들은 차일피일 편집이 미뤄져 얼마 전 들으니 6월에나 나온다는 것 같다(그 마저도 확실하지 않다. 실제로 나와야 나오는 거지 뭐. -_-;;)

결론은 5월이 다 가도록 2008년도엔 버젓이 옮긴이로 내 이름을 달고 출간된 책이 한 권도 없었다는 점.

기획이 아예 엎어져 원고가 사장되는 경우(심하면 원고료를 홀라당 떼먹히기도 한다 ㅠ.ㅠ)도 겪어 보았기에, 일단 원고를 넘기고 번역료까지 챙겨받고 나면 책이 나오든 말든 내 소관이 아니라 여기며 모른체 하고 싶지만 사람 마음이 또 그렇지가 않다. 편집자의 교정과 표지 디자이너의 정성스런 손길을 거쳐 떡하니 책으로 인쇄되어 세상에 선을 보여야 그간의 모든 노고와 정성이 제대로 보답을 받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들이는 품과 에너지와 정성을 감안할 때, 대한민국 출판계의 번역료 수준은 그리 후한 게 아니므로 나처럼 부끄러운 공명심으로 그 모자란 성취감을 채우려는 인간은 해마다 내 이름을 달고 차곡차곡 늘어나는 번역서의 권수가 꽤나 중요하다. 번역하는 사람들이 더러 모이는 자리가 생기면 우리나라도 얼른 일본처럼 출판계가 발전하여 매절 번역료가 원고지 장당 최소 만원은 돼야 한다고 별 희망도 없는 이야기로 핏대를 세우기도 하는데, 정말로 그런 날이 오지 않는 한 생계를 위해서라도 <질보다 양>으로 승부하려는 나 같은 치졸한 번역가의 욕심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을 것 같다. ㅎㅎ

어쨌거나 새해 들어서도 내내 작업은 늘어지기만 하여, 책구경 하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로 원고 넘기기도 죽도록 힘들어 허덕이고만 있었는데 기쁜 소식이 날아들었다. 무려 4년전에 한두 꼭지 번역에 참여했던 문학선집이 드디어 출간된다는 것. 교수님 소개로 얼떨결에 맡는 바람에 당연히 주최측도 아니었고, 그간 통 소식이 없어서 완전히 까맣게 잊고 있었기 때문에 책이 출간된다는 것만으로도 기쁜데, 얼마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번역료와 해설료도 지급되는 모양이었다. 당연한 것인데도 어찌나 고마운지 내심 몹시 뿌듯해 하며 이제나 저제나 책구경 하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었더니 오늘 증정본이 배달되었다. ^^;;

신비주의 블로그를 표방하는 터라 이곳에 본격적으로 책자랑을 할 날은 요원하리라 생각하지만, 이 책은 공역이니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리도 없고 ^^ 문학선집이라 작가들도 십여 명이어서 옮긴이들 이름은 아예 표지에서 구경도 할 수가 없으니 막 자랑하고 싶어졌다. 일반 서점에서도 판매가 될 책인지 어쩐지도 잘은 모르겠으나 도서관에나 보급될 확률이 높은 듯하고, 엮은이의 이름도 하도 거창하여 공동 번역자 이름으로 검색될 가능성도 별로 없을 듯하니 더더욱 금상첨화다. ㅋㅋ

Posted by 입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