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종목

책보따리 2008. 2. 16. 01:56
어느 분야든 전문성을 갖춘 이들만이 각광을 받는 세상이다 보니
'번역가'라는 이름에도 언제부터인가 '전문'이라는 말이 붙었다.
'전문번역가'라는 말은 그러니까 가끔 전천후 아르바이트나 부업으로 번역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번역을 본업으로 삼는 사람이라는 뜻일 게다.
아 참, 번역을 전문으로 하여 생계를 잇는 사람들 중엔 번역가 말고 '번역사'도 있다. ^^
번역사는 출판계 번역이 아니라 주로 계약서와 매뉴얼 등 서류 번역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을 칭한다는 것이
그쪽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친구의 설명인데, 내가 보기엔 의사, 검사, 판사, 세무사 따위와 같은 계급으로
상승하기 위해 (또는 동등한 권위를 지닌 직업으로 인정받기 위해) '사'라는 접미어를 붙인 직업명이거나
혹시라도 번역가와 번역사 집단 어느 한 쪽에서 서로 동등하게 취급받기를 꺼려 차별화한 이름인 것 같아서
좀 우습다. (친구야 미안^^)  

아무튼 누가 제일 먼저 '전문번역가'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내 직업을 지칭하는 이 말이 참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전문'을 떼어버리고 그냥 '번역가'만으로도 얼마든지 '외서를 우리말로 옮기는 것을 생업으로 삼은 이'라는
뜻이 충분이 전달되지 않는가 말이다.
사실 내가 보기엔 '번역가'라는 말보다는 '옮긴이'가 훨씬 더 정겨운데, 옮긴이라는 말은 책에 맨 뒤에 인쇄되는 책만든 사람들의 목록과 책소개 글에나 사용될 뿐 직업명으로 불리기엔 분명 어감상 모자람이 있다.
그렇다고 빈대나 벼룩, 이를 연상시키는 '옮기는 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

물론 훌륭한 번역가들 가운데는 확실히 자신만의 확고한 전문영역을 갖추고 그 분야에만 매진하는 분들이
있으니, 그분들께는 '전문 번역가'라는 말이 퍽 잘 어울리기도 한다.
환경 관련 서적만 번역한다든지, 과학 서적을 전문으로 옮기기 때문에 출판인들도 독자들도
그 사람의 번역이라면 선뜻 믿게 되는 객관적인 신뢰를 쌓은 분들이다.
'환경 전문 번역가'라든지 '과학 전문 번역가', '추리소설 전문 번역가'로 번듯하게 소개될 수 있는
(책 한 권 달랑 번역한 사람에게도 아무렇게나 뭉뚱그려 너그럽게 붙여주는 '전문번역가'--사이에 띄어쓰기 없음--와는 다르다) 그야말로 '주종목'이 확실한 번역가들이라고 하겠다.

가끔 내게도 주종목을 묻는 출판인들이 있다.
'어떤 분야를 전문적으로 번역하느냐, 또는 어떤 분야의 일을 가장 흥미로워하느냐'는 것이 그들의 질문이다.
다행히도 이미 출간된 책들의 성향을 알고 있거나 이미 여러 번 작업을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과
주로 일을 하기 때문에, "저는 주종목이랄 게 없답니다"라는 민망한 대답을 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물론 초창기엔 주종목이고 자시고 따질 것 없이 의뢰받는 일은 무조건 하겠다고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고(처음부터 소신있게 전문 분야를 개척하시는 분들도 당연히 계시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그렇다는 자기변명이다), 번역으로 꽤 자리를 잡은 사람이라 해도 일이 뜸할 땐 원숭이 줄타기 법칙의 본능에 따라 가끔은 하기 싫은 일(내 경우, 책마다 그 나물에 그 밥 타령인 자기계발서 류와 경제, 경영, 처세서!)도 질끈 눈감고 해내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느 정도 책을 고를 수 있게 된 입장이 된 뒤에도
나는 '주종목'이라고 내세울 수 있는 한 분야(또는 몇몇 분야)를 구축하고 그에 관련된 책만을 주야장천 번역하며 흥미로워할 자신도, 인내심도 없는 '얄팍한' 인간임을 깨달았다.
위에 언급한, 내가 싫어하는 분야의 책이 아닌 한 모든 책은 읽고 옮기기에 흥미로웠던 반면, 비슷한 책을 연이어 옮기다 보면 아무리 재미있는 책도 지루해져 소신과 영혼이 있는 번역가의 작업이 아니라 번역기계가 되어 무의식적으로 자판을 치고 있거나, 막무가내로 일하기가 죽도록 싫어지는 단계에 이른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묘사가 뛰어난 소설을 번역할 때 문장을 매만지는 과정에서 쾌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지만
원서 5백, 6백 페이지가 넘어 우리말로는 1, 2권으로 출간되어야 할 장편소설에 심혈을 기울이고 나서
곧이어 또 그 같은 소설을 작업하려면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럴 땐 좀 더 건조하고 진이 덜 빠지는 교양과학서라든지 인문서 같은 비소설로 눈길을 돌려
그간 한쪽으로만 지친 뇌를 환기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개인적인 무지 탓에 기본 자료조사와 두어줄 건너 한 번씩 정보 검색에 진땀을 흘려야하는
인문서나 과학서도 많지만 일도 하면서 뭔가를 끊임없이 배우는 그 묘미는 확실히 문학작품의 문체와 씨름할 때와 다르다. ^^
그렇기 때문에 내 경우 일을 계약할 땐 일부러 소설과 비소설, 무거운 책과 '말랑'한 책을 적절하게 시기적으로
배분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어느 책이든 번역은 모두 '골빠지는 작업'임엔 틀림없지만 그래도 소모되는 에너지가 조금씩 다른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독자로서, 그리고 동시에 옮긴이로서 섭렵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 번역가가 갖는 특권인 것 같다.

형편이 이러니 혹자들이 바라는 대로 주종목을 키워 명실상부한 '전문' 번역가가 되는 것은
내게 매우 요원한 일이다.
그래서 내게 주종목을 묻는 출판인들에게 나는 얼굴에 한자락 철판을 처억~ 깔고 이렇게 변명한다.
"제가 워낙 싫증을 잘 내서 한 분야만 줄곧 작업하는 건 괴로워하거든요.
게다가 요즘 출판사도 모두 '종합출판'을 목표로 하고 있으니 저도 '종합 번역인'으로 살려구요." -_-;;

사실 회사원 시절 계약서와 매뉴얼, 온갖 서류 번역이 멀미 나게 싫어 '진짜' 번역을 해보겠다고
야무지게 나섰던 초창기엔 번역가로서의 내 주종목이 어린시절 일어판 중역으로 읽었던 수많은 고전작품과
셰익스피어 희곡 같은 이른바 '정전'이 될 것이라 거침없이 믿었음을 이참에 고백하고 넘어가야겠다. ㅋㅋ
하지만 어설프게나마 대학원에서 영문학계의 판세를 들여다보니
대형 출판사에서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번역으로 야심차게 기획 출간하는 고전들의 번역을
대개 진짜 전문가인 '교수들'에게 맡기는 건 너무도 당연하다(물론 해당 교수들이 정말로 손수 번역을 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섣불리 고전작품이나 영문학 교과서들을 번역했다가 고매하신 박사님들이 구구절절 오역이니 아니니 따지고 나서면 어쩌란 말인가!! *_*
하물며 영문학 교수가 번역한 문학작품도 오역 연구 논문이 발표되는 마당인데?

욕심을 부려 내 평생 영문학 정전 가운데 몇 권쯤을 번역하고 오역의 지탄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지금 같아선 당장 내게 셰익스피어나 제인 오스틴, 찰스 디킨스 같은 작품 번역의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선뜻 나서기가 꺼려질 것 같다.
아니, 실제로도 꽤 야심찬 기획으로 영문학 전공 번역가를 대거 찾는다는 모 출판사의  의견타진을 받고
심히 고민중이다. 밀려 있는 일도 일이려니와, 일년 내내 그렇게 피말리는 일만 하고 사는 건 나 같은 얄팍한 인간에게 보나마나 무리임을 왜 모르랴.
역시 난 별다른 주종목 없이 그저 잡다하고 어수선한 번역서 약력 가운데
보석처럼 소중하고 뜻깊은 몇 권의 책이라도 간간히 박혀 있으면 흡족할 작은 그릇인 모양이다.



어쨌거나 이번에 나올 책에도 출신학교와 옮긴 책 목록 밖에 없는 알량한 약력엔
부디 민망한 '전문번역가'라는 말 대신 '이러이러한 책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을 하고 있다'는
구절이 들어가면 참 좋겠으나, 출판사의 성격상 내 바람은 무시될 확률이 대략 8할 이상이다.
차라리 '전문' 대신 '종합'이라는 말을 넣어달라고 하면 미친 사람 취급하겠지?
으음..
주종목도 없는 주제에 쉰소리는 관두고 나는 그냥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것이 좋을 듯하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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